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번역된 지젝의 단행본 저작은 모두 7권이다(*이 글은 지난 1월에 씌어졌다). 아마도 내년까지는 4-5권이 더 번역돼 나올 듯하다. 그 중 5권이 2001-3년 사이에 나온 것들이다. 이 정도면 지젝 ‘르네상스’는 아니더라도 푸코나 들뢰즈의 경우처럼 일종의 ‘붐’은 형성할 수 있을 터인데, 현재의 사정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여러 차례 지적된 바대로,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함량 미달인 탓이다(그것은 상대적으로 푸코나 들뢰즈 번역의 경우 오역이 없지는 않더라도 ‘찬물’을 끼얹을 정도는 아니라는 반증도 된다). 이 번역의 수준은 책의 판매량과 직결돼 있는데(그만큼 독자들의 안목이 예리하다는 의미도 된다), 알라딘 통계를 기준하여 순위를 매기면([ ]안은 원저의 출판년도),

1.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외, 1995)[1991]
2.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2002)[1989]
3.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주은우, 1997)[1992]
4.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김종주, 2003)[2002]
5. <환상의 돌림병>(김종주, 2002)[1997]
6. <향락의 전이>(이만우, 2001/2)[1994]
7. <믿음에 대하여>(최생열, 2003)[2001]

이다. 물론 판매량을 결정하는 요인에 출판년도도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신통찮은 번역의 경우에 절판되는 것이 예사이므로, 오랫동안 팔리고 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대략 그 번역의 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순위에 동감한다. 이 7권에 대해서 일부분이라도 대략 원저와 대조해 본 결과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데올로기>를 빼면, 잘팔리는 두 권의 ‘영화책’은 지젝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이전에 번역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그렇겠지만, 나는 지젝의 이름을 영화학도에게서 처음 들었는바,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학을 하는 사람들 간의 입소문에 의해 지젝은 처음 우리의 ‘지식장’ 혹은 ‘지식시장’에 편입됐다.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바, ‘현대이론’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영화학도에게서 숭배하건 무시하건 간에 라캉과 정신분석학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라캉에 대한 열정을 보라). 요즘은 아무리 무식한 영화학도라고 해도 ‘라캉’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없이 영화과를 졸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교수가 덩달아 무식하지 않는 한).

그런데 그 (신화적이면서도 난삽하기 짝이 없는) 라캉이론의 영화에 대한 개입(방식)을 가장 쉬우면서도 현란하게 보여준 이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지적 영웅’ 지젝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앞으로 나올 또다른 ‘영화책’ <들뢰즈와 결과들 Deleuze and Consequences>(2004)의 번역이 영화학도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알다시피 얼마전에 출간됐다).

물론 지젝의 ‘영화책’들이 읽기 쉽다는 것은 순전히 상대적인 의미에서일 뿐이다. 당연히 지젝을 읽는 것은 라캉을 직접 읽는 것보다 10배는 쉽다. 그리고 그의 ‘영화책’들은 현재 번역/교정중이라는 <불안정한 주체 The Ticklish Subject>(1999)나(<까다로운 주체>로출간됐다)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 Tarrying with the Negative>(1993) 등의 ‘철학책’(독일관념론을 다룬다)보다는 3배쯤 쉽다(물론 이들 ‘철학책’들에도 영화 얘기가 들어가 있긴 하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비교적 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에게 그냥 만만하게 읽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나는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를 재미있게 완독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해서, 지젝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 우리말로 지젝을 읽고 즐길/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다소 ‘계몽적인’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거창한 것은 아닌바, 비교적 읽을 만한 우리말 번역본을 같이 읽으면서 중요한 핵심을 정리/이해하고, 일부 오역들은 교정해 나가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년쯤인가(혹은 2002년에) 나는 <향락의 전이>에 대해서, 이러한 방식을 시도해 보고자 했는데, 워낙에 견적이 안나오는 번역서라 그걸 교정하면서 함께 읽는다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내가 조금 게으르고 다른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서 정한 원칙은 우선 읽을 만한 번역을 읽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한 커트라인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이다. 그게 허리인바, 나머지 4권은 차라리 없으면 더 좋을 허리이하적인 번역서들이다(이런 번역서들은 각자의 골방에서 사적으로만 음미하는 게 좋겠다). 내가 권장하는 것은 그나마 있어서 다행인 번역서 3권을 한달에 한권씩이라도 독파해 보시라는 것이다. 그 읽을 순서는 좀 임의적이지만, 나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서 <삐딱하게 보기>로, 그런 후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전이해 가겠다. (가령, 쿤데라님처럼) 영화를 안 좋아하는 분들은 그냥 <이데올로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이겠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원제(Enjoy your symptom!: Jacque Lacan in Hollywood and out)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라캉 정식분석학의 핵심개념들을 헐리우드 안팎의 영화들을 소재로 하여 설명하고 있는 ‘계몽적인’ 책이다. 딜런 에반스가 쓴 <라캉 정신분석 사전> 같은 류의 책들이 보다 직접적인 용어설명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젝의 영화책들은 그 추상적인 용어 혹은 개념들에 ‘실감’이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비유컨대, <사전>이 비타민이나 영양제(라캉 캡슐)라면, 지젝의 책들은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라캉 식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한 식탁이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즐길만하지 않을까?.. 

