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주체'란 말의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학문 주체성'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 글이다.    

교수신문(09. 09. 28) ‘학문의 주체성’ 수립 이전에 던져야 할 질문들

‘학문의 주체성’ 혹은 ‘주체적 학문’의 정립이란 과제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한번쯤 부닥치게 되는 요구이다. 하지만 무엇이 주체적 학문이고, 학문적 주체성은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학문 사대주의’를 극복하자는 구호와 함께 우리 고유어나 고유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되살려 써야 한다거나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에 맞는 우리 이론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주장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지만, ‘우리 학문’과 ‘주체적 학문’을 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마음에 걸리는 말은 ‘주체’이다. 알다시피 이 ‘主體’는 ‘객체’에 대응하는 (철학)용어로서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참고로, 사전에는 ‘북한어’로서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인민 대중을 이르는 말”이란 정의도 첨가돼 있다. 어떤 행동의 ‘主가 된다’는 말 자체가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대략 ‘주도하는 자’ 정도로 ‘주체’의 뜻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주인이냐 하인이냐, 상전이냐 머슴이냐는 구도에서 주인노릇하고, 상전노릇하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한데, 학문용어로서 이 ‘주체’가 영어 subject(프랑스어 sujet, 독어 Subjekt 등)의 번역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정은 좀 복잡해진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juche ideology’라고 옮기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주체’는 대부분 ‘subject’로 옮겨지는데, 그렇다고 이 ‘subject’가 항상 ‘주체’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간추려도 ‘subject’는 주제, 주어, 신민, 주체 등의 뜻을 갖는다. 곧 주체와 subject는 서로 비대칭적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subject’가 주체(주인)이면서 동시에 신하나 국민 같은 피지배자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subject’가 갖는 의미의 이중성이고 모호성이다.   



이 ‘주체’의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를 따라서 니체의 한 문단을 읽어봐도 좋겠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지하는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복종하거나 복종한다고 믿는 그 무엇에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명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복종하는 자이다.” 니체에게서 주체는 ‘명령하는 주체’와 ‘복종하는 주체’로 분열된다. 사실 ‘명령하는 주체’가 동어반복이라면, ‘복종하는 주체’는 모순형용이다. 중요한 것은 분열돼 보이는 이 둘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 

니체는 원문에서 마지막 문장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를 독어가 아닌 불어 “L'effet, c'est moi.”로 썼다.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유명한 말 “국가, 그것이 바로 나이다”(L'´Etat, c'est Moi.)를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다. “지배계급은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성취를 동일시하는 것이다”라고 니체는 덧붙였다. 이러한 정치적 비유는 ‘주체’란 말의 본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절대군주는 법과 행정이라는 국가의 권력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립하고 행사하는 권력이고, 그의 신민들은 그러한 ‘권리 속의 주체’라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장 보댕의 이런 말도 음미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든 시민이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는 그가 복종하는 주권권력에 의해 제한받기 때문이다.”

원래적 의미에서건 통용되는 의미에서건 주체(subject)의 자유와 강제, 의지와 복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러한 사실이 ‘주체적 학문’이란 요구에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주체적’이란 말로는 온전한 의미의 자유나 독립이란 뜻을 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서양학문과는 다른 독자적인 학문을 지향하면서 그것을 ‘주체적 학문’이라고 지칭한다면, 그때의 ‘주체적’이란 말은 ‘subjective’라고 번역될 수 없을 것이다. 어원적 의미에 충실하자면 ‘주체적 학문’은 자기 정립적인 자유와 예속이 교차하는 양다리 걸치기식 학문이다.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권력에 다시금 예속되는 시민의 처지에 견주어볼 수 있겠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주체’나 ‘주체적’이란 말은 기만적이다. 이 말들이 갖는 의미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다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문 사대주의는 아니더라도 서양학문에 대한 우리의 예속성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가를 잠시 잊게 만든다. 사실 ‘주체적 학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우리의 자발적인 문제의식인가도 의문이다. 우리의 의지가 복종에 근거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말이다. 따라서 ‘학문의 주체성’과 ‘주체적 학문’ 정립에 매진하기 전에 ‘학문의 예속성’과 ‘객체적 학문’이란 현실에 대해서 더욱 깊이 성찰해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인민 대중’으로서나 ‘시민’으로서나 우리에겐 ‘자유’라는 이념보다 ‘복종’이라는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09.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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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젝과 탁석산 저서, 두 권을 주문했거든요, 딱 맞았네,,

