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속의 벤야민

일반인 교양강좌 준비로 들뢰즈와 벤야민의 책들을 한두 권씩 가까운 서가로 옮겨놓고 있는데, 마침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리라이팅'한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트 프로젝트>(그린비, 2009)가 출간됐다. 저자는 <계몽의 변증법>을 리라이팅했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의 저자 권용선 씨. 수유너머에서 강의한 내용을 이번에도 책으로 펴낸 듯싶다. 참고문헌으로 챙겨놓는다.  

 

한겨레(09. 12. 11) 베냐민의 아케이드 정치적 독법으로 안내 

완결되기를 거부했고, 완결되지 않아 전설이 된 책. 발터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르는 말이다. 자본주의와 현대성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이름 높은 베냐민의 유작이지만, 완결된 책이라기보다 메모·단상의 형태로 남겨진 사유의 덩어리에 가까웠던 까닭에, 그 존재가 알려진 뒤에도 상당 기간 독자들의 접근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불친절한 책으로 남아 있었다.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그린비 펴냄)는 전설과 풍문에 주눅 든 독자들을 위해 권용선(사진) 수유+너머 연구원이 쓴,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안내하는 인문학적 개념 지도다. 유념해야 할 사실은 지도는 지도이되 목적지에 이르는 최적·최단의 경로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 연구원은 말한다. “베냐민의 ‘아케이드’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다. 나는 엔(n) 개의 길 가운데 내가 보았던 것 하나를 이야기할 뿐이다.”  



이 필생의 역작을 통해 베냐민이 성취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자본주의 도시공간의 해부학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현대성의 자기파괴적 속성에 대한 비판, 나아가 탈자본주의적 출구를 탐색하는 혁명의 문화정치학이란 해석도 있다. 권 연구원은 “다 맞는 말”이라면서도 “다만 나는 정치적 방식의 독해를 선호한다”고 덧붙인다.

정치적 독법에서 핵심적인 개념이 ‘환등상’이란 우리말로 번역되곤 하는 ‘판타스마고리아’인데, 이 개념은 ‘잠-꿈-각성’이라는 상이하면서도 연속적인 계기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환상’이나 ‘환영’과는 구별된다. 요컨대 파리의 아케이드라는 19세기의 판타스마고리아에는 소비 자본주의의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의 요소(잠)뿐 아니라 동시대인들이 꿈꿨던 유토피아를 향한 소망(꿈)과, 기만의 현실을 차고 이륙하기 위한 도약(상기·각성)의 계기가 공존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비약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일”이라고 권 연구원은 말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복원된 청계천을 보면서 대중의 저급성이나 권력과 자본의 토건적 상상력을 냉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판타스마고리아적 형식에 속박된 개인적·집합적 꿈(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공존과 화해)의 기억을 상기시켜 변혁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각성의 계기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처럼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찰나의 계기들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지가 관건인 셈인데, 이에 대한 베냐민의 처방을 권 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진보에 기대 과거를 낡은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듯 은폐된 과거의 흔적들을 섬광처럼 잡아채서 발굴하는 것, 다름 아닌 ‘기억’을 역사화시켜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세영 기자)  

09. 12. 11.  

P.S. 벤야민의 판타스마고리아 개념을 또 다른 도시공간인 19세기 페테르부르크에 적용한 책은 이덕형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2009)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환영의 도시를 거닐다'가 부제. 물론 나 같은 전공자에겐 유익한 필독서이지만, 벤야민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도시공간의 모더니즘에 대한 분석으로 가장 탁월한 책의 하나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이다. 오랜만에 언급하게 되는데, 번역만 더 깔끔했다면 강의실에서도 필독서로 쓸 수 있었을 텐데란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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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a49 2009-12-11 09:48   좋아요 0 | URL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가는 비가 뿌리던 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가 생각납니다.

로쟈 2009-12-12 09:53   좋아요 0 | URL
책을 보시면 기억에 더 새로울 수도 있으실 듯해요...

