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식대중화 현장을 찾아서'에서 '블로그' 편을 옮겨놓는다. 캡쳐화면에 '로쟈의 저공비행'도 포함돼 있어서,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블로그를 매개로 한 지식대중화 시대의 명암을 짚어주고 있다. 나도 최근에 비슷한 주제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미리 참조했다면 좋았을 뻔했다. 

교수신문(09. 05. 07) 미래 지식의 노마드 … 학문적 진실 혹은 ‘조회수’의 함정  

인류 문명은 지식 전달 방식의 변화로 함께 진보를 했다. 문자의 발명으로 구술 기억력을 넘어선 지식의 확장이 가능해졌고, 종이는 문자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줬다. 특히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를 했고, 그것이 결국 정치, 경제 등 역사 전반에 영향을 끼쳤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문서, 신문, 책의 형태로 저장된 지식은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자화된 지식은 일방향적 성격이 강해서, 대중은 어렵사리 접한 책들이 주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십 수 년 사이에 지식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짐작하겠지만 바로 인터넷 덕분이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발명품인 인터넷으로 인해 지식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됐으며, 대중의 지적 수준은 획기적으로 증대했다. 특히 지식의 소통이 쌍방향, 다방향적이 됐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새로운 지식 교류와 생산의 장
<교수신문>은 지금까지 인문, 사회, 과학 분야에서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단체가 있는 현장을 스케치했다. 좋은 취지와 커리큘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몸소 관련 단체를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크다. 또 ‘대중화’를 표방은 하지만, 막상 강사들 앞에서 청중이 왕성한 실시간 논쟁과 토론을 제기하기란 쉽지가 않은 이유도 있다.  

그렇다면 지식에 대한 욕망이 어느 때보다 커진 대중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 등이다. 인터넷 초창기의 홈페이지들은 사실 지식의 대중화와 거리가 멀었다. 종이에 있던 지식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의 카페나 클럽이 인기를 얻고, 블로그가 선풍적인 관심을 끌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이른바 웹 2.0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대중과 연구자들이 직접 인터넷을 통해 소통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점에 있다. 학문 성격상 인문 사회 분야의 연구자들이 대중과 접하는 경향이 크다. 그렇다면 웹을 통한 연구자들과 대중의 소통 양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은 서평과 북리뷰를 들 수 있다. ‘로쟈’는 대표적인 알라딘 블로거인데, 러시아문학을 전공, 강의하고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연구와 강의로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심도 있는 서평과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고, 각종 일간지, 주간지의 서평을 ‘평’하기도 한다. 로쟈의 서평에 대중은 댓글이나 추천 등으로 화답하는데, 개중에는 전문적 식견을 가진 이들의 코멘트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질문과 답변의 수준을 넘어 댓글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간혹 새로운 소식이나 지식이 로쟈의 블로그를 방문한 네티즌에 의해 공급되기도 한다. 로쟈의 블로그는 일일 방문객이 천명을 넘어설 정도로 대중 인지도가 높다.  

이렇게 어디서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닌 서평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하고, 그것을 주제로 대중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덕분에, 책에 대한 접근성, 배경 지식, 최신 정보가 대중과 공유된다. 이는 다소 점잖은 면이 있는데, 혈기왕성한 젊은 학자들은 단순 리뷰나 서평에 만족하지 않는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연구교수인, 알라딘 블로거 ‘FTA반대Balmas’는 대단히 날카롭게 불어 번역서들의 오역을 잡아낸 경력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데리다 등 주요 프랑스 철학책이 번역돼 나올 때마다, 꼼꼼하게 원문 대조 검토를 하고, 오역을 지적하곤 한다. 간혹 오역 논란이 커져, 대개 또 다른 연구자이기도 한 역자가 항의메일을 보내고, 그 항의메일이 공개되는 웃지 못 할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로쟈 역시 꼼꼼한 원문 대조 번역 검토로 명성이 높다.

