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지내다 보니 또 봄날이 간다. 봄날들이 가고 있다. 아무런 감상도 없이 보내기에는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아서 오래전에 쓴 시를 찾았다. 1995년 봄에 쓴 시들이니까 햇수로는 15년 전이다(아, 20대의 봄밤이여!). 라일락에 관해 쓴 시 두 편을 옮겨놓는다. 라일락이 한창이었다가 지기까기, 두 시 사이에는 한달 정도의 시차가 있다.  

라일락 폭죽 속에서

이건
동시다발적 폭죽이다, 세상의 종말이다, 이게 아니야!
라일락 폭죽 속에서 한번쯤 코피 터질 만도 한 세상,
세상은 그로기 상태다, 아 이게 아니야!
아니다 싶은 것들 한꺼번에 터져 나와 숨가쁜
마음은 무정부상태다, 망명정부다, 라일락 폭죽 속에서
라일락 그 눈부신 난타 속에서
라일락 그 화려한 어퍼컷과 본때나는 잽 속에서
나는 본다, 보고야 만다
그래 바로 저거야, 라일락은 그저 라일락으로
온통 라일락으로 한세상 죽여주는 거야
바로 저거야!

라일락 끝내 지고 말다

그저 라일락 맨몸으로 죽여주던 한세상,
도 또 다른 세상에 밀려 떠밀려가고
라일락, 끝내, 지고 말다
불 꺼진 라일락 폭죽은 더 이상 아무것도 불 밝히지 않고
한번쯤 커피 터진 세상, 두 번 실수하지 않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세상은 꿋꿋이
다시 일어나 시간 끌어들이고 시간 끌었다
끝내 끌려가는 라일락-

그저 맨주먹 하나로 안 되는 일도 있다
세상엔 없는 게 없다!  

 

09. 05. 18. 

P.S. 4월 29일에 쓴 걸로 돼 있는 '라일락 폭죽 속에서'의 시작노트는 이렇다. "아마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나 보다. 자취하던 3층방 창으로 라일락 향기가 진하게 번져오던 때였다. 방바닥에 드러누어 있으면 10-15분간격으로 떠가는 비행기들이 보였다. 그렇게 한세상이 끝나도 나는 별다른 미련이 없을 듯했다..." 그리고 '라일락 끝내 지고 말다'는 5월 27일에 쓴 걸로 돼 있다. "한달쯤 지났을 때, 라일락은 자취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진상을 보도해야 할, 중계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세상은 붐붐 맨시니처럼 야무지다. 만만하지 않다. 흔한 말로, 맨손과 맨션의 차이라고나 할까, 거지 같은."  

맨시니는 지난 1982년 도전자 김득구 선수와 함께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벌인 미국 권투선수다. 알다시피 김득구는 경기 끝무렵에 맨시니의 펀치를 맞고 쓰러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주먹 하나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26세의 젊은 복서는 홀어머니와 임신 3개월의 약혼녀를 남겨놓은 채 이국 땅에서 짧은 삶을 마감했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챔피언>(2002)은 그 비운의 복서를 소재로 한 영화였다. 흠, 라일락 얘기가 어쩌다가 복싱 얘기로 흘러가버렸나. 내친 김에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권투선수(The Boxer)'(1969)나 오랜만에 들어봐야겠다(http://www.youtube.com/watch?v=M7RgGFwgWPY).   

"빈민가 출신의 권투선수가 권투를 그만두고 귀향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노래했다는 이 노래는 실제로 "62년 3월24일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세계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도전자인 에밀 그리피스의 주먹을 맞고 숨진 쿠바 출신 복서 베니 파레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날짜가 하루 넘어가서 오늘이 5.18이군. 더 큰 비극들에 대해선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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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5-18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조차도 로쟈님답다는 느낌?
시인 김정환씨가 생각나기도 하는 시입니다. ^^

로쟈 2009-05-18 00:34   좋아요 0 | URL
김정환 시인은 훨씬 단단한 시들을 쓰시죠.^^;

드팀전 2009-05-18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서....좋아하는 노래에요. 그렇네요. 5월이 가기전에 사이먼앤 가펑클을 들어야겠어요.

로쟈 2009-05-18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얼마전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사이먼 앤 가펑클을 한두 시간 들었습니다...

조선인 2009-05-1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과 아카시아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꽃인 저로선, 공포시에요. =3=3=3

로쟈 2009-05-18 13:40   좋아요 0 | URL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으니 묵시록적인 시이긴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19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엔가 에밀 그리피스가 중년이 된 베니 파레트의 아들을 만났어요.둘의 상봉순간...그리피스가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파레트 2세도 울먹울먹...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세상을 맨시니에 비유하셨군요.이쁘장한 얼굴인데 난타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강타자였습니다.이태리 계에 이 성이 많지요.음악가 헨리 맨시니도 있구요.영화 좋아하시니 잘 알 거예요.

