착한 사람에게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
알라딘 서재에 글을 쓸 때에도 자기 검열은 작동한다. 이것저것 눈치를 봐야 한다. 서재에 글을 올리는 행위가 돈을 받고 매문을 하는 것도 아닌 데도 여러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소로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라딘 서재는 이해 득실'을 따질 필요가 없기에 가감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다짐했다. 내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1%도 없다. 다만 내 생각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거북하다면 < 판단 > 이 아니라 개인의 < 취향 > 으로 이해해 달라. 나는 이오덕'을 존경하지만 이오덕-주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글 사용에 있어서는 이오덕보다는 고종석-주의자'에 가까웠다. 언어는 오염되면서 살아남는다. ~의, ~적, ~성, ~것 따위를 문장에 사용한다고 해서 그 문장이 바르지 않은 문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근본적 순혈주의가 나는 불편하다. 이왕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이 자리를 빌려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김연수 소설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김연수의 말랑말랑하며 촉촉한 감성'을 좋아했지만 내게 보기에는 너무 푹 익었다. 굳어버린 기름덩어리를 씹는 맛이다. 무리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다. 야채를 버터에 볶는 레시피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버터를 버터에 볶을 때에는 등짝을 한 대 쳐주고 싶었다. 느끼하다. 그리고 신경숙은 포데기 신파의 여왕이었고, 강신주는 인문성형-주의자 같았다. "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어려우셨다고요 ?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요. 매월 29,900원에 무이자 5개월이 보장됩니다. 제품 구매 시 세계 문학전집 10% 할인권도 드립니다. 고객님 많이 놀라셨죠 ? 저도 마아아니 놀랐습니다. 48가지 골라먹는 재미가 베스킨라빈스 31보다 다양합니다. 지금 당장 주문하세요. 망설이시면 앙돼용 ~ "
자본주의가 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적 절차에 의해 가장 자본주의적 성공을 한 사람에 속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여기까지는 자기검열 없이 마음껏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쓸 때마다 망설이는 주제는 " 노무현 " 이었다. 나는 변호사 노무현을 좋아했지만 대통령 노무현을 아주 싫어했다. 그는 헌신적인 변호사였고, 솔직한 정치인이었으며 소탈한 대통령이었지만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쁜 대통령에 속했다. 물론 이명박과 박근혜는 노무현에 비해 아주아주아주아주 나쁜 대통령에 속하지만 넓은 범주로 확장하자면 노무현 또한 같은 범위'에 포함되었다. 내가 노무현 서거 때 동명항 방파제에서 서럽게 운 까닭은 헌신적인 변호사와 솔직한 정치인에 대한 애도였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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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고백이지만 천 만 관객을 동원한 < 변호인 > 은 그냥 시시껄렁한 영화'였다. 다만 그 사실을 숨기고 영화 < 변호인 > 을 지지했던 이유는 이명박근혜 정권 때문이었다. 적이 선명할 수록 분노는 정당성을 얻게 된다. 같은 이유로 < 또 하나의 약속 > 또한 삼성이라는 괴물을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 지지했다. 영화적 완성도'로 보자면 그닥 높은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의미 있는 영화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치 있는 영화'다. 이 이율배반적 태도가 거슬리기는 했으나 딱히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적은 선명해야 되니깐 말이다. 영화 < 변호인 > 과 < 또 하나의 약속 > 은 모두 정치사회적 문제를 건드리기는 하지만 핵심은 가족-서사'다. 영화 < 변호인 > 에서 국밥집 가족은 아버지가 부재하는데 그 이유는 그 자리에 송강호를 개입시키기 위해서이다.