2009-12-11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2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2-12 07:31   좋아요 0 | URL
저자의 '슈우너머 연구원'에 '고미숙' 박사도 생각나네요.
비슷할지 모르나 '판타스마고리아'의 개념을 '지방'의 권력층인
'자치단체장들'도 사용하는 숫법이기도 하죠...(11,17:04)

로쟈 2009-12-12 09:55   좋아요 0 | URL
연구거리가 되겠는데요.^^
 

최근에 나온 가장 반가운 책이자 오늘 택배로 받은 책의 하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신작 <지상 최대의 쇼>(김영사, 2009)이다.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 열풍 덕분에 그의 책을 바로바로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무지개를 풀며>도 아직 책장에만 꽂아두고 있다).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Climbing Mountain Improbable)> 정도가 아직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여하튼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았던 한 해를 '지상 최대의 쇼'와 함께 마무리할 수 있을 듯싶어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리처드 도킨스 읽기를 따로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히친스와 같이 묶은 적은 있다) 이 참에 리스트도 업데이트해놓는다. 어차피 <이기적 유전자>도 조만간 다시 읽어야 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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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쇼- 진화가 펼쳐낸 경이롭고 찬란한 생명의 역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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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풀며- 리처드 도킨스가 선사하는 세상 모든 과학의 경이로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최재천.김산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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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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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강- 리처드 도킨스가 들려주는 유전자와 진화의 진실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용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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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09-12-09 23:45   좋아요 0 | URL
리처드 도킨스...좋아하는 이름 만으로 고민없이 선택하는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한명.

그런데 이기적 유전자의 번역에 대해 그렇게 악평이 많던데,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될까요? 좋은 작품인건 알지만 아직 접하진 못했는데 볼려는 입장에서 일단 아쉽네요.^^;

로쟈 2009-12-10 19:49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해 질문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읽은 건 두산동아판과 을유의 개정된 부분이었어요. 겨울에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번역에 문제가 있다면 직접 지적들을 해놓으시면 독자에게도, 출판사에도 도움이 될 텐데요...

펠릭스 2009-12-10 08:36   좋아요 0 | URL
쇼펜하우어, 인생론 에세이'사랑은 없다'도 관련하여 읽어볼만 하죠.
지금은 '만들어진 신'을 읽고 있는데요(08:34).

로쟈 2009-12-10 19:47   좋아요 0 | URL
<신은 위대하지 않다> 등까지 세트입니다. 저는 <죽은 신을 위하여>랑 같이 읽었었고요...

놀이네트 2009-12-10 09:20   좋아요 0 | URL
도킨스와 그의 이론은 그만큼 흥미롭기도 하지만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도킨스와 그의 이론을 흡수하고 담론화하는 과정이 훨씬 흥미롭습니다.

나의 따스하고 발랄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은 극히 일부만 번역된데다가 지식분자들이 그의 이론에 대한 리뷰를 올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화론이나 생물학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지식인들 말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각자의 이론의 다름 보다는 한국사회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사견으로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이론을 서술하는 방식이나 서술자의 태도에서 보여주는 차이가 큰 분기점이 된다고 봅니다.

로쟈 2009-12-10 19:47   좋아요 0 | URL
글쎄요, 굴드의 책도 적게 번역된 건 아니고, 내년중에 몇 권이 더 나올 예정인 것으로 압니다. 도킨스의 경우엔 <이기적 유전자>가 뒤늦게, 그리고 <만들어진 신>이 의외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때문일 뿐이지, 다른 책들까지 많이 읽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꼼미 2009-12-11 00:07   좋아요 0 | URL
<만들어진 신>이 인기 폭발한 이유는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겠죠. 제목에 타협이 없어 보이니까... 특히, 한국에서는 말이죠.
올 해 나온 무신론 관련 책중에 빅터 스텐거(Victor J. Stenger)의 를 재미있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 번역이 되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자연과학과 진화론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는 "무신론자여 단결하자"는 주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펼치는 도킨스를 비롯한 여러 무신론자들과 무신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합니다. 과학적 사고가 우리 삶에서 왜 중요한지, 어떤 사람들이 그런 입장에 서 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요. 이 책이 제게 재미있는 건, 세세한 과학적 입증의 나열이기 보다는, 본격적인 '무신 사상(?)'에 대해 소개하는 것 같아서지요. 마치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가 소개한 일루미나티 (illuminati)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도킨스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아서요.