로쟈 2009-05-20 00:40   좋아요 0 | URL
맨시니를 잘 아시면 나이가 드러나시는 건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5-20 22:11   좋아요 0 | URL
하하하...에밀 그리피스는 50년대부터 활동했는데요.맨시니 쯤은...요즘은 UCC에 유명복서들 동영상이 다 나와요.연관되는 시합장면 따라가다 보면 다 알 수 있지요.30년대 복서들 시합장면도 가끔 열심히 연구합니다.
 

대한항공의 기내지인 모닝캄 5월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에 관한 짦은 소개글이다(초고가 약간 축약됐다). 애초에는 '쿤데라와 프라하'에 초점을 맞춰달라는 주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론 그의 '애매모호한 정체성'이 주제가 됐다. 이 글은 영문으로도 번역돼 있는데(물론 나의 번역은 아니다), 'Being Milan Kundera'가 그 타이틀이다.    

Morning Carm(09년 5월호) 체코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의 작품세계

“내게 있어 미래가 아무런 가치도 표상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에 집착해 있는 것인가? 신? 조국? 민족? 개인?” 스스로가 던진 이러한 질문에 체코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답한다. “내 답은 우스꽝스러운 만큼이나 진지한 것이다. 나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 있지 않다.”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란 세르반테스 이후의 서구 근대 소설을 가리킨다. 바로 그 ‘소설’이 자신의 유일한 집착대상이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는 ‘소설가’ 외에 다른 ‘소속’을 가지고 있지 않은 셈이다. 이런 소속감은 쿤데라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에게 ‘조국’ 혹은 ‘국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쿤데라는 단편집 <우스꽝스러운 사랑>과 장편소설 <농담> 등을 1960년대에 발표하여 체코 작가로서 명성을 얻지만, 1975년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다. 체코 국적을 상실하지만 1981년 미테랑 정부 시절 프랑스 국적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프랑스’ 작가인가? 사실 <불멸>(1990) 이후의 작품들은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써서 발표하고 있으므로 엄연히 ‘프랑스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우는 좀 모호하다. 이 이중언어 작가는 1981년 이후부터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어’ 작품을 발표하고 있지만 프랑스 서점에서 그의 소설은 ‘프랑스소설’이 아닌 ‘외국소설’로 분류된다고 한다. ‘동시대 프랑스 소설’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표현된 외국소설’이라는 것이 프랑스 독자들의 판단이다. 반면, 체코에서 쿤데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많이 번역된 체코 출신 작가”로 소개된다. ‘체코 출신 작가’란 말에서 망명작가인 쿤데라와 체코 정부 간의 불편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쿤데라는 체코 작가이기도 하지만 체코 작가가 아니고 프랑스 작가이지만 프랑스 작가가 아니다. ‘동유럽 작가’가 아닌 ‘중부 유럽 작가’를 자처하는 쿤데라는 ‘체코’라는 국명이 지시하는 정치적 정체성보다는 ‘보헤미아’라는 지역적 정체성을 더 선호한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기원전에 살았던 켈트족이 프라하의 정착민들을 ‘보헤미아’라고 불렀다. ‘보헤미아인’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은 거기에서 생겨났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와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나지만, 그는 ‘체코슬로바키아’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에서야 생겨난 말이며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국가로 분리됐으니 ‘체코’에 대한 그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역사적 뿌리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이 쿤데라의 생각이다. 대신에 그는 ‘보헤미아’를 인물들의 국적으로 사용한다. 쿤데라에게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가 아니라 그 보헤미아의 수도다.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은 프라하라는 도시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1968년의 ‘프라하의 봄’을 다룬다(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국내에는 <프라하의 봄>으로 소개되었다). 그는 한 정치적․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한 세대의 삶을 좌절과 파멸로 이끌었으며 개개인의 인생행로를 뒤바꾸어 놓았는가에 대한 소설적 명상을 시도한다.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그리고 프란츠다. 많은 여자와 자유분방한 관계를 갖던 이혼남 토마스는 어느 날 보헤미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카페의 여급 테레사를 만나며 그녀는 다시 프라하로 그를 찾아온다. 토마스는 자신의 애인인 사비나에게 부탁하여 테레사가 사진작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터진 것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체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짓밟는 구 소련의 침공 사태가 벌어졌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스위스 취리히로 떠났고, 제네바로 간 사비나는 그곳에서 만난 프란츠와 잠시 사랑을 나누고 파리로 향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의 끊임없는 바람기를 견디지 못한 테레사는 프라하로 돌아가고 그는 다시 그녀의 뒤를 따른다는 줄거리. 동시대 네 인물의 사랑과 성을 따라가면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해나가는 작품은 토마스와 테레사가 시골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며 죽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사실 이러한 마무리 자체가 제목에서 시사하는 ‘존재의 가벼움’을 한 번 더 강조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성찰로 작품을 시작하는데, 이는 모든 일들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신화’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이 영원회귀 사상을 삶의 일회성에 대비하면서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되묻는다. 만약에 정말로 한번뿐이라면,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불멸을 꿈꾸고 또다른 시도를 하지만, 이런 노력은 대부분 부질없고 우스꽝스러운 결과만을 낳았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그렇듯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며,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형식이다. 너무도 가벼운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신과, 조국, 민족은 너무도 무거운 존재이고 가치임을 그는 폭로한다. 쿤데라에게 삶의 자연스런 모습이란 어쩌면 세속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 바로 ‘보헤미안’의 삶일는지도 모른다.  

