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이 출간됐다. <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이 그것인데,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 이후 4년만이란다. 그 정도 터울이 마음에 든다. 게으르지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첫시집인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로부터 얼추 20년이다. 그렇게 시인도 독자도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싶다. 여러 평자가 지적하는 '관능미'를 나는 잘 모르겠고(마광수나 고종석, 그리고 이번에 발문을 쓴 김정환 같은 예찬론자가 아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통통 튀는 그녀의 시어들을 나는 좋아한다. 혹은 아래 서평에 나오는 '익살'이라고 해도 좋겠다. '리스본行 기차'를 탈 만한 여력이 없을 때 집어들 만한 시집이다.

세계일보(07. 12. 15) 황인숙 신작 시집‘리스본행 야간열차’

“지난밤,/ 리스본의 첫 밤이자 마지막 밤/ 파두 카페에 갔었다/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라는 말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 거듭거듭 노래했다/ 눈 밑살에 주름이 쩌억, 가는 듯했다”(‘파두―Dear Johnny’에서)

온건한 탐미주의자 황인숙(49) 시인이 이번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자명한 산책’(2003) 이후 4년만에 펴낸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에서는 포르투갈 민속음악 파두의 쓸쓸한 가락이 새어나온다. 수록된 57개의 가편(佳篇) 중 ‘파두’란 제목이 붙은 시는 세 편뿐이지만, 시가 비추는 리스본의 뒷골목 풍경과 파두의 애잔함 덕분에 가장 도드라진다.

파두는 포르투갈어로 ‘숙명, 운명’이란 의미다. 이름 뜻에서 감지되듯, 구슬픈 정조에는 귀족의 풍류가 아닌 서민의 애환이 담겨 있다. 시인은 파두를 들으며 이름 모를 포르투갈 시인의 운명을 상상한다. 시인 자신이 감내할 운명이기도 하다.

“마감 닥친 쪽글을 쓰느라 낑낑거리며/ 잡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부르짖는/ 가난하고 게으른 시인이/ 그 동네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비탈 좁은 계단길/ 한 좁은 아파트의/ 지붕 밑 좁은 방에서// (…) 다시 오를 길이라면, 내려가지 말자.”(‘파두―비바, 알파마!’에서)

생계 때문에 쓰고 싶지 않은 잡문을 쓰는 시인의 비애를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하지만, 좁은 계단길, 좁은 아파트, 좁은 방으로 상징되는 생활의 고단함은 익살에 섞인 자조를 들춘다. 시에 한생을 바치고 싶어도, 빵을 위해선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시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시인은 시를 포기하지 못한다. 시를 떠나려해도 결국 좁고, 거친 시인의 길을 다시 오른다. 그것이 시 쓰는 자의 ‘파두’다.

고양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면모는 여전하다. 황 시인은 ‘고양이 시인’으로 불릴 만큼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그는 1984년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했고, 전작에서도 ‘밤과 고양이’란 시를 선보였다. 그 속편 격인 ‘詩와 고양이와 나’에서는 “고양이는 몸을 비틀어 빼며/ 오직 권태뿐인 말간 눈으로/ 또 밥을 조르나/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하는데!”라며 직설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뜨거운 사랑 앞에선 시적 은유와 상징도 뒷전이다. 시인의 고양이 사랑은 프랑스 철학가 장 그르니에의 글귀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그르니에도 수필 ‘고양이 물루’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인용하며 고양이를 예찬했다.

시인은 ‘고양이를 부탁해’ ‘란아, 내 고양이였던’ ‘〈손대지 마시오〉’등에서 ‘영혼의 동반자’ 고양이에 대한 애착을 이어간다. 그는 노숙묘라 불리는 떠돌이 고양이까지 끌어안는다.

“잔인하고 무정한 이 거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가는 고양이들.// (…)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 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 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 그러면, 좋을까요?”(‘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예민한 침봉으로 세상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짚어낸다. 시집은 파두, 고양이의 아름다움 곁에 자잘한 일상의 눈부심까지 배치했다. 황 시인은 “이젠 ‘고양이 시인’이란 별칭이 지겹다”면서도 대화 중 고양이 이야기를 빠뜨리는 법이 없다.

“파두, 고양이 둘 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에요. 파두는 형체가 없는 노래이기 때문에 생명체인 고양이와 비교할 수는 없어요. 사귀어보면 알겠지만, 고양이는 정말 아름다운 동물이에요. 고양이 한번 키워보세요.”(심재천 기자)

한겨레(07. 12. 15) 고양이와의 공존을 부탁해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앞부분)

황인숙(49)의 1984년 신춘문예 등단작은 말하자면 ‘황인숙표 고양이’의 탄생 선언과도 같았다.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신경림이 남한강을, 김용택이 섬진강을 ‘전유’했듯이 황인숙은 고양이를 오롯이 제것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들은 그에게 시를 주었고 그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었다. 새로 나온 여섯 번째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고양이에 대한 시인의 동경과 찬탄은 잦아들 줄을 모른다.