로쟈 2009-12-11 08:46   좋아요 0 | URL
네, 국내에도 소개될 법하네요. 저에게 무신론 자체가 흥미롭진 않습니다. 종교 자체도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자기이해'가 더 흥미롭습니다...

피에타 2009-12-11 01:23   좋아요 0 | URL
이기적 유전아 홍영남 교수님 번역본 읽으며 참 난감(순화된 표현)했어요.
그래서 저도 나중에 어줍짢은 잉글리쉬임에도 원서로 구입했죠.
원서가 충분히 가치있다는 생각이네요...
네이버 서평에 어떤 분이 홍영남 교수님의 번역에 대해 비유한 글이 있어요.
읽어보시면 배꼽 잡아요. ^^

로쟈 2009-12-11 08:44   좋아요 0 | URL
이덕하님의 서평 말씀인가요? 아직 역자나 출판사나 평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가 봅니다...
 
헤세의 차라투스트라 VS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출판저널'(12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뤘는데, 지난달에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쿤데라의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0912_december_publishing_01 

출판저널(09년 12월호) 인생의 매 순간이 반복된다면?

“영원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것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의 화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2)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성찰로 시작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사상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지만 쿤데라는 자신만의 해석을 더 보탠다. 곧 “영원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사’란 어떤 것인가? 단 한 번뿐인 삶, 오직 순간성만을 갖는 세상사다.     

쿤데라가 보기에 영원회귀 사상이 역으로 주장하는 바는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이란 그림자에 불과하며 아무런 무게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한 번의 실수’처럼 정상참작의 대상이 되며 노스탤지어까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매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영원성에 못 박힌 형국이 된다. 더불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단 한 번의 삶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삶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지상에 더 가까워지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갖게 될 테지만, 반면에 짐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면서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쿤데라는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거움, 아니면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이란 쿤데라의 탐구주제는 주로 주인공 토마스에게 할당돼 있다. 프라하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토마스는 아내와 이혼하면서 아들까지 떼어주고 부모와도 절연한 채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바람둥이다. 여자를 갈망하는 한편 두려워하는 그는 그 두려움과 갈망 사이에서 ‘에로틱한 우정’이란 타협점을 고안해낸다. 감상을 배제하고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 조건하에서 에로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에로틱한 우정’이 혹시나 ‘공격적인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그는 ‘3의 규칙’까지 만들어낸다. 짧은 기간 동안 연달아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3번 이상은 안 되며, 수년 동안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적어도 3주 이상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권장하는 규칙의 내용이다.   

하지만 테레사를 만나면서 토마스의 규칙은 흔들린다. 그는 보헤미아의 한 작은 마을에 진료차 내려갔다가 우연히 카페의 여종업원 테레사를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열흘 후에 테레사는 토마스를 만나기 위해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손에 들고 무작정 프라하로 찾아온다. 그들은 그날로 동침을 하지만 테레사가 독감을 앓게 된 탓에 바로 떠나지 못하고 그의 집에서 일주일을 더 머물다가 내려가게 된다. 어떤 여자든 간에 한 여자와는 살 수 없고 오직 독신일 경우에만 자기 자신답다고 확신하던 토마스였지만 테레사가 떠난 뒤에는 아파트 창가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다. “테레사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이러한 선택이 반복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 어떤 결정이 옳은가를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토마스는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보기를 제안한다.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의 경험을 완전하게 기억하면서 두 번째의 삶을 살게 되는 것. 더 나아가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갖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행성도 가정해볼 수 있겠다. 이것이 토마스가 생각하는 영원회귀이다. 그런 경우에 매번 다시 태어나면서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더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라는 이 ‘무경험의 행성’에서는 그런 이점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치 아무런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이러한 선택에 직면하여 토마스가 중얼거리는 독일어 속담이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Einmal ist Keinmal)”이다. 한번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쿤데라는 토마스란 인물 자체가 바로 이 한 문장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준다. 말하자면 그는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의 소설적 육화이자 구현이다.   

