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06. 05. 31)에 문학평론가이자 지방대학 국문학 (여)교수 김용희의 영화평 '선생 날라리들의 빨간 마후라'를 옮겨온다. 지난 3월에 개봉됐었던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대한 것인데, 우연히도 어제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다가 막간에 절반쯤 봤다는 게 옮겨온 이유이다. 영화 자체는 (예상대로) 별로 성에 차지 않지만, 혹 생각해볼 거리들이 있나 리뷰들을 더 찾았다. 김용희 교수의 평에 이어지는 것은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의 리뷰이다.   

 

 

 

 

-사실 영화의 촉발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1998년 중학생들이 유희적 자작극처럼 만든 비디오<빨간 마후라>.(*<스물살>이란 영화 등도 같은 소재를 취해서 만들어진 '허접한' 영화였다.) 

-여중생의 실제 성관계를 찍은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들은 그 이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오, 갓! 놀랍게도 이들은 대학교수가 되어있더란 말이지. 아니ㅡ 그럼, 중학교 때 양아치였던 이들이 개과천선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리가. 한국의 영화관객은 ‘대한늬우스’가 나오던 과거 계몽의 훈계에 이미 넌더리가 난지 오래다. 그러니까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교수의 숨겨진 과거, 은밀한 사생활에 대한 훔쳐보기, 대중의 관음증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런 점에서, 이 영화 자체의 발상 또한 대단히 '부도덕'하다. 과거지사와 현재 사이의 '끄나풀'을 물고 늘어지면서 연좌제식의 윤리를 추궁하고 있기에).

-지방 전문대학의 염색과 교수 조은숙과 만화과 교수 박석규. 이들은 중학교 때 최고의 양아치, 양아치의 ‘깔대기’였던 과거를 자신의 비밀로 묻어두고 있다 우연히 대학에서 교수로 만나게 된다.(*한때 살인자도 개과천선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이다. 하물며 '양아치'가 무슨 '절대악'이라도 되는가?)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갖은 교양과 품위 있는 말투로 자신을 치장하고 숨기며 살던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지는 순간이다(*한번 양아치이면 영원한 양아치인가?).

-조은숙(문소리 분)은 스스로의 품위와 지적 풍모에 취하여 높은 비음으로 자작시를 낭송한다. 함께 회식을 하던 남자교수들은 거의 실신할 듯이 감탄을 하며 여교수를 바라본다. 여교수는 광택나고 몸에 붙는 브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있다. 남성들의 숱한 관능적 시선을 스스로 즐기면서 자기도취적으로 몸을 꼬며 걸어간다. 여교수는 자신의 관능미를 마음껏 펼치며 지적 내숭으로 남성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완벽한 코메디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의 내숭과 위선을 포복절도하며 비웃어보라 한다.(*이 영화는 쓴웃음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포복절도까지는 아니다.) 

-아무렴, 세상에 이런 여교수는 없다. 실제 대학현장에서 대개 여교수는 중성적이어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야 한다(여성은 중성화내지 남성화됨으로써 비로소 남성중심 사회에 끼어들 수 있으므로). 여성 학자는 중성적일 때 좀더 지적인 풍모와 안정감을 보장받는다. 사실 여성 학자에게서 아름다움 특히 관능적 미모란 그들의 지성의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잣대일 뿐이다. (“어떻게 저렇게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고 공부란 것을 할 수 있겠어? 말도 안돼!”)

-그렇다. 여교수는 쇼트커트나 단발머리에 거의 원불교 전도사나 수도승처럼 검정, 회색, 곤색 슈트를 번갈아 입고 검정색 단화를 신어야 한다. 만약 영화에 나오는 여교수와 같은 여성 학자가 있다면 그들은 남성 교수에게서 ‘애인’의 그룹에 속하게 되지 ‘동료’의 반열에 놓이지 않는다.(*이 무슨 오버스런 반응인가? 영화는 여교수와 기자간의 기예적 섹스신을 보여주는 서두부터 '리얼리즘'과 무관하다는 걸 이미 전제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 교수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용감하게 맞장 뜨고 서로 통쾌하게 웃어버릴 담대한 호기조차도 없다.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숨긴 채 내숭을 떨고 체면을 차리면서 “적어도 공인이니까” 자위하면서. 제도권 하에서, 당위적 삶의 표본 아래서, 점잖은 목소리와 성숙한 교양으로 욕망을 저당 잡힌 채. 서로를 “선생님,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지성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우리는 어떤 비밀과 공모를 안전하게 숨기고 있는 것인가.(*이 또한 평자의 '유머'인 듯하지만, 별로 웃기지 않다. 지방대학 유머인가?) 

-하여 영화에서 대학 교수는 말한다. “교수생활? 편하거든, 아무렴...... 교수야 입으로 먹고 사는 거지. 그래도, 겁도 나지, 얘들한테 구라쳐서..... 그렇다고, 함부로 못하지. 얘들이 보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빨간 마후라’의 날라리 같은 끼를 반납한 채 어느 정도 내숭을 떨면서 시대의 지성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에 가서 한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아오고 양아치였던 과거를 숨긴 채. 그러니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우리 시대 교수 상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블랙유머가 아니고 무엇인가. 흥미로운 陰畵(음화)가 아니고 무엇인가.(*영화도 그렇지만, 영화평 또한 기대에 못 미친다. 시읽기에 나름대로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준 평자의 영화 읽기는 왜 이리 허술한가? 그리고 제목은 왜 '교수 날라리...'가 아니라 '선생 날라리...'인가?)

(*)건성으로 보던 영화에서 '러시아어' 몇 마디가 들리길래 다시 돌려보기도 했다. '블랙유머'나 '흥미로운 음화'라기보다는 '양아치'적 발상의 영화에 불과하다. 유치하게 '빨간 마후라' 운운하지 말고 '날라리 교수사회'를 정공법으로 풍자하든가 말든가 했어야 했다(애꿎은 '지방 전문대 교수'들이나 도마에 올려놓지 말고). 어느 평자의 '짝퉁 홍상수'란 평조차도 과분해 보인다. 차라리 <스물살> 같은 어설픈 에로영화가 '정직'해 보인다. 더불어, '은밀한 매력' 어쩌구저쩌구 해놓고는 애꿎은 여배우의 전라 연기까지 요구할 건 무언가? 이 영화의 '은밀함'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21(06.04. 05) 황진미, '매혹되기에는 너무 값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이 영화는 첫째, ‘지식인을 조롱하는 영화’가 아니다. 둘째, ‘모호하고 매혹적인 여성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주변부 떨거지인 그들을 지식인이라 하기엔, 아직까지 ‘지식인’이란 말이 아깝고, 그녀에게 매혹되기엔 그녀가 너무 싸구려다. 영화는 그녀를 닮았다. 겉으론 ‘교수’라는 직함에 외모도 그럴싸하지만 천박한 정신에 자아도취가 전부인 그녀처럼, 영화 역시 그럴듯한 제목에 세련된 포스터와 예고편을 내세우지만, 형편없는 주제의식과 자의식 과잉이 전부이다.

-시(詩)를 읊고 살짝 다리를 저는 설정처럼 영화 또한 온갖 형식미학을 어수선히 차용하고, 적당히 언밸런스하고 깨는 듯한 편집을 통해 짐짓 예술영화인 척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첫 장면이 중요하다. 사진 찍는 수녀들의 시선이 머무는 바닷가 여인은 두개의 텍스트를 연상시킨다. 하나는 지방성(地方性)을 화두로 삼는 <무진기행>이요, 다른 하나는 히스테리아를 화두로 삼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두 텍스트에 대한 거명은 평론가의 안목이면서 동시에 고육지책처럼 여겨진다.) 

 

 

 

 

-<무진기행>의 ‘무진’은 실제 지명이 아니다. ‘안개가 특산물인 항구’이자, ‘서울과 대비되는 곳’의 의미로 지어낸 이름이다. ‘심천’ 역시 실제 지명이 아니라,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의 의미로 지어낸 것이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무진에 내려와 처음 만나는 것은 ‘잘 차려 입고 지적(知的)이라는, 미친 여자에 대한 수군거림’이다. 이것이 작가가 잡아낸 ‘지방성’의 첫인상이다. 영화의 첫 장면, 대도시에선 바닷가에 성장(盛裝)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구경거리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녀들의 주시는 지방성의 징표이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지방방송 TV출연을 대단한 일인 양 여기고, 그녀 역시 “TV스타” 운운하며 자아도취에 빠진다. 리포터가 아니라 PD라는 말에 표정이 바뀌고, 상대를 그럴듯하게 보아 동침한다. PD는 “SBS와 SBC가 다를 게 뭐냐?” 대들지만, 곧 “여기 PD가 PD냐?”며 반문한다. 그나마 서울에서 내려가는 박 작가는 “지방 전문대에서… 애들 가르쳐”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PD는 의식은 하되 인정하려들지 않으며, 박 작가는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지방성’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교수’니, ‘선생’이니, ‘작가’니 높여부르지만, 서로를 비웃고 서로의 진성성을 의심한다(“콤플렉스 때문”, “단체엔 연애하러 오나?”, “개나 소나 다 교수”).

