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표적인 지성사학자 이사야 벌린 경의 <자유론>(아카넷, 2006)이 번역/출간됐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룰 여유가 없기에 언론 리뷰 두 개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것인데, 보수주의 석학의 책인 만큼 두 보수 언론의 '경의'는 마땅해 보인다. 이미 평전 <칼 마르크스>와 <낭만주의의 뿌리>의 저자로 소개된 바 있지만, 벌린의 저작은 좀더 읽히는 것이 온당하다. 에누리 없이 '교양의 문턱'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뿌리>의 공역자이기도 한 강유원은 <공산당 선언> 강의에서 이렇게 적었다.

"앞서 소개한 마르크스 평전 중 하나를 쓴 이사야 벌린은 오늘날 대표적인우파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일단 '근대인'이라 하면 우파적인 교양을 갖추는 게 기본이다.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골고루 먹고사는 문제, 그러니까 평등의 문제 등을 고민하면 좌파인 거다. 우파건 좌파건 근대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람들 모두 교양인이다. 한국에서 우파라 불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된다. '한국 우파의 금자탑' 운운하는 조갑제 같은 사람을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힘센 보스를 그리워하는 노예근성의 똘마니들일 뿐이다."(51쪽,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자신이 교양인이라고 떠들어대는 이라면, 우파건 좌파건 간에 먼저 벌린 정도는 읽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론>은 얼마전에 재출간된 칼 포퍼 경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민음사, 2006)과 함께 '우파 교양서'의 전범적인 저작이므로 필히 아는 체해둘 필요가 있겠다. 이 정도 읽어주지 않으면, 우파건 좌파건 '똘마니'라 불리는 걸 면하지 못한다. 적어도 근대인/교양인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일단은 두 개의 서평을 참조하시길.

동아일보(06. 06. 10) 영국의 지성사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의 진면목은 같은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와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카는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러시아혁명을 높이 산 진보적 역사학자였다. 반면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러시아혁명을 목격한 벌린은 옥스퍼드 출신으로 혁명에 기반한 전체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전통적 자유주의자였다(*그러니까 벌린의 경우도 '좌파 이후의 우파'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카를 마르크스의 평전을 냈다는 공통점도 지닌다(*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전도 썼다. 한편, 벌린이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한 러시아의 작가/사상가는 투르게네프와 게르첸이다). 학계에서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카의 평전보다는 자유주의자였던 벌린의 평전을 더 높이 평가한다. 한국에서는 카의 영향이 압도적이지만 2000년대 들어 벌린의 저서가 잇따라 번역되면서 그의 만만치 않은 내공에 감탄하는 이가 늘고 있다.

-이 책은 ‘자유에 관한 네 편의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1968년 출간된 것을 그의 사후인 2002년 대폭 보완해 새롭게 출간한 것이다. 벌린은 이 책에서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의 거센 광풍 아래 부르주아 사상이라고 비판 받은 자유주의가 얼마나 심오하고 진취적 사상인가를 펼쳐 보인다.

-네 편의 논문 중 ‘역사적 불가피성’은 인류의 역사가 필연적이라는 결정론적 사고와 역사 속에서 개인의 선택을 도덕적으로 찬양·비난하는 윤리적 행위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역사에서 개인의 선택을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격하시킨 카의 역사관을 교조적 유물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벌린이 역사의 필연성을 부인하거나 영웅사관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유주의는 이런 모순을 깊숙이 파고드는 회의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두 개념’은 일체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적극적 자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즉, 우리의 상식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자유주의의 진취성은 진리는 하나라는 교조주의와 그 진리를 전유(專有)하려는 전체주의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확인된다. 벌린의 이런 관점으로 인해 이 책은 다원주의의 고전으로도 꼽힌다. 이 개정판에는 ‘자유에 관한 다섯 번째 논문’이 될 뻔했다가 시한에 쫓겨 빠진 ‘희망과 공포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그가 12세 때 소설 형식으로 러시아혁명의 모순을 다룬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와 ‘냉전의 설계자’라 불린 미국 외교정책의 브레인 조지 케넌에게 보낸 서한 등이 수록돼 있다.(권재현 기자)

조선일보(06. 06. 10) 1997년 11월 영국 사상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타계 소식을 접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날 뉴욕타임즈 지는 벌린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기사를 한 면 통째로 실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에게 영국 국왕은 기사 칭호와 공로 서훈을 내렸다. 이 책은 벌린의 주저로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어 간 ‘자유에 관한 네 편의 논문’의 수정증보판을 우리 말로 옮긴 것이다.

-벌린의 사상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여러 가지일 뿐 아니라 때로 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따라서 윤리학이나 정치학 등의 인간 관계 학문 분야에서 ‘최종성’(finality) 즉, 일원론을 기대한다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박해와 불관용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벌린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면서 자유에 대한 논의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다. 벌린은 자유의 근본 개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제지나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추출한다. 그렇다면 외부의 간섭이나 방해가 없는 소극적 자유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적극적 자유론은 이성에 입각한 자기 지배를 이상으로 한다. ‘하나의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벌린은 유일 진리에 대한 허황된 맹신(盲信)이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전체주의자 등에 의해 악용될 소지에 대해 극구 우려하고 있다.

-벌린은 따라서 인간의 삶에서 선택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되풀이 강조한다. 다원주의와 소극적 자유가 인간적 상황을 넘어가는데 최선의 방책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다. 유일 진리 따위에 대해 환상을 가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오만이며, 이는 곧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덕적·정치적 미숙(未熟)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벌린의 글 속에는 이 시점 한국 사회를 향한 질문도 발견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진리는 끝내 승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종주의적 증오를 부추기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북한 체제를 미화하는 언동 등도 토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책을 곰곰이 읽어도 그가 어떤 처방을 내놓을지 분간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선택에만 촛점을 맞출 뿐, 선택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벌린은 시종일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보편적 이론은 존재할 수가 없음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소극적 자유를 자유의 알파요 오메가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자유에 대한 생각과 인간 존재론이 떼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면, 가치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자유에 대한 입장도 달라야 마땅하지 않은가? 가치의 객관성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소극적 자유를 강조하는 벌린의 문제의식은 현대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조(基調)와 거의 그대로 중첩된다. 따라서 벌린의 한계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벌린 특유의 만연체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의 진지한 노력 덕분에 책이 쉽게 넘어간다. 성실한 주석도 크게 도움이 된다. 벌린의 사상을 큰 틀에서 조망하고 평가하는 글이 빠져 아쉽지만, 8년에 걸친 번역의 수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사)

06.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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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6-12 06:47   좋아요 0 | URL
음... 이사야 벌린의 글을 함 읽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되는 포스트로군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6-06-12 07:44   좋아요 0 | URL
분량이 만만치는 않지만, '예의상' 읽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瑚璉 2006-06-12 11:21   좋아요 0 | URL
그냥 똘마니하면 안될까요 (T.T).

로쟈 2006-06-12 18:58   좋아요 0 | URL
'교양인' 노릇한다는 게 좀 힘들긴 합니다. '무시'당하지 않고 산다는 게 여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재작년 8월 중순에 '열차 속의 이방인 농담'이란 제목으로 올렸던 모스크바 통신문에서 히치콕/지젝의 맥거핀 이야기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지젝의 히치콕 읽기를 예전에 대략 다 정리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제오늘 비가 좀 흩뿌린 휴일이었던 만큼, 비 얘기부터...

