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하고도 며칠을 더 끼워넣어보면 그러니까 지난달 22일에 아주 큰일을 치를뻔하였었다.
그야말로 착찹한 심정으로 암흑같은 며칠을 보냈더랬다.
실은.....
친정아버지가 협심증으로 쓰러지셔서 앰블런스를 타고 큰병원으로 급히 옮겨져 큰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날저녁에 아버지는 쇼크를 두 번이나 와서 전기충격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셨다.
병의 심각성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딸인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친정엄마는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딸의 건강이 염려되어 나에게 이소식을 알려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서 무척 고민하셨고..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몸조리를 잘하는 것이 낫겠다라는 생각을 하셨나보다.
위기를 넘기시고 며칠이 지난후에 상황이 이러했었다, 저러했었다 하시면서 한 시간을 넘게 통화를 하였었다. 물론 수술 받으신 다음날 중환자실에 친정아버지를 면회하러 가긴 하였었다. 그때도 두동생들과 엄마는 그저 고비를 넘겼다라는 말만 하고 내가 충격을 받을까봐 말을 꺼리셨다. 엄마는 내가 생각보다 독하고 강하다는 것을 잘 모르시나보다.
식구들이 나에게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어도 대충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라는 느낌을 받았고, 당장 병원에 달려가고픈데 그날따라 시아버님도 편찮으셔서 시어머님을 우리집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당장에 쌍둥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던지라 혼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울면서 아기들에게 젖을 물렸다. 신랑이 퇴근해온후에 병원으로 달려가려니 병원에 도착하면 이미 중환자실 면회시간을 끝날 시각이었다. 그날저녁에는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불었던지라 엄마는 날더러 오지 말고 다음날 일요일에 오라고 하셨다. 집을 나설적에는 반드시 내복을 껴입고 오라신다.
다음날 나는 엄마말대로 내복을 껴입고 옷을 단단히 입고 집을 나섰다. 혹시나 산후풍이 오게 되면 엄마,아빠가 평생 나에게 미안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날은 다행히 바람이 불긴 했으나 햇빛이 밝았다. 그리고 아빠는 고비를 넘기시고 혈색이 많이 좋아지신 날이었다. 그래도 뒤늦게 찾아온 것이 죄송스럽기도 했거니와 갑자기 늙어버리신 아빠의 얼굴을 뵈니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환자의 안정이 최우선인지라 엄마는 나를 살짝 팔로 건드리며 눈을 깜빡 거리신다. 사촌언니도 팔을 건드린다. 아빠를 위해서 울지 말라고....
내가 친정아버지께 더욱더 죄송스러웠던 이유는 협심증이 온 그전날 엄마를 우리집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이 산후조리를 몇 주간 해주시느라 어머님댁에 밀린 집안일을 잠시 보시러 가신다기에 혼자서 쌍둥이들을 돌볼 엄두를 못냈던지라 친정엄마한테 일 주일간 우리집에 와달라고 부탁드렸었다. 엄마는 한가한 날을 잡아 우리집에 온날이 바로 아버지가 쓰러지기 하루전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다음날 친정아버지는 일을 마치시고 아침에 퇴근하신후 이틀전에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불었던 탓에 예전에 살던집 지붕이 허물어져 그것을 손보시다가 통증을 느끼셨다. 그래서 지붕에서 내려와 거실로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아무도 없었던지라 아버지 혼자서 근처병원의 앰블런스를 부르셨다고 한다.
만약 내가 엄마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이런일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가게 되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날이후, 처음으로 아버지가 만약 계시지 않는다면? 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은 아니지만...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이란 생각을 하게 되니 그저 눈물만 흐를뿐이었다. 병원을 크게 벗어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에 친정엄마와 두남동생들은 병원근처의 여관을 하나 잡아서 그곳에서 묵으면서 엄마와 동생들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다면? 이란 생각으로 첫날은 눈물로 밤을 보냈다고 한다. 식구들이 그야말로 친정아버지의 존재여부에 사활을 건셈이다.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셨고, 이번주 목요일에 퇴원을 하신다고 하신다. 협심증이란 것이 병을 완전히 고쳤다고 장담할 병이 아니라 퇴원하고서도 항상 조심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다니시던 아파트 경비일도 그만두실 것이다.
그래도 친정아버지가 내곁에 살아계시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고 기쁘긴하나 항상 노심초사해야만 할 일이 착찹해진다. 협심증의 증세로 아버지의 경우엔 아주 위독했던 상황이어서 의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나신 셈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더 걱정스럽다.
내부모가 위급하니 내자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쌍둥이들의 배내짓의 표정을 보면서 웃곤 하지만 그상황에서는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그상황을 많이 원망했었다. 아가들을 보면서 많이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욕심이 많은지라 내새끼들뿐만 아니라 내부모도 곁에 오랫동안 두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모쪼록 친정아버지의 건강이 빨리 회복된 것이 기쁘고, 계속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기회를 계기로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어 무척 기뻤던 순간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