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어제 읽은 칼럼 한 편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한 문단을 나란히 읽어보려고 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제 올려놓으려고 했던 페이퍼로서 지난주에 올린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보충의 의미도 갖는다. 쟁점은 '문화적 저항의 의의와 한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먼저 결과적으로 소비문화에 투항해버린 90년대 '신세대' 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대안문화 창출을 요구하고 있는 강내희 교수의 칼럼이다. 

  

경향신문(09. 04. 10) 청년세대와 대안문화

1993년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발칙한’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온 적이 있다. 90년대 초라면 서울의 압구정동이 소비의 메카로 떠오르고 ‘오렌지족’을 위시한 소비지향적 신세대가 등장하던 때이다. 문제의 책을 펴낸 저자는 미메시스라는 그룹으로, 이들은 ‘386세대’로 통칭되는 80년대의 청년세대가 금욕주의의 운동권 문화를 신세대에게 강요한다며 나름대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 

90년대후 신세대 소비문화 빠져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의 시대 변화를 감각적으로 반영했다고 생각된다. 한국말로 된 랩 음악을 처음 시도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이 나오기 한 해 전이다. 당시 젊은 세대는 서태지에게 열광했고, 문제의 책은 신세대 감수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때 이미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80년대 운동권 문화는 지나친 엄숙주의를 드러낸다고 보고 있었던 터라 서태지의 새로운 감수성 실험과 미메시스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해방은 운동권이 강조하던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당시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만큼이나 욕망의 분출도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신세대가 걸었던 길은 한국사회가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투항이었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청년세대가 사회적 의제를 주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학생들이 전국적 의제로 집단행동을 한 것은 통일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북으로 간다며 연세대 교정에서 농성을 벌인 96년이 마지막이다. 이후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시장의 소비자로 변해버렸다. 신세대는 운동권 선배의 금욕주의, 엄숙주의를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의 해방을 위한 욕망을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젊은 세대가 기존의 문화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문화의 성격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5년 동안의 청년세대가 보여준 문화는 소비문화였다. 이들이 비판한 80년대의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넘어선 대안문화를 실험하려 했는데 말이다. 이전 세대가 문제점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80년대 청년세대는 권위주의 정치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권위주의로 흐른 측면이 적지 않았고, 세계 동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곧 망해버릴 소련의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은 것이 단적인 예다. 그래도 당시 청년세대는 현실을 뛰어넘는 대안문화를 추구했다.

대안문화로 ‘새 해방’ 추구 기대
80년대 대학 곳곳에서는 시국 시위와 함께 마당극이 수시로 펼쳐졌다. 강의시간이면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러나 개인의 관찰로 판단한다면 오늘 교수들의 강의 내용에 도전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개인의 패션과 스타일, 학점, 취업 등에 대한 관심은 늘어났으나 자기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히려 뒤로 미루는 듯하다.

오늘의 청년세대는 욕망의 표출에서 해방을 찾기 시작한 90년대 신세대의 직계 후배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해방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일까. 소비문화로부터 벗어나려고 기획하는 것일까. 청년세대가 새로운 삶을 실험하지 않는 사회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강내희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 

  

80년대 세대의 '정치적' 청년문화에 대한 불만과 반발심에서 터져나온 '신세대 문화'가 결과적으론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한 투항으로 귀결됐다고 지적하면서 필자는 동시에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문한다. 진단은 맞지만, 주문은 모호하다.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던 '압구정동' 세대의 문화가 대안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정말로 자기 욕망에 충실하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보는 것일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미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 아닌가?(이명박 정권만큼 어떠한 도덕적 금제도 없이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노골적으로 충실한 정권이 또 있었던가?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포식자들만큼 자신의 권력욕과 성욕에 충실한 이들을 더 찾아야 할까? 이들은 모두 지 꼴리는 대로 한다!)   

'네 멋대로 해라'는 건 이미 청년세대의 구호가 아니다. 세상이 앞질러,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자본이 노골적으로 챙기는 구호가 '네 멋대로 해라'이며(물론 그들을 '소비주체'로 호명하는 구호다. "너도 이런 거 살 수 있어!"), '세상에 너를 소리쳐!'다. 이명박 장로님도 필진으로 참여한 청소년 '처세서'의 제목도 '네 멋대로 살아라'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불온한 대안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미 문화적 '주류'의 목소리다. 차라리 '별일 없이 산다'는 구호가 오히려 더 '불온'하지 않은지? "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라고 말하기. 혹은 "난 알아요!" 대신에 맥없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라고 주절거리기(그래도 '아무렇지 않'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다. 소심하긴 해도 '루저 문화'의 저항적 에너지는 '어'라는 한음절에 집중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저항,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시차적 관점>의 한 문단에서 암시를 얻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전환이다"(15쪽)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지난번에도 적은 바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from the liberation from the System to the System of Liberty)"이다.  

