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우수합니까 ?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 한국어의 우수성 > 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한글로 글을 쓰는 이유는 아는 것이 < 한글 > 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 머리에 번개'를 맞아 느닷없이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나는 영어 작문을 한글 작문'보다 잘 쓸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한글로 글을 쓸 뿐이다. 농담으로 말하자면 한국어 문법은 ” 누가 보지 않으면 트럭에 실어서 내다 버리고 싶을 ” 만큼 까다롭다. 한국어 문법은 예외 조항이 많은, 문법적으로 불완전한, 언어 체계’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피어싱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 이러한 패륜적 발언‘은 내가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고 해도 똑같은 소리를 지껄일 것이 분명하다. “ 영어란 누가 보지 않으면 트럭에 실어 내다 버릴 언어에 가깝소. “
사실 언어‘는 비교 평가’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이런 자화자찬’은 뒤집어보면 문화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허세‘와 연결된다. 한국적인 것은 모두 다 우수한가 ? 한국어는 영어에 비해 결코 우수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영어 또한 한글에 비해 우수하지 않다. 아프리카 소국의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문자 사회가 무문자(無文字) 사회'보다 언어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착각에 불과하다. " 무문자 사회 주민들은 식물들의 속성을 매우 세밀하게 구별할 줄 안다. 평균 그들은 500내지 1000종을 분간해 그 이름을 알고 지낸다. 그에 비해 산업화된 도시 사람들은 보통 50 내지 100 정도밖에 알지 못할 것이다/ 작은 인간, 마빈 해리스 "
국가경쟁력으로 언어의 우수성을 입증하려는 행위는 뻔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모두 평범하다. 동시에 가장 위대하다. 한글'이 다른 文字에 비해 우수하다고 해서 한국어가 반드시 다른 言語'에 비해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어의 우수성을 말할 때 흔히 인용하는 " 색의 다양성 표현 " ( 예를 들면 노랗다, 누렇다, 샛노랗다, 노리끼리하다....... ) 은 한국 사회'가 오랜 기간 동안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발달한 감각일 뿐이다. 재배 작물의 잎 색깔'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필리핀의 아그타족은 < 고기를 잡는다 > 를 뜻하는 동사가 31개나 된다. 즉, 언어의 특정 분야가 세분화되는 이유는 문화적 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언어는 환경이 지배한다. 마빈 해리스는 < 작은 인간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체의 각 부분에 대한 명칭도 문화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벌거벗고 다니는 열대에서는 손과 팔을 한 단어로, 또한 발과 다리를 한 단어로 묶어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추운 기후 속에 살면서 특수한 옷들 ( 장갑, 장화, 버선, 바지 등 ) 을 몸의 각 부분에걸쳐야 하는 사람들은 < 손 > 과 < 팔 > , < 발 > 과 < 다리 > 같은 것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러한 차이들을 근거로 해서 언어의 진화 수준을 가늠할 수는 없다.
- < 작은 인간 > , 마빈 해리스
이처럼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집단적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 마빈 해리스 할아버지의 지적처럼 어떤 차이를 근거로 비교 평가해서 언어의 진화 수준을 논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 필리핀 아그타족 사람들이 < 고기를 잡는다 > 라는 뜻을 가진 31개 동사들'을 이유로 한국어는 표현력이 떨어지는 빈약한 언어'라고 반박을 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대꾸 하겠는가 ?
