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사회, 혹은 정보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으로 잘 알려진 마뉴엘 카스텔의 3부작을 읽어볼 계획이다.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엄두를 내긴 어려운데, 실제로 언제나 다 읽게 될는지 장담할 수 없다(다 읽기 전에 개정판이 나올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소련의 붕괴를 다룬 3권 '밀레니엄의 종언'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3부작이라고 하니 1권부터 손에 들었다. 리처드 세넷과 지그문트 바우만까지, 내가 주목하는 세 사회학자의 키워드는 각각 '네트워크 사회' '새로운 자본주의' '유동적 근대'이다. 어디서 만나고 갈라지는지는 더 읽어봐야겠다. 참고로, <밀레니엄의 종언>의 원서 표지엔 일리야 레핀의 그림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이 들어가 있다. 국역본의 밋밋한 표지는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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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사회 (양장)- 비교문화 관점
마뉴엘 카스텔 지음, 박행웅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2월
40,000원 → 40,000원(0%할인) / 마일리지 40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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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twork Society: From Knowledge to Policy (Paperback)
Castells, Manuel / Center for Transatlantic Relations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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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반양장)
마뉴엘 카스텔 지음, 김묵한.박행웅.오은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8월
29,000원 → 29,000원(0%할인) / 마일리지 87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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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 Rise of the Network Society (Paperback, 2nd, Subsequent)
Castells, Manuel / Blackwell Pub / 2000년 8월
65,600원 → 53,790원(18%할인) / 마일리지 2,6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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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노바바 2009-04-14 07:38   좋아요 0 | URL
제 경험상 information age 3부작은 읽는데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사실 2권은 건너뛰엇습니다만). 워낙 정보와 자료를 꼼꼼하게 들이대다보니 질릴 정도입니다. 그게 카탈루냐 사람이라서 그렇답니다. 그 사람들이 꼼꼼하기로 유명하다는... 오히려 반대로 미디어에 관한 보다 철학적인 2개의 장 (1권 중후반부)은 너무 허술해서 의아할 정도입니다. 사실 real virtuality, space of flows, timeless time 장이 가장 유명한 챕터지만 미디어 전공자 입장에서 가장 엉성한 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근데 정말 사소한 걸로는 한국 번역판에는 왜 '마누엘 카스텔스'가 아니라 '마뉴엘 카스텔'이라고 적는지 궁금합니다. 프랑스에서 많이 활동햇으니 프랑스어식으로 읽은건가 의문스럽다가도, 그렇더라도 어쨋든 '마누엘' 아닌가 싶어 더더욱 의아합니다. 혹시 이 사람이 자기 이름은 이렇게 읽어달라고 햇는지...

로쟈 2009-04-14 23:1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닥 읽고 싶은 학자는 아닌데, '지명도'라는 것 때문에...^^;

노노바바 2009-04-15 01:49   좋아요 0 | URL
'책이 후졋다'는 얘기는 아니엇구요, 읽을 가치는 잇습니다. 두껍고 위트도 없이 꼼꼼하게 진행되는 책이니만큼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는 얘기엿습니다 ^^

로쟈 2009-04-15 07:05   좋아요 0 | URL
네, 재미에 대한 기대는 접고 있습니다.^^;
 

검찰의 PD수첩 수사뿐 아니라 MBC 9시 뉴스의 신경민 앵커와 라디오 진행자 김미화 씨 교체 문제로 다시 한번 현 정부의 언론'탄압'이 화제가 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책 두 권이 눈길이 끈다, 국역본의 제목부터가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이다. 권력에 안주하는, 아니 권력 자체가 돼버린 언론과 그 하수인 정도를 자처하는 기자들에겐 언감생심이겠다. 우리의 처지가 아니어서 유감스럽지만, 미국에서도 '전설'로 회자되는 사건 아닐까. 다시 한번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최소한 리뷰 정도라도 일독해보시길.

