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했던 지난주와는 달리 이번주 북리뷰란은 북적거린다.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고 손길이 갈 만한 책들도 여럿 된다. 먼저 손에 잡히는 책은 퇴근길에 서점에서 본 <아름다움의 과학>(프로네시스, 2008). '미인불패, 새로운 권력의 발견'이 부제다. 저자 울리히 렌츠는 독일의 의사이자 과학 저술가. 그의 책으론 <일 덜하는 기술>(문화과학사, 2003)이 번역돼 있다. 악셀 브라이히와의 공저이다.

Die Kunst, weniger zu arbeiten.

<아름다움의 과학> 표지에는 'The science of beauty'라고 박혀 있지만 원제는 <미, 과학 그 자체(Schönheit. Eine Wissenschaft für sich)>이다. 광고투로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과학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3. 15) “아름다움 향한 광기, 왜 나쁜가”

솔직하고 거침없는 책이다. 아니 ‘도발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2006년 출간 당시 전 독일을 논쟁 속에 몰아넣었다. ‘아름다움의 과학’(The science of beauty)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방점은 육체적·외적 아름다움에 찍혔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논외다. 독일의 의사이자 과학전문저술가인 저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들의 통념 혹은 사회적 금기에 ‘딴죽’을 건다. ‘도발적’인 책이 빠지기 쉬운 허술함 대신 치밀함으로 무장했다. 사회과학에서 진화생물학을 거쳐 역사 및 경제학까지 다양한 연구 및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고. 그러나 아름다운 외모야말로 삶의 중요한 덕목이자 재능이라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좀 솔직해지자.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얼마나 많은가. 학교에선 예쁜 아이가 더 많은 애정과 더 좋은 성적을 받는다. 호감 가는 외모는 면접이나 승진을 할 때도 유리하다. 그러니까 다들 성형외과를 찾지 않는가.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다른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에도 이의를 단다. 아름다움은 정량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개념이라는 것. 물론 아름다움은 제 눈의 안경처럼 서로 다르지만 놀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전 세계의 수많은 연구에서도 미를 평가하는 기준이 기가 막힐 정도로 일치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500년 전 사람들처럼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다.

이 같은 주장이 페미니스트들의 원성을 살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못박아두기 위해 ‘고안된 신화’라니까. 그렇다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마저 예쁜 얼굴을 더 오래 쳐다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면 예쁜 얼굴의 조건은 티없는 피부. 평균에 가까움, 대칭. 앳됨, 성숙함, 풍부한 표정, 포동포동한 볼, 두드러진 광대뼈와 핼쑥한 볼 등이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많은 종들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이 이성을 사로잡아 번식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에 방해가 될 뿐인 화려한 깃털이 공작새에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책에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단정적인 표현들이 많다. “아름다움은 힘이다.” 두 사람이 좁은 인도에서 마주쳤을 때 양보를 받는 건 대체로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를 보라. “아름다움은 재능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성적을 줄 때 외모에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름다움은 선이다.” 서양에선 ‘선’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쁘면 다 착하다.” 돌을 넣은 눈을 던져서 다른 아이를 다치게 한 7살짜리 아이가 예뻤다면 그저 개구쟁이의 짓궂은 장난, 예쁘지 않았다면 “범죄자의 싹수가 보인다”고까지 평가 받는다. 똑같은 범죄 행위를 두고 미인들에게는 ‘특별 할인행사’를 한다는 판결 통계도 있다.

그나마 위안(?)은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다지 깊은 연관이 없다는 사실. 행복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우에만 온다. 특히 외모에 집중하는 사람은 더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는데 이것이야말로 도달하지 못할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더 예뻐지면 더 행복해질거야”라고 중얼거린다. ‘더 예쁘게, 더 날씬하게, 더 젊게’는 이 시대의 표어다. 예전에는 아름다움과 젊음은 자연의 은혜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상태는 모두 병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감옥’에 갇힌 꼴이다.



