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번역 현실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로 관심을 모았던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에 나오는 지적이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 번역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함께,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한국의 인문서 번역 현실과 그 적들’, 창비주간논평, 2007. 12. 4). 뼈아픈 지적이고 고민을 담은 주장이긴 하지만,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 우리의 척박한 번역문화가 아니었던가. 다만 그간에 부족했던 것은 이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였고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의지였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제안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전문번역가 이희재씨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노작이다. 20여 년 동안 번역을 해온 전문번역가가 번역현장에서 느낀 문제점과 깨달음을 생생하게 정리한 결과물이라고 책에 대한 소개를 대신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가치는 단지 번역의 방법론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의 표현으론 ‘문화사적 맥락’에서의 의의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저자의 고백을 확장해서 미리 말하자면, 독자로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새삼 한국어에 눈뜰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일차적인 의의다. 더 나아가 번역을 통해서만 우리가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의 특징이 있다는 걸 이 책은 알려준다. 그것이 이차적인 의의다. 이것은 번역작업, 혹은 번역행위가 갖는 보편적인 의의와도 연관됨 직하다. 

번역의 딜레마 - '들이밀까, 길들일까' 

이러한 의의를 좀 더 살피기 전에, 먼저 필자가 잘 정리해놓은 번역의 딜레마에 대해서 짚어보는 것이 좋겠다. 어떤 딜레마인가? ‘들이밀까, 아니면 길들일까’의 딜레마이다. 직역과 의역 사이의 딜레마를 저자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데, 알다시피, 출발어(원어)에 충실한 번역을 직역이라 하고, 도착어(번역어)에 충실한 번역을 의역이라 한다. 가령, “a political hot potato”란 표현을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라고 옮기는 것이 직역이고, “정치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는 식으로 옮겨주는 것이 의역이다. 지금에야 ‘뜨거운 감자’란 표현이 좀 익숙해져서 “시장개방 문제가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나와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처음엔 상당히 낯설었을 것이다. ‘시장 개방문제’가 ‘뜨거운 감자’라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좀 생소하더라도 원어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이 ‘들이밀기’다. 번역에서 독자 편의 가독성이나 이해가능성보다는 원어에 대한 충실성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에게 충실한  번역이 직역이라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 충실하다는 건 더 많이 배려한다는 뜻이다. 물론 놓여 있는 맥락이 서로 다른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충실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경구는 그런 곤경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어느 한쪽에 충실하자면 다른 쪽에는 충실하기 어려운 번역가의 딜레마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표현으로, 프랑스에서 건너온 ‘부정한 미녀(Belles Infidéles)’가 있다. 주로 의역을 가리키는데, 아름답지만 원문이나 저자에게는 충실하지 않다는 뜻을 함축한다. 반대로 원문이나 저자에게 충실하긴 하나 독자가 읽기에는 딱딱하고 어색한 직역투의 번역에 대해서는 '정숙한 추녀'라는 말을 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번역학에서는 ‘자국화(domestication)’과 ‘이국화(foreignization)’란 전문용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길들이기’와 ‘들이밀기’라고 옮긴 것에서 번역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미리 간취해볼 수 있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직역과 의역이 모두 일장일단을 가지며 무엇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저자는 일단 의역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왜인가? 그건 우리가 그간에 너무 ‘들이대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길들이는 쪽으로 가보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기도 하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사실 ‘길들이기’는 영미권에서 다른 언어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소개할 때 으레 해오던 것이다. 그런 전통이 너무 강해서 번역학자나 이론가들이 그런 ‘길들이기’가 함축하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가능하면 원문의 표현이나 구조를 살려주는 ‘들이밀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최인훈의 <광장> 영역본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쓴 작가의 서문을 영어권 관례에 따라 누락시켰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소설작품에 서문을 잘 붙이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고 번역본의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이 소위 ‘길들이기’다.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개항 이후에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때는 원문 중심의 딱딱한 직역투가 주로 쓰였는데,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자신감이 커지면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보다는 일본어로 가독성이 높은 번역을 선호하게 됐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각국의 이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들이밀까, 길들일까’의 문제는 단순히 번역 방법론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사회적·문화적 맥락은 물론이고 자국어와 자국문화에 대한 자신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요컨대, 번역에서 ‘길들이기’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가 그렇게 해도 좋을 만한 문화적 수준에 도달해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번역이란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