09. 0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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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7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8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8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9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전환도 할 겸 오랜만에 동네극장에서 심야영화를 보기로 하고 정한 프로그램은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다. 박찬욱의 <박쥐>도 상영중이지만 한편만 봐야 한다면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여러 리뷰를 보건대 <박쥐>의 감상이 유쾌할 것 같지 않다). 두 시간쯤 남았는데, 마침 감독 인터뷰 기사가 있기에 '기념'으로 스크랩해놓는다. 인터뷰의 홍상수는 이젠 나도 잘 아는 홍상수이다. 아, 그의 취미는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영어제목이 'Like You Know It All'이군...  

서울신문(09. 05. 16) 칸 영화제 초청받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감독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 아니다. 홍상수(49) 감독 이야기다. 그의 최근 동선은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달 전주영화제(단편 ‘첩첩산중’)와 칸영화제(‘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부른 데 이어, 8월 열리는 로카르노영화제에서도 그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다.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홍 감독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9번째 장편 ‘잘 알지도 못하면서’(14일 개봉)에 호평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영화감독인 구경남(김태우)이 제천과 제주를 방문하면서 겪는 일화를 담고 있다. 두 곳에서 차례로 여자를 만나지만, 오해와 과욕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만다. 홍 감독은 바쁜 와중에도 이메일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다.

→평소 영감을 얻는 곳은.

-남들이 보면 일상적인 상황인데, 나한테는 영화적으로 풀어나가면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들을 그 구현과정에서 ‘저절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직감으로 들 때가 있다. 난 거기서 시작한다.

→작품이 더 편안하고 재미있어진다는 평에 “나이가 들어서”라고 했는데 혹시 세계관이나 작품관이 바뀌었나.

-항상 지향하는 곳은 밝은 곳, 힘찬 곳, 명료한 곳이었다(어떤 것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명료함까지 포함해서). 내가 겪은 것이 있고, 생긴 게 있어서 나의 경로가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영화 시작했을 때 내가 가졌던 관심들과 지금의 것들이 달라진 것이 있다. 난 언제나 부분으로서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따로 ‘관(觀)’으로서 얘기하면 과정에 대한 왜곡된 설명이 될 것이다. 영화가 나에겐 최선의 표현이라고 믿고 싶다.

→주인공 구경남에 혹시 본인의 모습도 투영이 됐나.

-모델이 있어야 작업을 하는 사람이지만, 모델과 최소한의 거리가 있어야 작업이 가능하다. 그래서 한 인물을 위해서 모델 여럿을 섞기도 하고, 모델 아닌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을 섞기도 한다. 구경남은 (퍼센티지는 모르겠고) 나와 김태우와 다른 언급 안 된 모델들과 내가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의 합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몇몇 인물의 경우, 연기가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개의치 않는 건가, 특별한 느낌을 유도하기 위한 건가.

-내가 어떤 건 많이 꼼꼼하고, 어떤 건 조금 설렁설렁한다. 주어진 촬영 조건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오케이를 내면서 찍어간다.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별로 걸리지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이야기나 대사가 앞뒤에서 대구를 이루거나, 약간의 변형을 거쳐 반복된다. 이 기법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있나.

-삶이 일직선으로 나간다고 믿는 것도 대구·반복의 구조처럼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대구가 더 사실적인 삶의 구조일 수 있다. 입력된 해석의 틀이 너무 강해서 우린 삶의 현상을 맨눈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분으로 봐서는 같지만 둘을 놓고 보면 꼭 다른 점이 보이고, 너무 다른 것이라도 같이 놔두고 보면 꼭 같은 면이 발견된다. 우린 그런 부분의 발견을 통해서 입력된 틀의 허구를 운 좋게 확인할 수도 있다, 가끔.

→감독의 영화를 보면, 현실의 비루하고 약간은 추잡한 모습들이 그럴 듯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모습을 그리는 것은 ‘이런 것도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라고 인정하기 위함인가.

-표현대로 ‘비루하고 약간 추잡한 게’ 우리가 매일 사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루하지 않고 추잡하지 않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지만…. 난 과장된 사고와 근거 없는 환상 때문에 삶이 불필요하게 더 힘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사고 과장과 환상들을 끄집어내서 같이 보려 하는 맘이 있다. 그런 맘 때문인지 어떤 삶의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보다 더 자주 선택되는 것 같다.