"이것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었던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진정 파악하기 어려운 변증법적 전환이다." 즉, 저항과 전복의 포즈만으로는 '자유의 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체위를 다 시도해본다고 해서 제도가 바뀌는 건 아니다. 지젝은 '혁명적 정치학'에서 두 가지 사례를 든다. 각각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사례다.  

"살롱에서 토론하며 자신들의 모순된 언행을 즐기던 자유론자들로부터 권력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권력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역겨운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후반 혁명 전 프랑스에서 꽃피웠던 여러 자유사상가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혁명적 공포의 엄격한 새로운 질서로 전도시키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번역에서 '역겨운 예술가들'은 'pathetic artists'를 옮긴 것인데, '측은한 예술가들' 정도가 아닌가 싶다. 살롱에서 토론을 즐기던 자유론자들이나 권력에 나름 애교 있게 항의하던 예술가들이나 모순적이게도 한편으론 권력에 '기생'하는 족속들이었다. 오늘날 그런 이들의 사상과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살롱에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혁명적 공포'를 불가불 수반하는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고자 한 시도를 지지하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에도 피바람 부는 '혁명 만세'를 외칠 수 있는지.    

"유사하게 절대주의자, 미래파, 구성주의자 등이 혁명적 열정의 우위를 두고 경쟁하던 시기인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첫 문장의 '혁명적 열정'이나 두번째 문장의 '혁명적 열기'나 모두 'revolutionary fervor'를 옮긴 것이다. '강요된 집단화(forced collectivization)'는 '강제 집산화'가 낫겠다. 그런 강제 집산화 과정에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실정적/긍정적 사회정치 질서로 옮기고자 했던 시도를 읽는 게 중요하다는 것. 요컨대 핵심은 '혁명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거기에 비하면, "혁명 이후의 현재가 짊어진 십자가에서, 그들 자신들이 자유에 대해 가진 만개하는 꿈의 진실을 인식하기 거부하는 혁명적인 아름다운 영혼들보다 윤리적으로 더욱 역겨운 것은 없다."(16쪽)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은 제시하면 "There is nothing ethically more disgusting than revolutionary Beautiful Souls who refuse to recognize, in the Cross of the postrevolutionary present, the truth of their own flowering dreams about freedom." 즉, 자유에 대한 열망을 실컷 늘어놓다가 정작 혁명적 공간이 열리자 '이런 게 아니었어'라고 부인/회피하는 태도를 지젝은 '아름다운 영혼'의 역겨운 태도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대안문화'가 아니다. '질서'가 바뀌지 않는다면 '대안문화'의 '대안'은 가식적인 눈속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저항'도 '도발'도 '전복'도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가 새로운 질서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이 생략된다면, 모든 체제비판은 체제 기생적인 비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여기저기서 "네 멋대로 해라"고 부추기는 시대에 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기 개성을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그러한 조건에 구속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다면, 네 멋대로 하지 마라!.. 

09.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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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영혼'이란 일종의 비꼬는 듯한 표현인가요?

로쟈 2009-04-11 15:35   좋아요 0 | URL
헤겔의 용어입니다. '순진한 주관주의' 정도일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은 주관적 관념론자가 아니라서 순진한 주관주의를 거시기하게 보았겠군요.

로쟈 2009-04-12 12:06   좋아요 0 | URL
그냥 누가 봐도 '순진한' 태도죠...

yoonta 2009-04-1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표현들이 난삽한 편이어서..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

이런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이 불분명했었는데 로쟈님 설명을 들으니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군요.

결국 헤겔의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로군요.

체계를 단순히 거부하거나 도발하는 것은 최초의 반정립적 '부정'은 될 수있을지 모르나
최초의 체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는 '부정의 부정'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


로쟈 2009-04-11 19:47   좋아요 0 | URL
지젝은 적어도 제 경우엔 헤겔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가 난삽한 건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10대말에서 20대 초중반이 보기엔 60년대 태어난 사람들이나 70년대 초반 태어난 사람들이나 다 아줌마 아저씨들일 뿐이겠지요.

