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잡지 <기획회의>(251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터뷰이가 로쟈여서다. 인터뷰어는 북칼럼니스트 이하영 씨이고(<조제는 언제나 그 책을 읽었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나는 두주 쯤 전에 인터뷰에 응한 바 있다. '로쟈'에 대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기획회의(09. 07. 05) 죽어야 사는 인문학 출판 - 블로거 로쟈

로쟈의 블로그는 인문서의 살생부다. 인문학의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왕성하게 올려대는 그의 글들은 온라인서점을 방문한 독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때론 지름신으로 강림하고 때로는 특정도서에 대한 독서 의욕에 초를 치기도 한다. 그의 검은 날카롭고 그의 검술은 무자비하다.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사실 나는 그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므로. 나는 여전히 물질화된 콘텐츠를 신용하는 보수주의자(?)다. 인터넷의 검증되지 않은 날것은 비리다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나는 알게 모르게 블로거 로쟈의 리뷰에 영향을 받아 왔고, 오프라인 매체에 실린 로쟈의 글에 대한 신뢰와 호감 역시 온라인에서 받은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온라인에서 무림고수가 된 그는 오프라인 매체에서도 다른 수식어 없이 ‘인터넷 서평꾼’이라고 자신을 규정했는데 이는 많은 이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우리 사회의 학적인 배경 없이 그저 그의 글이 담고 있는 실력 하나로 ‘발굴된’ 필자일 거라는 추측이었다. 드디어 우리 사회에도 지식과 교양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희망사항에 로쟈를 증거로 삼고 싶어 했다고나 할까. 

내게도 로쟈에 대한 막연한 상이 있었다. 어쩐지 로쟈는 이 복잡한 도시에서 땀 냄새 풍기며 사는 소시민은 아닐 것 같았다. 학연과 지연과 혈연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강호의 고수가 아닐까 상상했다. 그러나 역시 망상에 불과했음이 그의 책 출간과 함께 여실히 드러났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날개에 인쇄된 저자 소개말은 나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로쟈’라는 ID 혹은 필명으로 알려진 그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200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이며…” 

미네르바가 전문대졸 백수라는 사실에 통탄해마지 않던 자들처럼 나도 로쟈가 ‘서울대 박사’라는 사실에 통탄했다(뭐, 전혀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자꾸만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이해해줄 이도 있을 것이다). 통탄해봤댔자 배배꼬인 내 심사야 내 사정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인문서의 지름신이자 살인자(혹은 살서자인가)인 그를 만나 물을 얘기가 많았다. 

6월의 교정은 찬란했다. 햇살은 눈부셨고, 녹음은 무성했으며, 공기는 투명했다. 저만치서 그가 걸어오고 있다. 멀리서 봐도 로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팔이 긴 남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자유로운 두 팔이 허리춤에서 반쯤 접혀 있다. 책꾸러미를 들고 다니느라 길어졌을 것이 분명한 저 두 팔은 오늘, 모처럼 한가롭다. 내가 그의 책을 들고 서성이는 것을 보고 그도 나를 향해 알은 체를 한다.  

악한 사회에 선한 개인은 없다고 믿는,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이 가진 것은 나누어야 한다고 여기는, 그래서 자신이 지닌 ‘앎’을 거침없이 숨 가쁘게 나누고 있는 한 지식 전체주의자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유명하고 냉혹한 로쟈지만 그를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느껴진다. 그의 일상은 주로 고독하고 그의 내면은 주로 여리다. 아직 소년의 앳된 미소를 간직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준비했던 질문들이 하얗게 사라진다. 그에겐 ‘로쟈’라는 이름보다 ‘미카엘’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살인자의 얼굴은 평온했고, 전체주의자의 미소는 천진했다. 어찌하랴. 어쨌거나 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서당개 3년은 풍월을, 블로거 5년은 출판을 

이하영 (이하 이) ― 먼저 『로쟈의 인문학 서재』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책은 많이 팔리는지요? 

로쟈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많이 팔린 것 같습니다. 출판사는 4,000부 이상 팔리는 인문서를 내는 것이 목표라고 하던데 제 책이 일단 그 목표는 넘어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사실 제목이 좀 딱딱한 듯해서 마음에 걸렸지요. 『나는 인문학 공부를 후회한다』라고 했으면 더 좋을 뻔했다는 생각은 듭니다(웃음).  

― 저도 후회합니다, 로쟈를 인터뷰하기로 한 것을. 책이 어려웠어요. 뭘 질문해야 하나, 난감하더라구요. 로쟈님을 인터뷰할 수준이 못 된다는 자괴감이랄까. 대중지성이라면서 이렇게 수준이 높으니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로쟈 ― 내용이 약간 무거운 것은 의도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블로그에 올린 글이니 가벼울 거라는 편견, 인터넷 공간을 통해 소통되는 지식과 담론이 수준이 낮고 신뢰할 수 없을 거라는 인식을 깨고 싶었어요. 그런데 인터뷰이로 왜 저를 택했습니까? 다른 베스트셀러 저자도 많을 텐데요. 

블로그가 출판기획자들의 전초기지가 되다시피 한 상황이지만 인문학 블로거 로쟈의 책 출간은 의미가 큽니다. 지금까지 블룩은 실용서나 가벼운 에세이가 대세였으니까요. 하지만 로쟈님을 필두로 좀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블룩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전문가 블로거의 파워가 전통과 공신력을 자랑하는 오프라인 매체들의 영향력을 앞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인문학 블로거 로쟈의 영향력은 이미 전설적이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는 로쟈 같이 전문성을 지닌 블로거들로 전문서평웹진을 꾸려 신간서평을 정기적으로 올린다면 기존 신문들의 북섹션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거라고 판단하고 그 수익모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로쟈의 생각은 어떤지도 궁금하네요. 

로쟈 ― 그런 서평공간이 인터넷에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신문의 영향력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성으로는 기존 신문을 앞설 수 있을 테니까요. 수익모델만 찾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서재블로그뿐 아니라 다음과 네이버 카페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데요. 세 공간의 차이점이 있습니까?  

로쟈다음 카페 ‘비평고원’이 먼저였죠. 알라딘의 서재블로그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카페는 함께 고전을 읽는 소모임 회원들의 공간입니다. 알라딘에 ‘나의 서재’라는 공간이 생긴 것이 5년쯤 전이고, 덩달아 저의 블로거 경력도 5년차쯤 됩니다. 책에 담긴 내용의 대부분이 2004년도에 쓴 글들인데 그해에 저는 러시아에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었죠. 이 책은 제게 그때 이후 블로거 활동에 대한 기념품 같은 겁니다. 인터넷 글쓰기라는 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일이잖아요. 그간의 시간과 노력이 쓸 데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의미가 있죠. 가족들도 좋아하구요. 

― 왜 블로거가 되었나요? 블로거 활동의 매력이랄까, 멈출 수 없는 이유는요? 

로쟈블로거가 된 게 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알라딘 회원에게 자동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그런 공간이 생겼던 거구요. 그래서 서재 소개에 이렇게 적어놓은 것이죠. “이런 곳도 다 있군요. ‘나의 서재’라지만, 제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적응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매력’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입니다. 인터넷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면을 통해서나 활동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블로그 이전에는 ‘카페’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병행을 하고 있구요. 매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지만 매체의 변화에 나름대로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편입니다. 

―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인터넷에 자주 로그인하여 블로그이웃들과 소통하는 생활이란, 육체건강에 매우 해로울 듯합니다. 건강관리는 어찌 하시는지요?  

로쟈 ― 최근에서야 동네 헬스클럽의 가족 회원권을 끊었는데요, 역시나 자주 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나름대로 복부비만에다 당연히 체력이 별로 좋진 않지요. 어린시절엔 병약한 것을 다행스러워한 적도 있었어요. 공부는 잘하는 편이니까 모자란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 게 제 ‘평등감각’이었습니다. 요즘은 저를 부러워할 사람도 별로 없는 듯싶으니 건강관리도 좀 해야겠습니다. 써야 할 책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도 하구요. 



로쟈 vs. 이현우 

― ‘로쟈’는 인터넷 아이디이지만 오프라인 매체에서도 필명으로 줄곧 써오셨습니다. ‘로쟈’라는 이름에 특별한 사연이 있나요? 