→여성 관객분들 중에 간혹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한번 건드리면 쉽게 넘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 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느 주체적이고 튼튼한 정신의 여자분은 내 영화를 아주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둘은 뭘 다르게 보는 걸까. 한 분은 (어떤 이유나 목적의식으로) 그 여자 인물의 행동 액면가에 반응하는 것 같고, 한 분은 영화의 맥락과 태도에 감흥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홍 감독의 영화는 대개 현재 시점으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방식을 특별히 싫어하는 이유가 있나.

-시간대가 늘어지면 시간 점프가 커지고, 그 사이를 설명 없이 건너가려면 (설명을 할 수는 없고) 뭔가 전형성에 많이 의존해야 해야 할 것 같다. 모른 척하고 그냥 건너갈 수도 있지만 그건 척하는 것 같고, 쿨한 척. 근접 시간대의 미세한 차이 속에서 뭔가를 얘기해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소위 특급 배우를 잘 기용하지 않는다. 캐스팅의 원칙이나 기준이 있다면.

-대강 이야기가 정해지면 배우들을 만나기 시작하는데, 그 배우란 사람 속에서 어떤 맥을 읽게 된다. 그 맥이란 게 그 사람을 ‘내 식으로 이해하는’ 어떤 기억 속의 인물의 환기같은 건데, 그걸 잡고 내가 미리 준비한 걸 섞으면서 과정을 시작한다. 



→취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취미라고 부를 것은 없다. 첫 영화하고 상금 탄 돈으로 뭔가 사둬야겠다고 해서 피아노를 샀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가끔 그걸 5분, 10분씩 치면 재미있다.

→감독의 연애관이 궁금하다.

-연애보다는 삶이 재미있다. 애인보다는 친구가 최고다.

→칸 영화제에 5번째로 가게 된 소감은.

-불러주니 가는 것이고, 내가 작업을 계속하는 데 도움되는 일이려니 생각하고 가는 게 크다.(강아연 기자) 

09. 05. 16. 

 

P.S. 영화는 예상보다 조금 길었지만 예상대로 아주 재미있었다(그런데 객석은 텅 비어 있었다. 한 10명쯤 같이 본 듯하다). 이 저예산 영화에 아마도 무보수로 출연했을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좋았다. 공형진, 유준상 등의 연기. 그러나 압권은 정유미였다. <사랑니> <가족의 탄생> 등의 영화에서 이미 본 배우이고 간간이 그녀의 연기에 대한 호평도 들었지만, 이렇게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인 줄은 미처 몰랐다(스크린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좋아하는 배우가 한 명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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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9-05-1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의 탄생에서 정유미씨가 무척 눈에 띄더군요. 그러고 나서 사랑니를 우연히 다시 봤는데 거기 있더라구요^^ 어떤 드라마에서 얼핏 봤을 때는 노다메 칸타빌레의 노다메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

로쟈 2009-05-17 14:49   좋아요 0 | URL
제가 일본 드라마는 안 봐서요.^^;

딸기 2009-05-1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유미라는 배우였군요. 고현정인줄 알았어요.

로쟈 2009-05-17 14:48   좋아요 0 | URL
아, 위쪽 사진은 고현정 맞습니다. 정유미는 좀더 작은 배역으로 나옵니다...

딸기 2009-05-18 23:42   좋아요 0 | URL
위에 쓰신 글에 여자가 두 명 나오잖아요. 위 사진에 남자랑 앉아있는 여자는 고현정인 거죠? 그럼 밑의 독사진은 누구인가요?

로쟈 2009-05-19 00:24   좋아요 0 | URL
독사진이 정유미예요...

노이에자이트 2009-05-1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현정 누나는 우리 고향사람(전남 화순에서 국민학교 2학년까지 다녔던가...여하튼)입니다.그 동네에 고씨 집성촌이 있지요.
정유미 누나는 우에노 주리 닮았다는 자명한 산책 님의 말씀인데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음...이 누나도 귀엽네요.
로쟈 님은 제시카를 알았고 저는 정유미를 알았네요.

로쟈 2009-05-17 22:34   좋아요 0 | URL
연기를 한번 보셔야 하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5-1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에노 주리도 귀여워요.검색 한번 해보세요.로쟈 님 고향에서 나온 이쁜 연예인은 누구인가요?

로쟈 2009-05-19 00:25   좋아요 0 | URL
글쎄요, 딱히...^^;

노이에자이트 2009-05-19 23:39   좋아요 0 | URL
광주 및 인근 전남 지역출신 이쁜 연예인 엄청나게 많은데...문근영,유빈,한지혜,구하라 등등...그 외에도 수두룩합니다.로쟈 님도 찾아보면 고향출신 연예인이 나올 거예요.