처음 보는 새끼고양이에게 “어디서 왔니, 새끼고양아?”(<그 참 견고한 외계>)라고 말을 걸거나 홈리스 고양이의 새끼들을 보며 “고양아, 예쁜이들아!”(<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뜰>) 외치는 시인에게서는 어쩐지 철부지 엄마 고양이의 면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고양이에 대한 매혹은 고양이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기하학을 구현하는 내 고양이의 몸”(<란아, 내 고양이였던>)이 감탄을 빚어내는가 하면, “고양이는 기다리지 않으면서/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다”(<<손대지 마시오>>)에서 보듯 그 초연한 정신이 경외의 염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고양이는 매혹과 경외 이전에 인간들의 편견과 위협에 익숙해 있다. 고양이와 공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그래서 시인은 묻는다.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 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 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 그러면, 좋을까요?”(<고양이를 부탁해> 마지막 부분)(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12. 17.

P.S. 시집의 부제를 '고양이를 부탁해'라고 붙여도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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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1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인숙 시인은 은밀하면서도 발랄한, 고양이스러운 사람인 것 같아요.
'고양이를 부탁해'란 영화도 참 좋게 봤어요.^^

로쟈 2007-12-17 15:48   좋아요 0 | URL
네 영화도 재미있었지요.^^

마립간 2007-12-1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몰라 여쭤보는 것인데, 시 '고양이를 부탁해'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등에 나오는 고양이의 공통적 이미지나 의미가 있나요?

로쟈 2007-12-17 15:48   좋아요 0 | URL
관계는 없던데요.^^

베토벤 2007-12-1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나온 소설과 이름이 같군요. (완전 바람의 그림자 분위기) ^^; 예전에 고종석씨의 에세이에 보면 고종석, 황인숙, 강금실 세 사람이 포르투갈에 같이 가서 파두를 들었다 그런 구절도 있더군요.

로쟈 2007-12-18 00:12   좋아요 0 | URL
네, 고종석씨는 <인숙만필>의 발문도 썼지요...
 

대선도 며칠 안 남은 김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책들을 올해 나온 책들과 조만간 참조하려는 책들 위주로 꼽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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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민주주의인가- 한국 민주주의를 보는 하나의 시각, 민주주의총서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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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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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과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7)을 주섬주섬 읽었다(예전에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 때문에). 두 권 모두 독립된 논문들의 묶음이어서 반드시 완독할 필요는 없고 흥미를 끄는 장들만을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동일한 주제/주장이 계속 반복/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저자가 이미 밝혀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 글들은 다양한 청중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니만큼, 똑같은 관점들이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상당량의 반복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반복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반복을 원래대로 두기로 했다."(9쪽)

내가 주로 읽은 장들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서문('경합적 다원주의를 위하여')과 1장('급진민주주의: 근대적인가 탈근대적인가?'), 7장('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접합에 대하여'),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서론('민주주의의 역설')과 1장('민주주의, 권력, 그리고 '정치적인 것''), 5자장('경쟁자 없는 정치>'), 결론('민주주의의 윤리') 등이다. 역시나 전체적인 조감도를 그려보는 데 가장 유익한 건 서문/서론이며 이어지는 1장들이 핵심을 포괄하고 있다.

<귀환>의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의 통일적인 핵심 주제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성찰과 권력 및 적대의 뿌리 깊은 특징에 관한 성찰이다. 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좌파의 기획을 다시 정식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최근의 합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담론을 비판하고자 이런 성찰의 결론을 끌어내려 했다."에 적시돼 있듯이 무페의 기본 입장은 좌파의 정치적 입장을 '급진적 다원적 민주주의'로 재정식화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함리적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담론을 비판하는 것이다(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뿌리 깊은 특징'은 'ineradicable character'를 옮긴 것인데 같은 뜻이지만 '근절할 수 없는'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합하다. 무페가 보기에 권력과 적대는 근절할 수 없으며 해소 불가능하다).

제목에서 이미 강조되어 있지만 무페의 정치이론의 시발점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대한 관심이다. 이것은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에서 빌려온 것인데, 11쪽의 역주에 따르면,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politics)와 다르게, '정치적인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규정하는 차원"을 가리킨다. 무페가 보기에 대부분의 자유주의 정치이론가들의 무능력은 "정치적인 것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유주의 사유의 무능력과 적대의 환원 불가능한 특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롤즈의 자유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인 것'을 회피하거나 사고하지 못하는 주류적 정치관에 대한 무페의 비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정치관은 합리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나는 이 정치관의 주요 결함이, 갈등과 결정의 차원에 놓인 정치적인 것의 특정성에 관한 안목이 없고, 적대가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역할을 하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이후 적대라는 통념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가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하지만 이 믿음에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12쪽) 