물론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지식 소통이 책을 매개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나 학부생들도 활발하게 블로그나 클럽, 홈페이지, 카페 등을 통해 지식의 소통과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일차적으로는 각종 일간지, 주간지 혹은 학술지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거기에 코멘트를 다는 작업에 집중된다. 다소 폐쇄적이고 위화감이 있는 해당 언론사의 사이트와 달리, 지식의 정류장 역할을 하는 이들의 블로그를 통해, 대중은 보다 손쉽고 가벼우며 친숙하게 각종 학술 소식을 접한다.

속류화의 위험성 경계
또 인터넷을 통해 대중이 연구자에게 직접 날카로운 질문이나 논쟁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언급한 알라딘 블로거 외에 들뢰즈 연구자로 유명한 김재인 서울여대 강사의 홈페이지인 ‘철학과 문화론’에는 항상 많은 네티즌이 들끓는다. 네그리의 다중 개념에 의거해, 지식 생산에서 위계적 관계의 폐지를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다중네트워크센터’는 아예 방문객이 직접 지식을 생산하고, 집적하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그 외에 문학 평론가 조영일 강사가 운영하는 카페인 ‘비평고원’, 랑시에르 번역으로 유명한 양창렬의 ‘철학사랑’ 등에도 발걸음이 이어진다. 



최근에는 출판사들 역시 대중에게 문호를 전면 개방하고, 표현의 욕구를 배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해나무는 최근 『지식의 이중주』를 출판하면서 우리 시대의 키워드에 대한 댓글을 설문조사했는데, 이는 향후 책에 대한 아이템만이 아니라, 대중의 지적 동향을 읽을 수는 점도 노린 것이다. 그린비는 소박하지만 깔끔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직원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고민과 출판관을 털어놓고 있으며,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을 하고 있다. 도서출판 난장의 대표 역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책 홍보 보다는 국내외 인문 사회 학술 쟁점을 알리고, 논평하는 일에 더 열중한다. 이쯤 되면 돈 받고 책 파는 출판사라기보단, 연구 집단과 독자 대중의 지식이 왕래하는 소통의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여러 장점과 대세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한계나 위험성도 간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개방적인 외양과 달리, 인터넷 공간에서도 지식인과 대중, 연구자와 일반인 사이의 격차는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이고, 나름대로 공력을 쌓은 일부 네티즌을 제외하면, 사실상 유명 블로거를 운영하는 연구자의 말을 ‘경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이를 방증한다. 게다가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 오고가는 지식이 얼마나 학문적인 검증을 받았는가하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대중의 기호와 조회수에 대한 집착이 학문적 진실을 도외시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연구자들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소통에 신경을 쓰느라, 본분인 연구에는 소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정성스럽게 가꾼 사이트를 운영 중인 김현돈 제주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블로그나 사이트를 연구자들이 애용하는 추세에 대해서 “지식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분명 의의는 있다”면서도 “사실 댓글, 콘텐츠 등등을 관리하자면 시간 및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연구에 소홀해질 수도 있는 점이 문제다”고 실토했다.(오주훈 기자) 

09. 05. 10. 

P.S. 흠, "대중의 기호와 조회수에 대한 집착이 학문적 진실을 도외시 할 수 있다"는 점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실 댓글, 콘텐츠 등등을 관리하자면 시간 및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연구에 소홀해질 수도 있는 점이 문제다"라는 지적은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독촉'들을 떠올려보니 그렇다. 이러다 사회적으로는 '매장'당하고 블로그만 둥둥 떠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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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5-10 19:46 
    교수신문 : 지식대중화 시대와 블로그 — 로쟈