로쟈 2009-04-12 17:52   좋아요 0 | URL
각 세대마다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만, 점점 좀스러워지는 듯해서 아쉽습니다. 요즘은 각자 생각만 하기 바쁘니까요...

paul 2009-04-1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기다리신다는 "The Monstrosity of Christ" /Slavoj Zizek 이 출간된 것 같더군요.^^

로쟈 2009-04-12 17: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여름에나 읽을 수 있을 텐데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번주에도 지갑을 열게 하는 책은 많지 않다(보통 확실한 필요 때문이거나 절박한 관심 때문에, 혹은 예기치 않은 횡재일 경우에 구입을 서두르는 편이다). 그럼에도 눈길을 잡아끄는 책이 없지 않은데, 인문서 가운데는 단연 <일급 비평가 6인이 쓴 매혹의 인문학 사전>(앨피, 2009)이 '탐나는 책'이다. 찾아보니 "현재 일본 문학계를 이끄는 6인의 비평가들이 의기투합하여 1991년에 펴낸 <읽기 이론>을 번역한 책이다. 문학에서 출발하여 사상, 실제 비평으로 이어지는 심오하고도 명쾌한 내용으로 일본에서는 스테디셀러이다."라고 소개된다. 개인적으로는 '읽기 이론'이란 제목이 더 마음에 들지만, '이론'이란 말은 국내 교양서에서 기피 용어다. 아쉽게도(물론 예견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기사는 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론 읽기' 범주에 들어갈 책은 조엘 도르의 <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1>(아난케, 2009)이다. 라캉 직계 제자의 '라캉 독해 입문서'인데, 2권이 마저 출간되면 앞으로 출간될 라캉의 <세미나>들과 <에크리> 읽기에 유익한 참조가 되겠다(<에크리>는 드디어 올해 출간되는 듯하다). 이 두 권과 함께 관심도서로 꼽아본 책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이다. 제목에서부터 '학술적인' 냄새를 팍팍 풍기는데, 다행스럽게도 '매혹의 인류학' 같은 제목으로 개명되진 않았다. 주중에 서점에서 보고 가장 '놀란' 책이기도 하다. 예기치 않은 타이틀이어서인데, 그럼에도 리뷰기사는 충분히 예상가능했다. 한겨레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나도 조만간 서평을 쓰게 될 듯하다(표지는 국역본이 더 마음에 드는군).     

한겨레(09. 04. 11) 자본주의를 구원하라, 인류학이여

인류학은 자주 서구 제국주의 시대 욕망의 산물이거나 서구인들의 이국취미의 학문적 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2001)은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 책은 인류학이 대안적 세계에 대한 비전을 열어줌으로써 당대 지배체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인류학의 전통 속에서 그런 투쟁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은이 데이비드 그레이버 자신이 학문과 투쟁을 병행하는 사람이자 학문을 투쟁의 장으로 삼는 사람이다. 뉴욕대 교수를 거쳐 런던대 교수(사회인류학)로 재직중인 그는 ‘지구적 민중행동’ ‘세계산업노동자조합’ 같은 급진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책의 관심은 가치이론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제출하는 데 있다. 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시장과 화폐를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이 시대가, 인류학적 조망 아래서 보면 보편적이기는커녕 오히려 특수한 사례라는 인식이다. 그런 인식 위에서 그는 먼저 우리 시대의 지배 가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논의를 풀어간다. 개인들이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만인에게 결국 이익이 된다는 명제는 우리 시대의 거의 보편적인 믿음이 됐다. 지은이는 이런 믿음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개인도 시장도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최근세사의 산물일 뿐이며, ‘자기 이익 극대화 노력’이라는 것도 서구에서 발전한 자본주의 질서에서만 뚜렷하게 확인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시장을 초역사적 보편 체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강자·부자의 지배와 이익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 작업일 뿐이다. 

이와 함께 지은이는 ‘포스트모더니즘’ 학문 조류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류가 일체의 보편적 평가기준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함으로써 결국 연대와 저항의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지은이의 시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귀착한 것은 ‘개인의 창조적 자기형성’이었고, 그것은 결국 사회의 파편화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상대주의가 신자유주의의 총체적·보편적 가치평가 체제와 상응한다는 사실이다. 한쪽은 파편화하고 다른 한쪽은 그 파편적 존재들을 총체적 가치 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은이는 인류학이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살피는 사람이 인류학의 거인 마르셀 모스(1872~1950·사진)다. 지은이의 목표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모스의 인류학적 연구를 결합하는 것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마르크스와 모스는 서로에 대한 완벽한 보완물”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투신했다면 모스는 비교인류학의 성과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했다.” 또 “마르크스는 지속적으로 인류학에 관심이 있는 사회주의자였으며, 모스는 평생 동안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인류학자였다.” 