-<무진기행>의 그들도 그랬다. “무진에선 누구나 타인은 모두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내가 대학 다닐 때’를 말끝마다 붙이는 음악선생에게 <목포의 눈물>을 청해 들으며, 그녀를 둘러싼 애정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녀 역시 유행가나 듣는 그들을 경멸하면서, 애정관계를 이용해 ‘결혼’이든 ‘서울행’이든 뭔가를 얻고자 한다.

-여기서 ‘지방성’을 거론하는 것은, 지방 사람들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화가 ‘그들’에게 조롱의 시선을 보낼 때, 과연 무엇에 대한 풍자가 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들이 ‘중심부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은 ‘지식인들’의 심장부에 꽂히지 않고, ‘주변부의 지식인인 양 구는 떨거지들’에게 빗맞는 것이다. 풍자는 어설픈 ‘허수아비 논박’이 될 뿐이며, 이로써 중심부 지식인들은 표적을 빠져나간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문학박사이자 비평가인 그녀가 사실은 동거남에게 논문을 얻었고, 동거 사실을 숨긴 채 시집을 가고자 돈을 지불한다는 이야기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폭로가 된다. 그러나 심천대 염색과(대사 “뭐 그런 과도 다 있냐?”) 교수인 미혼녀가 주변의 지인들과 돌아가며 연애를 한다 한들 무슨 풍자가 되는가? <선데이서울> 기사거리도 안 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와 톱스타의 데뷔전 이야기는 스캔들이 되지만, 만화가(대사 “만화 안 보는 사람들은 모르지”)와 지방대 교수의 중학 시절 유명하지도 않은 일화가 무슨 흥밋거리가 되는가? 시에 대한 조롱은 <넘버.3>의 베스트셀러 시집 <스물아홉, 섹스는 끝났다>에서 이미 끝났건만, 아마추어 시인인 그녀를 내세워 무슨 변죽을 울리는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음란서생>이 발칙했던 건 그들이 단순한 양반 나부랭이가 아니라, 중앙의 최고권력층이었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 파문’과 ‘국회의원 성추행’이 실시간인 시대에 지식사회와 중심부 권력에 정조준하지 못하고, 어디다 시시한 총구를 겨누는가?(*내 말이 그 말이다.) 그래도 제일 깨끗해 보이는 환경단체를 조롱한 건 신선하지 않냐고? 이미 수년 전 존경받던 환경단체장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포커스도 맞지 않고, 신랄하지도 않으며, 시대에도 뒤처진 솜방망이 헛손질이 불쌍할 뿐이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시작, 영국 해변가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 그녀에 대한 소문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이며, 미쳤다는 것. 그러나 귀족 청년은 그녀의 지성과 모호함과 특별한 사연에 매혹된다. <여교수…>의 첫 장면, 바닷가의 그녀를 보고 “죽이지 않냐? 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그녀에 대한 수군거림. 교수란다. PD가 그녀에게 매혹되는 지점은 외모와 살짝 장애와 교수라는 직함이다. 훨씬 얄팍하다.

-<프랑스…>에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과거는 아예 ‘창녀, 미친년’이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녀 스스로 꾸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하여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말로 귀족을 매료시키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든다. <여교수…>의 그녀에게 수치스러운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녀는 과거로부터도 현재로부터도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의 그녀는 일찌감치 섹스를 하게 된 여자였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는 아니었다. 외부적으로는 남자친구에 의해 교환 양도되기도 하고, 스스로도 이긴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니가 이겼다며?”) 남성 중심의 성관계를 내면화한다. 그녀의 섹스는 남자들간의 힘의 논리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녀의 의지나 취향에 달려 있지 않으며, 그녀의 프라이버시는 언제이고 남자친구 앞에서 고해져야 하는 것이다(“했냐?”). 그녀는 남자의 전리품이다. 성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상대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지, 그저 문란하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그녀 역시 여왕벌이 아니다. 환경단체 남자들 모두와 시간차를 두고 섹스를 한 듯한 그녀는 그들의 공공연한 치근거림을 받는 상대이다. 그들은 서로 질투하며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여러 명이 그녀와 자고 싶어하니까 그녀에게 지배권이 있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그녀는 그들의 정욕과 경쟁심의 ‘대상’이요, 매개항일 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그들을 지배한다면, 그들은 그녀가 누구와 자든지 감히 상관할 수 없어야 한다(<바람난 가족>에서 황정민의 애인이 딴 남자와 있을 때, 황정민은 사과하고 돌아간다). 그녀 뒤를 캐는 유 선생을 그만두게 하지 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여러 남자와 섹스를 할 뿐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까놓고 말하면 유 선생의 유언처럼 “네가 갖든지, 형이 갖든지, 돌려서 처먹든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녀는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PD라는 직함에 호감을 표하고 섹스를 한 뒤 아이로부터 “엄마 없다”는 대답을 유의미하게 듣는다. 유부남과 관계를 가지면서 부인의 존재 유무에 여전히 신경쓰는 것이다. 그러다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피한다. 유 선생이 PD에 대해 묻자 “결혼할 사람”이라 대답하고, 유 선생이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자 쩔쩔맨다. <프랑스...>의 그녀가 결혼제도의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킴으로써 자유로웠던 것에 반해 <여교수…>의 그녀는 결혼제도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그녀가 수치스러운 과거를 만들어 모호한 매력으로 삼았듯이 <여교수…>의 그녀는 장애를 만들어내어 매력으로 삼는다(“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남다은도 지적하듯(<씨네21> 545호 ‘욕망을 배신하라, 스타일을 배신하라’) 그녀가 다리를 저는 증상은 히스테리아이다. 그 증거로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을 고집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히스테리아는 ‘증상에 대한 무관심’이 특징이다. (또 감독은 인터뷰에서 “약간의 장애가 있는 여자는 남자들이 보호해주고 싶어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가습기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환후(幻嗅) 역시 히스테리아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환후는 적개심의 표현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히스테리오닉 성격장애(hysterionic personality disorder)임을 알 수 있는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주목받기를 원하며, 여학생에겐 심하게 질투를 느낀다. 또한 언제나 ‘개인극장’ 안에서 배우인 양 연극적으로 말하며, 이따금 팜므파탈처럼 차갑게 지시하고, 심한 욕설을 내뱉는 것도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런데 그녀가 히스테리아적 주체라고 말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남성중심 사회에서 언어화되지 않은 욕망이 신체언어로 발화한다고 말할 때, 즉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고 할 때, 그 언어는 누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프랑스...>에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여성의 신경증에 관한 의학 논문과 판례 등이 작품에 삽입되어 있고, 그녀를 ‘남자를 조종하고 이용하는 악녀’로 진단하는 신경증적 분석이 나오지만, 결론적으로 그녀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입으로도 그녀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녀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시점의 문제이다. <프랑스…>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구사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1인칭 시점을 끼워넣듯이 <여교수…> 역시 특이한 시점을 보여준다. 대개의 영화들이 3인칭 시점이고 드물게 1인칭 시점이 활용되는 반면, <여교수…>의 장면들은 2인칭으로 구성된다. 시점숏을 대부분 정면응시로 처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을 대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녀를 2인칭으로 봄으로써 그녀를 3인칭, 객관적 관점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필요를 폐기하고자 한 것일까?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신의 증상을 관객 눈앞에 늘어놓으며 스스로 ‘play’(놀다, 연기하다)할 뿐,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과연 그녀의 몸은 붉은 꽃이요, 그녀의 자궁은 미궁이다. 즐!

(*)해서, 평자가 주목하는 것은 '여교수'가 아니라 '그녀'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녀는 모호한 히스테리적 주체로 남는다는 것. 나는 이 모호함이 그녀의 '은밀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밀함'은 그보다는 값비싸고 숭고한 어떤 것을 요구한다...

06. 05. 31. -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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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31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날선생>도 봐야겠어요.

로쟈 2006-05-3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말씀드리지만, 추천해드리는 영화는 아닙니다...
 

지난주에 프린트해놓은 대담을 잠시 짬을 내어 읽었다. 씨네21(06. 05. 24)에 게재됐던 '우리 시대 대표적 시네필-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을 만나다'가 그 대담이다. 영화평론가 홍성남씨가 대담자로 나섰는데, 지난 전주영화제 참석차 이 '걸출한' 평론가가 내한했다는 소식은 '필름2.0'에서 이미 읽었었다('필름2.0'에도 짧은 대담이 실렸다). 시네필도 평론가도 아닌 나로선 '로젠봄'이란 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 고전적인 영화들에 '명불허전'이란 말이 전해져오듯이 '영화평론가'의 명성이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대담을 읽으며 알게 됐다. 해서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로젠봄에 대한 '소개'격의 서두는 제쳐놓고 막바로 대담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고다르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앙드레 바쟁”이라고 할 만한 동시대 비평계의 거목이 전주영화제 ‘인디비전’ 부문 심사위원 자격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고다르의 말은 로젠봄이 '우리 시대 최고의 비평가'란 뜻이다). 하지만 굳이 심사대상작이 아니더라도 매시간 영화를 보러 다니느라 인터뷰 시간을 좀체 잡기 힘들었던, 그래서 그 성실함을 눈으로 확인케 해주었던,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시네필-평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로젠봄으로부터 영화비평과 영화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시네필'이란 말을 굳이 덧붙이는 것은 그만큼 그가 많은 영화들을 본다는 뜻이겠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 ‘인디비전’ 심사위원 자격으로 전주를 방문했는데, 이번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들에 관심이 갔는가? 그리고 어떤 경향을 발견한 것이 있다면.