저자는 인간 안에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가 왜 나쁜가”라고 반문한다. 삶이란 하나의 시장이며 아름다움은 이 시장 안에서 높은 값이 매겨지는 상품이다.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다. 그럼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의 한계선은? 성형수술이 당사자를 반드시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잘 알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미용 알약이 나온다면 당연히 구매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책에서 문제 삼는 건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내는 놀이로서 아름다움의 추구가 미용산업 등 전문집단에 의해 변질됐다는 사실이다. 놀이의 즐거움 대신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과 스트레스가 들어섰다. 수많은 연구들은 자신의 신체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불만은 더욱 커진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사랑받는 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때 행복한 것”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꺼내든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끝나는 인생 그 자체이므로,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름다움을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론으로 점철된 책은 아니다. 저자는 물론 역자도 말했듯이 책에서 보고하는 각종 실험 통계자료는 “통계자료일 뿐”이다. 일반화된 법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우리가 아름다움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고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김진우기자)

08. 03. 14.

P.S. 정작 'The science of beauty'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은 따로 있다. <미 - 가장 예쁜 유전자만 살아 남는다>(살림, 2000)라고 번역된 낸시 에트코프의 'Survival of the Prettiest'가 그것이다. 저자는 하버드 의대 교수이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읽을 게 없었던 책이다. 울리히 렌츠의 <아름다움의 과학>도 대략적인 요지는 낸시코프의 책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과학저술가'인 만큼 '교수'보다는 재미있게 써주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아름다움'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쓴 '악의 기원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성'(http://blog.aladin.co.kr/mramor/1585706)도 참고해보시길. 그리고 더불어 지적하자면 '아름다움은 과학'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아름다움은 과학'이라고 말하는 발화행위는 같은 값을 갖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바보인 것과 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아름다움이 힘이고 재능이란 건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앎을 발설하고 공표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이 페이퍼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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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5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 리뷰 한편을 옮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6). 아프가니스탄 출신 작가 호세이니 원작의 <연을 쫓는 아이>. 개봉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리뷰를 읽으니 꼭 챙겨보아야 할 영화의 하나다. 짧은 리뷰라서 이럴 땐 더 유익하기도 하고(작가 호세이니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718531 참조).

시사인(08. 03. 01) 우정과 용기의 놀라운 치유력

영화 번역가 이미도의 산문집을 읽다가 탐나는 문장을 발견했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그 사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원작 소설 <시체>에 나오는 첫 문장이라는데, 영화 <연을 쫓는 아이>를 소개하는 이 글에 꼭 빌려 쓰고 싶은 문장이다. 이 영화는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을 용기 있게 털어놓은 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을 실천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옛 소련이 침공하기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 수도 카불에 사는 부잣집 아들 아미르와 하인 아들 하산. 아미르는 글을 모르는 하산의 머리가 되어주고 하산은 싸움 못하는 아미르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나란히 열두 살 되던 해 겨울, 카불 시내를 들썩이게 만든 대규모 연싸움 대회가 열리고, 아미르와 하산이 힘을 합쳐 우승을 차지한 기쁜 순간이 잔인한 운명의 시작이다. “네가 원하면 1000번이라도 연을 찾아올 수 있다”라며 떨어진 연을 찾아 골목길을 달려나간 하산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뒤늦게 친구를 찾아 나선 아미르는 하산이 불량배들에게 겁탈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겁에 질려 숨어 있는다. 그 후 친구 얼굴을 볼 때마다 치밀어오르는 죄책감이 불편했던 아미르는 엉뚱한 거짓말로 누명을 씌워 하산 가족을 내쫓아버린다. 참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미르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하산의 소식을 듣는다. 뒤늦게 반성한다. 속죄한다. 그리고… 참 많이 운다.



<연을 쫓는 아이>는 아프가니스탄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2003년에 펴낸 같은 제목의 소설이 원작이다. 38개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에서 800만 부가 팔린 이 베스트셀러의 매력은 우리가 늘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실천하지 못하는 두 가지 덕목, ‘우정’과 ‘용기’의 기운 센 치유력을 증명해 보인 데 있다.