로쟈 2009-09-29 19:40   좋아요 0 | URL
많이 보시네요.^^

2009-09-2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9-09-2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주체' 번역관련해서는 사카이 나오키의 "번역과 주체"라는 책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나옵니다. :) 특히 한국어 번역본에 실린 일본어판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네요. ㅎ

로쟈 2009-09-29 19:39   좋아요 0 | URL
네, 사카이의 책도 읽어봤는데, '환승중인 주체' 외에 제가 딱히 써먹을 수 있는 말이 잘 눈에 안 띄더군요.^^;

람혼 2009-09-2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이 글이 '우리말로 철학하기'라고 하는 어떤 경향, 곧 [순수]언어와 [순]민족주의를 향한 [순]진한 경도와 열정을 지닌 어떤 경향에 대해 우회적인 우려와 불만을 냉철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체'의 이중적 의미에 바탕하여 전개되고 있는 논의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경향에 대해 더욱 설득력 있는 공격과 반박이 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나 그러한 단순한 언어환원주의가 어떤 '주체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무척이나 회의적이기에, 이 글을 다른 글보다 더욱 가깝고 주의깊게 읽게 되었네요.
'주체성'을 '언어적 주체성' 혹은 '순수 민족언어'라는 가상과 동일시하면서 소위 '오염된' 용어들과 용법들을 기계적으로 '순수하게' 환원하려는 경향은, 말씀하신 대로 저 "지난한 과제"를 너무 쉬운 것으로 치부하거나 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 자체를 [세계]구조적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민족]감정적으로 보려는 경향도 분명 있고요.
이를 두고 '우리말로 철학하기 혹은 학문하기' 자체의 '주체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9-09-29 19:38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주체'를 'juche'라고 표기하면 주체적 학문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펠릭스 2009-09-2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론적 환원주의에 준해 '우리학문'과 '주체적학문' 다르다고 규정한다면,
탁석산 박사의 '조선문화'와 '한국문화'와의 단절만이 현재의 '한국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로쟈 2009-09-29 19:36   좋아요 0 | URL
일리 있지만, 그게 '단절'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9-09-2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탁석산 선생님 덕분에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었는데, 그분의 첫 작품인 <한국의 주체성>과 <한국의 정체성>은 당시에 많이 논란이 됐었죠. 티비에도 나와서 고종석으로부터 '순진한 우파'라는 이야기도 듣고. 이건 둘 중 어느 책 때문에 받은 '칭호'인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위 책들 말고도 <우리말로 철학하기>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하고, <우리말 철학사전>이 만들어진 취지도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급 구석에 놔두었던 이 주제에 관해 또 파고들고싶은.

로쟈 2009-09-29 19:35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말' 철학에 대해 좀 회의적입니다. '존재'로 옮기던 'Sein'을 '있음'이라고 옮긴다고 해서 무엇인 개시될 성싶지 않아서요. <우리말 철학사전>에 실린 표제어들도 사실 대부분 '우리말'은 아닙니다. '이성'이니 '존재'니 '상징'이니 하는 식이니까요. 번역이 아니란 의미 정도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09-09-29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쩍 지나가다가 한 가지 궁금해서요...^^ '주체적 학문'이 기만적이라면, '학문의 예속성'-인문 사회학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은 그렇지 않은가요? 예속적인 학문과 그렇지 않은 학문을 구분하는건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글의 요지와는 큰 관계가 없지만,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로쟈 2009-09-29 19:31   좋아요 0 | URL
'주체적'이란 말의 환상을 지적하고 싶었어요. 마치 그런 것이 있는 듯한 환상. '주체성'과 '예속성'은 분리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라는 게 제 요지입니다. 요즘처럼 인문학에서도 SCI급 논문을 요구받는 세태에선 '주체적 학문'이란 말 자체가 사치스럽기도 하구요...

빵가게재습격 2009-09-30 00:53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 <회상>(한길사, 2009)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 책에 대한 유일한 언론리뷰일 듯싶다.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하나로 나온 것이긴 하나,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회고록의 하나로 널리 읽히면 좋겠다.    