한겨레(09. 04. 11) '망할 애송이 기자’ 대통령 무릎 꿇리다 

1972년 6월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 단지 안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몰래 침투한 괴한 5명이 체포당했다. 비즈니스 정장 차림에 외과수술용 장갑을 낀 그들은 최신형 도청장치를 지니고 있었고, 일련번호가 이어지는 100달러짜리 고액권 수천 달러를 갖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이 저지른 ‘3류 주거침입’ 또는 ‘절도사건’(그들 중 4명이 쿠바 출신자였다)쯤으로 치부되던,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그 사건은 불과 2년 뒤 대통령의 치욕스런 하야라는 미국 역사상 초유의 대사건으로 번져간다. 법무장관과 백악관 비서실장, 백악관 고문, 국내 수석고문 등 한때 기세등등했던 권력실세들 사십여명이 감방으로 갔다.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석권한 로버트 레드퍼드,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대통령의 음모>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진실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사건은 미국 사회와 역사를 바꿨고 미국과 세계 언론의 존재양식도 바꿨다. 최근 반동적 역류로 어지럽지만, 한국 저널리즘이 고난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도달하려 애써온 이상향도 상당부분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쟁취한 미국 언론의 성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언론은 그 뒤 변질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을 둘러싼 미국 언론 쟁투를 통해 우리는 한국 언론의 현주소와 문제를 좀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73년 4월 말 당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보좌관을 통해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 담당기자 보브 우드워드를 협박했다. “그 망할 애송이 녀석들 좀 조심하라고 해.” ‘녀석들’은 당시 30살의 우드워드와 그의 29살 취재 단짝 칼 번스틴. 하지만 이미 닉슨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 며칠 뒤인 4월30일 그의 최고보좌관 해리 홀드먼 등이 사임했고 해고당한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은 옛 주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외엔 거의 침묵을 지키던 미국 언론들이 그 무렵엔 다시 워터게이트로 모두 몰려들고 있었다. 우드워드와 번스틴은 그때 처음으로 자신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닉슨 재선운동본부 책임자를 지낸 전 법무장관 존 미첼은 자신의 비리에 관한 폭로기사가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화로 번스틴을 협박했다. “만약 그 기사가 진짜로 나가게 되면 캐서린 그레이엄(워싱턴포스트 사주)의 젖꼭지를 거대한 압착기계로 비틀어 짜버릴 줄 알아.” 로널드 지글러 백악관 대변인은 보도내용을 모조리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워싱턴포스트>를 근거 없는 기사로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비열한 신문이라며 국민을 선동하고 다른 언론사들을 이간질했다.  

1973년 초 워싱턴포스트 주가는 주당 38달러에서 21달러로 폭락했다. 정부가 이 신문사 소유 텔레비전 방송국 두 곳 재인가 문제를 걸고넘어졌기 때문이다. 1973년 9월15일 녹음된 닉슨의 발언은 이를 예고했다. “가장 중요한 건 워싱턴포스트가 이번 일로 정말 지옥 같은, 지독한 고생을 하게 될 거라는 점이지. 그 회사는 텔레비전 방송국들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정부로부터 허가를 갱신받아야 해. 앞으로 엄청나게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게 될걸.” 하지만 불과 얼마 뒤 지옥에 떨어진 건 닉슨 자신이었다.

중국과 화해하고 베트남 북폭을 강화하는 등 권력의 절정에 있던 닉슨의 1972년 대선 재선이 확실한 상황(49개 주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을 눌렀다)에서 대다수 언론들은 침묵했다.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 초기에 경쟁했던 일부 신문들마저 워터게이트에 눈감았다. 우드워드에 따르면, “관청 쪽 배포기사에 대한 더러운 애착을 지닌 포로들”, “겉으로만 센 척”하고 “정보를 이리저리 분류하며 정작 할 일은 하나도 안 하는 놈들”, “정부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 적기나 하는 약아빠진 속기사”였던 백악관 출입 고참기자들은 백악관을 화나게 하면 돈과 명예가 보장되던 백악관 출입기자 자리를 잃을까 걱정했고, 워싱턴포스트의 새파란 전담 신참기자들(우드워드는 사건 발생 당시 입사 9개월, 번스틴은 11년차였다)을 깔봤다.  

백악관 출입 정치부 기자가 아니라 사회부 수도권 담당 기자였던 우드워드와 번스틴은 기성 제약들에서 해방돼 있었다. 그 ‘애송이들’이 잠복근무와 관계자 야간취재 등 오늘날 ‘탐사보도’의 핵심기법으로 알려진 집요하고 저돌적인 취재방식을 미국 언론사상 그때 처음 도입했다. 사주와 편집인, 데스크가 똘똘 뭉친 워싱턴포스트는 외로웠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1971년 6월 베트남 전쟁 확전 주범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 보도와 더불어 그때가 미국 언론으로서는 권력을 견제하는 ‘제4부’로서의 존재감이 가장 선명했던 전성기였다. 워싱턴 지방신문 4개 중에서도 3위에 머물렀던 워싱턴포스트가 일약 뉴욕타임스에 버금가는 일류 전국지로 거듭난 게 그 시기였다. 워싱턴포스트 성공의 최대 공로자는 물론 우드워드와 번스틴이었으나 또 한 사람, 닉슨의 역설적 ‘공덕’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닉슨은 2기 임기 절반도 못 채운 채 1974년 8월 9일 사임했다.  