로쟈 ‘로쟈’라는 이름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리고 여성인줄 알았다는 분들도 많으신데 ‘로쟈’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입니다.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가가 아니라 살인자죠. 누군가 제 책에 대해서 ‘살인자의 헌신’이라는 평을 해주었는데 마음에 듭니다. 저 역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시절도 있었구요. 

― 가난한 대학생이었군요,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는. 

로쟈 ― 사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걸 서울로 대학을 와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난은 상대적인 가난인 거죠. 지역에서는 나름 중산층이었고 그땐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다른 기대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했죠. 책에도 쓴 얘긴데, 어머니가 제 당사주를 봤을 때 백발도사가 책 읽는 모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내놓은’ 자식이 됐어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문학을 전공으로 택했는데, 하필 러시아 문학이냐고 하면 러시아 문학에 큰 작가들이 많아서였어요.  

― 80년대 학번, 러시아문학전공. 글쎄요. 로쟈로서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자연인 이현우로서는, 게다가 장남이라면서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네. 그렇죠. 한마디로 책임감이 없는 거죠. 가족들 고생시키고. 늘 현실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수도사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죠. 수도사의 삶이 좋아보였던 이유는 덜 먹고, 사치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는다는 데 있었어요. 북유럽에 가면 훌륭한 감옥시설들이 있죠. 책읽기에 그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 거예요. 안락한 공간에다 적절한 식사도 공급해주고 시간 맞춰 운동도 시켜주고요. 커다란 도서관만 갖추고 있다면 그런 곳에서 장기 복역할 의사도 있습니다.  

― 대한민국에 사는 남자에겐 해야 할 ‘노릇’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문화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노릇’들에서 자유롭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텐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온 걸까요? 책을 많이 읽어서 자의식이 강해져서 그런 건가요? 

로쟈 ― 글쎄요. 저는 불편하지 않은데, 대신에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죠. 저는 주변에서 구박 받고. 

― 세속적인 욕망과 거리두기를 잘 하시나 봐요. 비결이라도 있나요? 

로쟈 ― 역사적으로나 동시대적으로 우리가 먹고살만한 축에는 들어가 있죠. 상위 몇 % 안에 들어갈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빈곤이나 박탈감 때문이지 대개 절대적인 빈곤 상태는 아닌 것이죠. 좀더 넓은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욕심, 남보다 더 많이 갖겠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사는 데 크게 지장은 없지 않을까요. 거기서 남는 걸 나눠가지면 되구요.  

― 현실세계와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사는 것 같은, 이 세계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듯한 겉도는 느낌이랄까, 로쟈에게서는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로쟈 네. 그런 거리감이 늘 있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지방의 소도시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그래서 그 지역 토박이는 아니라는 거리감이 항상 있었어요. 서울에 와서도 마찬가지구요.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어릴 적 동창들을 만나도 여전히 그때의 거리감이 남아있습니다. 저와 그들 사이에 ‘전학 온 아이와 토박이’라는 거리가 존재하죠. 그러고 보면 출신 지역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쩐지 저는 이 사회에 완전히 속해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거리감이 있습니다. 

― 그런데 책이나 인문학과는 거리감이 없잖아요. 

로쟈 ― 그렇군요. 인문학에 대해서는, 책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군요.

인문학 출판, 죽어야 산다 

― 거리감이 너무 없어서 그런가요. 로쟈의 서평은 때로 무척 아픕니다. 제가 만든 책도 아닌데 제가 다 아프고 민망할 지경입니다. 어려운 인문학 책을, 그것도 많이 팔리지도 않는 책을 애써 번역한 번역자와 편집자로서는 칼을 맞는 기분일 거예요. 

로쟈 그래서 비판도 많이 받죠. 가뜩이나 좋지 않은 인문학 출판 시장을 죽이는 일이라며 부작용을 우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고 덮어둔다고 인문학 시장이 살아나나요? 아무도 오류를 지적하지 않아서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이 잘못된 지식을 올바른 것으로 믿는 것이 인문학 대중화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요? 제가 지적하는 것은 오탈자의 단순한 실수들이 아닙니다.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옮긴다든가 문장의 의미를 전혀 엉뚱하게 왜곡한다든가 하는 경우들입니다. 그런 건 고쳐가면서 읽자는 것이죠. 우리 인문학 출판이 어려운 것은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판계는 인문학 책을 읽지 않는 독자를 탓하고, 독자들은 인문학 책이 읽기 어려운 데 비싸다고 불평합니다. 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누가 먼저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요. 구조적인 문제이지만 당장은 의지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을 듯해요.  

한국은 인문․학술출판 시장이 작아서 책을 만드는 데 들인 노력을 보상받을 가능성이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학에선 정부 지원에 의지합니다. 논문과 보고서만 업적으로 인정하는 현 제도 하에서 학자들은 그 기준에 맞추는 일만으로도 바빠 대중적인 글쓰기에 할애할 시간이 없죠. 힘들게 책을 내도 초판조차 소화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역이나 실수가 발견돼도 다음 쇄에서 수정할 기회를 갖기 어렵죠. 그렇다면 정오표라도 만들어서 공개하는 게 좋을 듯해요. 불성실한 오역서가 고급교양서나 학술서로 포장되어 팔리는 것은 지양해야죠.  

― ‘죽어야 산다’는 뜻인가요. 책 제목을 『나는 인문학 공부를 후회한다』라고 할 걸 그랬다는 농담이 빈말은 아닌 듯합니다. 인문학자가 된 것을 후회하나요? 

로쟈후회도 합니다. 하지만 대안이 없으니 후회해도 소용없죠. 다른 데에는 소질이 없었으니까요. 인문학 공부는 재미있는 공부만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슬프죠. 정현종의 시구에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게 있어요. 인문학은 멜랑콜리한 학문입니다. 인간을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그렇죠.  

‘인문학자’라는 타이틀은 제게 부여된 것입니다. 지금도 ‘인문학자’라 불리는 것이 빌려 입은 옷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제가 인문대 출신이긴 하지만요. 학부 시절, ‘인문대’란 말은 교련 시간에 제일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인문대’ 하면 군부대이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더러 “문학 전공이라면서 인문학도 다방면으로 많이 아시네요”라고 말하는 분도 있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다룹니다. 인간 삶의 총체성을 담는 것이 문학이니까요. 인간은 역사적, 정치적 존재이면서 또 생물학적 존재죠. 그런 인간을 이해하려면 다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적어도 그렇게 노력은 해야겠죠.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러나 마음 약한 로쟈 

―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부분이 「책머리에」와 「프롤로그」 그리고 「에필로그」입니다. 책을 여는 글과 닫는 글 두 편이 다 ‘눈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본문과 달리 촉촉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인의 감성을 드러낸 부분도 친밀감이 느껴졌습니다. 인문학 책의 살생부를 쓰는 듯한 냉혹한 로쟈와 니진스키의 눈물을 이야기하는 로쟈는 다릅니다. 어쩐지 분열적입니다. 

로쟈 눈물이라는 건 고통에 대한 방어막이기도 하죠. 눈물을 흘린다는 건 적당히 느끼고 적당히 슬퍼하는 것이기도 해요. 충격에 대한 방어기제가 눈물입니다. 충격을 완화하는 애도 방식이 슬픔이고 눈물입니다. 그래서 울 수 없고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우리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니진스키처럼 정신줄을 놓아버릴 수도 있구요. 그런 게 눈물의 이중성입니다. 눈물은 고통에 대한 연민이면서 궁극적인 고통에 대한 방어막입니다. 문학, 혹은 인문학은 그런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는 것이면서 그런 눈물의 윤리에 대해서도 되새겨보게 합니다.  

― 인문학에 거는 희망이 그런 건가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커지면 세상이 좀더 나은 곳이 될 거라는? 

로쟈 저는 인문학을 통해 희망을 발견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절망하기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희망, 행복, 재미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으니까요. 정말 필요한 건 절망인지도 모르겠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기도 하잖아요. 개인적으론 거기서 어떤 연대를 기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출판사들로부터 이런저런 제안을 많이 받을 듯합니다. 번역이나 집필 요청도 많이 받으시죠? 