조너선 로젠봄: 전주에 온 것도, 한국에 온 것도 처음이라 이번 영화제의 전반적 경향을 말하는 건 어렵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았던 영화는 경쟁 외 부문에 있었다. 리트윅 가탁의 영화 2편 <구름에 가린 별> <사랑스러운 간다르>와 <미친 한 페이지> <원웨이 부기우기/27년 후>가 좋았다. 경쟁작들 중에서는 <방랑자> <아름다운 천연> 두편이 가장 좋았다. <가족> <뮤추얼 어프리시에이션>도 좋게 봤다. 개막작인 <오프사이드>도 포함시켜야겠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보이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번 경쟁작 일부에도 반영됐는데, 한 영화에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돼 있다는 것이다. 아주 모호한 방식으로.

홍성남: 어느 글에서인가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10대에 봤고 그때는 오해를 했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처럼 어려서부터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영화를 접했던 것 같은데.

 

 

 

 

조너선 로젠봄: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는 1961년 내가 18살쯤이었을 때 인권에 대한 급진적 캠프에 참가했다가 보게 됐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영화가 싫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평가를 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외의 영화들은 할아버지의 극장에서 봤다. 소규모 극장체인을 하시던 분이어서 공짜로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할아버지가 극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한 유력한 조건이다!).

-칼 드레이어 영화 같은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60년대는 학문적으로 영화 연구(Cinema Studies)라고 불리는 개념이 아직 없던 시기였다(*영화학의 역사란 그토록 짧다). 미국에서 영화에 대해 공부하려면 도서관에 가야만 했다. 그나마도 책이 4∼5권뿐이었고 좋은 책들도 아니었다. 비디오나 DVD도 없었기 때문에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극장이 유일했다. 뉴욕과 파리는 경우가 좀 달라서 영화를 구해서 보는 일이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나 역시 60년대 대부분을 뉴욕에서 살다가 60년대 말에 파리로 이사했다.

홍성남: 에세이스트이자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필립 로페이트는 60년대 시네필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 보기의 영웅적 시기(heroic age)”라는 표현을 썼다. 그때를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역사적인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가진 영화문화의 공과를 다 알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은가.

조너선 로젠봄: 내 세대 사람들은 60년대를 황금기로 보고 오늘날에는 영화가 죽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에 반대한다. 60년대가 굉장히 활기찬 시대이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칭찬하는 60년대 영화들은 당시엔 호응을 얻지 못했다. 고다르의 가장 중요한 영화들이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졌고,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도 늘 논쟁의 대상이 됐고 그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당시보다 요즘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점은, 그때 같은 스노비즘이 지금엔 없다는 점이다.

-요즘은 영화의 역사를 알기 위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세계 어디서든 영화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오히려 영화가 너무 많아 무엇을 선택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더 많은 지도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도 영화를 분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 자신도 영화를 분류하고 목록을 만드는 데 대한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오늘날엔 영화문화가 어떤 중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decentralized) 6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니 파버, 피터 보그다노비치, 조나스 메카스, 스탠 브래키지, 폴린 케일 같은 사람들이 <필름 컬처>라는 잡지 하나에 다 글을 썼다. 요즘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말이다.(웃음)(*로젠봄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건 정말로 불행한 일이다.)    

-오늘날 생긴 또 한 가지 문제는 저널리즘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이들과 아카데믹한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이들이 서로의 글을 충분히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도 스노비즘이 존재하긴 한다. 여하튼 실제로는 아카데믹하게 영화를 접근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기보다 그저 지위만 갖고 있는 것이다.

홍성남: 당신은 ‘영화연구’가 태동하고 발전하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당신은 그 현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와 관련해 예를 들어보자면, <필름 코멘트>에 글을 쓰는 유능한 영화평론가인 켄트 존스는 원래 영화를 만들려다가 영화연구쪽으로 분야를 옮겼는데, 그 연구란 것이 프랑스 인문학을 영화에 ‘잔혹하게’ 적용하는 데 질려서 그만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조너선 로젠봄: 영화연구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쪽에서는 자신들을 저널리즘과 차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차이를 두려고 심각한 척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저널리즘이 (영화역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름에도)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영화연구가 (영화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막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건 미국에서는 예술보다 사회과학에 더 치중하는 경향, 심지어 예술을 불신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너무 비판적으로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내가 영화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내 일자리를 지키고 내 미래를 확보하는 데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1년 이상 자리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시카고 리더>에 글을 쓸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무직자였을지도 모른다(*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해서는 운도 따라야 한다).

홍성남: <시카고 리더>에 매주 글을 쓰는 걸로 아는데, 글을 쓸 영화를 고르는 어떤 기준이 있는가.

조너선 로젠봄: 내 관심을 끄는 영화, 영화를 보고 할 말이 있을 영화, 다른 비평가들은 안 할 것 같은 말이 있을, 그런 영화를 선택한다. 시카고에서 상영될 영화들을 많이 쓴다.  

홍성남: 당신의 글이 아주 평범한 저널리스틱한 비평과는 다르긴 해도 여하튼 저널리즘 비평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 영화산업이나 신문·잡지 편집자들은 저널리즘 비평을 영화 마케팅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동조하는 면도 있지만 나는 저널리즘 비평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영화에 관한 논쟁을 촉진시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홍성남: 당신의 글들에서는 (영화)형식에 대한 민감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형식을 거론하는 당신의 방식은 영화연구쪽에서 형식을 고려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디서 그와 관한 통찰을 얻는가.  

조너선 로젠봄: 노엘 버치의 책 <영화 실천의 이론>(Theory of Film Practic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이미 오래전부터 영화학도들의 필독서인 버치의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도 영화학계의 직무유기이다). 그리고 내가 본 많은 영화들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알렝 레네 같은 이들의 영화 말이다. 이런 영화감독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형식 면에서 접근해야지 단순히 내러티브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들도 내게 영향을 끼쳤다. 파리에서 5년간 살았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에서 쓰여진 평론들은 형식과 스타일에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홍성남: 프랑스에서 있었다고 했는데, 그때에 자크 타티와 작업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프랑스에서 살았다는 것이 지금의 일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조너선 로젠봄: 자크 타티와 일한 것 말고도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몽상가의 나흘 밤>)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도 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생활이 준 무엇보다 큰 영향은 쾌락주의(hedonism)- 예술에서의 쾌락을 포함한- 라고 생각한다. 매우 쉽게 훌륭한 영화들을 볼 수 있었고, 사는 곳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극장이 엄청나게 많았다.(*이 또한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집주변에 극장이 많아야 한다는 것. 파리처럼.)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영화를 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홍성남: 당신은 지금 시대의 대표적인 시네필-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국내에서는 평론가 정성일 정도를 '시네필-평론가'로 꼽을 수 있겠다. 조건은 영화를 절대적으로 많이 보고 많이 써야 한다는 것.)

조너선 로젠봄: 만약 당신이 시네필이 아닌 그냥 평론가라면 사회학이나 마케팅에 대해 글을 쓰지 예술형식에 대해 쓰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것이 회화나 문학평론가들에게는 그림이나 문학을 좋아하는지 않는지를 묻지 않는데 유독 영화평론가에 대해서는 영화를 좋아하느냐 아니냐를 문제삼는다. 영화를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홍성남: 당신이 하는 작업 중 놀라운 점 하나는 다른 영미권 평자들이 전혀 다루지 않고 다루기도 힘든 영화감독들, 예컨대 마스무라 야스조나 라울 루이즈 같은 이들의 영화들을 힘들게 찾아서 보고 연구해왔다는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 마스무라의 영화는 30년 전에 파리에서 처음 보았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졌고, 접근하기 힘든 그의 영화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또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내게 일종의 목표가 되었다. 이후 여러 통로를 통해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았는데, 일례로는 일본에서 후원금을 받아 2주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한 여자 대학원생이 장면마다 시놉시스를 알려준 덕에 자막 없이도 영화를 이해하며 볼 수 있었다.(*국내에선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이 작년 11월에 개최된 바 있다. 마스무라의 재발견에 로젠봄이 큰 기여를 했다는 얘기.)

-라울 루이즈의 작품은 로테르담영화제를 포함한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할 때마다 찾아서 봤다. 영어자막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힘든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은 내게 더 큰 추진력이 된다. 마스무라가 최근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기뻤다.

홍성남: 남들이 잘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평가할 수도 없는 영화들을 보고 알리는 것이 평론가의 책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단순히 보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봐서 흥분되고 재미를 느낄 만한 영화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영화가 단지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의 가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발견되는데, 나는 거기엔 반대하는 입장이다.

 

 

 

 

홍성남: 앞에서 거론했던 마스무라나 루이즈처럼 혹은 ‘현재의’ 알랭 레네처럼, 어떠한 이유로든 남들이 비평적 영토에서 배척한 영화감독들에 대해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다. 당신이 (재)조명하는 미국 감독들, 예컨대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앤서니 만, 니콜라스 레이, 오토 프레밍거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공통점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들은 모두 당대에 어떤 ‘오해’를 받았던 감독들이지 않나.

조너선 로젠봄: 맞는 지적이다. 오슨 웰스도 그 리스트에 포함된다.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준비 중이다. 그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 비평가로서 내가 가진 임무가 아닌가 한다.

