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 깁슨의 최신 화제작 <아포칼립토>(2006)를 봤다. 기독교의 기원이자 '유대문명 잔혹사'라 할 만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 이어서 '마야문명 잔혹사'를 다룬 <아포칼립토>는 살육의 피로 흥건하다. 마야의 희생제의에서 살아있는 제물의 심장을 꺼내고 목을 치는 장면 등은 심약한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하다(바타이유라면 흥분했을 듯하지만). 특이한 건 고대 히브리어, 아람어 등이 사용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마찬가지로 <아포칼립토> 또한 대사는 마야어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비록 아카데미상 후보에 들지 못했지만 두 영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쪽으로 분류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멜 깁슨의 고집과 야심이 읽힌다(그는 각본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원인을 문명(과 종족) 내부에서 찾고 있다는 점. 멜 깁슨의 철학, 혹은 인류학인가?

영화 자체는 호오가 갈리고 있는데,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들이 이 영화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불만스러워한다는 기사들도 눈에 띈다. 야생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화면이 그런 약점을 카바해줄 수 있을까. 알라디너라면 마야문명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어볼 생각을 하는 것으로 영화감상을 대신해도 무방하겠다. 아래는 이 영화의 스펙터클에 담겨있는 은근한 '백인우월주의'를 의심하는 리뷰기사이다(영화잡지들의 리뷰기사는 내주판들에 실릴 듯하다). 

경향신문(07. 01. 25)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백인우월주의 의심하다

미국의 생리학자이자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문명의 붕괴’(2004)에서 마야문명의 붕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문화적으로 발달한 창의적인 사회도 붕괴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마야에서 얻을 수 있다는 그는 문명이 붕괴되는 요인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하고 마야문명은 이 중 4가지를 충족시킨다고 지적했다. 삼림을 해친 데 따른 ‘환경파괴’, 장기간 지속된 가뭄이라는 ‘기후변화’, 부족간 분쟁이 이어진 ‘적대적 이웃’, 지배세력이 경쟁적으로 전쟁에 매달리고 기념물 건립에만 몰두한 데 따른 ‘사회 구성원의 반응’이 그것이다. ‘우호적인 교역상대의 지원이 줄거나 중단된 경우’만 제외하고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겐 낭만적인 관광지로만 인식돼온 수백년 전 마야문명에 대한 분석이지만, 4가지 모두 옛날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자원의 부족-삼림(환경) 파괴-이로 인한 가뭄(기상이변)-이에 대한 일시적 해결책인 전쟁(분쟁) 빈발의 악순환으로 마야문명의 붕괴 과정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걱정은 21세기 인류문명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로 논란의 칼끝에 섰던 배우출신 감독 멜 깁슨은 마야문명의 붕괴 직전을 배경으로 한 신작 ‘아포칼립토’로 다시 한번 첨예한 논쟁을 촉발시킨다. 인류 역사상 야생과 문명이 가장 강렬하게 충돌했던 곳 중 한군데로 관객을 이끈 영화는 지나칠 만큼 사실적으로 당대의 야만을 재현한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벽화와 문헌 등을 통해 재구성한 마야문명의 잔혹사는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저서 ‘살육의 문명’(2002)에 따르면(*<살육과 문명>이다) 당시 이 지역 지배세력들은 “포로들을 제단 위 돌에 눕히고 돌칼로 가슴을 갈라 고동치는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친 다음 시신을 계단 아래로 걷어찼다.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살자들은 포로들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얼굴 가죽을 벗겼다.” ‘아포칼립토’는 마야문명 지배세력의 이같은 제사 장면을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이어 사지에서 겨우 빠져나온 주인공이 목이 잘려나간 시체들의 밭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에 이르면, 아무리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하더라도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가 이래도 되는지 싶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이와 비슷한 ‘시체들의 밭’을 현대의 내전 소재 영화들에서 종종 본 적이 있다. 냉전시대 캄보디아 내전을 그린 ‘킬링 필드’(1984)부터 보스니아 내전이 배경인 오락영화 ‘에너미 라인스’(2001), 최근 르완다 내전을 다룬 ‘호텔 르완다’(2006) 등 인종(사상)을 청소하며 자행된 무차별 학살이 이런 참혹한 광경을 낳았고 또 영화에 재현됐다. 가장 야만적인 사태는 한 사회 내의 ‘적대적 이웃’에서 비롯되며, 이를 고발 혹은 상품화하려는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이전에 내부로부터 붕괴된다”는 미국 역사학자 윌 듀런트의 말로 운을 떼는 영화 ‘아포칼립토’는 그런 점에서 화면상 잔혹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듯 보인다(*듀란트의 <역사의 교훈>(범우사, 1989)은 품절됐다). 논쟁은 여기서부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스페인의 아스텍·마야 문명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서구·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미국 언론과 평자들 사이에서 뜨겁게 일고 있는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데이는 저서 ‘정복의 법칙’(2006)을 통해 피지배인들의 이질적인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지배를 합리화하는 서구 침략의 역사를 비판한다. 중남미를 지배한 스페인 역시 현지인들의 제사 문화를 들먹이며 ‘야만을 문명화한다’고 주장했지만 데이비드 데이는 서구인들의 야만성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백인들이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수순을 밟아가는지를 살폈다.