로쟈 ― 번역이나 감수 요청이 들어옵니다. 번역서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은 것을 제가 제안하기도 하지요. 요즘은 원고 청탁이 많아서 정신이 좀 없습니다.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웬만하면 다 승낙을 합니다. 그래놓고는 제때 해결을 못해 곤란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요. 외부 원고와 강의가 책 읽는 시간을 많이 빼앗아갑니다. 청탁이나 강의도 다 책으로 인한 일들이니 결국 책 때문에 책을 못 읽는 셈인가요. 써야 할 책들도 여러 권 있습니다. 세계화에 대한 것, 번역 비평, 러시아 문학 등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만 해도 얼추 열 종 정도 됩니다.  

― 책머리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 나는 다만 읽고 쓰고 떠들겠다”라고 쓰셨는데, 읽고 쓰고 떠드는 가운데 뭔가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으신가요? 

로쟈 당면과제는 말씀드린 대로 몇 권의 책을 쓰는 것입니다. 이건 강제된 부분도 있지만요. 특히 ‘너 자신을 세라’란 타이틀의 책을 수년 내로 쓰고 싶고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의 로쟈 버전입니다. 제가 읽고 싶은 책이기도 해서 저도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고 청탁이나 강의에 몸이 묶여 책 쓰는 일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도 확인해보니까 벌써 들어왔어야 할 원고료가 안 들어온 거예요. 저는 외부 원고료를 용돈으로 씁니다. 그래봐야 대개는 책값이지만. 그런데 이렇게 안 들어올 때는 어떡해야 하는 거죠?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에 연락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로쟈의 원고료 집달리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귀찮겠지만 자꾸 전화해서 받아내고, 어렵겠지만 계속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할 밖에. 일회용 원고를 쓰고 글값을 받는 일은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인문학 출판계에 적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무척 고단한 일이다. 독자로서도 그렇지만 필자로서나 역자로서는 더욱더 녹록지 않은 일일 터이다. 그래도 로쟈는 그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리할 것이다. 어깃장을 놓으면서 말이다.  

‘로쟈’는 살인자의 이름이다. 그러나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생성한다. 권위주의와 기득권, 안일과 욕망을 죽인 자리에선 무엇이 살아날까. ‘로쟈’는 살인자의 이름이지만 ‘헌신하는 로쟈’는 천사의 이름이다.(이하영_북칼럼니스트) 

09.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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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러웨이부인 2009-07-0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Sati 2009-07-09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어제 싸인받을 때 가까이서 뵈니까 얼굴이 때꾼하시던데요. 마음같아서는 제 시간과 건강을 기꺼이 나눠드리고 싶었다는...^^

델러웨이부인 2009-07-09 02:39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때꾼한게 어떤 거예요?

Sati 2009-07-09 14:33   좋아요 0 | URL
델러웨이부인님, 때꾼하단 거는 저희 집에서는 '힘들어서 얼굴이 까칠해 보인다' 대충 이런 의미로 써요. 남의 서재에서 저희끼리 잡담해도 되는 건가요?^^;

로쟈 2009-07-09 23:39   좋아요 0 | URL
네, 날이 무덥다 보니 저녁엔 좀 지치더군요.^^; 한데, 아는 체를 하셨으면 저도 반가웠을 텐데요.^^

목동 2009-07-14 23:41   좋아요 0 | URL
'예, 여기는 한 여름이군요", '로쟈'의 인터뷰 광경을 상상하면서 5월 26일에 들었던 어떤 강의 첫 인사말이 생각났습니다. 소설가나 어떤 학자는 말년에 은둔 생활을 하던데요, 더 자신의 일만 집중하고푼 열망이라 생각합니다만.

2009-07-09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7-09 23:40   좋아요 0 | URL
책은 서점에 있습니다.^^

2009-07-09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9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9-07-0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안할 수 없는 멋진 인터뷰군요!
특히 감옥에 관한 부분은 가히 촌철살인이군요.^^

로쟈 2009-07-09 23:42   좋아요 0 | URL
흔히 하는 얘기인 걸요.^^;

카스피 2009-07-0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노어 노문학과를 나오셔서 그랬는지 좀처럼 보기 힘든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계셨군요.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로쟈 2009-07-09 23:43   좋아요 0 | URL
흠, 좀 뒷북이신데요.^^;

목동 2009-07-1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호텔 생활을 꿈꿔요. 물론 호텔에 책이 많이 있다는 소릴 듣지 못했읍니다. 책이 많은 것과 탐독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왜 러시아문학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일까요? 혹시 조국의 현실과 연결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작품이 인간성을 잘 그렸던가요.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이 발표했던(1982년?) 당시의 대학생들을 생각해 봅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미래까지 예약한 상태입니다. - 어느 날 서재가 텅비었다고 상상해 보면 머릿속이 가벼워 질까요? 건강하시길 -

로쟈 2009-07-10 18:33   좋아요 0 | URL
서재가 텅 빈다면 하루 동안 행복할 거 같습니다. 이후엔 악몽이죠.^^;

2009-07-10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0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7-12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가 죄와벌의 그 로쟈였군요~ ^^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 저한테는 어려울 것 같아 망설였는데
우리집에서 자라나는 미래의 인문학도 삼남매를 위해서 구입해야겠네요.^^

로쟈 2009-07-12 13:53   좋아요 0 | URL
흠, 18금 내용도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얼마전에 출간된 하버마스의 <분열된 서구>(나남, 2009)에 대한 서평을 교수신문에서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론 관심을 갖고 있는 책이어서 다른 매체에 서평을 쓰려고도 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때문에 독서도 미뤄지고). 다음엔 기회를 만들어서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책은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와 나란히 읽을 필요가 있다). 흠, 하버마스도 올해 80세를 맞았다. 최근 관련서들이 부쩍 많아진 것도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교수신문(09. 07. 08) 미국의 이라크 참전, 진짜 문제는 ‘국제 규범 위협’이다

책 머리에
“서구가 분열하게 된 것은 국제 테러주의의 위험 때문이 아니라 국제법을 무시하고, 유엔을 주변화하고 유럽과의 불가피한 단절을 받아들인 현 미국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국가간의 자연상태를 종식시키려는 칸트적 프로젝트가 위험에 처해 있다. 서구의 분열은 표면적인 정치적 목표가 아니라 인류를 문명화하려는 위대한 노력들 중 하나와 관련해서 일어나고 있다. 표제로 사용된 이 책의 마지막 논문은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물론 분열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 자체를 관통하여 일어나고 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주로, 전 생애에 걸쳐 미국의 최선의 전통- 1800년대의 정치적 계몽의 뿌리, 실용주의의 풍성한 조류 및 1945년 후에 회귀한 국제주의-에 일체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이런 전통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태도가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작용한다.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연방공화국의 서구지향성으로 인해 형성되었던 화학적 결합은 이제 두 가지 구성요소로 분리된다. 즉, 서구문화의 원칙과 기본 신념에 대한 지적이고 도덕적인 결속-궁극적으로 자유주의화 된 독일의 규범적 자기이해는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은 냉전 시기에 유럽을 핵우산의 보호 아래 있게 했던 패권적 강대국에 대한 독일의 기회주의적 순응과 분명히 분리된다.  

나는 이런 차이 또한 상기시키고 싶다. 국제법의 입헌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나는 이런 문제와 유럽 통합이라는 목표의 연관을 조명하고 있는 전에 발표된 몇 가지 글을 함께 엮을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슈타른베르크, 2004년 1월 위르겐 하버마스
  


『분열된 서구』는 2001년 9.11 테러와 2003년 이라크 전 발발을 배경으로 수행된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정치철학적 현실 개입 시도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9·11 이후 발표된 하버마스의 인터뷰, 기고문들과 더불어 전체 글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작성된 논문 ‘국제법의 입헌화는 아직 기회가 있는가?’를 결론 글로 싣고 있다. 9·11 테러, 이라크 전, 유럽통합, UN 개혁과 새로운 세계질서의 모색 등 이 책은 매우 폭넓고 현실적인 정치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美 일방주의 외교노선과 ‘칸트적 기획’ 
이러한 폭넓은 주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이 책의 제목인 ‘서구의 분열’과 그러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 즉 ‘국제법의 입헌화’라는 칸트적 기획을 제시하는 데 있다. 여기서 분열이란 미래의 전 지구적 정치질서의 방향과 목표를 규정하는 데서 나타난 분열을 의미한다. 네오콘의 일방주의 외교 노선에 입각해 국제법을 무시하면서 시작된 美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서구는 앵글로색슨 국가들과 유럽대륙 국가들로, 낡은 유럽과 새로운 유럽으로 분열됐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분열의 근본적인 책임은 국제법을 무시한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 노선에 있다. 

