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지내다 보니 또 봄날이 간다. 봄날들이 가고 있다. 아무런 감상도 없이 보내기에는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아서 오래전에 쓴 시를 찾았다. 1995년 봄에 쓴 시들이니까 햇수로는 15년 전이다(아, 20대의 봄밤이여!). 라일락에 관해 쓴 시 두 편을 옮겨놓는다. 라일락이 한창이었다가 지기까기, 두 시 사이에는 한달 정도의 시차가 있다.
라일락 폭죽 속에서
이건
동시다발적 폭죽이다, 세상의 종말이다, 이게 아니야!
라일락 폭죽 속에서 한번쯤 코피 터질 만도 한 세상,
세상은 그로기 상태다, 아 이게 아니야!
아니다 싶은 것들 한꺼번에 터져 나와 숨가쁜
마음은 무정부상태다, 망명정부다, 라일락 폭죽 속에서
라일락 그 눈부신 난타 속에서
라일락 그 화려한 어퍼컷과 본때나는 잽 속에서
나는 본다, 보고야 만다
그래 바로 저거야, 라일락은 그저 라일락으로
온통 라일락으로 한세상 죽여주는 거야
바로 저거야!
라일락 끝내 지고 말다
그저 라일락 맨몸으로 죽여주던 한세상,
도 또 다른 세상에 밀려 떠밀려가고
라일락, 끝내, 지고 말다
불 꺼진 라일락 폭죽은 더 이상 아무것도 불 밝히지 않고
한번쯤 커피 터진 세상, 두 번 실수하지 않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세상은 꿋꿋이
다시 일어나 시간 끌어들이고 시간 끌었다
끝내 끌려가는 라일락-
그저 맨주먹 하나로 안 되는 일도 있다
세상엔 없는 게 없다!
09. 05. 18.
P.S. 4월 29일에 쓴 걸로 돼 있는 '라일락 폭죽 속에서'의 시작노트는 이렇다. "아마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나 보다. 자취하던 3층방 창으로 라일락 향기가 진하게 번져오던 때였다. 방바닥에 드러누어 있으면 10-15분간격으로 떠가는 비행기들이 보였다. 그렇게 한세상이 끝나도 나는 별다른 미련이 없을 듯했다..." 그리고 '라일락 끝내 지고 말다'는 5월 27일에 쓴 걸로 돼 있다. "한달쯤 지났을 때, 라일락은 자취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진상을 보도해야 할, 중계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세상은 붐붐 맨시니처럼 야무지다. 만만하지 않다. 흔한 말로, 맨손과 맨션의 차이라고나 할까, 거지 같은."
맨시니는 지난 1982년 도전자 김득구 선수와 함께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을 벌인 미국 권투선수다. 알다시피 김득구는 경기 끝무렵에 맨시니의 펀치를 맞고 쓰러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주먹 하나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26세의 젊은 복서는 홀어머니와 임신 3개월의 약혼녀를 남겨놓은 채 이국 땅에서 짧은 삶을 마감했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챔피언>(2002)은 그 비운의 복서를 소재로 한 영화였다. 흠, 라일락 얘기가 어쩌다가 복싱 얘기로 흘러가버렸나. 내친 김에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권투선수(The Boxer)'(1969)나 오랜만에 들어봐야겠다(http://www.youtube.com/watch?v=M7RgGFwgWPY).
"빈민가 출신의 권투선수가 권투를 그만두고 귀향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노래했다는 이 노래는 실제로 "62년 3월24일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세계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도전자인 에밀 그리피스의 주먹을 맞고 숨진 쿠바 출신 복서 베니 파레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날짜가 하루 넘어가서 오늘이 5.18이군. 더 큰 비극들에 대해선 말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