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잡지 <기획회의>(251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터뷰이가 로쟈여서다. 인터뷰어는 북칼럼니스트 이하영 씨이고(<조제는 언제나 그 책을 읽었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나는 두주 쯤 전에 인터뷰에 응한 바 있다. '로쟈'에 대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http://image.aladin.co.kr/cover/cover/6000346144_1.jpg)
기획회의(09. 07. 05) 죽어야 사는 인문학 출판 - 블로거 로쟈
로쟈의 블로그는 인문서의 살생부다. 인문학의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왕성하게 올려대는 그의 글들은 온라인서점을 방문한 독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때론 지름신으로 강림하고 때로는 특정도서에 대한 독서 의욕에 초를 치기도 한다. 그의 검은 날카롭고 그의 검술은 무자비하다.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사실 나는 그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인터넷에 올린 글이므로. 나는 여전히 물질화된 콘텐츠를 신용하는 보수주의자(?)다. 인터넷의 검증되지 않은 날것은 비리다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나는 알게 모르게 블로거 로쟈의 리뷰에 영향을 받아 왔고, 오프라인 매체에 실린 로쟈의 글에 대한 신뢰와 호감 역시 온라인에서 받은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온라인에서 무림고수가 된 그는 오프라인 매체에서도 다른 수식어 없이 ‘인터넷 서평꾼’이라고 자신을 규정했는데 이는 많은 이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우리 사회의 학적인 배경 없이 그저 그의 글이 담고 있는 실력 하나로 ‘발굴된’ 필자일 거라는 추측이었다. 드디어 우리 사회에도 지식과 교양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희망사항에 로쟈를 증거로 삼고 싶어 했다고나 할까.
내게도 로쟈에 대한 막연한 상이 있었다. 어쩐지 로쟈는 이 복잡한 도시에서 땀 냄새 풍기며 사는 소시민은 아닐 것 같았다. 학연과 지연과 혈연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강호의 고수가 아닐까 상상했다. 그러나 역시 망상에 불과했음이 그의 책 출간과 함께 여실히 드러났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날개에 인쇄된 저자 소개말은 나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로쟈’라는 ID 혹은 필명으로 알려진 그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200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이며…”
미네르바가 전문대졸 백수라는 사실에 통탄해마지 않던 자들처럼 나도 로쟈가 ‘서울대 박사’라는 사실에 통탄했다(뭐, 전혀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자꾸만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이해해줄 이도 있을 것이다). 통탄해봤댔자 배배꼬인 내 심사야 내 사정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인문서의 지름신이자 살인자(혹은 살서자인가)인 그를 만나 물을 얘기가 많았다.
6월의 교정은 찬란했다. 햇살은 눈부셨고, 녹음은 무성했으며, 공기는 투명했다. 저만치서 그가 걸어오고 있다. 멀리서 봐도 로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팔이 긴 남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자유로운 두 팔이 허리춤에서 반쯤 접혀 있다. 책꾸러미를 들고 다니느라 길어졌을 것이 분명한 저 두 팔은 오늘, 모처럼 한가롭다. 내가 그의 책을 들고 서성이는 것을 보고 그도 나를 향해 알은 체를 한다.
악한 사회에 선한 개인은 없다고 믿는,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이 가진 것은 나누어야 한다고 여기는, 그래서 자신이 지닌 ‘앎’을 거침없이 숨 가쁘게 나누고 있는 한 지식 전체주의자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유명하고 냉혹한 로쟈지만 그를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느껴진다. 그의 일상은 주로 고독하고 그의 내면은 주로 여리다. 아직 소년의 앳된 미소를 간직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준비했던 질문들이 하얗게 사라진다. 그에겐 ‘로쟈’라는 이름보다 ‘미카엘’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살인자의 얼굴은 평온했고, 전체주의자의 미소는 천진했다. 어찌하랴. 어쨌거나 나는 질문을 해야 한다.
