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생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어머니>를 다루고 있다. 못본 체할 수도 없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8. 03. 28) [오늘의 책 <3월28일>] 어머니

1868년 3월 28일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가 태어났다. 1936년 68세로 몰. “그는 러시아 고전 문학과 소비에트 문학을 잇는 ‘살아 있는 다리’다.” 선배 작가인 톨스토이의 말이다. “과거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운동에 관여해 왔다면, 지금에 와서 그들은 <어머니>를 읽고 있다.”

고리키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레닌이 그와의 대화 중에 한 말이다. 그들의 말대로 고리키는 위대한 19세기 러시아 문학 최후의 작가이자 20세기 소비에트 문학 최초의 작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불린다.

 

 

 

 

<어머니>(1907)는 그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다. “…진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천벌을 받을 어리석은 놈들, 진리가 네놈들 머리 위에 떨어질 날이 있을 게다.” 노동운동을 하다 법정에 선 아들이 당당하게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한 말을 유인물로 만들어 길거리에 뿌리다 붙잡힌, <어머니>의 주인공 파벨의 어머니가 소설 마지막에서 절규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어머니>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로 자신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인식한 노동자계급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무기력한 연민의 대상, 수동적 인간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스스로도 변혁을 꿈꾸는 존재로 거듭나는 어머니의 의식 변화, 모성애가 인류애로 발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림으로써 <어머니>는 살아있는 문학이 됐다. 이 소설이 전세계 노동자계급과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이유다. 세상이 변해 문학으로 읽히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 소설은 한때 ‘이적 표현물’이었다.

고리키는 정규 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글을 쓴, 온갖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자살을 기도했던 자신의 운명을 혁명이라는 이상과 결합시켜 문학으로 빚어낸 작가다.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 고리키라는 필명은 ‘견디기 어려운’ 혹은 ‘비참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막심 고리키는 ‘최대로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뜻이 된다.(하종오기자)

08. 03. 28.

 

 

 

 

P.S. 고리키의 전기로는 니나 구르핀켈의 <고리키>(한길사, 1998), 앙리 트루아야의 <소설 고리키>(공동체, 1994) 등이 소개됐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이다. <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 같은 자전 3부작도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고리키 연구서로는 이강은 교수의 <혁명의 문학 문학의 혁명 막심 고리끼>(경북대학교출판부, 2004)가 거의 유일하다. 관련서들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한편,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6)의 마지막 장면은 http://youtube.com/watch?v=KI3jZtruxv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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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3-2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네이버 메인에 뜬 게 이 때문이군요.

로쟈 2008-03-28 23: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담비에서 중앙대대학원신문의 새연재 '구양봉의 橫書竪說(횡서수설)'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9324). 자주 언급한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에 대한 리뷰이다. 이전에 옮겨놓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서라'(http://blog.aladin.co.kr/mramor/1972805) 등과 겹쳐 읽으면 유익하겠다.