홍성남: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나와 있는 걸로 아는데, 그것들과는 다른 입장의 책일 것 같다.

조너선 로젠봄: 내가 과거에 웰스에 대해 쓴 글들의 모음집이면서 새로 쓴 글들도 들어 있다. 새 글들은 웰스에 대한 잘못된 자료와 오해를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웰스가 영화산업 내에서 일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영화산업 밖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매우 많다. 나는 많은 자료조사를 했고, 피터 보그다노비치 같은 이와도 인터뷰를 했고, 게리 그레이버(웰스의 생애 후반기에 촬영감독으로 웰스의 가까운 협력자 역할을 한 사람으로 현재 오슨 웰스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내 자신이 마치 이들이 오슨 웰스에 대해 느낀 점들과 알고 있는 점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종의 중간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잘 팔리고 유명한 책일수록 잘못된 정보가 많다는 것이다. 웰스에 대한 데이비드 톰슨의 책(<로즈버드: 오슨 웰스 이야기>)은 페이지마다 틀린 정보가 수두룩하다(*톰슨이 엮은 책으론 <비열한 거리>가 번역돼 있다).

홍성남: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조너선 로젠봄: 틀린 정보를 전할 뿐 아니라 편견도 심해서 문제다. 전쟁사가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지듯, 영화사도 감독 입장이 아닌 스튜디오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심지어 찰스 하이엄같이 훌륭한 학자의 저서(<오슨 웰스: 한 미국인 천재의 흥망>)도 스튜디오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편견으로 가득하다. <로즈버드…> 같은 경우 웰스는 자기 중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써내려간 책이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변호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톰슨의 책엔 자신이 조사해서 쓴 게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을 다시 한번 글로 써서 남긴 것뿐이다. 예를 들면 웰스는 부유한 혁명가들만 좋아한다고 했는데 절대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웰스의 주변에는 가난한 빈털터리 혁명가 친구들이 많았다. 내 책의 제목은 <오슨 웰스의 발견>(Discovery of Orson Welles)인데, 이미 완결된 상태이고 출간은 내년쯤에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은 흔히 웰스가 이런 사람이라고 확실한 결말을 짓고 싶어하는데, 찰스 디킨스 전집을 갖고 있으면 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웰스를 완벽하게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세계란 퍼즐과 같다. 그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발견의 과정이고, 우리는 소실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이 대담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상식적인 주장이지만, 상식이 언제나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홍성남: 웰스의 <오셀로>에 대해 당신이 쓴 글을 본 적 있다. 왜 미국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에 대한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조너선 로젠봄: 데이비드 톰슨의 저서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웰스를 ‘실패한 할리우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성공한 독립영화감독’이라고 보고 싶다. 몇번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이용할 기회가 있었던 성공한 독립영화감독으로서 말이다. <오셀로>는 <시민 케인>에 비견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고, 촬영방법과 예산을 모은 방법 등에서는 <시민 케인>보다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이 영화는 제작비 문제로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여러 장소를 전전하며 찍은 것으로 유명한데 웰스는 그같은 시공간적 ‘간극’들을 훌륭하게 메워낸 완성본을 만들어냈다). 이를 실패한 할리우드영화로만 보면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홍성남: 웰스가 할리우드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당신이 지적하는 것은, 허우샤오시엔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현재 미국의 극장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조너선 로젠봄: 미국 관객은 어떤 영화가 되었든지 간에 여러 유형의 영화들을 꽤 잘 받아들이는 편이다. 단지 앞에서 이야기한 감독들이 선보일 기회, 노출될 기회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미국 관객에겐 <오셀로> 같은 작품이나 허우샤오시엔, 키아로스타미 같은 감독들을 접할 기회가 없을 뿐이지 그들이 그런 감독의 영화를 특별히 거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알고 또 그들의 영화를 봐야 거부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않겠는가. 정보가 없는 게 문제라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키아로스타미가 미국 대중에게 소개되기만 하면 그가 단번에 스필버그처럼 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점은 바로잡고 싶다. 많은 이들이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단정짓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대중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한 가지, 박스오피스 수치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중은 자신들이 알고 있고 고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영화들을 보는 것뿐이다.

홍성남: 앞에서 이야기한 미국의 영화문화는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인 것 같다. 하지만 종종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있어 당신이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하곤 한다. 여하튼 당신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조너선 로젠봄: 우선 비평가들이 더 많은 영화를 알아야 한다. 돈을 들여 홍보가 잘되는 영화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다른 건 60년대의 이상적 조건에 대한 것인데, 당시에는 어떤 영화나 감독들이 소문이나 전설을 통해 퍼졌다. 고다르도 주류에 의해 알려진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하면서 알려졌다. 이런 현상들이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더 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 미국은 영화 티켓 판매 정도보다 DVD 판매 정도가 더 높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박스오피스만 보고 영화문화가 이렇다고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자신보다 젊은 시네필 평론가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외계에서 온 이들이 서로 모르면서 지구에 흩어져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지금의 고쳐져야 할 영화문화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너선 로젠봄: 그렇다. 내가 알기론 그런 힘이 될 비평가들이 전세계에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버라이어티>에 있다가 <로스앤젤레스 위클리>에서 글을 쓰고 있는 스콧 파운대스는 아주 공격적이고 진지한 글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캐나다 잡지 <시네마 스코프>에 DVD 리뷰를 쓰는 필자들도 훌륭하다. 미국에서 인터뷰를 하면 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로 진행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서 내 저서를 심도 깊게 읽고 와준 것도 고맙고 놀랍다.

홍성남: 마스무라 야스조에 대해 말하길, 그가 직접적인 연결이 없으면서도 동시대를 산 다른 감독들, 새뮤얼 풀러, 더글러스 서크, 니콜라스 레이, 프랭크 태슐린 등과 동일한 관심사를 공유하더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흥미가 갔다고도 했고. 그러면서 ‘전지구적 동시성’(Global Simultaneity)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최근에 그런 현상을 발견한 대상이 또 있었나.

조너선 로젠봄: 사실 <무비 뮤테이션즈>(Movie Mutations, 로젠봄과 에이드리언 마틴이 편집을 맡아 2003년에 출간된 책) 자체가 그런 관심사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것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1960년대생 시네필들, 예컨대 니콜 브레네즈(프랑스), 켄트 존스(미국), 에이드리언 마틴(호주) 등에게서는 비슷한 취향이 공유되고 있음이 발견되더라. (내 취향은 아니지만) 필립 가렐, 몬티 헬먼, 존 카사베츠 같은 감독을 좋아하는 성향 말이다. 그래서 ‘전지구적 동시성’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영화의 역사를 공유한다. 단순히 모든 나라에서 대형 제작사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결속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시를 싫어하고, 미국인들도 부시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 공통성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공통분모를 연대로 이어갈 수 있는 기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키아로스타미에 대한 책을 이란 사람(이란의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이기도 한 메흐르나즈 사에드 바파)과 같이 썼다. 그것도 그런 국제적 결속의 한 노력이지 싶은데, 앞으르도 그런 식으로 작업할 생각이 있는가.

조너선 로젠봄: 그 책뿐만 아니라 <무비 뮤테이션즈>도 동일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노력을 계속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메흐르나즈 사에드 바파가 프랑스 잡지 <트래픽>에 글을 쓸 때, 그녀의 이름만 올라 있지만 그 글의 형상화에 내가 도움을 줬다. 그 역시 내가 이란의 비평가들과 얘기할 때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책에 실린 두 사람의 대화 부분이 이란과 호주 잡지에 동시에 실린 것을 보고 기뻤다. 이 책을 쓸 때 키아로스타미와는 팩스를 통해서 인터뷰를 했다.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어로 내 이름 쓰는 걸 배우기도 했다.

홍성남: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려는 조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미권 비평에서는 고다르에 대한 논의가 어느 시점에서 멈춰져 있는 상태이고 그의 ‘현재’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다르의 현재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갖는 몇 안 되는 영미권 평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조너선 로젠봄: 전세계적으로는 고다르에 관한 커다란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다르 영화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놓은 책도 있고, 일본에서는 <영화사> DVD가 훌륭한 모양새로 나왔다(*고다르가 찍은 영화 100년의 역사를 말한다. 국내에는 언제 소개되는 것인지?). 사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가보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글도 아무 생각없이 500만명이 읽는 것보다 5명이 읽고 감동받아 세상을 바꾸자고 생각한다면 그게 더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스튜디오 마케팅 때문에 수치에 연연하는데, 나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홍성남: 고다르와 동년배이면서 점점 더 비평적 주가를 높여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그에 대한 당신 글은 그리 많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그를 어떻게 평가하나.

조너선 로젠봄: 사실 이스트우드에 대해서도 글을 많이 썼다. 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추악한 사냥꾼>(White Hunter Black Heart)을 가장 좋아한다. 액션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해서도 글을 썼고 매우 좋아한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썼는데 지금 떠오르는 영화들은 이렇다. 그는 전적으로 어떤 대본을 갖게 되느냐에 좌우되는 감독이다. 물론 연출력이 출중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는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양식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점 때문에 높이 살 만하지만 같은 이유로 과대 평가될 위험도 있다.