저자가 전해주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길들이기’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초창기 영어사전에서는 풀이어에 외래어가 전혀 나오지 않았으며 가급적이면 기존의 어휘를 동원하려고 했다. 예컨대, 지금은 한국어로 통용되는 ‘발코니(balcony)’와 ‘치즈(cheese)’를 당시엔 ‘툇마루’와 ‘소젖메주’라고 옮겼다. 여기서 ‘cheese’를 ‘소젖메주’로 옮기는 것이 ‘길들이기’이고, 다시 ‘치즈’로 옮기는 것이 ‘들이밀기’라면, 우리의 번역문화사는 ‘길들이기’에서 ‘들이밀기’ 쪽으로 흘러갔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어쩌면 서구어와 서구문화에 대한 모방과 동경의 풍조 속에서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차츰 엷어져간 세태와도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오렌지’라는 한국어를 영어의 ‘orange’와 똑같이 ‘어륀지’로 읽어야 한다는 발상까지 ‘들이밀며’ 한쪽에서는 영어 발음을 위해 혀까지 수술하는 세태 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직역(들이밀기)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만, ‘직역’이 보다 바람직한 번역 방법론이라고 고집하는 직역주의는 반성의 대상이 될 만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30쪽)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대로 그런 상식을 배제하는 것이 ‘직역주의’라면 말이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번역은 저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 하는 것”(234쪽)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독자는 물론 ‘한국어 독자’를 말하는 것이니, 독자를 위한 번역이란 보다 알기 쉬운 한국어 단어와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는 영일사전을 베끼다시피 한 우리의 영한사전보다는 북한의 영조사전이 오히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가령 'sabre-toothed tiger'를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의 풀이어 ‘劍齒虎’를 그대로 한국어로 읽어서 ‘검치호’라고 풀어주지만, 영조사전은 ‘칼이범’이라고 옮겼다. “No mill, no meal.”이라는 영어 속담을 영일사전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는 먹을 자격이 없다”라고 옮기고, 영한사전도 이와 비슷하게 옮겼지만 영조사전은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고 기존의 속담을 이용하여 번역했다. 북한의 영조사전은 ‘주체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때론 억지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런 북한의 태도를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남한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비교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학대하는 듯한 직역투의 문장에서 원문과 외국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면 과장일까?  

물론 이런 사대주의적 태도는 중화주의에 물들어 세종의 한글 창제를 극력으로 만류했던 당시 대신들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므로 ‘뿌리’가 깊다. 그렇게 중국을 숭배하다가 일제 때는 일본에 고개를 숙이고, 해방 이후엔 ‘코쟁이’들의 말과 문화에 사족을 못쓴 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지금도 미국식 문화, 미국식 학문은 당연한 모델처럼 받아들여지며, 같은 말이라도 가급적이면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유행이다. ‘조리법’ 대신에 ‘레시피’라고 하듯이 말이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서로 섞이고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편중됐고 일방적이며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길들이기’로서의 의역은 우리 멋대로 창조적인 번역을 하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어다운 한국어의 사용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란 저자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역자가 다양하면서도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어의 특징을 이모저모 짚어주고 있는 대목들이다. 특히 저자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의 특징을 어떻게 잘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한국어의 다양한 활용가능성을 실감하게 해주어 인상에 남는다.  