중앙대대학원신문(247호) 미학은 어떻게 정치와 조우하는가?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2000)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 소개되는 자크 랑시에르의 책이다. 비록 원문이 74쪽 밖에 안 되는 소품이지만 <감성의 분할>은 <불화: 정치와 철학>(1995)과 더불어 독창적인 사상가로서의 랑시에르가 지닌 진면목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다행히도 국역본 <감성의 분할>은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증오스러운 번역에 비한다면 훨씬 읽을 만하다. 물론 과도한 직역 탓에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건 문체에 대한 ‘감성’의 차이일 수도 있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이자 주요 개념인 ‘Le partage du sensible’를 ‘감성의 분할’이라고 옮긴 건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옮긴이의 해명(미주 1번)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le) sensible’은 ‘감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으로 옮겨지는 게 좋을 듯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le) sensible'은 그리스어 'to aisthêton', 즉 감각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대상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감성은 흔히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하기 때문에(가령 “저 사람은 감성이 예민해”라는 표현을 떠올려 보라) 원래의 뉘앙스가 거의 살아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뉘앙스를 살려야 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랑시에르의 정치(la politique) 대 치안(la police)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가 말하는 정치는 ‘치안’에 가깝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치안이란 곤봉을 든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어떤 구체적인 억압의 구조이기 이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즉, 감각적인 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적 구성원리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치안이 특정한 분할선에 의거해 감각적인 것을 배분하고 나눠놓은 질서를 다시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려는 행위이다. 이와 관련해 ‘(le) partage’의 역어로 ‘분할’을 선택한 것은 틀린 건 아니더라도 불충분하다. 나라면 ‘나눔’이라는 역어를 선택할 텐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랑시에르의 원래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몫’과 ‘공유’의 의미를 느슨하게라도 포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1998)에서 ‘(le) partage’를 법(nomos)의 어원인 그리스어 ‘nemein’과 관련지어 설명한 바 있다. ‘nemein’은 무엇보다 ‘토지’의 분할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해갈 토지의 구획을 확정해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공동체, 모든 제국의 역사의 시초”(칼 슈미트, <대지의 노모스>)이며, 그렇기 때문에 법의 어원이 된 것이다.

이런 토지의 분할은 무작위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신화적 사유(혹은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서 응당 그 토지를 소유할 자격이 있는 민족, 계급, 사람들의 등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할당된다. 특정 토지를 어떤 누군가가 소유하게 되는 것은 그의 자격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몫’인 셈이다. 가령 야훼가 유대민족에게 선사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다른 민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일한 자격과 몫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항해 서로의 자격과 몫을 ‘공유’한다. 적어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기 때문에 분할은 ‘배제’의 근거인 동시에 ‘참여’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토지 분할의 논리가 정치적 장으로 옮겨가면 그것은 특정 지위를 할당하는 논리가 된다. 가령 어떤 누군가가 지배자의 지위를 자신의 몫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이다. 플라톤은 일찍이 이런 자격(연장자, 강자, 현자 등이 타인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을 세분화한 바 있는데, 랑시에르는 이를 정치의 ‘아르케’(근본원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이런 아르케를 뒤흔들고, 더 나아가서는 아르케 자체의 해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미학과 정치는 이렇게 조우한다.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흔들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정치의 미학화”나 “미학의 정치화” 같은 말은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정치·치안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것인 이상, 그것 자체가 이미 미학이기 때문이다.

단, 이때의 미학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학이 아니라 그 어원에 충실한 미학이다. 즉, ‘감각적인 것’ 혹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to aisthêton'에 바탕을 둔 그 미학(‘감각학’으로서의 미학) 말이다. 이렇듯 랑시에르가 포착한 상동성으로 인해 가능해진 미학과 정치의 조우를 음미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08.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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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강의에서 종종 다루게 되는데, 유감스러운 건 대다수 번역본들이 절판 혹은 품절된 상태라는 점. 조속히 다시 출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번역본들과 음반, 영화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랄프 파인즈 주연의 영화 <오네긴>의 마지막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Z7aaBCekTXY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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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말에 선정/발표되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http://www.kpec.or.kr/)의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이 며칠 당겨서 발표됐다. 강제성은 전혀 없는 목록이고 그냥 일람해보는 걸로도 충분하다. 애꿎게도 나는 그걸 핑계로 몇 마디씩 보태적는 걸 월말마다 반복하고 있지만(지옥 같은 3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4월이라고 해서 '비전'이 보이는 건 아닌지라 '4월의 읽을 만한 책'을 꼽는 손길이 경쾌하지만은 않다. 개인적으론 '연옥에서의 책읽기' 정도라고 이름붙여둔다). 이것도 벌인가?.. 