어제부터 내일까지 원고의 강행군이다. 중간에 학회 발표도 하고, 학회지 편집도 거들고 하면서도 5편의 글 120매를 써야 하고 마지막 책 교정도 보아야 한다. 정신이 없어서 토요일자 신문들도 미처 챙겨읽지 못했다. 뒤늦게 둘러보니 다행스럽게도 주머니를 털 만한 '시급한'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니콜라스 미르조예프의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홍시, 2009)은 지난주인가 이번 주초에 봐둔 책인데, 이미 <바디스케이프>(시각과언어, 1999)란 책이 오랜전에 소개된 바 있는 저자다. 이번에 나온 책은 원제대로 '비주얼 컬처'(시각문화) 입문서로 꽂아둘 만한 책인 듯싶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9. 05. 09) 보는 행위, 그 속에 숨겨진 ‘시각의 권력’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물리적으로는 각자의 눈과 거기에 연결된 시신경이다. 그러나 보는 방식에는 권력이 스며있다. 자신도 모르게 백인의 눈으로, 남성의 눈으로, 제국주의자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인식한다.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근대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각문화를 대상으로, 보는 행위에 얽힌 정치적 함의를 풀어놓는다. 과거 존 버거는 미술작품에서,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 보는 자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읽어낸 적이 있는데 저자의 분석은 더욱 광범위하고 체계적이다. 그는 미술의 혁명이자 근대적 보기의 시작인 원근법의 발명에서 시작해 회화·조각·사진·텔레비전·가상현실·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시각문화가 발전해온 역사를 서술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도 있듯이 시각은 흔히 다른 감각에 비해 정확성과 객관성을 갖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여러가지 반증이 있다. 원근법은 사물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었으나 실제로는 빈번한 왜곡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의 화가들은 원근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왕이 신하들보다 작아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배경은 원근법으로 하되 인물은 고전적인 비례크기에 따라 묘사했다.

시각의 권력은 현대사회로 오면서 점점 커진다. 미국 가정의 99%에서 하루 평균 7시간48분동안 켜져 있는 텔레비전은 파편화된 세계에서 집단경험을 제공하는 초강력 매체다.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 문제는 수많은 미디어학자들이 지적해왔다. 인터넷 역시 발명초기의 급진적 평등성을 둘러싼 허풍스러운 주장보다는 역사적·문화적으로 결정된 공간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오늘날 가상세계는 인터넷 사용자·호스트·네트워크의 60%를 차지하는 중산층 미국인을 위한 보호막이라는 것이다.

시각이 갖는 권력은 제국주의 역사를 관통해 왔다. 콩고사회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표피적 서술은 그들에게 식인종이란 낙인을 찍었고, ‘미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제국주의자는 물론, 피식민지인 스스로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다. 현대의 신제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더욱 교묘하다. 저자는 외계인과 싸우는 미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맨 인 블랙>을 남미와의 국경을 통제하는 일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읽어냄으로써 일상에 스며든 이미지의 권력을 고발한다.

그는 1996년 가을 미국의 크루즈미사일이 이틀간 두차례 이라크의 대공방위시설물을 공격했음에도 며칠 뒤 이라크군이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던 일화를 들면서 “보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상문화학, 비판적 문화연구의 바이블에 해당되는 책으로, 원서는 10년전 나왔다.(한윤정기자) 

09. 05. 09.  

  

 

P.S. 기사 중에 존 버거와 로라 멀비의 책이 언급되는데, 짐작에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동문선, 1990)과 <1초에 24번의 죽음>(현실문화연구, 2007)을 가리키는 듯싶다. 예전에 '시각문화'와 '스펙터클'을 주제로 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느라 나름으로는 이 주제의 책들을 몇 권 뒤적여본 적이 있다. 기회가 되면 묶어서 다뤄봐도 좋겠다. 미로조예프의 책을 기준점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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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0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9-05-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라 멀비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ima라는 기념비적 논문을 언급하는 듯합니다. 그녀의 최근작인 <1초에 24번의 죽음>은 영화매체의 존재론을 다루는 이론서로 1초의 24번이라는 것은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기계적 촬영과 영사의 과정에서 사라지는 혹은 드러나지 않는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 본 것이죠. 영화의 유령성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화의 존재론적 특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이론서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9-05-10 22:32   좋아요 0 | URL
멀비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ima가 번역돼 있던가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관련논문은 읽은 적이 있지만...

