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프린트해놓은 대담을 잠시 짬을 내어 읽었다. 씨네21(06. 05. 24)에 게재됐던 '우리 시대 대표적 시네필-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을 만나다'가 그 대담이다. 영화평론가 홍성남씨가 대담자로 나섰는데, 지난 전주영화제 참석차 이 '걸출한' 평론가가 내한했다는 소식은 '필름2.0'에서 이미 읽었었다('필름2.0'에도 짧은 대담이 실렸다). 시네필도 평론가도 아닌 나로선 '로젠봄'이란 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 고전적인 영화들에 '명불허전'이란 말이 전해져오듯이 '영화평론가'의 명성이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대담을 읽으며 알게 됐다. 해서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로젠봄에 대한 '소개'격의 서두는 제쳐놓고 막바로 대담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고다르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앙드레 바쟁”이라고 할 만한 동시대 비평계의 거목이 전주영화제 ‘인디비전’ 부문 심사위원 자격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고다르의 말은 로젠봄이 '우리 시대 최고의 비평가'란 뜻이다). 하지만 굳이 심사대상작이 아니더라도 매시간 영화를 보러 다니느라 인터뷰 시간을 좀체 잡기 힘들었던, 그래서 그 성실함을 눈으로 확인케 해주었던,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시네필-평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로젠봄으로부터 영화비평과 영화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시네필'이란 말을 굳이 덧붙이는 것은 그만큼 그가 많은 영화들을 본다는 뜻이겠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 ‘인디비전’ 심사위원 자격으로 전주를 방문했는데, 이번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들에 관심이 갔는가? 그리고 어떤 경향을 발견한 것이 있다면.

조너선 로젠봄: 전주에 온 것도, 한국에 온 것도 처음이라 이번 영화제의 전반적 경향을 말하는 건 어렵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았던 영화는 경쟁 외 부문에 있었다. 리트윅 가탁의 영화 2편 <구름에 가린 별> <사랑스러운 간다르>와 <미친 한 페이지> <원웨이 부기우기/27년 후>가 좋았다. 경쟁작들 중에서는 <방랑자> <아름다운 천연> 두편이 가장 좋았다. <가족> <뮤추얼 어프리시에이션>도 좋게 봤다. 개막작인 <오프사이드>도 포함시켜야겠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보이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번 경쟁작 일부에도 반영됐는데, 한 영화에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돼 있다는 것이다. 아주 모호한 방식으로.

홍성남: 어느 글에서인가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10대에 봤고 그때는 오해를 했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처럼 어려서부터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영화를 접했던 것 같은데.

 

 

 

 

조너선 로젠봄: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는 1961년 내가 18살쯤이었을 때 인권에 대한 급진적 캠프에 참가했다가 보게 됐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영화가 싫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평가를 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외의 영화들은 할아버지의 극장에서 봤다. 소규모 극장체인을 하시던 분이어서 공짜로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할아버지가 극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한 유력한 조건이다!).

-칼 드레이어 영화 같은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60년대는 학문적으로 영화 연구(Cinema Studies)라고 불리는 개념이 아직 없던 시기였다(*영화학의 역사란 그토록 짧다). 미국에서 영화에 대해 공부하려면 도서관에 가야만 했다. 그나마도 책이 4∼5권뿐이었고 좋은 책들도 아니었다. 비디오나 DVD도 없었기 때문에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극장이 유일했다. 뉴욕과 파리는 경우가 좀 달라서 영화를 구해서 보는 일이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나 역시 60년대 대부분을 뉴욕에서 살다가 60년대 말에 파리로 이사했다.

홍성남: 에세이스트이자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필립 로페이트는 60년대 시네필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 보기의 영웅적 시기(heroic age)”라는 표현을 썼다. 그때를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역사적인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가진 영화문화의 공과를 다 알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은가.

조너선 로젠봄: 내 세대 사람들은 60년대를 황금기로 보고 오늘날에는 영화가 죽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에 반대한다. 60년대가 굉장히 활기찬 시대이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칭찬하는 60년대 영화들은 당시엔 호응을 얻지 못했다. 고다르의 가장 중요한 영화들이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졌고,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도 늘 논쟁의 대상이 됐고 그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당시보다 요즘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점은, 그때 같은 스노비즘이 지금엔 없다는 점이다.