 

 

 


1. 문학

소설가 신경숙씨가 추천한 문학분야의 책은 박범신의 <촐라체>(푸른숲, 2008)이다. 타이틀은 알고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몰랐는데(나는 '-체'의 일종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촐라체는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 남서쪽 17㎞에 위치하고 있는 6,440미터의 봉우리다. 난벽이고 거벽이다." 그리고 소설은 "현실에서 좌초한 이복형제가 촐라체 북벽을 등반하며 겪는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고. 더 구체적으론 "지난 시절 최소한의 장비로 당연히 셀파의 도움 없이 단 둘이 촐라체를 등반했다가 하산 길에 한명이 추락했으나 로프를 끊지 않고 끝내 추락자를 구해내서 생환하는 것으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최강식, 박정헌의 이야기가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정보는 생략하지만, 알다시피 네이버에 연재됐던 작품이라 웬만한 문학독자라면 나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듯하다.

사실 내가 아는 박범신은 <풀잎처럼 눕다> 시절의 박범신이니 어느적 박범신인가 싶다. 업데이트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범신이 만난 젊은 작가들>(문학동네, 2007)도 같이 챙겨보면서. 더불어 꼽는 건 비슷한 연배의 작가 김원우의 신작 소설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강, 2008)이다. 최근에 산문집 <산책자의 눈길>(강, 2008)과 같이 출간됐는데(관련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05770 참조), 동시대 두 중견작가의 '근황'에 대해서 보고서를 써볼 수도 있겠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선정한 추천도서는 <진인각, 최후의 20년>(사계절, 2008)이다. 이 선정은 전혀 놀랍지 않다. 나부터도 신간으로 소개한 바 있고(http://blog.aladin.co.kr/mramor/1921742 참조). 아직 책은 구입하지 못했지만 중국 최고의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이 겪은 문화혁명 기간의 시련이 핵심이야기가 아닐까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추천사에 따르면 "국민당 대신 공산당을 선택했던, 아니 대만이란 섬 대신 대륙을 선택했던 한 역사학자의 선택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어떻게 배신당하는지, 그리고 그런 체제 아래서도 인간은 왜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전기이다."

역사책은 아니지만 중국 관련서 몇 권을 더 보태고 싶다. 작가 한샤오궁의 <열렬한 책읽기>(청어람미디어, 2008)와 이미 '베스트 저자'군에 속하게 된 이중텐의 <이중텐, 중국인을 말하다>(은행나무, 2008)가 최근에 나온 관련서들이고(한샤오궁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984746 참조), 역사서로 분류되는 <중국 근대의 풍경>(그린비, 2008)도 방대한 분량의 노작이다. 특히 이 책은 국내 연구자들의 저작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이다. 이미 여러 차례 다룬 데다가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도 꼽아두었었기 때문에 군말은 필요 없겠다. 간단하게만 옮기면 "알랭 바디우의 저작들은 요즘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도 바울에 관한 이 책은 가장 넓은 독자층을 거느리는 작품이다. 저자가 다루는 바울은 사도나 성자로서의 바울이 아니다. 저작의 목적은 기독교적 신앙의 찬양이나 옹호에 있지 않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미증유의 진리가 출현하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고 그 사건 속에서 예감된 진리에 충실히 복종하고 희생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주체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바울과의 만남을 바디우는 제안한다. 나로선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와 같이 겹쳐 읽으면 좋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한다.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으론 좀 '끔찍한' 책이 올라왔다. 데릭 젠슨의 <거짓된 진실>(아고라, 2008). 저자의 책으론 <네 멋대로 써라>(삼인, 2005)부터 <웰컴 투 머신>(한겨레출판, 2006), <약탈자들>(실천문학사, 2007)까지 여러 권의 책이 출간돼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사회변혁운동가, 아나키스트, 환경운동가 등으로 다양한 사회활동에 앞장서는 저자 데릭 젠슨은 글쓰기 선생도 자처하며 많은 책을 낸다. 주로 현대사회와 그 가치에 의문을 갖는 글이 중심을 이룬다. 충격적인 사례를 소개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섬뜩하게 느끼도록 한다. 대단히 충격적이다. 그가 품는 학문과 관심 영역이 매우 다양해서인지 남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논증을 한다."