 

 

 

 

-자신이 대본을 쓰지 않기 때문에 어떤 대본을 갖고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의 질이 들쭉날쭉하다. 사실 그가 개봉 전 시사회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선 찬사를 보낸다. 그럴 수 있는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스필버그만 해도 개봉 전 시사회를 열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상업영화를 거부하거나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스필버그의 'A. I.'같은 작품은 최근 나온 영화 중 걸작이라고 할 만하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세르주 다네나 레이먼드 더그냇 같은 뛰어난 평론가들에 대해서도 꾸준히 글을 써왔다(*다네는 '카이예 뒤 시네마' 편집장을 지낸 프랑스의 최고의 비평가이다).

 

 

 

 

조너선 로젠봄: 두 사람 다 친구였다. 다네와는 특히 친했고 함께 작업한 적도 있다. 흔히 비평가들에 대해 얘기할 때 그들간의 경쟁에 주목하는데, 나는 비평가들 사이에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굉장히 영향력있는 비평가인 로저 에버트의 경우 그의 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인간적으로 친한 친구고, 시카고에서 시사회에도 자주 같이 간다. <무비 뮤테이션즈>에 참여했던 많은 비평가들과도 친하다. 크리스 후지와라 같은 이는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도 매우 좋아한다. 비평가들이 서로의 글을 많이 읽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홍성남: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다른 시각문화들도 발전하면서 영화라는 존재가 예전보다 힘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시대에 영화의 지위와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영화는 여전히 굉장한 영향력이 있는 매체다. 단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 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5편을 집에 두고 계속 볼 수 있는 시대, 그래서 영화와 더 친밀해져서 집안에서 그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는 시대가 온 것 같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영화의 역사를 더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대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한다.

홍성남: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당신은 부당하게 간과되거나 무시당한 감독들에 대해 집중해왔다. 현재의 감독 중 그런 인물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가장 최근에 그의 작품을 봐서 그런지 제임스 베닝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딱 이 사람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내 연배의 인물인데 그렇게 잘 알려지지는 않아서 미국에서는 DVD도 거의 안 나와 있다. 비평가협회에서 상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는 굉장한 실험영화인이다.

(*) 로젠봄의 책으론 <무비 뮤테이션즈>와 최근에 나온 <이센셜 시네마>를 얼마전에 구했다. 한국의 '로젠봄'들이 그만한 시야와 부피의 책들을 얼른 써주기를 기대한다. 

06.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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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개봉한 만다 쿠니토시 감독의 영화 <언러브드>(2002)에 대한 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엊저녁 퇴근길에 문화일보에서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리뷰를 읽은 게 계기가 됐다.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나로선 비디오로 출시되기나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미리 스크랩해두는 걸로 아쉬움을 달랜다.

문화일보(06. 05. 30) 돈 많은 벤처사업가 가쓰노(나카무라 도오루)와의 사랑을 뿌리치 고 택배 일을 하는 가난한 청년 시모카와(마쓰오카 슌스케 )에게 마음을 연 가게야마(모리구치 요코)는 그와의 첫 잠자리에 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가 처음이어서가 아니다. 시모카와와의 섹스가 특별히 그녀의 몸을 더 뜨겁 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가게야마는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과 ‘맞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시모카와의 벗은 등을 힘껏 껴안으며 왜 우느냐고 묻는 그에게 “너무 좋아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모카와는 가게야 마가 ‘좋다’라고 한 진짜 이유를 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언뜻 보면 동네 구청에서 일하는 9급 공무원 여성과 잘나가는 사 업가, 그리고 나이도 어리고 장래도 불투명한 한 청년의 그렇고 그런 3류 삼각관계를 그린 신파 TV드라마 같지만 <언러브드>는 그보다 훨씬 깊은 얘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현대사회,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랑의 본질을얘기하는 것인데, 그 내용이 너무 정곡을 찌르는 것이어서 때 론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지나친 진실은 일상을 뒤흔든다.

-흔히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 모든 차이를 덮어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그 ‘차이’ 란 때로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종교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차이의 요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하나, 결국 계급적이라는 것이다. 지난한 계급의 역사에서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이 해피엔딩이 된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됐을까. 그런 얘기는 정말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나 공중파TV의 수많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언러브드>는 우리들의 그 같은 오래된 착각의 세상인식을 전복시킨다.

-남녀간의 차이는 차이로 존재할 뿐 그게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다고 이 영화는 얘기한다. 여주인공 가게야마는 그 점을 너무 나 잘 아는 인물이다. 돈 많은 가쓰노는 그녀에게 수백만원짜리 의 드레시한 옷을 사 입히고 스노비시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최고 급 레스토랑에 데려가지만 가게야마는 가쓰노가 잠깐 일을 보러 간 사이 허름한 음식점에 가서 라면을 먹는다.

-가게야마는 가쓰노에게 옷을 돌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가쓰노는 레스토랑에 오랫동안 혼자 놔둬서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다. 그 ‘생각’의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는다. 가게야마는 가쓰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최고급의 옷’일 뿐이다. 가게야마 는 가쓰노에게 얘기한다. “당신과 있으면 나는 내가 아니게 돼요. 나를 잃게 돼요”라고.

-가쓰노는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낸다. 가쓰노의 분노도 이해 못할 것이 아니다. 가쓰노는, 너 역시 나를 만나면서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지 않았느냐며 그녀를 힐난한다. 차이를 두려워하고 거부 하는 것 역시 자기만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냐고 캐묻는다. 가난한 택배 청년 시모카와도 그녀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그녀식으로 자신들이 ‘차이없음’에 만족하고 사는 것은 결국 이 사회에 두껍게 벽을 쌓고 고립돼 살아가려는 왜소한 행위일 뿐 이라고 그는 안달한다.

-가쓰노는 가게야마를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이려고 하고 가게아먀 는 시모카와를 자신의 세계에 정착시키려 하지만 정작 시모카와는 가쓰노처럼 되고 싶어한다. 이 기묘한 부조화의 순환구조. 과연 누가 옳은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계급을 뛰어 넘는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 <언러브드>는 그게 결코 녹록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멜로드라마를 보러 들어갔다 가 무거운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한겨레(06. 05. 25) 사는 게 그렇지만 연애도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취향이나 환경, 가치관은 한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또 그렇게 관계가 맺어진 뒤에도 선택의 순간은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 타협과 포기가 끼어들고 이런 단어는 사랑이라는 우산 밑에서 헌신,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런데 현실 속의 선택에는 매뉴얼도 존재한다. 부와 능력, 배경, 외모 같은 조건들이 그렇다. 보통의 선택은 투명하게 스스로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욕망과 객관적 기준의 타협이기 십상이다.

-사랑 이야기이면서 ‘사랑받지 못하는’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언러브드>(24일 개봉)에는 남다른 선택을 하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시청 하급 공무원인 미쓰코(모리구치 요코)는 능력을 칭찬하고 승진 준비를 하라는 상사의 격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값싼 노동력에 만족하고 산다. 업무차 시청을 오가던 젊은 사업가 가쓰노(나카무라 도오루)는 참하고 조용한 미쓰코에게 반한다. 가쓰노가 연애를 걸어오자 미쓰코는 조용하게 그를 받아들이지만 가쓰노가 값비싼 드레스와 고급 레스토랑 등 자신이 속한 세계로 끌어당기자 싸늘하게 그를 거부한다. 대신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아래층 택배청년 시모카와(마쓰오카 슌스케)에게 연애를 건다.

-미쓰코는 욕심없고 소박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가장 평범해 보이는 그의 세계는 이해받지 못한다. 욕심없고 소박하다는 게 어떻게 해 볼 수 없어서 자조하는 것이라고 해석되는 세상에서 그가 욕심없고 소박한 자신의 세계를 관철하는 건 초고속 승진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된다. 당연히 미쓰코를 ‘구제’해줬다고 여기는 가쓰노가 미쓰코의 거부를 이해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처음엔 미쓰코의 살뜰한 사랑을 반기던 시모카와도 싫증을 낸다. 미쓰코는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이라 시모카와를 좋아하지만 시모카와는 미쓰코에게서 별수 없는 패배자로서 자신의 거울을 보기 때문이다. 가쓰노는 버림받은 데 분노하지만 시모카와는 선택받은 걸 혐오한다. 결국 자신의 성을 완고하게 지키며 사랑을 하려는 여자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남는 것이다.

-<언러브드>는 순종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사랑에 있어 선택의 문제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주관적 단어를 마치 수학이나 화학의 복잡한 공식처럼 철저하게 분해하면서 그 안에서 선택이 작동되는 기제를 정교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틀을 빌려왔지만 싸늘하리만치 냉정하고 이지적이다. 특히 영화의 막바지에 자신을 떠나려는 시모카와에게 미쓰코가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서 집요하게 설득하는 장면은 격렬한 토론장처럼 불꽃이 튄다. 영화 역시 밀도 있는 구성과 대사를 통해 사랑도 선택도 달콤한 휴식의 거처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투쟁의 장이라는 걸 관객에게 설득해내는 데 성공한다.(*이 리뷰는 김은형 기자의 것인데, 남성 평론가 오동진과는 달리 '계급적 문제'보다는 '캐릭터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 있다. '존재론적인 투쟁'?)

