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문화의 자유와 통제'란 부제를 가진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동국대출판부, 2005)는 '사상계'란 잡지명을 지우면 이게 한국의 50년대를 다룬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프레걸'이란 생소한 조어 때문인데, '아프레'란 불어에 영어 '걸'이 결합됐다. 이런 단어가 50년대에도 쓰였다니 놀랍다. 사실 더 놀라운 건 전후 폐허의 상태에서 불과 몇년 만에 향락적인 문화가 만연했다는 점이지만. '아프레걸'을 ‘자유를 갈망하던 사회적 약자’로 봐야 한다는 필자들의 견해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50년대 사회 문화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익한 문헌이 될 듯싶다.

  

서울신문(09. 05. 01) 격동의 50년대… 댄스에 빠진 ‘자유부인’은 쾌락 때문?

6·25전쟁에서 4·19혁명에 이르는 1950년대는 격동의 혼란기였다. 전쟁의 폐허 복구 과정에서 경제원조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토대가 형성되는 한편으로 반공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사회 전반을 통제했다. 무엇보다 ‘자유’와 ‘민주’, ‘실존주의’ 같은 근대 서구화 사상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유교적 전통과 관습에 기반한 사회문화적 가치관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아프레걸= 전후(戰後)+girl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동국대 출판부 펴냄)는 무정형의 욕구가 사방으로 분출되던 1950년대 문화 현상의 실체와 내면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1950년대는 전근대사회로부터의 탈피를 강력히 추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작용했고, 격렬한 지각변동을 거치게 된다. 권보드래 동국대 교수를 비롯한 10명의 필진은 전통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 지성적 열망과 퇴폐적 향락이 뒤엉킨 채 공존했던 당대의 문화를 읽는, 나름의 독법을 제시한다. 그 중심에는 미국 문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복제의 욕구가 놓여 있다.  

저자들이 주목한 키워드는 ‘아프레걸(Apres girl)’이다. 전후(戰後)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프레 게르(apres guerre)’에 영어 단어 소녀(girl)를 합성한 이 조어는 향락, 사치, 퇴폐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분방하고 일체의 도덕적인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구속받기를 잊어 버린 여성들”로 ‘성적 방종’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신상옥 감독의 영화 ‘지옥화’, 이강천 감독의 ‘아름다운 악녀’ 등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육체적 쾌락과 돈에 대한 욕망을 직설적으로 내뿜는다. 1950년대 서울신문에 연재돼 숱한 화제를 뿌렸던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남편의 제자와 춤을 추러 다니는 중산층 ‘아프레 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화와 소설에 등장하는 이 아프레 걸들은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저자들은 아프레 걸을 ‘자유를 갈망하던 사회적 약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테면 ‘자유부인’의 주인공 선영이 댄스나 계, 자모회 같은 영역에 진출하게 된 것은 사회적 요구가 작용한 것인데 그 책임은 오로지 여성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아프레걸들의 일탈은 쾌락과 욕망을 위한 값싼 방종이 아니라 잃어 버린 자아를 되찾는 과감한 모험이라는 주장이다.  

●현모양처 여성상 계몽했던 잡지 ‘여원’도 흥미
아프레걸이 미국의 문물을 소비하고, 댄스와 같은 미국식 문화를 향유함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을 대변한다면, 1950년대 지적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던 잡지 ‘사상계’는 미국식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에 기반한 지식 엘리트의 문화를 상징한다.  

1950년대 중반 창간된 여성지 ‘여원’을 통해 여성담론의 변화를 읽어 내는 대목도 흥미롭다. 현모양처 여성상의 계몽을 표방했던 ‘여원’은 짧은 기간이지만 독신여성 같은 다양한 여성 담론을 형성해 냈다. 하지만 곧 농촌여성을 중심으로 한 비도시 하층민 여성이 주 독자층으로 형성되면서 ‘여원’의 편집방향은 대중적 통속화의 길을 걷는다.(이순녀기자)  

09. 05. 04. 

