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를 읽다가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물론 책에 관한 것이고, 세계 각국의 베스트셀러로 2006년 한해를 되돌아보는 기획기사인데, 그 중 독일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재작년에 방한한 바 있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역사철학서 <분노와 시간>이다. <냉소적 이성비판>으로 명성을 얻은 바로 그 철학자의 최신간이다. 기사를 봐서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책인데 내년에 번역돼 나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전에 1권만 나오고 소식이 없는 <냉소적 이성비판> 2권이 먼저 번역돼 나와야겠지만.  

 

 

 

 

한겨레(06. 12. 29) 베스트셀러로 짚어본 2006 세계…유럽편

독일에서는 가을 출간된 <분노와 시간>(Zorn und Zeit)이라는 에세이 형식의 역사 철학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철학서가 베스트셀러에 들기 힘든 건 어디나 매한가지이지만, 이 책은 독일 출판계에서 하나의 신화를 이뤄냈다(*주어캄프출판사에서 출간했고 356쪽 분량이다).

 

 

 

 

 

 

 

 

 

저자인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68세대로 칼스루에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텔레비전 철학토론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은 그는 <냉소적 이성 비판>으로 이미 1980년대에 베스트셀러 철학서를 내놓았다.



‘정치, 심리적 시도’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세계 역사를 심리, 인류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라는 감정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즉 억압되어 쌓인 분노가 근대 해방운동, 지난 세기의 전체주의까지의 역사에 기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서구사회의 역사는 ‘분노 감정의 경영관리’의 역사라고 말한다. 공동체의 분노의 집합은 재화의 축적에 비유된다. 대표적인 예로, 레닌의 코민테른은 인민들의 분노가 모여 작용하는 ‘분노의 세계은행’이다.

반면, 이슬람 세력은 차세대 역사 변화의 원동력이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왜냐면 이슬람은 엄청난 선교력이 있고, 특히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의 좌절한 젊은 남성들이 서구세계에 대해 갖는 시기심과 분노는 역사를 바꿀 만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슬로터다이크는 이들이 정치적 저항세력으로서 한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이슬람 세력은 정치·문화적 알맹이가 부족해 공산주의 같은 ‘저항세력의 세계은행’을 설립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진단한다.(베를린/한주연 통신원)

06. 12. 29.

 

 

 

 

P.S. 출간돼 있는 역사철학서 몇 권을 나열해본다. 슬로터다이크의 '역사철학'은 아마도 이 계열의 맨마지막 장에 와야 할 듯싶다. 그리고, '냉소적 이성' 외에 '분노'란 말은 슬로터다이크의 키워드로 더 등록해야겠다. '분노의 관리로서의 세계사'는 '자유의 확장으로서의 세계사'(헤겔)와 짝패를 이룰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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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2-29 16:03   좋아요 0 | URL
'분노라는 감정의 경영관리'라는 그의 역사인식은 니체-하이데거의 오묘한 결합으로 보이네요. 덤으로, 니체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는 뤼디거 자프란스키와 함께 '철학 사중주'라는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로쟈 2006-12-29 16:45   좋아요 0 | URL
독일에선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이기도 한가 봅니다...
 

지난주부터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정작 읽어보지 못하고 있는 책이 있다. 나타샤 시네시오스의 <거울(Mirror)>(2001)이 그것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타르코프스키의 <거울>(1975)에 대한 '깊이 읽기'이자 '자세히 읽기'이다. 저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시나리오 선집(Andrei Tarkovsky: The Screenplays)>(2003)의 공역자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예고한 바 있는데, 오늘은 타르코프스키가 20년전에 세상을 떠난 날이다. <거울>을 들고 다닌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연말에 짬을 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아니, (물리적) 시간조차도 연말에는 더 빨리 내빼는 게 아닌가 싶다(부끄러워서?). 책은 문고본 판형의 120쪽 분량인데, 주된 내용은 <거울>의 제작과정과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돼 있다. 마지막 장은 이 영화의 수용에 관한 장이다. 아무려나 영화 <거울>에 대한 가장 상세한 안내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 책의 존재는 사실 몇 달전에 알게 되어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었고 이달 중순에 대출할 수 있었다. 같이 주문한 책이 댓권 되는데 모두 I. B. Tauris출판사에 내는 'KINOfiles Film Companions' 시리즈의 '러시아영화' 편에 들어 있는 책들이다(전체 시리즈의 책임자인 리처드 테일러 자신이 러시아영화 전문가이다). 현재까지는 10편의 영화를 다룬, 10권의 책이 출간돼 있다. 그 10편의 영화는 차례대로, <전함 포템킨>, <카메라를 든 사나이>, <위선의 태양>, <참회>, <침대와 소파>, <거울>, <학이 날다>, <리틀 베라>, <희생>, <폭군 이반> 등이다. 그러니까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각각 2편씩 목록에 포함돼 있다(<침대와 소파>만이 내가 처음 접하는 영화이다).  

