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의 차이
이번달 '출판저널'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루고 있으며, 지난달에 읽은 <데미안>의 한 장면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지면에는 첫문단과 끝에서 두번째 문단이 누락됐는데, 여기서는 되살려놓도록 한다.
출판저널(09년 11월호)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니체의 가장 난해한 책
헤세가 13살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저는 니체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말하자면 도덕의 살해인데요, 그것은 저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관점은, 제 종교는 경건하지만 도덕으로부터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저는 니체가 철학자로서 결코 오래 갈 것 같지 않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 듯하다. 그의 자전적 소설 <데미안>에는 대학생이 된 싱클레어가 니체를 탐독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대학에서의 ‘공장식’ 강의에 실망한 싱클레어는 교외의 낡은 집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쓰기로 한다. “내 책상 위에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다. 그를 그침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다.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그토록 가차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여기서 싱클레어-헤세가 느낀 행복은 니체의 운명에서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개인주의자’를 발견한 행복이 아닐까? 어떤 개인주의인가? 그가 <데미안>의 서문에 적은 놓은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니체의 교훈이 과연 그렇게만 정리될 수 있을까?
싱클레어의 책상에도 놓여있었을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그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세 단계로 묘사했다.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크게 고무되었지만 종의 진화라는 관점, 곧 하나의 종으로서 다수의 인간 무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아무런 목표점 없이 진화한다는 다윈의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진화는 선택된 개인의 진화였고 그 목표는 인간의 자기극복으로서의 초인(위버멘쉬)이어야 했다. 그 초인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것이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다.
낙타란 짐을 지는 정신이다.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총총히 사막으로 들어간다. 낙타는 “너는 해야 한다”는 주인의 명령에 순응하는 정신이다. 반면에 사자는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하는 정신이다. 비록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지는 못하지만 사자는 그러한 창조를 위한 자유는 쟁취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순진함이자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며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여기서 니체는 신성한 긍정이야말로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긍정인가? 운명에 대한 긍정이고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이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동시에 가장 난해한 책이다. 그 난해함은 니체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통해서 스스로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나 초인 사상과 함께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구성하는 영원회귀 사상은 많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차라투스트라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3부의 두 번째 장인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영(靈)인 난쟁이가 “진리는 모두 곡선이며 시간 그 자체는 원을 이루고 있다”는 순환론적 시간관을 먼저 들먹이자 그가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화를 낸다. 난쟁이는 그런 시간의 순환이 함축하는 영원회귀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이미 존재했었으며, 이제 또 시간의 오솔길을 달려가서 다시금 영원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 자체에 대해 섬뜩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서 그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개 짖는 소리를 상기해낸다. 그리고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무서운 환영을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황량한 달밤에 험한 절벽 사이에 서 있다가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걸 본다. 곁에서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개가 울부짖고 있다. 젊은 양치기는 구역질을 하면서 크고 묵직한 검은 뱀을 입에 물고 있고, 역겨움과 공포에 질린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손으로 뱀을 잡아당기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때 그의 안에서 “물어뜯어라! 대가리를 물어뜯어라!”라는 외침소리를 듣는다. “나의 두려움, 나의 미움, 나의 구역질, 나의 연민, 나의 선과 악이 한꺼번에 내 안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양치기는 그가 일러준 대로 뱀을 물어뜯어서 뱀 대가리를 멀찌감치 뱉어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는 이제 더이상 양치기도 인간도 아닌 자, 변화된 자, 빛에 둘러싸인 자로 웃고 있었다! 지금껏 지상에서 그처럼 웃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본 환영의 내용이다. 그것은 환영이면서 동시에 예견이다. 그럼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더없이 고독한 자’가 본 환영에 대해서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대 비유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그리고 언젠가 오고야 말 그 자는 누구인가? 뱀이 입속으로 들어간 양치기는 누구인가? 그러니까 가장 무겁고 가장 검은 것이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갈 인간은 누구인가?” 이것이 그가 묻는 수수께끼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3부의 후반부에 들어 있는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더 없이 깊은 심연의 사상”이라고 부른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구역질 때문에 쓰러진 차라투스트라는 일주일 동안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면서 앓아눕는다. 마치 젊은 양치기가 목구멍을 문 뱀 때문에 공포감에 질려 쓰러져 누워있었던 것처럼. 일주일 후에야 기운을 차린 차라투스트라는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와 자신을 질식시킨 괴물의 머리를 물었다가 뱉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구제하느라 지쳐서 병이 났다고. 이제 병상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차라투스트라에게 그의 동물들은 이렇게 예찬한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자다. 그것이 이제 그대의 운명이다. 그대가 최초로 이 가르침을 행해야 한다는 것, 이 크나큰 운명이 어떻게 그대의 가장 커다란 위험이자 병이 아닐 수 있겠는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다섯 번째 복음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이라면, 차라투스트라의 복음은 ‘초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에게선 영원회귀가 아닐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면,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은 초인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턱이다.
다시 헤세로 돌아가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 청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쓴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서 단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가지 일을 보고 겪으며 힘에 부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노력했고 그러다가 여러 번 상처를 입기도 했네. 하지만 그가 배운 것은 단 한가지뿐일세.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배웠네. 이 깨달음이 바로 그의 진리이며 긍지일세. 자네들이 그로부터 배워야 할 점도 바로 이러한 깨달음일세.” 요컨대, 헤세는 니체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09.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