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차라투스트라 VS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출판저널'(12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뤘는데, 지난달에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쿤데라의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출판저널(09년 12월호) 인생의 매 순간이 반복된다면?
“영원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것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의 화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2)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성찰로 시작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사상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지만 쿤데라는 자신만의 해석을 더 보탠다. 곧 “영원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사’란 어떤 것인가? 단 한 번뿐인 삶, 오직 순간성만을 갖는 세상사다.
쿤데라가 보기에 영원회귀 사상이 역으로 주장하는 바는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이란 그림자에 불과하며 아무런 무게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한 번의 실수’처럼 정상참작의 대상이 되며 노스탤지어까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매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영원성에 못 박힌 형국이 된다. 더불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단 한 번의 삶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삶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지상에 더 가까워지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갖게 될 테지만, 반면에 짐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면서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쿤데라는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거움, 아니면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이란 쿤데라의 탐구주제는 주로 주인공 토마스에게 할당돼 있다. 프라하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토마스는 아내와 이혼하면서 아들까지 떼어주고 부모와도 절연한 채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바람둥이다. 여자를 갈망하는 한편 두려워하는 그는 그 두려움과 갈망 사이에서 ‘에로틱한 우정’이란 타협점을 고안해낸다. 감상을 배제하고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 조건하에서 에로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에로틱한 우정’이 혹시나 ‘공격적인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그는 ‘3의 규칙’까지 만들어낸다. 짧은 기간 동안 연달아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3번 이상은 안 되며, 수년 동안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적어도 3주 이상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권장하는 규칙의 내용이다.
하지만 테레사를 만나면서 토마스의 규칙은 흔들린다. 그는 보헤미아의 한 작은 마을에 진료차 내려갔다가 우연히 카페의 여종업원 테레사를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열흘 후에 테레사는 토마스를 만나기 위해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손에 들고 무작정 프라하로 찾아온다. 그들은 그날로 동침을 하지만 테레사가 독감을 앓게 된 탓에 바로 떠나지 못하고 그의 집에서 일주일을 더 머물다가 내려가게 된다. 어떤 여자든 간에 한 여자와는 살 수 없고 오직 독신일 경우에만 자기 자신답다고 확신하던 토마스였지만 테레사가 떠난 뒤에는 아파트 창가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다. “테레사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이러한 선택이 반복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 어떤 결정이 옳은가를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토마스는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보기를 제안한다.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의 경험을 완전하게 기억하면서 두 번째의 삶을 살게 되는 것. 더 나아가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갖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행성도 가정해볼 수 있겠다. 이것이 토마스가 생각하는 영원회귀이다. 그런 경우에 매번 다시 태어나면서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더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라는 이 ‘무경험의 행성’에서는 그런 이점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치 아무런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이러한 선택에 직면하여 토마스가 중얼거리는 독일어 속담이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Einmal ist Keinmal)”이다. 한번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쿤데라는 토마스란 인물 자체가 바로 이 한 문장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준다. 말하자면 그는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의 소설적 육화이자 구현이다.
토마스에게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충 이백 명쯤 될 거라는 그의 여성 편력에도 반영된다. 특이한 것은 그를 여성에 대한 추구로 내모는 것이 관능적 욕구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이라는 점. 그는 한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별해주는 백만분의 일의 차이에 사로잡혀서 이 객관적인 여성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한다. 강박적인 여성 편력에 사로잡힌 바람둥이를 쿤데라는 여자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면서 매번 실망하는 ‘서정시적’ 유형과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언제나 만족하는 ‘서사시적’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토마스는 이 가운데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테레사와의 동거는 그의 여성 편력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비록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두 가지 열정이라고 생각하지만, 테레사를 알고부터 그는 술의 도움 없이는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된다. 그런 토마스의 모습을 보고 사비나는 바람둥이 토마스의 그림자 위에 낭만적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비친다고 말한다. 즉 돈 주앙 토마스는 한편으로 테레사만을 생각하는 트리스탄이기도 하다. 테레사에 대한 토마스의 특별한 사랑과 동정은 소설에서 “에스 무스 자인(Es muss sein)”이라는 또 다른 독일어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래야만 한다”는 뜻의 이 말은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에 쓰인 가사다.
‘어려운 결단’의 표현이기도 한 “그래야만 한다”는 여성 편력 때문에 자신을 떠난 테레사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한 그의 결단을 대변해준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기로 한 결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단과 함께 토마스는 가벼움의 세계에서 무거움과 필연성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렇듯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스의 삶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와 “그래야만 한다” 사이에 걸쳐 있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오직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이 영원회귀 사상이 던져주는 메시지다.
09. 12.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