모스크바에는 하루 종일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제법 많이 비가 내렸고, 토요일과 무관하게 나날이 '휴일'인 룸메이트와 나는 오후에 감자를 삶아먹고 마지막 남은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먹었다. 비 오는 날 창밖이나 바라보며 감자를 삶아먹는 일이, 어릴 적 내가 꿈꾸었던 ‘행복한 삶’, 곧 ‘더 바랄 나위 없는 삶’이었는바(그 이상을 바라는 건 몰염치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하루치의 ‘유토피아’를 산 셈이다. 게다가 저녁을 잔뜩 먹고 저녁잠까지 잤으니, 누릴 호사는 다 누린 셈이다.

정신을 차리고(=각성하고!), 요일과 무관한 본업에 또 착수하기 위해, 먼저 커피 한잔 마시려고 룸메이트의 방에 갔다가(주전자가 그 방에 있다), 룸메이트가 지난번에 공수해온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손이 갔다(내가 그에게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 룸메이트가 보드카를 마시러 간 사이에 잠시 둘러본다는 게 그만 뭔가를 쓸 만한 ‘구실’까지 찾게 되었다. 그건 ‘맥거핀’이다. 맥거핀에 대한 정의 그대로,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액션이 이루어지기 위한 순수 구실”의 역할을 하는 맥거핀. 이 글쓰기(=액션)는 순수하게 그 맥거핀 때문에 씌어진다.

 

 

 

 

모스크바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지젝의 책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3, 초판2쇄), <이라크>(도서출판b, 2004), 이 3권이다(앞의 두 권은 룸메이트의 것이다). 이미 <히치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읽은 바 있고(러시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몇 편을 제외하곤), <이라크>는 두 번째 읽고 있으며(따로 읽을 책도 없으니!), <숭고한 대상>은 가을에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영어본으로도 절반쯤 읽었었다). 읽는다는 건, 읽고 교정하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얘기이다.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 나의 할 일로 현재 확정된 것은 몇 편의 논문을 쓰는 것과 릴케와 지젝, 들뢰즈를 읽는 것 등이다. 그래야 나의 밥값이 떨어진다(*결과적으론 밥값을 다 치르지 못하고 나는 귀국했다).

적어도 역자들만큼은 자세하게 읽은 <이라크>에 대해서는 조만간(그래도 9월이나 돼야 가능할 것이다) 정리한 글들을 올릴 예정이다(*어느 정도는 계획을 이행했다). 그런 정리를 자청하는 건 일단 나 자신을 위해서이지만, 지젝에 입문하는 독자들이 좀더 ‘편하게’ 그의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나는 지젝이 좀더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좋아한다는 건 많은 일의 ‘구실’이 되어준다! 자신과 남들을 괴롭히는 일까지도?!).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지젝의 말을 약간 비틀면, 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너무 자세히 읽고 떠들어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더불어, 적당히 입다물며 침묵하는 건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표현을 빌면, 거의 자신이 저자인 걸로 착각한다(왜 아니겠는가!)...

 

 

 



이 글을 시작한 구실이 되었던 맥거핀은 앞에서 나열한 세 권의 책에 모두 나온다. 그건 히치콕 자신이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그가 종종 인용했다는 이 이야기의 주된 출전은 트뤼포가 쓴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먼저, 세 권의 책에서 관련 대목을 인용한다(<히치콕>에서의 직접적인 인용자는 지젝이 아니라 믈라덴 돌라르이다).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판을 다 독해해야 한다.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히치콕>, 72-3쪽)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에 관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그게 바로 맥거핀이다.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숭고한 대상>, 276-7쪽)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그것을 예시하기 위해 히치콕은 종종 다음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여기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 (<이라크>, 21-2쪽)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는 물론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이 대목을 읽어보지 않아서(그리고 분실했다) 이 일화가 어떻게 번역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현재 내가 참조할 수 있는 건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제목은 <히치콕이 말하는 영화>(모스크바, 1996) 정도의 뜻인데, 불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한 걸로 돼 있다. 러시아어본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1962년에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52시간 분량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며(사실 이런 류의 책으론 최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경우, 작년인가 나온 정성일의 ‘임권택과의 대화’는 바로 이 트뤼포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 헬렌 스코트가 통역을 맡았다(그러니까 트뤼포는 불어로 얘기하고, 히치콕은 영어로 얘기했다).

해서, 나온 책이 불어본(파리, 1966)과 영어본(런던, 1967)이며, 1980년(4월 24일) 히치콕이 사망하자 트뤼포는 마지막 16장을 추가하여 다시 책을 내는데, 제목을 <히치콕/트뤼포>(1983)라고 다시 붙였다(러시아어본의 겉표지 제목이 <히치콕/트뤼포>이다). 한국어본은 어느 판본을 옮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맥거핀’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조해야 할 책은 바로 이 책이다. 지젝이 맥거핀에 관해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간에 그 출처는 바로 이 책의 일화(=농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의 세 인용보다 먼저 인용되어야 할 것이 바로 <히치콕과의 대화>인 셈이다. 하지만 ‘현지사정상’ 지젝(돌라르)의 인용 번역만을 가지고 맥거핀 일화(번역)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러나 저마다 다르게!



먼저, 일화로 안내하는 내용.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를 보거나 <히치콕>을 보더라도, 히치콕이 이 ‘농담’을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은 없다. 러시아어본의 이 대목을 옮기면, “히치콕은 이 대상에 이름(=맥거핀)을 붙여준 일화(=농담)을 얘기하는데, 우연찮게도 ‘열차 속의 이방인’ 종류의 일화이다. 이 일화에는 결말이 다른 유고슬라비아 판(본)도 있다.” ‘우연찮게도’라는 건 같은 <열차 속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1951)이란 영화를 히치콕이 찍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류’라고 했는데, 만약에 이 농담이 여럿이라면 열차-속의-이방인 ‘시리즈’라고 해야 할 것이다(거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음,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와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핵심은 맥거핀이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라는 점이다.

번역에 대한 참견하자면, 읽기에 편한 번역은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해주는 번역이다. 사진으로 치면, 핵심은 뚜렷하게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점을 잘 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같은 대상을 놓고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으면 누가 찍더라도 대충 대상이 무엇인지는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찍은 사진과 평범한 사진의 차이는 그 초점 맞추기에 있다. 이야기를 가동/작동시킨다고 할 때, 초점은 ‘이야기’일까, ‘가동/작동’일까? 내가 보기엔 ‘이야기’인데,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면 아마도 ‘operate’를 옮긴 듯한 ‘가동/작동시키는’은 좀더 약화되어야, 즉 흐릿하게 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끌고가는’이나 ‘진행시키는’으로.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데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serve to operate’의 번역일까?).

같은 맥락에서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도 너무 강하다. 그것과 병렬관계에 놓여 있는 구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에 견주어서 그렇다. “특별한 중요성” 정도라고 하면 되고, 실제로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히치콕의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러시아어본으로 짐작해 보건대) ‘unusual’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국역본에 따르면, ‘fatal’인 듯도 하고). Unusual을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이라고 옮기는 것은 좀 과장이다. 아무런 의미/가치도 안 갖고 있는 맥거핀이 그들(=등장인물)에게는 아주 중요하다는 뜻을 전달하는 게 이 문장에서는 ‘핵심’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이다.