미국의 이라크전은 첫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입각한 전쟁이 아니며, 둘째, 실제적이거나 긴급한 공격에 대한 자기방어 전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제법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힘에 의한 일방주의 외교 노선을 강화했으며, 이라크 민중의 해방과 중동 민주화를 기치로 이라크 전을 수행했다. 엄청난 힘의 불균형 속에서 전쟁은 신속히 종료됐고, 독재자 후세인은 결국 체포됐다. 세계시민들은 독재자 후세인의 銅像이 무너지는 영상에 환호하는 동시에 강대국의 일방적인 힘의 행사에 대해 반대했다.

하버마스가 이라크 전에 반대하는 핵심적인 논점은 그것이 국제법이라는 규범을 파괴했다는 데 있다. 그는 반미주의자들처럼 미국이 본질상 제국주의 국가라든가 미국이 전쟁을 수행한 목적 자체가 자국 이익의 극대화에 있다는 식의 혐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미국의 이라크 전이 그 절차상 결코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는 결국 국제규범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전이 자유와 인권의 신장, 중동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확대라는 목표 하에서 수행됐고, 나아가서 그 전쟁이 결과적으로 이라크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신장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전쟁은 결코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차이는 인권 존중과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이념과 목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서 드러난다.  

하버마스의 주장 근저에는 진정한 세계평화는 강대국의 선의가 아니라 ‘국제법의 입헌화’ 기획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판단이 놓여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국가 내부의 진정한 평화는 강자의 선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등한 상호인정의 규범에 기초한 민주적인 법의 지배가 관철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세계평화 역시 현재 국제사회에서 헌법과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국제법이 그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갖출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국제법이 국민국가의 헌법과 같은 실질적 효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이런 의미에서 ‘국제법의 입헌화’는 우리에게 하나의 과제로 주어져 있는 상황이다. 민주적 국가들 사이의 법적 평화라는 이념을 위해 그가 제시하는 방안은 UN을 개혁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다국적 차원의 국제기구들을 활성화 하는 것이다. 개혁되고 강화된 UN은 세계평화와 인권 수호라는 제한적 임무만을 수행하며, 기타의 지역적, 지구적 사안들은 국제사회 강대국들 사이의 협력에 기초한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담당해야 한다. 이러한  구상을 그는 ‘세계정부 없는 세계 내정’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이상적인 세계공화국이 없이도 법에 의거한 평화로운 국제질서가 가능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자발적 협력이 필요하며, 유럽연합은 이러한 협력을 유도하는 국제사회의 주요한 대안적 행위자가 돼야만 한다. 하버마스는 유럽연합이 지구화가 초래한 탈국민국가적 상황 속에서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지역통합의 모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통합된 유럽이 초강대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유력한 지역통합의 시도들이 세계의 각 지역 단위에서도 진행돼야만 하며, 이러한 지역 통합체들 간의 협력에 기초해서 지구화의 도전에 대한 효과적 대응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구상에 기초해 미국이 국제법을 존중하고 다자주의를 중시하는 전통적 외교 노선으로 귀환해, 국제법의 입헌화 기획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동북아에 던지는 함의 
지구화가 초래한 탈국민국가적 상황은 오늘날 인류에게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선 정의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은 도덕으로 재무장한 현실주의나 시장의 자율적 힘에 의거한 세계질서를 거부하면서 과연 어떤 규범적 이상을 기초로 평화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될 수 있을지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어판의 보론으로 실린 역자의 논문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우리들에게 이라크 문제는 북한 문제와 겹쳐지고, 유럽통합에 대한 논의는 동북아의 현실과 겹쳐진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 중반 300만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폭압적인 정치행태가 유지되고 있다. 

현실은 이미 충분히 비극적이다. 그러나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북한 내부 사정과 강대국들 사이의 상이한 이해관계로 인해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민족주의가 팽배한 동북아에서는 여전히 중국과 일본이 지역 패권을 다투는 상황 속에서 지역통합 논의는 아직 본격화 되지 못하고 있다.  

무너지는 독재자 후세인의 동상은 당위와 능력, 법과 권력 사이의 현실적 간극을 우리에게 증언했다. 자신의 선의를 확신하는 일방적인 힘의 행사는 정당한 규범이 현실적 효력을 상실할 때 비로소 등장한다.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서 정의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해야 하는 새로운 인류사적 과제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지연된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무기력한 규범과 현실의 힘이충돌하는 비극적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통일국가를 건설하면서 이 과정 속에서 동북아의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국제법의 입헌화’라는 하버마스의 기획은 이러한 우리의 상황을 고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규범적 방향을 제시하고 것으로 보인다.(김원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철학)   

09.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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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잠깐 서점에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이다. 어렴풋이 과학사회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관심분야가 꽤 넓다. 소개를 보니, "이 책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저자 브뤼노 라투르가 근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 던지는 독특하고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탈근대주의의 근대성 비판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라투르가 말하는 근대인의 본질은 이분법이 아닌 ‘하이브리드’의 증식이다. ‘하이브리드’의 이해를 통해서만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돼 있다. 제목에서부터 '독특하다'는 건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점에서 '근본적'인지는 책을 읽어봐야 알겠다. 한겨레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시리즈에서 다루어진 바 있기에 참고자료로 옮겨놓는다(아, <해명>(솔, 1994)에서 미셸 세르의 대담자가 라투르였다).   

한겨레(09. 04. 11) 혼돈의 시대 ‘정치생태학’에서 해법을 찾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⑦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
1947년에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중심인 본의 와인제조업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미국 소크생물학연구소의 한 실험실에 대한 민족지 연구를 통해 과학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한 <실험실 생활>로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동료인 미셸 칼롱과 더불어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정립하면서, <프랑스의 파스퇴르화>, <과학의 실천> 등의 저서를 발표하여 과학기술학의 대표적 학자로 부상하였다. 1990년대에는 자신의 이론을 생태적 정치철학으로 발전시킨 <우리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자연의 정치학> 등의 저서로 더욱 각광을 받았고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넓히게 되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산실인 국립고등광업대학교 혁신사회학센터의 교수로 20년 넘게 재직하다가, 2006년에 파리 정치연구대학교의 사회학 교수로 옮겨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www.bruno-latour.fr)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기술학에서 출발하여 정치생태학에까지 그 사상의 폭을 넓혀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학자다. 그가 동료인 미셸 칼롱과 더불어 1980년대에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구축한 독특한 접근은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이론에서는 과학과 기술을 자연 실재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입장이나 사회 실재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 모두를 거부한다. 그 대신에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이질적 행위자들이 동맹을 맺어 공고한 연결망의 구축을 성취할 때 성공적으로 과학과 기술이 출현하며, 이 과정에서 사회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곧 과학기술과 사회는 연결망 구축의 결과로서 공동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파스퇴르의 탄저병 백신 개발에 관한 라투르의 사례 연구다.   

1870년대 후반에 탄저병은 프랑스 전역에서 수많은 가축, 축산농민, 수의사, 위생학자를 괴롭히던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이 병은 지역별로 숱한 변이를 보였기 때문에 세균과 같은 단일한 원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실험실 과학과는 연관이 없다고 흔히 믿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탄저병이 발생한 농장에 임시 실험실을 차려 농민과 수의사에게 정보를 얻고 이를 자신의 실험과학 언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농장에서 채취한 탄저균을 파리의 실험실로 가져와 본격적으로 분리 배양하는 실험에 착수하였다. 그는 이미 약화된 닭콜레라 배양균이 백신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탄저균 백신을 동물에게 주사하여 병독성의 다양한 변이를 실험실에서 모방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1881년 파스퇴르는 농업협회의 후원으로 푸이 르포르 마을의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탄저병 백신의 공개 시연을 열었고 결과는 파스퇴르가 예상했던 대로 대성공이었다.  