06.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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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3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영화는 어디서 하는거래요. 못봤는데. 씨네코아도 없고 씨네큐브에도 없으면 어디에서...?

waits 2006-05-3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필름포럼(예전 허리우드)에서 이번 주까지 하네요. (흡, 남의 서재에 답댓글을..;;)

Joule 2006-05-3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봤어요. 이벤트라고 까만 색의 예쁜 머그컵을 주었는데 소감을 말하자면 6천원짜리 머그컵 사니 덤으로 영화를 보여준거야,라고 위안하고 싶더라는. 연극적이에요. 영화보다는 영화평들이 더 훌륭한 걸 보면 차라리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울림이 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가와이 겐지가 음악을 맡았는데 애마부인 음악과 상당히 흡사한 분위기를 연출하더군요. 영화평에서 말하는 딱 그만큼만이에요. 그러나 다시 보라면 볼 것 같아요. 덤으로 주는 컵이 갖고 싶어서.

로쟈 2006-05-3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관 개봉하는 걸로 보아 흥행성이 없을 거라는 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애마부인 음악'이라는 장르(?)도 있는 모양이군요.^^

마늘빵 2006-05-3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 보러갔다가 제가 도착한 시간이랑 상영시간이 너무 차이가 나서 모노폴리 보고 왔어요.

로쟈 2006-05-3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같으면 저는 <모노폴리>를 먼저 보고, <언러브드>를 봤을 텐데요.^^
 

지난 5월 19일부터 6월 11일까지 종로구 창성동의 '갤러리 팩토리'에서는 2006 팩토리 기획 '현대 여성 미술의 새로운 표상 - 신여성'의 두번째 전시로 '김연태 회화전'이 진행중이다. 전시회의 타이틀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며(알다시피 메를로-퐁티가 같은 제목의 책을 쓴 바 있다), 나는 개막일에 들러서 작품들을 감상한 바 있다. 소개하는 뜻에서 몇몇 작품의 이미지와 해설을 옮겨온다. 전시회 해설은 독립 큐레이터 이순령씨가 썼다.

 

● 삶은 모호한 것 투성이이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쉽사리 길들여지지도 않는다. 세월의 켜가 쌓이면서 익숙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 늘 낯선 상황에 서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김연태의 작업에 다가가는 과정 역시 그러했다. 작업실에서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나는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는, 섣부른 접근을 허용치 않으려는 듯한 그 세계가 이내 궁금해졌다. 그리곤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조금씩 다가서서 조심스레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그녀의 작품들과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이 글은 어떤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그 감추어진 내밀한 속 풍경을 엿보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하였다.

● 회화나 입체, 설치에 이르기까지 김연태의 작업은 드로잉이 근간이 된다. 아크릴, 잉크펜을 사용하여 세필로 찰나의 인상을 포착하는 드로잉은 순발력이 뛰어난 그의 성격에 잘 맞는 매체이다. 초기부터 꾸준히 해온 드로잉 작업은 그녀 개인적으로는 일상의 투영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만났는지 무엇을 읽고 느꼈는지 그 단상에 대한 흔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배제된 채 화면은 몇 개의 선으로 요약된다. 상대적으로 터치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회화 작품조차 절제되고 그래서 때로는 비워진 듯 충만한 상태로 제시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다.

●(김연태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에 의한 과감한 생략은 지루하고 산만한 세부를 잘라내고, 우리의 관심을 곧바로 사물의 핵심적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글에 비유하자면 장황한 미사여구를 곁들인 산문이 아닌, 암시적 단서를 던져주고 읽는 이의 반응을 지켜보는 시(詩)에 가깝다. 최소한의 언어로 가볍고 경쾌하게 대상을 요약하는 김연태의 드로잉은 그중에서도 하이쿠를 연상시킨다. 시이지만 이미지적 성향이 강한 하이쿠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에 대한 인상을 간결한 시구로 표현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의 드로잉 작업은 슬쩍 무심한 듯 그은 몇 개의 선으로 대상을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가볍고 단순해질 권리가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 우리의 삶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경계를 알 수 없게 뒤섞여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의 관심은 민중, 역사, 정치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에서부터 개인, 일상, 욕망 등의 사적인 가치로 옮겨가게 되었다.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여성을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한다. 김연태는 그만의 예민한 감성으로 그 징후를 드로잉 작업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 소소한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그는 자신의 작업을 ‘상황과 장면의 기억 속에서 꿈을 꾸며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 덧붙여 ‘나는 주제를 찾아 헤맨 적이 없다. 언제나 주제가 나를 찾아 왔을 뿐이다’라는 가브리엘 마르케스(Gabriel Jose Garcia Marquez)의 말을 인용한다. 작업노트 한 켠에 적혀 있는 이 문장은 작업에 임하는 그의 태도를 짐작케 하는 단서가 된다. 삶의 순간순간 찾아오는 느낌과 감정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데서 작업은 출발한다. 이렇듯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기치 못하게 스치는 작은 미동마저 포착할 수 있는 발화점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대상에 내재한 특질들을 포착해내는 명민한 능력의 소유자인 작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그 느낌이란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것이 서서히 내적 사고를 점령해가고 결국 그것에게만 온 신경과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말한다. 김연태는 이렇듯 집중된 감정이나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침묵과 그 진실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 하지만 사소한 일상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개인적 감성과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친절하거나 투명하지 않다. 드로잉 안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친근한 사물이 불안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화면 속에서 발견되는 형태들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애매한 상태로 제시되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스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 김연태의 작업을 읽는 묘미는 이러한 익숙함과 낯설음의 공존에 있다. 일반적으로 비평이란 언어를 통해 작품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밝혀내거나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반적 추측은 미끄러지고 작품의 의미를 관통하려는 노력은 공허함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독자를 애매모호한 상태에 둠으로써 불확실한 감정을 촉발하는 것을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두려운 낯설음(uncanny)’이라고 정의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두려운 낯설음‘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 김연태는 일상의 어떤 대상에 감추어진 시각적 가능성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낸다. 구체적인 형상에서 출발하되 사물을 물질보다는 사건으로서 상황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어느 순간 우연히 눈에 들어온 말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낯설고 서늘한 감정과 그 예기치 않은 상황이 주제가 된다. 말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수차례 전이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에는 더 이상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물의 외연적 실체는 휘발되고, 그것과 닮았지만 그것이 아닌 새로운 문맥이 드러난다. 즉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모방이란 의무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방식으로 해석의 문이 열린다. 작가는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고 100% 소통가능한 현실로부터 의미를 면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주어진 개념의 틀에 갇히는 비평의 언어적 판단과 단정을 중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 분명한 사실은 그의 작품에는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생명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지만 탐지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크고 요란한 동작보다는 섬세하고 작은 변화 속에 내재된 움직임이다. 우리는 의외로 작은 변화에 더 민감하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을 김연태의 회화는 가시화한다. 그리고 일상적인 것에 내재된 비가시적인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가늘고 섬세한 선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솜털처럼 예민한 실선들이 구두나 가방처럼 생명이 없는 사물의 표면을 감싸고 있거나, 탯줄과도 같은 생명선이 서로 관계없는 사물들을 연결하거나, 혹은 나무줄기처럼 뻗어가며 뿌리내리려는 사유의 이미지를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시각적 표현이다. 그에게 선은 더듬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선을 긋는 것은 대상을 알아가는 가장 솔직한 방법인 동시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행위인 것이다.

● 이처럼 김연태의 드로잉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선 상에 서있다. 이러한 태도에는 작가의 은밀한 욕망의 투사가 개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내면화하는 응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Jacques Lacan)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응시란 타자의 영역에서 나에 의해 상상되는 응시를 말한다. 외부에 놓인 사물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하나의 시각적 경험인 응시는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자기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라진 ‘결여’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김연태의 작업과 맞닿아 있다. 생략되고 숨겨지는 단계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재현의 과정에는 시각을 통해 어떤 외적 실체로부터 진정한 자아를 도출해내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기반영성의 미학이 된다”는 작가의 언급과 일치한다. 자기애적 성향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 사실 우리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자기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에 관여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김연태에게 있어서 작업이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대상과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해가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내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끊임없이 새로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은 눈을 뜨고는 있지만 일상의 삶 속에 아직 잠들어 있는 감성들을 일깨우고,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자아를 되찾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길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풍경이지만, 길 위를 걷는 사람에게는 통로이다.” 앞으로 김연태의 작품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지에 대한 예측은 지금처럼 모호한 채로 남겨두고 싶다. 그러나 그는 길 위에 서있고 좀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심할 수 있고 기다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전시는 그 예감에 대한 믿음이다.

06.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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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연말에 쿠스투리차의 영화 'Life is a miacle'(2004)를 빌미로 하여 "쿠스투리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쓴 적이 있다. 주된 내용이 '기적'에 대한 것이어서 다시 정리하는 김에 '기적에 대하여'란 제목을 붙이도록 한다(이 글은 기적에 대한 나의 수다이다).