P.S. 1950년대 문화읽기에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몇 권을 골라놓는다(기본서는 역시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일까). 1950년대 영화를 다룬 책들이 몇 권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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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눈길을 끄는 책에 대한 서평도 없는 김에 미처 챙기지 못했던 책의 서평을 옮겨놓는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이 그것인데, 지난 3월말에 '아이아총서'의 한권으로 출간됐다. 근래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에는 아예 '오키나와학'이라는 것이 성립돼 있으며 <전장의 기억>(이산, 2002)의 저자이기도 한 도미야마는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하 후유의 사상을 통해 '폭력'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고찰한다. '폭력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저항'의 출발점이 되어줄 만하다고 하므로 관심을 가져봄 직하다.  

교수신문(09. 04. 27) 죽임에 처한 자들의 ‘지각’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오키나와’를 다룬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때 오키나와는 일본열도의 서남부 끝에 위치한 섬들을 지칭하는 단순한 지리적 명칭이 아니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오키나와는 물론 지역명이지만, 이 지역을 그렇게 명명한 폭력을 되묻기 위한 거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오키나와라는 이름은 지구 전체를 분할해 명명해온 지정학적 시선과 힘을 본원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지정학에 대한 되물음은 역사적 시선과 중첩돼있다. 그 시선은 바로 제국일본이라는 과거 통치 권력의 현재적 잔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일본은 현재 동아시아라고 불리는 지역을 스스로의 판도 내에 포섭하면서 유지돼온 통치체제이다. 이 역사는 현재 ‘식민통치’ 혹은 ‘침략’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이 식민과 침략이라는 말에 내포된 지역적 분할을 문제 삼게 한다. 식민과 침략으로 이 역사를 정의할 때, 일본(식민자/침략자)과 오키나와·타이완·조선(피식민자/피침략자)을 가르는 지역적 분할은 자명한 것으로 고정된다.  

이때 식민과 침략의 책임과 피해는 고스란히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한 국민국가 단위로 승계된다. 그 결과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이 드러냈던 복잡다단한 폭력의 양상은 안정적으로 정리된다. 현존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해 통치했던 역사, 이 투명한 인식 안에서 규명될 수 없는 것은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식민지라고 불리던 지역의 경험을 비교 검토해 더 자세한 실상을 드러내 고발하는 일이거나, 제국이라 불리던 침략의 주체가 ‘진출’이라는 말로 스스로의 경험을 여러 경로로 분식하는 일뿐이다. 도미야마는 이런 인식과 사유의 틀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지금부터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오키나와 역시 식민지라는 말로 수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식민주의라는 개념을 지리적 영역인 오키나와에 적용하고 분석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오키나와는 다른 식민지들과 나란히 놓이게 되고, 상하관계 속에서 서열화되고 비교되면서 공통성이나 이질성으로 표현되기 쉽다. … 다시 말해서 식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그 어떤 문맥을 문제 삼든 간에 먼저 어디가 식민지인가라는 지리적 공간의 문제로 치환되고, 이어서 이 지리적 공간이 이미 설정된 보편적인 식민주의를 체현하는 방법으로 정의되고 분석되며 이해돼 왔다. … 바꿔 말하면 식민주의를 지리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식민주의 혹은 탈식민주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整地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는 정지되지 않은 빈터로 남겨지게 된다.” 

즉 오키나와는 식민과 침략이라는 타동사적 어법이 전제하고 있는 ‘주/객’ 혹은 ‘능동/수동’의 분할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를 드러내는 계기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키나와는 기존의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잔여의 경험, 결코 언어가 다다를 수 없는 경험을 적시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오키나와라는 물음 앞에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정학적 분할은 분석과 비판의 힘을 잃는다. 과연 오키나와는 일본인가. 오키나와는 일본의 식민지였는가 미국의 점령지였는가. 이 하나 하나의 물음에 답하다보면 오키나와는 갈기갈기 찢겨진 분열적 역사경험을 고백하게 될 터이고, 이 때 오키나와라는 이름이 하나의 균질적이고 통일된 정체성을 드러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식민과 침략이 자행한 폭력이라고 도미야마는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폭력이 결코 철학적이거나 이론적으로 추상화돼 사념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이가 감지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에 대한 저항은 “살해당한 시체 옆에 있는 자가 획득해야 할”가능성이다. 따라서 이 폭력을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폭력이다’라는 식으로 폭력의 범주를 유형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사례를 환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표현상의 절박함이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폭력을 분석/비판하고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 더 이상 발화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혹은 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경험을 전달하는 ‘記述’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총살을 기다리는 자는 폭력에 벌거벗은 채 노출돼 있기에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죽은 것은 아니기에 말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폭력 비판의 출발점, 그 저항의 거점은 바로 이 순간, 말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지만 아직 상실되지 않은 순간이다.