이후에 한 문단을 더 적어내려갔는데, 알라딘의 서버가 다운되는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어쩌겠는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여하튼 20주기를 맞이하여 경건하게 타르코프스키와 그의 영화들을 한번쯤 돌이켜보면 좋겠다는 것. 아래 사진은 <거울>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실수를 한 줄 알고 인쇄소로 바쁘게 뛰어가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 촬영장면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게 된다(*자고 일어나니 이미지가 먹통이다. 영화의 시작 장면으로 바꿔놓는다. 남편을 기다리던 젊은 아내, 젊은 엄마의 뒷모습으로. **또 먹통이어서 다시 교체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어머니-시간의 뒤통수를 좇아가며 그것을 '봉인된 시간'(=영화) 안에 성공적으로 보존해놓았지만 극장 밖의 우리는 매번 놓치거나 헛걸음만 하게 된다. 시간은 언제나 발빠르게 우리를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몇 자 적으려던 생각도 저만치 뒤처져 있다. 세밑의 시간은 왜 그리 걸음이 빠른 것인지(부끄러워서일까?). 이제 곧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될 시간, 2006년에 작별을 고한다. 아듀, 아듀오스, 우리는 또 한 해를 살아냈다네!...

06. 12. 29-30.

 

 

 

 

P.S. 국내에서 읽어볼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 책은 여전히 3권 그대로이다. '러시아 영화 시리즈'에 대한 기대는 한참을 더 미뤄야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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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0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6-12-30 09:38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을 읽고 싶네요. 저 시리즈들이 번역이라도 되어 나온다면 좋으련만..

로쟈 2006-12-30 12:18   좋아요 0 | URL
**님/ 100불이면 좀 쓰셨군요.^^ 전 국내에서 출시됐을 때 구입했는데.
수유님/ 누가 출간하겠다고 하면 제가 번역이라도 하고 싶은데요...

수유 2007-01-01 11:25   좋아요 0 | URL
정말 로쟈님이 번역하셨으면 좋겠네요. 출판사를 세울만한 역량이 된다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그런 꿈을 꾸어보아도 좋을것 같아요.
 

지난달인가 MBC에서 창사특집 다큐멘터러로 '러시아 혁명' 편을 방송한다는 얘기를 후배로부터 들었지만 결국 한번도 보지 못했다. 강의자료로도 요긴할 듯싶어서 녹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냥 흐지부지됐다. 오마이뉴스에 이 다큐를 직접 제작한 한홍석 PD와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길래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특집다큐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보든가 해야겠다. 다큐에서 공개된 아래 사진은 박헌영과 그의 딸 박비비안나라고.  

오마이뉴스(06. 12. 28) "왜 러시아 혁명이냐고? 분단국이니까"

