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중순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몇몇 대목을 읽고 정리한 것이다. 벤야민에 대해서는 이후에 몇 번 더 다룬 적이 있다. 물론 아직도 정리해야 할 대목들은 차고 넘치지만 말이다.

요즘 서울에는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모양이지만(*2005년 1월의 얘기이다), 모스크바의 날씨는 영상 3-4도이다. 기온이 좀 떨어져야 영하 1-2도(어제오늘은 제법 바람이 불어서 체감온도는 영하이지만). 이래가지고서야 모스크바의 체면이 좀 무색하다(집에 전화를 걸어 그런 얘기를 하면, “거기 모스크바 맞아?”란 소리를 듣는다). 방마다 창문 아래벽에 설치돼 있는 스티머에서 스팀이 ‘빵빵하게’ 나오기 때문에 방안에서는 반팔, 반바지가 기본 복장이고 이불을 안 덮고도 잘 만하다(그젯밤에는 창문을 좀 열어놓고 잘까도 했다). 지난봄 모스크바에 올 때 들고 온 짐의 대부분이 겨울옷들이었지만, 그 90%는 한번도 입어보지 못하고 도로 들고가야 할 판이다. 이 또한 관념과 현실 간의 차이이리라. ‘모스크바’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실제 모스크바의 현실 간의 차이(“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가 없다!”).

 

 

 



우리가 관념의 지배, 혹은 판타지를 얼마간 걷어내는 길은 현실과 직접 맞부닥치는 것, 직접 가보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1892-1940) 역시 그랬다. “1926년 말에서 1927년 초까지 벤야민은 모스크바로 여행을 떠났다. 러시아어를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벤야민은 러시아 혁명의 현존을 눈으로 ‘보려’ 했다.”(<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2004, 48쪽.) 수잔 벅 모스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파사젠베르크)를 재구성하면서, 그의 이 여행이 모종의 구조/구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한편,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와 함께 읽어볼 만한 것은 한국작가 이태준의 <소련기행>이다. 나는 책을 사놓고 미처 읽지 못했는데, 돌아가면 한번 읽어볼 참이다.)

“어떤 장소를 알려면 가능한 한 많은 차원에서 경험해보아야 한다. 어떤 장소를 이해하려면 동서남북에서 다가가 보아야 하며, 동서남북으로 떠나가 보야야 한다.”(<모스크바 일기>)라는 벤야민의 말을 그녀는 그대로 그의 프로젝트에 적용하는바, “서쪽의 파리는 정치적-혁명적 의미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기원이며, 동쪽의 모스크바는 동일한 의미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종말이다. 남쪽의 나폴리는 지중해의 기원으로서, 신화로 둘러싸인 서구 문명의 어린시절이며, 북쪽의 베를린은 신화로 둘러싸인 작가 자신의 어린시절이다.”(45쪽) 그리고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개념상 두 축의 교점에 위치한다.”

물론 벤야민이 방문했을 때의 모스크바는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기의 러시아였으므로 “시골과 도시가 숨바꼭질하는 이행기의 도시”였다(신경제정책, 즉 NEP가 한시적으로 도입됐던 건 사회주의 혁명에는 성공했지만, 러시아에 아직 본격적인 사회주의의 ‘물적 토대’가 마련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해서 혁명정부는 한시적으로 부르주아 경제체제를 허용하는바, 그것이 NEP였다. 이 NEP 시기에 대한 신랄한 풍자극이 마야코프스키의 <빈대>(1929)이다. 이 작품 역시 메이에르홀드가 연출했고, 음악은 젊은 쇼스타코비치가 담당했다). “모스크바의 이행성은 ‘모든 생활, 모든 나날, 모든 생각’을 실험대에 올린다.”(49쪽)

그럴 만하지 않은가? 인류 역사상 ‘사회주의 혁명’에 처음 성공한 만큼, ‘사회주의로의 이행’ 또한 ‘첫경험’이었으니까(이런 걸 ‘한 졸렬한 시도’였다고 비판하는 것은 비판으로서 심히 졸렬하다). 어쨌든 “두달 동안(12월 6일-2월 1일) 벤야민은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으로 모스크바의 호텔에 머물며 소비에트의 문화생활을 관찰했다.”(52쪽)