“압도적인 약세의 위치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누군가를 기지의 폭력으로 압살하는 것이 예정된 어떤 특정 시대나 사회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결말이 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 존재하며, 이런 상황에서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기술은 예감하는 것에서 재개해야 한다.”『폭력의 예감』은 그래서 폭력이 다가옴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 따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예측과 대비는 이미 폭력행사의 주체와 객체를 확정하는 지식과 技術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압도적 약세의 위치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이들이 결코 지닐 수 없는 사치스러운 도구에 다름 아니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예감은 이미 태생적으로 방어태세를 습득한 이들의 ‘지각’이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저항은 이 지각을 어떻게 ‘언어표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때 언어는 중립적인 척하면서 보편적 시각틀을 제공하는 무시간적 매체이기를 그친다. 이와 달리 도미야마는 “글은 밀폐된 교실에서 사용되는 교과서가 아니라, 버려지는 전단지이며, 팸플릿이라는 사실임을 주지하고 말을 자아낼 때의 긴장감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단지와 팸플릿의 언어, 어찌할 수 없는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발화하는 자의 언어, 과연 폭력은 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타격을 입을 것인가. 총살을 기다리는 자의 언어와 저항으로까지 일상속의 스스로를 전락시키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상처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도미야마는 조심스럽게 경고하고 있다. 이 전락을 성취하는 일, 여기서부터 폭력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저항은 출발해야 할 것이다.(김항 고려대 HK연구교수·문화연구)   

09. 05.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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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5-04 12:27 
    바꿔 말하면 식민주의를 지리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식민주의 혹은 탈식민주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整地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는 정지되지 않은 빈터로 남겨지게 된다.
 
 
람혼 2009-05-03 01:08   좋아요 0 | URL
김항 선생의 글이군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폭력의 예감>은 저도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입하게 되어 낮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읽은 책입니다. 특히나 '겁쟁이들'이라고 하는 '문제적' 정체성으로부터 폭력의 '지각'과 '예감' 문제를 들고 나오는 데에서는 짜릿한 전류까지 맛보기도 했습니다. 근대성과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향후 반드시 참고해야 할 문헌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Guattari와 Poulantzas에 다시금 주목하게 해준 것도 이 책의 '공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로쟈 2009-05-03 11:00   좋아요 0 | URL
아, 벌써 읽으셨군요! 폭력에 대해서 뭔가 쓰시는 건가요?^^

람혼 2009-05-03 13:17   좋아요 0 | URL
^^

2009-05-03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3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3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5-05 08:32   좋아요 0 | URL
'미리'가 안되는 일이죠.^^;

게슴츠레 2009-05-03 13:09   좋아요 0 | URL
서구의 이론들을 가지고 또는 그에 기초해 만든 독자적인 이론틀을 가지고 나름대로 일본의 문제나 동아시아의 문제를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일본의 학계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일단 먼저 듭니다. 최근 들어 제 자신이 어떤 위치, 특히 어떤 '지리적 위치'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지 느끼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책들에 관심이 이래저래 쏠리게 되는군요.

로쟈 2009-05-05 08:32   좋아요 0 | URL
대담집 <세계사의 해쳬>를 읽으면서도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제국러시아의 코레야 견문록

이번주에 내가 관심도서로 분류한 인문서는 대담집 두 권이나 아직 언론리뷰가 뜨지 않는다. 내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덕분에 일이 헐거워졌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은 터라 다행이긴 하다. 대담집 대신에 잠시 눈길이 간 책은 프랑스인 고고학자가 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글항아리, 2009).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한국 관련서가 유럽에서 다수 쏟아져나왔는데, 이 책은 내용이 충실해서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다고도 한다. 그게 어떤 수준인지 호기심을 가져봄 직하다.