2006년이 저무는 시간, 지나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올해도 TV의 위력은 대한민국에서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도 친숙한 매체로 TV는 자리했다. 온갖 종류의 드라마뿐 아니라 월드컵 축구 등을 전달한 TV는 여전히 사랑받은 매체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TV에서 어땠을까? 보통 야심한 밤에 편성되는 시간표가 웅변적으로 말해주듯,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소위 시사 교양물들은 우리나라 TV의 비인기 종목이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우리 문화적 역량의 지표로 다큐멘터리가 자리매김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한 예가 지난 11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근 한 달간 M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5부작 <세계를 뒤흔든 순간- 러시아 혁명(한홍석 연출)>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17년 혁명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혁명이 다다른 곳까지를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담아냈다. 깊이와 재미는 물론이고, 충실한 자료화면, 고증을 통한 역사 재연, 4개국을 넘나들며 직접 따온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해설 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춘 빼어난 수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혁명>의 진가는 우리의 시각으로 '러시아 혁명'을 조명했다는 데 있다. 19세기 말 몰락해가던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끔찍한 테러가 만연하던 스탈린 시대까지, 그 먼 북구의 땅에도 '우리'는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의 꿈을 꾸며 192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또 소련의 각 지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우리 동포들이 스탈린 숙청의 희생물로 스러졌다. 박헌영의 딸은 아직도 그곳에 살며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런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신자유시대를 사는 21세기의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대미문의 노동자 혁명이었던 '러시아 혁명'의 이상은 본산지에서조차 실패했는데 말이다. 재미있고 내용도 알찬 이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신자유경제 체제와 분단 체제라는 두 짐을 걸머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1년간의 기획, 세 대륙을 돌며 100일에 걸쳐 진행한 촬영, 그리고 지난 두 달 반을 '노가다' 모드로 편집실에 틀어박혀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주인공, 한홍석 PD를 지난 12월 19일 오후 서울 남산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러시아 혁명>이 종영되고 이틀 후다. 다음은 한홍석 PD와 나눈 일문일답.

- 대장정을 끝낸 소회는?
"아직도 끝났다는 실감이 안 난다. 너무 큰 주제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맡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응도 아직 잘 모르겠다. 편집실에서만 두 달 반을 지내서 시청자들 반응은커녕 동료들의 반응도 아직 모른다."

- 이 다큐멘터리를 자평한다면.
"정치사적 흐름을 어느 정도 정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청자들에 대한 서비스라 생각한다. 이걸 보고 이 주제에 흥미를 느껴 전문적인 관심까지 두게 된다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성상 빠진 부분들이 안타깝다. 정말 많이 촬영했는데…. 러시아 문화·사회 문제 쪽으로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시간 제약 때문에, 그리고 현실의 제약 때문에 완성본에 결국 포함하지 못한 것들이 안타깝다."

- 이 작품을 기획하며 세웠던 목표나 의도는 무엇인가?
"이전에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다뤘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러시아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까지 미국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다. 우리의 분단 체제를 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0~50대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러시아 혁명에 대해 많이 듣고 읽었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책으로만 읽었던 트로츠키가 이렇게 생겼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이런 사건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40~50대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한다(웃음). 실제로 <러시아 혁명>을 40~50대들이 많이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재미'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역사는 재미있는데, 이제 '재미'가 뭔지도 헷갈리지 않은가. 역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발전시키고자 '장르 실험'을 했다. 러시아 현지 배우들을 출연시켜 역사를 재연했다. 역사를 좀 더 생생하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것이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실험적 형식은 아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현지 배우들을 고용해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역사상 처음이다."

- <러시아 혁명>을 만들기 전과 만든 후, 러시아 혁명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게 된 지점이 있는지.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다양한 가치는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아직도 효용성이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은 몰락했지만 사회주의 이상이나 평등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지고지선의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생각이다. 지금 러시아에서 아직도 구소련 체제를 그리워하고 그 때의 좋은 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들이 반동적이어서가 아니다."

- 매편 폭넓은 학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영국·미국 학자들 수십 명이 등장했는데.
"섭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연락을 취하면 그쪽에서 놀라고는 했다. '왜 한국에서 러시아 혁명을?'이라며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면 나는 항상 설명했다. '우리는 아직 분단국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금방 이해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방송국 게시판에 보면 '왜 러시아 혁명을 다루면서 러시아 학자들보다 영미 학자들이 더 많으냐'고 불평하는 의견들이 있었다. 이유는 이렇다. 러시아는 소련 체제를 거치며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관변학풍이 심했다. 그에 비하면 영미 학계에서는 지난 몇십 년간 광범위하게 축적된 객관적, 역사적 학문 전통이 있다. 대가도 그쪽에 분포되어 있고. 그들은 우리와 인터뷰를 아주 즐겼다. 소련이 붕괴한 후 영미권에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 요즘 침체해 있었던 터라 우리와 인터뷰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다."