Cover: Moscow Diary

지난번에 “벤야민과 관련해서는 그의 <모스크바 일기>(1926-7)를 구해보고 싶지만, 러시아어로는 번역돼 있는 것 같지 않다(영역은 돼 있을까?).”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의외의 우리말 번역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고(<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각주를 보니까 영역본 'Moscow Diary'는 1987년에 나왔다), 어제 인터넷에 부분적으로 올라온 걸 대충 읽어볼 수 있었다(역자에 의하면 곧 출간예정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이미 출간됐다. 나는 이 페이퍼가 계기가 되어 약간의 교정일을 거들 수 있었다).

“벤야민은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으로 모스크바의 호텔에 머물며 소비에트의 문화생활을 관찰했다.”에 붙은 미주를 보면, “그는 연극, 영화 – ‘평균적으로 그렇게 좋지 않다’ – 박물관, 문학논쟁 등을 참관했으며, 수집벽에 이끌려 매우 자주 쇼핑을 다녔다.”(482쪽)고 돼 있는데(아마도 내가 서점들을 돌아다니는 것만큼), 번역된 일기를 읽어보니까 “평균적으로 그렇게 좋지 않”은 연극의 목록에는 메이에르홀드가 연출한 <검찰관>(1926년) 초연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이 메이에르홀드 버전의 <검찰관> 초연은 러시아의 연극공연사에서 기념비적인 공연에 속한다(‘초연’이란 건 ‘첫회’ 공연이 아니라 ‘첫 공연된 시즌 전체’를 뜻한다. 그러니까 메이에르홀드의 <검찰관> ‘초연’은 아마도 1926년 가을부터 1927년 봄까지를 카바한다). 1920년대에 <검찰관>은 메이에르홀드 버전(1926년)과 테렌치예프 버전(1927년)으로 새롭게 공연되었는데(고골이 이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린 건 1836년이다). 특히, 메이에르홀드의 공연은 러시아 연극사상 가장 훌륭한 공연으로 평가되고 있으며(J. L. 스타이안, <표현주의 연극과 서사극>, 현암사, 90쪽), 다닐 하름스가 속한 오베리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하름스와 그의 동료들은 '오베리우 선언서'(1927)에서 테렌치예프의 공연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사실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여러 보고에 따르면, 메이어르홀드가 연출한 <검찰관>의 연기와 무대장치는 모두 파격적이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마치 희극적인 오페라에서와 같이 호화로운 의상을 입었다는 점이다(자세한 것은 스타이안, 같은 책, 90-2쪽 참조). 이런 유니크한 공연까지를 포함해서 “평균적으로 좋지 않(았)다”면, 공연에 대한 벤야민의 안목이나 기대치가 상당히 높았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나도 너무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가 러시아어 대사들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므로 공연을 제대로 관람할 수 없었을 거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나도 사정이 더 나은 건 아니다. ‘관광객’이 보기에 가장 좋은 공연은 발레와 서커스이다).

참고로, 모스크바에서 2004년의 최고 공연으로 지목되는 건 고골의 <외투>인데(소설을 각색해서 무대에 올린 것인데, 주인공 아카키 역을 유명한 여배우가 분장해서 연기한다), 12월에 보겠다는 당초 바람과는 달리 나는 그 공연을 볼 수 없었다. 표가 워낙에 빨리 매진된 탓에. 아무래도 ‘초연’ 관람은 포기해야 할 듯하다)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오면, 모스크바에서 그가 한 일이란 주로 연극/영화 관람, 박물관(그도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방문했다) 구경과 문학논쟁 참관, 그리고 쇼핑이었다. 물론 가장 큰 비중은 쇼핑에 두어졌을 법하다. “그는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나날을 러시아 인형을 수집하기 위해 쇼핑을 하면서 보냈다.”(54쪽, 여기서 ‘러시아 인형’이란 건 ‘마트료슈카’를 말하는데, 인형 속에 같은 인형이 10개 정도씩 들어있는 대표적인 러시아 기념품이다.)