yoonakim 2009-05-12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번역은 되어 있는데 원문으로 보는 것이 훨씬 이해가 잘되죠. 원문은 movies & methods나 film theory & criticism 같은 엔솔로지 형태의 영화이론서들에는 거의 수록되어 있습니다. 로라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에 와서는 페미니스트적 색체보다는 영화의 존재론이나 형식미학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는 듯합니다.

로쟈 2009-05-12 12:18   좋아요 0 | URL
네, 원문은 갖고 있어요. 번역됐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시차적 관점이 요구하는 것

중앙대 대학원신문(260호) '冊과 담론'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루고 있다. '한겨레21'에도 서평을 실은 바 있어서 청탁을 받고 주저했지만 초점을 다른 쪽에 맞춰달라고 해서 결국은 수락했다. 하긴 그렇게 초점을 달리하면, 서평은 몇 편 더 쓸 수도 있겠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5. 07) 저항의 교착상태는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현실 정치에 대한 그의 이론적 개입이자 그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 이후 이제까지 제시해온 담론의 중간결산이기도 하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롭게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 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 지금까지 다룬 문제들을 재정의하고, 자신의 작업을 재구성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젝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며 그의 공언대로 ‘주저’라는 말에 값한다. 

시차적 관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
‘시차’란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는 원래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2001)에서 얻어온 것이지만,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는 달리 헤겔-라캉주의자로서 지젝은 칸트주의를 헤겔적 사유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접목시킨다.  



그는 이미 <이라크>(2004)에서도 ‘시차’란 개념을 사용하여 이라크전쟁의 ‘진리’를 설명한 바 있다. 곧 “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는 부시의 말이 집약해주고 있는 바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이 전쟁의 첫 번째 이유요(상상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면(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세 번째 이유(실재계)라는 것이다.

요점은 여기서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게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다. 이 경우 한 가지 관점에서의 진리 주장은 그것이 타당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오류를 면치 못한다. 사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면서 정치적이고, 또 동시에 경제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춘 방책은 일면적인 해결책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차적 관점의 도입을 통해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철학의 교착상태뿐만 아니라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 학자들은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가령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도 혁명을 말하지만, 그들은 혁명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해나갈 따름이다. 자신들의 학술적 특권이 전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급진적인 담론을 쏟아내는 데 열중하는 ‘강단좌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발언을 뒷받침하고 있는 발언 위치, 곧 물적토대와 시스템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며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사실 한때 ‘급진적’이었던 과거 전력만큼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동체에 합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상당수가 젊은 시절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사실이 그 일례다. 가까이에서 예를 찾자면, 주사파의 대부였다가 전향하여 극우 이데올로그로 활동한다거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열혈분자였다가 수구정당의 ‘강성파’로 활약하는 정치인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사후적인 주장이 되겠지만, 이들의 ‘저항’이야말로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 흔한 사례가 아닐까. 

혁명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
지역적 층위의 국지적 저항으로 자본주의 세계화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가 국가로부터 언제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국가기계를 운용하는 책무를 떠맡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즉 국가라는 마당을 너무 쉽게 ‘적’에게 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결국 정치적인 것보다는 윤리적인 것을 더 강조하게 되며, 혁명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서 간주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은 다르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이다. 때문에 지젝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영속적이지 않을까라거나 혁명은 결국 안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좌파의 우려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오류는 혁명을 도덕적 의무로 사고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사-행동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것, 후퇴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불길한 수동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지젝의 시각이다. 그러한 수동성이 새로운 혁명적 주체와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이 암시가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내놓아야 한다면서 상사를 협박하기 위해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하는 것은 더 이상 주인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면서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위가 아닐까.  

