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에 대하여(*이 코멘트는 1999년에 씌어진 것이고 2004년에 모스크바에서 약간 손질되었다). 드레피스/레비노우의 <성숙이란 무엇인가>(What is Maturity?)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석/해석을 놓고 벌어진 푸코와 하버마스 간의 논전을 잘 정리하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의 우리말 번역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불어본(<푸코와 하버마스>)을 번역한 것이고(<우리시대의 문학 6>), 다른 하나는 독어본을 번역한 것이다(<외국문학> 1995, 겨울). 그리고 나에겐 이 둘과 영어본이 있다.

 

 

 

 

이 중에서 불어본의 번역은 난삽하고 부정확하다. 문맥에 대한 역자의 정확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는데, 가령 “푸코에 의하면, 칸트는 현대적이긴 하지만 성숙하지는 않다”(On Foucault's reading Kant was modern but not mature.) 정도로 번역되는 문장을 역자는 “푸코의 칸트에 대한 독서를 알려 주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칸트는 근대적이기 위해 성숙성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로 옮기고 있다(불어가 더 어렵긴 한 모양이다). 근대적이기 ‘위해’ 성숙성에 이르지 않았다니?

그리고 글의 결론에 해당하는 “우리가 이 논문에서 옹호하고 발전시키려고 하는 논지는 인간 시대 혹은 성숙성이 적어도, 행동을 개별적 주체와 글쓰기의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이론들 위에나,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발언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 위에다 세우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논리,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의도들이, 현존하는 모든 부분들이 일치하여 그것에서 우리의 현재 상황 내에는 더 불안한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어떤 것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하는 논리이다.” 같은 부분은 오역을 넘어서 해독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른다(이런 ‘most troubling한’ 문장이 번역으로 통용되는 한, 한국의 인문학은 가망이 없다).

이 부분의 영어본은 이렇다. “The thesis of this paper is that maturity would consist in at least being willing to face the possibility that action cannot be grounded in universal, ahistorical theories of the individual subject and of writing, or in the conditions of community and speaking, and that, in fact, such attempts promote what all parties agree is most troubling in our current situation.”

비록 저자들이 확정적인 표현을 피하고는 있지만, 이 부분의 요지는 이렇게 옮겨질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주장하는바, 성숙성이란 우리의 행위가 더 이상 개별 주체와 글쓰기에 대한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이론들이나, 혹은 공동체와 화행(말하기)의 조건들에 토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기꺼이 대면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이론이나 조건을 도출해내려는 시도들이 부추기는바 모든 정파가 동의하는 일이야말로 사실상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가장 곤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의 성숙성은 비역사적인 보편적 이론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다. 오히려 곤란한 것,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보편적 합의’이다. 정파간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합의에 따라 한쪽에선 의원들의 세비도 올리고, 다른 쪽에선 이라크 침공도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때의 ‘보편적 합의’는 기만과 폭력에 대한 ‘보편적 정당화’이겠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저자들은 하버마스보다는 푸코의 편을 들고 있다. 이때 푸코가 말하는 성숙한 태도는 아이러니적인 태도이다. 

참고로 독어본의 번역. “이 논문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개별적인 주체나 글쓰기의 보편적이고 반역사적인 이론 속에서는, 또는 공동체의 조건이나 말하기의 조건 속에서는 행위의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최소한 성숙의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위에서 열거된 이론이나 조건들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들은 실제로 모든 철학적 당파들이 일치하고 있는 것을 촉진시킨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촉진시키는 것이 우리의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

불어본의 번역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편이나 만족스럽지는 않다(독어가 불어보다는 쉬운 것인가?). 요컨대, 저자들이 칸트-하버마스 계열의 성취와 한계(“현대적이긴 하나 성숙하지 않다”)를 지적하고 있는 맥락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줄 필요가 있다.

06. 06. 22.

 

 

 

 

P.S. '성숙함'에 관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은,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브뤼크네르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이다. 즉, 성숙이란 '순진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의 순진함이란 자신을 어린아이나 희생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말한다. 유치하거나 기만적인 태도 말이다. 물론 그 유치함/기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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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06-2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숙이란. '순직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 때의 순진함이란 자신을 어린아이나 희생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말한다.

뜨끔하네요. 생각해보면 저는 순진함의 유혹에 정말 잘 빠져드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들을 분리 시키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유치하거나 기만적인 태도도.. 참 어렵네요.

유치하거나 기만적인 태도가 어떤 태도인지 알고 있다면 좀더 쉬울텐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고, 또 알고 있다고해도 그런 태도를 취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다면 더 왜곡되어서 표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성숙... 이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아.. 성숙해지고 싶은데..