경향신문(09. 05. 02) 프랑스인 눈에 비친 몰락앞둔 제국의 흔적 

“흥미로운 일이다. 이 정부에서는 항상 큰 개혁은 옷으로 하려니 말이다. 과거에는 주민에게 담뱃대 길이를 줄이라고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옷소매를, 모자챙을 줄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철도와 광산개발에 관련된 기술자문을 했던 에밀 부르다레는 대한제국을 이렇게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오래된 왕조의 완숙한 예술과 장인들의 숨결, 직물·도자·그림·조각 등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탄복한다. 190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원제 ‘En Core’e’)은 1900년대 초반 몇해의 한국을 세심하고도 애정 어린 눈길로 그려냈다.  

1882년 미국인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조선>을 펴낸 이후 1910년까지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이탈리아어 등으로 된 한국 관련 서적은 50종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에 관한 인상기나 견문기 수준에 머무는 게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4년여의 체류에서 나온 부르다레의 책은 충실성 덕분에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필자는 고종이 이끈 대한제국이 변화하려는 노력에도, 스스로의 명백한 한계와 일본의 간교한 식민지 포섭활동으로 인해 무너질 수 없었던 슬픈 현실을 증언한다. 그는 앞선 인용문처럼 조선 정부나 관료들의 형식적인 개혁을 비판하는가 하면, 위조화폐로 조선의 쌀을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간 뒤 비싼 값에 되파는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한다. ‘불결’하고 ‘악취’나는 조선의 근대화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조선의 문화에 대한 세밀한 관찰도 돋보인다. 시내를 활보하고 극장에서 배우에게 추파를 던지는 양반의 거들먹거리는 모습, 강한 식탐으로 먹고 마시고 취하는 장면, 손님이 가격을 물어봐도 대꾸 않는 행상, 아무데나 쓰러져 자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건축에 대해서는 “건물은 풍경을 강조하는 기분을 자아내며 풍경은 건물의 개성을 의도적으로 부추긴다”면서 후한 점수를 준다.

특히 양반의 모습, 문화유적, 축제 등을 찍은 흑백사진 30장과 극장 ‘협률사’ 내부구조 및 공연장면, 궁중연회 식순, 전차를 타고 교외로 놀러가는 젊은이들의 유람문화 등은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한윤정기자) 

09. 05. 02.  

P.S. 외국인들이 견문록은 집문당에서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완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에서 언급된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집문당, 1999)도 그 시리즈의 책이다(번역 수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러시아인의 견문록으로는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코레야 1903년 가을>(개마고원, 2006)과 곤차로프의 <러시아인, 조선을 거닐다>(한국학술정보, 2006) 등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서도 나옴 직한데,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를 기획한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풀빛, 2002) 외 다른 책이 있었던가 싶다.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대표적인 한국 관련서들의 내용과 영향 등은 짚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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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3   좋아요 0 | URL
주머니 사정만 허락된다면 이런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고 싶습니다만...신복룡 씨 저 책은 상당히 재미있더군요.스웨덴의 구스타브 왕자가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 총독부 후원하에 우리나라 야생동물을 왕창 잡아서 박제로 만들어 자기 나라로 가져간 사연이 있는데...나라를 빼앗기니 동물도 수난이죠.

로쟈 2009-05-02 18:19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관심을 가지실 줄 알았습니다. 헌책방에 아직 안 나온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3 16:35   좋아요 0 | URL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한 것 몇권은 저도 있어요. 헌책방에서 구한 게 대부분이죠.비숍 것은 이인화 번역본이에요.집문당에서 나온 시리즈는 도서관에 있더라구요.우리나라 동식물 연구서가 몇권 나와서 관심있게 본 적이 있습니다.혹시 관심 있으시면 얀코프스키에 대해 알아보세요.일제시대 때 부자가 북한에서 조선 호랑이 사냥하던 폴란드 계 러시아인입니다.작가는 아니라서 바이코프만큼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최근에 북한에서 맹수사냥하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남겼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로쟈 2009-05-05 09:04   좋아요 0 | URL
특이하게도 폴란드 계 러시아인이 많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5 15:56   좋아요 0 | URL
예.제가 소수민족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에 관심이 많아서요.바이코프도 우크라이나 사람이죠.그런데 고골리는 우크라이나 사람인가요,아니면 우크라이나에 산 러시아 사람인가요?