- 그 학자들을 전부 다 직접 만났나?
"그렇다. 미국 학자들의 경우는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학자들을 만나느라 미국을 횡단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 보스턴으로 나왔다. 미국 학자들은 쉬웠다. 연락만 되면 스케줄이 허락하는 한 쉽게 인터뷰에 응했다. 도리어 러시아 학자들 중에 인터뷰를 거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미국 학자들은 인터뷰를 즐기면서 진행했다. 그들은 말을 시키면 자기가 즐거워서 마구 말을 하는데 보고 있으면 흥이 날 정도였다."



- 박헌영의 딸이 구소련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어떻게 찾아냈나?
"사실 박헌영 딸에 대한 소식은 몇 년 전 국내 일간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래서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외에도 스탈린 딸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연락처까지 알아내 다섯 번인가 부탁을 했지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됐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우리와 인터뷰하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 총5부 중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평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4부가 가장 인상적이다. 관심도 가장 많았고. 4부는 러시아 혁명 후 진행된 소련의 산업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국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다."

- 차기 작품도 기대된다. 어떤 걸 구상하는지.
"구소련과 한국 전쟁을 묶어서 다뤄보고 싶다. 가제는 '스탈린과 한국전쟁: 1945-1953'. 러시아에서 한국 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이 요즘 많이 공개되고 있다. 이걸 바탕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청자 요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나는 요구한다!). MBC가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그것이 사회 공익에 얼마나 기여 하는가도 보지만 시청률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즘은 시청자가 원하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 시대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드라마 왕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드라마가 강세고 세계사 시리즈 같은 교양물은 점점 위축되고 약화하여가는 상황이다. 시청자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윤새라-조경국 기자)

06. 12. 29.





 

 

P.S.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이 흥미를 끈다. '스탈린과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것. 시청자의 요구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요구해줄 수 있다. 러시아쪽 자료들이 다수 공개되고 있는 걸로 알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의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된다(재작년 러시아 체류시에는 러시아 TV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잠시 볼 수 있었다. 김일성 정권의 성립과정에 러시아가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생존하고 있는 고위 관계자들 인터뷰와 함께 자세히 보여주었었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관한 자료/도서들은 얼마간 나와 있다.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풀무질, 2003-4)를 아직 갖고 있지 않은데, 그게 좀 아쉽군. 거기에다 따져보니까 러시아쪽 시각의 혁명사 소개는 빈곤한 듯하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시대에 대한 관련서들은 러시아나 영미권에서 차고 넘친다. 가장 정평있는 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어권 저작으론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의 저자인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 같은 책들이 기본서로 번역/소개되면 좋겠다('간략한 역사'라고는 하지만 430쪽이 넘는 분량이다). 왜냐고? 우린 아직 분단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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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29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강력히 요청합니다. 이거 MBC에 '스탈린과 한국전쟁' 다큐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라도 해야 할까요... 여튼 정말 간만에 보는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가 만든' 좋은 다큐인 것 같아 기분이 뿌듯하네요...^^

기인 2006-12-29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퍼갑니다.^^ 이 다큐 다운받아서 봐야겠네요.

로쟈 2006-12-3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내년엔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알라딘의 힘'을 보여줘야 할까요.^^

sb 2006-12-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MBC에 [다시보기] 서비스가 있습니다. 저도 제때 보지 못해서 이제서야 봤지요. 한번 정리하려던 참에 반가운 글입니다.

로쟈 2006-12-3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료' 다시보기인가요?^^

aporia 2006-12-3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글을 보고, 왠일이야 하며 우선 1편 다운해서 봤습니다. 소장할 가치도 있을듯해서...