![](http://image.aladin.co.kr/cover/cover/8901095718_1.jpg)
서당개 3년은 풍월을, 블로거 5년은 출판을
이하영 (이하 이) ― 먼저 『로쟈의 인문학 서재』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책은 많이 팔리는지요?
로쟈 ―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많이 팔린 것 같습니다. 출판사는 4,000부 이상 팔리는 인문서를 내는 것이 목표라고 하던데 제 책이 일단 그 목표는 넘어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사실 제목이 좀 딱딱한 듯해서 마음에 걸렸지요. 『나는 인문학 공부를 후회한다』라고 했으면 더 좋을 뻔했다는 생각은 듭니다(웃음).
이 ― 저도 후회합니다, 로쟈를 인터뷰하기로 한 것을. 책이 어려웠어요. 뭘 질문해야 하나, 난감하더라구요. 로쟈님을 인터뷰할 수준이 못 된다는 자괴감이랄까. 대중지성이라면서 이렇게 수준이 높으니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로쟈 ― 내용이 약간 무거운 것은 의도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블로그에 올린 글이니 가벼울 거라는 편견, 인터넷 공간을 통해 소통되는 지식과 담론이 수준이 낮고 신뢰할 수 없을 거라는 인식을 깨고 싶었어요. 그런데 인터뷰이로 왜 저를 택했습니까? 다른 베스트셀러 저자도 많을 텐데요.
이 ― 블로그가 출판기획자들의 전초기지가 되다시피 한 상황이지만 인문학 블로거 로쟈의 책 출간은 의미가 큽니다. 지금까지 블룩은 실용서나 가벼운 에세이가 대세였으니까요. 하지만 로쟈님을 필두로 좀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블룩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전문가 블로거의 파워가 전통과 공신력을 자랑하는 오프라인 매체들의 영향력을 앞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인문학 블로거 로쟈의 영향력은 이미 전설적이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는 로쟈 같이 전문성을 지닌 블로거들로 전문서평웹진을 꾸려 신간서평을 정기적으로 올린다면 기존 신문들의 북섹션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거라고 판단하고 그 수익모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로쟈의 생각은 어떤지도 궁금하네요.
로쟈 ― 그런 서평공간이 인터넷에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신문의 영향력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성으로는 기존 신문을 앞설 수 있을 테니까요. 수익모델만 찾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서재블로그뿐 아니라 다음과 네이버 카페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데요. 세 공간의 차이점이 있습니까?
로쟈 ― 다음 카페 ‘비평고원’이 먼저였죠. 알라딘의 서재블로그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카페는 함께 고전을 읽는 소모임 회원들의 공간입니다. 알라딘에 ‘나의 서재’라는 공간이 생긴 것이 5년쯤 전이고, 덩달아 저의 블로거 경력도 5년차쯤 됩니다. 책에 담긴 내용의 대부분이 2004년도에 쓴 글들인데 그해에 저는 러시아에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었죠. 이 책은 제게 그때 이후 블로거 활동에 대한 기념품 같은 겁니다. 인터넷 글쓰기라는 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일이잖아요. 그간의 시간과 노력이 쓸 데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의미가 있죠. 가족들도 좋아하구요.
이 ― 왜 블로거가 되었나요? 블로거 활동의 매력이랄까, 멈출 수 없는 이유는요?
로쟈 ― 블로거가 된 게 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알라딘 회원에게 자동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그런 공간이 생겼던 거구요. 그래서 서재 소개에 이렇게 적어놓은 것이죠. “이런 곳도 다 있군요. ‘나의 서재’라지만, 제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적응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매력’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입니다. 인터넷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면을 통해서나 활동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블로그 이전에는 ‘카페’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병행을 하고 있구요. 매체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지만 매체의 변화에 나름대로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편입니다.
이 ―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인터넷에 자주 로그인하여 블로그이웃들과 소통하는 생활이란, 육체건강에 매우 해로울 듯합니다. 건강관리는 어찌 하시는지요?