한겨레21(09. 10. 12) 스탈린의 '사냥개 같은 시대'에 대한 증언 

“늑대를 쫓는 사냥개 같은 시대가 내 어깨 위로 달려들지만,/ 내게는 늑대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차라리 털모자처럼 나를/ 시베리아 벌판의 따뜻한 털외투 소매에 끼워넣으라.”  

20세기 러시아 시의 거장 오십 만델슈탐(1891-1938)의 시 '늑대'(1931)의 한 대목이다. 시의 원제목은 '다가오는 시대의 울려 퍼지는 위업을 위해'이지만, 그냥 '늑대'라고 불렸다. ‘다가오는 시대’를 시인이 “늑대를 쫓는 사냥개 같은 시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대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1934년 5월의 어느 날 밤 시인의 집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만델슈탐은 스탈린을 풍자한 시를 써서 사람들 앞에서 낭송한 일이 있었고, 그 한 달 전에는 공개석상에서 아내를 모욕한 한 작가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급하게 가장 절친한 동료 시인 아흐마토바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아래는 만델슈탐 가족과 아흐마토바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나데쥬다이고, 맨 오른쪽이 아흐마토바, 그 옆이 오십 만델슈탐이다.)   

마침내 그날 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아파트를 수색하고서 시인을 체포해갔다. 시인의 아내 나데쥬다와 아흐마토바만을 덩그러니 남겨놓고서. 그렇게 체포되어 3년간의 유형생활을 한 만델슈탐은 1938년에 아무런 이유 없이 두 번째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만델슈탐의 주검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죽음이 1940년 5월 사망인 명부에 기록되었다. 그것이 가족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의 전부였다.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에서의 더딘 죽음보다는 그래도 덜 끔찍한 일이었다고 그의 아내는 자위했다.   

‘사냥개 같은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서 <회상>(한길사 펴냄)은 시인의 미망인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이다. “무슨 이유로 그를 잡아갔지?”란 질문은 금기시되었지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아흐마토바는 격분하여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시대의 목격담이자 증언이다. 한 시대의 증인으로서 나데쥬다는 자신이 겪은 삶과 고통을 면밀하게 기록한다. 그녀의 생존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편의 출판되지 않은 시들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녀가 겪은 부조리한 시대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를 위해 증언하는 일이 다른 하나였다. 오직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 그녀는, 다시 모스크바에 정착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을 때까지 소련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공장 노동자와 학교 교사, 번역가로서의 삶을 전전해야 했다.(*아래는 나데쥬다의 회고록 세 권과 아흐마토바에 대한 회상록.)   

  



만델슈탐은 자신의 원고에 대해 평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서 아무것도 보존하지 않았다. 아내 나데쥬다는 그런 남편의 원고를 보존하여 나중에 미국에서 전집이 출간될 수 있도록 했으니 첫 번째 목표는 이룬 셈이고, <회상> 이후에도 두 권의 회고록을 더 집필함으로써 20세기를 통틀어서도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겨놓았으니 두 번째 목표도 달성했다. 문제는 그녀가 겪은 시대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가 애쓰는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동구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이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주민 1천만 명이 사는 구동독에 사람들을 통제할 상근 비밀경찰요원이 10만 명이나 있었지만, 나치의 게슈타포는 독일 전체를 1만 명의 상근요원들로 관리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가 더 억압적이었느냐 하면 정반대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고발 네트워크에 의지할 수 있었기에 게슈타포는 굳이 많은 수의 요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료를 고발하는 데 저항했다. 따라서 훨씬 더 많은 요원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도덕적 감각은 정확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에 의해 유지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상>에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 못지않게 그러한 도덕으로 무장한 이들도 자주 등장한다. ‘나데쥬다’는 러시아어로 ‘희망’을 뜻한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삶의 기록이 전해주는 역설적인 ‘희망’이기도 하다. 

09. 09. 28.  

P.S. 아래 그림은 책의 표지로 쓰인 바실리 수리코프의 <친위대 처형의 아침>(1881). 아흐마토바는 트레티야코프(트레챠코프)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을 보고 "짐 썰매에 실려 간 뒤, 땅거미가 질 무렵 거름더미 같은 눈 속에 파묻히고, 어떤 정신 나간 수리코프가 내 마지막 길을 그리게 될까?"란 시를 썼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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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수리코프'도 '레핀'과 함께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미술 구룹인 '이동파'의 수장인 '이반 크람스코이'의 제자군요. 우리나라의 '역사회화(이순신, 강감찬 등)'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만델슈탐'에 대한 '회고'들을 독일의 '표현주의'로 담아냈더라면 더 리얼했을 것이라는 억지 생각에 서경석 선생의 '고뇌의원근법(돌배개,2009)'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문제를 상품화(미술품)하는 것에 못마땅한 사람도 있지만요.