릴케 현상 2009-05-1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우에노 주리라는 이름은 외워둬야겠네요...전 일드를 보는 방법도 몰라요. 만화의 이미지를 떠올려서 말씀드린 건데^^

Kir 2009-05-19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도 정유미의 매력에 빠지셨군요^^ 이 친구 정말 매력적이예요. 요새도 검색하면 바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몇년 전에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라고, 굉장히 호평받은 단편영화가 있었어요. 친구의 추천으로 봤다가 이 아가씨한테 반해버렸지요. 그 다음부터 영화 출연작은 다 챙겨보고 있는데, 이 영화는 아직입니다. 내리기 전에 빨리 봐야될텐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9-05-20 00:51   좋아요 0 | URL
네, 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부터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은 정치철학자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다. 그의 주저 <불화>도 소개될 예정이기에 (일부 불만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 붐'은 한동안 더 이어질 듯하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소개/해명하는 글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와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을 우리말로 옮긴 양창렬씨다.  

 

고대신문(09. 05. 10)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원상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단어는 아무데나 쓰이고, 그만큼 의미 없는 단어가 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앞에 붙는 수식어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킨다. 다양한 수식어만큼이나 민주주의는 닳아빠진 개념이 된 듯하다. 이처럼 모호한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랑시에르에 의하면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관념들의 고유함은 그것이 다의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차이가 불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치적 투쟁은 바로 그 단어를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되찾기 위해 랑시에르는 그 단어의 희랍적 어원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분절을 되짚어 본다. 특히 플라톤이 범례적으로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주목하면서 말이다.  

『국가』, VIII권에서 플라톤은 여러 정체들을 검토하면서 민주정을 과두정에 대한 빈자들의 전복으로 간주한다. 이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는 민주주의적 인간형을 서술하는 데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정체란 정부 형태만이 아니라 그 체제 하에서 공통으로 살아가는 존재 방식과 습속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적 인간은 노예와 구별되는 신분상의 자유, 의회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플라톤은 561c-e에서 이소노미아를 누리는 사람의 삶을 묘사하는 데, 이 민주주의적 인간형은 오늘날 공화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소비사회의 탈근대적 개인을 예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제멋대로 하는 자유는 민주정 자체가 정체들의 잡화점과 비슷한, 무정부 상태의 다채로운 정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플라톤은 이소노미아에 가장 분개하는데, 그것은 법 앞의 평등만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비롯한 공적 사안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평등을 가리킨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바로 추첨이었다. 추첨은 통치를 ‘아무나’에게 ‘우연’하게 맡길 뿐, 통치자의 어떤 자질이나 지식도 따지지 않는 제도다. 지식과 정치적 탁월함을 가진 자에게 기하학적 평등에 따라 통치의 특권이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던 플라톤에게 추첨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는 정치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가 있는가라는 랑시에르의 주요한 화두와 연결된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320d-324d)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신화에 주목하자. 에피메테우스는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기술을 나눠주면서 정작 인간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성질들을 부여하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과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흩어져 살 뿐, 도시국가에 모여 살지 못한다. 결국 제우스는 멸종할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정치적 덕(염치와 정의)을 주기로 작정한다. 헤르메스가 그 덕을 기술을 나눠주듯 분배해야 하느냐고 묻자, 제우스는 모두가 그 몫을 가질 수 있도록 분배하라고 답한다. 소수만이 그 몫을 갖는다면 도시국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와 관련해서 전문가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평등한 능력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이 평등이 모든 정치 질서, 모든 정치 공동체를 정초하는 전제가 된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 전제’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한 추첨 그리고 프로타고라스가 들려준 신화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누가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배해야할 자연적 원리(archē)는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부 형태는 이 원리의 부재, 정당성의 부재에 토대를 둔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여러 정체들 중 하나의 정체가 아니라,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 평등전제를 입증하고 활성화시키는 정치를 뜻하기도 하며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 주체화를 거친다. 이 점에서 데모스라는 단어가 내포한 이중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인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빈자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민은 본디 정치적 주체인 동시에 배제된 자라는 이중적 신체를 가진 분열된 주체인 것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항상 말과 사물 사이의 틈에서 생겨난다. 가령 헌법에 기록되어 있는 인민의 권력을 몫 없는 자들이 실제로 행사하려할 때 그것은 정치 질서 자체에 분리와 불일치를 가져오는 사건이 됨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빈자들, 노동자들, 여성들도 인민인가?’, ‘우리는 이 나라를 통치할 주인의 범주에 셈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언제나 말과 사물, 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내는 역량과 행위야말로 정치요 민주주의다.  



랑시에르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는 그가 정치를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것, 다시 말해 드문 사건으로 묘사하며, 선거나 투표와 같은 제도를 치안의 장치로 보는 등 제도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고로 정치를 어떻게 이어갈지, 민주주의 또는 평등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답변들로 결론을 대신하자.

첫째, 우리는 앞에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란 하나의 정체나 통치 형태가 아니라 정치 자체의 전제이자 원리임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다. 둘째, 랑시에르는 바디우처럼 모든 투표에 기권하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지난 2005년에 있었던 유럽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지배자들의 합의에 맞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투표 속에서 인민주권을 연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작년에 쇠고기 재협상과 대통령 재신임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던 주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사실 그것은 인민으로 바꿔 읽을 수 있으며, ‘아무나’에게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으로부터 나온다’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정치 무대에 올리는 한 실험이 될 수도 있었다.  