‘실용’보다 ‘관용’이 먼저이기에…
<몬스터 볼>과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만든 감독 마크 포스터가 연출을 맡은 건 원작자에게 큰 행운이다. 오직 코끝 찡한 이야기의 힘에 감동해 28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스태프와 배우가 모여든 건 감독에게 큰 행운이다. 그렇다면 실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찾아낸 평범한 아이들이 주연을 맡은 건 관객에게 가장 큰 행운일 것이다. 그 맑은 눈동자가 없었더라면, 그 순박한 미소가 없었더라면, 보는 이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뒤흔들어놓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슬람권에서 금기시하는 강간 장면 촬영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는 보도를 접한 후에는 마치 내 아이들인 양 안부를 궁금해하게 됐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잘 지낸다니 안심이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그 사람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맞는 말이다. <연을 쫓는 아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가장 실천하기 힘든 행동을 정말 실천에 옮길 때, 그 사람 인생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우리 인생까지도 아주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는 걸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용’보다 ‘관용’이며 ‘경기 회복’보다 ‘용기 회복’이 먼저라고 귀띔해주는 이 기특한 영화를 보고 <뉴스위크>의 평론가 데이비드 앤슨이 이렇게 썼다. ‘이 영화에 감동받지 못하면 가슴이 딱딱한 사람이다.’ 정확한 표현이다.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의 찡하고 짠한 라스트 신을 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딱딱한 가슴이라면 그 양반, 참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3. 14.

P.S. 영화에 얽힌 뒷이야기, 혹은 '현실' 이야기는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2009&article_id=504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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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1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원작 책과 함께 주목하고 있었는데 개봉관은 그리 많이 잡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3-14 09:35   좋아요 0 | URL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도 그랬었지요...

순오기 2008-03-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대하고 기다리는 영화입니다.

로쟈 2008-03-14 09:35   좋아요 0 | URL
아이들과 함께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8-03-1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이나 부산도 아닌 광주에서 이런 영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행운입니다. 이런 순간마다 광주극장 운영자님께 절로 감사합니다.

로쟈 2008-03-14 09:34   좋아요 0 | URL
머지않아 '서울이나 부산도 아닌 광주'에서 '광주라서'로 토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드팀전 2008-03-1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영화에 대해 <씨네 21>은 비판적 의견을 냅니다.물론 전쟁 전의 아프간을 볼 수 있고 우정을 이야기하지만....미국은 빠져있는 아프간...또는 알고 봤더니 그 둘이 그랬다더라..라는 아침 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설정...마지막부분 갑자기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연출 등등....앞에까지만 좋았다라는 평가들도 있더군요.부분 동의!!

로쟈 2008-03-14 09:33   좋아요 0 | URL
원작 소설이나 영화나 미국인들의 '아프간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효과'와 더불어 '부작용(side effect)'도 있는 거구요...

섬나무 2008-03-1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작정하고 구입한 건 이번에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처음이었어요. 어떤 영화 평론가의-로쟈님이 올린 기사-맥카시 평가가 대단해서리...결론적으론 이 책은 '정말 원작'으로 읽어야 그 맛이 나는 걸까? 싶었습니다. 아마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나 봅니다. '롤리타'는 정말 원작이 아니어도 나를 완전히 매수했었으니까요.
나보코프의 언어유희와 그의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서 책을 읽는 내내 황홀지경이었거든요.
하여간 책을 읽고 났더니 영화가 궁금하지 않아졌지요. 피 냄새를 충분히 맡았어요.

로쟈 2008-03-14 23:37   좋아요 0 | URL
해럴드 블룸 같은 비평가가 맥카시를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고 있습니다. 피냄새보다는 소녀의 향기가 사실 더 낫긴 하죠.^^;

다락방 2008-03-14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시사인에서 이 리뷰 읽었어요. 그전부터 보고싶었던 차에 리뷰읽고 나니 더 보고싶어지더라구요. 그런데 개봉관도 별로 없을뿐더러, 그 개봉관에서 조차 상영일이 길지 않더군요. 오늘이라도 달려가서 보아야 할까봐요. 영화 한편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로쟈 2008-03-14 23:38   좋아요 0 | URL
리뷰는 여기저기 실려 있는데, 개봉관은 정말 드문 모양이군요...