다음번에 다룰 내용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2장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얘기와 함께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를 설명하고 있는(동시에 데리다에 대한 라캉주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1장은 내가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 기억에 평이하게 읽혔던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간다(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는 있겠다). 혹 읽으신 분들이 질문이나 문제제기를 하실 경우에는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옐름슬레우를 다룬 글에서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해치우기로 한다. 검토의 대상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에서 옐름슬레우와 관련된 대목들이다. 2장 ‘언어학과 문자학’ 중 115-121쪽.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부분을 예로 들고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내가 참고한 것은 스피박(G. Spivak)의 영역본 'Of Grammatology'(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6)이다.



먼저, 115쪽 하단부: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이며 물질적인(음성적, 문자적 등) 실체(또 의미적, 심리적, 논리적인 실체)와 독립되어 있다.” 이 대목은 괄호가 잘못 쳐져 있는데,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 실체(의미적, 심리적, 논리적), 물질적 실체(음성적, 문자적 등)와 독립적이다.”로 고쳐져야 한다. 이어서 “우리가 위에서 제안했듯이, 소리와 의미의 단위는 여기서 놀이의 확실한 폐쇄이다.”/ “The unity of sound and of sense is indeed here, as I proposed above, the reassuring closing of play.”(57쪽)

바로 이전에 얘기되고 있는 것은 엘름슬레우의 언리학(Glossemantics) 개념들이 갖는 특징으로서의 형식성(formality)이다. 이에 따르면, “소리와 언어 사이에는 아무 연계성”이 없다.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유희’이다. 이것은, 소쉬르식 용어를 쓰자면, 기표와 기의간의 안정된 결합이 유예되면서, 즉 기표가 미끄러지면서 벌어지는 유희이다. 그런데, 소리라는 단위나 의미라는 단위는 자연스레 그들간의 안정적인 결합을 가정하면서 이러한 유희를 중단시킨다. 해서, “우리가[내가] 앞에서 주장한 바 있듯이, 소리 단위와 의미 단위는 정말로 그러한 유희를 확실하게 중단시킨다[는 뜻을 갖는다].”(난 처음에,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라고 봤는데, of가 양쪽에 걸린 걸로 봐서는 각각의 단위로 해석돼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the unity of sound and sense’라고 해석하면 더 이해하기 편하다.)

다음, 옐름슬레우로부터의 인용: “...그러나 어느 경우든 현대 언어학이 인지하듯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에 대해 변별적이지 못하다.”(118쪽) 변별적이지 못하다라는 말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통시적 고찰=공시적 기술’이 되는가? 문맥으로 봐서,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description)과 ‘무관하다’고 옮겨져야 한다(영역은 A are irrelevant for B 구문이다).

이어지는 언어학자 울달 인용문.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의 차이라는 개념 덕분에 우리는 언어와 문자가 대체로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 표현들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for it is only through the concept of difference between form and substance that we can explain the possibility of speech and writing existing at the same time as expressions of one and the same language.”(58-9쪽)

문제는 speech를 ‘언어’라고 옮긴 것.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건,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이다. 따라서 ‘언어와 문자’는 ‘음성과 문자’로 고쳐져야 한다. 다시 옮기면,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라는 서로 다른 개념 덕분에 우리는 음성과 문자가 각각 같은 언어에 대한 동등한 표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부분: “만약의 공기의 유출 또는 잉크의 유출, 이 두 가지 실체 중 하나가 언어 자체의 일부분이라면 언어를 바꾸지 않고 이 둘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If either of these two substances, the stream of air or the stream of ink, were an integral part of the language itself, it would not be possible to go from one to other without changing the language” 여기서 ‘공기의 유출’은 ‘음성(언어)’이고 ‘잉크의 유출’은 ‘문자(언어)’이다. 잘못 옮긴 건, ‘일부분이라면’이라고 한 것. 완전히 반대로 옮긴 것인데, ‘전체라면(integral)’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공기의 유출[음성]이나 혹은 잉크의 유출[문자]이라는 이 두 가지 실체 중 어느 하나가 한 언어의 전체라면, 그 언어를 바꾸지 않고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L1(언어1)=S(음성)이거나 L2(언어2)=W(문자)라면, 당연히 S에서 W가 교호하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언어(L1, L2)가 필요하다. 이건 형식논리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옐름슬레우와 그의 코펜하겐학파가 소쉬르처럼 음성언어에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문자언어 혹은 표기적(graphic) 표현-실체에 의존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개방한다는 것. 이들은 음성과 문자에 표현적 실체(substance of expression)로서의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들은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를 대신할 수 없다.