하지만, 그의 관찰과 쇼핑의 이면에 놓여 있던 건 여행의 ‘진정한’ 목적이었다(표면적으론 마르틴 부버가 <피조물>이란 잡지에 싣고자 청탁한 글을 작성하기 위한 모양이었던 듯하다. ‘모스크바’란 제목. 한편 벤야민은 <소비에트 백과사전>의 ‘괴테’ 항목을 모스크바 체류 이전부터 준비하여 집필하지만, 1928년 가을에 완성된 그 글은 당시의 교육부장관 루나차르스키에 의해 ‘부적절하다’고 거부당한다. “최종적으로 <소비에트 백과사전>에 실린 괴테편은 벤야민이 처음 쓴 원고의 12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483쪽, 주44).

무엇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었나? “벤야민은 아샤 라시스에, 그리고 공산당에 투신할 생각으로 러시아에 왔다.”(52쪽) 아샤 라시스는 누구인가? 그녀는 1924년 벤야민이 <파사젠베르크>의 기원을 마련했던 아주 중요한 시기에 영감을 주었던 ‘뮤즈’였다(수잔 벅 모스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기원’이 1924년 이탈리아에서 마련됐다고 본다). “그녀는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였고, 혁명 이후 소비에트 문화계에서 배우 겸 연출가로 활동했으며, 두마 혁명 이후에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걸출한 공산주의자’였고, ‘내가 만난 가장 걸출한 여자’였다.”(25쪽) 그녀의 이름이 바로 아샤 라시스(*라치스)였으며, “(그해) 6월부터 벤야민이 카프리에서 숄렘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호한 암시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숄렘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벤야민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26쪽)

아샤 라시스가 회고하는 벤야민과의 첫만남은 이렇다. 그녀가 아몬드를 사려고 가게에 들렀는데, 아몬드를 이탈리아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난처해하고 있을 때 벤야민이 통역을 해주었다. 다음번에 벤야민은 광장에서 그녀에게 다가와 부르주아의 예의범절을 깍듯하게 지키면서 자기소개를 하고는 짐을 들어주겠다고 자청했다: “작은 스포트라이트처럼 빛을 반사하는 안경알, 뻣뻣한 검은 머리, 좁은 코, 서툰 손놀림 - 그는 짐꾸러미를 놓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서, 진짜 지식인. 유복한 배경을 가진 지식인. 그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찾아봬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바로 다음날 찾아왔다.(…) 그는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말했다. ‘두 주 동안 당신을 지켜보았습니다.’”(26쪽) 러시아는 그 아샤의 조국이었다.

하지만, “여행중의 일기가 증거하는 것처럼 두 가지 기대는 모두 좌절되었다.” 물론 벤야민에겐 (나중에 이혼하게 되는) 아내 도라가 있었고(여덟 살난 아들과 함께), 그의 모스크바 체류 기간에 라시스는 적군(赤軍) 장교와 연애중이었다(그녀는 나중에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베른하르트 라이히와 결혼한다). 아마도 아샤 라시스와 도라 벤야민이 벤야민 인생의 두 여자였던 듯한데,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36쪽에는 두 여자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으며, 1928년 베를린에서 동시에 출간한 그의 책 <일방통행로>와 <독일 비극의 기원>은 각각 이 두 여자에게 바쳐졌다(“모든 범죄의 이면에는 여자가 있다”는 속설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모든 책의 이면에는 여자가 있다!”).

 

 

 



사실, 친구인 게르숌 숄렘과 달리 (유태인이었던) 벤야민이 팔레스타인행을 포기한 데에는(그는 숄렘의 권유로 팔레스타인행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히브리어를 배우기까지 했다) 라시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1924년 카프리에서 벤야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똑바른 정신으로 생각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모스크바로 가야 합니다.”(38쪽) 팔레스타인행과 관련하여 벤야민은 라시스와 ‘날카로운 언쟁’을 나누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충고에 따라 모스크바로 가게 되며, 그것이 1926년 겨울의 일인 것이다(요즘은 어떤 정신의 사람들이 모스크바에 오는가?).