토마스에게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충 이백 명쯤 될 거라는 그의 여성 편력에도 반영된다. 특이한 것은 그를 여성에 대한 추구로 내모는 것이 관능적 욕구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이라는 점. 그는 한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별해주는 백만분의 일의 차이에 사로잡혀서 이 객관적인 여성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한다. 강박적인 여성 편력에 사로잡힌 바람둥이를 쿤데라는 여자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면서 매번 실망하는 ‘서정시적’ 유형과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언제나 만족하는 ‘서사시적’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토마스는 이 가운데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테레사와의 동거는 그의 여성 편력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비록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두 가지 열정이라고 생각하지만, 테레사를 알고부터 그는 술의 도움 없이는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된다. 그런 토마스의 모습을 보고 사비나는 바람둥이 토마스의 그림자 위에 낭만적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비친다고 말한다. 즉 돈 주앙 토마스는 한편으로 테레사만을 생각하는 트리스탄이기도 하다. 테레사에 대한 토마스의 특별한 사랑과 동정은 소설에서 “에스 무스 자인(Es muss sein)”이라는 또 다른 독일어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래야만 한다”는 뜻의 이 말은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에 쓰인 가사다.   

‘어려운 결단’의 표현이기도 한 “그래야만 한다”는 여성 편력 때문에 자신을 떠난 테레사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한 그의 결단을 대변해준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기로 한 결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단과 함께 토마스는 가벼움의 세계에서 무거움과 필연성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렇듯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스의 삶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와 “그래야만 한다” 사이에 걸쳐 있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오직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이 영원회귀 사상이 던져주는 메시지다.  

09.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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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나 카레니나와 비인칭적 열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06 20:52 
    출판저널(1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루고 있다.      출판저널(10년 1월호) '결혼'과 '불륜'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가 예고도 없이 토마스를 찾아 프라하에 온 날 그녀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은 <안나 카레니나>였다. 덕분에, 두 사
 
 
들국화 2009-12-0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거리가 있는 소설이라고 봅니다. 영원회귀사상과 토마스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로쟈님 글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2.저는 "그래야만 한다"보다 "그럴 수 밖에"라는 번역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3.<출판저널>, 구독할 만한 잡지인가요?

로쟈 2009-12-09 21:10   좋아요 0 | URL
"그럴 수밖에"보다는 더 강한 의미 같아요("그래야만 해?"란 질문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출판저널>은 홈피 http://www.publishingjournal.co.kr/ 를 둘러보시길...

펠릭스 2009-12-0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운 것'에 대한 연민이 곧 '영원회귀'를 낳은 것은 아닌지요, 그것은 끝임없이 '미분'되지만 '영(없음)'에 도달할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으로 '테레사'에게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지요.

로쟈 2009-12-10 19:4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네파벨 2009-12-09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보게 되네요.
꽃다운 시절 수십번 반복해 읽은 그의 소설들을 다시 한 번 잡아봐야겠어요...

로쟈 2009-12-10 19:42   좋아요 0 | URL
그때가 20년 전이죠.^^;

비연 2009-12-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죠. 이 책 읽고 한동안 밀란 쿤데라에 열중했었던 적도 있었구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 자체가 크게 다가오는 책입니다.

로쟈 2009-12-10 19:45   좋아요 0 | URL
팬들이 많으시네요.^^

2009-12-10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0 0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le 2009-12-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영화가 날줄 씨줄로 엮여 있는 로쟈 님의 이런 페이퍼 좋아해요. 예전에는 추석 특집 같은 걸로 올라오곤 했던 것 같은데 이제 유명인사가 되셔서 잡지에 실리는군요. 하지만 이런 글들 모아서 책으로 낸다면 그게 가장 재미있겠어요. 1년에 한 권씩만 쓰세요.

로쟈 2009-12-10 19:45   좋아요 0 | URL
더 쓰면 혼나겠는데요.^^;

페크pek0501 2009-12-1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창 닦는 직업에 대하여 - 그의 내면적 <그래야만 한다!>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며 일단 일을 끝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이해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행복한 무관심을 체험하지 못했다. 예전에 수술이 그가 원한 대로 성공하지 못하면, 그는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는 여자에 대한 입맛을 잃기까지 했다. 그의 직업이 지닌 <그래야만 한다!>는 그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도 같았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26쪽....... 직업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살 수 있다면 우린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듯해요.