로쟈 2009-09-29 19:28   좋아요 0 | URL
나데쥬다의 회고록은 담담하면서 기품이 있습니다. 표현주의는 '인위적'이란 인상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펠릭스 2009-09-29 19:59   좋아요 0 | URL
그렇겠네요. 아내가 남편을 회고하는데 부드러움과 내재된 힘과 의지 등을 표현하려 할 것 같아요. 추한 모습보다,,,
 

손가락으로 따 꼽을 수 없는 할일들 가운데 두 가지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서 정리하는 것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전자는 이번주 강의를 위해서이고, 후자는 다음달 연재를 위해서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강의도 한 적이 있어서 기억만 되새기면 되지 않겠나 싶지만, 그래도 읽어야 할 자료들이 아주 적지는 않다(주로 논문들이다). 마침 극단 산울림에서 이번 가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린다. 1969년에 초연을 올렸다고 하니까 40주년 기념공연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보면 좋겠다. 그 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정독해보고. 공연리뷰와 함께 이번에 참고할 책 몇 권의 리스트를 꼽아놓는다(정말 몇 권 되지 않는다).   

뉴스컬쳐(09. 09. 20)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연출 임영웅)는 지루한 기다림으로 가득하다. 블라디미르(애칭 디디/한명구 분)와 에스트라공(애칭 고고/박상종 분)은 하염없이 오매불망 ‘고도’만을 기다린다. 언제부터 그를 기다려왔고, 왜 기다려야만 하는지. 두 방랑자는 어떤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오로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남과 동시에 바라던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뿐이다.

무대는 둔덕과 쇠꼬챙이를 휘어 만든 듯한 나무 한 그루가 전부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황량하고 적막한 공간은 마치 감옥 같으며, 두 방랑자가 겪는 지루함을 더 부각시킨다. “우리 이제 뭘 한다?”, “기다려야지”, “만약 안 온다면 어떻게 하지?” “끊임없이 지껄여야 생각을 안 하지” 디디와 고고에게 ‘말(言)’은 지리멸렬한 기다림을 참는 이유이자,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들의 장난과 춤추기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고도가 언제 올지 모를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초조와 낭패감을 극복하려는 온갖 노력들이 눈물겹다.

권력가를 상징하는 포조(전국환 분)와 운이 전혀 없어 보이는 하인 럭키(박윤석 분)가 가끔씩 등장한다. 부랑자들에게 아주 잠깐 재밋거리를 제공하지만, 역시 무의미한 언어와 행동들로 상황을 애매하게 만든 후 퇴장한다. 끝없는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한 소년(윤준호 분)이 등장해 고도가 오늘밤은 못 오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전갈을 남기면서 1막이 끝난다. 그러나 2막의 다음날이 되어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우울함 속에서 잠시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기다림은 계속 된다. 다시 와야 할 이곳을 멀리 떠나지 못한 채. 



이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e)의 희곡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주인공들의 연결 없는 대사들이 낯선 무대를 채우는 대표적인 부조리극이기도 하다. 다수의 부조리극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해답 없는 줄거리가 관객들을 당황하게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는 주인공 못지않게 관객들 역시 허무하게 만든다.

그러나 베케트는 전한다.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인도 모르고,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고 말이다. 뿌연 안개에 쌓인 듯 시간도, 장소도 희미한 현실. 애타게 바라고 있는 ‘고도’는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웃고 울면서, 고도를 계속 기다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영원히 ‘고도’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이주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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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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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임성희 옮김 / 청목(청목사) / 198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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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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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7 23:51   좋아요 0 | URL
'고도'는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수만큼의 텍스트입니다.
저마다 기다리는 '고도'는 대를 이여, 시대를 넘어 기다려야 할
운명 같습니다.

로쟈 2009-09-28 01:40   좋아요 0 | URL
열린 텍스트이면서 채워넣는 텍스트도 되지요. 한데, 해석은 의미를 좁히는 작업이기도 하구요...