아메리칸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고 있는 알리샤 셰퍼드가 2007년에 낸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WOODWARD AND BERNSTEIN- Life in the Shadow of Watergte)은 바로 그 과정을 우드워드와 번스틴의 캐릭터와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예일대 졸업에 해군 중위 출신의 전형적인 백인 엘리트 우드워드와 장발에 줄담배를 피우는 삐딱한 유대인 대학중퇴자 번스틴의 전혀 상반되는 캐릭터가 워터게이트를 매개로 최상의 조합으로 변모해가는 과정, 그리고 제대로 알려진 적 없는 출세 이후 그들의 인생유전이 중심을 이룬다. 마지막 장에 미국 언론 사상 최대의 미스터리였던 ‘딥 스로트’, 곧 결정적인 국면에 우드워드를 도와줬으나 33년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정부 고위 관계자(연방수사국·FBI 2인자 마크 펠트)의 커밍아웃 과정을 따로 다뤘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9. 04. 11) 미 언론 키운 한마디 “오케이, 보도합시다”

<‘워싱턴포스트’ 만들기>의 원제는 <멋진 인생>(A GOOD LIFE: Newspapering and Other Adventures). 편집국장, 편집인으로 닉슨 정부에 맞서 싸우며 오늘날의 <워싱턴포스트>가 있게 만든 또 한 사람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 주역 벤저민(벤) 브래들리의 자전적 회고록이다. 1971년 6월13일 <뉴욕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폭로한 초대형 특종을 했을 때를 브래들리는 이렇게 회고한다. “<뉴욕타임스>는 그 연구보고서 한 부를 입수해 10여명의 민완기자와 에디터들을 석 달 동안 투입한 끝에 10여 꼭지의 기사를 만들어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경쟁지 기사를 베껴 쓰는 창피스런 입장이었다. 우리는 문단을 바꿀 때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우리 눈에만 보이는 피가 흘렀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법무장관 존 미첼이 보도를 전면 중단하고 랜드연구소 군사전문가 대니얼 엘스버그가 빼낸 7000쪽에 달하는 자료를 모두 국방부에 넘기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주춤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 틈에 같은 내용의 4000쪽짜리 보고서를 긴급 입수해 닷새 뒤 실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 조처를 의식한 변호사 등 일부 간부들이 보도에 강력히 반대해 일대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때 대표적 보도 강행론자가 브래들리였고 도쿄 특파원을 지낸 돈 오버도퍼도 그의 편이었다.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은 처음엔 망설였으나 마침내 “오케이, 갑시다. 보도합시다”라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브래들리는 그 한마디가 “워싱턴포스트의 사풍을 완전히 바꿔버렸다”고 추억했다. “(그 한마디로) 새롭고 독립적이고, 단호하고, 자신있게 바꿔버린 <워싱턴포스트>를 모든 편집자와 기자들이 얼마나 각인하게 될지 우리는 몰랐다. 우리는 대통령과 대법원과 법무장관에 단호하게 맞서게 되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신문은 흔들리지 않고 원칙에 따라 나아갔다.” <워싱턴포스트>는 그 다음날 법원의 게재 금지 명령이 내려지기 전 한 차례 더 보도를 강행했다.

세기적인 워터게이트 특종은 그때의 경험이 토대가 됐다. “사내에서는 펜타곤 페이퍼의 경험으로 그레이엄 일가와 편집국의 신뢰가 견고해졌다. 또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명감을 공유하게 됐다. 펜타곤 페이퍼 이후 우리가 함께 극복하지 못할 어려운 결정은 없었다.” 하지만 군소신문이었던 <워싱턴포스트>가 미국을 대표하는 정론지로 거듭난 결정적인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워터게이트 특종.

브래들리에 따르면 워터게이트 특종은 언론을 국가적 존경을 받는 지위로 밀어올렸고, 특히 <워싱턴포스트> 기자들, 그중에서도 보브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은 미국 젊은이들에게 영웅으로 비쳤다. 고교와 대학 진로를 앞두고 고민하던 학생들은 언론에 매료됐고 언론학부 등록생 수가 치솟았다. “누구보다 언론을 싫어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닉슨이 가장 유능하고 젊고 강인한 활동가들을 언론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였다.” 그 사건 뒤 개혁적 정치인들이 등장하게 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워런 하딩 대통령 때 권력에 빌붙다가 몰락을 자초했던 <워싱턴포스트>는 국민과 민주주의 편에서 권력에 맞붙어 싸움으로써 재생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의 전체 윤곽은 우드워드, 번스틴의 삶에 초점을 맞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보다는 여러 사건을 두루 다룬 <‘워싱턴포스트’ 만들기>가 간결하지만 오히려 더 잘 요약하고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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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4-11 23:17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벤 브래들리를 기억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아요.물론 저널리스트들이야 알고 있겠지만요. 호프만과 레드포드가 나왔던 All The President's Men에서 밴 브래들리의 연기를 했던 제이슨 로바드는 정말 멋졌습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전통적인 구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편집장 역할이었습니다.영화 속의 워싱턴포스트 에디터 회의는 명연기자들의 집합소였지요..이름들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을 보면 알만한 훌륭한 연기자들...