푸이 르포르의 야외 실험이 성공했던 것은 사람들에겐 기적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실험실과 동일한 조건(소독·청결·보존·주사 동작·타이밍·기록 등)을 단순히 농장으로 확장시킨 덕분이었다. 이 실험 이후 탄저병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집단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이 생겨났다. “만일 당신의 가축들을 탄저병으로부터 구하고 싶다면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의 실험실에 백신 플라스크를 주문하라.” 이에 따라 탄저병 백신이 공급되는 상업적 회로 비슷한 것이 파스퇴르 실험실에서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의 통계기구는 탄저병의 전국적 감소를 도표로 기록했다. 이 사례 연구는 파스퇴르의 위대함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질적인 행위자들(탄저균·가축·농민·수의사·위생학자·언론·정부 등)이 과학자의 실험실과 연결되고 이를 통해 구축된 공고한 이해관계의 동맹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탄저병 백신을 둘러싼 이 행위자-연결망이 구축되기 전과 후의 프랑스 사회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사회 역시 연결망 구축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탈냉전과 생태 위기의 본격적 전개에 따라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이 이러한 지구적 문제에 던지는 철학적·정치적 함의를 모색하는 쪽으로 연구를 확대하였다. 그는 탈냉전이 기존의 낡은 근대주의적 정치를 벗어나 이제야말로 평화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를 할 기회를 좌파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냉전 시대에는 그 치열했던 계급전쟁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좌파와 우파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즉 근대화의 필요성, 진보의 불가피성, 경제의 토대적 역할,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 등에 대해 다양한 우파와 좌파 사이에 항상 깊은 의견일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탈냉전 이후에 우파뿐 아니라 좌파도 역시 ‘지구화’, ‘시장의 자유’, ‘탈규제’, ‘유연성’, ‘기술혁신’ 등을 외치며 누가 근대화를 더 잘 근대화하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을 뿐이라고 그는 꼬집는다. 오늘날 진정 중요한 문제는 수십억의 사람과 동물과 사물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지구 온난화, 종의 보존, 인구 증가, 환경오염, 유전공학의 영향 등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과학기술의 생산 및 소비와 관련된 이런 엄청난 ‘집단적 실험’이 그동안 아무 의정서도, 피드백 기회도, 사후보고도, 기록보관도, 모니터링도, 정당한 정치 과정도 없이 결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근대화냐, 생태화냐”로 요약되는 그의 문제의식에서, 좌파는 근대화의 심화에 몰두하는 우파와 이제야말로 진정한 차이를 만들 기회를 만났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생태화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현재의 녹색운동과는 다르다. 비인간들로만 구성된 절대적 ‘자연’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녹색운동은 문제의 궁극적 원인인 근대주의를 탈피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주의에서는 모든 실체들을 두 가지의 완전히 분리되는 존재론적 영역인 순수한 비인간들의 세계와 순수한 인간들의 세계로 나누고 있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물질/정신 이원론에서 비롯되어, 칸트의 객체/주체 이분법으로 전개되었고, 뒤르켐의 사회학에 와서는 자연/사회의 이분법으로 고정되었다. 여기서 전자는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사실’의 세계이고, 후자는 영혼과 자유의지가 작동하는 ‘가치’의 세계로 간주된다. 근대인들은 의식으로는 이런 이분법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무의식적으로는 행위자-연결망을 통해 점점 더 수많은 잡종들을 양산하여 생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모든 사실과 인공물이 이러한 잡종들인데, 근대인들은 이들을 순수한 비인간으로 간주하여 ‘사실’ 세계로만 단순히 파악하려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투르는 새로운 정치생태학을 제안한다. 그것은 절대적 실재로서의 ‘자연’이나 이를 반영한다고 간주되는 유일한 ‘과학’, 또는 인간에게만 행위성을 부여하는 ‘사회’ 개념을 모두 거부한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이 좀더 바람직하게 결합하는 공동세계(코스모스)의 점진적 구성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과학기술의 산물이 논란과 타협·조정의 정당한 정치적 과정을 거쳐서 공동세계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라투르는 이를 위해 ‘사실’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논란’과 ‘제도’로,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협의’와 ‘위계’로 분해한 다음에, ‘논란’과 ‘협의’를 상원으로 하고 ‘위계’와 ‘제도’를 하원으로 재편성하는 새로운 권력분립의 정치 모델을 제안하고 있다. 예를 들면 광우병의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단백질인 프리온의 경우, 상원에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며 과연 존재하는지 ‘논란’을 벌이고 이에 관련된 모든 행위자들(과학자, 축산농민, 도축장, 정부, 동물단체 등)이 충분히 ‘협의’를 하도록 맡긴다. 그 다음에 하원에서는 공동 세계에서 기존 구성원들과 프리온의 양립 가능성을 평가하고 상대적 위치를 조정하는 ‘위계’ 부여를 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프리온에 대해서는 논의를 종결하고 ‘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상원과 하원이라 한 것은 비유적 용어이고 공동 세계의 구성을 위한 의사결정의 권한을 그렇게 나누자는 것이다. 요점은 이러한 정치 모델에서 자연/사회, 사실/가치의 이분법은 마침내 사라지며, 모든 사물들이 관련 행위자들의 논란과 협의 및 조정을 거쳐야만 공동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으나, 라투르의 정치생태학은 지구적 혼돈과 생태위기 시대에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는 이들에게 참신한 의제와 통찰을 던져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김환석/국민대 교수)  

09. 07. 06.  

P.S. 필자인 김환석 교수가 라투르의 책 <자연의 정치학>과 <사회학의 재구성>을 번역중이라고 한다.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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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투르와 근대성의 문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11 09:00 
    이번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인데, 서평을 쓰게 될 수도 있어서 리뷰기사를 찾아보았다. 참고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07. 11) "근대성의 큰 문제는 비대칭성 '우리는 근대인' 관념을 버려야"  근대인은 전근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끝없는 단절을 시도했다. 그 일정한 성과를 바탕으로 태동한 용어가 ‘근대성’이다. 근대성은 사실과 가치
 
 
나디스 2009-07-06 23:09   좋아요 0 | URL
진정 의외의 번역이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로쟈 2009-07-06 23:20   좋아요 0 | URL
네, 서점 나들이하는 즐거움이죠...

[해이] 2009-07-06 23:27   좋아요 0 | URL
번역됐군요. 예전에 진보지식인지도에서 보고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엇는딩

로쟈 2009-07-08 08:43   좋아요 0 | URL
실물이 있어야 지도도 의미가 있지요...

목동 2009-07-07 10:29   좋아요 0 | URL
본 글중에, "1870년대 후반에 탄저병은 프랑스 전역에서 수많은 가축, 축산농민, 수의사, 위생학자를 괴롭히던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 (중략) ~ 마침내 1881년 파스퇴르는 농업협회의 후원으로 푸이 르포르 마을의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탄저병 백신의 공개 시연을 열었고 결과는 파스퇴르가 예상했던 대로 대성공이었다.", 이 단락을 전문용어로 '자가백신' 접종이라 합니다. 즉, 환축의 몸에 세균이나 독소를 항원으로 만들어 같은 환축에게 투여함으로 문제의 질병을 방어(퇴치)하는 기능입니다.

로쟈 2009-07-08 08:4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번역 현실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로 관심을 모았던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에 나오는 지적이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 번역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함께,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한국의 인문서 번역 현실과 그 적들’, 창비주간논평, 2007. 12. 4). 뼈아픈 지적이고 고민을 담은 주장이긴 하지만,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 우리의 척박한 번역문화가 아니었던가. 다만 그간에 부족했던 것은 이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였고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의지였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제안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전문번역가 이희재씨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노작이다. 20여 년 동안 번역을 해온 전문번역가가 번역현장에서 느낀 문제점과 깨달음을 생생하게 정리한 결과물이라고 책에 대한 소개를 대신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가치는 단지 번역의 방법론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의 표현으론 ‘문화사적 맥락’에서의 의의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저자의 고백을 확장해서 미리 말하자면, 독자로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새삼 한국어에 눈뜰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일차적인 의의다. 더 나아가 번역을 통해서만 우리가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의 특징이 있다는 걸 이 책은 알려준다. 그것이 이차적인 의의다. 이것은 번역작업, 혹은 번역행위가 갖는 보편적인 의의와도 연관됨 직하다. 