유료이기 하지만  "http://www.wedisk.co.kr/" 참고하시길^^


sb 2006-12-31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C의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유료서비스이지요. 한편 보는데 500원입니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world/russia/index.html"

aporia 2006-12-3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디스크 광고같아 좀- 거시기하네요. 용량이 큰 2/3편(70케시)을 제외하고는 각 40케시네요. 넘 ~ 알찬 정보죠.ㅋ

로쟈 2006-12-3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아무려나 필요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거니까 다행입니다...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2006) 개정판이 출간됐다. 지난 1983년 초판을 찍은 이후에 20쇄를 거듭 찍었다고 하는 이 책은 예술철학에 관한 국내서로서는 단연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초판이 나온 지 벌써 23년이 넘었고, 그동안 예술계에도 다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내용에 있어서 책의 후기에 실은 최근의 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를 원래의 내용을 새롭게 요약하는 의미에서 추가한 것 이외에는 개정판의 내용이 초판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적어도 예술의 개념의 철학적 정의에 관한 한 나의 생각에는 핵심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어서 한자들은 모두 한글로 바뀌었고 도판들도 (비록 흑백이긴 하지만) 더 보충되었다. 게다가 별첨된 논문(27쪽)까지 보태져서 분량은 100쪽 가량 늘어났다. 10년도 더 전에 이미 두번쯤 읽은 책이지만 이번에 덧붙여진 논문에 대한 흥미도 있고 해서 나는 책을 다시 구입했다(이전에 갖고 있던 책은 박스 보관도서이다).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라고 제목이 붙어 있긴 하나 그 부제는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의 개념'이며, <예술의 종말 이후>는 지난 봄에 열심히 읽은 바 있는 아서 단토의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그 '단토'란 이름은 박이문 예술철학의 '기원'과도 연관되는 이름이다. 저자는 초판 서문에 이렇게 적었었다.

"예술이 갖는 신비한 힘은 무엇일까?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나는 지난 약 10여 년 간 예술철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가르쳐왔다. 이런 물음에 대해 하나의 일관성 있고 통일된 대답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1977년 여름 '인문학국가연구비'를 받고, 단토의 주도하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렸던 12명의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들의 두달 간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난 후였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단토나 디키의 새로운 이론에 접하게 되었고 그후 대충 그런 테두리에서 예술에 대한 총괄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개정판, 10쪽)

그러니까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박이문-단토-디키'의 삼각형이다('트리오'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박이문 예술철학은 미국의 두 현대 예술철학자의 영향/압력하에 그들과의 이론적 긴장/대결을 자양분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해서 나의 생각으로 <예술철학>을 읽는 중요한 독법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와 조지 디키의 <예술사회> 등과 같이 읽는 것이다(예술제도론자인 디키 또한 그 책에서 단토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쓴 바 있다). 이론은 언제나 그것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을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미학 연구자' 진중권은 뒷표지에 새겨진 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예술철학>은 단토의 생각에서 출발하되 '양상 논리'의 관점에서 예술을 그와는 다르게 정의하려는 시도다. 텍스트는 자기의 삶을 산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예술의 정의로 제시하는 '가능세계'란 말 속에서 '가능성'을 '잠재성'으로 살짝 옮겨놓으면, 20년 전에 쓰인 책이 디지털 문화 속에서 새로이 풀어놓는 의미에 문득 놀라게 될 것이다." 

예술철학에 초면인 독자들도 이 분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평이하고 명쾌한 언어로 씌어진 이 입문서의 일독을 권한다.

06. 12. 28.

P.S. 개정판의 서문에는 출간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많은 이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멋쩍게도 '아서 단토Arthru Danto'라고 병기된 영어 이름에서 오타가 났다('Arthur Danto'이다). 이런 걸 '삑사리'라고 부르던가. 학술지 편집에 오래 관여하다 보니 책을 펼치면 오문/오타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건 또 '삐딱이'라고 불러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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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2-2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박이문 선생의 글에 대해서는 학부 1학년 때 안 좋은 추억(비문 투성이의 글을 읽다가..) 때문에 그 이후로 접하지 못했는데 한 번 읽어봐야 겠네요.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

로쟈 2006-12-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학과현실>에서 데리다를 추모하는 글을 읽으며 좀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아무래도 연세 탓인 듯). 한데, 그걸 제대로 교정보지 않는 편집자들의 직무유기가 더 무책임하다는 생각입니다...
 