2009-09-28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8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9-09-28 02:10   좋아요 0 | URL
민음사 책을 읽고 연극을 보았던 기억이 있네요. 보는 내내 묘하게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고도'를 기다리는 저를 발견했었구요. 저마다의 '고도'가 무엇인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건지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잠시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로쟈 2009-09-28 09:50   좋아요 0 | URL
영화에 보면 교도소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연극이기도 하죠...

드팀전 2009-09-28 09:00   좋아요 0 | URL
지젝이 베케트의 '고도'에서 모더니즘의 전형을 찾으며 만약 포스트모던하게 '고도'를 다시쓴다면 '고도'가 육화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쾌락의 주체로 다닐거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 읽다가 오에겐자부로와 하루키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이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더불어 지젝과 고진을 읽어주신 로쟈님두..^^ 잘 지내시죠.

로쟈 2009-09-28 09:52   좋아요 0 | URL
네, 일이 많아서 게으르게 지내는 것 말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연휴가 짧아서 잘 쉬시란 말씀도 못드리겠네요.^^;

2009-09-28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8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9-28 11:07   좋아요 0 | URL
고도를 기다라며라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아직 읽어 보진 않은 책이네요.고도는 어렸을적 비밀 일기라는 영국의 청소년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소설속 주인공이 에스트라공의 이름은 무슨 피임약 이름 같다고 했다는....^^;;;;;

로쟈 2009-09-29 19:22   좋아요 0 | URL
'에스트라공'이 피임약이라... '에스트라'면 그럴 듯한데요...

펠릭스 2009-09-29 20:53   좋아요 0 | URL
'에스트라'는 난포호르몬(estrogen) 대사물질을 관리합니다.
'estrogen'은 빈성(牝性) 발정을 유발시키며 부족하면 남성화(갱년기)됩니다.

봄날 2009-10-14 11:0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정말 몇권 안되네요 ^^;;
 

역사분야에서 '이주의 책'으로 꼽을 만한 것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2>(역사비평사, 2009)이지만, 리뷰가 뜨지 않는 걸로 보아 다음주로 넘어간 모양이다(한데, 다음주는 추석 연휴라서 북리뷰도 쉬지 않을까). 영국사상연구소에서 펴낸 <논쟁 없는 시대의 논쟁>(이음, 2009)과 함께 고등학생들도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술의 비중이 많이 줄어서, 이런 책들까지 챙겨읽는 고등학생은 아주 드물겠지만(논술강사들에겐 물론 아주 요긴하겠다).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를 제쳐놓으면 이주의 역사서는 류대영 교수의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푸른역사, 2009)이다. 기독교사와 미국사 전공자이기도 한 저자는 <미국 종교사>(청년사, 2007)도 펴낸 바 있다.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란 주제에 관한 한 적임자인 듯싶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9. 26) 친미반공·진보·뉴라이트… 한국 개신교 100년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순결하게 고유한 종교의 영역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됐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교회의 역사는 곧 정치화한 종교, 종교화한 정치의 역사였다.”  

종교의 정치성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 개신교만큼 적절한 사례는 없다. 서세동점의 격변기, 이 땅에 첫 개종자를 배출한 이래 개신교는 줄곧 문명과 야만, 중화와 서방,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돌하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푸른역사)는 19세기 말의 개화당에서 21세기 뉴라이트까지, 한국의 근현대사에 새겨진 개신교의 정치적 발자취를 되짚은 책이다. 책을 쓴 류대영 한동대 교수는 말한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현상도 정치·사회적 차원을 가지며, 종교적 신념과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놀라우리만치 친밀도가 높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최근 한국 개신교의 정치활동은 정치적 극우파와 뚜렷한 친연성을 드러내지만, 류 교수가 볼 때 개신교의 사회참여가 처음부터 보수적 색채를 띄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개신교 보수교단의 원류랄 수 있는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선도하던 진보·개혁적 인사들이 많았다는 게 류 교수의 설명이다. 노예제 폐지와 여권신장, 교육기회 확대와 빈곤층 구제 등 사회개혁에 헌신했던 복음주의자들은, 그러나 러시아혁명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정치·사회·문화적 태도에서 ‘대반전’을 맞게 된다. 반공주의와 애국적 종말론이 결합된 극단적 근본주의가 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류 교수는 한국 개신교가 미국과 유사한 변화과정을 밟았다고 본다. 개화기 개신교는 말 그대로 ‘진보의 전도사’였다. 한글보급과 출판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축첩·조혼·신분제 같은 전근대적 구습과 대결하는가 하면, 인권을 신장하고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도 앞장서 지식인과 민중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20세기 초 강제합병을 전후해 ‘대반전’이 찾아왔다. 그 계기를 류 교수는 1907년 정점을 기록한 ‘대부흥’에서 찾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 개신교는 뚜렷한 탈정치화 경향을 띠면서 내세지향적인 감성 종교로 빠르게 탈바꿈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때 본격화된 탈정치화가 정치적 지배자에 대한 순응적 태도를 한국 교회에 심어놓았다면, 1920년대 유입된 사회주의와의 충돌은 뿌리깊은 반공주의의 기원이 됐다는 게 류 교수의 진단이다. ‘반공의 신학화’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나타났는데, 한경직 등 해방 직후 북한 정권과 충돌하고 월남한 교계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다. 여기에 한국전쟁의 경험은 공산주의에 대해 극복하기 힘든 증오심을 기독교인들에게 심어놓았다. 반면 전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고 교회를 통해 대대적인 구호활동을 펼친 미국에 대한 친밀감은 한층 강화됐다.