예를 들자면 “He took the trouble to see me, though he was very busy.”란 문장을 어떻게 옮길까? “굉장히 바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와주었다.” 정도가 아닐까. 저자는 그것 대신에 “굉장히 바쁜데도 일부러 와주었다.”라고 옮기는 것이 더 한국어답다고 말한다. “Even if I fail, I won't give up.”의 경우도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보다는 “실패할망정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옮겨주는 것이 더 맵시 있고 윤기 있다. 즉, 접속사가 발달한 영어 문장을 그대로 일대일 대응이 되게 옮기기보다는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 표현으로 옮겨주자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부정한 미녀’의 사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에 가깝지 않을까.   

번역 방법론에 대한 얘기를 주로 늘어놓았지만, 간단한 사례에서 짐작해볼 수 있듯이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한국어의 특징이나 아름다움, 유용성 등을 직접 발견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러한 발견은 저자의 오랜 번역 경험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끼리는 잘 몰라도 외국인과 같이 서면 한국인다운 특징이 바로 눈에 띄는 것처럼, 우리말도 다른 언어와 나란히 놓일 때 도드라진다. 명사중심의 언어인 영어에 맞춰 동사중심 언어인 한국어에 맞지 않게도 명사 위주의 번역문을 만드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다며 검역주권까지 내놓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외국인을 위한 번역, 남들 보기 좋으라는 번역이 아닌 이상, 번역에서도 ‘들이미는’ 일은 이제 그만 했으면 싶다.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다운 한국어로 옮기면 더없이 좋지 아니할까?  

사족을 덧붙이자면, 책은 쉽게 씌어져 있으므로 중고등학생도 읽어봄 직하다. 물론 번역가들뿐만 아니라 번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들, 특히 잘 안 읽히는 번역서를 붙들고 읽으면서 그동안 불만을 쌓아두었던 독자들은 필독해 볼 만하다.  

09.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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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9-07-0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사 중심인 남의 말들을 우리 말다운 동사 위주로 옮기면 뭔가 책잡힐 일을 했다는 느낌을 늘 지울 수가 없답니다. 명사 위주로 줄줄 나열하면 책은 안 잡히겠지, 이런 간교한 생각이 들기도 하니, 문제는 문제지요.

그나저나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이나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라는 표현이, 참으로 와 닿네요. 시원하게 정리해주신 서평이라고 느낍니다. :D

로쟈 2009-07-05 23:00   좋아요 0 | URL
인문 이론서는 그런 '면피성' 번역이 주종이죠. 원작/원전에 대한 '충실성'만 앞세우는 태도가 '어륀지주의'와 뭐가 다른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위버멘쉬'처럼 그냥 음역한 걸 '번역'으로 내놓기도 하고요...

2009-07-06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7-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는 로쟈님 글귀가 마음속에 콱 박히네요.
근데 인문 사회계열의 책들은 독자들이 원문 해석능력이 계신분이 많으므로 번역자들이 나름 공을 들여 번역지만 제가 좋아하는 장르 소설은 일어 중역이라든가 날림 번역이 많아 어떤때는 정말 책을 던져버고 싶을 정도지요.하지만 원문 독해실력은 없고 번역이나 소개조차 안된 책들이 대부분이니 번역이 좀 안 좋아도 그냥 출판해 해주시면 감지덕지 합니다 ^^;;;

로쟈 2009-07-06 12:38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의 경우엔 독자클럽 같은 데서 오역도 지적하고 작품 번역도 요구한다던데, 그게 아닌가 보죠? 아니라면 이제라도 그렇게 '실력행사'를 해야합니다.^^

종이한장 2009-07-1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관한 서평이라 주제넘게 한말씀 드리자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는 문장은 "독자에게 (좀) 더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라고 바꿔 쓰는 것이 옳은 표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보다"는 "이것보다 저게 더 낫다"에서처럼 조사로 쓰입니다. 그런데, 영어의 "more"를 직역(?)한 탓인지 "(좀) 더", "더욱"이 들어갈 자리에 "보다"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죠.

로쟈 2009-07-10 18:29   좋아요 0 | URL
책으로 묶게 되면 교정하겠습니다. 보통은 편집자들이 수정해주는데, 이번엔 그냥 넘어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