“지금 나는 졸리지만 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제 이미 다 생각해놓았다. 이것은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우리 시대에 살면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아파트에서 고분고분 떠나 교외에 있는 헛간에서 지낸다. 그는 이 낡은 헛간을 아름다운 벽돌집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헛간에서 살다가, 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이전에 한 차례 인용한 바 있지만, 하름스의 <노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앞에서 나는 ‘기적으로서의 삶(Life as a miracle)’과 ‘여행으로서의 삶(Life as a tour)’의 대립양상에 대해서 언급했는데(*단순하게 말하면, 여해에서 기적을 구하는 '여행으로서의 삶'은 '유사-기적으로서의 삶'이다), ‘기적을 행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계속 헛간에 살다가”)는 걸로 특징지어진다. 이건 변증법적 지양의 길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인가? 이하의 내용은 이 한 대목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인바, 겸사겸사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쿠스투리차의 영화 얘기로 되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기적을 행하는 자’의 라캉적 명칭은 ‘주인기표’가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나는 내가 말하는 바이다.” 여기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동일시의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16쪽)기기 때문이다. ‘원의 사각형’이란 말은 ‘square of the circle’의 번역인 듯한데, 사전에 다 나와 있는 바이지만, 그건 숙어적으로 (원을 네모지게 하는) ‘불가능한 일’을 가리킨다(우리말 ‘원의 사각형’이 그런 뜻을 갖고 있는가?). 때문에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동어반복이며, “불가능한 일”로 충분하다. 다시 옮기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완벽한) 동일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긴다.”

즉, 상징적/상상적 동일시는 불가능한 일이며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러니, ‘나(I)는 나(me)다’라는 상징적 동일시가 ‘기적’인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나(me)가 ‘주인’ 혹은 ‘주인기표’일 경우에는 더더욱. 68혁명 이후의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학 담론’에서(그 담론 공식의 하단부에서) 드러나는 바는 (에릭 샌트너가 말하는바) ‘임명(investiture)의 위기’ 혹은 서임(敍任)/수임(受任)의 위기이다(지젝, <이라크>, 188-9쪽).

그러니까 (주인으로서의) 어떤 임무나 역할을 주려고 하지만, 아무도 안 받겠다며 거부하는 걸 말한다(예컨대, 아무도 반장 안 하겠다고, 아무도 대통령 안 하겠다고, 못 해먹겠다고 버티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가 S(=주인기표)와 관계 맺는 것의 불가능성, 주체가 주인기표와 동일화하는 것의 불가능성 혹은 주체가 부과된 상징적 위임을 떠맡는 것의 불가능성”(<이라크>, 189쪽)을 가리킨다. 이 불가능성이 산출하는 것은 ‘상징적 동일성(=정체성)’의 상실이다. 즉, 상징적/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나(Me)’를 상상적 ‘나(i)’가 거부/회피함으로써 ‘나(i)≠나(Me)’가 되는 것이다(사회학자 미드의 ‘I-me’ 관계를 ‘i-Me’ 관계로 수정했다).

거꾸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나란 말인가?”란 부인으로부터 “나는 다름 아닌 나란 말이야!”란 수락에 이르는 여정(물론 이때의 ‘나는 나다’라는 건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것이 표시하는 건 역설적으로 동어반복의 불가능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은 ‘운명애’의 인간이다(비록 라캉은 니체를 참조하지 않지만). 그리고 이때의 운명은 (니체를 따를 때) 다리로서의 운명이고 몰락으로서의 운명이다. 너는 너의 운명(=몰락)을 사랑하는 자인가?

운명애로서의 ‘나=나’가 ‘기적’이라면, 그것에 대한 거부/회피로서의 ‘나≠나’가 흔히 가리키는 것은 투어이고 일탈/도착이다(흔히 ‘나’를 찾아간다는 명목의 이 행은 실상은 ‘나’로부터 미끄러지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담의 종결은 보통 집에 돌아와 보니까 거기에 ‘나’가 있더라는 식이니까). 그걸 좋은 쪽으로 말하면, 유목이고 탈주가 된다(무엇의 유목이고 탈주인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블랙메일과 핫머니 아닌가? 정작 유목/탈주의 ‘모델’인 집시들은 탈주하고 있는가? 자신들이 탈주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재배치하는가? 매번 재배치되는 건 전략 핵무기 아닌가? 사고/사유의 재배치는 뉴에이지즘과 과연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생각을 바꾸면, 파트너를 재배치하고 체위를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가?).

하지만, ‘나=나’라는 상징적 동일시의 “상실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으로 인해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일이다…”(<이라크>, 189쪽) 번역문의 ‘향유’를 ‘향락’으로 고쳤다. ‘향유에 시달린다’는 건 우리말로 넌센스이다. 여기서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이란 지젝의 말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며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러시아의 한 TV채널에서는 ‘플레이보이’사(社)에서 만드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보여주는데, 요즘은 주로 스트립쇼와 ‘섹스의 모든 것’이란 제하의 프로그램이 나온다(‘모든 것이 가능한 섹스’라고 해야 할 듯하다). 스트립쇼야 흔하게(?) 보는 거지만, ‘섹스의 모든 것’에 나오는 것들은 간혹 엽기적일 때가 있다.

성기 피어싱부터 각종의 도구와 장치들을 이용한 새도-마조히즘과 집단섹스에 이르기까지 르포식으로 보여주는데(<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보여지는 집단섹스 등은 ‘판타지’가 아니다), 참가자들은 다들 희열에 차 있는 듯하지만(혹은 희열을 연기하는 듯하지만)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그들은 사실 너무 고생스러워 보인다(아무런 마취도 없이 성기를 피어싱한다고 생각해보라).

‘향락’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러한 고생/고통이 우리가 ‘나=나’라는 기적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는 ‘보상’이다(웬만하면 기적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소위 ‘성 범죄자들’이 보내져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이러한 (어떠한 금지도 없는) ‘섹스 천국’이라고 생각한다(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라!).(‘섹스 천국’의 유일한 금지는 외부에서는 절대로 아는 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나=나’(라는 ‘파시즘’)에 대한 알레르기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안티-오이디푸스’적이다.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라이버는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아파트라는 익명성의 공간에서 섹스만을 소통(불)가능성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자살 때문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말론 브란도는 남편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신의 수많은 (가짜)이름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탈주하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나’의 세계란 가식적인/의례적인 탱고의 세계에 다름 아니기에(그는 탱고경연장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 보임으로써 그러한 세계를 욕보이고자 한다). 그러한 그가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지점은 물론 죽음이다(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에겐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도 ‘껌’이었다). 그의 죽음을 순전히 부르주아 여성의 변덕/배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일 것이다.

‘나=나’라는 테마를 사이에 두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대척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자크 도마엘의 <토토의 천국>이다(원제는 ‘영웅 토토’였던 듯하다). 신생아 병동에 난 화재소동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부잣집 아이의 운명과 뒤바뀌었다고 ‘믿는’ 토토는(자신의 연인도 빼앗긴다) 노인이 되어서 부도 위기에 몰린 이 재벌 친구(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한스’라고 해보자) 대신에 암살당하는 운명을 선택한다. 그는 그럼으로써 ‘나=한스’로 이행해가며, 자신의 ‘진정한 나(=한스)’로서 죽음을 맞는 ‘기적’을 연출한다. 그는 자기 운명의 주인공/영웅(Hero), 즉 주인-기표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주인기표가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는 텅 빈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캐나다 감독 장 클로드 로종의 <레올로>에서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테마이다(나는 이 영화를 10년 전에 한 영화제에서 연거푸 보았다. 이 영화 또한 내게 ‘기적’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똥싸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는, 몬트리올의 한 빈민가정에 태어난 소년 레오는 자신의 본래적 아버지는 시실리의 농부라고 ‘믿으며’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이태리식으로 ‘레올로’라고 부른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무식한 아버지, 그리고 미친 누이들과 정신박약의 형 사이에서 삶을 버텨나가는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옆집 처녀 비앙카를 사랑한다. 그러다가 비앙카가 돈을 받고서 할아버지에게 매춘을 한다는 걸 알고서는 할아버지를 죽이려다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영화의 나레이터에게 남겨진 것은 레오, 아니 레올로가 남긴 기록들뿐이다. 그것은 레오가 레올로라는 상징적 위임을 떠맡고자 분투했던 날들의 기록들이기도 하다(하면, 기적들도 웬만하진 않다).

 

 

 



어쨌든 인상적인 것은 죽음/정신을 담보로 하더라도 끝까지 ‘나(me/Me)’라는 상상적/상징적 정체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혹은 그걸 유지하고자 하는 분투들이다 가령, 모파상의 단편 <쥘르 삼촌>은 여기서 좋은 분석거리가 된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한 가족의 상징적 정체성이다. 부자가 돼서 돌아올 걸로 이들 가족이 꿈꾸는 ‘쥘르 삼촌’이 아무리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허울은 필수적이다.

멕시코 감독 립스테인의 걸작 <짙은 선홍색>에서 자신의 ‘가발’에 악착같이 집착하는 대머리 이발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 자신을 ‘가발을 쓴 나’하고만 동일시하고자 강박적으로 애쓴다. 가발을 안 쓰면 어떤가? 하지만, 그에게서 ‘가발을 안 쓴 나’는 곧 비존재(nothing)이다. 허리에 달랑 ‘새끼줄’ 하나만 두른 걸로 ‘의상’을 대신하는 한 원주민 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새끼줄로 가려지는 부분도 없지만, 그들은 새끼줄을 안 찬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새끼줄도 안 차고 어딜 돌아다닌단 말인가?).