09.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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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9-05-08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길한 수동성'이라니까 어릴 때 읽은 중국5000년의 지혜(?)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가 권력을 잡았을 때의 기인들 얘기였는데, 한 기인은 사마의 잔치하는 곳에 와서 맨날 깽판 놓고 했는데 사마의는 항상 호방하게 대했다 그런데 한 기인은 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는데 사마의가 죽여 버렸대요^^ 권력자들이'불길한 수동성'을 싫어한다는 예로 맞을라나요?

로쟈 2009-05-08 22:56   좋아요 0 | URL
재밌는 예인데요.^^

[해이] 2009-05-0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능 사서 읽고 싶은데 책값이 만만찮군요... 원서보다 더 비싸요 ㅠ

로쟈 2009-05-10 17:07   좋아요 0 | URL
인문 이론서의 경우 독자층이 많지 않으니 책값이 더 비싸게 매겨지는 듯해요...

도톰 2009-05-0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이님 말씀을 받아보자면 어쩌면 번역서가 원서보다 더 비싸도 이상할게 없다는 생각도 해보네요. 저자의 품 + 번역자의 품이 합쳐지니까 말이죠. 물론 그러한 품이 양적으로 고스란히 환원될 수는 없는 출판계 특유의 '환대'가 존재하긴 합니다만..

[해이] 2009-05-10 00:01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말한건 한국으로 건너온 원서 말한건데요ㅎㅎ한국으로 건너오면 원래 엄청 비싸지잖아요ㅋ근데 그거보다 더 비싸니까 놀랍다 뭐 이런ㅎㅎ

moonsavvy 2009-07-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란 제이 파큘라 감독의 영화에서 따온 게 아니라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나온 건가요? 국내에 <암살단>이라고 알려진 영환데 제임슨이 분석한 바 있는 영화입니다. 아직 책을 안 읽어 봤는데 이 영화와는 상관이 없는 건가요?

로쟈 2009-07-04 14:03   좋아요 0 | URL
네, 영화와는 무관합니다...
 

김지하 시인이 최근 신작 신집 <못난 시들>(이룸, 2009)과 함께 네 권의 산문집을 동시에 펴냈다. 산문집에 실린 많은 글이 작년 촛불집회에 촉발되어 씌어진 듯하다. 마침 시인과의 육성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노컷뉴스(09. 05. 08) 김지하 시인 “이명박 대통령, 촛불 의미 못 읽으면 혁명 온다” 경고  

▶ 진행 : 변상욱 대기자(CBS 라디오 '시사자키 변상욱입니다')
▷ 출연 : 김지하 시인


시인이자 생명운동가, 민족과 민중의 문학을 일궜고 유신독재에도 맞섰던 김지하 시인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아주 쉬운 시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시집과 함께 4권의 산문집도 동시에 펴냈고요. 김지하 시인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뭔지 들어보겠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시집과 산문집을 동시에 들고 오셔서 반갑습니다. '못난 시들'이라는 제목을 지으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 김지하 시인> 계기가 작년 시청 앞 촛불 때부터인데요. 촛불의 주역들이 20대 미만의 미성년, 어린이들, 이름 없는 많은 여성들, 노인들, 비정규직, 노숙자들 아니에요. 그러니까 못난 사람들이죠. 이들이 주체가 되고, 시청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걸 저는 제가 공부한 동학, 그러니까 후천개벽이라고 하죠. 거긴 기독교 방송이니까 예수 복음으로 하면 밑바닥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과 같죠. 그런 것들을 못 난 이들의 시라는 뜻으로 썼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아마 옛말에 대교는 약졸이라고 하더니 정말 지혜로운 것은 그렇게 어수룩하고 못나 보인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 김지하 시인> 그건 너무 과찬이시고요.(웃음) 



▶ 진행/변상욱 대기자> 촛불집회에 나가서 살펴보셨던 모양이군요. 젊은 사람들과 얘기는 나눠보셨습니까?