-요즘은 영화의 역사를 알기 위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세계 어디서든 영화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오히려 영화가 너무 많아 무엇을 선택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더 많은 지도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도 영화를 분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 자신도 영화를 분류하고 목록을 만드는 데 대한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오늘날엔 영화문화가 어떤 중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decentralized) 6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니 파버, 피터 보그다노비치, 조나스 메카스, 스탠 브래키지, 폴린 케일 같은 사람들이 <필름 컬처>라는 잡지 하나에 다 글을 썼다. 요즘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말이다.(웃음)(*로젠봄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건 정말로 불행한 일이다.)    

-오늘날 생긴 또 한 가지 문제는 저널리즘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이들과 아카데믹한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이들이 서로의 글을 충분히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도 스노비즘이 존재하긴 한다. 여하튼 실제로는 아카데믹하게 영화를 접근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기보다 그저 지위만 갖고 있는 것이다.

홍성남: 당신은 ‘영화연구’가 태동하고 발전하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당신은 그 현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와 관련해 예를 들어보자면, <필름 코멘트>에 글을 쓰는 유능한 영화평론가인 켄트 존스는 원래 영화를 만들려다가 영화연구쪽으로 분야를 옮겼는데, 그 연구란 것이 프랑스 인문학을 영화에 ‘잔혹하게’ 적용하는 데 질려서 그만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조너선 로젠봄: 영화연구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쪽에서는 자신들을 저널리즘과 차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차이를 두려고 심각한 척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저널리즘이 (영화역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름에도)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영화연구가 (영화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막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건 미국에서는 예술보다 사회과학에 더 치중하는 경향, 심지어 예술을 불신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너무 비판적으로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내가 영화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내 일자리를 지키고 내 미래를 확보하는 데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1년 이상 자리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시카고 리더>에 글을 쓸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무직자였을지도 모른다(*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해서는 운도 따라야 한다).

홍성남: <시카고 리더>에 매주 글을 쓰는 걸로 아는데, 글을 쓸 영화를 고르는 어떤 기준이 있는가.

조너선 로젠봄: 내 관심을 끄는 영화, 영화를 보고 할 말이 있을 영화, 다른 비평가들은 안 할 것 같은 말이 있을, 그런 영화를 선택한다. 시카고에서 상영될 영화들을 많이 쓴다.  

홍성남: 당신의 글이 아주 평범한 저널리스틱한 비평과는 다르긴 해도 여하튼 저널리즘 비평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 영화산업이나 신문·잡지 편집자들은 저널리즘 비평을 영화 마케팅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동조하는 면도 있지만 나는 저널리즘 비평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영화에 관한 논쟁을 촉진시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홍성남: 당신의 글들에서는 (영화)형식에 대한 민감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형식을 거론하는 당신의 방식은 영화연구쪽에서 형식을 고려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디서 그와 관한 통찰을 얻는가.  

조너선 로젠봄: 노엘 버치의 책 <영화 실천의 이론>(Theory of Film Practic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이미 오래전부터 영화학도들의 필독서인 버치의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도 영화학계의 직무유기이다). 그리고 내가 본 많은 영화들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알렝 레네 같은 이들의 영화 말이다. 이런 영화감독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형식 면에서 접근해야지 단순히 내러티브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들도 내게 영향을 끼쳤다. 파리에서 5년간 살았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에서 쓰여진 평론들은 형식과 스타일에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홍성남: 프랑스에서 있었다고 했는데, 그때에 자크 타티와 작업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프랑스에서 살았다는 것이 지금의 일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조너선 로젠봄: 자크 타티와 일한 것 말고도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몽상가의 나흘 밤>)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도 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생활이 준 무엇보다 큰 영향은 쾌락주의(hedonism)- 예술에서의 쾌락을 포함한- 라고 생각한다. 매우 쉽게 훌륭한 영화들을 볼 수 있었고, 사는 곳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극장이 엄청나게 많았다.(*이 또한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집주변에 극장이 많아야 한다는 것. 파리처럼.)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영화를 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홍성남: 당신은 지금 시대의 대표적인 시네필-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국내에서는 평론가 정성일 정도를 '시네필-평론가'로 꼽을 수 있겠다. 조건은 영화를 절대적으로 많이 보고 많이 써야 한다는 것.)