이제 본론이다. (1)“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2)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3)“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1)에서 돌라르는 아예 대화체로 옮기고 있는데, 그것이 예시적으로 잘 보여주는바 이 일화/농담에서 핵심은 두 사람이 대화이다(그리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결말이다). 나머지는 다 약화되어도 무방하다. 즉 두 사람 혹은 두 남자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상대방의 꾸러미/짐가방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내용. 일단 (1)에서 ‘하이랜드’는 좋은 번역이 아니다. 나처럼 ‘하이랜드?’하면서 영한사전을 뒤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the Highlands’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로 돼 있다. 그러니까 이건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며,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닌 이상 고유명사 ‘하이랜드’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스코틀랜드의 고지/고지대’ 정도로는 옮겨줘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라고 친절하게 옮겨주는 것도 초점을 잘못 맞춘 과잉친절이다).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도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없는데요.”로 충분하다(농담은 리듬과 타이밍이 중요하므로 짧게 받아쳐야 한다). ‘꾸러미/짐가방’으로 옮겨진 건 ‘pack’ 종류 같은데, 가장 무표적인 건 ‘가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3)은 좀 비경제적이다. 일단 ‘두 신사’가 만난 것부터가 그렇다. 히치콕은 그냥 ‘two men’이라고 했을 거 같은데, 지젝이 ‘two gentlemen’이라고 다시 고쳐 말했을까? 이 농담에서 신사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가장 무표적인 ‘두 사람’ 정도가 가장 무난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옆사람’ 혹은 ‘앞사람’이면 된다. ‘운반하는’은 ‘갖고 가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라고 실제로 ‘이상하게’ 물어봤을까? 적어도 농담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자’가 ‘표범’으로 바뀐 건, 지젝의 착각인지 유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충실한’ 역자의 ‘창작’일 리는 없을 테니까(주전자가 항아리로 바뀌는 것처럼). 어쨌든,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도 좀 어색하다. (1)에서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죽이다’는 ‘kill’의 번역일 테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말로는 (2)에서처럼 ‘잡는다’고 한다.



이제 가장 핵심이 되는 결말. (1)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2)“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3)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1)과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2)/”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3)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나는데, 보다 적절해 보이는 건 다수인 (2)/(3)이다. 그리고, “그것은 맥거핀이 아니다”의 원문은 “it is not McGuffin.” 같은데(“McGuffin is not”이란 표현이 가능할까?), 러시아어본은 마치 “So, it means, McGuffin is nothing at all.”을 옮긴 것처럼 돼 있다. 그리고, 이게 좀더 흥미롭다. 즉, “맥거핀이 아닙니다”란 부정/부인 대신에, “맥거핀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란 뉘앙스의 ‘정의(definition)’가 이 농담에는 함축돼 있는 걸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지젝이 말하려는 바가 더 잘 전달된다. 즉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라거나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but it works!” 어떤 도구가 잘 작동/작용한다는 뜻을 우리말 구어에서는 어떻게 전달하는가? “잘 들어요?” “잘 먹혀요?” 그럼, 이제까지의 내용을 재구성해보기로 하자. <숭고한 대상>의 번역을 바탕으로 ‘의역’하면: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묻습니다. “저기, 짐칸에 있는 가방은 뭔가요?” “아, 그거요,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지요?” “아, 그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거예요.” “그런데, 거긴 사자가 없잖아요?” “맞아요,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네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마지막 대답만 다르다. “그래도, 얼마나 잘 먹혀 드는데요!” 그리고 실상 <이라크>에서 지젝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라고 말할 때 누락하고 있는 것은 그 작용/효과이다. 그게 맥거핀이라는 걸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이었다.

맥거핀이 작용한다, 효과가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작용/효과의 대상은 무엇인가? 히치콕에게선 이야기이다(부시에게선 전쟁이었지만). 그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구실(만)을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상(=밥)은 누구인가? 맥거핀에 말려든/먹혀든 순진한 동승인이다(그리고 파병 중인 한국이다). 그 기의만을 옮길 때 맥거핀에 가장 적합한 우리말 번역어는 ‘헛물’이다. 마신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없는 물이 ‘헛물’이다. 히치콕의 농담에서 직접적으로 헛물을 들이킨 사람이 바로 동승인이며(한국이며), 그의 영화에서는 관객들이다(궁극적으로는 그 헛물을 들이킨 자가 부시이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들)이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맥거핀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지젝을 반복하자면,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유사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맥거핀은 신이라는 것! “신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걸 갖췄다. 그 한 가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맥거핀 신자들이 맥거핀 전쟁을 비난하는 건 따라서 모순이다.)

04. 8. 14-15.

 

 

 



P.S.1. 이 글의 절반 이상은 토요일 저녁 이곳 NTV에서 방송된 히치콕의 <프렌지(Frenzy)>(1972)를 보면서 작성한 것이다. 나머지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를 보면서. <프렌지>는 히치콕 말년의 작품으로, 그는 1976년에 <가족의 음모(Family plot)> 한 편만을 더 만들었을 뿐이다. 다음주 토요일에도 히치콕의 영화를 방영한다는 걸로 봐서 NTV에서는 한동안 히치콕의 영화들을 내보낼 모양이다(좋은 기회이다!). <프렌지>는 여자들을 넥타이로 목 졸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의 얘기니까, 제목이 뜻하는 바는 ‘미친 놈’ 정도이겠다. 그렇다면, 그 정도는 야코죽이는 ‘유영철’을 다룬 (가상의) 영화 제목은 <프렌지, 프렌지, 프렌지>쯤이 되어야 할 것이다.

P.S.2. 맥거핀 번역에 대해 몇 가지 참견의 말을 했는데, 실상 이론서 번역은 그렇게까지 섬세한 걸 요구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섬세하지 않은 건 ‘오역’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쓸 만하지만, 이론서는 내용(=뜻)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론서 번역은 ‘이해한 내용’만을 옮겨주면 된다. 반면에 문학작품 번역은 ‘이해한 내용’을 다시 ‘작문’해야 한다(기표, 혹은 형식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더 쉬운 쪽은 이론서 번역이다. 거기서는 다만, 이해의 난이도가 문제될 따름(그래도/그래서 나는 이론서 번역에서 한국어의 유려함이 이해의 정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해서, 나의 ‘참견’은 공허하다. 다만, 공허한 참견을 일삼는 것은 모든 번역에는 ‘긴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나부터도 번역에 매달려 있지만, 그것이 오역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이라크>의 번역도 마찬가지인데,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아쉬움이 많이 남을 테지만, 이론서 번역으로서는 무난하다. 그렇다고 오역이 없는 건 아닌데,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란 랭보의 말을 비틀면, “오역 없는 번역이 어디 있으랴!”이다. 이 자리에서 크고 작은 오역의 사례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고, 중요한 것 한 가지만을 일단 지적해둔다. 사드에 관한 것이다(중요하다고 한 것은, 사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사드의 <규방철학>에서 돌망스는 “우리에게서 작열하는 빌어먹을 천국 불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외제니를 부른다. 이것은 휠덜린이 시인의 개념을 ‘천국에서 온 불’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이라고 전개한 것과 동일한 해에 쓰여졌다.”(225-6쪽)

동일한 해라는 건 1806년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시기적으론 사드(1740-1814)의 말년이며, 그래서 <규방철학>은 그의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사실 이 책은 <안방철학>이란 제목으로 국역돼 있지만, 역자가 참조한 것 같지는 않다(나는 절판된 그 책을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했었는데, 내 기억에는 마광수 교수가 서문인가를 썼다). 일곱 개의 대화로 구성돼 있는 이 책은 분량이 200쪽 정도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그러니까 책을 다시 낼 만하다는 얘기이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대목은 세 번째 대화에 나온다.