이 책을 추천한 김광웅 교수는 "우리가 일궈온 문명의 희생자들이 너무 많은데,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그의 명제이다"라고 정리한다. 알라딘의 소개가 간명한데, "노암 촘스키, 반다나 시바, 아룬다티 로이, 하워드 진과 함께 급진적인 사회 변혁 운동가로 주목받고 있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사상가 중 한 명인 데릭 젠슨이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증오와 위선적인 문화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고찰한 책." 딱 그만큼으로 읽으면 되겠다.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론 처노의 <금융 권력의 이동>(플래닛, 2008)이다. 추천사에 따르면 "이 책은 '금융제국 J.P. 모건'으로 잘 알려진 금융관계 저술가 론 처노(Ron Chernow)가 썼다. 원래의 제목은 '은행가의 죽음(The Death of the Banker)'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은행업의 종언이라고나 할까." 사실 '은행업의 종언'에 대해서 내가 특별히 애도할 건 없지만 <금융제국 J.P. 모건>(플래닛, 2007)도 소장도서인지라 뒤적여볼 수는 있겠다. 무얼 알아낼 수 있을까? 

"로스차일드, 모건, 베어링, 워버그 등 전설적인 금융명가(名家)들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눈부시게 번성했다가 어느새 광채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왜 금융계의 영원한 주역으로 남지 못하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위세를 잃게 되었을까."의 해답을 알아낼 수 있다. 20세기 정치사를 가로지르는 정치와 경제의 권력이동을 다룬다고 하니까 재미로도 자기몫은 하겠다. 더구나 "짧아서 지루하지 않고 과거의 책들에 비해 이해하기도 쉬워서 좋다"면 망설일 이유도 없겠고. 물론 금융권력의 이동에 대해서 알게 됐다고 해서 나의 신용등급이 올라가는 건 아닐 터이지만.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전혀 예기치 않게도 빌 클린턴의 <기빙(Giving)>(물푸레, 2007)이다. 추천자 자신이 미리 예상되는 '우려'들을 차단하고 있다. "대필 가능성이 농후한 유명 정치인이자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던 성 추문의 당사자라는 저자의 편력, 엎치락뒤치락하는 대선주자 힐러리의 홍보물로 곡해될 수 있는 소지, 게다가 미국의 봉사활동 사례들을 편중적으로 열거한 자국 중심적 내용 등 부정적 요소들을 첩첩이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눔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간명한 메시지는 그 모든 결함들을 한방에 제압한다.(...) ‘Taking’을 넘어선 ‘Giving’이 새로운 시대적 코드임을 주지시키는 이 책은 경쟁과 점유가 아닌 소통과 공생의 새로운 생활윤리를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찾아보니 국역본의 부제는 '우리 각자의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좋은 말인 만큼 여러 말 할 건 없고(말은 말일 뿐이니까) 그가 그런 삶을 실천해왔는가만 살펴보면 되겠다. 그래서 <기빙>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아예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물푸레, 2004)와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웅진지식하우스, 2003/2007)까지 챙겨볼 필요가 있겠다(이 자서전들의 인세는 어디로 가는 건지 확인해보면서).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하고 있는 과학분야의 책은 <21세기를 달군 후끈후끈 달 탐사 여행>(파라주니어, 2008)이다. '달 탐사'란 타이틀에서 짐작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4월 8일.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씨가 우주로 향한 온 국민의 꿈을 실현시키는 날이다. 러시아 소유즈 로켓에 한국 최초의 우주인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보내 아쉬움이 남지만 올해 말 전남 고흥에 나로 우주센터가 완공되면 우리가 만든 발사체에 우리가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대한민국의 우주 축제를 마음껏 즐기고 싶은 심정이다."가 추천의 배경이다. 때문에 "인류가 진행한 달 탐사 프로젝트의 처음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라는 것.