번역의 딜레마 - '들이밀까, 길들일까' 

이러한 의의를 좀 더 살피기 전에, 먼저 필자가 잘 정리해놓은 번역의 딜레마에 대해서 짚어보는 것이 좋겠다. 어떤 딜레마인가? ‘들이밀까, 아니면 길들일까’의 딜레마이다. 직역과 의역 사이의 딜레마를 저자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데, 알다시피, 출발어(원어)에 충실한 번역을 직역이라 하고, 도착어(번역어)에 충실한 번역을 의역이라 한다. 가령, “a political hot potato”란 표현을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라고 옮기는 것이 직역이고, “정치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는 식으로 옮겨주는 것이 의역이다. 지금에야 ‘뜨거운 감자’란 표현이 좀 익숙해져서 “시장개방 문제가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나와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처음엔 상당히 낯설었을 것이다. ‘시장 개방문제’가 ‘뜨거운 감자’라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좀 생소하더라도 원어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이 ‘들이밀기’다. 번역에서 독자 편의 가독성이나 이해가능성보다는 원어에 대한 충실성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에게 충실한  번역이 직역이라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 충실하다는 건 더 많이 배려한다는 뜻이다. 물론 놓여 있는 맥락이 서로 다른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충실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경구는 그런 곤경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어느 한쪽에 충실하자면 다른 쪽에는 충실하기 어려운 번역가의 딜레마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표현으로, 프랑스에서 건너온 ‘부정한 미녀(Belles Infidéles)’가 있다. 주로 의역을 가리키는데, 아름답지만 원문이나 저자에게는 충실하지 않다는 뜻을 함축한다. 반대로 원문이나 저자에게 충실하긴 하나 독자가 읽기에는 딱딱하고 어색한 직역투의 번역에 대해서는 '정숙한 추녀'라는 말을 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번역학에서는 ‘자국화(domestication)’과 ‘이국화(foreignization)’란 전문용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길들이기’와 ‘들이밀기’라고 옮긴 것에서 번역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미리 간취해볼 수 있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직역과 의역이 모두 일장일단을 가지며 무엇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저자는 일단 의역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왜인가? 그건 우리가 그간에 너무 ‘들이대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길들이는 쪽으로 가보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기도 하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사실 ‘길들이기’는 영미권에서 다른 언어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소개할 때 으레 해오던 것이다. 그런 전통이 너무 강해서 번역학자나 이론가들이 그런 ‘길들이기’가 함축하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가능하면 원문의 표현이나 구조를 살려주는 ‘들이밀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최인훈의 <광장> 영역본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쓴 작가의 서문을 영어권 관례에 따라 누락시켰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소설작품에 서문을 잘 붙이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고 번역본의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이 소위 ‘길들이기’다.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개항 이후에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때는 원문 중심의 딱딱한 직역투가 주로 쓰였는데,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자신감이 커지면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보다는 일본어로 가독성이 높은 번역을 선호하게 됐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각국의 이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들이밀까, 길들일까’의 문제는 단순히 번역 방법론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사회적·문화적 맥락은 물론이고 자국어와 자국문화에 대한 자신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요컨대, 번역에서 ‘길들이기’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가 그렇게 해도 좋을 만한 문화적 수준에 도달해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번역이란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

저자가 전해주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길들이기’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초창기 영어사전에서는 풀이어에 외래어가 전혀 나오지 않았으며 가급적이면 기존의 어휘를 동원하려고 했다. 예컨대, 지금은 한국어로 통용되는 ‘발코니(balcony)’와 ‘치즈(cheese)’를 당시엔 ‘툇마루’와 ‘소젖메주’라고 옮겼다. 여기서 ‘cheese’를 ‘소젖메주’로 옮기는 것이 ‘길들이기’이고, 다시 ‘치즈’로 옮기는 것이 ‘들이밀기’라면, 우리의 번역문화사는 ‘길들이기’에서 ‘들이밀기’ 쪽으로 흘러갔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어쩌면 서구어와 서구문화에 대한 모방과 동경의 풍조 속에서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차츰 엷어져간 세태와도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오렌지’라는 한국어를 영어의 ‘orange’와 똑같이 ‘어륀지’로 읽어야 한다는 발상까지 ‘들이밀며’ 한쪽에서는 영어 발음을 위해 혀까지 수술하는 세태 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직역(들이밀기)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만, ‘직역’이 보다 바람직한 번역 방법론이라고 고집하는 직역주의는 반성의 대상이 될 만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30쪽)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대로 그런 상식을 배제하는 것이 ‘직역주의’라면 말이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번역은 저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 하는 것”(234쪽)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독자는 물론 ‘한국어 독자’를 말하는 것이니, 독자를 위한 번역이란 보다 알기 쉬운 한국어 단어와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는 영일사전을 베끼다시피 한 우리의 영한사전보다는 북한의 영조사전이 오히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가령 'sabre-toothed tiger'를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의 풀이어 ‘劍齒虎’를 그대로 한국어로 읽어서 ‘검치호’라고 풀어주지만, 영조사전은 ‘칼이범’이라고 옮겼다. “No mill, no meal.”이라는 영어 속담을 영일사전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는 먹을 자격이 없다”라고 옮기고, 영한사전도 이와 비슷하게 옮겼지만 영조사전은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고 기존의 속담을 이용하여 번역했다. 북한의 영조사전은 ‘주체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때론 억지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런 북한의 태도를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남한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비교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학대하는 듯한 직역투의 문장에서 원문과 외국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면 과장일까?  

물론 이런 사대주의적 태도는 중화주의에 물들어 세종의 한글 창제를 극력으로 만류했던 당시 대신들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므로 ‘뿌리’가 깊다. 그렇게 중국을 숭배하다가 일제 때는 일본에 고개를 숙이고, 해방 이후엔 ‘코쟁이’들의 말과 문화에 사족을 못쓴 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지금도 미국식 문화, 미국식 학문은 당연한 모델처럼 받아들여지며, 같은 말이라도 가급적이면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유행이다. ‘조리법’ 대신에 ‘레시피’라고 하듯이 말이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서로 섞이고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편중됐고 일방적이며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길들이기’로서의 의역은 우리 멋대로 창조적인 번역을 하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어다운 한국어의 사용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란 저자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역자가 다양하면서도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어의 특징을 이모저모 짚어주고 있는 대목들이다. 특히 저자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의 특징을 어떻게 잘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한국어의 다양한 활용가능성을 실감하게 해주어 인상에 남는다.  

예를 들자면 “He took the trouble to see me, though he was very busy.”란 문장을 어떻게 옮길까? “굉장히 바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와주었다.” 정도가 아닐까. 저자는 그것 대신에 “굉장히 바쁜데도 일부러 와주었다.”라고 옮기는 것이 더 한국어답다고 말한다. “Even if I fail, I won't give up.”의 경우도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보다는 “실패할망정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옮겨주는 것이 더 맵시 있고 윤기 있다. 즉, 접속사가 발달한 영어 문장을 그대로 일대일 대응이 되게 옮기기보다는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 표현으로 옮겨주자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부정한 미녀’의 사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에 가깝지 않을까.   

번역 방법론에 대한 얘기를 주로 늘어놓았지만, 간단한 사례에서 짐작해볼 수 있듯이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한국어의 특징이나 아름다움, 유용성 등을 직접 발견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러한 발견은 저자의 오랜 번역 경험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끼리는 잘 몰라도 외국인과 같이 서면 한국인다운 특징이 바로 눈에 띄는 것처럼, 우리말도 다른 언어와 나란히 놓일 때 도드라진다. 명사중심의 언어인 영어에 맞춰 동사중심 언어인 한국어에 맞지 않게도 명사 위주의 번역문을 만드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다며 검역주권까지 내놓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외국인을 위한 번역, 남들 보기 좋으라는 번역이 아닌 이상, 번역에서도 ‘들이미는’ 일은 이제 그만 했으면 싶다.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다운 한국어로 옮기면 더없이 좋지 아니할까?  

사족을 덧붙이자면, 책은 쉽게 씌어져 있으므로 중고등학생도 읽어봄 직하다. 물론 번역가들뿐만 아니라 번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들, 특히 잘 안 읽히는 번역서를 붙들고 읽으면서 그동안 불만을 쌓아두었던 독자들은 필독해 볼 만하다.  