여기서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모두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다. 즉,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나/우리의 상징적 정체성에 필수적인 보증물이며 버팀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이전의 차원에 있는 향락의 무의미한 중핵”으로서의 그것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 기능한다. <이데올로기>에서 지젝은 욕망의 그래프를 해설하면서 잉여 향락의 차원을 끌어오는바,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알튀세르) 너머의 차원에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의 이러한 잉여물을 고려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 비판은 두 가지 상보적인 절차로 구성된다(이하 <이데올로기>, 217-223쪽 참조).



-하나는 담화적인 차원으로서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증상/징후를 읽는 독법’이다. 이는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얼마나 서로간에 이질적인 ‘부유하는 기표들’의 조립을 통해, 다시 말해 어떤 ‘매듭’의 개입을 통한 전체화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입증해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이란 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순진한 지각/수용을 뜻한다. 서로 이질적인 기표들이 어떤 ‘매듭’을 통해 얽어 매지고, 조립(=편집)됨으로써 산출되는 게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인데(가령 신문의 지면을 보라),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수용하는 데 이데올로기의 함정이 있다. 증상/징후 읽기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해체’하는 것인바, 이러한 작업은 바르트의 신화 읽기와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향락의 중핵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환상 속에 구축된 이데올로기 이전의) 향락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산출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다.

첫 번째의 ‘담화분석’을 두 번째의 ‘향락의 논리 분석’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예증하기 위해서 지젝이 들고 잇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순수한 육화’로서의 반유태주의이다. “담화분석의 수준에서 유태인의 형상 속에 투자된(=투여된) 상징적인 중층결정의 네트워크를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거기엔 전치의 과정이 있다. 반유태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계략(=속임수)은 사회적인 갈등(=적대)을 건전한 사회조직체와 그것을 부패시키는 힘으로서의 유태인 사이의 갈등(=적대)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치는 유태인과 돈 거래를 연관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취와 계급적인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기본 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조합이 계급투쟁을 대치하면서 ‘생산’력(노동자, 생산의 주최자…)과 ‘생산’계급들을 착취하는 상인들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218-9쪽)

마지막 문장은 오역인데, 러시아어본을 참조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그렇게 되면, 착취와 계급적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생산계급(노동자+산업자본가)과 (생산계급을 착취하고 건강한 협력관계를 계급투쟁으로 변질시키는) 상인계급 사이의 관계가 된다.” 즉, 반유태주의는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적대’를 ‘생산계급과 상인계급의 적대’로 전치시킨다. 이러한 전치를 보조하는 것이 응축(=압축)인데, “유태인의 형상엔 상하위계급들이 연상되는 특징들이, 상호 대립적인 특징들이 응축되어 있다. 유태인은 예를 들어 더러우면서도 지적이고, 음탕하면서도 (성적으로) 무기력하다 등등.”

담화분석에서는 이러한 유태인의 형상이 징후/증상이라는 걸 읽어낸다. 즉 그것이 코드화된 메시지이자 암호이고, 사회적 적대의 왜곡된 표상이라는 걸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가 바로 전치/응축작업의 ‘해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유(=전치)-환유(=응축)의 논리 분석은 유태인의 형상이 얼마나 우리의 욕망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유태인이 환상의 틀 속에 들어와 우리의 향락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우는 물론 사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신체로서 보는 통합주의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물론 이러한 ‘하나로 통합된 신체로서의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220쪽)

그렇다면, 이러한 통합주의적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간의 거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이다. 요컨대 ‘유태인’은 물신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불가능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구현하는 물신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것은 사회적인 장 속에서 향락이 분출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란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기능은 (사회의 구조적인) 이러한 비일관성을, 다시 말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실패한 동일시를 보상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파시즘에 있어 ‘유태인’은 파시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다… 결국 ‘유태인’은 단지 어떤 근본적인 장벽에 대한 물신적인 구현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21-2쪽) 더불어 지적하자면, 스탈린 체제에 있어서 ‘인민의 적’들은 사회주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었다. 왜 우리가 완전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인민의 적들 때문이다! 왜 진정한 세계화가 실현되지 못하는가? 분파적 테러리스트들 때문이다! 등등.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전체주의적인 응시에 의해 인식된 인과율의 연쇄를 전도시켜야 한다. ‘유태인’은 사회적 적대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는 단지 사회가 하나의 완결되고 동질적인 전체로서 자신의 완전한 동일성은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장벽과 불가능성의 구현물일 뿐이다. 유태인은 사회적인 부정성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부정성이 실제의 현존을 떠맡는 지점이다.”(222쪽)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기면: “유태인은 사회적 부정성의 원인이 아니다. 유태인의 형상은 사회적 부정성 자체가 실정적인 것으로 전화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떤 주어진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 속에서 그것 자체의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요소를 탐사하는/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인 환상의 횡단’은 이런 식으로 ‘증상과의 동일시’와 상관적인 게 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사회적 환상으로 다루는데, 사회적 환상과 개인적 환상이라는 (불)가능한 구분을 도입하자면,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가족적/개인적 환상이기도 하다. 보다 일상적인 용어로 말해서, ‘환상’을 우리의 (구조적인) 실패에 대한 ‘핑계’가 되어주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의 기본문형은 “그것만 없(었)다면(if not only)” 혹은 거꾸로 “그것만 있(었)다면(if only)”이다. 쥘르 삼촌만 있다면, 가발만 있다면, 새끼줄만 있다면, 상징적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정이 바로 환상의 중핵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의 횡단이란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이 다만 허울이며 핑계라는 걸 인지/확인하는 것이다. 즉,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과 유태인은 모두 ‘환상’이며, 그 너머에 있는 건 ‘실재라는 사막’이고 ‘shit’이며, ‘개똥’이고 ‘nothing’이라는 걸. 거기에 있는 건 궁극적으로 죽음 충동뿐이라는 걸. ‘개똥-되기’에의 충동.

앞에서 나는 ‘나=나’로의 이행이 (불가능한) 기적이며, ‘나≠나’(투어적 존재론)가 그러한 기적에의 거부/회피라고 말했지만, 그때의 불가능한 기적은 불완전한 기적이기도 하다. 보다 온전한 기적의 내용은 ‘나=나’가 아닌 ‘나=0’라는 사실의 인지/확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걸 ‘기적의 횡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진정한 기적이란 “나는 나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기적이다(“주여,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걸 순차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기적은 두 번 일어나며, 두 번 일어나야만 한다. “나는 나다”라는 기적,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기적.



다시 반복하자면, 하름스의 <노파>에서 ‘기적을 행하는 자’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왜인가?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을 ‘기적을 행하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첫 번째 기적이라면, 그 ‘기적을 행하는 자’를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두 번째 기적이다.

흔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일컬으며 축복하지만, 그건 기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거야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지만, 그리스도는 신이며 최소한 신의 아들이 아닌가? 벼룩이 뜀뛰기를 잘 하는 게 기적이 아니듯이, ‘특별한 존재’가 기적(奇蹟)을 연출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기적은 다른 데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물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모든 걸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그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음’이다. 그걸 나는 ‘기적 없는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자’는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 투어로서의 삶을 ‘나=나’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지만, 그러한 도피의 이면은 ‘나=0’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가 되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승인함으로써이다. ‘주체의 공백/궁핍(destitution of subject)’이란 말이 뜻하는바, 진정한 주체의 자리란 텅 빈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걸 무위(無爲)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라고 한 가수는 노래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한, 내가 ‘당신’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비라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으며, 혁명의 시간도, 민주주의도 도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 혁명의 시간과 민주주의가 도래할 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우리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아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마지막 영화 <희생>(1986)은 전적으로 ‘기적 없는 기적’에 바쳐진 영화이다. 자신의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친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은퇴한 노배우 알렉산더가 생일을 맞이하여 꾸는 세계 종말의 꿈과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의 하루 낮 하루 밤”을 다루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따르면, ‘우리 세기(=지난 세기)의 마지막 우화’인 <희생>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 관한 영화다. 그는 3차 대전(=세계의 종말)에 맞서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켜내고자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종말 대신에)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 또 주어진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어제와 같이 밝은 햇살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자 그는 신에게 감사하며 가족들 몰래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는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간다.

사실 이 영화는 암투병중이었던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영화적 유언으로 만든 것이며, 자신의 아들과 인류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영화 속 알렉산더처럼 모든 걸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찍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의 기적은 알렉산더의 간구대로 다음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가족들에겐 일상적인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지만, 알렉산더는 그 하루에서 신의 은총과 기적을 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자신의 ‘말씀’, 즉 로고스 또한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만약에 당신이 이 ‘기적’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동시에 이 영화는 아주 코믹하다), 아직 당신의 삶은 기적이 아니라 투어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라건대, 당신 스스로가 ‘기적을 행하는 자’임을 믿을 것이며 세상은 너무도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을지어다. 아멘.

06. 05. 30.



P.S. 쿠스투리차의 <삶은 기적이다>에서는 시작 장면에서 “삶은 정말 기적이군!”이란 대사가 나온다. 우체부가 주인공 루카의 집 암탉이 닭장 둥지에 잔뜩 낳아놓은 달걀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내뱉는 대사이다. 전쟁과 난장 속에서도 (일상적)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 그것이 쿠스투리차가 보는 기적이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버전으로 말하자면, (지진과 같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렇듯, 기적은 활달하고 기적은 눈물나며, 기적은 충만하다. 눈물 흘리는 성상/성화나 불상/탱화를 찾아 다니는 이들만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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