그런 관심에서라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청어람미디어, 2002)도 빼놓을 수 없겠다.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비행사들의 내밀한 체험,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정신적인 충격"을 테마로 하고 있는 책이니까. 또 마크 트라의 <우주 여행>(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은 보다 실전적이어서 "힘들고 고된 우주인 훈련센터에서의 훈련 과정부터 무사히 우주를 향해 떠나는 모습, 우주에서의 생활과 이들이 해야 할 일들, 우주에서 바라본 풍경 등을 생생하게 담은 컬러 사진을 함께 보여주어 간접적으로나마 우주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이다. 아예 토머스 존스 등의 <NASA, 우주개발의 비밀>(아라크네, 2003) 같은 책을 손에 들 수도 있겠는데, 정작 우리가 발사체를 쏘아올리는 러시아의 가가린우주센터에 관한 책은 거명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러시아당국의 보안정책에 위배될지 모른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존 하비의 <블랙패션의 문화사>(심산, 2008)이다. 제목 그대로 블랙 패션의 문화사이면서 "패션 일반이 드러내는 옷의 코드와 의미에 대한 상상력도 자극하는" 책이란 평이다. "블랙은 본디 밤의 색이었고, 죽음과 비통의 색이었으며, 수도사와 수녀의 색이었는데, 그것이 지위와 전문성, 권위와 권력, 더 나아가 우아함과 경건함, 섹시함의 패션으로 자리하기까지 그 이면에는 무수한 정치, 사회, 문화, 심리적 변수들이 작용했다. <패션의 체계>라는 책을 쓴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 했듯이 패션이야말로 ‘널리 퍼지지만 사라져버리는 의미’를 가진 무엇이다. 언젠가 있다가 사라져버린 검은 옷의 비밀들을 캐보는 재미를 맛보자."라는 것이 추천자의 제안이다(바르트의 <패션의 체계>는 <모드의 체계>로 번역돼 있다).  

덕분에 찾아본 것이지만 패션사에 관한 책이 많이 소개된 편은 아니다. 앤더슨 블랙 외, <세계패션사1,2>(자작아카데미, 1997)가 처음 소개된 책인 듯하고 이후에 <세계패션사>(간디서원, 2005), 제임스 레버의 <서양 패션의 역사>(시공사, 2005) 등이 더 소개되었다. 작년에 나온 필리프 페로의 <부르주아 사회와 패션>(현실문화연구, 2007)은 19세기 복식사에 대한 풍부한 정보와 도판을 제공해주는 책으로 문학 전공자들도 챙겨둘 만하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윌리엄 랑게비쉐의 <사하라 사막 횡단기>(크림슨, 2008)이다. "사막, 그것도 사하라 사막이다."로 다 설명되는 책이겠다. 사막 횡단 경험이 없기에 사막이라고 하니 나로선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정도가 떠오른다(오늘 잠깐 볼 기회가 있었다). 찾아보니 스티브 도나휴의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김영사, 2005)이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황금나침반, 2006) 등이 관련서이다. 이젠 사막 횡단도 '교양'이로군!..

 

 

 

 

10. 평전

최근에 나온 주목할 만한 평전 두 권은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민음사, 2008)과 정준호의 <스트라빈스키>(을유문화사, 2008)다. 네루다의 책은 물론 재작년에 나온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생각의나무, 2005)와 같이 읽으면 더 좋겠고, 스트라빈스키의 경우엔 그의 <자서전>(1998)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영어권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전기가 생각보다 많이 나와 있다)...

08. 03. 26.

 

 

 

 

P.S. 4월의 고전은 단테의 <신곡>이다. 개인적으론 독서강좌의 강의를 맡은 탓에 이마미치 교수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를 비롯해서 4종의 원전 번역본을 모두 갖고 있다(4종이면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체면치레 정도는 되지 않나 싶다). 기타 관련서들까지 포함하면 열댓 권은 되는 듯하다. 그래봐야 30년을 공부하고 강의하는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그 수준을 알아볼 급수는 된다(바둑 급수는 낮아도 프로기사들의 기보는 읽을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곡>의 해설자라기보다는 '길잡이' 정도가 내 역할이지 않나 싶다. 강의가 마무리되면 관련문헌들의 간략한 해제 정도는 적어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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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3-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촐라체가 -체의 일종인줄 알았는데요. 로쟈님의 이 페이퍼를 읽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그렇게 알고 있을 뻔 했네요.