09.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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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9-07-0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사 중심인 남의 말들을 우리 말다운 동사 위주로 옮기면 뭔가 책잡힐 일을 했다는 느낌을 늘 지울 수가 없답니다. 명사 위주로 줄줄 나열하면 책은 안 잡히겠지, 이런 간교한 생각이 들기도 하니, 문제는 문제지요.

그나저나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이나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라는 표현이, 참으로 와 닿네요. 시원하게 정리해주신 서평이라고 느낍니다. :D

로쟈 2009-07-05 23:00   좋아요 0 | URL
인문 이론서는 그런 '면피성' 번역이 주종이죠. 원작/원전에 대한 '충실성'만 앞세우는 태도가 '어륀지주의'와 뭐가 다른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위버멘쉬'처럼 그냥 음역한 걸 '번역'으로 내놓기도 하고요...

2009-07-06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7-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는 로쟈님 글귀가 마음속에 콱 박히네요.
근데 인문 사회계열의 책들은 독자들이 원문 해석능력이 계신분이 많으므로 번역자들이 나름 공을 들여 번역지만 제가 좋아하는 장르 소설은 일어 중역이라든가 날림 번역이 많아 어떤때는 정말 책을 던져버고 싶을 정도지요.하지만 원문 독해실력은 없고 번역이나 소개조차 안된 책들이 대부분이니 번역이 좀 안 좋아도 그냥 출판해 해주시면 감지덕지 합니다 ^^;;;

로쟈 2009-07-06 12:38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의 경우엔 독자클럽 같은 데서 오역도 지적하고 작품 번역도 요구한다던데, 그게 아닌가 보죠? 아니라면 이제라도 그렇게 '실력행사'를 해야합니다.^^

종이한장 2009-07-1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관한 서평이라 주제넘게 한말씀 드리자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는 문장은 "독자에게 (좀) 더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라고 바꿔 쓰는 것이 옳은 표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보다"는 "이것보다 저게 더 낫다"에서처럼 조사로 쓰입니다. 그런데, 영어의 "more"를 직역(?)한 탓인지 "(좀) 더", "더욱"이 들어갈 자리에 "보다"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죠.

로쟈 2009-07-10 18:29   좋아요 0 | URL
책으로 묶게 되면 교정하겠습니다. 보통은 편집자들이 수정해주는데, 이번엔 그냥 넘어갔네요.^^;
 

한때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도 했지만 올해는 '본격적으로 삽질하기 시작한 계절'이라고 해야겠다. 삽질 '늬우스'와 본격적인 노동계 하투로 채워질 듯한 계절에 읽을 만한 책을 꼽을 만한 흥은 나지 않지만, 다른 할일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칠면조가 위급에 처하여 머리를 처박는 것처럼) 단순작업을 해둔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타임캡슐'의 의미도 언젠가는 갖게 되기를 바라면서...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꼽은 문학서는 박범신의 <고산자>(문학동네, 2009)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일대기를 그린 이 소설에 대해선 따로 소개가 필요하지 않겠다. 추천자의 평은 이렇다. "<고산자>는 시대 고증은 물론이고 고산자의 내면이 섬세하게 들여다 보인다. 어느 때는 고산자 당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 밀착감으로 인해 고산자의 일생은 역사소설 안에 갇히지 않고 현재 우리 곁에 살아있는 사람처럼 복원되었다. 역사가 유기한 인물인 만큼 부족한 고산자의 연대기에 불어넣은 작가의 상상력이 이루어낸 진경이며 더불어 당시 민초들의 삶도 감칠맛 나게 펼쳐진다."  

거기에 보태어 가벼운 소설과 무거운 소설을 한권씩 보태본다. <맛>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이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라는 <나의 삼촌 오스왈드>(강, 2009)와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한 트래비스 홀랜드의 첫번째 장편소설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 전자는 "'유쾌하게 즐기며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오스왈드가 어떤 남자도 쓰러뜨리고 마는 아찔한 미모의 야스민, 정자 영구저장법을 고안해낸 케임브리지 화학과 교수 워슬리와 환상의 팀을 이루어 세기의 천재들을 상대로 기발한 정자 탈취극을 벌인다"는 이야기이고, 후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인 1939년 스탈린 치하의 모스크바에서 악명을 떨쳤던 루뱐카 교도소를 배경으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함, 감시와 처벌이라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과 고뇌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상이한 소설들을 읽으며 문학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해보고 싶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문화연구소장이 꼽은 역사분야의 책은 조셉 커민스의 <라이벌의 역사>(말글빛냄, 2009). 제목과 표지에서 이미 책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라이벌의 역사>는 라이벌들의 갈등과 대결을 통해 그 시대를 생생하게 보게 한다. 장개석과 모택동, 그리고 프랑스의 드 카스트리 장군과 싸운 베트남의 보 구옌 지압 장군을 제외하면 모두 서양인들이지만 한 시대를 주도한 라이벌의 대결은 양의 동서를 뛰어넘는 흥미를 준다. 서로 다른 캐릭터를 가진 라이벌이 동시대를 끌고 가기 위해 경쟁했다는 자체가 흥미롭다."  

작년 10월에도 이덕일씨는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역사비평사, 2008)을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테마를 역사가들을 흥미로워하는 듯하다. 내가 더 떠올릴 수 있는 책은 몇년 전에 나온 라이벌 시리즈인데,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갑인공방, 2006),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갑인공바, 2005) 등. 타이틀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삐져나올 듯하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꼽은 철학분야의 책은 클로소프스키의 <니체와 악순환>(그린비, 2009)이다. 다른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서 군말은 보태지 않는다. 추천자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앎, 이제까지의 가치, 이제까지의 습관을 모두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계획하자, 이것이 니체의 외침이다. 이런 니체의 외침이 20세기 후반기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이데거의 니체 강의, 들뢰즈의 니체론 등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니체 사상을 현대 사상사 안에 폭발시킨 또 하나의 도화선이 있는데, 그것이 이번에 번역된 클로소프스키의 니체론이다. 철학자가 아닌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영화감독, 화가인 클로소프스키. 그는 바타유, 푸코, 들뢰즈 등과 같은 프랑스 니체주의자들의 구심점이었다. 이 책은 두통과 광기에 시달리는 니체의 인간적인 모습과 영원회귀라는 숭고한 계시 아래 현자의 길을 가는 니체의 모습을 짜임새 있게 엮어가고 있다."  

니체에 관한 국내서로 박홍규의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필맥, 2008)과 김진석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 2009)는 '민주주의'란 쟁점을 놓고 니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논쟁적이다. 그 논쟁이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으로 귀결된다면 니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으리라.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레이코프의 <자유전쟁>(프레시안북, 2009)이다. "언어학과 인지과학을 결합시킨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로서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며 우리는 모두 ‘프레임’이라는 일종의 틀을 통해 사고를 한다는 프레임론을 통해 현대정치를 분석,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과 프레임론을 통해 자유라는 개념을 둘러싼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개념전쟁을 분석해 또 한 번 현대정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 단계 높여주고 있다"는 것이 책에 대한 평이다.   

마침 책상머리에 원서와 함께 놓여 있는 책이기도 한데, 레이코프의 요지는 간단하다. "오늘날 미국에는 자유에 대해 매우 다른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미국을 양분하는 두 개의 매우 다른 도덕적, 정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다"는 것. '누구의 자유인가?'란 원제는 그 두 가지 해석의 충돌을 지시한다. 2009년의 한국은 어떤 전쟁터일까?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꼽은 경제/경영서는 지난 5월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고른 바 있는 폴 그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세종서적, 2009)이다. "세계의 경제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불과 몇 년 전의 일이 오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2009년 대폭 개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이 책은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를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현실감을 보인다. 아직도 그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서브프라임 위기의 본질에 대해 이처럼 명확하게 분석해 놓은 경우를 다른 데서 보기 힘들다."는 것이 추천의 이유다.   