로쟈 2009-04-12 12:05   좋아요 0 | URL
이미지를 찾다보니 편집부 사진이 눈에 띄더군요. <미디어 모노폴리>를 보면 현재의 미국 언론시장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은데, 워터게이트 특종 같은 건 더이상 나오기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주의 경제서는 케빈 필립스의 <나쁜 돈>(다산북스, 2009)이다. 비록 책을 구입할 '나쁜 돈'은 없지만 리뷰 정도야 얼마든지 챙겨놓을 수 있다. "저자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드러난 미국의 진짜 모습을 '석유라는 세계 주요 자원의 독점', '금융 부분의 폭발적 팽창', '종교와 정치의 연합' 세 가지로 요약한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순차적으로 세계 경제의 패권을 쥐었던 나라들의 흥망성쇠에서 이끌어낸 공통점을 통해 미국이 앞으로 어떤 행로를 보일지 예측한다." 처음 접하는 저자이긴 하지만, 이력이 만만치 않다. 별로 주목받지 못한 듯한데, '미국의 금권정치와 거대 부호들의 정치사'란 부제의 책 <부와 민주주의>(중심, 2004)로 국내에는 처음 소개됐다. 몇 권 더 소개돼도 좋을 듯싶다.  

한국일보(09. 04. 11) 나쁜 달러, 미국을 버렸고 세계를 버렸다  

"중요한 문제는 2007~2010년 지속될 미국의 주택 및 신용 위기가 세계 위기를 일으키고 결국 경제 패권을 아시아로 넘겨줄 것이냐, 이다."(293쪽)

"악화(이 책 제목 '나쁜 돈')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16세기 금융인 그리샴의 갈파가 새삼스럽다. 미국의 대표적 지성으로 불리는 케빈 필립스가 지적하는 위기의 본질은 결국 그 통찰의 버전업인 셈이다. '나쁜 돈'은 가치가 떨어진 달러뿐 아니라 지나치게 거대해진 금융 부문과 그 불량 상품들, 그리고 위험한 태도를 가리킨다.

저자는 최근 미국의 경제를 '불노믹스(Bullnomics)'라는 말로 특징짓는다. 마구 날뛰는 황소 같다는 이야기다. 그 첫번째 특징은 1980~90년대에 연금 기금, 인터넷 거래. 기업 연금 등이 등장해 조성된 여건을 기반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다. 두번째는 정부 주도 하에 벌어지는 거대한 통계 왜곡이다. 1990년대 말의 정치적 흥분 속에서 소비자물가 지수가 은밀하게 사전 조율돼 일반의 관심에서 사라졌던 게 바로 그 때문이다.

세번째가 경제와는 무관할 것 같아 보이는 종교 문제, 즉 기독교 원리주의다. 미국인의 편향, 왜곡된 신앙 문제를 지적하는 대목은 이 책이 경제학 서적인가 싶을 정도로 문화적 측면을 중시한다. "조지 부시 시대 보수대연합이 사용한 마취제는 복음주의, 원리주의, 오순절 기독교였으며 9ㆍ11 이후 고조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테러, 악마, 이슬람에 대한 편견도 함께 주입하였다"(139쪽). <시크릿> <야베스의 기도> 등 최근 한국의 독서시장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복음주의와 부시 행정부의 '오너십 사회'는 결국 연계돼 있다는 것이다. 

실물이 아닌 금융에 대한 과도한 의존 정책은 결국 소득과 부의 양극화, 금전 숭배, 투기의 만연 등 시장의 대혼란으로 치닫고 말았다. 저자는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이 걸었던 길을 미국도 따르고 있다며 우려한다. 농업, 제조업 등 초기 형태의 산업을 희생시키면서 돈 장사(금융)에 올인한 나라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종교의 보수ㆍ우경화가 가세했다. 



저자는 미국이 세계의 분노를 촉발시키며 21세기를 출발했다고 날을 세운다. "판단 착오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유혈 점령한 뒤, 국제적으로 크게 신망을 잃었다"고 지적하면서 "침공 목적은 이라크에서 석유를 대량으로 생산ㆍ판매, 석유수출국기구를 무너뜨리고 유가를 낮추려는 것"이라며 전쟁의 본질을 꿰뚫는다. 이 같은 명쾌한 논리로 저자가 보는 세계 경제의 위기는 대단히 실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된다. "세계 석유 공급은 지금 정점에 도달하기 직전이며 수요를 지탱할 수 없"(41쪽)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협량한 세계관도 한몫했다. 저자는 "순진하고 애국심 강한 미국인들은 그토록 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에 반대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다"(45쪽)며 '선량한' 미국인들에게 경고장을 날린다. 닉슨 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출발, 2006년 미국의 기독교 유파를 비판한 <미국의 신정 정치>를 발표하는 등 쓴소리꾼을 자임하는 저자는 타임 등 매체에서 필명을 날리고 있다.(장병욱기자) 

09.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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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어제 읽은 칼럼 한 편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한 문단을 나란히 읽어보려고 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제 올려놓으려고 했던 페이퍼로서 지난주에 올린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보충의 의미도 갖는다. 쟁점은 '문화적 저항의 의의와 한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먼저 결과적으로 소비문화에 투항해버린 90년대 '신세대' 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대안문화 창출을 요구하고 있는 강내희 교수의 칼럼이다. 