슈미트의 '통찰'이 필요한 것은 이 대목에서이다(역시나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specificity'를 '특정성'이라고 옮긴 것은 어색해보인다. '특성'이나 '특이성'으로 충분해보이는데, 굳이 사전에는 없는 단어로 옮길 만한 이유가 따로 있는지? 'notion'은 무조건 '통념으로, 또 자주 나오는 단어 중 'existence'는 '실존'으로만 옮긴 것도 기계적인 번역이다. 'illusion'을 '환상' 대신에 '가상'이라고 옮긴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소위 '칼 슈미트의 도전'인데, 그람시와 함께 슈미트는 무페의 이론적 프로젝트를 떠받치는 지주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은 무시하지 못할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의 결함을 이렇게 드러냄으로써, 슈미트는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제기되어(야) 할 쟁점들을 확인하게 해주어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내 목표는 슈미트와 함께 생각하고 슈미트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슈미트의 비판에 맞서 그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슈미트의 기본 통찰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학의 중심에 '친구/적 관계(friend/enemy relation)를 갖다놓은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적의(hostility)를 정치적인 것의 차원과 연결시킨 것이다(이 점에서 슈미트/무페의 '적대의 정치학'은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과 대척점에 놓인다). 사실 이건 정체성 형성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기억에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주체 형성에 관한 라캉의 정신분석학도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왜 그런가?

"모든 정체성이 관계적이라는 것, 또 각각의 모든 정체성의 실존 조건이 어떤 차이의 긍정, 즉 '구성적 외부' 역할을 할 하나의 '타자'를 결정하는 것임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적대가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경계를 설정해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관건인 집단 정체성 형성의 영역에서는,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친구와 적 유형의 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달리 말해 슈미트의 용어 이해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항상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13쪽)

여기서 '구성적 외부(constituitive outside)'는 데리다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민주주의의 역설>에서는 '구성적 타자'라고 번역돼 있다): "그의 '구성적 타자(*외부)'의 개념이 모든 객관성에 내재하고 있는 적대감과 집합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우리와 타자라는 구별이 중심적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있어서 해체주의적 접근법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역설>, 29쪽) 

우리의 정체성, 더 나아가 집단적 정체성 형성에 '구성적 타자'가 필연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은 본질주의적 입장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비본질주의'가 따라서 무페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객관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필연적으로 유도한다.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에서 우리는 여하한 사회적 객관성도 권력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질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모든 사회적 객관성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며, 그것의 구성을 지배하는 배제행위의 흔적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구성적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결정적인 것이다. 모든 실체는 그 자신의 존재에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각인돼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모든 것은 차이로 주조되며, 그것의 순수한 '실현' 혹은 '객관성'으로 파악될 수 없다. 구성적 타자는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으로서 언제나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정체성은 순수하게 우연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권력을 미리 만들어진 정체성들 사이에 벌어지는 외적인 관계로서 이해해서는 안되며, 차라리 권력은 정체성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함을 함축한다. 객관성과 권력 사이의 이러한 동시적인 영향력을 우리는 '헤게모니'라고 명명한 바 있다."(<역설>, 41-42쪽)

<사회변혁과 헤게모니>(터, 1990)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국역본 제목인데, 지금은 절판됐다. 다행히 <귀환>의 책갈피를 보니 후마니타스의 근간 목록에 원제대로 올라와 있다(호미 바바의 <민족과 서사>,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도 기대를 갖게 하는 근간 목록이다). 여기서 핵심은 모든 사회적 객관성(social objectivity)이 권력에 의해 구성되며, 따라서 정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반본질주의의 귀결이며 이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무페의 기본 입장이 도출된다.

"이러한 반본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정치를 이해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존립하기 위해서 어떠한 사회적 행위자도 사회적 기초에 대한 장악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주장이 갖는 특수성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한에서 그들은 보다 민주적이 됨을 의미한다.(...) 이제 더이상 민주적 사회는 사회관계에서 완벽한 조화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사회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것의 민주적 속성은 여하한 제한적인 사회적 행위자가 자신이 전체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42쪽)

이러한 입장을 우리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자기 주장의 특수성과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 곧 입에 발린 말로 '국민 승리'나 '국민 행복'을 말하는 여하한 정치적 주장도 반민주적인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의 승리', '모두의 행복'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약속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우리 자신이 권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면서 권력관계의 존재와 그것의 전환에 대한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는 프로젝트에 고유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근대의 다원적 민주주의는 그것이 잘 질서잡혀진 것조차도 지배와 폭력의 부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제한되고 도전될 수 있는 일련의 제도를 만들는 데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적대감의 제거될 수 없는 속성을 부정하고 보편적인 합리적 합의를 목표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42-43쪽)

첫문장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역자라면 이렇게 옮겼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권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상을 버리면서 권력관계의 실존과 그것의 변형에 대한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는 프로젝트에 특정한 것이다." 요는 다시 한번 적대의 제거 불가능성(ineradicable character of antagonism)이다. 제3의 길을 주장하는 기든스식의 '중도좌파' 혹은 '급진적 중도'에 대한 무페의 비판도 그러한 논리에 근거한다.  