인용에서 ‘천국의 불’ 혹은 ‘천국에서 온 불’이란 비유가 뜻하는 바는 도덕 법칙이고 양심이다(혹 역자는 ‘천국의 불’을 ‘향유’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따라서, 사드의 주인공인 ‘향락주의자’ 돌망스가 자신의 파트너인 외제니를 “도덕률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부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이론서 번역에서 그런 경우는 대부분 오역이다). 도덕법칙을 향유하기 위해서? 영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어본을 다시 옮기면, 돌망스는 “우리의 가슴에서 불타고 있는 천국의 불을 정액의 물줄기(=홍수)로 끄기 위해서” 외제니를 부른다(그래야 말이 되지 않는가?).



러시아어본 <규방철학>(1992)은 이 대목에서 ‘정액’이란 말을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은어로 썼다(*이 글이 씌어진 이후에 국역본 <규방철학>이 재번역돼 출간됐다). 그래서 짐작에 ‘빌어먹을’이라고 역자가 옮긴 것이 정액을 뜻하는 영어 은어이지 않을까 싶다. ‘거시기의 물줄기’. 아무래도 역자가 사드를 너무 칸트적으로 (점잖게) 읽어서 빚어진 오역이 아닐까 한다. 알다시피, 라캉의 ‘칸트를 사드와 더불어(Kant with Sade)’란 ‘교훈’이 뜻하는 바는 사드를 칸트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칸트를 사드적으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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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8월 중순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의 일부를 따로 떼서 옮겨놓는다. '열차 속의 이방인 농담'이란 글에서 번역에 관한 몇 마디로 어쩌다 들어갔던 대목인데, 중요한 저작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 독서계의 '관행'에 대한 불만을 얼마간 늘어놓고 있다. 그 관행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제목은 '침묵에 대하여'라고 고쳐달도록 한다.

 

 

 

 

낮에 (모스크바의) 인터넷카페에 갔다가 알라딘의 신간서적들을 검색해봤는데, 지젝의 경우 ‘최신간’인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의 경우 ‘기이하게도’ 한 건의 리뷰도 붙어 있지 않았다(*적어도 이 글을 쓸 시점에서는 그러했다. 지금도 이 책은 부당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요컨대,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거의 100쪽 분량의 2판 서문까지 쓸 만큼 지젝이 애착을 갖고 있는 책이며,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지젝은 곧 들뢰즈를 추월할 것이다) ‘지식인’ 혹은 ‘사상가’의 ‘대표작’이 이런 ‘냉대’를 받는다는 건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답지 않은 일이지만, 모두들 갑자기 ‘신중해진’ 것인지?

물론 두뇌를 긴장시키는(‘머리를 아프게 하는’이 아니라) 두툼한 ‘이론서’를 완독하고 뭔가 한 마디(=리뷰) 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하버마스의 주저 가운데 한 권인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이 번역돼 나왔을 때에도 이와 같은 ‘기이한 무관심’이 조성되었는바, 나는 아직도 그 책에 대한 ‘리뷰’를 보지 못했다. 짐작에, 그런 사정이 지젝의 경우에도 재연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지레짐작일까? 하지만, 내 ‘경험’은 그런 지레짐작의 편을 들도록 부추긴다. 다시 번역돼 나온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에 대해서도 너무나 ‘조용한’ 걸 보면(민음사본이 나왔을 때 얼마나 떠들썩했던가!), 한국의 ‘독서계’(혹은 ‘지식사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카르텔’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침묵의 카르텔…



얼마 전에 한 출판사에서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거의 없는 말 그대로의 아이디어 제안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누설’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이 제안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여간에, 제안자는 내가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걸 알고 나의 ‘책읽기’에 ‘유로지비’란 말이 들어간 제목을 붙이는 건 어떨지 구상해본 듯했다. ‘유로지비’란 러시아어는 ‘바보 성자’로 흔히 번역되지만, 일차적으론 ‘광신도’를 뜻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를 일컫는 말이 이 ‘유로지비’인바(그는 리자베타 또한 ‘유로지비’라고 부른다), “이 여자는 유로지비구나!”란 말은 “이 여자는 바보 성자로구나!”라는 긍정적 경탄이 아니라, “이 여자는 광신도로구나!”라는 부정적 인지를 뜻한다. 광신도는, 대체적으로 ‘냉정하다’는 얘기를 듣는(‘쿨하다’로 번역하면 나쁜 뜻이 아니지만) 내가 가장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자기-이미지이지만(평소에 나는 좀처럼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나는 그걸 성격상의 ‘결함’이라고까지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비위가 강한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혹 유로지비의 인상을 주었다면, 그건 아마도 남들이 적당히 침묵할 때 떠들어댔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조용히’ 떠들어댔음에도!).

무엇에 대해서 떠들어댔는가? 책을 읽고 쓰는 일을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는(물론 그런 일이 아직 밥벌이도 못 된다는 게 유감스럽다) 나의 주된 관심은 좋은 책들을 읽는 것이고 내 생을 바꿔치기할 만한 책들을 쓰는 것이다(그리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후자는 물론 떠들면서 해야 할 일이 전혀 아니며, 내가 떠드는 건 주로 전자에 대해서이다. 즉, 어떻게 하면 좋은 책들을 읽을 수 있을까? 제대론 된, 제값을 하는 책들을. 나는 그런 책들에 경탄하는 한편으로 그렇지 못한 책들, 제대로 안된, 제값을 못하는 책들을 혐오한다. 이건 생태계의 문제이다(가타리가 ‘생태학’을 문제삼는 것과 유사하게). 더불어, 건강의 문제이다(그리고 돈의 문제이다). 불량서적들은 불량식품들만큼이나 유해한바, 정신의 양식이 아니라 독이다.

물론 적당한 불량식품(가령 불량감자들)을 섭취함으로써 그에 대해 ‘내성’을 키우는 것도 생존의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으리라. 즉 불량서적들도 익숙하게 읽다 보면 또 그런대로 적응이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코흘리개들을 등쳐먹는 값싼 불량식품이나 불량서적들에나 해당한다. 그리고 대개 그런 불량식품/불량서적들은 ‘나 불량식품/불량서적’이라고 자신을 공개/공표하며, 오히려 그런 ‘불량함’으로 식자들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불량식품/불량서적이라고 공개돼 있고, 또 그걸 인지한 상태에서 먹거나 읽는 행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나의 관심사도 아니다.