로쟈 ― 최근에서야 동네 헬스클럽의 가족 회원권을 끊었는데요, 역시나 자주 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나름대로 복부비만에다 당연히 체력이 별로 좋진 않지요. 어린시절엔 병약한 것을 다행스러워한 적도 있었어요. 공부는 잘하는 편이니까 모자란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 게 제 ‘평등감각’이었습니다. 요즘은 저를 부러워할 사람도 별로 없는 듯싶으니 건강관리도 좀 해야겠습니다. 써야 할 책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도 하구요.
![](http://mohawkapenglish.files.wordpress.com/2007/11/crimepunishment.jpg)
로쟈 vs. 이현우
이 ― ‘로쟈’는 인터넷 아이디이지만 오프라인 매체에서도 필명으로 줄곧 써오셨습니다. ‘로쟈’라는 이름에 특별한 사연이 있나요?
로쟈 ― ‘로쟈’라는 이름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리고 여성인줄 알았다는 분들도 많으신데 ‘로쟈’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입니다.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가가 아니라 살인자죠. 누군가 제 책에 대해서 ‘살인자의 헌신’이라는 평을 해주었는데 마음에 듭니다. 저 역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시절도 있었구요.
이 ― 가난한 대학생이었군요,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는.
로쟈 ― 사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걸 서울로 대학을 와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난은 상대적인 가난인 거죠. 지역에서는 나름 중산층이었고 그땐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다른 기대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했죠. 책에도 쓴 얘긴데, 어머니가 제 당사주를 봤을 때 백발도사가 책 읽는 모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내놓은’ 자식이 됐어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문학을 전공으로 택했는데, 하필 러시아 문학이냐고 하면 러시아 문학에 큰 작가들이 많아서였어요.
이 ― 80년대 학번, 러시아문학전공. 글쎄요. 로쟈로서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자연인 이현우로서는, 게다가 장남이라면서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 네. 그렇죠. 한마디로 책임감이 없는 거죠. 가족들 고생시키고. 늘 현실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수도사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죠. 수도사의 삶이 좋아보였던 이유는 덜 먹고, 사치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는다는 데 있었어요. 북유럽에 가면 훌륭한 감옥시설들이 있죠. 책읽기에 그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 거예요. 안락한 공간에다 적절한 식사도 공급해주고 시간 맞춰 운동도 시켜주고요. 커다란 도서관만 갖추고 있다면 그런 곳에서 장기 복역할 의사도 있습니다.
![](http://www.abeingo.org/images_news/jail_austria_002.JPG)
이 ― 대한민국에 사는 남자에겐 해야 할 ‘노릇’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문화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노릇’들에서 자유롭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텐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온 걸까요? 책을 많이 읽어서 자의식이 강해져서 그런 건가요?
로쟈 ― 글쎄요. 저는 불편하지 않은데, 대신에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죠. 저는 주변에서 구박 받고.
이 ― 세속적인 욕망과 거리두기를 잘 하시나 봐요. 비결이라도 있나요?
로쟈 ― 역사적으로나 동시대적으로 우리가 먹고살만한 축에는 들어가 있죠. 상위 몇 % 안에 들어갈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빈곤이나 박탈감 때문이지 대개 절대적인 빈곤 상태는 아닌 것이죠. 좀더 넓은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욕심, 남보다 더 많이 갖겠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사는 데 크게 지장은 없지 않을까요. 거기서 남는 걸 나눠가지면 되구요.
이 ― 현실세계와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사는 것 같은, 이 세계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듯한 겉도는 느낌이랄까, 로쟈에게서는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로쟈 ― 네. 그런 거리감이 늘 있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지방의 소도시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그래서 그 지역 토박이는 아니라는 거리감이 항상 있었어요. 서울에 와서도 마찬가지구요.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어릴 적 동창들을 만나도 여전히 그때의 거리감이 남아있습니다. 저와 그들 사이에 ‘전학 온 아이와 토박이’라는 거리가 존재하죠. 그러고 보면 출신 지역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쩐지 저는 이 사회에 완전히 속해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거리감이 있습니다.