로쟈 2009-05-05 16:50   좋아요 0 | URL
고골은 우크라이나 태생입니다. 스무살에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합니다. 한데, 러시아어로만 작품을 썼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이란 정체성은 거의 없었던 듯싶어요. '러시아인'으로서 사고하고 작품을 썼습니다. '소수민족으로 유명해진' 경우는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5 17:0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2009-05-03 00:28   좋아요 0 | URL
집문당에서 나온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의 번역은 '논란이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학생들한테 과제로 번역을 나눠 맡기고 모아서 책으로 펴낸 모양인데, 정말 비양심이랄 밖에...-_-^

노이에자이트 2009-05-03 16:36   좋아요 0 | URL
음...우리나라 학문이 발전하려면 제발 위계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찢어쓰기 번역을 중단해야 합니다.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시간만 된다면 작년말에 나온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와 함께 묶어서 읽어보고 싶다. 20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 좀 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하고. 초심자라면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이학사, 2007)와 함께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레비를 당혹하게 만든 사르트르의 '선'과 '악'을 미리 만나볼 수 있다.

문화일보(09. 05. 01) '진리의 화신’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사르트르는 그저 국가원수처럼 환영받고 신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의 국가였다. 그는 진리의 화신이었다. 그는 전 지구적 차원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사람들은 그의 면죄부를 먼저 획득하고자 서로 다투었다. 실제로 1950년대는 물론 1960년대에도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밀사를 파견하지 않은 민족해방운동, 혁명집단, 소수과격파, 압제의 피해자들, 같은 정신 신조를 가진 자들, 반란을 일으키고, 총살당하고, 박해당하던 학생들의 연합은 거의 없었다.”

책이 프랑스 철학자 클로드 란츠만의 저작을 인용, 장 폴 사르트르를 설명한 말이다. 책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한 사람의 철학자나 문학가가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였다. 어떤 철학적, 정치적, 문학적 사유로 그는 소란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20세기를 그처럼 완벽하게 그 자신 속에 구현할 수 있었을까.  



책은 제목 그대로 사르트르 평전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40세였다”라는 책의 첫 문장에서 보이듯 그의 전 생애가 오롯이 담긴 평전은 아니다. ‘세기의 인간’으로서 사르트르의 삶을 다루되,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의 공정한 평가에 무게 중심을 두고 내적 일관성과 모순을 파헤치는 데 치중했다. 문제는 잣대다.

책의 저자는 프랑스 신철학의 기수이자 대표적인 참여 지식인으로 꼽히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서 스탈린 독재와 집단수용소의 존재를 묵인한 서구 좌파를 통렬히 비판, 프랑스 지성계를 들쑤신 이력에서 보이듯 사르트르를 보는 눈은 착잡하다. 어떻게 ‘존재와 무’, ‘구토’로 대표되는 절대 자유를 추구하며 니체주의적 경향을 가진 인물이 모택동주의자의 기관지 ‘인민의 대의’를 지지하고,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의 전체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 사르트르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사람이 이것을 하고, 또 저것을 할 수 있는가.

책이 출간되기 20년 전, 레비가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감한 이유다. 당연히 책은 사르트르가 두 인간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중에서 한 사르트르는 ‘선(善)’이고, 또 다른 사르트르는 ‘악(惡)’이다. 현존 프랑스 최고 지성이자 작가인 레비는 20년 동안 “가슴에 안고 지내며 꿈을 꾸고 되새김질하다” 쓴 책에 걸맞게 책은 풍성한 전거(典據)에 바탕해 바람몰이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자체가 한 국가였던 사르트르의 면모는 보부아르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 편력에서 그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만년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2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고 어느 순간 철학적인 실패를 예감하다 끝내는 과거의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사르트르 사상의 여정은 보다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레비가 이 책에 ‘철학적 탐구’라는 부제를 붙인 배경이다. 