셋째,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짧은 임기로 연임할 수 없게 의회의 대표를 뽑고, 국가의 공무원이 인민의 대표를 중임할 수 없게 만드는 등 고대 그리스의 ‘추첨’을 연상시키는 주장들을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의제를 ‘민주적’으로 이끄는 최소치이지 그러한 제도 변화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넷째, 랑시에르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무너지며, 촛불에 불이 붙고 사그라지는 짧은 봉기의 순간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는 ‘사건과 돌발’의 사상가가 아니라 ‘해방’의 사상가다. 역사는 국가 형태에서 벗어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발명하려는 다양한 노력과 실천들의 망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그가 간헐적인 사건들의 불연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공존하는 여러 시간성들의 집합을 통해 역사를 사유하기 때문이다.(양창렬_파리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09.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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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학술서'라고 할 만한 책은 단연 <열녀의 탄생>(돌베개, 2009)이다. 주중에 서점에 들렀을 때 표지를 보기는 했지만 '열녀의 탄생'이란 제목만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리뷰를 보니 강명관 교수의 '대작'이다. 850쪽이 넘는 분량이 대작이란 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부제는 '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 이미 제목과 부제가 내용을 다 짐작하게 해주는데, 그럼에도 물론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다. 책은 한국사회 여성 차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꼼꼼하게 짚어준다. 리뷰를 읽어보니 문제는 <소학> <삼강행실도> 열녀편, <내훈> 등의 핵심 텍스트들이고, "<열녀의 탄생>은 18세기 이후 종법제에 입각한 가부장적 친족제도가 완벽하게 정립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 텍스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됐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여성의 대뇌에 장착돼 어떤 파급효과를 낳는지, ‘열녀’의 역사를 축으로 삼아 치밀하게 파고든다." 저자의 노고와 열정이 인상적이다. 책은 지난주에 출간된 강준만 교수의 <어머니 수난사>(인물과사상사, 2009)를 떠올리게 해주어, 서평기사를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5. 16) 여성은 조작된다, 지금도 쭉~

누나는 대학, 남동생은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는데, 둘 다 합격했다. 아버지는 누나한테 진학 포기를 종용했고 공부 잘하던 딸은 거기에 따랐다. 자신을 희생한 누나와 그 남동생의 그 뒤 인생은 흔히 미담기사의 재료가 되거나 인기 있는 방송 드라마로 등장했다. 이런 얘기도 가능하다. 오누이가 있었는데 이번엔 오빠가 대학, 여동생은 중학교에 시험을 쳐 둘 다 합격했다. 가난했던 그 집 어머니가 둘 중 하나한테 학교를 그만두라고 종용한다. 누구한테? 열에 아홉, 아마도 열에 열 모두 여동생 쪽이 아닐까.

얼마 전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하며 그런 성차별은 과거지사라고 말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대학 인문분야 학생들 다수가 여학생이다. 그런데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가운데 여성은 한두 명뿐이다. 교수 공채 때 여성은 아예 처음부터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치권을 보든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보든, 검사 판사를 보든 우리 사회 힘 있는 분야에서 실세를 점하고 있는 쪽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남성이다. 임금격차와 승진기회, 가사노동 모두 여성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 우리 현실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이 많이 낳지 말라고 닦달하더니 이젠 많이 낳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낮은 출산율과 관련한 ‘문제’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쏠리는 쪽도 주로 여성이다. 따라서 “작동방식만 다를 뿐 우리는 여전히 가부장제하에서 살고 있다”는 게 강 교수 생각이다.

