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이제 고유명사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홍상수의 신작 제목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하지만 <밤과 낮>은 아직 보지 못했다) 당연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도 관심을 두게 된다. 박찬욱의 <박쥐>나 봉준호의 <마더>보다도 더 기대를 한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취향 탓이다. 나는 '영화 같은 영화'보다는 '영화 같지 않은 영화'를 좀더 선호하는 것이다. <박쥐>에 밀려서 동네극장에서는 <똥파리>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박쥐>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연착하는 게 아닐까 우려된다. 내주에는 영화감상 시간을 좀 내야겠다. 짤막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5. 04) 잘 알지만 잘 알지 못하는 내 자화상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그의 필모그래피(작품 목록)에서 가장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영화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독설과 조롱은 전작들에 비해 한결 줄었으며, 감독 자신의 표현대로 “나이가 들어 편안해진” 것처럼 보인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짝 미쳐 있는 여자들, 센 척 하지만 항상 쩔쩔매는 남자들,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한 인물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충분히 있을 법한 말과 행동을 쏟아내는데, 기이하게도 홍상수는 그 익숙함을 낯설게 포착해내는 데 성공한다. 관객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일상의 조각에 참았던 웃음을 터뜨린다. 

일상을 살짝 비튼 웃음

홍상수의 주인공은 언제나처럼 길 위에 서 있다. 예술영화 감독 구경남(김태우)은 제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제천에 갔다가, 얼마 뒤 학생들에게 특강하러 제주도에 간다. 영화는 구경남이 제천과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상의 장면들을 비틀어 웃음을 이끌어내는 홍상수식 유머는 거의 정점에 이른 듯하다. 이를테면 구경남과 제천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엄지원)가 처음 만나는 장면. 구경남은 전날 한숨도 못 잤는데,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한두 시간 잤더니 다섯 시간 잔 것처럼 개운하다는 등의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공현희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허리를 자르며 명함을 건넨다. 저녁에 열린 파티에서는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흥행 감독이 됐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후배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싸잡아 얘기하면 너나없이 다 속물들인데, 그런 속물들이 사는 곳이 바로 세상 아닌가, 홍상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vs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의 주인공은 여전히 연애에 관심이 많지만, 예전처럼 본능적 욕구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영혼의 ‘짝’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짝을 만났다고 자부하는 두 커플을 만난다. 그러나 구경남이 확인한바, 부상용(공형진)·유신(정유미) 부부는 자기 안에 갇힌 과대망상의 ‘송충이’이며, 양천수(문창길)·고순(고현정) 부부는 바람을 피운다. 구경남 자신은 이번에도 짝을 찾는 데 실패한다.

제천과 제주라는, 앞 글자가 같은 두 공간의 대구는 ‘지키지도 못하면서’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대구이기도 하다. 제천에서 만난 공현희는 구경남에게 지키지도 못하면서 왜 약속을 남발하느냐고 타박하고, 제주에서 만난 고순(고현정)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고 구박한다. 영화는 결국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고, 스캔들을 비난하는 세상을 향해 “위선 떨지 마, 지가 하고 싶은 거였으면서”(구경남)라고 야유를 보낸다.

 

영화에 대한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극장전>(2005)보다도 훨씬 직접적으로 감독 자신의 작품(혹은 작품 활동)에 대해 대놓고 말하는 ‘영화에 대한 영화’(메타 영화)다. <씨네21>이 실명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텍스트 안으로 끌고 들어와 스스로 흔들고 풍자한다. “왜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구경남은 뭐라고 답변하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허공을 떠돌고 결국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구경남은 “다음 영화는 200만”이라며, 사람들이 많이 보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래서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지금까지 나온 홍상수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다.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진 맙시다”(<생활의 발견>), “생각을 해야겠다.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극장전>)와 같은 영화 유행어를 남긴 홍상수는 고현정의 입을 빌려 달관한 사람처럼 일침을 놓는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홈비디오로 찍어놓은 자기 모습을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쑥스럽고 민망하다. 그러나 그런 보잘것없는 자화상과 대면한 뒤 극장 문을 나서면 관객은 다시 그 쑥스럽고 민망한 세상 속에서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홍상수의 유머는 힘이 세다.(이재성기자)  

09.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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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ike You Know It All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16 21:40 
    기분전환도 할 겸 오랜만에 동네극장에서 심야영화를 보기로 하고 정한 프로그램은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다. 박찬욱의 <박쥐>도 상영중이지만 한편만 봐야 한다면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여러 리뷰를 보건대 <박쥐>의 감상이 유쾌할 것 같지 않다). 두 시간쯤 남았는데, 마침 감독 인터뷰 기사가 있기에 '기념'으로 스크랩해놓는다. 인터뷰의 홍상수는 이젠 나도 잘 아는 홍상수이다. 아, 그의
 
 
2009-05-05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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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0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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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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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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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2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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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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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stant 2009-05-0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폰지 하우스에서 이 영화 개봉에 맞춰서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을 상영하는
감독전을 3주간이나 진행한다고 하네요~

밥은 굶어도 책사고 영화보느라 돈을 꽤 쓰는 편인데,
안 그래도 가벼운 지갑 속 잔돈까지 탈탈 털어서 챙겨봐야겠어요 ^^

로쟈님은 홍상수 감독 영화 중 어떤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전 <오! 수정>만 아직 못 봤는데 그외는 다 좋아합니다;;;)

밀리 2009-06-02 14:52   좋아요 0 | URL
<오!수정>은 꼭 봐야 합니다!!^^;

2009-05-07 1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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