"실로 그러한 관점은 필연적인 경계와 배제의 형태를 '중립성'이라는 가장 하에 감추는 자유주의적 사고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폭력이 '합리성'에 대한 호소 뒤에 숨어 인지되지 않고 감추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43쪽)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페가 제시하는 전략이 '급진적 민주주의'이고 '경합적 다원주의'이다.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다원주의가 민주주의 혁명을 심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다원주의의 관념을 급진화하려면, 합리주의, 개인주의, 보편주의와 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귀환>, 20쪽)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최종 해결이 궁극적으로 가능하리라는 확신은 민주주의의 기획에 필수적인 지평을 제공하기는커녕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21쪽) 

이런 맥락에서 무페는 보편주의에 대한 주장(하버마스)과 그에 대한 거부(리오타르)를 모두 비판한다. "한스 블루멘버그가 <근대의 정당성>에서 구별한 계몽주의의 두 측면을 고려하자는 로티의 안내를 따라가보자. 그것은 (정치적 기획과 동일시될 수 있는) '자기주장'과 (인식론적 기획인) '자기정초'와의 구별이다.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특정 형식의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이 분명한 그 통념을 포기하는 대신 정치적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23-24쪽)

<귀환>과 <역설>에서 모두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Blumenberg)가 '한스 블루멘버그'로 옮겨졌는데, 관례에 따를 필요가 있다(블루멘베르크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025028 참조). 마지막 문장은 불분명하게 번역돼 있다.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특정 형식의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이 분명한 그 통념을 포기하는 대신 정치적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의 원문은 "Once we acknowledge that there is no necessary relation between these two aspects, we are in the positions of being able to defend the political project while abandoning the notion that it must be based on a specific form of rationality."(10쪽)이다. 마지막 절의 'it'이 받는 건 '통념(notion)'이 아니라 '정치적 기획(political project)'이다. 그리고 여기서 'must be'는 '-임에 틀림없다/분명하다'란 뜻이 아니다.

근대의 정치적 기획과 인식론적 기획이 분리될 수 있다면, 정치적 기획이 반드시 특정한/제한적인 합리성에 정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다시 옮기면,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정치적 기획이 특정한 합리성에 정초해야만 하다는 통념을 포기하고서도 그 정치적 기획을 방어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무페는 두 가지 기획을 구별해야 한다는 블루멘베르크/로티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로티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근대성 개념의 핵심부에 있는 두 전통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맥퍼슨이 보여주었듯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단지 19세기에 접합된 것뿐이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다."(24쪽) 

 

 

 

 

캐나다의 정치학자 C. B. 맥퍼슨은 무페가 중요하게 참조하고 있는 이론가이며 <귀환>의 7장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와 함께) 자세하게 언급된다. 맥퍼슨의 중대한 기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시킨 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맥퍼슨의 책으론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인간사랑, 1991)과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박영사, 2002)가 소개돼 있는데, 전혀 다른 책처럼 보이지만 같은 원서를 번역한 것이다. 보비오의 책으론 <민주주의의 미래>(인간사랑, 1989),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문학과지성사, 1992), <제3의 길은 가능한가>(새물결, 1998)이 소개돼 있다. 맥퍼슨/무페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가 근대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그것의 특징이 두 가지 상이한 전통 사이에서 표출된 것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근대사회의 정치적 형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법의 지배, 인권의 보장과 개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등의 가치로 구성되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론 평등과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시, 그리고 인민주권 등의 사상으로 구성되는 민주주의적 전통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 사이에는 여하한 필연적 연관도 없으며, 단지 유연한 역사적 표출만이 있을 뿐이다. C. B. 맥퍼슨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처럼 자유주의는 민주화되었고 민주주의는 자유화되었다."(<역설>, 15-16쪽)

'표출'이라고 내내 옮겨진 것은 'articulation'의 번역이며 <귀환>의 역자처럼 '접합'이라고 옮기는 게 적합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 두 가지 전통 사이에는 여하한 필연적 연관도 없으며, 단지 유연한 역사적 접합만이 있을 뿐이라는 게 핵심적인 내용이다. '민주주의 역설'이란 표제가 뜻하는 바는 이러한 우연한 접합이 낳은 효과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심적인 주장은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밑바탕에서는 상호 조화될 수 없고 결코 서로 완벽하게 화해될 수 없는 두 개의 논리가 표출된(*접합된) 결과물임을 이해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정치에 필수적이라는 점이다."(<역설>, 18쪽)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이 제기되는 건 이 지점에서인데, 그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생존할 수 없는 체제"라고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무페는 그러한 '역설적 관계'가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요점은 이렇다.