▷ 김지하 시인> 제가 얼굴이 팔리면 정부에서 안 좋게 생각할까봐 슬금슬금 밤에 가장자리에 가서 오래 있지도 못하고 4,5번 갔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촛불이 1주년을 맞았습니다. 제2의 촛불, 제3의 촛불이 있었다고도 얘기하지만 촛불은 다시 켜질 거라고 보십니까?

▷ 김지하 시인> 이미 커졌죠. 이건 단순한 정치사건이 아니고 문명사 변동의 중요한 계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 보십시오. 금융위기니 뭐니 하면서 문명의 중심이 유럽과 미국 중심의 방향에서부터 동아시아 태평양 쪽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어요. 경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그런 전체적 대세로 봐서 한반도에서 어린이들, 여성들, 노인들, 비정규직 같은 사람들이 정치주체로서 소리를 낸다는 것은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계기죠. 이런 일은 자꾸만 반복될 것이라고 봤죠. 물론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죠. 저는 그것을 횃불, 숯불이라고 부르는데요.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촛불이라는 처음 순수한 못난 사람들의 희망이 계속해서 촛불을 켤 것이라고 봤습니다. 가만 보니까 5월 2일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촛불을 문명사의 변동이라고 본다면 거기서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권이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뭡니까?

▷ 김지하 시인>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지한 거죠. 그걸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처음에 본인이 북악산 올라가서 머리를 숙이고 어쩌고 했듯이 이 예쁜 촛불을 오히려 들어 올리고 존중하는 태도로 가면 우리나라 국운이 지금 상당히 좋거든요. 그렇다면 문명의 대세가 우리나라로 오고 있는 것일 텐데. 맞이하고 마중하는 자세가 되고요. 만약 그것을 탄압하게 되면 문화혁명 같은 시끄러운 사태가 나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87년 당시를 기억하시겠습니다만 민주화 운동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이어질 때 '죽음의 굿판을 거두라'고 일갈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정치 세력들이, 사람들이 너무 어둡게 몰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걱정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볼 때 지금 철거민들이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저항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 김지하 시인> 그것도 좋지 않아요. 하여튼 목숨 끊는 건 안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자살자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거든요. 대학생 자살자 수만 한 달에 30여명입니다. 또 고등학생 자살자도 1년에 140명입니다. 전체 자살자 수가 12000여명 되는데 이것은 OECD 국가 중 첫째예요. 전 세계 수준으로는 네 번째이고요. 젊은 여성 자살자 수가 남자보다 더 많습니다. 이건 내가 보기에 안 좋은 현상인데요. 이 안 좋은 어두움도 이 나라에서 큰 문명 변동이 오리라는 신호입니다. 해뜨기 전에 시커먼 것처럼.

▶ 진행/변상욱 대기자> 전조 같은 걸까요?

▷ 김지하 시인> 그런 거죠. 그러니까 시커멀 땐 흰 빛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거죠. 그렇게 봅니다만 자살은 안 해야죠. 용산 참사도 그렇고 이런 경우에 조금 지나쳤고.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렇게 몰고 가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분명한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들도 있는데요?

▷ 김지하 시인> 그래야겠죠. 그러니까 그것까지 포함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그 촛불 안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갈망, 희망, 아젠다를 존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존중해서 받들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데 자꾸 억누르려고 하고, 옛날 박정희 시대에 하는 식으로 흉내 내고 싸우면 혁명 터집니다. 제가 보기엔 틀림없어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래서 쇄신이라는 얘기가 요새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정치권의 쇄신이라고 구호는 내걸고 있는데, 어떻게 쇄신했으면 좋겠습니까?