해서, “언리학은 문학적 요소에 대한 접근과 문학에서 형식의 놀이와 규정된 표현 실체를 연결하는 문자로 표기된 텍스트로 통하는 것에 대한 접근을 지칭한다.”(120쪽 두번째 문단) 이건 우리말로 너무 심하지 않을까? 영역은 이렇다: “It[Glossemantics] showed how to reach the literary element, to what in literature passes through an irreducibly graphic text, tying the play of form to a determined substance of expression.”(59쪽)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학의) 이 ‘문자적’ 요소, 즉 문학에서 ‘형식의 유희’[기표의 유희]를 규정된 표현 실체[의미]에 연결시켜 주는, 이 환원불가능한 표기 텍스트를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literary를 ‘문학적’이 아닌 ‘문자적’으로 옮겼다. 이탤릭체로 강조돼 있는 것이 그것의 어원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文)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색하기에 ‘문자적’이라고 해둔다.

데리다는 이 문자적 표기에는 텍스트의 ‘의미’(현전으로서의 음성)로 다 환원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보며 옐름슬레우와 코펜하겐학파의 언리학은 이를 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코펜하겐학파가 루소나 소쉬르와 달리 문학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작업을 더욱 전면화(radicalize)한다.

“따라서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 일반의 구조에서 이 심급을 벗어나는 것은 일정한 기술 유형을 필요로 할 가치가 있는데, 언리학이 아마 그 규범과 가능성 조건을 최상으로 도출시켰을 것이다.”(121쪽)/ “That which, with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in the structure of a literary text in general, escapes that framework, merits a type of description whose norms and conditions of possibility glossemantics has perhaps better isolated.”(59쪽)

오포야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문학성(being-literary; literariness), 혹은 ‘문학적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면서, 음운론적 심급을 특권화하고, 그것이 지배적인 시문학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코펜하겐 학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시만이 아닌) 문학 전반의 ‘문학성’의 탐구에 관심을 두며, 이때 언리학이 요긴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 해서, 다시 옮기면,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의 일반 구조에서 (형식주의자들의) 이론적 틀을 벗어나면서도 그 규범과 가능성의 조건을 하나의 유형으로 기술할 필요가 있는, 그러한 유형을 언리학은 보다 잘 도출시켜 왔다.” 약간 의역을 했는데, isolate의 번역이 좀 까다롭다.

계속. “아마도 이렇게 해서 언리학은 문학 테스트의 구조와 문학성의 문학적 생성사에서, 특히 <근대성>이라는 개념에서 순전히 문자 표기적인 성층을 연구하는 데 최상의 준비를 해온 것이다.”/ “It has perhaps thus better prepared itself to study the purely graphic stratum within the structure of the literary text within the history of the becoming-literary of literality, notably in its 'modernity.'”

불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literality는 '문학성'이 아니라 '문자성'이다.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자성이 점차 문학으로 생성되어 가는 역사, 특히 그 ‘근대성’의 역사 속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순전히 표기적인 층위에 대한 보다 나은 연구를 준비해 왔다.”

이어지는 문단들도 읽기에 불편한데, 하여간에 이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덧붙임: 앞에서 약간 의역했다고 한 부분에 대한 러시아어판 번역(Laputsky옮김, 2000)을 우리말로 옮기면, "문학사와 문학텍스트의 구조에서 음성과 무관한 것은 다른 설명을 요구했고, 그것의 규범과 가능조건에 대해서는 특히 언리학이 분명 더 잘 밝혀주었다."(185쪽) 더 간명하게 번역돼 있는데, 이해하기도 물론 더 쉽다.(여기서 다른 설명이란 건, 음운론과 시에 집중했던 형식주의와는 다른 설명을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천개의 고원>(새물결) 3장을 읽기 전에 내가 읽은 건 4장의 1절이다(147-167쪽). ‘화용론적 전회’라고 할 만한 새로운 언어철학을 들뢰즈/가타리는 제시하고 있는데, <분자혁명>(푸른숲)이나 <기계적 무의식>(푸른숲)에서 반복적으로 이 주제가 다루어지는 걸로 미루어 여기엔 가타리의 몫이 더 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이 부분이 들뢰즈/가타리와 관련하여 나의 일차적인 관심사항이다.