조너선 로젠봄: 만약 당신이 시네필이 아닌 그냥 평론가라면 사회학이나 마케팅에 대해 글을 쓰지 예술형식에 대해 쓰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것이 회화나 문학평론가들에게는 그림이나 문학을 좋아하는지 않는지를 묻지 않는데 유독 영화평론가에 대해서는 영화를 좋아하느냐 아니냐를 문제삼는다. 영화를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홍성남: 당신이 하는 작업 중 놀라운 점 하나는 다른 영미권 평자들이 전혀 다루지 않고 다루기도 힘든 영화감독들, 예컨대 마스무라 야스조나 라울 루이즈 같은 이들의 영화들을 힘들게 찾아서 보고 연구해왔다는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 마스무라의 영화는 30년 전에 파리에서 처음 보았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졌고, 접근하기 힘든 그의 영화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또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내게 일종의 목표가 되었다. 이후 여러 통로를 통해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았는데, 일례로는 일본에서 후원금을 받아 2주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한 여자 대학원생이 장면마다 시놉시스를 알려준 덕에 자막 없이도 영화를 이해하며 볼 수 있었다.(*국내에선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이 작년 11월에 개최된 바 있다. 마스무라의 재발견에 로젠봄이 큰 기여를 했다는 얘기.)

-라울 루이즈의 작품은 로테르담영화제를 포함한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할 때마다 찾아서 봤다. 영어자막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힘든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은 내게 더 큰 추진력이 된다. 마스무라가 최근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기뻤다.

홍성남: 남들이 잘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평가할 수도 없는 영화들을 보고 알리는 것이 평론가의 책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단순히 보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봐서 흥분되고 재미를 느낄 만한 영화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영화가 단지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의 가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발견되는데, 나는 거기엔 반대하는 입장이다.

 

 

 

 

홍성남: 앞에서 거론했던 마스무라나 루이즈처럼 혹은 ‘현재의’ 알랭 레네처럼, 어떠한 이유로든 남들이 비평적 영토에서 배척한 영화감독들에 대해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다. 당신이 (재)조명하는 미국 감독들, 예컨대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앤서니 만, 니콜라스 레이, 오토 프레밍거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공통점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들은 모두 당대에 어떤 ‘오해’를 받았던 감독들이지 않나.

조너선 로젠봄: 맞는 지적이다. 오슨 웰스도 그 리스트에 포함된다.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준비 중이다. 그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 비평가로서 내가 가진 임무가 아닌가 한다.

홍성남: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나와 있는 걸로 아는데, 그것들과는 다른 입장의 책일 것 같다.

조너선 로젠봄: 내가 과거에 웰스에 대해 쓴 글들의 모음집이면서 새로 쓴 글들도 들어 있다. 새 글들은 웰스에 대한 잘못된 자료와 오해를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웰스가 영화산업 내에서 일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영화산업 밖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매우 많다. 나는 많은 자료조사를 했고, 피터 보그다노비치 같은 이와도 인터뷰를 했고, 게리 그레이버(웰스의 생애 후반기에 촬영감독으로 웰스의 가까운 협력자 역할을 한 사람으로 현재 오슨 웰스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내 자신이 마치 이들이 오슨 웰스에 대해 느낀 점들과 알고 있는 점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종의 중간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잘 팔리고 유명한 책일수록 잘못된 정보가 많다는 것이다. 웰스에 대한 데이비드 톰슨의 책(<로즈버드: 오슨 웰스 이야기>)은 페이지마다 틀린 정보가 수두룩하다(*톰슨이 엮은 책으론 <비열한 거리>가 번역돼 있다).