내가 문제삼는 건, 값비싼 불량식품/불량서적들인바, 이런 것들은 겉으로는 멀쩡하고 고급/고상한 척하지만, 실상은 엉터리 약재와 정교한 무지로 가득 채워진 건강보조식품들이고 ‘고급 교양서’들이다. 즉, 대체로 ‘냉정한’ 나를 분개하도록 만드는 것은 (1)값비싼 것들이면서, (2)그래서, 고상한 체하는 것들이면서, (3)실상은, 부실한 엉터리인 것들이다. 물론 이 세 가지가 모두 결합돼 있는 경우. 그런 경우에 나에겐 ‘저자에의 의지’가 아니라 ‘교정원에의 의지’가 발동한다. 그 ‘교정원에의 의지’란 건, 세상을 좀 바꿔보겠다는 ‘거룩한 의지’가 아니라(세상이 좀 바뀌는 건 부대효과로서나 기대할 만한 일이다), ‘체하는 것들’의 (문화적) 상징폭력을 못 봐주겠다는 ‘저항에의 의지’이다(왜, 문화적 폭력뿐이겠는가, 경제적 착취이기도 하다! 나처럼 벌이도 변변찮은 사람의 돈을 갈취하는!).

지식인들이 위선적인 거야 그들의 유구한 내력이지만, 적어도 책은 정직해야 한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결을 말하자면, 위선적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자리(=포지션)을 보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책을 쓰거나 옮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식인으로서의 ‘상징적 위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흔한 방법도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다. 이건 딜레마일까? 이 딜레마를 돌파/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은바, 두 가지 방법, 혹은 두 가지 ‘행위’가 있다(지젝의 독자라면, 그에게서 ‘행위’란 말이 얼마나 숭고한 의미를 갖는지 알 것이다).

첫째는, 아무도 모르게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다(이땐 책이라기보다는 ‘논문’이라고 해야겠다). 혹은 자기가 낸 책은 자진해서 자기가 다 사들이는 것이다.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않을 책이지만(대학출판부들에서는 이런 책들을 곧잘 낸다), 덕분에 안전하게 저자로서 행세할 수 있다. 이걸 ‘유사-행위’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둘째는, 정말로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 즉 ‘제대로’ 책을 쓰거나 옮기는 것이며(이런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흔하지 않다. 진정 고상하고 고귀한 것들은 드문 것인지?), 이것이 진정한 ‘행위’라고 불려질 만한 것이다. 창작행위, 번역행위...

다른 자리에서 나는 번역자들을 ‘성자들’이라고 일컬은바, ‘자학적일’ 만한 사회적 홀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먹을 만한 ‘정신의 양식’을 생산해내는 일이야말로 성자의 일, ‘바보 성자’의 일에 값한다(나는 이 성자들이 합리적인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바보’란 딱지를 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물론 여기서도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성자들과 유사-성자들이 있는바(유사-성자들은 성자들의 이면인 것인지도 모른다. 즉, 유사-성자들을 제거한다면, 성자들도 남아나지 않을지 모른다), 이에 대한 분별을 게을리하는 것은 “굶주림과 다이어트를 등치시키는 것”만큼이나 외설적이며 무책임한/부도덕한 일이다(지젝은 <이라크>에서 이 비유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는데, 한번은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 개념을 비판하면서이고, 또 한번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교적(秘敎的) 지식’ 개념을 비판하면서이다).

 

 

 

 

지젝의 비유를 계속 쓰자면, 내가 떠들어대는 건 일종의 ‘다이어트 비판’이다. 정신의 ‘부실한 양식’에 대한 이 다이어트주의자들의 변명? “다 당신의 다이어트를 위해서야!”(“아는 게 병이잖아?” “그거 알아봐야 체한다구!”) 하지만, 언제나 굶주려 있는 나의 정신은 ‘다이어트 사절’이며, 정말로 알고 싶다. 우리에겐 정말로 ‘침묵의 카르텔’이 있는 것인가? 거기에서 나만 제외/배제돼 있는 것인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떠들어대는 건 정말로 순진한 ‘바보짓’인가? 유로지비의 짓인가?..

지젝이 지적한바 ‘음모론’은 불쌍한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더불어 그가 지적하는바, 우리주변엔 진짜로 음모들이 있다!..

04. 08. 14./ 06.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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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5월에 모스크바 통신문에 올렸던 걸 옮겨놓는다. 원래 제목은 '키노와 류베와 오쿠자바'이지만, 잡다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냥 '모스크바의 5월'이라고 해둔다. 원래는 지난달에 정리를 해두었어야 마땅했지만,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비가 오는 날씨가 문득 비가 자주 오던 그해 모스크바의 5월을 떠올리게 했다.

5월 9일은 (분위기로 보아) 러시아 최대의 국경일이다. 다름아닌 승전기념일인데, 1945년 5월 9일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공식적으로 항복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작년 2005년에 승전 6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된 바 있다. 사진은 1945년의 베를린). 당시 소련은 미국, 영국 등과 함께 연합군에 속해 있었다. 2차 대전을 다룬 대부분의 전쟁영화들은 주로 미-영연합군과 독일이 대치했던 서부전선에서의 참상과 전쟁영웅들을 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낳은 것은 독일과 소련이 격전을 벌인 동부전선이었다(최대 격전지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묘사한 영화와 책들이 국내에도 소개돼 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2천만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생중계된) 공식 행사는 우리의 국군의 날 행사와 비슷하게 진행됐는데, 크레믈린 광장에 도열한 각 부대 장병들에게 국방장관이 “59주년 전승기념일을 축하한다”고 하면, 매번 장병들이 “우라, 우라, 우라”(만세삼창)으로 화답하는 식이었다. 장관의 축하가 끝나고 푸틴 대통령에게 경과를 보고하자, 이어서 푸틴의 치사가 이어졌고, 그 이후엔 열병과 행진이 시작됐다.

바로 그제(7일) 푸틴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기 때문에, 크렘믈린 광장에서의 사열과 열병이 이틀만에 또 진행된 셈. 크렘믈린의 대통령궁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취임식은 황제의 대관식을 방불케 했는데(사실, 러시아 대통령은 임기제 ‘황제’이다), 열병식이 벌어진 장소는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개봉)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3세로 분한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가 사관학교 졸업생들의 열병을 받던 그 장소였다.

공휴일이 휴일인 토요일이나 일요일과 겹치는 경우 러시아에서는 다음 월요일도 자동적으로 휴일이 된다. 그래서 내일(10일)까지가 휴일인 셈인데, 지난 메이 데이 이후 승전기념일을 전후한 대략 10일간이 러시아에서는 거의 연휴인 듯싶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 기간 동안에 여행일정을 많이 잡기도 하며, 학교 부근은 정말 조용하고 한산하다. 물론 지난 목요일에 내가 다니는 필팍(인문대학) 건물 앞에 있는 승전기념탑(혹은 전몰용사 추모탑) 앞에서는 참전용사들도 참여한 기념식과 헌화식이 치러졌다. 망치와 낫이 그려진 구소련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군복과 정장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앞장을 서고, 젊은 학생들이 뒤를 따랐으며, 장엄한 군가들이 울려퍼졌다.