<천개의 고원>은 분명 공들인 번역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선 이의를 달지 않겠다. 하지만, 유려하거나 세심한 번역은 아니다. 나는 새물결판과 함께 수유연구실판도 같이 읽었는데, 전자가 후자보다는 더 가독성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미 다른 자리에서 지적했듯이, ‘화용론’을 ‘화행론’으로, ‘의미작용’을 ‘기표작용’으로 번역한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수유연구실판은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그런 걸 제외하면,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수유연구실판보다 더 나은 번역이다.

가령, 수유판에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샤를뤼스’를 ‘카를루스’로, 연속살인범의 닉네임인 ‘샘의 아들’을 무슨 영화나 소설의 작품명으로 옮겨놓았다(85쪽). ‘끔찍스런 능력’(수유, 80쪽)이란 말보다는 ‘가공할 만한 능력’(새물결, 148쪽)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수유판에서는 ‘간접화법’을 무리하게 전부 ‘간접적 담론’이라고 옮겼다. 물론, 예외는 있다. 나는 ‘작은 사형선고(sentence de mort)가 있다’(새물결, 149쪽)보다는 ‘어느 정도는 사형선고가... 있다’(수유, 81쪽)가, ‘집단적 배치’(새물결)보다는 ‘집합적 배치’(수유)가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리스도’는 왜 ‘크리스트’(158쪽)라고 옮기는가?

먼저, 두 번역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오역. 영어의 shifter를 모두 ‘연동소’(수유, 83쪽/새물결, 153쪽)라고 한 건, 불한사전에 그렇게 돼 있는지는 몰라도, 적절하지 않다. 언어학 용어로서 ‘전환사’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 subject란 말은 철학에서는 ‘주체’이지만, 언어학에서는 ‘주어’를 뜻하는 단어이다. 영어나 불어에서는 통일해서 쓰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이걸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이 4장에서는 언어학적 문맥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에 항상 subject에는 ‘주체’란 뜻 외에도 ‘주어’라는 뉘앙스가 들어가고, 또 명백하게 ‘주어’로 옮겨져야 하는 대목도 있다. 참고로, 이진경은 <노마디즘1>(휴머니스트)에서 ‘주체(주어)’ 혹은 ‘주어(주체)’로 표기하고 있다(266-7쪽).

예컨대, “이런 것들은 주체화의 과정 또는 주체의 소환을 랑그 속에 배분한다. 이것들이 랑그에 의존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소리이다.”(154쪽)에서 ‘주체의 소환’은 ‘주어의 할당’의 오역이다(수유, 84쪽도 마찬가지이다). ‘주체-주어’의 혼용이 혼동의 여지가 있다면, 적어도 ‘주체(주어)의 할당’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맛수미(Massumi)의 영역본에서 이 대목은 “which, far from depending on subjectification proceedings or assignations of subjects in language, in fact determine their distribution.”(78쪽)이다. 새물결판은 끊어서 번역했는데, 이 문장의 전체주어는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 등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이 배치 등은] 언어(랑그) 속에서의 주체화(주어화) 과정이나 주체(주어)의 할당에 의존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사실상 그들의 배분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배치 등]이다.”

언어학적 문맥을 간과해서 나온 코믹한 오역이 그 다음에 이어진다. “각 랑그에서 주체 형태소들의 역할과 몫을 측정하는 이런 ‘행위-언표’ 배치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의사소통이 정보보다 더 좋은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상호 주관성이 의미생성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같은 쪽) 여기서 ‘주체 형태소들’라고 옮긴 것은 영어로는 subject morphemes이다. 즉 ‘주어 형태소’이다(이걸 수유판에선 한술 더 떠서 ‘주관적 형태소’라고 옮겼다. 그럼 객관적 형태소도 있나?). 그리고 ‘역할과 몫’(역할과 몫은 뭐가 다른가?)이라고 한 건 수유판을 따라서 ‘역할과 범위’(role and range)라고 해야 하고, ‘측정하는’이라고 한 건 ‘한정하는’(delimit)으로 고쳐야 한다. 역자가 이 대목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한 대목만 더 들겠다: “물론 우리는 집단적 배치물을 정의해 볼 수는 있다. 행위와 언표의 잉여복합체라고, 또 이 복합체는 필연적으로 집단적 배치물을 얻어낸다고 말이다.”(157쪽) 이 대목의 수유판 번역: “물론 우리는 집합적 배치를 행위와 언표의 잉여적 복합체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언표는 필연적으로 행위를 완성한다.”(85쪽)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각기 다르게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맛수미의 영역: “We can no doubt define the collective assemblage as the redundant complex of the act and the statement that necessarily accomplishes it.”(80쪽) 불어나 영어나 비슷할 텐데, 새물결판은 관계사 that의 선행사를 complex로 봤고, 수유판은 statement로 봤다. 또 그에 따른 목적어 it을 새물결판은 collective assemblage로 수유판은 act로 봤다. 어느 쪽이 타당한가? 당신은 어느 쪽에 판돈을 걸겠는가?