로쟈 2008-03-28 00:09   좋아요 0 | URL
^^

열매 2008-03-2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근대의 풍경>은 방대하긴 하지만 '노작'일런지는 직접 보고 확인해야 될 듯 싶습니다. 2004년에 출간된 <일본근대의 풍경>과 일련의 시리즈물로 기획된 듯 한데, 그 책은 사진이나 캐리캐처 한장에 당시의 시대상을 설명하는 식의 교양서정도의 수준이였습니다. 32천원이나 주고 사서 한번 읽고 중고서적으로 팔았습니다. 이번 책은 여러 국내필진이 쓴 책이니 다를지 모르겠지만, '풍경'이라는 제목처럼 전문성과는 거리가 있을듯하네요.

로쟈 2008-03-28 00:1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분량으로 보아 '애쓴 책'은 되겠죠.^^ 저도 책은 직접 보지 못하고 소개글만 읽은 상태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트에서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090). 필자는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이고 그의 리뷰 연재를 즐겨 옮겨오던바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컬처뉴스(08. 03. 25) 사도 바울, '다시' 논쟁의 가운데 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그러나 이렇게 말한 맑스 역시 잊은 것이 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반복이 꼭 비극-소극 짝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그 예외적인 경우 중 하나가 사도 바울(10?~67?)과 철학자들의 조우이다. 이들 간의 첫 번째 조우는 대략 51년경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등의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배꼽을 움켜잡은 채 파안대소하며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희극적이라고 할 만한 이 조우 이후 거의 20세기 뒤에 이뤄진 두 번째 조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현대 유럽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조우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1937~  )에 의해 촉발되어 지난 2005년 미국 뉴욕 주의 시러큐스 대학에서 제법 ‘진지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바디우인가? 바디우 이전에도 사도 바울을 언급한 철학자들은 부지기수이다(바디우 본인이 작성한 명단만 봐도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리오타르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바디우만이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의 두 번째 조우를 실제로 현실화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디우의 바울은 ‘사도’ 바울이기 전에 ‘투사’ 바울이기 때문이다. ‘투사’ 바울의 형상을 찾는 것 역시 바디우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로 그려진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새로운 투사였고, 이 새로운 투사로서의 바울이 갖는 동시대적인 의미는 동료 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번에 국역되어 나온 바디우의 1997년 저서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원래 제목은 “성 바울: 보편성의 정초”이다)는 바로 이 두 번째 조우의 발단이자 초대장 같은 책이다. 이 초대에 응할지 안 할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겠지만, 이 초대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보편성’의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기 때문이다. 흔히 보편성이란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모든 사람/사물에 적용되는 어떤 성질/원칙이다. 그런데 바디우의 설명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정초한 보편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는 기존의 모든 차이와 분리를 무화시키는 무엇인가가 보편성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자와 후자의 보편성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실제 대상들에서 뭔가 공통적인 것을 ‘추출’해낸 것이라면(이런 보편성은 “……이지만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지만 인간이다”), 후자는 공통적인 것을 ‘창출’해냄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보편성은 “……이고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고 그리스도교인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적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를 창안함으로써 바로 이 새로운 보편성의 윤곽을 정초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 위해서 그/그녀가 반드시 어떤 특정한 귀속 조건(민족, 성별, 신분 등)을 미리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봤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28)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는 묘한 ‘도약’이 있다. 통상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것 안에서 통합된다. 가령 성별의 범주로 보면 그/그녀는 남성/여성이지만, 종(種)의 범주로 보면 인간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성별)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공통적인 것(종)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그녀의 정체성은 연속적이다, 혹은 말 그대로 동일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는 이런 연속성(동일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범주는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무화’된다. 그러므로 이때의 공통적인 것은 기존의 차이와 분리를 뛰어넘는(여기서 “뛰어넘는다”는 “극복한다”보다는 “초월한다”에 가깝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은 차이에 ‘무관심’하다) 제3항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가 창안되려면 그 이전의 주체에게서 미리 일종의 단절이 일어나야만 한다. 열정적으로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담하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을 사도 바울로 뒤바꿔놓은 것과 같은 단절 말이다. 바디우는 이 단절을 ‘사건의 도래’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단절이었다. 바디우가 그 안에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레닌에게는 1914년 8월에 발생한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 혹은 1917년 2월 혁명이 그런 사건이겠다(흥미롭게도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 시기를 레닌의 ‘철학적 계기’라고 부른 바 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실이 아니다. 사건은 “한 시대의 열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관계들의 변화”, 즉 가능성의 열림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음”) 때문이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열린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사건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건은 단절이기에 “……이 아니라 ……임”의 논리를 갖는다. 바디우에 따르면 여기에서 “……이 아니라”는 폐쇄적인 특수성들을 해체하는 과정이고, “……임”은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에 주체들이 동역자(즉, 사도)로서 임해야 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은 주체(화)와 하나의 구성적 짜임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 이 사건을 사건으로서 볼 수 있는 주체(사도)가 있다. 이 주체는 이 사건을 사건이라고, 혹은 이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의 사상가”가 “시인”인 동시에 “투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건의 사상가는 늘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하기에 시인(시인의 어원이 그리스어 ‘만들다’[ποιέω]인 점을 염두에 둬라)이며, 그 보편성에 근거해 새로운 세계를 열기 때문에 투사이다.  