여기서 지은이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사회주의’로 표출된 모스의 정치적 열망이다. 그의 대표작인 <증여론>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다른 어떤 저작보다 더 강렬한 정치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이 저작에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놓인 부족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가치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북아메리카 북서부 원주민인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콰키우틀족의 경우에서 보이는 교환양식을 ‘선물경제’라고 명명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을 주고 그 선물을 받은 쪽은 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시 선물하는 행위양식이 이 선물경제의 특징이다. ‘자기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과는 아주 다른 교환양식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화폐의 가치, 상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놓을 때, 선물경제권에서는 “공적으로 무언가를 선물하는 기쁨이나 관대한 분배의 기쁨, 공적이고 사적인 향연에서 베푸는 호의의 기쁨”이 최우선의 가치가 된다. 여기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대안 체제를 찾아냈다.

지은이는 모스가 <증여론>을 발간하던 해에 <볼셰비즘에 대한 사회학적 평가>를 함께 출간했음을 상기시킨다. 모스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한편으로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그 혁명의 폭력적·당파적 성격에 의구심을 품었고, 특히 권력 중심적 사고에 거부감을 느꼈다. 지은이는 모스의 이런 우려를 수긍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권력 문제를 회피하는 혁명 열망은 순진한 도덕주의로 귀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스의 도덕주의가 마르크스의 냉철한 이론과 결합한다면 대안을 창출하는 상상력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책은 강조한다.(고명섭 기자)  

09. 04. 11. 

  

P.S.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 바로 떠올려주는 책은 물론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마르셀 모스'론을 쓴 레비 스트로스(<구조인류학>이 재번역되어야 한다)와 일반경제로 확장시킨 <저주의 몫>의 저자 조르주 바타이유다.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칼 폴라니의 경제인류학과 비교해보아도 흥미롭겠다(참고로 하이에크와 폴라니의 비교는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4101737055&code=9003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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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류학적 가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외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12 00:26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훏어보고 없는 시간에 부랴부랴 작성한 것이다. 안 그래도 저자의 다른 책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상들>을 어제 구했는데,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이 책은 105쪽 분량이니까 같은 저자의 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얇긴 하다.     교수신문(09. 05. 11) 시선 끄
 
 
푸른바다 2009-04-11 11:58   좋아요 0 | URL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은 모셔다만 놓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마침 저도 아침에 배달된 한겨레에 실린 이 기사를 읽고 그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됐네요^^

로쟈 2009-04-12 11:54   좋아요 0 | URL
저는 모셔둔 책이 어딨는지 못찾겠어요. 아마 처박아두었나 봅니다...

게슴츠레 2009-04-11 12:50   좋아요 0 | URL
최근에 한겨레21에 폴라니 특집이 실렸었죠. 개인적으로 저는 우석훈 씨 등이 주도하고 있는 '인류학적 시각'들이 좌파의 방향감각상실에 대한 징후이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괴물의 탄생>의 경우, 스위스의 시계나 이탈리아의 수제 자동차 생산 등의 사례를 들면서 강한 국민경제와 제3부문의 연관성을 드시던데 '자본주의의 세계성'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더군요. 제3부문의 존재가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이 세계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논거는 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억압적 세계체계를 구성하는 필수적 고리일 수 있다는 것, 그저 주변부의 착취를 그 저변에 둔 고급 소비재의 생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세계체계분석과 고진을 읽으면서 들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학적 성과들이 모두 거부되어야 할 유토피아적 환상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가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인류학을 좌파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신중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그런 맥락에서 (아마 읽을 시간은 나지 않겠지만;ㅂ;) 이 책이 기대가 되는군요. 마르크스와 모스를 어떻게 저자가 조화시키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씨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와 함께 보면 좋을 것 같군요.

로쟈 2009-04-12 11:56   좋아요 0 | URL
역자인 홍기빈 씨가 '폴라니주의자'이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주목일는지 판타지일는지는 진지하게 검토해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55   좋아요 0 | URL
에밀 뒤르카임은 사회주의자와 사귀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해 거리를 두었는데 그 제자인 마르셀 모스도 그랬군요.두 사람의 사회주의관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겠네요.
그레이버 책은 모스 연구서로 읽으면 좋겠군요.