로쟈 2006-06-2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진함의 유혹>은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성숙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구요.^^
 

월드컵 관련 기사를 몇 개 옮겨온 김에 교수신문(06. 06. 21)에 게재된 김진석 교수의 문화비평도 옮겨온다. 타이틀이 '축구열풍이 그저 파시즘이라고?'이다.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 그의 주장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그 상식을 잊거나 헐거워한다. 필자의 시론집 제목을 반복하자면, 우리는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그런 상식이 좀더 강화되었으면 싶다.  

-다시 뜨거운 월드컵바람. 2002년과 달리 거리응원이 광장을 독점 계약한 기업과 미디어의 주도와 후원 아래 놓이고, 방송들은 과잉편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열풍만이 아니다. 4년 전에도 그랬지만 벌써 그 열풍을 다시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냉풍들도 윙윙거린다. 이 냉풍은 저 열풍과 맞물리면서, 이것이 뜨거워지면 더 차가워진다. 뜨거운 축구상업주의 바람이 드는 것도 짜증스럽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축구에 들뜨고 환호하는 풍경 자체를 파시즘의 광기로 낙인찍어야 하는가. 열풍의 지나침을 경계하면서도, 그것을 금방 파시즘의 광기라고 말하지 않는 태도도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뜨거운 바람 속에 서있으며 그 바람을 맞을 각오만 있다면.

 

 

 


-뜨거운 바람들이 폭력적 경향을 띠기 쉬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경향성 때문에 축구에 달아오르는 몸과 마음들에 파시즘의 낙인을 찍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예민하게 태도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알게 모르게 다수의 폭력적인 바람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며, 금방 거기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무망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열풍처럼 다소 폭력적인 현상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이 일어나는 구조적 정황을 고려하거나 인정한다면, 그것을 금방 파시즘적 광풍으로 몰고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월드컵 혹은 축구 바람이 민족주의나 상업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이 아니라 자본이 응원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국가적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모습에 병리학적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극단적인 행위들을 빌미로, 그것들과 닿아있는 모든 적극성과 능동성에 파시즘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 이 경우 ‘파시즘’이란 표현이야말로 과도하게 남용되는 것이며, 심지어 그 말의 그런 과도한 사용행태도 자칫하면 ‘거꾸로 파시즘적’일 수 있다(*이 파시즘 남용/남발에 나도 불편하다).

-‘파시즘’이란 말은 오늘날 수사학적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이 경우 그 말은 사회와 정치의 폭력적 불모성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표현하는 역할을 널리 수행한다. 반면 그 말은 과도하게 사용되고 남용될 때도 있다. 우선, 어떤 집단적 행위들이 폭력적으로 보이더라도, 다만 그 이유로 그것들을 모조리 파시즘의 광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정치적 차원에서 폭력의 원인과 결과, 배경과 맥락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먼저 유발한 더 폭력적인 원인이나 주체가 있다면, 우선 그것에 비판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폭력적 현상을 똑같이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일은 공허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주변의 강한 권력과 폭력의 자장 때문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내부의 폭력적인 증상들을 다룰 때도 세심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파시즘 개념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은 전혀 폭력에 손을 담그지 않고 있고 우매한 사람들만 스포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상정하는데, 이런 지적 계몽성은 편협하거나 공허하다.

-월드컵이 괴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대학도 지식폭력을 생산·소비하는 괴물 아닌가. 월드컵이 상업주의에 물들어있는 것을 마치 시민들이 모르는 것처럼 훈계하는 비평들도 많다. 환호하거나 감동하는 민중이 그저 바보일까. 함정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몸을 싣는 복잡한 행위가 존재한다. 그들은 칸막이된 지적 비평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폭력적 사회구조 안에 빡빡하게 끼인 채 그것을 살짝 타고 넘어야 하는 실존들이다.

-물론 국가와 자본의 이름으로 경기에 열광하는 집단행위에 광적인 도취가 불안하게 어른거리곤 한다. 그러나 거기서 꼭 국가와 자본의 큰바위얼굴만을 보아야 하나. 그것이야말로 그 얼굴들을 근엄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오늘 이 불안한 시대에도, 아니 어쩌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감동하고 몰입하고 때로는 싸우는 경기장을 원하는 듯하다. 국가와 자본, 특히 큰 것이 너무 불안하다고? 그럴수록 그것들의 이름을 빌려 그것들 사이에서 기쁘게 싸우고 대적하는 살풀이 마당이 있을 법하지 않은가.

06. 06. 22.

P.S. 참고로, 이 칼럼에 붙은 댓글 하나는 이렇다: "수십만명이 밤에 잠도 안자고 거리에 나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제스처를 하고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 이는 병적인 애국주의이다. 이 정도로 광분하는 나라는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한국인임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댓글의 제목은 '파시즘이 아니라 미친 또라이들'이다. 문제는 파시즘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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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06-06-23 03:58   좋아요 0 | URL
-_-;;; 댓글에 공감.. 읽기 꽤 불편하네요..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의 광기로 몰아세우는 것도 볼쌍사납지만 월드컵을 불쾌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높은 테라스에 앉아 혀를 끌끌차는 지식인들의 잘난척으로 획일화시켜서 보는 진석이님의 시선도 거북하네요. 진석이아저씨 또한 자신을 얍쌉하게 괄호치는건(난 엘리트의식에 빠지지 않은, 하지만 상업주의에 대책없이 빨려들어가는 대중도 아닌 양식있는 지식인이다.) 마찬가지인듯.