이에 대한 수잔 벅 모스의 촌평: “연정과 정치가 한데 묶여 깨달음을 줄 때 얼마나 창조성이 생기는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일과 사랑이 삶의 분리된 국면이 아니라 하나로 강렬히 융합된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들(*라시스와 벤야민) 관계의 결정적 중요성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39쪽) 그러니 그대, 프로젝트를 꿈꾸는가, 먼저 사랑에 빠질 일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벤야민은 아샤 라시스에, 그리고 공산당에 투신할 생각으로 러시아에 왔다.”(52쪽) 하지만, 상황은 벤야민의 편이 아니었다. “벤야민의 (모스크바) 체류기간에 라시스는 (라이히의 아파트로 옮겨갈 때까지) 요양소에서 ‘신경쇠약’을 치료하고 있었으며, 주간에는 외출하여 벤야민을 만날 수 있었지만 둘만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세 사람 – 라시스, 라이히, 벤야민 –은 누구와도 일부일처 관계가 아니었다. 벤야민의 간결한 설명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일기를 읽어보면 벤야민이 당시의 상황에서 겪었던 감정적 고통을 감지할 수 있다. 벤야민은 체류 초기에 라시스에게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소극적이 되었고 때로는 라시스보다도 소극적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편안하지 못했다. 말다툼은 격렬했으며, 애정표현은 조심스러웠다. 벤야민은 논문으로 감정을 전했고, 라시스는 정치적 의견을 표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했다.”(53쪽)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읽는 독자는 (그 당시 라시스가 느꼈을) 답답함을 느낀다. 그는 왜 사랑에도 정치에도 투신하지 못하는가? 그는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나날을 러시아 인형을 수집하기 위해 쇼핑을 하면서 보냈다. 라시스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 전의 모든 만남이 그랬듯이 불확실한 것이었다. 일기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그녀는 걸어가면서 돌아보는 것 같았는데, 잠시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커다란 여행가방을 안고 어두워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눈물을 흘렸다.’”(53-4쪽, 강조는 나의 것)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는 그렇게 끝나는 모양이다. 거기에 붙이고 있는 수잔 벅 모스의 촌평, “그의 무능은 유치했을까 아니면 현명했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현명함’이란 ‘살아남은 유치함’의 다른 이름이니까(때문에 ‘현명함’은 언제나 사후에 소급 적용된다. ‘현재의 현명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무능이란 사랑에도 정치에도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투신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모스크바의 이별 장면에서도 그러한 자신의 무능을 담보로 하여 벤야민이 챙긴 것은 아마도 ‘커다란 여행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논문 자료들과 쇼핑한 물건들일 것이다. 벤야민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는 라시스나 수잔 벅 모스가 답답해 하는 만큼 우리도 답답하다. 하지만, 벤야민의 비밀은 그 ‘무능(=답답함)’에 있는 듯하다. 그걸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함’,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함’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말이다(“정신 좀 차려라, 벤야민!”).

<파사젠베르크>의 부제는 ‘변증법적 동화’이며, 흥미롭게도 벤야민에게서 이 동화의 모델은 언제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그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도시에 대한 초현주의자들의 태도였는바, “벤야민의 회상에 따르면 <파사젠베르크>의 구상은 파리 아케이드가 중심적으로 등장하는 루이 아라공의 초현실주의 소설 <파리의 농부>에서 영감을 받았다.”(55쪽) 이후에 그는 <파사젠베르크>를 구성하게 될 최초의 메모들을 작성해가는데, “이들 목록은 도시 현상에 매혹됐던 초현실주의자들의 태도를 암시한다. 초현실주의자는 도시 현상(urban phenomena)’을 객관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동시에 꿈으로 경험했다.”(이에 영향을 받은 벤야민은 1927년 초현실주의에 대한 논문을 쓴다.)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현실을 꿈으로 인식했다면, <파사젠베르크>는 독자를 꿈에서 깨우기 위해 역사를 환기한다(*독자를 깨우자면, 독자는 자고 있어야 한다. 혹은 아이들 버전으로 말하자면, “내가 깨워줄 테니까 자고 있어, 알았지?”). 초기 단계였던 당시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제목이 ‘변증법적 동화’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벤야민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준다.”(56쪽) 다시 한번 들려준다는 건 이전에 벤야민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 얘기를 이전에 두 번 더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독일비극의 기원> 서문에서였는바, 그는 이 서문을 자신의 ‘가장 성공적인 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