<열녀의 탄생>(돌베개)은 이 유구한 우리사회의 성차별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전적들을 섭렵한 철저한 문서검증을 통해 고고학적·계보학적으로 더듬어 올라간 강 교수의 10여년에 걸친 노작이다. ‘열녀’(烈女)가 무엇인가? “열행(烈行)을 실천한 여성”이다. 열행의 대종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유일하게 공인된(또는 공인될) 성적 상대자(대부분은 남편)에게 자신의 성적 종속성을 천명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거나 신체의 일부 또는 신체 전부를 희생하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남편을 위험에서 구하거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훼손하거나 목숨을 버리는 행위다. 남편의 병구완을 위해 허벅지 살을 도려내 피와 살을 먹이거나 외간 남자한테 잡힌 손목을 잘라버리는 행위, 개가를 거부하며 코나 귀를 베어버리거나 굶어죽는 행위, 임진·병자 양란 때 겁탈에 저항하다 학살당한 일 등이 이에 포함된다. 나라가 문을 세워 이들을 표창하고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준 게 정려(旌閭)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정려의 대상으로 뽑힌 열녀는 거의 목숨을 버린 경우다. 선조 이후 열녀 553명 중 임진왜란과 직접 관련된 열녀는 441명이고 이들 중 죽지 않고 열녀가 된 여성은 단 4명, 1%도 되지 않았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열녀나 열행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말조차 없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절부’(節婦), ‘열부’(烈婦)란 말이 일부 사대부들의 글에 등장한다. 절부는 남편이 죽었는데도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여성이며, 열부는 열행을 감행한 남편 있는 여성이다. 열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열행까지 포함한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절부는 아내가 죽어도 새장가 들지 않고 수절한 남편인 ‘의부’(義夫)와 짝을 이뤘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남편 잃은 여성의 재가, 삼가는 전혀 허물이 되지 않았으며, 수절은 여성에게만 강요된 윤리가 아니라 남녀 모두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결혼한 여성이 남자 집(시댁)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여성의 친가(처가)에 들어와 사는 게 일반적 관행이었다. 이런 풍경은 조선 전기까지 대체로 유지됐다. 15세기 후반 성종 때의 ‘경국대전’에서 ‘의부’란 말이 사라지고 개가를 하는 여성의 후손들에겐 벼슬길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 법·제도상으로는 가부장제가 어느 정도 정비됐으나 본디 윤리적 성격이 강한 열행, 열녀를 법·제도로 장려하고 강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국가를 가족의 연장으로 본 조선의 성리학 사도들이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본디 대등했던 ‘남성=여성’ 관계를 ‘남성>여성’의 위계적 관계로 바꾸고, 여성들이 그것을 자연스런 인간본성으로 받아들인 뒤 남성에 대한 종속성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까지 내던지게 만드는 더욱 강력한 장치가 필요했다. 이 종속적 윤리의 내면화, 이념적 세뇌를 위한 텍스트, 유교적 가부장제의 욕망을 윤리의 이름으로 여성의 대뇌에 설치해 그것을 끝없이 복제함으로써 종속적 여성을 대량으로 자동제조해내는 프로그램이 바로 국가-남성이 독점한 인쇄물이었고, 그 대표가 <소학> <삼강행실도> 열녀편, <내훈>이었다.  

<열녀의 탄생>은 18세기 이후 종법제에 입각한 가부장적 친족제도가 완벽하게 정립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 텍스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됐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여성의 대뇌에 장착돼 어떤 파급효과를 낳는지, ‘열녀’의 역사를 축으로 삼아 치밀하게 파고든다. <소학>은 결코 아이들 교육용 책이 아니었다. 난해한 남성용 한문서적인 소학(나중에 언해본도 나옴)은 성리학 사도들을 길러내는 의식화 작업의 실천원리였다. 경국대전의 차별적인 여성 조항들이 모두 주자가 중국 고대 고전들에서 따와 편집한 이 소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시 대부분 중국 <고금열녀전> 등에서 얘기를 따와 그 가운데서 능동적인 여성상을 제시한 부분들을 제거해버리고 재편집한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여성의 종속성 내면화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여성용 책이다. <내훈>은 주로 위기시의 열행을 기록한 <삼강행실도>와는 달리 일상적인 열행을 담았다.

오누이 이야기는 과거지사가 아니다. 강 교수에 따르면 “‘나’는 권력적 타자에 의해 제작된 존재”다. 예전에는 국가-양반(남성)이 <소학>과 <삼강행실도>와 <내훈>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들을 양산해냈다면, 오늘날엔 국가-자본(테크놀로지)이 교육과 미디어라는 권력기구를 통해 그들의 욕망을 대뇌에서 대리복제하는 개인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정말 나일까? <열녀의 탄생>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한승동 선임기자)   

» 가족계획 지도원(오른쪽 끝)이 농촌 여성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고 있다. 가족계획사업이 시작된 1962년 당시 교육 내용은 산모 나이 35살까지 3년 터울로 4명의 자녀만 낳자는 것이었다.

한겨레(09. 05. 09) '극성 엄마’ ‘속물 엄마’ ‘부패 엄마’ 만드는 사회

‘한국 생활사’ 집필을 평생 작업으로 구상중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어머니’라는 존재 안에 농축된 한국형 가족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파헤쳤다. 책 제목이 <어머니 수난사>다. <입시전쟁잔혹사>에 이어 넉 달 만에 선보인 생활사 단행본이다. 그런데 왜 ‘수난사’인가. 강 교수가 볼 때 한국의 어머니들은 생존을 위해 각개약진해야 했던 사회에서 가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과잉 순응’ 전략으로 ‘투사’가 됐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입시전쟁 투사, 치맛바람 투사, 자녀결혼 투사, 부동산 투사. 전투의 일선으로 내몰린 이들에겐 사는 게 축복일 리 없었다. 싸움으로 점철된 역사는 고난의 역사, 시련의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자기희생’의 상징이자 실체로 자리잡았다.  