홍성남: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조너선 로젠봄: 틀린 정보를 전할 뿐 아니라 편견도 심해서 문제다. 전쟁사가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지듯, 영화사도 감독 입장이 아닌 스튜디오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심지어 찰스 하이엄같이 훌륭한 학자의 저서(<오슨 웰스: 한 미국인 천재의 흥망>)도 스튜디오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편견으로 가득하다. <로즈버드…> 같은 경우 웰스는 자기 중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써내려간 책이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변호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톰슨의 책엔 자신이 조사해서 쓴 게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을 다시 한번 글로 써서 남긴 것뿐이다. 예를 들면 웰스는 부유한 혁명가들만 좋아한다고 했는데 절대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웰스의 주변에는 가난한 빈털터리 혁명가 친구들이 많았다. 내 책의 제목은 <오슨 웰스의 발견>(Discovery of Orson Welles)인데, 이미 완결된 상태이고 출간은 내년쯤에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은 흔히 웰스가 이런 사람이라고 확실한 결말을 짓고 싶어하는데, 찰스 디킨스 전집을 갖고 있으면 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웰스를 완벽하게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세계란 퍼즐과 같다. 그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발견의 과정이고, 우리는 소실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이 대담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상식적인 주장이지만, 상식이 언제나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홍성남: 웰스의 <오셀로>에 대해 당신이 쓴 글을 본 적 있다. 왜 미국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에 대한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조너선 로젠봄: 데이비드 톰슨의 저서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웰스를 ‘실패한 할리우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성공한 독립영화감독’이라고 보고 싶다. 몇번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이용할 기회가 있었던 성공한 독립영화감독으로서 말이다. <오셀로>는 <시민 케인>에 비견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고, 촬영방법과 예산을 모은 방법 등에서는 <시민 케인>보다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이 영화는 제작비 문제로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여러 장소를 전전하며 찍은 것으로 유명한데 웰스는 그같은 시공간적 ‘간극’들을 훌륭하게 메워낸 완성본을 만들어냈다). 이를 실패한 할리우드영화로만 보면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홍성남: 웰스가 할리우드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당신이 지적하는 것은, 허우샤오시엔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현재 미국의 극장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조너선 로젠봄: 미국 관객은 어떤 영화가 되었든지 간에 여러 유형의 영화들을 꽤 잘 받아들이는 편이다. 단지 앞에서 이야기한 감독들이 선보일 기회, 노출될 기회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미국 관객에겐 <오셀로> 같은 작품이나 허우샤오시엔, 키아로스타미 같은 감독들을 접할 기회가 없을 뿐이지 그들이 그런 감독의 영화를 특별히 거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알고 또 그들의 영화를 봐야 거부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않겠는가. 정보가 없는 게 문제라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키아로스타미가 미국 대중에게 소개되기만 하면 그가 단번에 스필버그처럼 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점은 바로잡고 싶다. 많은 이들이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단정짓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대중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한 가지, 박스오피스 수치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중은 자신들이 알고 있고 고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영화들을 보는 것뿐이다.

홍성남: 앞에서 이야기한 미국의 영화문화는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인 것 같다. 하지만 종종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있어 당신이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하곤 한다. 여하튼 당신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조너선 로젠봄: 우선 비평가들이 더 많은 영화를 알아야 한다. 돈을 들여 홍보가 잘되는 영화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다른 건 60년대의 이상적 조건에 대한 것인데, 당시에는 어떤 영화나 감독들이 소문이나 전설을 통해 퍼졌다. 고다르도 주류에 의해 알려진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하면서 알려졌다. 이런 현상들이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더 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 미국은 영화 티켓 판매 정도보다 DVD 판매 정도가 더 높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박스오피스만 보고 영화문화가 이렇다고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자신보다 젊은 시네필 평론가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외계에서 온 이들이 서로 모르면서 지구에 흩어져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지금의 고쳐져야 할 영화문화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너선 로젠봄: 그렇다. 내가 알기론 그런 힘이 될 비평가들이 전세계에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버라이어티>에 있다가 <로스앤젤레스 위클리>에서 글을 쓰고 있는 스콧 파운대스는 아주 공격적이고 진지한 글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캐나다 잡지 <시네마 스코프>에 DVD 리뷰를 쓰는 필자들도 훌륭하다. 미국에서 인터뷰를 하면 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로 진행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서 내 저서를 심도 깊게 읽고 와준 것도 고맙고 놀랍다.

홍성남: 마스무라 야스조에 대해 말하길, 그가 직접적인 연결이 없으면서도 동시대를 산 다른 감독들, 새뮤얼 풀러, 더글러스 서크, 니콜라스 레이, 프랭크 태슐린 등과 동일한 관심사를 공유하더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흥미가 갔다고도 했고. 그러면서 ‘전지구적 동시성’(Global Simultaneity)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최근에 그런 현상을 발견한 대상이 또 있었나.

조너선 로젠봄: 사실 <무비 뮤테이션즈>(Movie Mutations, 로젠봄과 에이드리언 마틴이 편집을 맡아 2003년에 출간된 책) 자체가 그런 관심사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것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1960년대생 시네필들, 예컨대 니콜 브레네즈(프랑스), 켄트 존스(미국), 에이드리언 마틴(호주) 등에게서는 비슷한 취향이 공유되고 있음이 발견되더라. (내 취향은 아니지만) 필립 가렐, 몬티 헬먼, 존 카사베츠 같은 감독을 좋아하는 성향 말이다. 그래서 ‘전지구적 동시성’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영화의 역사를 공유한다. 단순히 모든 나라에서 대형 제작사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결속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시를 싫어하고, 미국인들도 부시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 공통성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공통분모를 연대로 이어갈 수 있는 기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키아로스타미에 대한 책을 이란 사람(이란의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이기도 한 메흐르나즈 사에드 바파)과 같이 썼다. 그것도 그런 국제적 결속의 한 노력이지 싶은데, 앞으르도 그런 식으로 작업할 생각이 있는가.