  

경향신문(09. 04. 10) 청년세대와 대안문화

1993년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발칙한’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온 적이 있다. 90년대 초라면 서울의 압구정동이 소비의 메카로 떠오르고 ‘오렌지족’을 위시한 소비지향적 신세대가 등장하던 때이다. 문제의 책을 펴낸 저자는 미메시스라는 그룹으로, 이들은 ‘386세대’로 통칭되는 80년대의 청년세대가 금욕주의의 운동권 문화를 신세대에게 강요한다며 나름대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 

90년대후 신세대 소비문화 빠져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의 시대 변화를 감각적으로 반영했다고 생각된다. 한국말로 된 랩 음악을 처음 시도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이 나오기 한 해 전이다. 당시 젊은 세대는 서태지에게 열광했고, 문제의 책은 신세대 감수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때 이미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80년대 운동권 문화는 지나친 엄숙주의를 드러낸다고 보고 있었던 터라 서태지의 새로운 감수성 실험과 미메시스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해방은 운동권이 강조하던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당시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만큼이나 욕망의 분출도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신세대가 걸었던 길은 한국사회가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투항이었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청년세대가 사회적 의제를 주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학생들이 전국적 의제로 집단행동을 한 것은 통일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북으로 간다며 연세대 교정에서 농성을 벌인 96년이 마지막이다. 이후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시장의 소비자로 변해버렸다. 신세대는 운동권 선배의 금욕주의, 엄숙주의를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의 해방을 위한 욕망을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젊은 세대가 기존의 문화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문화의 성격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5년 동안의 청년세대가 보여준 문화는 소비문화였다. 이들이 비판한 80년대의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넘어선 대안문화를 실험하려 했는데 말이다. 이전 세대가 문제점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80년대 청년세대는 권위주의 정치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권위주의로 흐른 측면이 적지 않았고, 세계 동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곧 망해버릴 소련의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은 것이 단적인 예다. 그래도 당시 청년세대는 현실을 뛰어넘는 대안문화를 추구했다.

대안문화로 ‘새 해방’ 추구 기대
80년대 대학 곳곳에서는 시국 시위와 함께 마당극이 수시로 펼쳐졌다. 강의시간이면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러나 개인의 관찰로 판단한다면 오늘 교수들의 강의 내용에 도전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개인의 패션과 스타일, 학점, 취업 등에 대한 관심은 늘어났으나 자기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히려 뒤로 미루는 듯하다.

오늘의 청년세대는 욕망의 표출에서 해방을 찾기 시작한 90년대 신세대의 직계 후배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해방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일까. 소비문화로부터 벗어나려고 기획하는 것일까. 청년세대가 새로운 삶을 실험하지 않는 사회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강내희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 

  

80년대 세대의 '정치적' 청년문화에 대한 불만과 반발심에서 터져나온 '신세대 문화'가 결과적으론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한 투항으로 귀결됐다고 지적하면서 필자는 동시에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문한다. 진단은 맞지만, 주문은 모호하다.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던 '압구정동' 세대의 문화가 대안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정말로 자기 욕망에 충실하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보는 것일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미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 아닌가?(이명박 정권만큼 어떠한 도덕적 금제도 없이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노골적으로 충실한 정권이 또 있었던가?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포식자들만큼 자신의 권력욕과 성욕에 충실한 이들을 더 찾아야 할까? 이들은 모두 지 꼴리는 대로 한다!)   

'네 멋대로 해라'는 건 이미 청년세대의 구호가 아니다. 세상이 앞질러,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자본이 노골적으로 챙기는 구호가 '네 멋대로 해라'이며(물론 그들을 '소비주체'로 호명하는 구호다. "너도 이런 거 살 수 있어!"), '세상에 너를 소리쳐!'다. 이명박 장로님도 필진으로 참여한 청소년 '처세서'의 제목도 '네 멋대로 살아라'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불온한 대안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미 문화적 '주류'의 목소리다. 차라리 '별일 없이 산다'는 구호가 오히려 더 '불온'하지 않은지? "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라고 말하기. 혹은 "난 알아요!" 대신에 맥없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라고 주절거리기(그래도 '아무렇지 않'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다. 소심하긴 해도 '루저 문화'의 저항적 에너지는 '어'라는 한음절에 집중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저항,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시차적 관점>의 한 문단에서 암시를 얻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전환이다"(15쪽)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지난번에도 적은 바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from the liberation from the System to the System of Liberty)"이다.  

"이것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었던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진정 파악하기 어려운 변증법적 전환이다." 즉, 저항과 전복의 포즈만으로는 '자유의 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체위를 다 시도해본다고 해서 제도가 바뀌는 건 아니다. 지젝은 '혁명적 정치학'에서 두 가지 사례를 든다. 각각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사례다.  

"살롱에서 토론하며 자신들의 모순된 언행을 즐기던 자유론자들로부터 권력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권력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역겨운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후반 혁명 전 프랑스에서 꽃피웠던 여러 자유사상가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혁명적 공포의 엄격한 새로운 질서로 전도시키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번역에서 '역겨운 예술가들'은 'pathetic artists'를 옮긴 것인데, '측은한 예술가들' 정도가 아닌가 싶다. 살롱에서 토론을 즐기던 자유론자들이나 권력에 나름 애교 있게 항의하던 예술가들이나 모순적이게도 한편으론 권력에 '기생'하는 족속들이었다. 오늘날 그런 이들의 사상과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살롱에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혁명적 공포'를 불가불 수반하는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고자 한 시도를 지지하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에도 피바람 부는 '혁명 만세'를 외칠 수 있는지.    

