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신 프로즈의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민음사, 2009)의 말미에는 추천도서 목록이 실려 있는데, 이름하여 '소설 쓰기 두려운 날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런 류의 리스트를 좋아하는지라 꼼꼼히 읽어봤는데, 그 자신이 작가인 프로즈의 책은 포함돼 있지 않다. 여섯 쪽 정도니까 적당한 분량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작품들도 적지는 않아서 리스트를 만들까도 했지만 또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기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러시아문학 작품만 골라놓기로 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 영어권 작가의 리스트답게 단연 톨스토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영어권 작가들이 꼽은 최고의 소설가가 톨스토이였다), 그래도 두어 권의 이채로운 책이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모두 16종이며 배열은 가나다순이다.
1. 고골, <죽은 농노>
고골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자 작가의 분류로는 '서사시'. <죽은 혼>이라고도 번역된다. 러시아어에서 'dusha'란 말이 '영혼'과 '농노'를 둘다 의미하는 중의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중에서 거의 구할 수 없으며 아직 한국어 결정판도 없다. 고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창 번역중인 걸로 아는데, 올해안으로 출간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2. 나보코프, <러시아문학 강좌>
나보코프의 문학강의 시리즈는 세 가지가 있다. 모두 코넬대학 등의 문학교수 시절 강의한 것을 모은 것인데, <러시아문학 강의>, <문학 강의>(내용은 <서구문학 강의>), <돈키호테 강의>가 그것이다. 이 세 권 모두 러시아어로도 출간돼 있고, 나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모두 갖고 있다. 몇년 전 한 출판사에 번역 출간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시기상조'였다. 지금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지 모르겠다. <러시아문학 강의>의 경우는 전공 대학원생이나 강사들에게 아주 유익한 책. <문학 강의>는 상당한 분량이고, <돈키호테 강의>는 얇다.
3. 나보코프, <롤리타>
이건 따로 소개가 필요없겠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은 두 종. 나보코프의 언어유희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영어본도 같이 읽어봐야 할지 모른다.
4.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톨스토이에 비하면 상당히 인색하게도 프로즈는 <죄와 벌> 한권만을 골랐다(하긴 저자는 셰익스피어도 <리어왕> 한편만을 목록에 올렸다). <죄와 벌>은 앞으로도 서너 종의 국역본이 더 나올 듯하므로 한국어로도 풍족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5. 만델스탐,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
러시아 시인 오십 만델슈탐의 아내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이다. 얼마전 <회상>(한길사, 2009)이라고 번역돼 나왔는데, 지난 세기말에 여러 지식인인들이 꼽은 '20세기의 책'에 포함되기도 했다. 남편 오십은 스탈린 시기에 체포되어 수감되고 사망한다. 개인적인 고통과 불우한 시대를 회상하고 있지만 치열한 성찰과 높은 격조를 보여주는 회고록의 걸작. 1970년에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이 뉴욕에서 동시에 출간됐고, 영어판의 제목이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이다. 러시아어판은 <회상>으로 돼 있으며 나데쥬다는 이어서, 2권과 3권도 차례대로 썼다. 2권은 <버려진 희망>이란 제목으로 영역되었고, 3권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 러시아아어로 '나데쥬다'는 '희망'이란 뜻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책.
6. 바벨, <단편전집>
이삭 바벨(이사크 바벨)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단편문학의 거장이다. 연작소설 <기병대>가 국내에 소개돼 있다. 덧붙여 바벨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 트래비스 홀랜드의 소설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도 번역돼 있고, 바벨의 책들에 대한 유익한 서평은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에서 읽어볼 수 있다.
'The Collected Stories'를 '단편전집'이라고 했는데, 영어판으론 선집과 전집이 모두 출간돼 있다. 전집은 1000쪽이 넘는 분량.
7. 체호프, <서간문 모음집>
체호프의 적잖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그의 편지들은 아쉽게도 번역돼 있지 않다. 그의 전집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체호프는 많은 편지를 썼고, 영어본으로는 꽤 번역돼 있는 편이다. 옥스포드대학출판부에서 올해 낸 단편집의 표지들이 인상적이군.
8. 체호프, <안톤 체호프 전집>
어떤 판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어판 전집 1-13권'이라고 돼 있어서 놀랐다. 국내에 출간된 두어 권짜리 선집으로는 아직 역부족이다.
9. 톨스타야, <안개 속의 몽유병자>
유일한 생존작가이자 현역 여성작가 타치아나 톨스타야의 작품집. 국내에도 두 권이 소개돼 있다. 톨스타야는 저명한 소비에트 작가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손녀인데, 만델슈탐의 <회상>에 보면 알렉세이는 만델슈탐 부부와 악연을 갖고 있다. 톨스타야는 한 TV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명 방송인이기도 하다.
10. 톨스토이, <부활>
이제부터는 톨스토이 퍼레이드다. <부활>도 따로 설명이 필요없겠다.
11.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최근에 <안나 카레니나>도 새 번역본이 나왔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 가져온 에피그라프는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라고 옮겨졌고, 유명한 첫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가 되었다. 다른 주요 대목들도 기존 번역과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좋겠다. 애독자라면.
12.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외>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네댓 종 이상의 번역이 시중에 나와 있다. 후기 톨스토이의 가장 대표적인 중편소설.
13.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전쟁과 평화>는 아직도 새로운 세대의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다. 범우사판 외에 몇 개 판본이 있는 정도. 영어판으론 옥스포드대학출판부본이 저렴하다.
14.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외>
전기 톨스토이의 대표 작품집일 듯하다. 펭귄북에서 나온 <크로이체르 소나타>에는 <가정의 행복>, <악마>, <신부 세르게이> 등이 같이 묶였다.
15. 투르게네프, <첫사랑>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이 작품이 어느새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 됐다. 청소년이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16. 파우스톱스키, <희망의 세월: 자서전>
콘스탄틴 파우스톱스키(1892-1968)가 마지막 작가다. 작품집은 갖고 있지만, 이 서정적인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읽을 기회는 없었고, 그의 자서전도 생소하다. 영어판은 이미 1968년에 출간됐다. 당연히 좀 희소한 책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온라인에서 읽어볼 수 있다(http://home.freeuk.net/russica2/books/paust/hope/hope.html). 원작은 6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으로 영역본은 그 중 제4권을 옮긴 것인 듯하다.
러시아본을 찾아보니 두 권으로 합본돼 있는 책이 눈에 띄는데, 분량은 총 1278쪽이다. 단편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산이었다. 한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다!..
09. 0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