모국어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태도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국어를 타 언어와 비교하며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천박한 태도다. 한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며 과학적인 언어가 아니다.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저 평범할 뿐이다. 언어에 서열이 어디 있는가. 언어도 GDP로 서열을 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정말 꼴값이 아닐 수 없다. " 한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 " 이 아니다. " 한국적인 것은 한국적인 것 " 일 뿐이다. 싸이의 < 강남 스타일 > 은 한국적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것이 된 것이 아니다. < 강남스타일 > 열풍을 두고 이 노래 리듬이 국악 가락과 비슷하다는 분석을 내놓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분석 기사'를 쓴 기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주장이었을 것이다. 아마... 늙은 꼰대가 장악한 데스크'였기에 가능한 기사 전송이 아닌가 싶다. 자기 논에 물 대는 논조'다. 이 정도 착각이면 < 아전인수 > 가 아니라 < 아전홍수 > 라 할 만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세계 보편적 정서를 관통했기에 인기를 얻은 것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국적인 것은 그냥 한국적인 것이다. 한국인은 자신이 가진 < 보물 > 을 평가할 때 항상 우월적 타자'를 끌어들인다. 예를 들면 " 마이클 잭슨이 먼저 인정한 비빔밥의 맛 " 이라거나 " 세계가 먼저 인정한 국악의 예술성 " 따위'다. 이처럼 한국적 가치는 반드시 우월적 타자의 인정을 받을 때에 비로소 그 우수성을 입증된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노예 근성'이다. < 종북 > 만큼 심각한 것은 < 종미 > 다.
식스팩 없는 80년대 고개 숙인 한국 남성을 다룬 영화 < 살인의 추억' > 은 우월적 대타자 앞에서 존나 꼬리를 내리며 벌벌 기는 한국인의 굴신을 제대로 보여준다. 영화 속 형사들은 무능하다. 그들은 아무 일도 못한 채 미국으로 보낸 유전자 검사 결과 통지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사이 죄 없는 소녀들이 살해당한다. 그들은 손을 놓고 미국으로부터 온 편지'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도대체 그토록 기다렸던 < 미국으로부터 온 편지 > 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 왜 우리는 손 놓고 미국으로부터 온 메시지’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클라이맥스’인 기차 터널 앞 격투 장면’에서, 우리는 분노에 찬 김상경’이 살인자의 머리에 총을 겨루며 처형’을 거행하려는 순간을 지켜본다.
이때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가 마침내 도착한다. 처형은 잠시 미루어진다. 물론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메시지’는 <혐의 없음, 사건 종결하그라, 알긋냐 ! 촌놈들...... > 이다.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다. 미국의 메시지는 곧 법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충격적 결과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들 믿으랴. 제우스의 아들들은 우월적 대타자인 아버지가 내린 선고 앞에서 당황한다. 거역할 것이냐, 순종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때 갑자기 어두운 터널에서 기차가 튀어나오면서 무능한 두 남자와 한 명의 용의자’를 양쪽으로 가른다. 기차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불만이 가득한 두 아들에게 내리는 두 번째 메시지’다. 우월적 대타자는 기차의 형상’으로 변하여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첫 번째 메시지가 사건 기각’이라면, 두 번째 메시지는 첫 번째 메시지’를 어길 경우에 따른 무시무시한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바로 어둠 속 터널 안’으로 도망가는 용의자’를 향해 형식적으로 터널 속 허공을 향해 쏘는 세 방의 총 소리’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사는 상징적 처형’을 감행한다.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억울하고, 더럽고,치사하고, 분통이 터지고, 미치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죽은 희생자’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허공을 향한 총 소리’가 죽은 자의 넋을 달래기 위한 조총 소리’처럼 들린다.그것은 김상경이 죽은 자에 위해 마련한 위령제’다.
영화 < 살인의 추억 > 은 미국이라는 우월적 존재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 없는 한국 남성들에 대한 자화상으로 읽힌다. 미국의 허락이 떨어져야지만 범인을 처형할 수 있는, 이 웃지 못할 상황극은 지금의 한국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국군은 존재하지만 미사일 버튼을 누를 권한은 없다. 누르기 위해서는 먼저 펜타곤으로 긴급 전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 핼로우 ! 존슨 ?! 아빠 ! 나야... 평양 밤 하늘에 미사일 몇 방 쏘면 안 될까 ? 불꽃놀이 하면 안 될까 ? 안 돼 ?! 왜 ? 아잉, 아빠아아아! 한 번만, 한 번만....... " 종북이 문제라면 종미도 문제다. 이 정도면 제국에 대한 소국의 굴신'이 아닐까 ?
모국어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