'돈이냐 행복이냐'란 물음은 '돈이냐 사랑이냐'란 물음만큼이나 구닥다리이지만, 연말정산의 시즌이 돌아오면 직장인들은 한번쯤 생각해보는 주제일 법하다. 평소 연소득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던지라 '연말정산'을 해본 적이 없지만 올해엔 한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까닭에 몇 가지 서류들을 떼고 정보/자료를 입력하고 하는 일들을 해야 하게 생겼다. 그게 오늘의 일과 중 하나이다. 때마침 지난주에 출간된 <행복경제학>(미래의창, 2007)에 대한 리뷰들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고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본다(책의 출간일자는 2007년 1월 15일로 돼 있다. 이맘때면 '미래의 책'들을 앞당겨 보게 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새롭다. 2007년의 책들!). '돈이냐 행복이냐'란 제목의 '게으른' 리뷰를 쓰면 왜 안되는지에 대해서. 책의 부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얼마가 필요한가'이다.

이데일리(06. 12. 27) 돈이냐 행복이냐

돈이 없는 사람은 항상 돈을 생각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돈만 생각한다." 억만장자로 유명한 폴 게티의 말이다. 우디 앨런은 "돈은 가난보다 좋다. 오로지 재정적인 이유뿐이라고 해도.."라고 말했다. 돈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게 바로 돈이다. 이미 돈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다.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애쓰고, 쓰는 데서 희열을 느끼며, 벌어놓은 돈을 더 불리는데 집중한다.

실제로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도, 노후를 위해 들어놓은 보험이나 연금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돈이 있다면 이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일종의 안도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보다 두배를 번다고 반드시 두배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다. 이처럼 당연하지만 아주 진부한 명제를 저자는 다양한 연구통계와 사례, 맛깔스런 언어로 버무려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겨우 이 정도라면 책은 읽으나 마나한 것 아닌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갑부들 중 설문에 응한 억만자들의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소 몇 마리가 전부인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백만장자 보도 셰퍼와 행복하기 위해 돈과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마저 버린 하리데마리 슈베르머의 대조적인 삶이 던져주는 의미도 크다.

미국의 노숙자가 인도의 노숙자보다 열배나 부유하지만 덜 행복한 이유도 흥미롭다. 미국의 노숙자들의 경우 배우자나 자식이 없거나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인도의 노숙자들이 더 가난한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게 느끼지 않고, 그만큼 행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빌 게이츠의 재산이 매년 자동적으로 몇 억 달러씩 늘어난다고 해도 줄곧 행복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혹여 큰 실수로 증가하는 흐름이 역전된다면 빌게이츠 역시 신년 보너스가 취소된 직장인처럼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럴듯한 말의 조합으로 여겨질 법한 `행복경제학`이란 이 책의 제목은 실제 학문이다. 행복경제학의 개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은 1930년대 혁명적인 논문을 통해 돈과 행복의 관계를 제시했고, 최근 행복경제학자들에 의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저자인 하랄드 빌렌브록(1967- )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언론인으로 일하고 있다. 유력 잡지에 경재관련 현장 보고서를 게재해 여러차례 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독일 최고의 경제 언론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양미영 기자)

문화일보(06. 12. 22) 무소유와 백만장자 사이 행복과 돈의 난해한 함수

행복과 돈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돈만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까. 아니면 돈이 없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까. 현실론자들은 당연히 돈이 있어야, 그것도 충분히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낭만적 또는 관념적인 이들은 돈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책은, 돈과 행복 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다. 결코 과도한 현실론이나 관념론에 빠지지 않고,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례들을 통해 돈과 행복이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이란, 단순히 행복에 관한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분야가 아니다. 소득과 재산이 삶 속에서 실제로 느끼는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물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지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이를 전공으로 하는 학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점차 주목받고 있는 학문 분야다.

책은, 두 가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행복과 돈의 상관 관계를 살핀다. 우선,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머니 코치’ 보도 섀퍼다. 그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가난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사는 동안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메시지로 섀퍼는 수백만명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스스로 백만장자가 됐다. 하지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또 다른 예는, 행복하기 위해 돈 없는 삶을 선택한 하이데마리 슈베르머다. 그녀는 돈, 신용카드,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등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선택한다. 단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일을 해준 대가로 충당할 뿐이다. 또는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같은 삶을 택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책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함을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은 부자들 중에 있다’는 주장에 강하게 긍정한다. 하지만 ‘재정적인 자유를 얻는다면 누구나 행복해진다’는 명제엔 확실하게 부정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돈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국민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마디로 돈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돈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책은 증명하고 있다.(김영번 기자)

06. 12. 28.