L.SHIN 2008-03-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연을 날리는 꿈을 꾸었는데... 나는 무엇을 날리고 싶었던 걸까요.

로쟈 2008-03-14 23:39   좋아요 0 | URL
저는 꿈에서 연을 본 게 몇 십년 되는 거 같습니다.^^;

L.SHIN 2008-03-15 14:12   좋아요 0 | URL
전 꿈에 연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꿈은 자주 꾸는 종류인가 보죠?

2008-03-15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5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시사인에 실린 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7).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08)에 대한 리뷰이다. 책의 메시지와는 좀 어긋나는 일이지만 다 읽고 쓴 것이다.

시사인(08. 03. 11) 책을 읽지 않아야 교양인이다?

세 가지 두려움에 대한 질문. 당신은 독서를 의무라고 느끼십니까? 당신은 책을 정독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당신은 읽은 책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습니까? 비록 다수는 아니겠지만 이 질문들에 어느 정도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강추’할 만한 책이 있다. 프랑스의 문학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펴냄). 책이라곤 거의 읽지 않는 환경에서 태어나 독서에 그다지 취미를 들이지 못했고 독서할 시간도 별로 없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고 책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된 저자가 도달하게 된 ‘독서론’이다. 혹은 독서에 대한 강박과 무의식적 죄책감에서 벗어나자고 제안하는 ‘비독서론’이다. 아니 궁극으로는 진정한 ‘독서 이론’이고자 한다. 

저자가 먼저 문제 삼는 것은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경계이다. 당신은 자기가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을 얼마나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가? 독서의 실상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책을 읽었다’는 말이 매우 다양한 수준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범례를 참고해보면,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 ‘대충 뒤적거려본 책’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 등이 우리가 저마다 읽은 책의 목록을 구성한다. 엄밀한 독서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제대로 읽지 않은 책’의 목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대로’ 읽는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독서의 과정 자체가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도 이미 앞에서 읽은 것을 망각하기 시작하는 과정일진대 말이다.

책을 잘 알기 위해 한 권도 읽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소극적 비독서만 있는 것도 아니다. 무질의 방대한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도서관 사서를 저자는 예로 드는데 (저자는 ‘대충 뒤적거려본 책’으로 분류한다), 이 사서는 책을 좀더 잘 알기 위해서 일부러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 350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알기 위해서 그가 정한 원칙은 자신이 맡은 모든 책에서 제목과 목차 외에는 절대로 읽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책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교양에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독서에도 틀려먹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교양이란 무엇보다도 ‘오리엔테이션’의 문제이며, 저자의 주장대로 중요한 점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일 테니까. 

요컨대, 책을 읽는 게 교양이 아니라 책을 읽지 않는 게 교양이다. 한 권을 읽느라고 다른 책 열 권을 놓치게 되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독서의 기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비독서의 전략’이다. 물론 이때의 비독서는 책을 전혀 읽지 않는 ‘무독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비독서란 ‘무수히 많은 책 속에서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그 책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의 진정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독서자는 책에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어떤 책이 다른 책과의 관계 속에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책읽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사람, 그가 비독서자이다. 

오늘날 천장까지 가득 채우고도 남을 고전의 목록과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간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교양을 유지해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자의 충고는 이렇다. ‘중요한 것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들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라는 점. 자신이 읽지 않은 많은 책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 정말로 그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곤란한 상황’을 멋지게 돌파하고 있다!

08. 03. 13.

P.S. 몇 주 전에 읽어서인지 이미 내용이 기억에서 삭제되기 시작했지만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선생 앞에서'란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서아프리카 티브족의 <햄릿> 읽기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가 이 원주민 부족에게서 셰익스피어 극작품의 '보편성'을 확인하고자 했을 때 벌어진 일 이야기다. 바야르는 이것을 <햄릿에 관한 앙케트. 귀머거리들의 대화>(2002)에서 자세히 다뤘다고 하는바,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이다(그의 책들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830688 참조).