로쟈 2006-06-23 07:52   좋아요 0 | URL
축구 열광을 불쾌해/불편해하는 것과 그것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건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라는 포지션 자체가 '얍쌉한' 건 아니고 그걸 유지하기가 힘든 게 아닐까요? 어부님도 광화문에 나간 이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보십니까?..

어부 2006-06-24 00:36   좋아요 0 | URL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 라는 어조거든요.

어부 2006-06-24 00:40   좋아요 0 | URL
자신이 하는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근본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의식. 하지만 다른 비판적 발언들에 대해선 근본주의 어쩌구 판결 내릴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한는 것. 훨씬 근본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이들과 그들을 또 근본주의로 몰아붙이는 진석이님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겠다는 거죠.(근본주의는 남발해도 되는 말이지만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이고이 아껴서 순도측정 한 다음에 사용해야 되는 말이라고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_-)
비판적 입장에 대해.. 자신도 결국 똑같은 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떼쓰고 있는듯이 보이거든요.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에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괜한 심통..^^

2006-06-24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4 12:18   좋아요 0 | URL
어부님/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라고 하신 건 '댓글'에 대한 취사선택 아닐까요? 월드컵 열광에 불편/불쾌해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축구 열광을 파시즘으로 지목하거나 열광적인 응원자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가 차이가 있다고 보며, 김진석 교수의 견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라고 하셨는데, 월드컵 열광을 파시즘으로 규정짓는 태도를 그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인가요(그렇다면, 꼴보기 싫은 대상에는 '근본주의자들'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괜한 심통'이라고 하시면 할말은 없지만...

어부 2006-06-25 01:38   좋아요 0 | URL
전 댓글에 '동의'가 아닌 '공감'한다고 했는데요..-_-;;;

진석아저씨가 그들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모자를 씌우는 순간 그의 비난이 스스로를 향하게 된다는 것. 비난하려는 대상의 면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월드컵 열풍에 대해 불평하는 발언들과 그들을 몰아세우는 진석아저씨의 발언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닌데요..
진석아저씨의 시각과는 다르게 월드컵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소수의 발언일 뿐이며 여간 귀를 귀울이지 않고는 잘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라고 보여지는데.. 로쟈님 말씀대로 그들을 파시즘으로 보는 이들도 또 다르게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 다른 목소리들이고 귀 귀울여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열광을 파시즘적으로 보려는 이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라고 보구요. 그렇게 주장하게 된 맥락을 따져보고 비판하려면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보는것이 어떤 부분에서 부적절한지를 지적하면 그만입니다.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틀을 함부로 씌울만큼 진석아저씨가 그들의 주장을 빠짐없이 들어보았는지 의문이구요.
파시즘이란 고전적 모델에 대한 어떤 원형이 존재하는지 지식과 생각이 짧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오리지날리티를 가려내는 일이 과연 생산적 사유인지 모르겠군요. 지금의 우리들은 특정 체제를 파시즘으로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파시즘적 경향성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질문해 보는 것이 훨씬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이전에 잠깐 훓어보았던 권명아 선생의 '역사적 파시즘'에 이끌렸던것 같습니다.) 월드컵 현상에서 파시즘적 경향을 읽어내려는 시도들을 무작정 근본주의로 깎아내리는 것은 문제있어 보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을 진석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없는 의심만 생기네요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단일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경향들에 세포를 열어두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논점이 좀 멀리 간듯..-_-;;;;
마지막 사족은 제게 괜한 심통이라 하신다면 제쪽에서 할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엽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또한 제 서툰 발언을 가다듬게 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어서 감사하지만 거칠게나마 제가 말하고자 한 전체논점에 대한 생각도 말씀해주시면 더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로쟈 2006-06-26 13:12   좋아요 0 | URL
너무 덩치가 큰 문제들이 걸려 있는 듯한데,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부님은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에 대해서 의문시하며,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용어 사용이 취미나 취향의 문제와 연관될 경우에 의미의 전용은 문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공론장 같은) 대화적 소통 상황에서라면 가급적 정확하고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야겠죠.