 

 

 

 

P.S. 그러니까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돈이냐 행복이냐' 따위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하며, 다만 이때의 행복은 상대적이어서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다(인도의 노숙자가 미국의 노숙자보다 행복하다!). '가난한 날의 행복'도 있는 것이지만 가난 때문에 더 행복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게 일상적 삶의 감각이다.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은 과거에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교과서적' 내용과 무관하게 내가 기억하는 행복은 돈과 관련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내가 초등학교때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어느 해 연말인가 보너스를 포함해서 50만원의 월급을 받아오신 적이 있었다. 사상 '최고액'을 봉투에 두둑히 담아 들고 오신 아버지나 그걸 받아드신 어머니나 그날만큼은 더없이 행복해 하셨다. 아마도 그날 아버지는 북어 안주에 한잔 하셨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돈 자체가 행복을 대신해주는 건 아니다. 그 돈으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걸 장만해줄 수 있다는 부듯함이 행복의 원천이었던 것. 적어도 '소득 1만달러'가 되기 전까지는(사실 이 '1만 달러'는 민주주의의 경제적/심정적 토대이기도 하다).

그 '1만 달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연소득 3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가리킬텐데,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까 그 정도 소득이면 60억 세계 인구 가운데 상위 6% 부근이라고 한다. 좀 넉넉하게 잡아서 10%라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90%는 아직도 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는 계층에 속한다. 하므로 '돈이냐 행복이냐' 같은 '배부른' 소리는 자제하는 게 옳겠다. 

내 생각에 '근대소설'은 그 90%를 위한 문학 형식이었다(먹고살 만한 10%에게 필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이다). 우리가 1인당 연평균소득 3만불 시대로 진입한다면 '소설'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가난'이 빠진 문학은 김 빠진 사이다만큼이나 밋밋하다. 물론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고민할 수도 있고, 우아 떠는 소설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문학정신'을 운운하는 일은 삼가하는 게 좋겠다.

어쩌다 이야기가 문학으로 번진 김에 나로선 미스테리하게 여겨지는 시 한편을 인용해본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인가에도 실렸(었)고 수능 문제로도 한번 출제된 바 있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이다. 얼마전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를 읽어보니까 이 시는 시인이 "남을 위해 쓴 유일한 시"라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인이 자주 드나들던 동네 술집의 딸과 그의 애인. 남자가 도피중인 노동운동가라 결혼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신경림이 직접 식을 준비해 주례를 섰다. 그 때 선물한 축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다. 지금 부부는 인천에서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나도 젊을 때 그런 사랑을 한 경험이 있어요. 실패한 첫사랑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오버랩된 거지. 남을 위해 썼지만, 결국 담은 정서는 내 거였어.” 일화를 알고 나서 읊는 시는 더욱 애잔하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이 가슴까지 전해온다. 이것이 신경림이 말한 ‘제 맛’인가 보다. 깊은 울림을 독자와 나누기 위해, ‘가난한 사랑 노래’ 전문을 싣는다."(06. 12. 08)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란 마지막 구절만을 놓고 보아도 이게 어떻게 '결혼식 축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실패한 첫사랑의 시'가 말이다!). 언젠가 중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히고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라는 게 이 시의 메시지라면 말이다(이 시의 '깊은 울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시를 읽히면서 '자발적 가난'을 운운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시가 희망을 노래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가난의 울분과 한을 노래한 시를 굳이 모든 학생들이 읽고 음미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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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2-28 16:00   좋아요 0 | URL
'평균치'의 삶도 꾸려가지 못하리라는 위협/죄의식(!)과 '행복'이라는 어떤 도달해야 하는 시대적 이상...초자아가 행복의 자리로 귀환하고 있다는 지젝의 지적이 떠오르네요.

마노아 2006-12-28 22:05   좋아요 0 | URL
오늘 이 페이퍼 유독 마음에 와 닿아요. 내가 중학교 때에 이미 이 시를 절감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싸아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6-12-29 16:51   좋아요 0 | URL
suture님/ 요즘은 '행복' 또한 '자유'나 '평등'만큼이나 모호하고 무의미한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노아님/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