약 10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은 묵직하고, 다루는 내용 또한 20세기 지성사를 종횡무진하지만 책을 읽기는 의외로 경쾌하다. ‘아메리칸 버티고’에서 보여준 예리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사르트르의 삶과 사상의 단절, 이중성에 주목한 책은 그 후 적잖은 반박을 불러왔다지만 평전으로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임에 틀림없다. 쉽잖은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서도 책의 내용은 물론, 레비 특유의 문체와 책읽는 재미까지 고스란히 살려 놓은 번역자의 역량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김종락 기자) 

09.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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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가 만난 사람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6-24 18:34 
    두어달 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묵직한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이 출가된 데 이어 이번엔 사르트르 자신의 묵직한 책이 출간됐다. <시대의 초상>(생각의나무, 2009)이란 제목이 붙은 그의 <상황4>가 우리말로 번역된 것. 그의 다양한 시론(時論)들이 <상황> 시리즈에 묶인 건 알고 있었고, 그 중 <상황2>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란 것도 알고
 
 
merci 2009-05-02 08:59   좋아요 0 | URL
오, 관심 가는 책이 또 하나 나왔군요! 어서 보아야겠네요. ㅋㅋ
그런데 위에서 추천해주신 <지식인의 두 얼굴>은 사르트르 부분만 관심이 있어서 예전에 봤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지극히 사적인 여성편력에 대한 비난만으로 - 심지어 비판도 아니고 - 가득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6   좋아요 0 | URL
폴 존슨이 원래 진보파였다가 70년대에 전향한 뒤로 그런 책들을 많이 썼지요.특히 진보파들의 추문을 많이 파헤쳤구요.전향자들은 그런 심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5   좋아요 0 | URL
앙리 레비<자유의 모험>에도 사르트르를 많이 비난했더라구요.그렇다고 우익계열을 칭찬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우상파괴 작업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지식인들이 읽는 지식인'이란 의미에서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는다. 며칠 전인가 전화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는데, 그게 기사에 인용돼 있다. 좀 뻘쭘하다. 인터뷰이가 몇 사람은 될 줄 알았다. 기억에 내가 답한 질문은 '최근 한국에 어떤 사상가/이론가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유행이 있는가?" 등이었다.

1-슬라보예 지젝(사진제공 : 마티 출판사)
2-가라타니 고진
3-안토니오 네그리(사진제공 : 세종서적)
4-조르조 아감벤(사진제공 : 새물결 출판사)
5-자크 랑시에르(사진제공 : 궁리)

주간한국(09. 04. 30)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구일까 

들뢰즈, 벤야민, 라깡. 한때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지식인이다. 해외 유명 저널에서 발표, 인용되는 지식인은 국내 지식인 사회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일반 독자들이 신문과 전문잡지를 비롯한 매체를 통해 혜안을 얻듯, 지식인 역시 국내외 석학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 현안을 분석하게 된다. 국내 지식인들의 저서, 비평, 칼럼, 강연, 토론 등을 통해 소개, 인용되는 이른바 ‘지식인의 지식인‘은 우리 지식사회와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최근 정보를 얻는 매체가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되는 해외 석학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소개된 사상이 인용되는 기간은 더 짧아 졌다. 국내 지식인 사회를 움직이는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굴까? 2000년대 들어 최근까지 한국 지식인 사회 이슈가 된 지식인을 소개한다.

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을 빼놓고 200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를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수 년 전 젊은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라깡을 더듬어 올라가 정신분석학을 비평에 도입했던 시도 역시 지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1949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류블랴나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해 1972년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자크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전공해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헤겔의 독일 관념론 같은 철학적 주제를 SF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통해 분석한다. 



19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출간하며 지식인 사회에 이름을 내민 그는 이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 등 논쟁적인 저서를 발표해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이후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학자로 손꼽힌다. 또한 이라크 전쟁, 9.11테러, 전체주의 같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발언하면서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인이 됐다. 



최근 국내에 그의 대표 저서 ‘시차적 관점(마티 출판사)’이 번역 출간됐다. 지젝은 ‘어떤 천체를 두 지점에서 보았을 때 대상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을 뜻하는 천문용어 ‘시차(Parallax)’에서 개념을 빌려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관점이 발생하는 ‘시차적 간극’에 대해 설명한다.