한편, 책의 만듦새는 아쉬움을 남긴다. 곳곳에 오타들이 남아 있고 오역도 몇 군데 눈에 띈다. 가령 174쪽에서 "그는 불확실성을 견딜 수가 없고, 그래서 떠맡을 수밖에 없는 그 이미지는 사실 그 자신에게는 그리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에서 '파괴적인'은 영역본에 따를 때 'unsettling'을 옮긴 것이다("He succeeds, on his own terms, in assuming this image that is less unsettling to him, becasue it is less ambiguous."). 그는 자신에게 '덜 불안정적인'(=덜 모호한) 이미지를 떠맡는다고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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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3-13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책 소개를 볼 때 나를 위한 위로 같았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읽자가 아니라 최소한의 책을 골라 읽자 입니다.^^ 천성이 게으른 탓이지요. 그런 점에서 로쟈님의 수고는 늘 내게 좋은 안내도가 되곤 합니다.ㅎㅎ
저녁은 드셨겠지요.

로쟈 2008-03-13 20:55   좋아요 0 | URL
저녁은 막 먹었습니다. 사실 대중적이진 않은 책이지만 독서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겐 어필할 만합니다.^^

Mephistopheles 2008-03-13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무도 아니요 라고 답할 수 있고 정독도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고 정확하게 이야기 해야만 한다..에도 아니요 라도 답하는 저는 대체 뭐랍니다.^^

로쟈 2008-03-13 21:21   좋아요 0 | URL
'다수'에 속하시는 거지요.^^
 

어젠가 그젠가 읽은 기사에 문인들이 뽑은 '올해의 시' 기사가 있다.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이런 내용이다.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김경주 `무릎의 문양`) 지난 한 해 발표된 시 가운데 문인들이 가장 좋아한 작품은 김경주(사진) 시인의 `무릎의 문양`이었다. 도서출판 `작가`가 2007년 한 해 동안 각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시를 대상으로 문인 13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 매년 시행하고 있는 이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은 시집으로는 최금진 시인의 `새들의 역사`(창비 펴냄)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당연히 시도 찾아보았다. 저녁 시간인지라, '무릎, 하고' 불러보면서...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가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빠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를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를"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걸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 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08. 03. 12.

P.S. 너나없이 '무릎팍 도사'만 보지 말고 이런 시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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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3-1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시도 그림도.. 몸이 피곤해진 저녁에 읽으니 더 좋군요
무릎팍도사도 재밌어요..^-*

로쟈 2008-03-13 00:02   좋아요 0 | URL
'-인 것이어서' 같은 노티나는 구절들을 빼곤 저도 좋습니다. 특히 첫 세 행...

수유 2008-03-13 18:3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녁'에 부르는 이름이라 다소 노티 나도 괜찮습니다..

로쟈 2008-03-13 20:56   좋아요 0 | URL
'음절'이나 '근친' 같은 시어들이 김경주필인데, 자칫 시적 상투어가 될 우려도 있습니다. 노티 안 내려는 독자가 보기에.^^;

섬나무 2008-03-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올리신 시는 여러 번 옮겨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전 옮겨쓰기 덜 번거로운 걸로 하나 올려 드릴게요.

목돈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사람들에게 이 시가 나를 붙잡은 건 애인의 빤스 같은 시인의 목돈이 아니라 시인의 목돈 같을 이 세상의 애인들이라고 말했지요.^^



로쟈 2008-03-13 00:00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 재밌게 읽은 시로군요. 원래 솜씨 좋은 시들은 쓰는 시인이지만 저는 '땀에 절은' 시들이 더 좋습니다.^^

모래한알 2008-03-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 다 참 좋군요. 고맙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로쟈 2008-03-13 14:21   좋아요 0 | URL
^^

섬나무 2008-03-13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정서랑 좀 거리가 있긴 합니다. 로쟈님 애인이야 들킬수록 행복한 책이니 부족함이 있을리도 없지요. 오늘도 책과 진하게 한 판 하실 로쟈님을 응원하며...