한국 개신교의 친미·반공 코드를 교란해 놓은 것은 ‘1980년 광주’의 경험이었다. 1970년대 반유신투쟁에 적극적이었던 진보적 교회뿐 아니라, 침묵하던 보수교회 안에서도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하려는 집단적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시대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해방·민중신학 등 진보신학에 기초한 현실참여에는 동조할 수 없었던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신의 의지(정의)를 현실 속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 삼는 ‘하느님 나라’ 개념에서 출구를 찾았다. 장로교 등 보수교단의 일부가 민주화 운동에 결합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김진홍·인명진·서경석 등은 이 시기 복음주의 참여파를 대표했던 성직자들이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된 보수 개신교의 정치적 세력화는 어떻게 봐야 할까. 대체 무엇이 자족적인 신앙 공동체에 머물러 있던 보수교회 교인들을 백주의 광장으로 끌어내 성조기를 흔들며 ‘좌파마귀 척결’을 외치게 만들었냐는 얘기인데, 류 교수는 답변은 복합적이다. 복음주의 개신교의 일부 집단이 갖고 있는 마니교적 선악이원론과 종말론적 위기의식에 집권 진보세력의 새로운 대외정책이 야기한 반공·친미주의 세계관의 균열, 여기에 진보세력의 분열과 미숙함이 만들어낸 ‘힘의 공백’ 상태가 정치적 보수주의와 유착된 일부 교회집단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추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류 교수는 보수 개신교의 ‘행동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는 아니라고 본다. 거리로 나선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소수이며,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압도적인 정치적 힘 앞에 순종하는 관습을 오랫동안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0년대 초반 복음주의 우파의 정치적 행동양식은 지금의 ‘힘의 공백’이 어떤 식으로 메워질 것이며, 이후의 정치적 세력판도가 어떻게 짜일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류 교수는 말한다.(이세영 기자)  

09.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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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9-28 03:29 
    아무래도 이 책 읽어봐야 할 듯 .. / 스크랩 — 로쟈
 
 
2009-09-28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8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8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랜신 프로즈의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민음사, 2009)의 말미에는 추천도서 목록이 실려 있는데, 이름하여 '소설 쓰기 두려운 날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런 류의 리스트를 좋아하는지라 꼼꼼히 읽어봤는데, 그 자신이 작가인 프로즈의 책은 포함돼 있지 않다. 여섯 쪽 정도니까 적당한 분량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작품들도 적지는 않아서 리스트를 만들까도 했지만 또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기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러시아문학 작품만 골라놓기로 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 영어권 작가의 리스트답게 단연 톨스토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영어권 작가들이 꼽은 최고의 소설가가 톨스토이였다), 그래도 두어 권의 이채로운 책이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모두 16종이며 배열은 가나다순이다.   