국내 지젝에 관한 지식인들의 발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도올 김용옥은 최근 한 일간지의 대담에서 ‘효경’을 주해ㆍ번역하는 데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하면 동ㆍ서 문명을 비교하면서 ‘철학의 록스타’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시각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해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논객 김정한은 ‘그대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서 지젝의 말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최근 문학평론가 김홍중 씨는 비평 ‘행복의 예술, 그 희미한 메시아적 힘’에서 지젝의 이론을 빌려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 바 있다. 문화연대 부설 연구기관의 무크지 ‘문화사회’ 3월 호에서는 발터벤야민의 역사철학과 슬라보예 지젝 이론을 다루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있게 한 지식인이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善男) 이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썼다. “가라타니 고진은 저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지젝의 책이 2006년에 출간된 점에 미루어 볼 때 2001년 작인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평론가에서 출발해 역사, 건축, 철학 등 전방위 문화예술 평론가로 변신했다. 비서구인의 주변부적 문제의식과 서양의 근현대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결부시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사유방식으로 서구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인문학계의 무라카미 하루키’라 할 만큼 국내 젊은 인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2006년 국내 번역 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고진은 2003년 “미국은 1950년대에, 일본은 1980년대에, 한국은 1990년대 말부터 문학이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 바 있고, 그의 언급을 시발점으로 한국문학의 위기가 문학계 화두가 되어 왔다.

문학평론가 서영채 씨는 ‘역설의 생산: 문학성에 대한 성찰’(문학동네 2009년 봄호)에서 “문학 위기에 대한 담론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되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2004년에 발표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씨 역시 ‘추억과 집착-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안과 밖’ 2007년 상반기호)에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문학은, 비평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라는 말로 고진이 국내 문학계에 던진 파장을 설명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직접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 씨는 고진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국문학계를 비판한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을 지난해 출간한 바 있다. 



안토리오 네그리
이탈리아 좌파정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1933년 이탈리아 파노바에서 출생했다. 21세기 가장 급진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아우토노미아(자율성, 자주성)’운동의 창시자다. 1957년 23세 때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대 후반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발전시켜 이탈리아 비의회좌파운동에 참여했다. 현재 마르크스에서 들뢰즈,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 받는다. 대표적인 저서는 ‘지배와 사보타지(1977)’,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1978)’, ‘제국(2000)’ 등이 있다. 



지난 해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다중(Multitude, 세종서적)’이 국내 출간됐다. 2000년 출간된 ‘제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형태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지배 권력의 대항자였던 인민, 대중, 노동계급의 개념을 세계화시대를 맞아 ‘다중’으로 지칭한다. 네그리는 세계화의 네트워크 권력이 더 치밀하게 강화될수록 다중의 저항적 잠재력도 커진다고 말한다.

국내 젊은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그의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그의 최근 저서 ‘다중’은 자율평론(http://waam.net)에 기고된 원고의 일부가 국내 유통되면서 원서 출간과 동시에 국내에 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인문·사회과학학 교육원 ‘다중지성의 정원’은 네그리의 ‘다중’개념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이곳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안토니오 네그리를 비롯해 마르크스, 들뢰즈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핫(Hot)한 인물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다. 최근 문예지와 학술지를 중심으로 이들의 저작과 이론을 비평에 도입한 평론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이들의 저서가 번역, 출간되는 수가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42년 로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미학적 시각을 지닌 비평가로, 현재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미학과 정치를 넘나들며 인간을 ‘말하는 동물’로 정의했다. 미셸 푸코의 생철학과 칼 슈미트의 비상사태를 토대로 로마시대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현대 정치를 비추어 쓴 책 ‘호모 사케르’로 주목받았다. 대표 저서로 ‘아우슈비츠의 남겨진 것’(1998), ‘예외상태’(2003) 등이 있으며 지난 해 ‘호모 사케르’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철학자 이진경은 저서 ‘모더니티의 지층들’에서 아감벤의 이론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현대사회론을 포괄적으로 소개한 이 책에서 이진경은 현대자본주의와 인권의 개념을 설명하며 아감벤을 도입한다. 문학평론가 복도훈 씨 역시 ‘목소리가 사라지는 곳으로 문학이 가야한다’(문예중앙 2007년 가을호)에서 아감벤과 지젝의 이론을 소개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소리’와 관련된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수제자였던 자크 랑시에르는 1960년대 ‘자본론 읽기’의 공저자로 이름을 알렸다. ‘자본론 읽기’가 1990년대에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랑시에르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크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랑시에르는 스승인 알튀세르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영화광인 그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분석한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지난 해 ‘무지한 스승’, ‘불화’ 등 6권의 책이 잇따라 국내 번역 출간되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됐다.