“잠자는 미녀가 나오는 동화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하고 싶다. 그녀는 가시덤불 속에서 잠을 잤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깨어났다. 그러나 행운의 왕자님의 키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깨운 것은 주방장이었다. 주방장이 어린 요리사의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려퍼졌다. 오랜 세월 막혀 있던 에너지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아름다운 아이가 가시울타리 뒤에서 자고 있다. 한껏 현란한 지식으로 장식한 행운의 왕자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 결혼의 키스를 하면 아이가 왕자에게 달려들 테니까. 작가가 아이를 깨우는 것이 훨씬 낫다. 작가가 주방장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따귀를 때릴 때가 한참이나 지나갔다. 따귀의 날카로운 울림은 지식의 방들에 울려퍼질 것이다. 그러면, ‘고물’ 물레에 손가락을 찔렸던 이 가련한 진리도 깨어날 것이다. 이 진리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에, 물레에 걸린 채 교수의 가운으로 짜여 들어갈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40쪽)



이에 대한 수잔 벅 모스의 촌평: “학계는 ‘고물’이 되었다. 작가 벤야민은 자기가 오랫동안 잠들었던 형이상학의 진리를 깨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진리는 교수복을 입고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었다. 좀더 적당한 옷을 쇼핑몰에서 찾은 것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일까?”(벤야민 자신도 <일방통행로>에 대한 에른스트 블로흐의 서평, “이곳에 철학이 개점했다. 쇼윈도에는 형이상학의 봄 신상품이 진열된다.”에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아무튼 여기서 ‘진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이며, 벤야민(=작가)는 (왕자는 아니더라도) 이 미녀(=진리)를 깨우는 ‘주방장’이고자 한다(요즘 버전으론 ‘슈렉’). 나는 동화의 이러한 ‘비틀기’가 벤야민 자신의 독창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건 이 이야기에서 대별되고 있는, ‘깨우기’의 두 가지 방식이다. 첫번째는, 전통적인 방식인바, ‘왕자의 키스’. 이건 직접적이며 무매개적인 방식이다(슈렉은 입냄새로 깨우던가?). 그리고 두번째는 ‘주방장의 따귀’. 어린 요리사를 따귀 때리는 소리에 공주가 깨어났다고 하니까. 이건 간접적이며 매개적인 방식이다. 벤야민이 (무)의식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왕자의 키스’가 아니라 ‘주방장의 따귀’이다.

‘따귀 때리기’가 얼핏 강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식이고 매개적인 방식이며, 직접적인/무매개적인 방식으로 진리/미녀를 깨우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가림막이다.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지만(혹은 그럴 걸로 기대되지만), 진정한 액션이 아니라 이른바 유사-액션인 것이다. 가령, 모스크바 체류 초기에 “벤야민은 라시스에게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따귀’를 때린 것. 하지만, 그게 전부이며, 그는 결정적으로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는 따귀를 때린 것 정도로 모든 결과가 산출되기를 기대했지만, 라시스(=공주)는 깨어나지 않았다(아마도 기지개 정도를 켜다 말았으리라). “그러나 곧 소극적이 되었고 때로는 라시스보다도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왜 사랑에도 정치에도 투신하지 못하는가?”란 물음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 있다(정치에서도 그는 ‘재야 좌익’ 정도를 자신의 몫으로 생각한다). “그는 왜 사랑에서도 정치에서도 ‘키스’하지 못하는가?”(왜 엉뚱한 아이의 따귀나 걷어붙이는가? 무슨 프로젝트 ‘준비’만으로 생애를 다 보내는가?)