로쟈 2009-04-12 12:01   좋아요 0 | URL
'뒤르켐'이라고 보통 읽지요(전공자인 김종엽 교수를 따라서). '뒤르카임'은 영미식이고, 보통 '뒤르껭'이라고 많이 읽었었지요...

푸른바다 2009-04-12 13:26   좋아요 0 | URL
고전 사회학의 3대 거장이라고 하는 맑스, 베버, 뒤르켐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푸대접을 받는 사람이 뒤르켐이 아닌가 싶군요^^ 베버의 형편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제가 알기론 불어에서 직접 번역된 그의 저작은 단 한권도 없는 듯 싶어요. 번역되었던 책들도 대부분 절판 상태이고... 우리나라 강단 사회학이 미국식 구조 기능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면 그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사람이 뒤르켐일텐데 말입니다. 물론 현재 한국 좌파 계열의 이론적 원천 중의 하나인 프랑스의 인류학과 사회과학에도 뒤르켐의 영향은 매우 크겠지요. 아무튼 기능주의의 태두 탈콧 파슨즈의 책도 번역된 게 거의 없으니 중역이라도 몇권은 번역되었던 뒤르켐의 사정이 더 나은지도 모르지요. 번외자로서 할 소리는 아닌지 모르지만, 강단 사회학계의 부실한 기초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느껴져 좀 씁쓸합니다. 좌파들의 경우 그의 후계자들을 소화하는 데도 벅차서 그들의 외할아버지 뻘인 뒤르켐까지 관심이 미치기는 시간이 부족할 지도 모르겠네요. 제 개인적으로는 뒤르켐에 관심이 있고, 근대성에 대한 그의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시각'도 분명히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댓글을 다는 순간 아이콘을 바꾸셨군요^^ 취조 당하듯 의지에 앉은 지젝으로 ㅎㅎㅎ 마침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주문한 상태입니다. 이제 지젝에 대한 취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12 15:11   좋아요 0 | URL
알사스 로렌 출신이라서 독일발음처럼 읽는다고 해서 뒤르카임이 아닌가 하고 적었어요.거기가 수천년 독일문화권이라서...물론 프랑스 사람으로 통합니다만.그런데 영어발음은 뒤르켐이 아닌가요? 전에 이 문제로 참고한 책이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저는 그동안 뒤르켕으로 표기했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2 20:5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람혼 2009-04-13 01:07   좋아요 0 | URL
그레이버의 책이 단연 눈에 띄는군요. 곧 구해서 탐독해 봐야겠습니다. 언제나 좋은 책 발 빠르게 소개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로쟈님. 그나저나 서재가 새단장을 했네요. 새롭게 바뀐 배경화면과 새로운 지젝 사진이 서로 호응하는 듯합니다.^^

로쟈 2009-04-14 23:15   좋아요 0 | URL
네, 요즘 세상이 하도 '폭력적'이어서요...
 

예정에 없이 <용의자 X의 헌신>이란 영화를 봤다. 두어 시간쯤 시간을 죽여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동네 멀티플렉스에 가서 제일 먼저 시작하는 영화표를 달라고 했다. 그게 <용의자 X의 헌신>이었다(물론 이미 봐도 괜찮을 영화로 분류돼 있었지만). 저명한 일본의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원작자의 이름이 정확하게 '히가시노 게이고'란 것은 영화를 본 이후에야 새겨두게 되었다(기억엔 지난주인가 <씨네21>의 커버스토리로 다루어진 바 있다). 영화만 보더라도 대단히 뛰어난 추리소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알고 보니 저명한 문학상 수상작이다. 게다가 대단히 동양적인(최소한 일본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헌신'이 주는 감동도 있고). '히라시노 게이고의 헌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작가와 영화 관련기사를 모아놓는다(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영화 리뷰는 건너뛰시는 게 낫겠다).    

   

한겨레(07. 08. 01) 일본의 대표적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의 대표적인 미스터리물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50). 작가 경력 22년이지만, 그의 전성기는 쇠퇴할 줄 모른다. 1985년 <방과후>로 데뷔한 이래,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중문학상인 나오키상의 단골 후보 작가였던 그다. 지난해에는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드디어 제134회 나오키상을 거머쥐었다. 총 60여 편의 작품 중 <백야행>을 비롯한 15편이 티브이 드라마화되었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된 <편지> <숙명>을 포함해 <비밀> <게임의 이름은 유괴> <변신>은 영화화되었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트릭’대신 ‘인간’을 그려낸다.    