'파시즘'이란 말이 사용된 고유한 역사적 문맥이 있고, 일차적인 의미는 거기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그런데, 파시즘이란 말이 포괄하는 여러 의미역 가운데, 한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춰서 '파시즘'이라고 '일반화'할 수도 있겠구요. 그러는 가운데, 의미의 전이, 수축/확장이 발생하는 것일 텐데, 제가 보기에 몇 년전부터 '남용'되는 듯한 '파시즘'은 본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이/전용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인바 거기서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 반복'을 지적해내는 게 아니라면 과잉일반화(오버)라고 생각합니다(대개 그러한 일반화는 대에충 게으름의 산물입니다. 당대적 현실에 대한 '적확한' 분석/설명에의 요구로부터 빠져나가는).

시각에 따라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도의 문제까지 집어넣으면 '50% 파시즘' '70% 파시즘' 등의 다양한 유형학까지 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생산적일지는 의문입니다.

수잔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미의 전이 혹은 어떤 단어의 은유적 사용은 시적인 특권일 수도 있지만 때론 위험한 만용이거나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축구에 대한 열광을 '파시즘적'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에이즈를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태도만큼이나 부정확하다고 봅니다. "나는 에이즈를 혐오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이즈는 우리 시대의 흑사병이야!"라고 말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지적조차도 어떤 우월적인 포지션을 전제로 한 오만한 태도이며 똑같이 '파시즘적'이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막을 도리는 없어 보이니까요...

 

 

 

 

 

어제부터 '공식적으론' 방학에 들어간지라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게 됐다(강의 없는 강사는 대략 백수이다. 즉, '니그로'이다. 아무리 할일이 많다고 저 혼자 우길지라도 말이다). 당장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피아노학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하는 일이 '아빠의 일'로 다 떨어진다. 그나마 유치원으로 데리러 가는 일도 딸아이와 사이가 좀 좋아졌기에 '허락'받은 일이다.

학원에서 데려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잠시 놀아주고 저녁 먹이고 양치질 하게 하고 공부하자고 꾜셔서 한글 두어 쪽과 수학 두어 쪽 문제풀게 하고(이런 공부도 딸아이는 '연극놀이'로 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친구나 동생 역을 맡아서 문제를 풀어달라고 졸라야 한다) 자리 펴주고 재우고 나니 9시 반이다.

아이는 자기 전에 꼭지점 댄스를 두번 연습했고(아이는 모레 상암경기장에 견학을 간다), 박지성이 골 넣는 장면에서 프랑스 선수가 뒤늦게 볼을 잡으려고 애쓰던 장면이 너무 웃겼다고 어제 새벽의 경기를 한번 더 되새기고는 잠이 들었다(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좀 늦게 퇴근한 엄마에게 꼭지점 댄스를 한번 더 보여주고 잤다). 아이는 어제 경기 후반전의 후반에 잠이 깨어 극적인 무승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유시간'이 됐길래 학회 발표문을 정리한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면서 이곳저곳의 뉴스들을 훔쳐보는데 딸아이의 블로그에도 한번 들어가보라는 핀잔이 들려온다. '무관심한 아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이미 듣고 있지만) '쑥쑥 자라는 종팔이!'(박찬욱 감독이 써먹은 거지만, 나도 그냥 '종팔이'라고 해둔다)에 들어가 새로 올려진 사진들을 훑어본다. 그리고는 그 중 한 장을 옮겨놓는다(두 손가락 포즈가 아이의 '공식' 포즈이다). '자상한 아빠'의 가장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기 위해서.  

아빠, 엄마의 '결점'들을 모두 타고난 탓에 (한)약을 달고 사는 편이지만, 아이는 잘 먹고 잘 자라주었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달력에다 스케줄을 잔뜩 적어놓으면서도 문득 딸아이를 위한 스케줄은 전혀 없다는 걸 얼마전 발견하고 반성한 적이 있는데, 이번 방학때는 얼마나 교정될 수 있을지(사실, 나는 내 스케줄도 다 소화를 못하고 있다. 무슨 '업적'을 남기는 이들은 대체 어떤 묘수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나인 '우리 동네'이다. 말은 '동네'이지만, 아이의 '우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동산과 교회와 가게와 만화가게는 피아노 학원이 있는 건물 하나에 다 들어 있지만, 아이는 모두 독립시켜서 따로 그려놓았다. '우리동네'인 아파트는 15층 건물이지만, 아마도 정서적인 축약을 거쳐서 2층짜리가 된 듯하다.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건 그런 정도이다. 아이의 마음을 읽기 위한 투자를 좀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어떤 아빠로 기억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 스무 살 남짓 되던 나이에 나는 인생의 목표가 한 여자에게 존경받는 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염두해둔 '한 여자'는 '딸아이'였다. 적어도 딸아이에게만은 존경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심사였고 그럴 경우 구제받을 만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게 계산이었다. 한데, 이후에 여러 '딸들'에게서 확인한 바이지만, 그 '존경'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노력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반복적인 일상이다. 그리고 물론 가끔씩의 이벤트이다!