그리고 또 한번. 1908년, 16세의 벤야민은 학생잡지 <데어 앙팡(der Anfang)>의 재판에서도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언급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잠자는 미녀다. 왕자가 자기를 깨우러 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자고 있다. 젊은이가 깨어나기 위해서, 젊은이가 자기를 둘러싼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것을 위해서 우리 잡지는 힘을 보태기를 원한다.”(484쪽, 주58)

여기서도 ‘젊은이(=미녀)’를 깨우러 오는 것은 ‘왕자’인데, 문맥상 ‘우리(=우리 잡지)’는 ‘왕자’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젊은이가 깨어나기 위해서 힘을 보태기를 원한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란 여기서도 ‘따귀’나 때리는 것이다(창작에 비해서 2차적인 비평 자체가 이미 ‘따귀 때리기’일까? 1930년 파리 체류중에 솔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벤야민은 자신의 목표가 “(현대) 독일 문학 최고의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59쪽)이라고 밝혔다. 더 물고 늘어지자면, 그는 여기서도 ‘최고의 비평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최고의 비평가라고 평가/인정해줄 ‘왕자’를 기다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요컨대, 벤야민에게서 일생에 걸쳐 반복되는 ‘모티브’(혹은 ‘반복강박’)는 '잠자고 있다-깨워야 한다'이며, 그 깨우는 방식은 독특하게도 간접적/매개적인 것이었다(그에게 ‘역사’는 ‘역사의 천사’였다). 그에게 ‘변증법’은 무엇보다도 잠/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했는바, 애초에 ‘변증법적 동화’로 구상되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 자체가 “상품 환등상이라는 집단 꿈에서 ‘깨어남’과 관련하여” “<잠자는 미녀> 이야기의 마르크스적 다시 쓰기이다.”(349쪽)

그러한 다시 쓰기의 전제조건은 ‘잠자고 있기’이다. “벤야민의 목표는 ‘초현실주의의 유산’ 속에서 깨어남의 충격과 기억하는 훈련을 연결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역사적 대상물을 동력화(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지난 세기의 키치를 ‘깨우는’ 자명종 시계를 만든다 –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간지(奸智)와 함께 작동한다.”(351쪽) 들뢰즈의 상용구를 동원하자면, 벤야민의 꿈은 ‘자명종-되기’였던 것이다(<모스크바 일기>에서 그는 모스크바의 ‘너무 많은’ 시계점들에 대한 관찰을 기록하고 있다. 왜 너무 많을까? 유독 시계점들에 주목했기 때문 아닐까?).



그런 벤야민에게, 혹은 그의 프로그램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진 것이 히틀러의 나치즘이었다. “독일이여 깨어나라!”가 나치의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라디오라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벤야민의 작업과는 상반되는 정치문화를 배양했다. 파시즘은 현실을 무대에 올리는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역전시켜 정치적 스펙터클뿐 아니라 역사적 사건 자체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현실’ 자체를 연극으로 만들었다(*이런 게 ‘예술의 정치화’에 대응하는 ‘정치의 예술화’이다). 게다가 이러한 좌파문화운동의 전체주의적 역전은 좌파가 해내지 못했던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이와 유사하게 스탈린주의를 ‘정치적 아방가르드’로 이해하는 관점은 보리스 그로이스,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참조).