로쟈 2009-12-13 00: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런 대목도 있지요...

페크pek0501 2009-12-1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 이 책을 읽었었는데 로쟈님의 위의 글을 보니 제가 놓친 게 있는 듯했어요. '어 이런 내용도 있었나'라고 할 정도로요. 그래서 다시 책을 꺼내 보았어요. 평소 밑줄 그으며 책을 읽는 버릇이 있어 줄 친 곳 위주로 다시 읽었더니 신기하게도 로쟈님이 언급한 내용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어요. 즉 내가 놓친 게 있다는 것은 읽을 때엔 인지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잊었던 거였어요. 그래서 얻은 결론은 리뷰를 읽는 행위는 중요하다는 것, 입니다. 지주 들러야겠어요.

로쟈 2009-12-13 20:45   좋아요 0 | URL
덧붙여, 직접 써보는 게 중요하지요.^^
 

이번주 창비주간논평을 옮겨놓는다. '사회통합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전략'이란 부제가 칼럼의 주제를 말해준다. 지난봄에 <성장친화현 진보>(미들하우스, 2009)란 책이 소개됐지만 눈여겨보지 않았고, 찾아보니 알라딘에서도 거의 '잊혀진' 책이다. 칼럼 덕분에 다시금 주목하게 됐다. 미국이라면 집권 민주당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제도권 야당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해서 의제화할 필요도 있을 듯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제3의 길'과 마찬가지로 절충주의적인 게 아닌가 의심스럽지만, 성장친화적인 한국민들에게 현재로선 '진보'가 다가갈 수 있는 '현실적인' 통로일 듯싶으니까...

창비주간논평(09. 12. 09) 두바이의 몰락과 '성장친화형 진보'  

두바이가 몰락했다. 세계 경제위기의 유탄을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위험성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선진국에서 두바이식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자는 주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그들은 사회통합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의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왔다. 이른바 유럽의 리스본 전략이나 미국의 해밀턴 프로젝트 등이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국내에서도 '사람에 투자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규모 개발사업에 가려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국내에는 성장을 위해 두바이식 개발과 규제완화가 필수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두바이식 개발은 경제이론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의 성장담론은 세계적 추세와 괴리된 지 오래다. 필자는 답답한 심정에 오래전부터 '두바이 대 리스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왔다. 토목 기반의 개발이 단기간의 외형적 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장점이 있지만 환경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없음을 비판하고, 이에 견주어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인적 자원의 투자를 강조하는 것이 요지였다.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을 넘어
마침 미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성장친화형 진보》(The Pro-Growth Progressive)라는 책을 최근 번역하면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전략의 특징을 소개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내용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성장친화형 진보'는 바로 시대가 요구하는 의제에 새로운 대답을 제시한다.

성장친화형 진보의 특색은 진보가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성장 대 분배·복지'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틀로는 효율적인 분배와 복지를 통해 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성장친화형 진보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착된 이분법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시대에 대처하는 새로운 사고를 만날 수 있다.

기존의 진보적 정책도 성장을 촉진해왔다. 미국에서도 진보정부 집권기의 성장률이 보수정부의 그것을 앞선다고 일반적으로 관측된다.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은 사회통합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모험적 사업에 뛰어드는 동기를 유발한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노동자의 경우 정리해고를 수용할 여유가 더 많고, 복지제도가 발전하면 모험적 사업의 위험부담을 줄여 기업가정신과 혁신을 북돋운다. 그러나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에 갇힌 우리 사회의 다수에게 이러한 성장촉진형 분배는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이기에 성장친화형 진보가 널리 이해되기는 쉽지 않다.