 

다 뒤져보니 지난 겨울에 롯데월드에 데리고 갔던 게 마지막 '이벤트'였다(장시간 걷고 기다리고 하느라고 아이는 녹초가 됐고 결국 저녁을 먹으러 들른 분식집에서 오후에 먹은 걸 다 토해냈다. 덕분에 나는 롯데월드에 다시는 안 가도 될 '명분'을 쌓았다!). 아이의 생일이 여름방학때인지라 이번엔 뭔가 또 '계획'을 세워야 한다(작년 여름을 조용히 보낸 탓에 더더욱). 이 또한 한참 머리를 굴릴 일이다.

흔히,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생각해 보면, 아빠의 일, 곧 부업(父業)도 마찬가지이다. 그걸 '아르바이트'로 대충 때우려고 하면 금방 들통난다. 대개 아이들은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들이 능숙하게 꼭지점 댄스를 추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지 않은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어떨 때는 이 아이가 혹 아빠의 인생이 구제할 만한 것인가를 탐색하러 온 '스파이'가 아닌가란 생각도 한다. 그 정도면 나는 이미 '세상의 음모'를 모두 간파한 수준이다. 그래서 오늘도 딸아이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몰래 이 페이퍼를 쓴다. 내일 아침에는 고구마 맛탕을 해줄 것이다(아빠식 맛탕이다). 이틀 정도는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아니면 반나절? 안되겠다, 좀더 연구해봐야겠다...

06.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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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2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재밌다가 끝났네요...;; 로쟈님 글을 이렇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니. ^^

Joule 2006-06-20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뻐요. 지적인 미모네요. 아빠와 딸,이라고 해서 저는 마이클 두 독 드 빗 감독의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어 들어왔다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는군요.

twoshot 2006-06-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뛰어난 미모+근사한 그림+꼭지점 댄스를 더해보면 '결점'만 닮은 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로쟈님의 독자에게는 '고구마 맛탕(?!)'같은 페이퍼였습니다.:)

LAYLA 2006-06-21 0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인 미모라는 쥴님의 표현에 왕동감입니다

로쟈 2006-06-21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도 물정을 다 알아서 귀엽다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칭찬해주신 분들께는 아이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아이는 자고 있어서). 참고로, 종팔이는 저를 별로 안 닮았고 저보다 그림을 잘 그리며, 저보다 춤도 잘 춥니다(이건 비교 자체가 안되지만). 대신에 아직 저만큼 책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조선인 2006-06-21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딸에게 존경받는 건 쉬워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거, 그건 정말 정말 어렵다는 거 강조해 드립니다. =3=3=3

로쟈 2006-06-2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제 목표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겁니다. 한데, '다 큰 딸'은 이해심이 많아지지 않나요? '어린 딸들'은 변덕이 심해서, '존경'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릴케 현상 2006-06-2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을 듯 웃지 않는 아이의 표정이 아주 예술이군요^^=3=3=3

바벨의도서관 2006-06-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이렇게나 이쁘다니요... 저도 그런 딸 있으면 좋겠습니다^^부럽습니다...

biosculp 2006-06-2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애들 환심(아부) 사기위해서 엄마들이 질색하는 일에 맞장구를 치는데요.
가끔 피시방 데리고가 메이플이나 스타시켜주기, 드래곤볼 만화 전질 사주기, 유희왕 카드 사주기. 길거리 음식(불량식품이라고 못먹게 하는것) 사주기 뭐 이정도랄까요.
저는 아들들인데 딸들보면 이쁜 수첩에 스티커 붙이기 이런거 좋아하더군요. 그리고 어린이 보기에 유치찬란한 색이들어있는 장식품등. 저녁에 시간나시면 앞 문방구에 가서 유치찬란한 스티커만 같이 보고 사주셔도 환심정도는 얻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애들 눈높이에서

nada 2006-06-2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인상적인 사건 한두 개라도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이해하는 거 같아요. 핏줄이란 징글징글하지만 그런 미덕이 있죠. 자잘한 건 좀 미흡해 보이십니다만 큰 거 한두 방으로 때우세요.ㅋ 그나저나 저 시도 때도 없는 V자는..ㅋㅋ 전형적인 성배형 V자가 아니어서 좀 다행이긴 합니다만.. 깜찍한 얼굴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포즈를 좀더 개발해 주시어요~~~

로쟈 2006-06-2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언들 감사합니다. 스티커북들은 저도 사줍니다(기본이죠!).^^ 큰 거 한두 방이 글쎄, '자기방'을 만들어주고, '피아노' 사주고 하는 것들이라(--;), V자형 포즈는 유전형인지 다른 포즈는 어색해하더군요.^^

로드무비 2006-06-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리바이라기보다는 자랑 페이퍼 같은데요.
딸에 대한 애정을 감출 수 없는.
너무 이쁩니다.^^

로쟈 2006-06-2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입니다. "어쩌자고 세상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라는 난감함...

