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PD수첩 수사뿐 아니라 MBC 9시 뉴스의 신경민 앵커와 라디오 진행자 김미화 씨 교체 문제로 다시 한번 현 정부의 언론'탄압'이 화제가 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책 두 권이 눈길이 끈다, 국역본의 제목부터가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이다. 권력에 안주하는, 아니 권력 자체가 돼버린 언론과 그 하수인 정도를 자처하는 기자들에겐 언감생심이겠다. 우리의 처지가 아니어서 유감스럽지만, 미국에서도 '전설'로 회자되는 사건 아닐까. 다시 한번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최소한 리뷰 정도라도 일독해보시길.

한겨레(09. 04. 11) '망할 애송이 기자’ 대통령 무릎 꿇리다
1972년 6월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 단지 안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몰래 침투한 괴한 5명이 체포당했다. 비즈니스 정장 차림에 외과수술용 장갑을 낀 그들은 최신형 도청장치를 지니고 있었고, 일련번호가 이어지는 100달러짜리 고액권 수천 달러를 갖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이 저지른 ‘3류 주거침입’ 또는 ‘절도사건’(그들 중 4명이 쿠바 출신자였다)쯤으로 치부되던,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그 사건은 불과 2년 뒤 대통령의 치욕스런 하야라는 미국 역사상 초유의 대사건으로 번져간다. 법무장관과 백악관 비서실장, 백악관 고문, 국내 수석고문 등 한때 기세등등했던 권력실세들 사십여명이 감방으로 갔다.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석권한 로버트 레드퍼드,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대통령의 음모>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진실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사건은 미국 사회와 역사를 바꿨고 미국과 세계 언론의 존재양식도 바꿨다. 최근 반동적 역류로 어지럽지만, 한국 저널리즘이 고난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도달하려 애써온 이상향도 상당부분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쟁취한 미국 언론의 성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언론은 그 뒤 변질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을 둘러싼 미국 언론 쟁투를 통해 우리는 한국 언론의 현주소와 문제를 좀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73년 4월 말 당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보좌관을 통해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 담당기자 보브 우드워드를 협박했다. “그 망할 애송이 녀석들 좀 조심하라고 해.” ‘녀석들’은 당시 30살의 우드워드와 그의 29살 취재 단짝 칼 번스틴. 하지만 이미 닉슨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 며칠 뒤인 4월30일 그의 최고보좌관 해리 홀드먼 등이 사임했고 해고당한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은 옛 주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외엔 거의 침묵을 지키던 미국 언론들이 그 무렵엔 다시 워터게이트로 모두 몰려들고 있었다. 우드워드와 번스틴은 그때 처음으로 자신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닉슨 재선운동본부 책임자를 지낸 전 법무장관 존 미첼은 자신의 비리에 관한 폭로기사가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화로 번스틴을 협박했다. “만약 그 기사가 진짜로 나가게 되면 캐서린 그레이엄(워싱턴포스트 사주)의 젖꼭지를 거대한 압착기계로 비틀어 짜버릴 줄 알아.” 로널드 지글러 백악관 대변인은 보도내용을 모조리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워싱턴포스트>를 근거 없는 기사로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비열한 신문이라며 국민을 선동하고 다른 언론사들을 이간질했다.
1973년 초 워싱턴포스트 주가는 주당 38달러에서 21달러로 폭락했다. 정부가 이 신문사 소유 텔레비전 방송국 두 곳 재인가 문제를 걸고넘어졌기 때문이다. 1973년 9월15일 녹음된 닉슨의 발언은 이를 예고했다. “가장 중요한 건 워싱턴포스트가 이번 일로 정말 지옥 같은, 지독한 고생을 하게 될 거라는 점이지. 그 회사는 텔레비전 방송국들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정부로부터 허가를 갱신받아야 해. 앞으로 엄청나게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게 될걸.” 하지만 불과 얼마 뒤 지옥에 떨어진 건 닉슨 자신이었다.
중국과 화해하고 베트남 북폭을 강화하는 등 권력의 절정에 있던 닉슨의 1972년 대선 재선이 확실한 상황(49개 주에서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을 눌렀다)에서 대다수 언론들은 침묵했다.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 초기에 경쟁했던 일부 신문들마저 워터게이트에 눈감았다. 우드워드에 따르면, “관청 쪽 배포기사에 대한 더러운 애착을 지닌 포로들”, “겉으로만 센 척”하고 “정보를 이리저리 분류하며 정작 할 일은 하나도 안 하는 놈들”, “정부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 적기나 하는 약아빠진 속기사”였던 백악관 출입 고참기자들은 백악관을 화나게 하면 돈과 명예가 보장되던 백악관 출입기자 자리를 잃을까 걱정했고, 워싱턴포스트의 새파란 전담 신참기자들(우드워드는 사건 발생 당시 입사 9개월, 번스틴은 11년차였다)을 깔봤다.