로쟈 2008-03-13 14:20   좋아요 0 | URL
'목돈' 같은 시('땀에 절은 시')를 저는 좋아합니다. 그의 다른 시들이 너무 노숙해서요.^^;
 

프리모 레비에 대한 강의를 위해서 쇼아 혹은 홀로코스트 관련서 몇 권을 훑어보았다. 아직 읽지 않은 책까지 몇 권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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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08-03-17 01:23   좋아요 0 | URL
핀켈스타인를 제외하면 대부분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쓴 책 같네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란 중동에 이스라엘이라는 테러국가를 세우려고,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없으면 유대인은 멸종한다는 위기감을 전세계에 불어넣고 또 유럽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중동으로 보내기 위해서 영/미 찌오니스트들이 부풀린 이야기였지요.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의 중동 점령, 침략으로 인한 중동 분쟁을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하려는 그들의 비밀 계획은 9/11 테러를 계기로 세상에 드러났고요. 영/미 공군이 아우슈비츠로 달리는 독일 철도는 건드리지도 않고 전쟁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천 여개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 가공할 파괴와 게르만 인종학살은 아우슈비츠의 범죄를 아이들 장난처럼 보이게 했으나 이런 역사는 독일에서도 최근에야 공론화되고 있습니다. (http://www.amazon.de/Brand-SPIEGEL-Band-35/dp/3877630359) 대한민국에서 번역되는 책들이 대게 쉰들러 리스트 수준의 신파극이니 이 바보들의 행진이 언제 끝날려는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8-03-12 17:54   좋아요 0 | URL
나치와 일부 시오니스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그들의 비밀협상도).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테러국가를 세우려고" 동족 600만을 학살하거나 학살을 방조했다고 보시는 건가요? 책이 다 나와 있을 정도의 '음모론'도 음모론이 되는 건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테렌티우스 2008-03-12 08:3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최호근 박사님의 관련 책들은 아주 좋은 책들입니다...^^

http://www.alad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

이중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도 훌륭합니다.

로쟈 2008-03-12 17:49   좋아요 0 | URL
네, 의외로(?) 충실한 책이더군요.^^

2008-03-12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12 17:49   좋아요 0 | URL
네, 몇 권 추가했습니다.^^

쿠자누스 2008-03-13 00:17   좋아요 0 | URL
테렌티우스//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는 상당히 공들인 작품입니다. 영/미 식민주의자들이 북미 대륙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벗겨오는 사람에게 보조금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보았지요. 그러나 아우슈비츠에 관해서는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도 마찬가지지만 그 범죄의 국제적 배후에 대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공식사관에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쿠자누스 2008-03-17 01:18   좋아요 0 | URL
로자// 정말 6백 만명이 학살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6천 만 명이 희생되었다 해도 문제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찌오니스트, 더 정확히는 나찌-Zionist라는 세력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요한 묵시록 2:9)이니까요. 그 둘을 혼동하도록 조작하는 게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 작업이 아닐까요? 보통 사람의 상상력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 범죄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일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국제적 사변과 이스라엘의 연관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3-13 00:36   좋아요 0 | URL
'신의 섭리'나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이나 제겐 모두 '신학적'으로 보입니다...

쿠자누스 2008-03-13 01:02   좋아요 0 | URL
로자// 마인드 컨트롤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고요 미 의회에서 그 실체가 검증된 것이지요 ( There had been a number of earlier secret U.S. governmental projects to study mind-control... 출처는 http://en.wikipedia.org/wiki/MKULTRA) 정치심리학의 중요한 연구 분야이기도 합니다.


로쟈 2008-03-13 00:55   좋아요 0 | URL
제가 말씀드린 건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 작업이 아닐까요'하는 믿음입니다. 하기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분들도 제 주변엔 많으니까요...

쿠자누스 2008-03-17 22:42   좋아요 0 | URL
로자// 친일파가 조선 민족의 적이듯이 찌오니스트들은 유대민족의 적이지요. 그것을 숨기는 작업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위에 소개하신 번역본 목록이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8/03/16/0601080100AKR200803160036000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