'트릭' 대신 '인간'을 그려낸다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3관왕의 기록을 가졌다. 추리문학계에서 유명한 ‘이 미스터리가 최고상’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등 세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 비밀은 보통의 미스터리물과는 다른 이야기 구조에 있다. 작가는 처음부터 범인이 하나오카 모녀와 천재수학자 이시가미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결말까지 도통 책장을 넘기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절대 ‘복선’을 깔거나 계산하지 않고 ‘직감’으로 써나가는 능력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고전 추리물과 달리 ‘트릭’ 대신 ‘인간’을 그려내는 것으로 승부한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작품인 <편지>를 읽은 독자들도 “이거 추리소설 맞아?” 하면서 놀란다. 주인공은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살인자의 입장에서 그려내는 범죄를 통해, 그는 사회와 가족과 인간의 화두를 이끌어낸다. 결국 미스터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반 독자까지도 그의 팬으로 끌어온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지바 마유미(24)도 그중 하나다. 그는 <백야행>이 지난해 티브이 드라마로 화제를 뿌릴 무렵부터 히가시노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디브이디는 아예 세트로 구입했고, 다른 소설 <비밀> <환야> 등까지 찾아 읽는 계기가 됐다. 그는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어느 정도 결과가 정해진 미스터리라는 느낌을 받아 심심하다. 반면 항상 대답을 독자에게 위임하는 히가시노의 일관된 패턴은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것’을 특집으로 다룬 문예 무크지 <야성시대>는 “나이를 곱게 먹어 가면서 마음속에는 탁월한 로맨티스트의 면모와 동거하는 남자”라고 작가를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의 창작의 원천은 무엇일까. 혹시 술이 아닐까. 인터뷰 속 작가의 하루 일과를 보면 그렇다. ‘술시’라는 게 있는데, 바로 술을 마시는 시간이다. 새벽 3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잔다. 오후 4~6시의 운동시간을 전후로 하루 8시간은 온전히 글만 쓴다. 되도록 밤 9시까지는 일을 마친다. 그 뒤 밤 11시부터 잠들기 전까지는 혼자 또는 벗들과 술을 마신다. 그것은 일종의 ‘부친 따라하기’다. 시계수리공이었던 부친이 늦은 밤까지 일을 끝내고 “아아, 오늘은 여기까지 해냈군” 하면서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마감을 끝내면 이모쇼추(고구마소주)를 마시면서, “그래, 그 대목은 그걸로 괜찮겠지”, “아휴, 거긴 고쳐 쓰는 게 좋았을걸” 하며 되돌아본다. 때로는 벗들을 찾아 도쿄 긴자의 바 ‘문단’을 찾는다. 다양한 업계 사람들을 접하면서 현실 감각을 얻는 곳이다. 편집자들을 만나 인물과 이야기 전개 방향을 논하기도 한다. 

마감 끝난 ‘술시’는 창작의 힘
그는 문예계에서 흔치 않은 이공계 출신이다. 1981년에 오사카부립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일본 전자회사인 ‘덴소사’에 입사해 엔지니어가 되었다. 하지만 1985년 <방과후>로 그해 최고 추리소설 신인작가에게 주는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으면서 인생이 바뀐다. 그 뒤 도쿄로 상경해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다. 그의 공학도 경력은 작품 도처의 대사나 이야기 전개에서 맛볼 수 있다. 최근 펴낸 에세이집 <사이언스?>도 그렇다. 과학과 경제·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수학이라는, 이공계 출신 추리소설가 특유의 과학에세이로 호평받고 있다.

“10명이면 10명 모두 납득하는 살인 동기가 아니라, ‘뭐야? 이런 걸로 사람을 죽여?’ 하는 추리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다.” 히가시노의 말이다. 지금이야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한때는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고 한다. 현재 그는 도쿄 중심가의 한 맨션에서 “가족이자 나를 비추는 거울이며 교사이기도 한 위대한 존재”인 네코짱(고양이)을 부양하며 살고 있다.(황자혜/<한겨레21> 도쿄 전문위원)    

 