내가 영문법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that의 선행사는 당연히 statement이다. 만약에 다른 걸 받으려면, statement 다음에 쉼표(,)라도 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정의의 문형은 “A를 B로 정의한다”인데, 지저분하게 뒤에 뭐가 붙는다는 건 문장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문맥상으로도 들뢰즈/가타리가 앞에서 강조한 것이 모든 언표가 행위-담지적이라는 점이었으므로, 그런 내용을 고려한다면, 수유판의 번역이 타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단, 나라면 ‘완성하다’는 ‘실행하다’로 옮기겠다. 해서 다시 옮기면, “물론 우리는 집합적 배치라는 것을 행위와 반드시 그를 실행하는 언표와의 잉여적인 복합체라고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혹시 의견이 다르신 분은 반박해 주시기 바란다...

덧붙임: 앞의 문장에서 왜 행위와 언표의 '복합체'가 아니라 '잉여적인 복합체'일까? 그건 언표 또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거기엔 중복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잉여적'이란 말은 '(불필요한) 중복'이란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는 게 내 생각이다. 이 대목의 새물결판 번역은 그런 의미 또한 설명할 수 없기에 확실한 오역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새물결)에서 가장 어렵다는 3장(도덕의 지질학)을 읽다가 옐름슬레우(Hjelmslev)로 빠지게 됐다. 사실 내가 관심있는 건 들뢰즈/가타리의 기호학 비판과 언어철학인데(그래서, 4-5장만 읽으려고 하다가, 3장을 먼저 읽어야겠기에 작전상 후퇴했다), 그들의 주장에 결정적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 옐름슬레우의 언어학, 즉 언리학(Glossemantics)이다(그레마스의 기호학 또한 옐름슬레우라는 언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장, 수도없이 쏟아지는 ‘표현과 내용’, ‘형식과 실체’란 말의 감을 잡지 않고서는 <천 개의 고원>을 읽어나갈 수가 없다.

이진경의 <노마디즘1>(휴머니스트)에서 비교적 친절한 설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역시 그걸로는 부족해서 관련서적을 뒤적이게 된다. 이때 요긴한 참조가 되어주는 책이 존 레흐트의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이다. 약간의 오타/오역이 흠이긴 하지만, 그만하면 80%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다. 그리고 서정철의 <기호에서 텍스트로>(민음사). 5명의 언어학자/기호학자를 다루고 있는 책의 한 장이 옐름슬레우에게 할당돼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그래도 국내 필자가 쓴, 옐름슬레우에 대한 가장 자세한 소개이다.

옐름슬레우의 주요어 중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건, 형식form과 짝을 이루는 substance이다. 철학에선 주로 ‘실체’라고 옮기고 언어학에서는 ‘실질’이라고 옮기기 때문에(서정철도 ‘실질’로 옮기고 있다) 좀 애를 먹이는데, 같은 언어학자인 최승언의 <일반언어학강의>(민음사)나 김성도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 번역에서도 ‘실체’로 번역하고 있으므로 그냥 일률적으로 ‘실체’로 옮겨도 무방하겠다.

 

 

 



문제는 번역된 옐름슬레우의 주저 <랑가쥬 이론 서설>(동문선)의 번역이 수준이하라는 것(동문선은 오역 전문출판사로서 수위를 다툴 듯하다). 이 책은 이진경도 참조하고 있지만, 용케 오역인 부분들만 피해가고 있다. 원저가 덴마크어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불역본도 어차피 중역이어서, 영역본과 비교해 보는 것이 적반하장격은 아니다. 가장 짜증나는 건 'substance'를 전부 '본질'로 옮겨놓은 것. 비록 철학에서 ‘실체’란 말이 ‘본질’과 비슷한 뜻을 가질 때도 있지만, 불어학 전공자들인 두 역자의 언어학적 상식이 의심스런 대목이다. 레흐트에 의하면, 옐름슬레우의 ‘실체’는 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비가시적인 '본질'과는 차이가 나며, 따라서 그렇게 옮겨서는 안된다.