세계화시대, 새로운 진보적 전략
성장친화형 진보는 세계화와 지식정보혁명이라는 환경에서 진보적 성장대안을 제시한다. 세계화는 폭발적인 기술발전을 일으키고 있다. 한 국가 내에서 승자산업과 패자산업이 확연하게 갈리는 한편, 기술발전에 따라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임금격차도 커지고 있다. 두바이식 개발에 몰두하는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사회통합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이러한 도전에 응전하는 전략이다. 경제이론에 따르면 세계화시대 각국의 경쟁력은 인적자본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경제전략가들은 새로운 자원배분을 통해 인적자본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효율적 정책을 추구해왔고, 그 일련의 작업이 성장친화형 진보로 귀속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실업보험 등 다양한 지원책이 입안·시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수동적 지원에서 벗어나 노동자 숙련도를 높일 새로운 방식이 세계 각국에서 시도되고 있다. 특히 숙련도를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 직장내 훈련임을 감안하면 기업을 지원하여 고용을 늘리는 정책이 곧 훌륭한 기술훈련임을 알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이 세계화를 대처하는 방법이라는 정·재계의 주장은 중국이라는 대규모 개발도상국이 등장하면서 근거를 상실했다. 이제는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숙련도 향상이 각국의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등장하는 중이다.

맞춤형 선제적 지원정책으로 나아갈 때
성장친화형 진보는 선제적 지원정책이라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다양한 복지정책도 효율성 측면에서 우열을 가릴 수 있다. 과거에는 무조건적인 정부지원에 대한 거부감으로 주로 지원정책의 입안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문과 계층을 위한 선제적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협정으로 피해가 발생한 이후에 지원하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정부가 사용가능한 통계와 정보를 사용하여 사전적으로 특정 부문이나 계층을 지원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일 때가 많다.

복지의 수혜계층에 대해서도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빈곤층 자녀가 교육을 받지 못해 빈곤을 대물림하는 상황에서 정부지원이 필요하다면, 선제적으로 보육과 교육에 대한 지원비를 늘리는 것이 복지지출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취약계층의 일생주기에서 어떤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지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진보적 정책의 효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효율적 복지로 성장-통합의 양날개를
한정된 복지재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타당하지만, '복지병(病)'에 대한 우려를 털어버리고 보수진영의 저항을 줄이면서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지혜로운 전략이기도 하다. 가령 근로빈곤층을 지원하려고 최저임금을 무조건 높인다면 기업에 부담을 주어 실업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세계화시대에 이같은 정책은 기업의 해외이전을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테면 근로장려세제는 기업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지원하는 정책이다. 적절한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를 합리적으로 결합하면 기업과 노동자 양측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처럼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펴되 복지수혜자에게도 책임을 부과하고 특히 근로빈곤층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근로의욕을 장려하는 것은 사회통합을 촉진하고 복지정책을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성장친화형 진보와 맥을 같이하는 제3의 길 논자들이 ‘기회와 책임’을 강조하는 이유다.(홍종학/ 경원대 교수, 경제학) 

09.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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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09 20:34   좋아요 0 | URL
내년도 대통령 여름 휴가 독서목록으로 추천합니다.

로쟈 2009-12-09 20:47   좋아요 0 | URL
'녹색'과 '서민'에 이어서 '진보'까지 넘보게 되나요?..
 

교수신문에서 이번주 서평위원 칼럼(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으로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몇 곳에 올해의 책을 추천하면서 빼놓은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에 대한 '후기'로 적은 글이다. 개인적으론 몇 달 전에 읽은 책인데, 담고 있는 콘텐츠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재배치했더라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을 갖게 했다. 하지만 유익했던 책이고 CBS의 시사자키 '로쟈의 서재' 코너에서 소개도 한 바 있다.  

교수신문(09. 12. 07) 어떤 ‘역사전쟁 관전기’  

12월에 접어들면 여러 언론과 출판계에서 벌이는 연례행사 중 하나는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선정 작업에 손을 보태면서 한해를 돌아보게 됐다. 한 개인이 읽을 수 있는 역량을 훌쩍 넘어서는 다종·다량의 책이 해마다 출간되고 있기에 ‘올해의 책’에 대한 선정은 제한된 독서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조건하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보다가 다시 손에 들고 만지작거린 책은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이다.