"유사하게 절대주의자, 미래파, 구성주의자 등이 혁명적 열정의 우위를 두고 경쟁하던 시기인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첫 문장의 '혁명적 열정'이나 두번째 문장의 '혁명적 열기'나 모두 'revolutionary fervor'를 옮긴 것이다. '강요된 집단화(forced collectivization)'는 '강제 집산화'가 낫겠다. 그런 강제 집산화 과정에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실정적/긍정적 사회정치 질서로 옮기고자 했던 시도를 읽는 게 중요하다는 것. 요컨대 핵심은 '혁명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거기에 비하면, "혁명 이후의 현재가 짊어진 십자가에서, 그들 자신들이 자유에 대해 가진 만개하는 꿈의 진실을 인식하기 거부하는 혁명적인 아름다운 영혼들보다 윤리적으로 더욱 역겨운 것은 없다."(16쪽)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은 제시하면 "There is nothing ethically more disgusting than revolutionary Beautiful Souls who refuse to recognize, in the Cross of the postrevolutionary present, the truth of their own flowering dreams about freedom." 즉, 자유에 대한 열망을 실컷 늘어놓다가 정작 혁명적 공간이 열리자 '이런 게 아니었어'라고 부인/회피하는 태도를 지젝은 '아름다운 영혼'의 역겨운 태도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대안문화'가 아니다. '질서'가 바뀌지 않는다면 '대안문화'의 '대안'은 가식적인 눈속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저항'도 '도발'도 '전복'도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가 새로운 질서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이 생략된다면, 모든 체제비판은 체제 기생적인 비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여기저기서 "네 멋대로 해라"고 부추기는 시대에 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기 개성을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그러한 조건에 구속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다면, 네 멋대로 하지 마라!.. 

09.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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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영혼'이란 일종의 비꼬는 듯한 표현인가요?

로쟈 2009-04-11 15:35   좋아요 0 | URL
헤겔의 용어입니다. '순진한 주관주의' 정도일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은 주관적 관념론자가 아니라서 순진한 주관주의를 거시기하게 보았겠군요.

로쟈 2009-04-12 12:06   좋아요 0 | URL
그냥 누가 봐도 '순진한' 태도죠...

yoonta 2009-04-1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표현들이 난삽한 편이어서..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

이런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이 불분명했었는데 로쟈님 설명을 들으니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군요.

결국 헤겔의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로군요.

체계를 단순히 거부하거나 도발하는 것은 최초의 반정립적 '부정'은 될 수있을지 모르나
최초의 체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는 '부정의 부정'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


로쟈 2009-04-11 19:47   좋아요 0 | URL
지젝은 적어도 제 경우엔 헤겔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가 난삽한 건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10대말에서 20대 초중반이 보기엔 60년대 태어난 사람들이나 70년대 초반 태어난 사람들이나 다 아줌마 아저씨들일 뿐이겠지요.

로쟈 2009-04-12 17:52   좋아요 0 | URL
각 세대마다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만, 점점 좀스러워지는 듯해서 아쉽습니다. 요즘은 각자 생각만 하기 바쁘니까요...

paul 2009-04-1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기다리신다는 "The Monstrosity of Christ" /Slavoj Zizek 이 출간된 것 같더군요.^^

로쟈 2009-04-12 17: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여름에나 읽을 수 있을 텐데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번주에도 지갑을 열게 하는 책은 많지 않다(보통 확실한 필요 때문이거나 절박한 관심 때문에, 혹은 예기치 않은 횡재일 경우에 구입을 서두르는 편이다). 그럼에도 눈길을 잡아끄는 책이 없지 않은데, 인문서 가운데는 단연 <일급 비평가 6인이 쓴 매혹의 인문학 사전>(앨피, 2009)이 '탐나는 책'이다. 찾아보니 "현재 일본 문학계를 이끄는 6인의 비평가들이 의기투합하여 1991년에 펴낸 <읽기 이론>을 번역한 책이다. 문학에서 출발하여 사상, 실제 비평으로 이어지는 심오하고도 명쾌한 내용으로 일본에서는 스테디셀러이다."라고 소개된다. 개인적으로는 '읽기 이론'이란 제목이 더 마음에 들지만, '이론'이란 말은 국내 교양서에서 기피 용어다. 아쉽게도(물론 예견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기사는 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론 읽기' 범주에 들어갈 책은 조엘 도르의 <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1>(아난케, 2009)이다. 라캉 직계 제자의 '라캉 독해 입문서'인데, 2권이 마저 출간되면 앞으로 출간될 라캉의 <세미나>들과 <에크리> 읽기에 유익한 참조가 되겠다(<에크리>는 드디어 올해 출간되는 듯하다). 이 두 권과 함께 관심도서로 꼽아본 책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이다. 제목에서부터 '학술적인' 냄새를 팍팍 풍기는데, 다행스럽게도 '매혹의 인류학' 같은 제목으로 개명되진 않았다. 주중에 서점에서 보고 가장 '놀란' 책이기도 하다. 예기치 않은 타이틀이어서인데, 그럼에도 리뷰기사는 충분히 예상가능했다. 한겨레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나도 조만간 서평을 쓰게 될 듯하다(표지는 국역본이 더 마음에 드는군).     