더불어 마음에 안드는 건 ‘형식’을 또 전부 ‘형태’로 번역하고 있는 것. 화용론의 주장대로,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만, 웬만하면 관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가령, <천개의 고원>의 역자는 언어학/기호학 용어중 ‘화용론’을 ‘화행론’으로, ‘의미작용’을 ‘기표작용’으로 생경하게 옮겨놓는데, 그럴 듯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번역임을 면치 못한다. 마치 ‘등신’이란 말을 좋은 취지로 썼다는 딴나라당 국회위원의 경우처럼.

<랑가쥬 이론 서설>이란 제목도 그렇다. 불어에서의 랑그와 랑가주를 구별해주기 위해서 쓴 거 같지만, 랑그와 달리 랑가쥬는 언어학에서도 그다지 상용되는 말은 아니다. 해서, 랑그로서의 언어와 랑가주로서의 언어가 혼동될 경우에만 괄호안에 넣어주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가령, 크리스테바의 <언어, 그 미지의 것>(민음사)에서의 ‘언어’는 ‘랑가쥬’를 가리키지만, <랑가쥬, 그 미지의 것>이란 제목을 일반 독자가 언어학 책으로 알아볼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다.

번역본만으로는 의미파악이 거의 되지 않거나 아주 힘든, 의미의 변비통만 안겨주는 책인데, 한 대목만 보자;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본질은 전적으로 형태에 좌우되고 우리는 어떤 의미로도 - 정확히 말해 그 여건에 따라 - 독립적인 존재를 형태에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한다.”(68쪽) 이에 대한 영역은 “If we maintain Saussure's terminology- and precisely from his assumptions - it becomes clear that the substance depends on the form to such a degree that it lives exclusively by its favor and can in no sense be said to have independent existence."(50쪽)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문에서 ‘본질’과 ‘형태’는 앞서 말했듯이 오역이므로 ‘실체’와 ‘형식’으로 바꿔서 이해해보자. 일단 번역문은 (1)실체는 형식에 좌우된다, (2)우리는 독립적인 존재를 형식에 부여할 수 없다, 라는 두 가진 진술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왜 ‘실체’를 얘기하다가 갑자기 ‘형식’으로 초점이 넘어갔느냐는 것이다. 뒷부분의 불어 원문은 이렇다: “il nous faut alors rendre compt - et precisement d'apres des donnes - que la substance depond exclusivement de la forme et qu'on ne peut en aucun sens lui preter d'existence independante."(불역본, 68쪽)

나로선 불어사전을 가지고 더듬거리며 읽는 수준이기에 유창하게 번역하진 못하지만, 역자들이 마지막에 있는 대명사 lui를 substance가 아닌 forme를 받는 걸로 해석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번역에서 대명사나 관계사의 선행사를 잘못 짚게 되면, 치명적인 오역을 낳을 수밖에 없다. 통사적으로 모호할 경우엔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역자들은 만만한 불어실력에만 의존한 듯하다.

해서 다시 옮기면,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실체는 전적으로 형식에 의존한다. 때문에 (그의 전제/가정들에 따라서) 실체가 독자적인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괄호로 묶은 “and precisely from his assumptions”나 “et precisement d'apres des donnes”은 앞의 전제/가정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즉 실체와 형식에 관한 내용이 앞에 주어져 있는데, 그에 따라서 이러이러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국역본이 “정확히 말해 그 여건에 따라”라고 옮긴 것 역시 오역이다.

사소한 대명사 착오가 사소하지 않은 오역을 낳는다. 엘름슬레우와 관련하여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동문선)이다. 존 레흐트를 참조한 것이지만, 국역본 117-121쪽 정도에서 옐름슬레우의 언리학에 대한 데리다의 평가를 읽어볼 수 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없다. 역자는 언어학자임에도 불구하고(그나마 언어학자의 번역이어서 사정이 좀 나은 걸까?), 여러 곳에서 치명적인 오역을 범하고 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sboy 2007-05-16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만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소쉬르의 용어를 따른다면(그리고 정확히 말해 그의 전제들에 입각해본다면), 실체는 반드시 형식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고, 결코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실존을 갖는다고 얘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명백히 실체는 형식에 의존해 있다."