‘자기반성’을 심리학적 의미가 아닌 ‘역사철학적’ 의미로 이해한 벤야민에게 이러한 상황은 개인적 위기로 경험되었다.”(59쪽) 비유컨대, ‘자명종-벤야민’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확성기-히틀러’이며(사실 이건 그 ‘직접성’에서 경쟁 자체가 안된다! 그는 나치즘에 쫓겨 미국 망명까지 시도하지만 결국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하고 만다), 때문에 “파시즘이라는 배경막이 드리워진 상황에서, 현재를 탈신화화할 역사를 현시한다는 <파사젠베르크>의 교육적 기획은 더욱더 절박한 것이 되었다.” 교육적 기획? 아이의 따귀를 때리는 것 말이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주변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1931년 여름과 1932년에 벤야민은 자살을 생각했다. 1930년에 아샤 라시스가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모친이 사망했으며, 자신의 이혼이 결정되었다. 그는 이후의 고독 - 2,000권의 장서를 보유한 서재가 딸린 베를린 아파트의 고독 혹은 여름 별장의 고독 -과 화해했다고 주장했지만, 경제적인 ‘생존투쟁’에는 지치고 말았다. 파시즘의 확산과 함께 재정문제는 점점 더 힘겨워졌다.”(60쪽)

그를 얼마간 더 지탱시켜준 힘은 자신의 프로젝트(‘커다란 여행가방’)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통째로 관류하고 있는 건 '잠자고 있다-깨워야 한다'이다. 거기서 ‘잠’을 근대 자본주의의 환상으로 대치하게 되면, 벤야민은 곧바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이때의 마르크시즘은 유년기의 깨어남을 모델로 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걸 ‘유년기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고 싶다(‘성년의 마르크스주의’가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이 유년기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몇 마디 덧붙이고 싶지만, 그건 내가 당장에 실현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대신에 몇 개의 인용문만을 나열하면서 이 글은 일단 끝마치기로 한다.

A Barricade of the Paris Commune

“유년기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생물학적 과제는 집단적/사회적 깨어남의 모델이 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한 세대는 집단적 경험에서 두 가지 깨어남을 수렴한다. 한 세대가 의식에 이르는 순간은 정치적으로 힘을 받는 순간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독특한 순간에 새로운 세대는 부모의 세계에 반항함으로써 깨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졸고 있는 시대의 유토피아적 잠재력을 깨울 수도 있다.”(354쪽)

“우리가 줄곧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이 그 객관적 이미지의 일부이다. 이 세대를 스스로에게서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꿈-연결 속에서 목적론적 계기를 찾는다. 이 순간은 기다림의 순간이다. 꿈은 은밀하게 깨기를 기다린다. 잠자는 사람은 누군가 자기를 부를 때까지만 자신을 죽음에 맡긴다. 그는 간지를 통해 포로 상태에서 풀려날 순간을 기다린다. 꿈꾸는 집단도 마찬가지다. 꿈꾸는 집단의 아이들은 집단이 깨어나는 다행스러운 계기가 된다.”(354쪽)

“유물론적 역사는 새 자연을 탈주술화하여 자본주의의 주문에서 풀어주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힘은 구해낸다. 이러한 유물론적 역사가 벤야민이 바라는 동화의 목표였다. 집단의 역사적 깨어남의 수간에 동화는 ‘나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아이의 사회역사적 질문에 대해 정치적 폭발력을 담고 있는 대답을 제공할 것이다. 근대적 존재,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근대적 꿈나라의 이미지는 어디서 왔을까? 그러한 꿈나라의 미학적 표현인 초현실주의를 언급하면서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는 다다였고 어머니는 아케이드였다’고 말했다.”(354쪽) “(아케이드에서) 우리는 꿈속에서처럼 부모와 조부모의 삶을 다시 산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아가 동물의 삶을 다시 살듯이 말이다.” “누가 아버지의 집에서 살 것인가?”(이상 357쪽)

05.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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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판타스마고리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11 09:28 
    일반인 교양강좌 준비로 들뢰즈와 벤야민의 책들을 한두 권씩 가까운 서가로 옮겨놓고 있는데, 마침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리라이팅'한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트 프로젝트>(그린비, 2009)가 출간됐다. 저자는 <계몽의 변증법>을 리라이팅했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의 저자 권용선 씨. 수유너머에서 강의한 내용을 이번에도 책으로 펴낸 듯싶다. 참고문헌으로 챙
 
 
Forgettable. 2009-12-1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얼마 전 [모스크바 일기]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페이퍼가 더 재미있네요^^
오래전 글인데 먼댓글 따라와서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