 

 



내가 처음 들은 노래는 <모래시계> 주제가로 잘 알려진, 유리 감자토프의 시에 곡을 붙여서 이오시프 코브존이 부른 '백학'이었다(이 이름을 딴 한국식당도 모스크바 강변에 있다). 알다시피, 이 노래는 2차 대전시 전사한 전우들이 백학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오늘 낮에 나에게도 얼굴이 낯익은 (아마 국내에도 다녀간 듯) 러시아의 젊고 유명한 테너 가수가 전쟁가요/가곡만을 부르는 콘서트가 국영 '러시아'방송을 통해 방영됐는데, 이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시는 청중들도 여럿 있었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가끔 생각하지,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용사들이,
잠시 고향 땅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백학으로 변해 버린 듯하여

그들은 그 옛적부터 지금까지
날아만 갔어, 그리고 우리를 불렀어
그래서 우리는, 자주 슬픔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잊은 건 아닐까.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 하늘에 지친 학의 무리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는 아닐는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더불어
나는 회청색의 그 어스름 속을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 둔 그대들 모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놓아 부르면서.

노래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면, 지난주 발음교정 수업시간에 유명한 그룹 <류베(Lyube)>의 노래를 들은 것이 계기가 돼(나는 이름만 듣고 있었는데), 문구점에서 그들의 MP3음반을 샀다. 내가 산 1집에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발표한 6개의 앨범이 들어가 있었는데(총 6시간 42분 분량), 이 선집 시리즈는 올해 새로 나온 것이다(값을 120루블=6천원). 그리고 마침 지금 <제1방송>에서는 류베의 콘서트를 방영하고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5xSOK7ODLSM).

활동 경력이 15년쯤 된 듯한 중견밴드인데, 악기를 연주하는 멤버들은 6명이고, 솔리스트로 보컬을 맡고 있는 니콜라이 라스토르구예프는 공식적으로 ‘러시아 인민 예술가’로 돼 있다(그들의 명성을 알게 한다). 그는 짧게 친 머리에(소위 ‘깍두기 머리’) 큰 키는 아니고 덩치가 좋은, 그러면서 단단해 보이는 체구의 아저씨이다(룸메이트는 버스기사처럼 생겼다고 했다). 나는 이런 밴드가 맘에 든다.

 

 



류베의 앨범과 같이 산 건, 나온 지 몇 년 된 듯한 <키노(Kino)>의 선집 디스크 중 제3집이다(한국에서 많이 듣던 노래들도 다 들어가 있다). 역시 MP3이고, 87년부터 90년까지의 공연실황들을 주로 담고 있으며, 영화에 출연해서 부른 노래들도 들어가 있다. 영화세미나 시간에 빅토르 최가 반항적인 대학생으로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잠깐 보기도 했다. 지금은 요절했지만, 그는 그룹 키노를 이끌던 리더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교포 3세쯤 될까? 키노의 노래 대부분은 그가 작사/작곡한 것이다). 빅토르 최의 키노는 내가 학부에 다닐 때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였다(http://www.youtube.com/watch?v=PNZYPqdtNnU).

70년대를 대표하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은 비소츠키나 오쿠자바(발음은 ‘아꾸자바’) 같은 ‘음유시인’들이었는데(이들은 현재 공식적으로 20세기 문학사에 편입돼 있다. 어제의 전야제에 이어서 오늘부터 ‘오쿠자바 탄생 80주년 기념 페스티발’이 한 보름간 열린다), 사정을 잘은 모르지만, 이런 러시아식 록밴드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인 80년대 중반부터이지 않을까 싶고, 키노는 당대 최고의 밴드였다(물론 국내에도 소개된 지는 오래됐다). 이제는 ‘전설’만이 남았을 뿐인데, 그들의 노래가 사랑 받는 한 그 전설은 그래도 영원히 ‘현재적’일 것이다. 아르바트거리에 남아있는 추모의 벽처럼(온갖 페인트의 헌사가 바쳐진 이 낡은 벽만은 재건축 불허라고 한다).

요즘은 이들의 노래를 하루에 몇 시간씩 틀어놓는다. 고급스런 러시아 발레나 오페라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이런 대중음악이다. 물론 요즘 미국식으로 ‘팝’화된 러시아 미소년/미소녀들의 노래까지 좋아하는 건 결코 아니다. 난 좀 구닥다리가 좋다(아코디언이 들어간 밴드를 좋아한다). 해서, 노래가 맘에 들면, 가사를 프린트하기도 하고. 또 맘에 드는 가수들을 ‘발견’할 때까지는 아마도 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을 것 같다. ‘러시아식’이라고 했는데, 나는 하드록과 현란한 기계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대신에 노래에 서정과 절규가 적절히 배합돼 있는 걸 좋아한다(클래식보다는 뱃노래를 좋아한다). 대중음악의 경우에도 언제나 더 오래 남는 건 기교가 아니라 진정성이다. 거기에 잘 맞는 건 러시아나 북유럽의 밴드들 같다(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 나오는 핀란드 밴드들!). 아, 수업시간에 들었던 류베의 노래가 지금 나오고 있다. “내 이름을 조용히 불러줘.”(빠자비 미냐 찌하 빠 이미니 “Pozovi menja tikho po imeni” http://www.youtube.com/watch?v=LTlmDzyQpJU) 같이 듣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여기까지 쓰고서는 1호선 취스뜨이 쁘루드이역에 있는 '소브레멘닉'(‘동시대인’이란 뜻) 극장에 가서 연극 <뇌우>를 보고 왔다. ‘취스뜨이 쁘루드이’는 ‘깨끗한 연못’이란 뜻인데, 전철역에서 극장으로 10분쯤 걸어가야 하는 길 오른편에는 공원과 함께 (연못이라고 하기엔) 좀 큰 연못이 있고, 수상 공연장 같은 것도 있다. 소브레멘닉에서는 지난 4월 중순에도 러시아에 온 이후 최초로 연극관람을 했었는데, 그때 본 프로그램은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연출한 <악령>이었다(객석이 꽉 찼었다).

물론 카뮈가 각색한 대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사실 기대를 갖고 본 이 연극이 기대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줄거리 따라가기 바쁜 연극이었다. 배역들도 내가 읽은 원작과는 너무 다르고), 그동안 연극 관람에 큰 흥미를 갖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스트롭스키 원작의 <뇌우>는 TV에서도 한번 소개가 됐고, 러시아 선생님의 권유도 있어서 관람하게 된 것.

제목은 <뇌우>이지만 주제와 인물들만 원작에서 따온 2막의 ‘판타지’극이었는데, 여성 연출가가 여러 장면에서 안무까지 도입하여 새롭게 시도한 공연이었다. 오스트롭스키는 19세기 러시아 최대의 드라마작가로서 <뇌우>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데(열린책들에서 나온 <러시아희곡1>에 번역돼 있다), 볼가강 주변 소도시의 상인집안에서 엄한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 카테리나가 장사를 떠난 남편 몰래 정부와 바람을 피웠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남편에게 자백하고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작품에 나오는 ‘뇌우’는 억압적인 사회적 규범을 상징하는데, 카테리나는 이 뇌우 소리를 두려워했었다. 조금 다르게 이해하면, 이 드라마는 여성의 ‘볼랴’에 대한 공포를 주제로 하고 있다.