로쟈 2007-05-1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페이퍼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번역해주신 대로입니다. 숙제가 여기도 남아있었네요.^^;
 

얼마 안되는 분량을 두고 오래 뜸을 들이는 것도 별스러운 것이어서 마저 해치우기로 한다. 우리가 가장 바쁠 때 가장 많은 일을 한다는 속설에 의지해 보면서. 어제는 프로이트-라캉 카페에서 소개받은 지젝 관련 글을 읽었는데, 지젝의 근황과 최근의 사생활이 비교적 자세하게 드러나 있어서 흥미로웠다. 지젝을 이해하는 데, 아니 이해하기 시작하는 데 아주 요긴해 보이는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미친 척하고 요약/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아니, 그 전에 찾아서들 읽어보시면 되겠고, 어느 분이 먼저 요약/정리해주시면 더욱 좋겠지만...



-데리다 인터뷰로 넘어와서, 대담자의 다음 질문은 좀 어리숙하다(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인지).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 둘은 서로 이질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원문의 "They aren't heterogeneous."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아무래도 논리상 맞지 않는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고려해 보건데, '그 둘은 서로 이질적입니다'가 돼야 할 거 같다. 아마도 녹음된 구어를 옮기는 과정에서 오타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They are heterogeneous."라고 말했을 것이고, 그래야 말이 맞다. 데리다의 영어발음이 부정확했거나 필사자의 청력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해서 이어지는 대목은, "그래서 당신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 아무런 지혜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번역하면서 계속 께름직했는데, 결론은 오타일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 "지식과 행위 사이에는 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심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 한 더 많이 알고자 하는 노력이 방해받는 건 아닙니다. 철학, 즉 필로소피아는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필리아가 사랑이고 소피아가 지혜죠. 따라서 지혜에의 의무가 바로 철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전적으로 지식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한 많은 것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결정의 순간에 내가 가진 지식으로부터 어떤 비약을 감행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지혜가 문제되는 건 행위이다. 즉 지식과 행위(지혜를 필요로 하는)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철학은 그 지혜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고 나는 생각한다.

-지식과 지혜에 대한 이런 얘기는 좀 고리타분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목들은 재미있다. 그리고 데리다의 '사생활'이 조금씩 내비친다. "1967년에 출간한 책들 덕분에 당신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나로선 좀 예기치 못한 질문이다.

-"내가 더 행복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데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매우 활동적이고 정력적으로 살아왔습니다. 만약에 내가 20세때 누군가 지금 나이인 72세에 내가 무얼 하고 있을지 말해줬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나는 아주 병약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반에 반만 하더라도 쓰러졌을 겁니다. 그 작업(책)이 얻어낸 호응이 내게 지금과 같은 에너지를 준 것이죠. 사람들은 저와 제 작업을 관대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만약 그런 관대함이 없었더라면 확신하건데, 나는 진작에 주저앉았을 겁니다."

-그 다음 뜬금없는 질문. "왜 여성 철학자는 없는 걸까요?"(그런데, 왜 여성 대법관은 없는 겁니까?) 페미니즘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질문이다.

-" 왜냐하면 철학적 담론이란 건 자체가 여성과 아이들, 동물과 노예 들을 주변화하고, 억압하고, 침묵시키는 방식으로 조직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철학적 담론의 구조입니다. 그걸 부인하는 건 어리석은 것이죠. 따라서 당연히 위대한 여성 철학자는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여성 사상가들은 있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철학이란 건 여러 사고양식 중에서 대단히 특별한 사고양식의 하나(일뿐)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변화되어 가는 역사적 국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건 거창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많은 저작들이 남근중심주의의 해체와 관련돼 있습니다. 자화자찬하자면, 나는 그러한 문제를 최초로 철학적 담론의 중심에 놓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한 억압은 특히 남근중심주의의 철학적 근저에 끈질기게 남아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페미니즘 문화의 동맹군입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몇몇 선언적인 주장들에 대해서는 유보적입니다. 단순히 위계를 뒤엎는다든가 관습적으로 남성적인 행동으로 간주돼 왔던 가장 부정적 측면들을 여성들이 전유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저작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오해는 무엇입니까?"