"보편주의적인 자유주의적 논리가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적 이해와 '인민'을 정치적으로 구성해야 될 필요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슈미트의 생각이 옳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두 전통 중 하나를 우리가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양자의 표출(*접합)이 역설인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시키는 모순적 관계로 보는 대신에 두 논리 사이의 긴장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나의 주장은 이러한 역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을 이해하는 관건이라는 것이다."(<역설>, 25쪽)

첫문장은 비문이다. 원문은 "I state that, while Schmitt is right to highlight the different ways in which the universalistic liberal logic is in opposition to the democratic conception of equality and the need to politically constitute a 'demos', this dose not force us to relinquish one of the two traditions."(9쪽)이고, '- 사이의 대립'이란 표현은 없다. 다시 옮기면, "보편주의적 자유주의의 논리가, 민주주의적 평등 개념과 인민(demos)을 정치적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와는 대립적이라는 사실을 여러 모로 강조해서 보여준 슈미트의 주장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두 전통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다양한 이론적 주제에 관한 무페의 논의를 계속해서 따라가볼 수 있겠지만 시간상/분량상 이 정도에서 일단 끊어야겠다. 당초 '민주주의 혁면과 급진민주주의'란 타이틀을 달았지만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얘기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에 제목은 그냥 '정치적인 것과 민주주의의 역설'이라고 해둔다...

07. 12. 16-17.

P.S.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민주주의의 역설>은 오역서라곤 할 수 없어도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번역서들이다. 군데군데 오역이 있기도 하거니와 교열도 평균점 이하이기 때문이다. <역설>의 경우엔 고유명사 표기가 엉망이다. 클로드 르포(클로드 르포르), 디데로(디드로), 지라드(지라르), 에이펠(아펠), 커벨(카벨), 라지크만(라이크만), 앙드레 고르츠(앙드레 고르) 같은 인명 표기들은 역자가 최소한 국내에서 통용되는 표기들에 전혀 무지하다는 걸 보여준다(편집자는 무관심했다는 것이고). 나는 원저들도 읽어본 바 없을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지만.

<귀환>의 경우에도 '찾아보기'는 불만스럽다. 원저에 없는 항목들이 일부 추가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저에 있는 항목을 누락시킬 이유가 있는가? 대표적으로 '맥퍼슨'이란 이름을 국역본의 색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비중이 적은 것도 아니어서 '맥퍼슨'은 여덟 페이지에 걸쳐 등장한다). 그리고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왜 'o'에 가 있는가? 39쪽에서 '실재에 대한 정의'는 'definition of reality'의 번역인데, '정의'의 한자어가 '定義' 대신에 '定議'라고 엉뚱하게 병기돼 있다.

이런 엉뚱한 병기는 영어의 경우에도 눈에 띈다. 35쪽에서 '선취들'은 '선입견들'이라고 옮겨야 할 'prejudices'를 잘못 옮긴 것인데, 엉뚱하게도 'preoccupations'란 단어가 병기돼 있다(이런 실수 혹은 창작이 역자의 '작품'인지 편집자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확인할 수 있는 건 무지와 무성의다. 적어도 역자가 가다머를 읽지 않았다는 걸 알려준다). 사소한 실수들이더라도 누적되면 책에 대한 신뢰를 좀먹는다. 더구나 공짜로 얻은 책들도 아니고 제값을 다 치르고 산 책들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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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12-1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두번째 단락, '실재에 대한 정의'에 대한 지적은 37p이 아니라 39p에 나옵니다.
<귀환>의 경우 두챕터정도 무난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꼼꼼히 봐야되겠군요.

로쟈 2007-12-18 18:33   좋아요 0 | URL
페이지를 잘못 봤군요.^^; 그럭저럭 무난하게 읽히지만 불만스런 대목들도(실수나 오역) 눈에 띕니다(그래서 완벽한 번역은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좋은 번역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자다 말다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벼운 몸살 같기도 하고 피로의 누적 같기도 하다). 엊그제부터 샹탈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론에 대해 몇 자 적고 밀린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진도는 두어 페이지를 못 나가고 있다. 정신 좀 차리기 위해 '단순작업'을 해두기로 한다. 얼마전(사실 몇주 전)에 출간된 김석의 <에크리>(살림, 2007)에 대한 리뷰가 뒤늦게 올라왔는데(한국적 서평 관행에 미루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어 <에크리>가 없는 상태라 여전히 '엇박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여하튼 '예습'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볼 수는 있겠다.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7158.html)를 읽어가며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이도록 한다.