‘볼랴’는 ‘자유(의지)’란 뜻인데, 그걸 여기서는 ‘여성적 욕망’으로 이해해도 별 무리는 없다(그리고, 언제나 여성의 욕망은 남성의 욕망보다 더 크다! 어느 남자가 바늘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는가?). 이 볼랴는 여성 자신에게도 낯선 어떤 것이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여성성은 여성 자신에게도 타자이다?). 거기에 대응하는 적합한 우리말은 ‘자유부인’이라는 조어에서의 ‘자유’이다. 그것은 사회의 상징적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제한되고(거세되고), 금지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아들의 어머니로서 시어머니-여성은 (자신의 욕망이기도 했던) 며느리-여성의 욕망을 억압하고 감시하며 통제한다! 때문에, <뇌우>와 <자유부인> 모두에서 여주인공이 사회적인 응징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회적 응징의 반복적인 무대화는 거꾸로, 이 여성적 ‘볼랴’ 혹은 ‘자유’에 대한 사회의 신경증적 불안을 무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사를 알아듣긴 힘들어도 전반적인 줄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내용을 따라가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보고 난 인상은 너무 어중간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정격 공연이 아닌, ‘파격’ 공연인 바에야 더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더 파격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공연은 몇몇 새로운 장면에도 불구하고 이도저도 아닌 식이 돼 버렸다. 게다가 2막은 1막에 비해서 긴장도 떨어지고, ‘뇌우’의 상징성도 거의 사용되지 않은 가운데 짧게 끝나버려서 왜 굳이 제목이 ‘뇌우’인지가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 내막에 대해서 오래 궁금해 할 여유는 없었고, 나와 룸메이트는 주연배우들의 인사가 끝나자 극장문을 나섰다. 나는 레프 도진의 <바냐 아저씨>나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얼마전 읽은 공연평에 의하면, 한국에도 다녀간 바 있는 도진은 생전에 ‘거장’이 되었다).

러시아에서의 대부분의 공연은 저녁 7시에 시작한다. <뇌우>도 마찬가지였고, 막간의 중간 휴식 15분 정도를 빼면, 2시간 20분쯤 되는 공연이었던 듯싶다(<악령>은 3시간이었다). 오늘은 전승기념일이라 그런지 공연 시작 전 잠시 동안 관객 전체가 기립하여 방송에 나오는 구령에 따라 묵념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러시아에선 러시아식으로 하는 수밖에!). 그런 거 저런 거 빼면, 2시간 10분쯤? 9시 45분쯤 극장문을 나섰는데, 해가 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제 막 어둠이 내리고 있었는데, 더불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5월은 싱그럽다. 봄비에 실려서 가로수 냄새와 풀 냄새까지 코끝에 스친다(봄비가 내리는 광화문을 나는 좋아했었는데…). 보슬비를 맞으며 걸어가는데, 왼편의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이제 막 어느 밴드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의 노래가 귀에 익었다 싶었더니 류베의 노래였다. ‘혹시나’ 싶었지만, 류베는 아니었고,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젊은 밴드가 류베의 대표곡 하나를 부르고 있었다. “안개 저 너머에”라는 발라드. 푸른 바다에서 배를 타고 안개 저 너머에 있는 고향으로 귀향하고 있는 한 사내를 노래하고 있다. 아직은 멀었지만, 나도 푸른 하늘, 구름 저편에 있는 고향으로 귀향할 날이 올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 TV에서는 두 곳에서 오쿠자바 특집방송이다(사진은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오쿠자바 동상). 한 곳(‘문화방송’)에서는 생전의 오쿠자바의 공연 장면과 회고 등을 내보내고 있고, 다른 한곳(렌티브이)에서는 오늘부터 시작된 오쿠자바 페스티발을 녹화해서 보내주고 있다. 한 음유시인을 기억하는 야외 공연장에는 남녀노소 만 여명 이상이 질서정연하게 모여 있다.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데 있어서 러시아 사람들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다(프랑스 사람들과 한번 비교해 봐야겠지만). 다음주에는 오쿠자바 음반도 하나 사야겠다. 이 참에 당신(들)도 한번 구해보시기를. 키노와 류베와 오쿠자바(그리고 비소츠키)를…



04. 5. 9./ 06.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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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프리뷰'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다(이로써 중복카테고리까지 포함 15개가 되었다). 그간에 주로 '로쟈의 인용'으로 분류해놓았던 신간 리뷰들을 따로 모아놓으려고 한다. 신간에 대한 나의 '선입견'들을 늘어놓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언론의 신간 리뷰를 옮겨놓고 정리하는 자리로 활용할 예정이다(즉, 이 카테고리 또한 일종의 스크랩북이 될 터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는 부담을 얼마간 덜 수도 있다는 계산도 없지는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쏟아지는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없으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선별해주는 '리뷰'이다. 나는 이 리뷰들을 관심에 따라 선별해놓고자 한다(그래서 '프리뷰'라고 이름붙였다. 'preview'이면서 'freeview'인 '프리뷰'). 게으른 독자의 부지런떨기라고나 해야 할까?..

이 페이퍼에서 프리뷰의 대상으로 고른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그와 관련한 책 두 권이 최근에 출간되었고 그 두 권을 함께 다루고 있는 언론의 리뷰 두 개를 옮려온다. 한겨레와 한국일보의 리뷰들이다(온라인에 떠 있는 한국일보의 리뷰 기사는 지면의 최종본이 아닌 초고본인 듯한데, 실제 지면 기사를 참고해서 보충했다).

 

 

 

 

한겨레(06. 06. 09) "보수세력 정체성은 미국 백인의 세계"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탈식민주의 문제설정을 한국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제3세계 실천적 지성의 상징이었던 사이드를 통해 혼란에 빠진 한국 지성계에 새로운 싹을 틔우려는 시도다.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책세상 펴냄)는 사이드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쓴 책이다. 사이드로부터 직접 배우고 그를 국내에 소개한 김성곤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 오길영 충남대 교수 등 영문학자 11명의 글을 모았다.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이란 상투어는 좀 쑥쓰럽지 않을까? 사이드에 관한 국내 유일의 단행본 저작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밖에 없는 데 말이다. 설혹 논문 한두 편을 쓴다 하더라도 그게 '국내 최고의 권위'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면 좀 부끄러운 일 아닌가?

 

 

 



-<오리엔탈리즘>으로 널리 알려진 사이드의 사유는 ‘타자에 대한 이해’로 집약할 수 있다. “다른 문명의 고유성을 억압하는 서구의 지배담론을 해체함으로써, 재현되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김상률·오길영)하려는 이론적 작업이다. 그 뼈대는 ”서구가 그동안 어떻게 동양을 교화하고 문명화하고 지배해야할 ‘타자’로 취급”(김상곤)했는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한국은 21세기 오리엔탈리즘이 활개를 치는 땅이다. 애초 사이드는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에 주목했지만, 지금은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이 문제다. 필자들은 “(한국) 지식층의 의식은 미국적 오리엔탈리즘에 적잖이 침탈당했고, 우리 삶 도처에서 덫처럼 도사린 구체적 현실이 됐다”(설준규)고 짚었다. “선/악, 문명/야만, 우수/열등 등의 이분법적 이야기에서 자신의 정체를 긍정적 세계인 백인의 세계와 동일시”(고부응)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미국화를 지향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한 결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고즈윈 펴냄)은 이 대목에 각별히 주목한 결실이다. 언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일했던 성일권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연구위원이 썼다. 사이드의 저작인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을 국내에 번역·소개했던 그는 이 책에서 한국 보수 지식인들의 담론 체계를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빌려 비판했다.