인문학, 특히 문학 비평분야에서 랑시에르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최근 문학 비평이 ‘언어의 새로움’에 치중된 상태에서 ‘말 없는 말’(문학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소통의 언어와 달라지며 문학성을 쟁취한다는 랑시에르의 문학 개념) 등 랑시에르의 이론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기 좋은 텍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비평 ‘소설과 정치’에서 작가 황정은의 소설을 분석하며 랑시에르의 저서 ‘감성의 분할’을 인용하고 있다. 평론가들의 반응을 반영하듯, 계간지 ‘문학과 사회’ 올해 봄호에서는 자크 랑시에르의 인터뷰를 특별기고 형식으로 소개했다.

이들 ‘지식인의 지식인’은 흔히 해외 유명 인문 사회과학 저널을 통해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된다. 국내에서 발견되는 특징 중 하나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지식인의 지식인’의 저서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틈새 출판시장’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된 지젝의 저서들과 최근 1,2년 사이 각광받기 시작한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가 이에 해당된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이미 ‘읽을 사람은 다 읽은’ 유명 저서가 됐다. 모두 포털사이트 서평 카페에서 인터넷 서평꾼을 통해 소개된 후 유명세를 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 서평꾼 중 한 명인 로쟈는 전공인 러시아와 비교할 때도 한국에 유독 많은 지식인이 소개되고, 이들 서적이 소비된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지극히 한정된 지식인 사회에서 사상가들의 이론이 소개된다.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푸코와 들뢰즈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대학과 대학가 주변 등 이들 사상가들의 이론이나 고급 담론을 소비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상가와 이론이 소개되고 맛보기 식으로 회자된 다음 (*다음) 지식인, 이론가로 넘어간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지식인의 이론과 저서를 소비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게 된 셈이다.(이윤주 기자) 

09. 05. 01.  

P.S. 기사에서 랑시에르가 "지난 해 ‘무지한 스승’, ‘불화’ 등 6권의 책이 잇따라 국내 번역 출간되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됐다."고 했지만, <불화>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근간예정인 책이다. 대신에 놀랍게도 <문학의 정치>(인간사랑, 2009)가 최근 번역돼 나왔다. <미학 안의 불편함>과 마찬가지로 아직 영역본도 나오지 않은 책이다. 놀라운 속도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전례를 보아 읽을 수 있는 책인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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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5-01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사조들이 빠르게 국내에서 유통된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식인 그룹의 고담 준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저는 '고담준론' 자체에 비판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고담준론을 어느정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뛰어난 '정치가'의 부재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울러 미국 철학자 로티의 (미국에서) 좌파들의 몰락은 그들이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주장만을 일삼았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조들의 소화와 아울러 기존의 지배적인 담론들에 대한 재해석도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분량이 적당하다'는 점이 강점인 것 같군요^^ 랑시에르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은 참신하지만, 이미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정치'라는 단어의 용례와는 그 개념이 다르고 너무 한정적인 의미로 축소되어 과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아무튼 랑시에르의 '치안'의 개념은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 지는 모르지)만)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학자 옥쇼트의 '정치'의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보수적인 옥쇼트가 생각하는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에 '진정한 정치'가 있다는 게 랑시에르의 주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9-05-01 23:54   좋아요 0 | URL
분량마저 '배신'한다면, 전혀 읽을 수가 없을 듯한데요.^^ 그래도 제가 읽고 싶은 책은 좀 두툼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입니다...

2009-05-0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1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