이 ― 그런데 책이나 인문학과는 거리감이 없잖아요.
로쟈 ― 그렇군요. 인문학에 대해서는, 책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군요.
인문학 출판, 죽어야 산다
이 ― 거리감이 너무 없어서 그런가요. 로쟈의 서평은 때로 무척 아픕니다. 제가 만든 책도 아닌데 제가 다 아프고 민망할 지경입니다. 어려운 인문학 책을, 그것도 많이 팔리지도 않는 책을 애써 번역한 번역자와 편집자로서는 칼을 맞는 기분일 거예요.
로쟈 ― 그래서 비판도 많이 받죠. 가뜩이나 좋지 않은 인문학 출판 시장을 죽이는 일이라며 부작용을 우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고 덮어둔다고 인문학 시장이 살아나나요? 아무도 오류를 지적하지 않아서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이 잘못된 지식을 올바른 것으로 믿는 것이 인문학 대중화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요? 제가 지적하는 것은 오탈자의 단순한 실수들이 아닙니다.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옮긴다든가 문장의 의미를 전혀 엉뚱하게 왜곡한다든가 하는 경우들입니다. 그런 건 고쳐가면서 읽자는 것이죠. 우리 인문학 출판이 어려운 것은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판계는 인문학 책을 읽지 않는 독자를 탓하고, 독자들은 인문학 책이 읽기 어려운 데 비싸다고 불평합니다. 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누가 먼저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요. 구조적인 문제이지만 당장은 의지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을 듯해요.
한국은 인문․학술출판 시장이 작아서 책을 만드는 데 들인 노력을 보상받을 가능성이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학에선 정부 지원에 의지합니다. 논문과 보고서만 업적으로 인정하는 현 제도 하에서 학자들은 그 기준에 맞추는 일만으로도 바빠 대중적인 글쓰기에 할애할 시간이 없죠. 힘들게 책을 내도 초판조차 소화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역이나 실수가 발견돼도 다음 쇄에서 수정할 기회를 갖기 어렵죠. 그렇다면 정오표라도 만들어서 공개하는 게 좋을 듯해요. 불성실한 오역서가 고급교양서나 학술서로 포장되어 팔리는 것은 지양해야죠.
이 ― ‘죽어야 산다’는 뜻인가요. 책 제목을 『나는 인문학 공부를 후회한다』라고 할 걸 그랬다는 농담이 빈말은 아닌 듯합니다. 인문학자가 된 것을 후회하나요?
로쟈 ― 후회도 합니다. 하지만 대안이 없으니 후회해도 소용없죠. 다른 데에는 소질이 없었으니까요. 인문학 공부는 재미있는 공부만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슬프죠. 정현종의 시구에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게 있어요. 인문학은 멜랑콜리한 학문입니다. 인간을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그렇죠.
‘인문학자’라는 타이틀은 제게 부여된 것입니다. 지금도 ‘인문학자’라 불리는 것이 빌려 입은 옷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제가 인문대 출신이긴 하지만요. 학부 시절, ‘인문대’란 말은 교련 시간에 제일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인문대’ 하면 군부대이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더러 “문학 전공이라면서 인문학도 다방면으로 많이 아시네요”라고 말하는 분도 있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다룹니다. 인간 삶의 총체성을 담는 것이 문학이니까요. 인간은 역사적, 정치적 존재이면서 또 생물학적 존재죠. 그런 인간을 이해하려면 다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적어도 그렇게 노력은 해야겠죠.
![](http://michaelminn.net/andros/images/nijinsky_vaslav.jpg)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러나 마음 약한 로쟈
이 ―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부분이 「책머리에」와 「프롤로그」 그리고 「에필로그」입니다. 책을 여는 글과 닫는 글 두 편이 다 ‘눈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본문과 달리 촉촉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인의 감성을 드러낸 부분도 친밀감이 느껴졌습니다. 인문학 책의 살생부를 쓰는 듯한 냉혹한 로쟈와 니진스키의 눈물을 이야기하는 로쟈는 다릅니다. 어쩐지 분열적입니다.