한겨레(09. 04. 11) 자본주의를 구원하라, 인류학이여

인류학은 자주 서구 제국주의 시대 욕망의 산물이거나 서구인들의 이국취미의 학문적 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2001)은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 책은 인류학이 대안적 세계에 대한 비전을 열어줌으로써 당대 지배체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인류학의 전통 속에서 그런 투쟁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은이 데이비드 그레이버 자신이 학문과 투쟁을 병행하는 사람이자 학문을 투쟁의 장으로 삼는 사람이다. 뉴욕대 교수를 거쳐 런던대 교수(사회인류학)로 재직중인 그는 ‘지구적 민중행동’ ‘세계산업노동자조합’ 같은 급진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책의 관심은 가치이론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제출하는 데 있다. 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시장과 화폐를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이 시대가, 인류학적 조망 아래서 보면 보편적이기는커녕 오히려 특수한 사례라는 인식이다. 그런 인식 위에서 그는 먼저 우리 시대의 지배 가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논의를 풀어간다. 개인들이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만인에게 결국 이익이 된다는 명제는 우리 시대의 거의 보편적인 믿음이 됐다. 지은이는 이런 믿음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개인도 시장도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최근세사의 산물일 뿐이며, ‘자기 이익 극대화 노력’이라는 것도 서구에서 발전한 자본주의 질서에서만 뚜렷하게 확인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시장을 초역사적 보편 체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강자·부자의 지배와 이익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 작업일 뿐이다. 

이와 함께 지은이는 ‘포스트모더니즘’ 학문 조류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류가 일체의 보편적 평가기준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함으로써 결국 연대와 저항의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지은이의 시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귀착한 것은 ‘개인의 창조적 자기형성’이었고, 그것은 결국 사회의 파편화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상대주의가 신자유주의의 총체적·보편적 가치평가 체제와 상응한다는 사실이다. 한쪽은 파편화하고 다른 한쪽은 그 파편적 존재들을 총체적 가치 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은이는 인류학이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살피는 사람이 인류학의 거인 마르셀 모스(1872~1950·사진)다. 지은이의 목표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모스의 인류학적 연구를 결합하는 것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마르크스와 모스는 서로에 대한 완벽한 보완물”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투신했다면 모스는 비교인류학의 성과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했다.” 또 “마르크스는 지속적으로 인류학에 관심이 있는 사회주의자였으며, 모스는 평생 동안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인류학자였다.” 

여기서 지은이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사회주의’로 표출된 모스의 정치적 열망이다. 그의 대표작인 <증여론>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다른 어떤 저작보다 더 강렬한 정치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이 저작에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놓인 부족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가치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북아메리카 북서부 원주민인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콰키우틀족의 경우에서 보이는 교환양식을 ‘선물경제’라고 명명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을 주고 그 선물을 받은 쪽은 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시 선물하는 행위양식이 이 선물경제의 특징이다. ‘자기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과는 아주 다른 교환양식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화폐의 가치, 상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놓을 때, 선물경제권에서는 “공적으로 무언가를 선물하는 기쁨이나 관대한 분배의 기쁨, 공적이고 사적인 향연에서 베푸는 호의의 기쁨”이 최우선의 가치가 된다. 여기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대안 체제를 찾아냈다.

지은이는 모스가 <증여론>을 발간하던 해에 <볼셰비즘에 대한 사회학적 평가>를 함께 출간했음을 상기시킨다. 모스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한편으로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그 혁명의 폭력적·당파적 성격에 의구심을 품었고, 특히 권력 중심적 사고에 거부감을 느꼈다. 지은이는 모스의 이런 우려를 수긍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권력 문제를 회피하는 혁명 열망은 순진한 도덕주의로 귀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스의 도덕주의가 마르크스의 냉철한 이론과 결합한다면 대안을 창출하는 상상력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책은 강조한다.(고명섭 기자)  

09. 04. 11. 

  

P.S.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 바로 떠올려주는 책은 물론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마르셀 모스'론을 쓴 레비 스트로스(<구조인류학>이 재번역되어야 한다)와 일반경제로 확장시킨 <저주의 몫>의 저자 조르주 바타이유다.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칼 폴라니의 경제인류학과 비교해보아도 흥미롭겠다(참고로 하이에크와 폴라니의 비교는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4101737055&code=9003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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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류학적 가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외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12 00:26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훏어보고 없는 시간에 부랴부랴 작성한 것이다. 안 그래도 저자의 다른 책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상들>을 어제 구했는데,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이 책은 105쪽 분량이니까 같은 저자의 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얇긴 하다.     교수신문(09. 05. 11) 시선 끄
 
 
푸른바다 2009-04-11 11:58   좋아요 0 | URL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은 모셔다만 놓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마침 저도 아침에 배달된 한겨레에 실린 이 기사를 읽고 그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됐네요^^

로쟈 2009-04-12 11:54   좋아요 0 | URL
저는 모셔둔 책이 어딨는지 못찾겠어요. 아마 처박아두었나 봅니다...