1. 고골, <죽은 농노>  

 

고골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자 작가의 분류로는 '서사시'. <죽은 혼>이라고도 번역된다. 러시아어에서 'dusha'란 말이 '영혼'과 '농노'를 둘다 의미하는 중의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중에서 거의 구할 수 없으며 아직 한국어 결정판도 없다. 고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창 번역중인 걸로 아는데, 올해안으로 출간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2. 나보코프, <러시아문학 강좌> 

 

나보코프의 문학강의 시리즈는 세 가지가 있다. 모두 코넬대학 등의 문학교수 시절 강의한 것을 모은 것인데, <러시아문학 강의>, <문학 강의>(내용은 <서구문학 강의>), <돈키호테 강의>가 그것이다. 이 세 권 모두 러시아어로도 출간돼 있고, 나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모두 갖고 있다. 몇년 전 한 출판사에 번역 출간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시기상조'였다. 지금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지 모르겠다. <러시아문학 강의>의 경우는 전공 대학원생이나 강사들에게 아주 유익한 책. <문학 강의>는 상당한 분량이고, <돈키호테 강의>는 얇다.  

3. 나보코프, <롤리타> 

이건 따로 소개가 필요없겠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은 두 종. 나보코프의 언어유희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영어본도 같이 읽어봐야 할지 모른다.  

4.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톨스토이에 비하면 상당히 인색하게도 프로즈는 <죄와 벌> 한권만을 골랐다(하긴 저자는 셰익스피어도 <리어왕> 한편만을 목록에 올렸다). <죄와 벌>은 앞으로도 서너 종의 국역본이 더 나올 듯하므로 한국어로도 풍족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5. 만델스탐,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 

러시아 시인 오십 만델슈탐의 아내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이다. 얼마전 <회상>(한길사, 2009)이라고 번역돼 나왔는데, 지난 세기말에 여러 지식인인들이 꼽은 '20세기의 책'에 포함되기도 했다. 남편 오십은 스탈린 시기에 체포되어 수감되고 사망한다. 개인적인 고통과 불우한 시대를 회상하고 있지만 치열한 성찰과 높은 격조를 보여주는 회고록의 걸작. 1970년에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이 뉴욕에서 동시에 출간됐고, 영어판의 제목이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이다. 러시아어판은 <회상>으로 돼 있으며 나데쥬다는 이어서, 2권과 3권도 차례대로 썼다. 2권은 <버려진 희망>이란 제목으로 영역되었고, 3권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 러시아아어로 '나데쥬다'는 '희망'이란 뜻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책.  

6. 바벨, <단편전집> 

이삭 바벨(이사크 바벨)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단편문학의 거장이다. 연작소설 <기병대>가 국내에 소개돼 있다. 덧붙여 바벨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 트래비스 홀랜드의 소설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도 번역돼 있고, 바벨의 책들에 대한 유익한 서평은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에서 읽어볼 수 있다.   

  

'The Collected Stories'를 '단편전집'이라고 했는데, 영어판으론 선집과 전집이 모두 출간돼 있다. 전집은 1000쪽이 넘는 분량.  

7. 체호프, <서간문 모음집> 

 

체호프의 적잖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그의 편지들은 아쉽게도 번역돼 있지 않다. 그의 전집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체호프는 많은 편지를 썼고, 영어본으로는 꽤 번역돼 있는 편이다. 옥스포드대학출판부에서 올해 낸 단편집의 표지들이 인상적이군. 

8. 체호프, <안톤 체호프 전집>  

어떤 판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어판 전집 1-13권'이라고 돼 있어서 놀랐다. 국내에 출간된 두어 권짜리 선집으로는 아직 역부족이다.  

9. 톨스타야, <안개 속의 몽유병자> 

 

유일한 생존작가이자 현역 여성작가 타치아나 톨스타야의 작품집. 국내에도 두 권이 소개돼 있다. 톨스타야는 저명한 소비에트 작가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손녀인데, 만델슈탐의 <회상>에 보면 알렉세이는 만델슈탐 부부와 악연을 갖고 있다. 톨스타야는 한 TV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명 방송인이기도 하다.  



10. 톨스토이, <부활> 

 

이제부터는 톨스토이 퍼레이드다. <부활>도 따로 설명이 필요없겠다.  

11.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최근에 <안나 카레니나>도 새 번역본이 나왔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 가져온 에피그라프는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라고 옮겨졌고, 유명한 첫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가 되었다. 다른 주요 대목들도 기존 번역과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좋겠다. 애독자라면. 

12.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외>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네댓 종 이상의 번역이 시중에 나와 있다. 후기 톨스토이의 가장 대표적인 중편소설.  