Joule 2006-06-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그 싯귀가 있는 시집 제목이 뭔가요.

SMOKE 2006-06-2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쁘군요.

에바 2006-06-2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반갑습니다. 이 서재를 거의 매일 찾고 있는데 배울 게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니 너무 진부한 인사말입니다. 그리고 따님 사진을 자주 보다 보니 꼭 제 딸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로쟈 2006-06-2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입니다.
껄껄선생님, 에바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는 딸아이가 더 인기가 있는 듯하네요(^^;)...

기인 2006-06-2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로쟈님 이쁜 따님 처음 뵙겠습니다 :) 저는 또 오타 말씀드리고 갑니다. ^^;;;
따님 사진 바로 아래 아래 문단.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니인'
요즘 친구들도 '달려라 하니'를 알까요. 생각해보니, 로쟈님도 모를수도;;;
(달려라) 하니가 아닌 '하나'로 추측됩니다. 저도 이쁜 딸-스파이 ^^ 한 분과 함께 할 날이 오기를... :)

로쟈 2006-06-2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밝으시군요.^^ 스파이 한 분 모시고 사는 게 공부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참고하시길...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의 국내 개봉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한겨레(06. 60. 20) 정한석 기사의 전갈이다. 

-영화 <시간>의 개봉이 확정됐다. 영화사 스폰지는 오는 8월10일경 김기덕 감독의 <시간>을 개봉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간>은 이미 올 4월경 완성됐지만 개봉 일정은 불투명했다. <빈 집>과 <활>의 연이은 국내 흥행 저조로 실망한 김기덕 감독이 국내 배급을 완전히 포기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일부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김 감독이 무조건 국내 배급을 거부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건만 맞으면 국내 배급사가 판권을 구매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네 들었고, 5월 중순경 만나 합의했다. 최종적으로 감독이 제기한 몇 가지 조건을 수용하면서 개봉이 결정됐다. 극장을 운영하는 입장으로서 적절한 한국영화 콘텐츠를 확보해야 하는 우리쪽 입장과도 맞아떨어졌다”고 밝혔다.

-스폰지와 김기덕 감독이 <시간>에 관해 합의한 내용은 국내의 모든 영상물 판권을 스폰지가 소유하되, 판권 보유기간이라도 비상업적인 상영을 위해서는 적극 협조하고, 향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판권을 다시 양도하는 방식이다. 그 밖에도 본인을 내세운 무리한 마케팅 자제도 김 감독쪽이 영화사에 내건 조건의 일부였다.

-조성규 대표는 “김기덕 영화에 적합한 제작방식이 있듯이, 그에 맞는 배급방식도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한국에서도 성공적으로 상영될 수 있다는 모델을 제시하고 싶다. 광고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소규모 상영하는 쪽으로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성현아, 하정우가 출연하고, 오래된 연인인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성형수술을 시도한다는 내용의 <시간>은 스폰지가 운영하는 압구정과 종로의 스폰지하우스 두곳을 포함해 대략 10개에서 15개 정도의 개봉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모처럼 듣기 좋은 소식에 <시간>에 관한 자료들을 몇 개 훑어보았다(<시간>은 지난달말 씨네21 등의 주최로 국내 최초 시사회가 열렸었다. 이에 대해서는 <씨네21> no.556 참조. 영화에 대해서는 개봉 후에 다루기로 한다). 그러다가 읽은 김기덕 관련 기사.  

한겨레21(04. 10. 21)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김기덕 감독이 만드는 달력이 담아내는 계절의 색깔은 어떠할까. 부산영화제에 참석 중인 김기덕 감독은 지난 10월8일 러시아 푸친 대통령에게 증정될 VIP용 달력에 담길 사진 연출을 러시아의 유력인사로부터 제안받았다고 밝혔다. 스틸 사진을 세 가지 테마로 찍는 방식으로 진행될 작업은 할리우드 프로듀서와 러시아의 사진작가가 동참할 예정이다. 작업방식은 김기덕 감독의 연출대로 러시아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사진작가가 지시에 따르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김 감독은 “테마 중 하나인 ‘풍경’ 편은 한국의 풍광을 담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달력의 배경에 담길 로케이션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공간이었던 청송 주산리와 송정, 인사동, 한강 등지가 물망에 오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촬영될 ‘풍경’ 편에는 러시아 모델이 참여할 예정이기도 하다. 김 감독에게 이러한 제안이 온 경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비롯한 러시아에 개봉된 그의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영화에서 김 감독은 에곤 쉴레의 회화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미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구도를 보여주곤 했다. 김 감독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곧바로 달력 사진을 위한 촬영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작년 1월 모스크바를 떠나올 때 마지막으로 읽었던 현지 기사가 바로 이 사진 작업에 관한 것이었는데, 당시엔 김기덕이 러시아 모델과 일종의 '광고' 사진을 찍는 줄 알았다(푸틴을 위한 달력?). 여하튼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Korea with Kim-Ki-Duk'이다. '김기덕과 함께 보는 한국'은 그걸 옮긴 제목이다. 기획 자체는 '관광엽서'이지만, 결과는 그렇게 친숙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풍광에 이국적인 러시아 여인이 들어오게 되면 얼마나 '언캐니'해지는가를, 얼마나 섬뜩해지는가를 몇몇 사진들은 보여준다.