-성 위원이 보기에 “‘악의 레짐’과 ‘선의 레짐’이라는 부시 미 대통령의 수사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 도식을 재현”한 것이다.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의 궁극적 목적은 동양을 관리·지배·억압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지옥과 같은 공산국가인 북한, 미국의 도움으로 아시아 자본주의의 총아가 된 남한이라는 신화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신화 속에 한반도가 갇혀 있길 바란다.”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은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국 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독재정권의 분단논리, 강대국의 냉전논리, 일본의 식민지배논리가 만들어낸 허구들의 조합이다. 그 담론 체계는 당연히 실제 현실과는 무관하다.” 성 위원은 ‘신우익’(뉴라이트)을 그 대표주자로 꼽았다.

 

 

 



-신우익은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을 내재화하고 이상화한 ‘복제 오리엔탈리즘’”을 구현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악의 축 북한과 남한의 친북정권을 무너뜨려 한반도를 명실상부한 팍스 아메리카나 제국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성 위원은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친북, 좌파, 반미라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한국 사회를 구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성 위원은 류근일·김대중·조갑제·이영훈·유석춘·제성호·정진홍 등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구현하는 미디어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이들에 대한 비판도 시도했다.

-아직 거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빌려 한국 지식사회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참신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에서 정정호 중앙대 교수는 “(사이드의) 포스트식민이론이 해체이론·다문화주의론 등과 같이 또다른 ‘무장해제이론’으로 오용되어 아무런 실천적 역할을 해내지 못하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새로운 형태로 계속 변장하는 신식민주의와 신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포스트식민론을 실천의 대항담론으로 전화시키자”고 제안했다.(안수찬 기자)



에드워드 사이드 → 제3세계 실천적 지성…차이를 우열로 왜곡시키는 제국주의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영원한 방랑인’이었다. 프린스턴대·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컬럼비아대에서 가르쳤다. 명저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통해 차이를 우열로 왜곡시키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다. 아랍인이면서 기독교도였으며 동시에 이슬람을 옹호했다. 팔레스타인 망명 국회 의원을 지냈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을 비판하기도 했다.

 

 

 

 

-아랍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고, 수준급의 실력으로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던 천재였다. 미국 유대계 지식인들의 비난에 둘러싸여 테러 위협까지 당했지만, 백혈병과 싸웠던 말년에는 유대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비판적·실천적 지성인을 대표했지만, 마르크스주의 대신 좌파 지식인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는 생전에 “어디를 가나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낯선 나라처럼 느끼는 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라는 12세기 독일 수도승 후고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갈수록 이 사회가 ’낯설어지는’ 한국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사이드의 후예다.(안수찬 기자)

한국일보(06. 06. 10) "차이는 우열이 아니다" 끝나지 않은 외침

-평화와 공존이라는 인류의 소망을 조롱하듯, 21세기에 들어서도 증오와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세계는 한 지식인을 떠올린다. 서구의 일방주의를 비판하고 동서양의 교류와 소통을 강조한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는 한국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이드의 삶과 학문 세계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사이드로부터 배운 김성곤 서울대 교수 등 영문학 교수 11명이 저자다. 평전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생애와 철학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지만 아랍인과 유대인의 전쟁으로 이집트 카이로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명문가 자제만 들어가는 학교에 다녔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사이 가족은 카이로에서 레바논으로 이주했고 최종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다.(*아래는 누이와 어린시절의 사이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그는, 에드워드라는 영국식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의 조합이 상징하듯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사이드는 “미국인과 함께 있어도, 아랍인과 함께 있어도 언제나 불완전함을 느꼈다”면서 망명객을 자처했다. 이런 자의식은 그를 특권의 바깥, 안락한 삶의 외부로 끌어내 소외되고 박탈당한 이웃을 옹호하고 동양인과 식민지인, 소수 인종과 제3세계인에게 관심을 갖도록 했다.



-탈식민 연구라는 새로운 영역을 연 영문학 교수, 아시아의 대표 지성, 행동하는 지식인 사이드가 세계 지성사에 충격을 준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꾸짖은 것은 서구의 편견이었다. 서구는 식민지인을 자신과 다른 ‘타자’(他者ㆍthe other)로 취급했고, ‘차이’(difference)를 우열로 보았다. 그 바탕에는 서구인은 우월한 문명인인 반면 비서구인은 열등하고 미개하다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서구는 비서구를 교화하고, 문명화하고, 지배해야 할 타자로 여겼다. 야만적이고 열등한 비서구의 계몽과 교화가 서구의 사명이고, 따라서 서구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착취ㆍ억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근대화, 문명화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서구인은 자기 암시를 통해 그것을 사실로 믿었고, 제국주의의 실천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이 같은 적대적이고 차별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상호 관계를 이루자고 주장한다. 특히 문명과 문화가 겹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해와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에 정착한 그가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은 67년 중동전에서 아랍이 패하면서부터이다. 그는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대변인이자 시인인 사촌 카말 나시르가 이스라엘의 테러로 살해되자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면서도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테러에는 반대했다. 말년에 백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9ㆍ11 사태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테러와 그것에 대응하는 미국의 국가 테러를 동시에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이드는 고향을 잃었다는 자각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한 평의 땅도 갖지 않았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신에게 집이란 의미 없는 공간이며, 만일 자신이 자기만의 집을 가진다면 그것은 곧 누군가를 노숙자로 만드는 일라고 생각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은 사이드의 이론을 차용,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린 우리 사회를 겨냥한다. 저자는 파리8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파리외교전략연구원과 런던정경대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서구제국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오리엔탈리즘이 유럽, 미국, 일본을 지나 우리 사회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미국과 한국의 오리엔탈리스트는 자신만이 인권과 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는 이성의 소유자이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자는 배제해야 할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책이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스트는 미국의 네오콘, 일본의 신우익, 우리나라의 극우 지식인이다. 극우 성향의 교수, 어론인, '386 전향자', 종교인 등에 대해서는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한다. 그리고 사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차이를 인정하자고 제안하면서 프란츠 파농의 글을 인용한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박광희 기자) (*)마지막 제안/인용은 좀 안이하게도 느껴진다. 어딜 만지고, 무얼 느끼라는 것일까? Killing the others softly?..

 

06.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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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12 09:16   좋아요 0 | URL
포스터 ㅎㅎㅎ 네가 저항할 수 없는 것에서 어떻게 도망갈 것인가?...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압축문구네요.포스터를 고르신 로쟈님의 센스가 ㅎㅎ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최근에 나온 책이네요.읽어야겠어요.

로쟈 2006-06-12 00:16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보시는군요. 파농의 책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인용문구는 너무 '심심한' 편인지라 좀 '죽이는' 걸로 바꿔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