한겨레(07. 12. 15) '욕망의 이론가’ 라캉을 다시 읽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서 몇 번의 변곡점을 그렸다.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이 밀어닥치던 1990년대 중반 라캉의 이론은 루이 알튀세르나 미셸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과 함께 구조주의의 중심 이론 가운데 하나로 거의 빠지지 않고 거명됐다. 그러다 곧바로 탈구조주의 물결이 구조주의 위를 덮쳤다. 라캉은 이 물결에 밀려, 특히 질 들뢰즈의 철학에 밀려 지식장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러니까 기자가 그리고 있는 라캉의 수용사는 알튀세르. 푸코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겠다. 기억에 가장 '혁신적'이었던 책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90)이었다. 저자의 <에크리>의 참고문헌 소개에는 '국내에 번역된 책들'만 제시되고 있는데 기존의 수용 성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과문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푸코, 알튀세르에 대해 저자가 소화한 내용을 그래도 적시하고 있는 것이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며 '교양서'로 분류하기엔 다소 전문적이지만 참고문헌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구조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 전4권)가 필독서이다. 비록 술술 읽히는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알기에 라캉에 관한 모든 책은 김형효 교수의 책에 뒤이어 출간됐다. 국내 필자가 쓴 또다른 책으로 이진경의 <철학의 외부>(그린비) 정도가 떠오르는데 '구조주의자 라캉'에 대한 소개와 비판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와 국내 '라캉학'을 종합한 <라캉의 재탄생>(창비, 2002), 그리고 박찬부 교수의  연구서들이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일 텐데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이런 책들 대신에 "라캉의 <에크리>를 읽고 연구할 때 참고가 될 만한 책들"로 불어권 연구서들만 나열해 놓고 있다. 국내 연구서들을 읽느니 차라리 불어 입문서를 읽는 게 낫다는 암시일까? 일반독자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들뢰즈의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 개념을 날려버렸고, 들뢰즈의 저작 <안티오이디푸스>는 라캉이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아버지-어머니-아들)을 폭파해버렸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 지젝이 자기 사상의 이론적 기둥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지젝과 더불어 라캉은 부활했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웃음이 났다. 한동안 들뢰즈의 것이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지? 들뢰즈의 독자가 그토록 많은가? 지젝과 함께 라캉은 정말 '귀환'하고 '부활'했는가? 약간은 드라마틱한 과장이 느껴진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폭파해버렸다면 지젝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오이디푸스 또한 다시 귀환하고 부활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품게 된다. 물론 짤막한 리뷰 기사에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라캉 전공자 김석(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씨가 쓴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은 이렇게 부활한 라캉을 그의 주요 저서 중심으로 친절하게 소개하는 안내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 분야의 이론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명실상부한 최고의 이론가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프로이트 사후 분화를 거듭하던 정신분석학계에 강력한 이론적 성채를 제공했다. 그러나 라캉이 단순히 프로이트로 돌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극복하고 혁신하려고 했다. 그는 ‘리비도’(성에너지)와 같은 프로이트의 생리학적·생물학적 개념과 완전히 단절해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해명했다. 특히 프로이트가 거리를 두었던 철학이나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정신분석학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라캉의 대표 명제는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를 주제로 2005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돼 있으니까 액면 그대로 '라캉 전공자'이다(이미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동문선, 2002)을 옮긴 바 있다). 올해는 역시나 라캉으로 학위를 받은 김서영씨가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도서출판b, 200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어서 <에크리> 수용의 품새는 다 갖춰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와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도 최근에 모두 소개되었기에 라캉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에크리>도 <세미나>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이러니컬하긴 하지만(듣자 하니 <에크리>의 경우 내년에는 번역본이 나올 듯하다). 한편 여전히 가장 쉬운 입문서는 다리안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해설 대상으로 삼은 것이 제목에 드러난 대로 라캉의 대표저작 <에크리>다. 1966년 출간된 <에크리>는 1936년 이래 30년 동안 라캉이 쓴 논문 28편을 엮은 책이다. 라캉 사상의 거의 전부가 이 책에 압축돼 있다. 라캉을 두고 ‘욕망의 이론가’라고 하는데, 그가 평생토록 해명하려 한 것이 이 욕망의 성격과 구조와 작동이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밑바닥에서 작용하는 욕망의 질서를 가리키며, 이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존재가 주체다. 라캉은 주체가 대상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나누었다. 1950년 이전 상상계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던 라캉은 원숙기에 이르러 상징계를 분석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삼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실재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개념이어서 일종의 세트를 이룬다. <에크리>의 논문들은 이 세트 개념들을 포괄해 설명하고 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키워드로 하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세 단계를 거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1966년에 나온 <에크리>는 이 중 상징계, 혹은 구조주의 시기의 라캉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지적된다. 70년대의 <세미나>에서 그는 자기 이론에 대한 새로운 제안과 교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라캉'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라캉 vs 라캉'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온다). 나는 이게 라캉 이해의 가장 큰 난점이라고 생각한다. 라캉의 '이론적 전기;'에 대한 관심이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다(수시로 사전도 참조해야 하고).  