이런 어머니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건으로 강 교수는 한국전쟁을 꼽는다. 전쟁은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고 피붙이의 중요성을 실감케 함으로써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를 한층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물론 ‘강한 어머니 만들기’에는 정부도 한몫했다. 1955년 정부는 5월8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했는데, 이를 통해 전파시키려고 했던 것은 어머니의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이었다. 해마다 어머니날이 오면 대통령 담화가 발표됐고, 언론은 “자녀의 빛나는 생을 위하여는 자기 몸을 초개처럼 내던질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을 앞다퉈 강조했다. 이즈음 욕망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부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자유부인>이 반향을 일으키자, 정부와 사회단체들은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도려내 복약시켰다는 ‘허벅다리 부인’의 사연을 발굴해 맞세우기도 했다.

60년대에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전투적인 가족계획이 추진되면서 가족 구성과 어머니의 구실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돈 쓰고 로비도 불사하는 것을 가리켜 ‘치맛바람’이라 이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정부와 언론은 공모한 듯 거세게 치맛바람을 질타했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모든 궂은일은 어머니가 떠맡게 하는 구조를 온존·강화하면서 그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문제의 책임을 어머니들에게 돌리는 수법은 이후 지속되는 어머니 수난사의 핵심을 구성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복부인’과 ‘신사임당’이 공존한 70년대를 거쳐 입시전쟁에 질적 전화가 이뤄지는 80년대가 열렸다. 입시전쟁도 점차 제도화·체계화의 길을 밟는데, 더는 어머니의 희생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계급전쟁’의 양상을 띤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머니가 동원할 수 있는 경제력의 크기와 현명함 또는 영악함”이 중요했다. 8학군 신드롬과 함께 중산층의 강남을 향한 질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97년 외환위기는 ‘강한 어머니’를 다시 호명했다. ‘남편 기 살리기’를 강조하는 신현모양처론이 유행하는 가운데 한쪽에선 ‘아줌마 때리기’가 본격화됐다. 아줌마 때리기는 기혼 중년여성의 가족 이기주의와 공공의식 부재를 문제삼았다. “어머니는 찬양하고 아줌마는 때려라”였다. 아줌마를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이런 심리를 강 교수는 ‘자궁 가족’ 이기주의로 규정한다. “나의 어머니가 나를 위해 벌이는 투쟁은 아름다워도 너의 어머니가 너를 위해 벌이는 투쟁은 추하다는 이중적 인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런 어머니 수난사를 야기한 주범으로 ‘가족주의’를 지목한다. “자궁 가족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일부 어머니들은 ‘복부인’이 되기도 했고 ‘마담뚜’의 도움을 받아 ‘정략결혼’의 수익성을 최대화하고자 했다. 일부 어머니들은 ‘기러기 엄마’가 되기도 했고, ‘원정출산’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경제적 능력이 못 되는 어머니들은 ‘우골탑’ 대신 ‘모골탑’을 쌓았다. 많은 어머니들이 극성 엄마, 속물 엄마, 부패 엄마 노릇을 불사했다.”

문제는 이렇게 험난한 어머니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말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인데, 강 교수는 이를 일러 “모두가 희생자요 모두가 불만인 체제”라고 한다. 비극은 이 체제의 덫을 벗어날 속시원한 방도를 누구도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진보진영을 향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투쟁의 틀을 벗어나 구체적 대안을 모색하라”고 주문한다. “당장 어머니들의 육아 부담을 제도적으로 덜어주는 게 백날 ‘신자유주의 타도’를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 극복책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도 어머니가 투사가 되어야만 하는 잔혹한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이세영 기자)  

09. 05. 16. 

 

P.S. '여인 잔혹사'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영화가 두 편 있다. 한국 최초의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한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1983)와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4).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영화들인데, 짐작엔 <물레야 물레야>에 대한 호평 때문에 <자녀목>이 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두 편 다 원미경 주연작이며, <자녀목>은 그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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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5-16 16:46   좋아요 0 | URL
'열녀' 이야기도 나왔으니 '효자/효녀/효부'에 대한 책도 나와야 할 것 같군요^^ 사실 조선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녀'도 중요하지만 '효자/효녀/효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9-05-16 21:09   좋아요 0 | URL
네, <효경>에 대한 비슷한 연구서도 나올 법하네요...

딸기 2009-05-17 14:06   좋아요 0 | URL
저는 잘 몰랐는데, 강명관 교수가 대단한 분인가봐요.
책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

로쟈 2009-05-17 14:51   좋아요 0 | URL
한겨레 쪽에도 칼럼을 쓰시죠. 연구서 네 권을 한꺼번에 펴내기도 하시고...

노이에자이트 2009-05-17 15:31   좋아요 0 | URL
강명관,강준만 둘 다 기성논리에 도전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지요.그리고 글 읽는 맛이 있어서 좋아요.강명관의 한겨레신문 토요일 고정칼럼은 끝난 것 같던데요.

로쟈 2009-05-20 21: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칼럼들을 묶어도 읽을 만한 책이 나올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