‘아포칼립토’는 극중 제사를 관장하는 지배세력이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내세우며 다른 부족민을 권력 유지의 희생양으로 삼는 실상을 고발한다. 이것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침략자·독재자의 정복 논리이기도 하다는 풍자인지, 아니면 마야문명만을 대상으로 ‘미개인들의 말세’를 그린 것인지에 대해 영화는 똑부러진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극 종반부 스페인 에르난 코르테스의 무적함대로 보이는 백인들이 부자연스러우리만치 멋진 자세로 상륙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멜 깁슨 감독에 대한 의심은 짙어진다.

아름답고 양심 어린 영화로 국내에서 과대평가된 롤랑 조페의 영화들-‘킬링 필드’(1984), ‘미션’(1986), ‘시티오브조이’(1992)-처럼, 야생과 문명의 충돌을 다룬 영화들을 보는 관객은 소수의 백인이 의로운 일을 이끌고 다수 현지 유색인종들은 계몽과 개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인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꼼꼼히 뜯어보며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마야문명 속 선량한 부족의 한 청년이 호전적인 종족의 살육에 맞서 쫓고 쫓기며 가족을 지키는 이야기인 ‘아포칼립토’는 2월1일 개봉한다.(송형국 기자) 

07. 01. 27.

 

 

 

 

P.S. 찾아보니 국내 출간돼 있는 마야문명 관련서들이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개 품절된 책들이다. 가장 두꺼운 책은 존 핸더슨의 <마야문명>(기린원, 1999)이지만 이 또한 품절 상태다. 나로선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나 참조해봐야 할 듯하다.

P.S.2. 젊은 세대들에게 '잔혹사'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해줄 영화는 유하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이겠다. 잔혹사라고 해봐야 몇 대 때리고 맞는 정도이지만 젊은 치기에는 '잔혹사'라 불러봄 직하다(물론 영화의 배경은 70년대 말이니까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겐 <친구>와 마찬가지로 '사극'이라 할 만하다).

점잖은 세대인 내게 '잔혹사'를 각인시켜준 영화는 기억에 '이조 여인 잔혹사'란 부제를 달았던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1983)이다. "양가의 규수이나 집안이 가난한 길례는 세도가인 김진사댁의 망자와 혼례하여 청상과부 노릇을 하는데, 한생에게 겁간을 당하고 그것이 발각되나 시아버지의 관용으로 접포 표식을 달고 도망하게 된다. 길례는 채진사댁 머슴 윤보를 처음 만나 종이 된다. 하지만 이후 윤보는 자신의 가문이 복권된 것을 알고 길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고, 길례는 윤부자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나 아이가 없어 윤보는 첩을 들이는데 결국 윤보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길례에게 씨내림을 강요한다. 길례는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은장도를 받은 길례는 목을 매고 자살을 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느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던 이 영화는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였던 원미경의 청순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곧 그녀는 <변강쇠>(1986)에서 농염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여인들의 잔혹사'로 관통하기는 군부정권 치하였던 지난 80년대 한국영화의 책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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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7-01-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3번쯤 죽었다 깨도 못 볼 영화입니다. ^^;;
극장에서 예고편만 봐도 절래절래 고개가 돌아가더군요.

로쟈 2007-01-2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고편에 아마 다 들어가 있었을 듯한데요.^^

프레이야 2007-01-2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칼립토, 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1-27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형스크린으로 보신다면 심장은 집에 두고 가시길...

로쟈 2007-01-2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모호하지만 '면죄부'까지는 아닌 듯합니다.^^ 9.11 문제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이기 때문에요. 이라크나 빈 라덴은 그냥 미국 자체이 내적 분열을 외부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양날의 칼이란 생각이 듭니다...

sommer 2007-01-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의 구절을 빌려서 표현한 것처럼, 문명과 문명의 위상학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 속의 야만 사이의 관계로 더 나아가 문명의 붕괴 혹은 파국을 '지구제국'으로 확장시켜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역사 이후'의 관점에서 멜 깁슨의 영화는 역사 자체에 대한 우화로 읽히는 게 아닐까요?

sommer 2007-01-2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멜 깁슨이 분했던 '매드 맥스'까지 소급/퇴행해 갈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7-01-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멜 깁슨이 상상 이상의 야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고요. 뭔가 메시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영화를 기대해봐야죠...

소경 2007-02-03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일보와 비슷한 기사가 수록 되었군요. 참모님 방 청소하나 그부분 슬쩍 보았기는 했는데 고고학을 계속 전공하려는 입장에서 그러한 '우월주의'가 왠지 그렇게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허나 분명한건 요새 읽고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소개하는 벤야민의 견해가 오히려 '진리'처럼 느껴지더군요. 자세한 내용을 아직 이해 못하였지만 피지배 계급 입장으로의 역사의 복원이.
(잘 읽고 갑니다. 요새 몰래 제 작업장에서 몰래 간부 컴퓨텅에서 옮겨 잘 읽고 있습니다. 다만 사진은 여건상 보질 못하지.)

로쟈 2007-02-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군대 문서작성도 다 컴퓨터로 하겠지요? 오래전에 4벌식 타자치던 기억이 새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