▷ 김지하 시인> 말로만 자꾸 떠들죠. 말만 쇄신이에요. 예를 들어 홍준표 같은 사람은 4월엔 경제개혁법을 통과시켰고, 5월엔 사회개혁법, 6월엔 무슨 개혁법을 하고. 순 형식주의적이고 표피적인, 국회 통과시키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양 그래요. 그러니까 보선결과 보세요. 완전참패 아니에요. 그건 이명박 정권 전부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 그렇게 진짜 쇄신을 안 하고 말로만 떠들면 우리는 너희들을 안 찍겠다는 말이에요. 그 분위기를 빨리 읽어야죠. 그런데도 못 읽는 것 같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문제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내가 보기엔 형편없습니다. 지금 4대강 깨작깨작 해서 국민들 불만만 많고 거기서 무슨 경제적 이득이 오겠어요? 그러니까 좀 성큼성큼 시원시원 나갔으면 좋겠어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동아시아 시대에 국운의 융성이 호기를 맞았는데요. 이 상황에서 김지하 시인께선 앞으로 어떤 일을 주로 하실 겁니까?

▷ 김지하 시인> 저는 정치운동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담 쌓았습니다.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특강만 합니다. 거기서 불교와 동학, 기독교, 유교 등 전통사상과 서양사상, 나는 예수를 참 좋아하니까 이렇게 결합시켜서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태평양에 오고 있는 새로운 문명의 대세, 여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 제시라든가 예감이라든가 이런 것과 연관해서 르네상스, 아시아 르네상스가 와야 한다고 보거든요. 워낭소리라든가 똥파리라든가 이런 게 예감이 와요. 그렇다면 불교와 기독교의 결합이라든가 이런 걸 가지고 사상사적인 변화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강의나 하고 글이나 쓰고 이러다 가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래서 그것이 이번에 제목으로 다루신 못남의 길일 수도 있고요.

▷ 김지하 시인> 맞습니다. 이번 책도 전부 그 얘기예요. 

09.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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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나오키와 니시타니 오사무의 대담집 <세계사의 해체>(역사비평사, 2009)가 지난주에 출간됐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서평이 올라오지 않는다. 이번주에 다뤄지는지 모르겠지만, 들춰보니까 대담집이라고 해서 생각만큼 만만한 책은 아니다.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여러 권 소개된 사카이 나오키의 책을 정색하고 읽진 못한 듯하다. 가라타니 고진 읽기와는 비교가 되는데, 아무래도 비평가인지라 가라타니가 조금 더 편하게 글을 쓰는 듯싶다. 가라타니에 비하면 사카이는 '인문학자'인 것이니까. '번역과 주체'라는 문제틀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여서 조금 깊이 읽어보려고 한다(그런 생각을 한 지가 이미 오래됐군. 영어본도 구해놓았건만). 니시타니 오사무는 프랑스철학 전공으로 블랑쇼와 레비나스, 바타이유, 낭시 등을 일본어로 옮겼다고 한다. 상당한 실력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 대담에서도 니시타니의 멘트 가운데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니시타니의 경우는 더 소개된 책이 없어서 사카이 나오키의 리스트만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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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해체-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
사카이 나오키.니시타니 오사무 지음, 차승기.홍종욱 옮김 / 역사비평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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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상, 미국 :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
사카이 나오키 지음, 최정옥 옮김 / 그린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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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번역과 주체
사카이 나오키 외 지음 / 이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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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사카이 나오키 지음, 이규수 옮김, 이연숙 대담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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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09 15:31   좋아요 0 | URL
임지현과의 대담도 있었는데 대담집을 이번에도 내는군요.

게슴츠레 2009-05-09 17:20   좋아요 0 | URL
<세계사의 해체>는 잠깐 책방에서 들춰봤는데 이거 뭐 대담집이라고 해도 쉽게 읽기는 힘들겠더군요...허나 읽는 데 따르는 '고난'은 차지하고서라도 두 학자가 '세계사의 해체'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