세계일보(09. 04. 02) 용의자 X의 헌신, 오랜만에 보는 정통 미스터리의 진수 

천재 수학자가 있다. 모든 천재가 그렇듯이 그는 외롭다. 수학에만 열중하고 싶어 기꺼이 사랑도 포기하고 살아왔다. 가세가 기운 탓에 대학 연구실 대신 고등학교 교사를 선택했지만 큰 불편이나 불만은 없다. 하지만 마흔을 넘어서면서 삶이 고달파졌다. 세상은 수학처럼 아름답지도 완벽하지도 않고,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가 없다. 조금씩 죽음을 떠올릴 즈음 계산에 없었던 감정과 맞닥뜨린다. 아파트 옆집에 이사 온 여인에게서 설렘을 느끼게 된 것.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인은 살인을 저질렀다. 이 여인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용의자 X의 헌신’은 오랜만에 정통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영화다.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 데쓰야(쓰쓰미 신이치)와 이를 밝히려는 그의 동창이자 천재 물리학자인 유카와 마나부(후쿠야마 마사하루)의 두뇌싸움을 그렸다. 영화는 처음부터 사건의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시작한다. 여인은 자신의 집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전 남편을 전깃줄로 목 졸라 죽인다. 이를 목격한 이시가미는 시체를 식별할 수 없도록 얼굴과 지문을 뭉개서 유기했다. 

 

경찰이 확보한 시체와 현장, 증거물도 관객이 지켜본 사건의 전말과 일치한다. 사건 현장 인근에 놓였던 자전거에서 전 남편의 지문을 채취했고 시체 DNA는 그가 최근 생활했던 여관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의 그것과 일치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경찰에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이시가미는 과연 어떠한 트릭으로 이처럼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었을까. ‘기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라는 이시가미의 귀띔이 유카와가 포착한 유일한 단서.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든 이시가미와 이를 풀어내는 유카와의 팽팽한 머리싸움과 섬세한 감정묘사, 잘 짜인 플롯, 촘촘하게 배치된 단서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원작의 탄탄한 줄거리, TV드라마 ‘하얀거탑’과 ‘갈릴레오’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날카롭게 그려낸 니시타니 히로시 감독의 연출력, 일본 정상급 가수이자 탤런트인 후쿠야마와 쓰쓰미 등의 열연에 힘입어 이 영화는 일본에서만 관객 370여만명을 동원했다. 9일 개봉하며 12세 관람가다.(송민섭기자) 

09.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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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원신문 4월호에 실은 연재글을 옮겨놓는다.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출판사, 2009)을 실마리 삼아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보았는데, 애초엔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을 중심적으로 다루려고 했었다. 막스 베버가 두 책을 이어주는 조인트다. 결과적으로 세넷을 더 자세히 다루지 못해 아쉽다(지그문트 바우만과 함께 그는 개인적으로 '올해의 재발견'이다).  

   

연세대학원신문(09. 04. 07) [당신 서재의 나침반] 고민하는 힘 

필요 없는 것을 생각할 여가가 있으면 전문지식을 익히고 유용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기. TOEIC이 900을 넘지 않으면 취직이 힘들다며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기. 이런 각박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식 프로그램을 필사적으로 소화하기.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가 엿본 한국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분명 그런 학창시절을 보내면 일류 기업에 취직할 수 있고 높은 월급을 받는 엘리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청춘이기 때문에 마음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열정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라는 것이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에서 내비치는 그의 염려다.  



하지만 경제 불황과 취업대란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대다수 한국 대학(원)생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열정의 상실에 대한 염려보다는 ‘루저(loser)’로 전락하지 않을까라는 불안일 것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생활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청춘’이라도 담보로 내놓으려 하지 않을까. 물론 문제는 장래를 담보로 학자금을 대출받고 청춘을 불사르며 학업에 매진하여 기적적으로 ‘성공의 사다리’에 올라탄다 한들 “거기에 남는 것은 이상하게 부풀린 오만과 영혼을 잃어버린 사고”밖에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소고기 협상은 미국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오만과 사고를 사례로 떠올릴 수 있겠다). 무엇이 문제이며 우리의 고민이어야 할까. 