그가 국밥집 아들을 위해 변호하는(개입하는) 순간 송강호는 유사-아버지'가 되어 또 하나의 가족이 된다. 결국 이 영화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부성애 가족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있다기보다는 낡은 가족 서사'에 기대서 안전하게 분노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상업 영화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다. < 또 하나의 약속 > 도 마찬가지'다. 가족 서사에 기대다 보니 사실이 가지고 있는 " 날것 " 의 생생함보다는 드라마적 요소가 강해서 전달력이 떨어진다. 생생한 고통과 증언을 간직한 딸은 생각보다 일찍 화면에서 빠진 점은 아쉽다. 그것은 마치 달걀을 풀어서 북엇국을 끓였는데 북어 우린 국물 맛보다는 계란탕 맛이 더 강한 경우다. 이 영화들이 보여준 불의에 대한 " 분노 " 는 " 불온 " 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객이 이 영화들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사회적 모순보다는 착한 가족'을 특정 집단이 건드렸다는 것에 대한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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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온순한 분노는 국가가 자본가에게 있어 그렇게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천사는 기쁨과 눈물을 주지만 대상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어떤 대상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악마'에게만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 필요한 존재는 날개 달린 천사가 아니라 꼬리 달린 악마'다. 그래서 < 변호인 > 과 < 또 하나의 가족 > 은 위협적이지 않다. 비록 이들 영화가 관객들에게 눈물과 기쁨을 주겠지만 이 눈물과 분노가 집단을 향하지는 못한다. 당신은 영화관을 나오면서 눈물을 닦고 이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갤럭시로 카톡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은 감기와 같다. 며칠 지나면 분노는 사라진다. IMF가 터지고 나서 " 내 탓이오 " 캠페인이 벌어진 적이 있다. 사람들이 자동차 뒷 유리창에 내 탓이오 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 네 탓 > 하지 말고 < 내 탓 > 하자는 소리'다.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으로 시작된 캠페인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캠페인은 전형적인 노예 근성'을 강요하는 메시지처럼 보였다. 한국 사회는 자기 징벌 사회'다. 자살 현상은 남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화를 돌리는 행위'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가 < 내 탓 > 은 하지 않고 < 네 탓 > 이 만연한 사회라는 것은 새빨간 주장이다. 한국이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무슨 놈의 " 내 탓 " 타령인가 ? 김수환 추기경은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사람들은 세 모녀가 연탄불을 피워 놓고 자살한 사건에 대해 슬퍼하고 애도했다. 그 어떤 사건보다 울림이 컸다. 이 울림이 컸던 이유는 세 모녀가 보여준 < 착함 > 이었다. 그 가족은 죽는 그 순간에도 밀린 방세와 공과금을 지불했다. 사람들은 착한 가족이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슬퍼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과정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만약에 그 가족이 70만 원이 든 돈봉투를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큰 울림을 주었을까 ?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착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만 분노한다. 영화 < 변호인 > 에서 속물인 송강호가 국밥집 아들 변호를 맡으면서 한 말은 " 그 사람들 착한 사람이잖아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 " 였다. 그리고 < 또 하나의 약속 > 도 같은 뉘앙스'였다. 그렇다면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 그 사람들이 그닥 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 지금처럼 이렇게 뜨겁게 울 수 있을까 ? < 변호인 > 에서 송강호가 " 착한 사람에게 이러면 안되잖아요 ? "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 착한 사람 " 이라는 말 대신 단순하게 그냥 " 사람 " 이라고 말해야 한다.
다시 수정하면 " 국가 기관이나 거대 기업이 힘으로 사람들에게 이러면 안되잖아요. " 라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세 모녀 사건을 다룬 기사 덧글에 넘쳐나는 " 착한 사람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 는 말은 기괴하게 들린다. 돈봉투가 없었다면 그토록 슬프지는 않았다는 말인가 ?! 바로 그점이 한국인의 인권 수준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리퀘스트 방송을 볼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방송은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을 다룰 때 < 착함 > 을 강조한다. 속이 얼마나 깊은 아이인가를 강조한다. 결국 착한 장애인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야만적이다. 왜냐하면 착한 장애인은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고 나쁜 장애인은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내포하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 두근두근 내 인생 > 도 바로 이러한 착한 장애인 메시지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차원에서 한심한 소설이다.
그것은 김애란이 그만큼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언론이 착한 사람의 안타까운(억울한)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약자의 비참에 대해서 슬퍼해야지 착한 사람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촛점을 맞춰 슬퍼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착한 사람이든, 까칠한 사람이든, 이혼녀이든, 재벌집 딸이든 그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사람은 약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