책은 젊은 인터넷 논객이자 자칭 ‘키보드워리어’인 저자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촉발한 ‘역사전쟁’을 정리하고 평가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이다. 그가 염두에 둔 ‘상식인’은 일차적으론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이지 싶다. 아니 그런 느낌은 소위 ‘88만원 세대’가 이 책을 가장 깊이 공감하면서 열독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나의 생각이 빚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로선 저자의 주장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그의 논지전개방식은 다소 낯설었다. 하지만, 그런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았고, 또 몇몇 쟁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더불어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새로 부추긴 공로도 있기에 이 책은 내게 ‘올해의 책’에 버금할 만하다.   

그렇다면, 한윤형은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 한국사에 대해 ‘상식인’ 수준의 이해를 갖고 있는 내가 더 따져 보고픈 쟁점 몇 가지를 나열해본다. 먼저,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들을 모두 비판하는 저자의 ‘스탠스’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란 문제다. 그는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근대 민족주의란 기본적으로 신분제의 철폐를 전제로 하는데, 노비의 비중이 30%를 웃돌았던 18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현재와 ‘민족’ 개념이 형성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만 치부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3·1운동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전면화됐고 ‘역사적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김일성과 이승만은 사천 년 단일민족을 두 동강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3·1운동 때 이룬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백범 김구에 대한 평가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김구는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지만, 해방 이후 정국에서 상당 기간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이 동일시됐다는 지적은 눈길을 끈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 입장이 예기치 않게도 모든 반대 세력에게 민족주의라는 포장을 씌워주게 되고 결과적으론 친일파와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구하기 위해 김구 노선을 비판하고, 민족주의자들이 영문도 모르면서 이승만을 비판하고 김구를 옹호하는 것은 모두 자가당착적이다.   

셋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흔히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남한은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고, 북한은 공산주의여서 망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국통이었던 이승만은 1950년대 말부터 미국식 경제시스템을 흉내 내어 시장개방, 금융자유화 등을 실시하고 은행도 민영화했지만, 박정희는 그것을 다시 국유화하는 한편 1972년에는 사채를 동결시키는 조치까지 단행했다. 이러한 박정희식 모델은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원조인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즉, 완전한 자본주의도 완전한 사회주의도 아닌 혼합형 체제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근대의 쌍생아라면, 사회주의 또한 한국 근대의 필수적인 구성소였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맞는 것 아닐까.

그리고 넷째는 대한민국사의 주류세력이 누구였나라는 문제.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대한민국사는 친일파든 독립운동가든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기회주의를 펼친 이들의 역사였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일관된 기득권 세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역시 기득권 세력을 경멸했기에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다는 점도 근거의 한 가지다.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소득은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된 것이다. 벌써부터 내년에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09. 12. 08. 

 

P.S. 최근의 관심사 중 하나는 레닌과 박정희를 겹쳐서 읽는 것이다. 구체적으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를 겹쳐 읽기 위해서 몇 권의 책을 구입하고 또 대출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뭔가 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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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09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 기회주의'가 '박정희'와 '레닌'의 만남을 주선했군요. 뭔가 기대됩니다.

로쟈 2009-12-09 18:15   좋아요 0 | URL
네,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자료들을 좀 보려고 합니다...

들국화 2009-12-0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라이트 역사논쟁뿐만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정치투쟁을 보는 새로운 (균형잡힌)시각을 제공해 개인적으로 아주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제시하는 게 상당히 신선하고 생산적이라고 생각해서 좀더 큰 반향을 불러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그렇지는 않더군요. 저는 한윤형보다 앞 세대인데, 친구들에게 적극 권하고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읽힐 책이라고 생각해요.

로쟈 2009-12-09 20:46   좋아요 0 | URL
저도 아쉽게 생각하는데, 편집이나 구성을 달리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12-10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 리스트에 넣고 싶었던 책이었네요..뭔가 '논쟁'이 불길 바랬는데,,아쉽습니다. '한윤형'이라는 이름 자체의 주목과 소비라고 할까까요...뭔가 '기특하다'는 시선으로만 보려는 분위기가...한편으론 한윤형이 쓴 '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나아가진 못한 건 아닌지..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로쟈 2009-12-10 19:50   좋아요 0 | URL
삼세번이라고 했으니까 세 번째 책이 나오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죠. '기특하다' 이전에 20대 독자들이 너무 안 읽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