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http://weekly.changbi.com/blog_post_192.aspx). 내가 주문받은 것은 '인문서 번역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일이었고 마침 최근 출간된 <번역비평>을 읽고 있었기에 그걸 실마리 삼아 몇 자 적은 글이다. 새삼스럽지 않은 얘기를 '진지하게' 늘어놓아 멋쩍긴 하다. 그리고 최종원고를 보낸 지 한 시간만에 글이 올라와 놀랍기도 하고(!).
창비주간논평(07. 12. 04)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최근에 나온 《번역비평》(고려대학교출판부) 창간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작년에 발족한 한국번역비평학회의 연간 학술지이다. 지난 10월 영미문학연구회의 정기학술대회에서도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라는 주제가 다뤄진 걸 보면, 번역에 대한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의식은 어느 때보다도 널리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인터넷을 통해 활성화된 번역비평과 작년에 불거진 대리번역 파문 등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비평》과 학술대회 발표문들을 읽으며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우려할 만한 번역현실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박상익 교수가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통해서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한 바 있다. 그대로 옮겨보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번역에 적대적인 한국현실
이러한 현실이 끌어안고 있는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은 번역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팎의 문제들이다. 일부에서는 오역 집어내기에만 열중하는 번역비평의 비생산성을 꼬집기도 하지만, 사실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라고 할 때 '오역'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대부분 무지와 무성의에서 비롯된 단순오역들이다. 가령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를 서로 바꿔 옮긴다거나 라깡의 '대학담론'(discourse of University)을 '우주에 대한 강좌'로 옮기는 식이라면 독자의 '좌절과 환멸'은 불가피하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혹은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란 '고상한' 번역학적 논란이 우리의 현실에 잘 부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번역 텍스트의 문제라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번역을 양산해내는 번역의 컨텍스트 문제이다. 그래서 《번역비평》에서도 특히 공감하며 읽은 글들은 '번역출판과 현장'의 목소리들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번역이 중요하다 말하지 말라"라고 일갈한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말을 빌리면,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며, 서평의 제도와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며,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 및 이용의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고, 번역의 지형도가 번역에 적대적이고, 학문 제도와 구조가 번역에 적대적"인 현실이 문제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다. 이만하면 총체적으로 적대적인 상황 아닌가?
인색한 번역료, 척박한 서평문화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란 사실은 인문서 번역의 경우 더욱 실제적이다. 표정훈은 매절번역료 원고지 1매당 4,000원 혹은 인세율 5%를 기준으로 번역료 수입을 계산했지만, 요즘 인문서 번역의 대세인 인세계약을 기준으로 하면 저작권이 있는 도서의 경우 보통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6~8%이다. 정가 20,000원인 책 2,000부를 초판으로 찍는다고 할 때, 역자의 손에 떨어질 수 있는 최대 수입은 240~320만원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인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고급인력'이 최소한 두세 달을 꼬박 투자하여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서는 결코 내세울 만한 수준이 못된다. 게다가 고급 인문서의 독자층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는 현실은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박차고 '불만의 번역자'를 자처하고 나설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동서양명저 번역사업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이 사업에 배정되는 1년 예산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채 값에 불과하다. '언 발에 오줌 누기'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번역서 서평문화도 척박하긴 마찬가지다. 표정훈의 비교에 따르면, 북리뷰의 프론트면의 서평 양에서 《뉴욕타임즈》가 국내 신문보다 3배 많다. 이런 서평란이 《뉴욕타임즈》에서는 30~40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반해서, 국내 주요 신문은 5~8면이다. 게다가 씨스템상으로 책을 꼼꼼히 읽고 평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양산되는 국내의 서평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출판인회의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같은 유관기관에서 문제가 많은 오역서를 '이달의 책'으로 선정하는 코미디가 간혹 벌어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문과 달리 서평은 학술업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학술·교양서적이 번역되어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이 관련 학술지에서조차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다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적인' 인간관계가 고려되는 탓에 실질적인 '번역비평'이 이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돈독한 인간관계 속에서 번역문화만 낙후돼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번역문화'라면 과연 어떻게 개선해가야 할 것인가?
한권의 번역서를 책임진다는 자세로
'가난한' 번역자들이 자주 겪는 것이지만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 이용의 편익을 최대한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해봄직하다. 하지만 고전 번역서들의 번역이 아직 미흡하여 '지식의 지형도'를 제대로 그려볼 수 없다는 불만은 인과응보이기에, 현재로선 감수하는 수밖에 없겠다. 단, 지금 세대가 여전히 필요한 번역에 손을 놓는다면 그러한 불만을 다음 세대에까지 또 물려주는 도리밖에 없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하지만 인문학자나 인문학도 들이 저마다 한권의 번역서는 책임진다는 각오로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바닥에 땀을 좀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족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우리의 고전과 각종 관찬사료 들의 번역을 체계적으로 추진한다고 하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고전문헌 가운데 우선적으로 6,400여 책을 번역자를 양성해가며 다 번역하려면 4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한다. 2003년에 창립된 한국키케로학회에서 30권으로 기획하고 있는 키케로전집 번역에는 50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한다. 각 학회나 전공분야에서 그 정도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향후 반세기 정도 혼신의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일찍이 '번역대국'의 길에 들어선 일본과의 격차를 좀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의 컨텍스트를 바꿔나가야
물론 열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다. "번역이 힘든 건데, 그럼 일본어·영어로 읽으면 쉽지 않은가?" 혹은 "앞으로 100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라는 인식과 판단이 한국어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태도가 된다면, 인문고전 번역의 미래는 없다. 이미 자연과학에서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인문학에서도 한국어는 변방의 언어, 기지촌의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과연 인문학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일까?).
대학강단에서도 영어가 공용어로 '강요'되고 있는 징후적인 현실은 분명 번역에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이 아니라면, 번역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며 번역업적의 평가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학계의 제도와 관행을 이제부터라도 바꾸어야 한다.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하여 교수 이름으로 내던 관행부터 타파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런 관행에 익숙한 이들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할 리는 없지 않은가?).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도 독자들의 좌절과 환멸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는 시험에 계속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현실이어야 할까.
07. 12.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