백악관 출입 정치부 기자가 아니라 사회부 수도권 담당 기자였던 우드워드와 번스틴은 기성 제약들에서 해방돼 있었다. 그 ‘애송이들’이 잠복근무와 관계자 야간취재 등 오늘날 ‘탐사보도’의 핵심기법으로 알려진 집요하고 저돌적인 취재방식을 미국 언론사상 그때 처음 도입했다. 사주와 편집인, 데스크가 똘똘 뭉친 워싱턴포스트는 외로웠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1971년 6월 베트남 전쟁 확전 주범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 보도와 더불어 그때가 미국 언론으로서는 권력을 견제하는 ‘제4부’로서의 존재감이 가장 선명했던 전성기였다. 워싱턴 지방신문 4개 중에서도 3위에 머물렀던 워싱턴포스트가 일약 뉴욕타임스에 버금가는 일류 전국지로 거듭난 게 그 시기였다. 워싱턴포스트 성공의 최대 공로자는 물론 우드워드와 번스틴이었으나 또 한 사람, 닉슨의 역설적 ‘공덕’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닉슨은 2기 임기 절반도 못 채운 채 1974년 8월 9일 사임했다.

아메리칸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고 있는 알리샤 셰퍼드가 2007년에 낸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WOODWARD AND BERNSTEIN- Life in the Shadow of Watergte)은 바로 그 과정을 우드워드와 번스틴의 캐릭터와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예일대 졸업에 해군 중위 출신의 전형적인 백인 엘리트 우드워드와 장발에 줄담배를 피우는 삐딱한 유대인 대학중퇴자 번스틴의 전혀 상반되는 캐릭터가 워터게이트를 매개로 최상의 조합으로 변모해가는 과정, 그리고 제대로 알려진 적 없는 출세 이후 그들의 인생유전이 중심을 이룬다. 마지막 장에 미국 언론 사상 최대의 미스터리였던 ‘딥 스로트’, 곧 결정적인 국면에 우드워드를 도와줬으나 33년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정부 고위 관계자(연방수사국·FBI 2인자 마크 펠트)의 커밍아웃 과정을 따로 다뤘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9. 04. 11) 미 언론 키운 한마디 “오케이, 보도합시다”
<‘워싱턴포스트’ 만들기>의 원제는 <멋진 인생>(A GOOD LIFE: Newspapering and Other Adventures). 편집국장, 편집인으로 닉슨 정부에 맞서 싸우며 오늘날의 <워싱턴포스트>가 있게 만든 또 한 사람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 주역 벤저민(벤) 브래들리의 자전적 회고록이다. 1971년 6월13일 <뉴욕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폭로한 초대형 특종을 했을 때를 브래들리는 이렇게 회고한다. “<뉴욕타임스>는 그 연구보고서 한 부를 입수해 10여명의 민완기자와 에디터들을 석 달 동안 투입한 끝에 10여 꼭지의 기사를 만들어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경쟁지 기사를 베껴 쓰는 창피스런 입장이었다. 우리는 문단을 바꿀 때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우리 눈에만 보이는 피가 흘렀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법무장관 존 미첼이 보도를 전면 중단하고 랜드연구소 군사전문가 대니얼 엘스버그가 빼낸 7000쪽에 달하는 자료를 모두 국방부에 넘기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주춤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 틈에 같은 내용의 4000쪽짜리 보고서를 긴급 입수해 닷새 뒤 실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 조처를 의식한 변호사 등 일부 간부들이 보도에 강력히 반대해 일대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때 대표적 보도 강행론자가 브래들리였고 도쿄 특파원을 지낸 돈 오버도퍼도 그의 편이었다.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은 처음엔 망설였으나 마침내 “오케이, 갑시다. 보도합시다”라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브래들리는 그 한마디가 “워싱턴포스트의 사풍을 완전히 바꿔버렸다”고 추억했다. “(그 한마디로) 새롭고 독립적이고, 단호하고, 자신있게 바꿔버린 <워싱턴포스트>를 모든 편집자와 기자들이 얼마나 각인하게 될지 우리는 몰랐다. 우리는 대통령과 대법원과 법무장관에 단호하게 맞서게 되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신문은 흔들리지 않고 원칙에 따라 나아갔다.” <워싱턴포스트>는 그 다음날 법원의 게재 금지 명령이 내려지기 전 한 차례 더 보도를 강행했다.
세기적인 워터게이트 특종은 그때의 경험이 토대가 됐다. “사내에서는 펜타곤 페이퍼의 경험으로 그레이엄 일가와 편집국의 신뢰가 견고해졌다. 또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명감을 공유하게 됐다. 펜타곤 페이퍼 이후 우리가 함께 극복하지 못할 어려운 결정은 없었다.” 하지만 군소신문이었던 <워싱턴포스트>가 미국을 대표하는 정론지로 거듭난 결정적인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워터게이트 특종.
브래들리에 따르면 워터게이트 특종은 언론을 국가적 존경을 받는 지위로 밀어올렸고, 특히 <워싱턴포스트> 기자들, 그중에서도 보브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은 미국 젊은이들에게 영웅으로 비쳤다. 고교와 대학 진로를 앞두고 고민하던 학생들은 언론에 매료됐고 언론학부 등록생 수가 치솟았다. “누구보다 언론을 싫어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닉슨이 가장 유능하고 젊고 강인한 활동가들을 언론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였다.” 그 사건 뒤 개혁적 정치인들이 등장하게 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워런 하딩 대통령 때 권력에 빌붙다가 몰락을 자초했던 <워싱턴포스트>는 국민과 민주주의 편에서 권력에 맞붙어 싸움으로써 재생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의 전체 윤곽은 우드워드, 번스틴의 삶에 초점을 맞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보다는 여러 사건을 두루 다룬 <‘워싱턴포스트’ 만들기>가 간결하지만 오히려 더 잘 요약하고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