-"그건 나를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텍스트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적인 니힐리스트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한 오독은 35년전에 시작되었고 이젠 깨뜨리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언어적이며 우리가 언어에 갇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정반대를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해체는 모든 것이 언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러한 철학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내 책을 주의깊게 읽은 독자라면 내가 긍정과 신앙을 고집스레 주장하며, 내가 읽은 텍스트들을 전적으로 존경한다는 점을 이해할 겁니다."
-"타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살인의 충동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살인충동은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물로서의 인간(human animal)의 한 부분이니까요. 동물로서의 인간은 잔인하며,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쾌락을 얻습니다. 그건 제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살인에의 권리는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철학과 사유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입니다. 즉 이 제거될 수 없는 충동을 제어하는 것이죠. 잔인성과 공격성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시킬 수는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쓸 때 그러한 활동엔 공격성도 한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 공경성을 뭔가 유용한 것으로 변형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공격성은 살인보다 흥미로운 어떤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당신은 실제로 살인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도 나는 타자를 (다른 방식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격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천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조훈현이나 유창혁의 공격바둑을 생각해 보라. 박지은의 공격적인 드라이브샷, 전성기 박찬호의 공격적인 피칭, 홍세화나 박노자의 공격적인 글쓰기 등등...)

-"영토나 소유권 등의 개념들이 인간들간의 갈등의 뿌리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관념들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왜 우리는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요?"(이건 달라이라마에게 질문해야 하는 거 아닐까?)

-"수세기동안 도시는 교역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이젠 더이상 그렇지 않죠. 장소의 정치학은 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한 친구가 최근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오늘날 탈영토화하거나 가상화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건 예루살렘과 석유이다, 라고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석유에 의존해 살고 있습니다. 비록 그런 상황이 변화할 수는 있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석유가 고갈된다면?) 모든 사회가 붕괴될 것입니다(이 부분의 번역은 원문을 확인해 주셨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건 유럽보다도 미국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항상 미국에서는 더 문제가 됩니다. 거기엔 분명한 이유들이 있고요."

-"과거가 사람들에게 쉽게 고통이나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지요?"(이 또한 멍청한 질문에 속한다.)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내 경우엔 다행스럽게도 나는 과거와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조차도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꺼이 나의 삶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정확이 일어났던 그대로 끝없이 반복되는 걸 수용할 수 있습니다. 즉 영원회귀를 말이죠."(답변은 똑똑하다.)

-"요즘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우문의 퍼레이드다.)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적이고, 공적이고, 정치적인 일들이 나에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과 함께 끊임없이 의식하는 건 내가 늙어가고 있고,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입니다.(영화 <데리다>에도 나오는 그의 백발과 눈가의 주름들을 떠올려 보라.) 인생은 짧습니다. 나는 항상 내게 남아있는 시간들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비록 이건 내가 어릴 때부터 죽 그래왔던 성향이긴 하지만, 72세가 되면 문젠 좀 심각해집니다. 아직까지는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거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자각이 나의 모든 사유에 침윤돼 있습니다.(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후기 데리다는 상당히 실존주의적이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끔찍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내 마음속에서도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죽음의 충격(terror)에 비해 주변적(alongside)입니다."(우리도 72세가 된다! 될까?...)

-드디어 마지막 질문. "당신은 언제 어른이 되었습니까?"(정말 엉뚱하고 기발한 질문이다. 내가 읽은 어떤 인터뷰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질문!)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나는 항상 사람들은 하나 이상의 나이를 가진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 가지 나이를 갖고 다닙니다. 내 나이 스무살때, 나는 내가 이미 늙었고 너무 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일흔 둘)은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엔 멜랑콜리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마음속으론 아직 젊다고 느끼지만, 나는 객관적으론 내가 더이상 젊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가지고 다니는 세번째 나이는, 이건 내가 프랑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데, 내가 막 책을 출간하기 시작하던 나이입니다. 그때가 35세, 서른 다섯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한창 작업하던 때의 문화적 환경(cultural world) 속에서 35세로 멈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죠. 왜냐하면, 나는 많은 분야에서, 좀 많은 책을 출간한 늙고 저명한 철학자로 간주되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내가 이제 막 책을 출간하기 시작한 신출내기 저자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글쎄, 꽤 전도유망한 녀석이군.""

마지막 질문에 대한 데리다의 답변은 감동적이다. 여러 시간을 이 인터뷰 번역에 쏟아부은 것도 이 마지막 답변을 여러 사람과 같이 읽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는지 모른다. 이 인터뷰의 원래 제목도 '자크 데리다의 세 가지 나이(The Three Ages of 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사생활'이란 타이틀이 크게 빗나간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영화 <데리다>에서 데리다는 나이가 들면서 같이 늙어가는 '손'과 나이를 먹지 않는 '눈'에 대해서 아주 흥미로워하는 듯한 표정(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야기한다)으로 얘기한 바 있다. 그 데리다가 이젠 73세, 일흔 셋이다. 103세까지 장수했던 가다머에 견주면, 아직 30년의 세월이 남았다. 그러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