로쟈 ― 눈물이라는 건 고통에 대한 방어막이기도 하죠. 눈물을 흘린다는 건 적당히 느끼고 적당히 슬퍼하는 것이기도 해요. 충격에 대한 방어기제가 눈물입니다. 충격을 완화하는 애도 방식이 슬픔이고 눈물입니다. 그래서 울 수 없고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우리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니진스키처럼 정신줄을 놓아버릴 수도 있구요. 그런 게 눈물의 이중성입니다. 눈물은 고통에 대한 연민이면서 궁극적인 고통에 대한 방어막입니다. 문학, 혹은 인문학은 그런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는 것이면서 그런 눈물의 윤리에 대해서도 되새겨보게 합니다.
이 ― 인문학에 거는 희망이 그런 건가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커지면 세상이 좀더 나은 곳이 될 거라는?
로쟈 ― 저는 인문학을 통해 희망을 발견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절망하기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희망, 행복, 재미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으니까요. 정말 필요한 건 절망인지도 모르겠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기도 하잖아요. 개인적으론 거기서 어떤 연대를 기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 출판사들로부터 이런저런 제안을 많이 받을 듯합니다. 번역이나 집필 요청도 많이 받으시죠?
로쟈 ― 번역이나 감수 요청이 들어옵니다. 번역서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은 것을 제가 제안하기도 하지요. 요즘은 원고 청탁이 많아서 정신이 좀 없습니다.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웬만하면 다 승낙을 합니다. 그래놓고는 제때 해결을 못해 곤란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요. 외부 원고와 강의가 책 읽는 시간을 많이 빼앗아갑니다. 청탁이나 강의도 다 책으로 인한 일들이니 결국 책 때문에 책을 못 읽는 셈인가요. 써야 할 책들도 여러 권 있습니다. 세계화에 대한 것, 번역 비평, 러시아 문학 등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만 해도 얼추 열 종 정도 됩니다.
이 ― 책머리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 나는 다만 읽고 쓰고 떠들겠다”라고 쓰셨는데, 읽고 쓰고 떠드는 가운데 뭔가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으신가요?
로쟈 ― 당면과제는 말씀드린 대로 몇 권의 책을 쓰는 것입니다. 이건 강제된 부분도 있지만요. 특히 ‘너 자신을 세라’란 타이틀의 책을 수년 내로 쓰고 싶고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의 로쟈 버전입니다. 제가 읽고 싶은 책이기도 해서 저도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고 청탁이나 강의에 몸이 묶여 책 쓰는 일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도 확인해보니까 벌써 들어왔어야 할 원고료가 안 들어온 거예요. 저는 외부 원고료를 용돈으로 씁니다. 그래봐야 대개는 책값이지만. 그런데 이렇게 안 들어올 때는 어떡해야 하는 거죠?
![](http://image.aladin.co.kr/cover/cover/8901077221_1.jpg)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에 연락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로쟈의 원고료 집달리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귀찮겠지만 자꾸 전화해서 받아내고, 어렵겠지만 계속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할 밖에. 일회용 원고를 쓰고 글값을 받는 일은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인문학 출판계에 적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무척 고단한 일이다. 독자로서도 그렇지만 필자로서나 역자로서는 더욱더 녹록지 않은 일일 터이다. 그래도 로쟈는 그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리할 것이다. 어깃장을 놓으면서 말이다.
‘로쟈’는 살인자의 이름이다. 그러나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생성한다. 권위주의와 기득권, 안일과 욕망을 죽인 자리에선 무엇이 살아날까. ‘로쟈’는 살인자의 이름이지만 ‘헌신하는 로쟈’는 천사의 이름이다.(이하영_북칼럼니스트)
09. 07.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