게슴츠레 2009-04-11 12:50   좋아요 0 | URL
최근에 한겨레21에 폴라니 특집이 실렸었죠. 개인적으로 저는 우석훈 씨 등이 주도하고 있는 '인류학적 시각'들이 좌파의 방향감각상실에 대한 징후이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괴물의 탄생>의 경우, 스위스의 시계나 이탈리아의 수제 자동차 생산 등의 사례를 들면서 강한 국민경제와 제3부문의 연관성을 드시던데 '자본주의의 세계성'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더군요. 제3부문의 존재가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이 세계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논거는 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억압적 세계체계를 구성하는 필수적 고리일 수 있다는 것, 그저 주변부의 착취를 그 저변에 둔 고급 소비재의 생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세계체계분석과 고진을 읽으면서 들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학적 성과들이 모두 거부되어야 할 유토피아적 환상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가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인류학을 좌파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신중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그런 맥락에서 (아마 읽을 시간은 나지 않겠지만;ㅂ;) 이 책이 기대가 되는군요. 마르크스와 모스를 어떻게 저자가 조화시키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씨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와 함께 보면 좋을 것 같군요.

로쟈 2009-04-12 11:56   좋아요 0 | URL
역자인 홍기빈 씨가 '폴라니주의자'이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주목일는지 판타지일는지는 진지하게 검토해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55   좋아요 0 | URL
에밀 뒤르카임은 사회주의자와 사귀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해 거리를 두었는데 그 제자인 마르셀 모스도 그랬군요.두 사람의 사회주의관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겠네요.
그레이버 책은 모스 연구서로 읽으면 좋겠군요.

로쟈 2009-04-12 12:01   좋아요 0 | URL
'뒤르켐'이라고 보통 읽지요(전공자인 김종엽 교수를 따라서). '뒤르카임'은 영미식이고, 보통 '뒤르껭'이라고 많이 읽었었지요...

푸른바다 2009-04-12 13:26   좋아요 0 | URL
고전 사회학의 3대 거장이라고 하는 맑스, 베버, 뒤르켐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푸대접을 받는 사람이 뒤르켐이 아닌가 싶군요^^ 베버의 형편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제가 알기론 불어에서 직접 번역된 그의 저작은 단 한권도 없는 듯 싶어요. 번역되었던 책들도 대부분 절판 상태이고... 우리나라 강단 사회학이 미국식 구조 기능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면 그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사람이 뒤르켐일텐데 말입니다. 물론 현재 한국 좌파 계열의 이론적 원천 중의 하나인 프랑스의 인류학과 사회과학에도 뒤르켐의 영향은 매우 크겠지요. 아무튼 기능주의의 태두 탈콧 파슨즈의 책도 번역된 게 거의 없으니 중역이라도 몇권은 번역되었던 뒤르켐의 사정이 더 나은지도 모르지요. 번외자로서 할 소리는 아닌지 모르지만, 강단 사회학계의 부실한 기초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느껴져 좀 씁쓸합니다. 좌파들의 경우 그의 후계자들을 소화하는 데도 벅차서 그들의 외할아버지 뻘인 뒤르켐까지 관심이 미치기는 시간이 부족할 지도 모르겠네요. 제 개인적으로는 뒤르켐에 관심이 있고, 근대성에 대한 그의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시각'도 분명히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댓글을 다는 순간 아이콘을 바꾸셨군요^^ 취조 당하듯 의지에 앉은 지젝으로 ㅎㅎㅎ 마침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주문한 상태입니다. 이제 지젝에 대한 취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12 15:11   좋아요 0 | URL
알사스 로렌 출신이라서 독일발음처럼 읽는다고 해서 뒤르카임이 아닌가 하고 적었어요.거기가 수천년 독일문화권이라서...물론 프랑스 사람으로 통합니다만.그런데 영어발음은 뒤르켐이 아닌가요? 전에 이 문제로 참고한 책이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저는 그동안 뒤르켕으로 표기했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2 20:5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람혼 2009-04-13 01:07   좋아요 0 | URL
그레이버의 책이 단연 눈에 띄는군요. 곧 구해서 탐독해 봐야겠습니다. 언제나 좋은 책 발 빠르게 소개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로쟈님. 그나저나 서재가 새단장을 했네요. 새롭게 바뀐 배경화면과 새로운 지젝 사진이 서로 호응하는 듯합니다.^^

로쟈 2009-04-14 23:15   좋아요 0 | URL
네, 요즘 세상이 하도 '폭력적'이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