지난번에 김기덕 영화 관련 이미지들을 찾다가 이 사진들을 보고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적이 있는데(한번쯤 경험해 보시길!), 한편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김기덕 영화는 언캐니(uncanny)에 관한 영화가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러시아의 거의 유일한 '한류', 혹은 한국문화 컬트로서의 김기덕이 보여주는 건 혹 '한국 안의 러시아'가 아닐까 싶은 것. 그게 그의 언캐니인가?    

K0001

K0002

K0012

김기덕 감독과 러시아 스탭들(전국을 돌며 2주간 작업했다고).

 

전시회에서 자신의 사진 앞에 선 러시아 모델 아나스타시야 포타니나(전시회는 2005년 1월말에 열렸다).

전시회장에서 즐거워하는 표정의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06.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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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2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거 달력으로 걸어 놓으면 집안 분위기 단번에 "uncanny"해지겠네요.

로쟈 2006-06-2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보면 더 섬뜩합니다!^^

parioli 2006-06-2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겨울 일산에 살 때, 성현아 비슷한 사람이 영화를 찍길래 물었더니, 성현아가 맞고 김기덕 영화라고 했는데, 그건가 봐요.
알라딘 사람들 모여서 같이 보는 건 어떨까요? ㅎㅎ

로쟈 2006-06-21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알라딘영화관이 생기거나 알라디너 무료 시사회라도 마련된다면 가능할지도...
 

미국의 저명한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위험한 열정 질투>(추수밭, 2006)에 대한 한겨레(06.06. 16)의 리뷰를 옮겨온다. 이유는 질투 때문이 아니라 기말시험 채점 중에 잠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기자는 일단 '질투는 진화의 힘'이라는 멋들어진 제목을 뽑았고, 마지막엔 이 책이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청림출판, 2003)의 재출간본이라는 점을 명시해줌으로써 점수를 땄다(출판사의 상호가 변경된 듯하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에 관해 이전에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조명해보는 이유이다(이 정도의 초보적인 진화심리학은 이젠 상식이 될 만하다).

 

 

 

 

-“어서 털어놔. 그 사람이랑 잤지?” “당장 고백하지 않으면 당신을 칼로 찌르고 말거야!” 남편에게서 살기를 느낀 아내는 공포에 질린 채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제 절 놓아줘요.” 순간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분노에 질린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잡고 탁자에 내리친 것이다.

-에밀 졸라의 소설 <수인>에서 주인공 루팽이 아내를 다그치는 이 장면은 불행히도 소설로 그치지 않는다. 매일같이 어디선가 질투 때문에 권총이 발사된다. 또 어디선가는 질투 때문에 휴대폰이 날아다니고 또 한편에선 질투 때문에 울부짖는다. 배우자의 외도를 목격하거나 파트너가 자기 곁을 떠나버릴 때 질투라는 감정은 격렬하게 경고음을 울린다. 밑바닥엔 “내가 널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널 가져선 안돼”라는 위험한 열정이 도사리고 있다. 극단적으로 흘러 ‘살해 환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한두 번쯤 겪었을 이 음습한 열정,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악마적 본성은 대체 뭔가.

-“질투란 계속 생존하고 생식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감정이다. 질투하지 않는 사람은 질투심 많은 경쟁자에게 밀려 진화에서 도태되었다.” 질투라는 파괴적 본능을 건설적으로 본 사람은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 그는 여자친구가 없던 젊은 시절, “내 여자친구의 몸은 완전히 그의 것이고 자기가 원하는 누구와도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으며, 질투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미성숙한 감정일 뿐”이라고 ‘쿨하게’ 생각했지만 사랑에 빠지자마자 태도가 180도로 돌변해 잠자고 있던 심리의 저변을 인식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진화심리학을 탄생시킨 배경이다.

 

 

 

 

-인간의 짝짓기 전략을 탐구한 저서 <욕망의 진화>(백년도서, 1995)를 더 구체화한 <위험한 열정 질투>(추수밭 펴냄)는 자기 짝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욕망과 외도 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설계된 ‘질투’라는 안전판을 주목한 책이다(*<욕망의 진화>도 재출간되는 게 좋지 않을까? 책을 읽어본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사랑하는 만큼 질투하지만 질투만큼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감정도 없다. 질투는 상처와 위협, 상심, 당혹, 배신감, 거부당함, 화남, 소유욕, 혼란, 좌절, 우울, 분개 등을 동반한다. 그렇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주요한 애정관계에 위협이 왔음을 알리는 적응적 신호이다. 예컨대, 위협적인 언사와 매서운 눈초리로 경쟁자를 몰아내고, 배우자에게 애정 공세를 퍼부어 한눈을 팔지 못하게 만들고,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를 배우자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알리는 구체적 행동을 유발시켜 사랑을 붙잡아두도록 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면 질투는 사랑을 지키는 ‘방어 메커니즘’인 셈이다.