그리고 두 가지 공식이 있다. “……이 아니라 ……임”이라는 사건의 논리.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 이 두 가지 공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주체는 사건의 논리에 따라 이미 도래한 사건을 저지하려는(또는 보지 못하는) 힘을 해체하고, 주체화의 논리에 따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료들을 사건에 충실한 주체로 만듦으로써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걷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진리의 사건=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바로 이것이 바디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가 왜 첫 번째 조우 때와는 달리 희극적이지 않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들이다(따라서 이 두 번째 조우에 “철학자들 한가운데의 성 바울: 주체성, 보편성, 그리고 사건”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인류의 위대한 실험이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체의 진리가 상대화되고, 인류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원칙이 의심받으면서 국가에 맞서는 정치가 정체성의 정치로 축소되어버린 오늘날, 우리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려 한다면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의 의미를 몸소 보여준 ‘우리의 동시대인’인 사도 바울을 외면할 수 있을까?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소 뒤처진 감이 있지만, 우리는 뛰어난 국역자의 도움으로 비로소 바디우가 내놓은 ‘미래를 위한 내기’에 동참할까 말까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이 내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철학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있다. 아감벤은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를 “……이지만 ……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남겨진 시간: 로마서에 대한 주해』, 2000)의 논리로 다시 읽는데, 이는 사도 바울을 “보편성의 정초자”가 아니라 “급진적인 분리의 주창자”로 읽는 방법으로서 바디우의 주체화 논리와 첨예한 쟁점을 형성 중이다.

그리고 『까다로운 주체』(1999)에서 『꼭두각시와 난장이: 그리스도교의 도착적 핵심』(2003)[이 책의 국역본 제목은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에 이르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표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의 결과 역시 곧 책으로 발간될 예정이며, 그리고 또……. 아무튼 우리에게는 더 많은 판단 자료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바디우의 말마따나 많은 사건들, 심지어 멀리 떨어진 사건들조차 여전히 우리가 그것들에 충실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이재원_출판기획자)

08. 03. 25.

P.S. 리뷰에서 언급된 아감벤의 책 <남겨진 시간>에 대해서는 '아감벤과 사도 바울'(http://blog.aladin.co.kr/mramor/10102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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