13.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전쟁과 평화>는 아직도 새로운 세대의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다. 범우사판 외에 몇 개 판본이 있는 정도. 영어판으론 옥스포드대학출판부본이 저렴하다.  

14.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외> 

  

전기 톨스토이의 대표 작품집일 듯하다. 펭귄북에서 나온 <크로이체르 소나타>에는 <가정의 행복>, <악마>, <신부 세르게이> 등이 같이 묶였다.  

15. 투르게네프, <첫사랑>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이 작품이 어느새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 됐다. 청소년이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16. 파우스톱스키, <희망의 세월: 자서전> 

 

콘스탄틴 파우스톱스키(1892-1968)가 마지막 작가다. 작품집은 갖고 있지만, 이 서정적인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읽을 기회는 없었고, 그의 자서전도 생소하다. 영어판은 이미 1968년에 출간됐다. 당연히 좀 희소한 책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온라인에서 읽어볼 수 있다(http://home.freeuk.net/russica2/books/paust/hope/hope.html). 원작은 6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으로 영역본은 그 중 제4권을 옮긴 것인 듯하다.   

К. Г. Паустовский Повесть о жизни. В 6 книгах. Книга 1-3. Далекие годы. Беспокойная юность. Начало неведомого векаК. Г. Паустовский Повесть о жизни. В 6 книгах. Книга 4-6. Время больших ожиданий. Бросок на юг. Книга скитаний 

러시아본을 찾아보니 두 권으로 합본돼 있는 책이 눈에 띄는데, 분량은 총 1278쪽이다. 단편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산이었다. 한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다!..   

09.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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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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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7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7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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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7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고골 <죽은 혼> 2부를 중단하고 원고를 불살랐다 합니다.
작품에 대한 회의로 그는 차차 종교적 신비적 정신에 빠진듯 합니다.

국내 소설가중에도 절필하고 종교에 몰입한 분들이 있습니다.
<무진기행> 김승옥, <들불> 유현종 등은 지병에 의한 생각의
변화로 종교에 몰입했고,

'고골'은 작가로서의 정체성 변화에 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은 정신적이든 육체적인든 작가의 변신을 뜻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름난 작가들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두 작품(들불,외투)을 거이 외우다 시피합니다.작품속의 약자에
대한 연민이 저를 항상 감동시켰습니다.



로쟈 2009-09-27 11:35   좋아요 0 | URL
네, 일리야 레핀의 유명한 그림도 있습니다. 고골이 자기 원고를 불사르는...

펠릭스 2009-09-27 12:42   좋아요 0 | URL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은 리얼하군요.
'레핀'이 '고골'을 무척 좋아 했던 모양입니다.

고골 소설 <죽은 혼> -> 알리야 레핀 <분신>,
베르메르 유화 <진주귀고리의 소녀> -> 피터 웨버 영화 <진주귀고리의 소녀>,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 임철우 단편 <사평역에서>,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 -> 이반 크람스코 유화 <미지의여인>.

화가 '레핀'의 스승이 '이반 크람스코'사실에 놀랍습니다.

글, 그림, 소리의 교감은 묘한 생명력을 느끼께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한 번 본 중년 남자에 대한 캘릭터(외모)가 몇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그 남자(캘릭터)속에 미지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막연한 상상때문에

로쟈 2009-09-27 12:41   좋아요 0 | URL
'크람스코이'입니다. 작가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9-2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24번 안동민 번역 <죽은 혼>이 완역본인데 영역본을 대본으로 했습니다.뒤에 '외투'가 함께 실려있어요.그런데 이 이후로 번역이 안 된 건가요? 은근히 재미있는데 안타깝군요.일종의 로드 무비같다고나 할까요? 요새 활자로 번역한다면 600쪽이 넘을 것 같아요.

갑자기 읽어보고 싶네요.읽은 지 몇 년 되었거든요.

로쟈 2009-09-27 17:11   좋아요 0 | URL
저는 <죽은 농노>라고 나온 정음사판으로 읽었더랬습니다. 다른 번역본도 더 있긴 합니다...

2009-09-27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8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0-1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에 삼성이 '톨스토이문학상'를 제정하였군요. 이런 경우도 있군요.

로쟈 2009-10-12 22:10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선 그래도 상금이 센 문학상이라고 합니다...

털세곰 2009-12-0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죽은 혼은 어느 분에 의해 번역이 가열차게 준비되고 있나요? 혹 알려주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