상상계는 어린아이의 자아인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라캉은 ‘거울단계’라는 용어로 이 세계를 설명한다.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그 거울 이미지를 따라 ‘상상적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성된)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기만적 환영이다.” 거울단계를 거친 어린아이는 다시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법,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한다. 그 과정을 거쳐 진입하는 곳이 상징계다. 상징계란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다.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를 통해서 관계 맺는 세계다. 아버지란 이 질서의 대표자이자, 주체가 동일시하는 ‘대타자’(큰타자)다. 그 아버지는 남근(팔루스)을 소유한 자로 간주되며, 남근이라는 특권적 기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주체의 욕망이다. 욕망이란 그러므로 남근이 없는 상태, 곧 결여를 가리킨다.

상징계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에 상응하는 것은 라캉에게서 '아버지의 이름'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건 정신분석의 '언어학적 전회'이다(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불운은 그가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 이전에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 '언어학적 전회' 이후의 아버지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상징적 아버지, 부권적 권위로서의 아버지이다. 곧 법이고, 질서이고 언어규칙이다. 때문에 '안티오이디푸스'가 정신병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법과 질서, 언어규칙의 바깥으로 외출/탈주하려는 것이 안티오이디푸스의 기본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갇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여기서 그 너머가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그 세계는 상징계가 균열을 일으키거나 구멍이 뚫릴 때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어서, ‘주체의 원초적 현실’이자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며 “안과 밖의 구분도,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세계다. 실재계는 때로 환각으로 때로 광기로 드러나기도 하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 모순적 대상이야말로 욕망의 궁극적 귀착점이다. 라캉의 후예인 지젝은 실재계로 대표되는 이 후기 이론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고명섭 기자)

07. 12. 15.

P.S. 라캉에 대한 지젝의 주석의 많은 부분이 실재(계)에 할애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라고 정의되지만 그것이 '어떤 세계'라고 규정될 수는 없다. 실재는 그저 상징계의 표상/재현이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징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잉여가 '실재'이다.

기자는 계속해서 지젝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그에 대해서 전혀 참조하지 않는다(하지만 라캉을 이해하는 데 지젝을 경유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애당초 이 책을 구입했을 때 '지젝 없이 라캉 읽기'라는 페이퍼를 적으려고까기 했을 정도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라고 기자는 적었는데, 기꺼이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그냥 '여성의 음부' 같은 곳이다(지젝이 어디선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다 믿을 듯하다). 가려진 뭔가가 있지만 막상 '가리개'를 제거하는 순간 그 뭔가는 상실된 것으로 체험된다.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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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디선가 지젝이 그렇게 말했다는 '확신'까지 드는데요...^^
개인적으로 Bertrand Ogilvie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은, Peter Widmer의 <욕망의 전복>과 함께, 라캉 입문을 위한 좋은 안내서라고 생각합니다. Bruce Fink의 <에크리 읽기>는 아직 채 다 읽지 못했는데, 역시나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저 모든 책들은 언제나 제게 '가닿을 수 없는 실재'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6 17:39   좋아요 0 | URL
문제는 실재가 아니라 욕망이지요.^^

람혼 2007-12-17 02:27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

vinoveri 2007-1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울단계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가는 과정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듯 한데요.. 라깡은 거울단계에 상상계뿐만 아니라 상징계가 개입하는 것으로 얘기하지 않나요?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오인)할 때, 그것에 대해 보증자의 역할을 하는 제3자 - 주로 어머니겠지요 - 의 확인 내지 인정의 개입을 통해서 말이지요.(람혼님이 소개해주신 <욕망의 전복>에도 이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울단계를 통해서 아이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옮겨가게 된다'라는 식의 생각은 라깡이 국내에 소개되던 초기에 잘못 소개된 통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거울단계 이전에는 상상계밖에 없고 그 이후에 아이가 상징계에 편입된다라는 식의 생각 말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상상'계', 상징'계'라는 번역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 상징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요.)
그렇게 본다면, 거울단계를 거쳐 다시 외디푸스단계로 넘어간다라는 설명도 제가 보기에는 별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라깡이 이런 식의 단계론적 설정을 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로쟈 2007-12-16 17:45   좋아요 0 | URL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를 구별하면 문제가 해소될 듯한데요. 그리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는 순차적인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상계 이후에 상징계가 온다는 식이 아니라 서로 매듭을 이루며 공존하는 것이죠...