막스 베버는 일찍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러한 ‘마지막 인간’이 도달하게 될 지점을 이렇게 기술했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화자찬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 따르면, 베버의 ‘마지막 인간’은 더 이상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가리킨다. 언어학적 의미를 넘어서 대저 ‘의미’란 무엇인가? 아니 ‘의미의 의미’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우리’를 거쳐서 관심과 고려의 범위를 ‘그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걸 뜻하지 않을까. “당신 없는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란 노래가사를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그들까지도 행복하지 않다면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 말이다. 그건 ‘다 살리는 일’을 뜻하는 우리말 ‘다스림’과도 상통한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으론 ‘함께 살아감(living together)’이다. 이 ‘다 살리는 일’과 ‘함께 살아감’이 정치의 본래적 목적이고 의의다. 그것을 달리 ‘전체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무엇이 ‘전체’인가? 무엇보다도 ‘인류 전체’를 가리키지 않을까. 흔히 쓰는 말로는 ‘전체 인구’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 2008)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인용하는 바에 따르면, 2002년 기준으로 세계인구는 62억 명을 넘어섰으며 매년 7,700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증가율은 불균등해서 ‘선진국들’의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는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이나 앙골라 같은 최빈국의 인구는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것이 ‘인구 과잉’이라는 당면한 문제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너무 많은 부자들’이 양산해내는 것이다. 비교적 인구가 적은 부국들이 전 세계 에너지의 2/3를 소모한다. 이런 과소비적 생활방식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유지하려면 현재의 부존자원은 턱도 없이 모자란다. 때문에 식민주의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의 열매’는 결코 모두에게 공유될 수가 없다.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만연하면서 기대 수명이 절반으로 떨어져도 선진국의 제약회사들은 적당한 가격의 약을 공급하는 데 난색을 표하며 그들의 죽음을 방치했다. 장기간의 빈곤과 분쟁의 여파로 아프리카를 떠난 이주자들이 ‘유로피언 드림’을 꿈꾸며 밀항을 시도하다가 여러 차례 지중해에서 수장(水葬)됐지만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방안은 마련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이제 그만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우리’의 기득권을 지키는 안전한 방책이라고 믿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경제의 불안정성과 사회적 불평등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인 산물이지만,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그 불안전성/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격차만이 아니다. ‘두 국민 사회’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국민국가 안에서의 계층간 소득격차와 그에 따른 사회적 위화감이 위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미 마르크스가 160여 년 전에 자본주의 하에서 “딱딱한 모든 것은 녹아 사라진다”(『공산당선언』)라고 공언한 바 있지만, 바우만이 ‘유동적 근대’라고 명명한 오늘날 그 유동성은 우리의 삶에 거대한 공포를 드리우고 있다.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에서 바우만은 아예 “다가오는 세기(=21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그 재앙의 근원을 직시하는 것만이 유일한 치료법이 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다.  



그러한 근원을 직시하는 데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도 도움을 준다. 세넷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민간부문에 군대의 조직 원리를 도입한 일에서 소위 ‘사회자본주의(social capitalism)’의 기원을 찾는다. 사회자본주의적 관료제는 사람들에게 예측할 수 있는 ‘합리화된 시간’ 관념을 심어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력에 비추어 앞으로의 승진 경로와 늘어날 재산 규모를 그려볼 수 있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우면서 노후를 설계해나갈 수 있었다. 비록 베버는 이러한 관료제 하의 삶을 ‘쇠창살’에 갇혀 지내는 것에 비유했지만, 세넷이 보기에 베버의 비판은 일면적이다(작년 조사에서 한국의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1위가 공무원이었으며, 그들이 꼽은 이상적 배우자 직업도 공무원이었다).

오늘날 다수의 노동자들이 관료제적 ‘쇠창살’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을 들씌우고 있는 것은 ‘비정규직’이라는 더 잔혹한 올가미이다. 사회자본주의는 과거의 이름이 되었다. 피라미드적 관료제 사회를 대신하여 들어선 것은 무한경쟁을 독려하는 ‘승자독식사회’다. 1%의 승자가 모든 걸 다 차지하고 나머지 99%가 퇴출되고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승자독식사회』(웅진지식하우스, 2008)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해보도록 한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라고 말하기엔 아직 젊다. 아직은 ‘전체’를 생각해야 할 나이다.  

09.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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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10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저도 읽고 참 좋았고 써먹을 대목이 많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캐피털리즘과 신자유주의와 인간성파괴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로쟈님 오늘도 좋은 책 소개에 감사하며 좋은 하루되세요 ^^

로쟈 2009-04-11 00:2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써먹을 대목이 많은 책이죠.^^
 

밀턴의 <실낙원>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성의 역사'에 대해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된다('성의 진화'도 포함하여). <아담, 이브, 뱀>(아우라, 2009)와 <진화하는 결혼>(작가정신, 2009) 등이 그런 맥락에서 손에 들게 된 책이고, 오늘은 푸코의 <성의 역사1>(민음사)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예전에 정독하지 않았는데, 내 책은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다). 이 참에 생명정치와 관련한 쟁점들을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게 '야무진' 꿈이다(<뉴레프트리뷰>에 실린 '생명정치적인 것의 벡터들'이 좋은 길잡이다. 하지만 몇몇 번역문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이유는 나중에 기회를 보아 적도록 하겠다). 독서를 채근하는 의미에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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