경제서의 경우엔 주저없이 두 권의 책을 덧붙일 수 있다. 조지프 히스의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마티, 2009)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 분량상 폴라니의 책은 이달에 다 읽어내기 어렵겠지만, 여름내 곱씹어서 음미해볼 수는 있겠다. 우리 또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어째서 그런한가는 교수신문의 칼럼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8530 을 참조).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고른 사회분야의 책은 좀 특이하다. 샌드라 하딩의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나남, 2009쪽). 저자가 페미니스트 과학자인 만큼 과학서로도 분류됨 직하지만, 추천자는 과학에 관한 사회적 논쟁의 관점에서 보는 듯하다. 페미니즘 과학론에서 하딩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최근의 페미니스트 과학론은 크게 인식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경험론과 과학지식을 성, 인종, 계급과 같은 사회적 변인에 의해 매개되는 지적 산물로 간주하는 입장론, 그리고 과학지식을 포함한 세상 모든 지식의 편파성·임의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과학론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과학지식의 사회적 근원을 따지는 입장론을 지향하되, 그것이 지배집단의 통제권을 벗어나 본연의 힘을 발휘할 때 그 해방적 잠재력이 극대화한다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저자 하딩은 1, 2부에서 ‘강한 객관성’이라는 개념틀에 입각해 페미니스트 입장론의 핵심적 쟁점과 내용을 상술한 후, 3부 ‘타자들’에서는 성적 쟁점을 넘어선 입장론의 다문화주의적 확장을 시도한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고른 책은 위르겐 타우츠의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이치 사이언스, 2009)이다. 사실 진작에 실물을 확인해보고 싶은 책의 하나였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서는 초개체 꿀벌의 탄생 배경, 여왕벌을 중심으로 한 꿀벌의 생태학, 꿀벌의 시각, 후각, 공간지각, 의사소통 능력,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짝짓기, 벌집의 구조와 기능, 유충의 미래 결정하는 부화의 지혜 등 꿀벌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윌슨과 휘도블러의 <개미 세계 여행>(범양사, 2007)이나 감수를 맡은 최재천 교수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1999)의 꿀벌 버전이 아닐까 짐작해본다(분량이 두툼한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이 막바로 떠올려주는 또 다른 책은 로완 제이콥슨의 <꿀벌 없는 세상, 결실 없는 가을>(에코리브르, 2009)이다. 짐작엔 추천자도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이렇게 덧붙이고 있으니까.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지구에서 사라지면 인간은 그로부터 4년 정도밖에 생존할 수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최근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깨끗한 환경의 지표인 꿀벌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이 시점에 꿀벌의 은밀한 생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소중하다. 책장을 덮으면서 꿀벌을 돕는 길이 우리 스스로를 돕는 길이란 저자의 에필로그가 마음에 깊이 남는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20세기 패션 아이콘>(미술문화, 2009)이다. 다양한 분야를 안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2000년을 10년 앞에 놓고 전 세계의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20세기를 정리하는 담론들을 쏟아냈던 때가 있다. 여러 각도에서 20세기를 정리한 책들이 재미있기도 하여 한동안 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2000년하고도 10년이 코앞인 시점에 20세기를 정리한 책이 하나 더 나왔다. 바로 패션의 시각에서 20세기를 정리한 책이다.(...) 미니스커트의 출현은 물론 PVC 재료의 옷, 하이테크를 이용한 미래지향적 의복, 그리고 오늘날 하나가 된 지구촌 문화를 드러내는 옷 등등 많은 화보들이 포함된 이 책과 더불어 20세기를 한번 조망해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라고 추천의 이유를 적었다.    

 

20세기 패션을 다룬 책으론 <20세기 패션>(시공사, 2003)도 같이 참조해볼 수 있겠다.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책은 질 리포베츠키의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 1999)인데, 최근에 영역본과 함께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다. 저자는 "중세 말기에 패션이 출현하여 수세기를 거치면서 그것이 진화해온 주요 경계선들을 이해하는 것"과 함께 "현대사회에서 패션의 힘이 상승하는 것을 이해하고 소비주의와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길을 따라 시작한 민주주의 안에서 패션이 차지하는 중요한, 전례없는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적었다.  

참고로, 영역본의 서문은 리차드 세넷이 썼다. 최근 불거진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데 가장 참조할 만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사회학자가 세넷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해서 '세넷의 모든 책'이기도 하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백승선, 변혜정의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가치창조, 2009)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크로아티아를 소개하고 안내하는 책이다. 추천자에 따르면, "유럽 구석구석을 참 많이 다녀보았지만 크로아티아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저 크로아티아는 옛 유고 연방의 한 나라였고 축구를 잘하는 작은 나라 정도가 솔직히 내가 가진 정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최근 여행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크로아티아 가 보았느냐?”는 질문을 듣는 일이 조금씩 잦아지고 있었다. 이 책, 참으로 잘 만들었다. 한 마디로 크로아티아 같은 책이다."   

흠, 이런 항구 도시들을 내려다보노라면, 여름 한 철이 짧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크로이티아 이전에 러시아라도 몇 번 더 가봐야 할 텐데, 혹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이병훈의 러시아예술기행 시리즈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한길사, 2007)과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한길사, 2009)를 먼저 일독하시는 게 좋겠다.   

그리고 여유 자금이 있다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도 한번 들러보시길. 지난주 경향신문의 여행기사를 읽고 매력을 느낀 도시인데, "에스토니아의 탈린이란 도시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탈린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도 중 하나다. 서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한자동맹의 거점 도시로 고풍스럽고, 크며, 아름답다.(...) 탈린은 완벽한 관광도시다. 곳곳에는 중세의 복장을 한 상인들이 물건을 팔거나, 활쏘기 체험을 권유한다. 또 건물 하나하나에 역사가 깃들어 있다. 전망도 좋아서 덴마크 왕의 정원, 구시청사의 첨탑 등에서는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탈린은 북유럽의 보석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즐겁긴 하군. 탈린까지는 어떻게 가는가? "핀란드 헬싱키까지는 직항이 생겨 9시간 만에 갈 수 있고, 여기서 배타고 2시간만 가면 탈린이다." 그래, 10년 내로 한번 가보기로 한다...   

10. 좌파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의 주제는 '좌파'로 골랐다. 최근에 나온 버틀러, 라클라우, 지젝 공저의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도서출판b, 2009)의 부제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도 여러 국내외서가 나와 있지만, '좌파란 무엇인가'란 화두에 댭해줄 만한 번역서 세 권을 골랐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난장, 2009)와 앤소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한울, 2008)를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의 오른쪽에 덧붙여두고 싶다. 국내서 가운데는 박노자의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한겨레출판, 2009)를 먼저 꼽아야 할 텐데(흠, 반드시 맨왼쪽 서가에 꽂아두어야 할 책이다). 이미 작년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고른 적이 있는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 김진석의 <기우뚱한 균형>(개마고원, 2008) 등이 거기에 보태질 수 있겠다. 여하튼 한두 권이라고 읽어볼 수 있으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09. 07. 04.  

P.S. 이달의 고전으로는 사르트르를 골랐다. 최근에 '상황4' <시대의 초상>(생각의나무, 2009)이 번역돼 나왔기 때문인데, 이 참에 좀 밀린 사르트르의 책들도 뒤적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과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 등이 그 밀린 책들이다. 참고로, <시대의 초상>에서 사르트르가 앙드레 고르의 소설 <배반자>(1958)에 붙인 서문의 제목이 '쥐와 인간'이다. 쥐와 인간에 대한 사르트르식 식별법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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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7-0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조가 아니라 칠면조인가요

로쟈 2009-07-05 19:02   좋아요 0 | URL
흠, 두 가지 설이 있나 봅니다...

Jade 2009-07-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와 인간에 대한 사르트르식 식별법"에 급 땡기는데요 ㅋㅋ

아, 로쟈님 페이퍼는 어려운 책을 사라고 꼬드기는 마약같아요...아직까진 구매행위가 읽는것으로 잘 이어지고 있지 않은 폐단이 있다만...켁

로쟈 2009-07-06 11:56   좋아요 0 | URL
그래도 출판문화 창달에 기여하시는 것이죠.^^;

푸른바다 2009-07-14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 <존재와 무> 새 번역본이 나왔네요. 번역이 어떨지 궁금하군요...

로쟈 2009-07-14 08:04   좋아요 0 | URL
저는 예전 번역이겠거니 했는데, 진짜 새 번역본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