vinoveri 2007-12-18 01:31   좋아요 0 | URL
거울단계에서 아이에게 일어나는 동일시는 상상적 동일시가 아니냐는 말씀으로 이해되는데요..
물론 아이가 자신의 거울이미지를 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상상적 동일시이지요. 하지만, 아이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확신(오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머니로 대표되는 제3자의 보증이 개입하게 되지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면서 '저게 나야?'라고 묻는 (듯한) 아이에 대해서, '그래, 그게 바로 너란다.'라고 대답하는 (듯한)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 뭐, 이런 상황이 이들 3자간에 벌어지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이 제3자의 시선은 소위 '정형외과적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파편화된 채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던 이미지들이 하나로 기워져서 단일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지요. 제3자의 개입이 없다면 아이는 사회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데 큰 장애(소위 자폐)를 겪게 되며, 그런 점에서 거울단계에서 제3자의 개입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드리고자 했던 것은 이 과정에서 하는 제3자의 역할이 상징적인 것의 개입에 해당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어머니가 주로 하는 역할이지만, 이 때의 개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것이구요.) 따라서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미 상징적 동일시가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거울단계에서 개입하는 제3자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라깡의 에끄리의 거울단계논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기 라깡의 세미나에서 강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출전의 차이 때문에 혼란이 가중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인 논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이거, 로쟈님의 블로그에 처음 다는 댓글이 너무 딱딱하고 까칠한 게 아닌가 해서 많이 걱정이 되네요..--; 그저 지식인들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로쟈님의 블로그를 빛내려는 충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07-12-17 15:52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의견이십니다. 사실 아시다시피 라캉에 대한 '해석'의 문제 같고, 제가 특별한 의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저는 전공자가 아니라 독자일 뿐이라서요). 몇몇 2차문헌에 근거하여 판단할 따름입니다. 보다 정밀하게 의견을 제시(발표?)해주시면 라캉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vinoveri 2007-12-18 01:32   좋아요 0 | URL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블로그를 드나들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그저 독자일뿐일걸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관심도서가 많지 않아서 눈길을 돌리게 된 건 해외신간이다. 중앙일보의 '글로벌책읽기'에 마침 하 진의 신간에 대한 소개가 올라왔기에 옮겨온다. 리안이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계 영화감독이라면 하 진은 가장 성공한 소설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소설들이 국내에서도 작년부터 적극 소개되고 있다. 해서 'Free Life'(자유인생)가 원제인 이 신간도 어쩌면 내년에는 구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672쪽 분량이니까 시일은 좀 소요될 듯하다).

중앙일보(07. 12. 14) [글로벌책읽기] 아들놈이 창피하대, 내가 영어 못해서 …

소설 『기다림』으로 명성을 얻은 중국계 소설가 하진이 새 소설을 출간했다. 중국을 배경으로 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소설은 중국인 이민자 가족이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미국 유학생 부부인 난우와 핑핑이 천안문 사태 직후 미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3년간 헤어져 있던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난우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학원을 그만두고 야간 경비원 등 갖가지 험한 일을 하게 된다. 뭐든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저축을 위해 극도의 내핍 생활을 하는 부부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타오타오의 교육이다. 난우에게는 결혼하기 전에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부인 핑핑도 잘 알고 있어서 부부 사이는 자주 삐걱거린다. 하지만 둘 다 중국에서 어렵게 데려온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한다.

보스톤 지역에서 뉴욕으로 가서 브루클린에서 조그만 레스토랑을 열고 다시 아틀란타 교외의 쇼핑 몰 한구석에 중국식당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아메리칸 드림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두꺼운 장편소설은 어떤 면에서 중국인 이민자들의 정착 교본처럼 읽힐 수도 있을 정도로 생활의 세목들을 자상하게 적어놓고 있다. 미숙한 영어 때문에 생기는 일들은 처음에는 코믹하지만 나중에는 가슴을 짓누른다. 그것이 결국 중국문화와 미국문화의 비교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난우가 보기에 미국인들은 근면하지만 돈의 노예이자 교양 없는 속물들이다. 하지만 중국에선 날마다 누군가와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고 뇌물 없이는 되는 일이 없는데다 정부는 국민들을 어린아이 취급하면서 복종만 강요한다. 난우는 자신의 아들이 그런 폭력적 환경을 견디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가면서도 주인공 난우를 앙앙불락하게 만드는 열망이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 되는 것이다. 중국에 있는 옛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함께 난우를 괴롭히는 시인의 꿈은 이민자가 가지게 되는 이중적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에서 살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영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온 사람이 영어를 마스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진이 인터뷰에서 한말 그대로 이민 생활의 핵심은 “영어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계속 배울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영어로 시를 쓰겠다는 난우의 생각은 편집자로부터 “시란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라는 충고를 듣기에 이른다.

여기다 불쑥 커버린 아들 타오타오는 부모들의 어설픈 영어를 창피해한다. 십대 아이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언행일 수도 있는 일이 이민자 부모들에겐 날카로운 아픔이 된다. 자신들의 삶을 희생해가면서 키운 아들이 미국인처럼 행동하면서 부모와 거리를 두려고 할 때, 부부는 위기에 도달한다. 부부 싸움 끝에 핑핑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집어드는데 누르는 번호가 911인 것은 우스우면서도 슬픈 장면이다.

하진의 전작들이 미국 독자들이 원하는 중국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자신이 미국에 와서 경험한 것을 적은 자전에 가깝다. 미국 숭배와 영어 배우기 열풍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이 소설은 미국 이민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이영준_문학평론가)

07. 12. 15.

 

 

 

 

P.S.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하 진의 소설은 대표작 <기다림>을 비롯해서 다섯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란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라 <기다림>과 <자유인생> 정도는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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