조너선 로젠봄: 그 책뿐만 아니라 <무비 뮤테이션즈>도 동일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노력을 계속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메흐르나즈 사에드 바파가 프랑스 잡지 <트래픽>에 글을 쓸 때, 그녀의 이름만 올라 있지만 그 글의 형상화에 내가 도움을 줬다. 그 역시 내가 이란의 비평가들과 얘기할 때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책에 실린 두 사람의 대화 부분이 이란과 호주 잡지에 동시에 실린 것을 보고 기뻤다. 이 책을 쓸 때 키아로스타미와는 팩스를 통해서 인터뷰를 했다.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어로 내 이름 쓰는 걸 배우기도 했다.

홍성남: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려는 조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미권 비평에서는 고다르에 대한 논의가 어느 시점에서 멈춰져 있는 상태이고 그의 ‘현재’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다르의 현재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갖는 몇 안 되는 영미권 평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조너선 로젠봄: 전세계적으로는 고다르에 관한 커다란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다르 영화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놓은 책도 있고, 일본에서는 <영화사> DVD가 훌륭한 모양새로 나왔다(*고다르가 찍은 영화 100년의 역사를 말한다. 국내에는 언제 소개되는 것인지?). 사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가보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글도 아무 생각없이 500만명이 읽는 것보다 5명이 읽고 감동받아 세상을 바꾸자고 생각한다면 그게 더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스튜디오 마케팅 때문에 수치에 연연하는데, 나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홍성남: 고다르와 동년배이면서 점점 더 비평적 주가를 높여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그에 대한 당신 글은 그리 많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그를 어떻게 평가하나.

조너선 로젠봄: 사실 이스트우드에 대해서도 글을 많이 썼다. 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추악한 사냥꾼>(White Hunter Black Heart)을 가장 좋아한다. 액션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해서도 글을 썼고 매우 좋아한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썼는데 지금 떠오르는 영화들은 이렇다. 그는 전적으로 어떤 대본을 갖게 되느냐에 좌우되는 감독이다. 물론 연출력이 출중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는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양식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점 때문에 높이 살 만하지만 같은 이유로 과대 평가될 위험도 있다.

 

 

 

 

-자신이 대본을 쓰지 않기 때문에 어떤 대본을 갖고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의 질이 들쭉날쭉하다. 사실 그가 개봉 전 시사회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선 찬사를 보낸다. 그럴 수 있는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스필버그만 해도 개봉 전 시사회를 열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상업영화를 거부하거나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스필버그의 'A. I.'같은 작품은 최근 나온 영화 중 걸작이라고 할 만하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세르주 다네나 레이먼드 더그냇 같은 뛰어난 평론가들에 대해서도 꾸준히 글을 써왔다(*다네는 '카이예 뒤 시네마' 편집장을 지낸 프랑스의 최고의 비평가이다).

 

 

 

 

조너선 로젠봄: 두 사람 다 친구였다. 다네와는 특히 친했고 함께 작업한 적도 있다. 흔히 비평가들에 대해 얘기할 때 그들간의 경쟁에 주목하는데, 나는 비평가들 사이에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굉장히 영향력있는 비평가인 로저 에버트의 경우 그의 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인간적으로 친한 친구고, 시카고에서 시사회에도 자주 같이 간다. <무비 뮤테이션즈>에 참여했던 많은 비평가들과도 친하다. 크리스 후지와라 같은 이는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도 매우 좋아한다. 비평가들이 서로의 글을 많이 읽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홍성남: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다른 시각문화들도 발전하면서 영화라는 존재가 예전보다 힘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시대에 영화의 지위와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영화는 여전히 굉장한 영향력이 있는 매체다. 단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 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5편을 집에 두고 계속 볼 수 있는 시대, 그래서 영화와 더 친밀해져서 집안에서 그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는 시대가 온 것 같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영화의 역사를 더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대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한다.

홍성남: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당신은 부당하게 간과되거나 무시당한 감독들에 대해 집중해왔다. 현재의 감독 중 그런 인물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가장 최근에 그의 작품을 봐서 그런지 제임스 베닝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딱 이 사람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내 연배의 인물인데 그렇게 잘 알려지지는 않아서 미국에서는 DVD도 거의 안 나와 있다. 비평가협회에서 상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는 굉장한 실험영화인이다.

(*) 로젠봄의 책으론 <무비 뮤테이션즈>와 최근에 나온 <이센셜 시네마>를 얼마전에 구했다. 한국의 '로젠봄'들이 그만한 시야와 부피의 책들을 얼른 써주기를 기대한다. 

06.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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