-반면, 외도는 진화적으로 가치 있는 자원의 일부가 다른 데로 새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은 자기 짝이 낳은 자식이 실제로 자기 자식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여성은 자신의 짝이 다른 여성과 그 자식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원’을 몽땅 갖다 바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늘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음 문제는 진화과정에서 생긴 남녀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① 그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깊이 교류하고 있다, ② 단지 다른 사람과 성욕만 나누는 사이다, 어느 쪽이 화나고 충격적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은 감정적 배신에, 남성은 성적 배신에 더 괴로워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배우자의 질투심에 맞선 남녀는 숨바꼭질하듯 ‘나선형 공동진화’를 해왔다. 낯선 냄새나 수상한 외출 따위의 낌새를 느끼면 배신행위의 비언어적 신호를 해독하는 심리적 안테나가 극도로 민감해진다. 동시에 감쪽같이 속여 넘길 상대의 기술도 연마된다. 또 짝시장에서 ‘남성은 자원, 여성은 외모’를 갖춘 선호도가 높은 경쟁자가 나타날수록 ‘질투 방어체계’가 크게 작용하도록 진화했다.

-거꾸로 배우자를 지키려는 질투와 모순되는, 다른 사람을 욕망하는 위험한 열정은 왜 품는가. 지위, 명예, 결혼, 심지어 신변의 안전까지도 송두리째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한 여성의 말이 흥미롭다. “남자들은 수프와 같은 거죠. 늘 여분의 한 냄비를 불 위에 올려두어야 하거든요.” 저자는 여성의 외도를 질병과 전쟁 등 짝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한 ‘짝보험’을 들려는 습성으로 설명한다.

-여성 생식기에서 발견된 또다른 진화론적 증거를 보자. 돌돌 말린 이상한 모양의 정자, 수영속도가 형편없는 일명 ‘가미가제’는 두 남자의 정자가 동시에 한 여성의 몸 속에 서로 섞여 있을 경우 근원이 다른 정자를 감싸 안고 함께 죽어버린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려는 오랜 경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전투 담당 특수정자가 등장했을 리 만무하다. 일부일처 이전, 생래적으로 폴리아모리(다자간 사랑)였음을 추정케 한다는 풀이다.

질투 숨기되 질투 유발시켜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책의 마지막장은 사랑으로 이끄는 대처법에 할애한다. 첫째, 질투를 숨겨라. 질투 경험이 있는 사람의 50%는 의도적으로 질투를 감춘다. 상대적 매력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질투를 유발시켜라. 다른 이성에게 시시덕거리며 미소를 짓는 건 “제가 곁에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지 말아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셋째, 경쟁자를 폄훼하라. 이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깊이 사랑하지만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고,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한다.” 질투의 늪에 빠진 오셀로가 남긴 이 말은 ‘오셀로 증후군’을 앓고 있는 모든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올바로 사용될 경우 질투는 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열정에 불을 붙이며 헌신을 강화한다. 질투가 전혀 없다면 연인에게 그만큼 불길한 신호도 없다”고 말한다. 2003년에 나온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를 재출간했다. 37개 문화권에서 무려 1만여명을 사례 조사했다. 구구절절한 사랑의 열정과 파멸이 소설책보다 극적이다.

 

06.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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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17 16:40   좋아요 0 | URL
ㅎㅎ 퍼가고 싶지만, 애인이 볼까봐서 -_-; 안 퍼갑니다. 진화생물학은 흥미롭지만, 인문학도로서는 일정부분 이상은 땡기지(?)가 안습니다. 뭔가, 생물학적 환원론 같기도 하고. '통섭'같은 문제도 과연 가능할까 의문이네요. 하지만, 역시 재미는 있습니다 ^^;

로쟈 2006-06-18 08:33   좋아요 0 | URL
진화생물학의 관심은 "일정 부분 이상은 땡기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애인이 볼까봐서 안 퍼갑니다"인 것이죠.^^

호박 2006-06-18 05:45   좋아요 0 | URL
몰래 읽고 애인을 관찰해보는 재미도... 풋.

evopsy 2006-06-29 05:56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2003년에 나온 [욕망의 진화] 개정판이 곧 재출간될 것 같은데요...^^

로쟈 2006-06-29 07:46   좋아요 0 | URL
좋은 소식이군요. 제가 다시 살 필요는 없었으면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