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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교보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은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의 한 권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앨피, 2007)이다. 폴 드 만(1919-1983)은 대중적으로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문학비평과 이론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지나칠 수 없는 '예일 마피아의 대부'로서 예일대학에 오래 봉직했던 벨기에 태생의 비평가이다.

 

 

 

 

드 만의 높은 지명도(혹은 악명?)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단 한권의 저작도 번역돼 있지 않아서 사실 이런 입문서의 출간이 반가운 것만은 아닌데, 어쨌거나 이번 출간이 계기가 되어 적어도 두어 권 이상은 번역/소개되었으면 한다(러시아어로도 <맹목과 통찰>, <독서의 알레고리> 두 권이 번역돼 있다. 짐작에 일어로는 더 많은 책들이 번역돼 있을 법하다). 적어도 데리다나 스피박의 책들이 번역되는 만큼은(드 만은 데리다의 친구였고 스피박의 지도교수였다) 소개되는 게 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한다(문학이론쪽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지라 나는 세 사람의 책들은 거의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번역본이 나온 김에 원서(2001)는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복사했다. 같은 시리즈의 여느 책들과 마찬가지로 143쪽의 콤팩트한 분량(국역본은 254쪽). 바쁜 일들에도 불구하고 제 버릇 남 못 주기에 서론(왜 드 만인가?)을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 몇 가지를 적어놓는다('비워놓는다'는 게 정확하겠다. 자꾸 어른거리기에 다른 일에 방해가 된다).

앨피출판사의 이 시리즈로는 올초에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과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출간된 바 있고(<제임슨>과는 좀 '시끄러운' 인연을 갖게 됐다) <폴 드 만>은 세번째 책이다. 이어서 나올 근간 목록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주디스 버틀러>,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눈에 띄는데, 모두 여성이론가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덕분에 하반기에는 이 여성이론가들에 대해 정리할 기회가 생길 듯하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로부터 시작된 이 시리즈의 책들을 나는 다 갖고 있다. 개인적으론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책들의 저자들을 다루고 있기에 일종의 '로드맵' 삼아서 소장해두는 격이다(이 시리즈의 의의는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이론가 사전을 겸한다는 데 있다). 매우 요긴함에도 불구하고 간혹 불만스런 번역이 없지 않아서 역자에 좀 민감하게 되는데, <폴 드 만>의 경우는 낭만주의와 벤야민의 문학이론 연구로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다.

벤야민과 드 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아, 알레고리론으로 연결된다!) 드 만이 낭만주의에 관한 권위있는 저작들의 저자인지라 '낭만주의 전공'이라는 이력은 그래도 의지할 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맨앞에 실린 '옮긴이의 글'에서 프랑스의 비평가 '제라르 주네트(Gerard Genette)'를 '제라르 자네트'라고 표기한 건 상당히 특이해 보이지만('쥬네트'나 '즈네트'란 표기는 본 적이 있지만 '자네트'는 처음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구조주의 비평가의 한 사람인 주네트의 경우에도 '제라르 즈네뜨'의 <서사담론>(교보문고, 1992) 이후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다(폴 드 만이나 제라르 주네트가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번역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 딱히 우리가 읽어야 할 문학이론서는 몇 권 되지 않는다).  

폴 드 만을 포함하여 힐리스 밀러, 제프리 하(르)트만, 해롤드 블룸 등 예일대학의 쟁쟁한 문학비평가 네 사람을 미국 대학가에서는 '예일학파'라고 칭하고 일부에서는 '예일 마피아'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는데, 드 만은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지만) 그 대부격의 인물, '돈 파올로(Don Paolo)'로 간주됐다(더 친숙한 인물로 고르자면 '돈 꼬레오레'라고 해야할까?).

이 예일학파에 대한 소개로는 페터 지마의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2001)가 단행본 분량으로서는 유일하면서도 유용하다(서론을 읽은 바로는 <폴 드 만>의 저자 맥퀼런은 드 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지마와 의견이 좀 다를 듯하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최악의 번역서란 평도 얻은) 프랭크 렌트리키아의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문예출판사, 1994)의 한 장이 폴 드 만에 할애돼 있고('폴 드 만: 권위의 수사학'), 빈센트 라이치의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 1993)와 조너던 컬러의 <해체비평>(현대미학사, 1998)에서도 드 만은 자주 언급된다.(*<이론에 대한 저항>과 <독서의 알레고리>도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청년시절 드 만이 전쟁 중에 전쟁 중에 점령된 벨기에에서 나치에 협력적인 언론을 위해 글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진 1987년 소위 '드 만 사건'"에 대해서는 책의 6장('저술과 책임: 드 만의 전시 언론활동') 외에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의 12장('파시즘 문제 - 폴 드 만/하이데거/니시다 기타로')를 참고할 수 있다.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던 데리다에 의하면 드 만의 업적은 '문학이론 영역의 변혁(transformation)'에 놓인다(두 사람은 1966년 존홉킨스대학에서 열린 '구조주의 논쟁'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만났다). "이 변혁은 대학 내외의 그리고 미국과 유럽 양쪽의 문학이론 영역에 물을 대는 경로들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동료였던 힐리스 밀러의 단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가 된다면 보편적 정의와 평화적 평화의 밀레니엄이 도래할 것"이다.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good readers in de Man's sense)'는 나라면 '드 만적 의미의 좋은 독자'라고 옮기겠다(일급의 비평가였던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가 되는 것보다는 '드 만적 의미의 좋은 독자'가 되는 게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일 아닐까?).

1970년대 예일대학에 몸을 담게 된 드 만과 동료 비평가들의 "선구적 작업으로 형성된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관심은 (*미국) 학계에 상당한 마찰을 불러왔다. 문학비평의 전통적 형식들이 새로운 지식체계의 극단적 함의들로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이 무렵에 종종 옛것과 새것 사이의 '매서운 토론'이 잇따라, 흔히 이 시기(대략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는 영미권 지식인의 삶 속에 이른바 '이론 전쟁(theory wars)'이라는 극적인 명칭으로 불린다."(21쪽) '이론 전쟁'이란 말은 '예일 마피아'란 별명과 잘 어울리는군.

"드 만의 저술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부터 사망하기까지 약 65편의 에세이와 평문을 남겼다."(23쪽)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계산'은 정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겠다. 드 만의 저술은 ' 75편(some seventy-five)'이다. "책으로 출간된 드 만의 첫 에세이 모음집은 <맹목과 통찰>인데, 이는 1971년에 출간되어 1983년에 수정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 이어서 문학과 수사학을 탐구하는 <독서의 알레고리>(1979)가 간행되었다."

"드 만의 글 중 영향력이 가장 큰 몇몇 글들은 사후 첫번째 간행된 모음집인 <이론에 대한 저항>(1986) 속에 실려 있다. 이 책의 표제 제목으로 선택된 논문은 소위 '이론 전쟁' 기간 동안 이론적 질문의 방향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낭만주의의 수사학>(1984)은 <독서의 알레고리> 속에 표현된 이론들을 확장시키는데, 낭만주의적 사유에 대한 드 만의 작업의 중요성을 공고히 한다. <낭만주의와 현대비평>(1993)은 어떤 의미에서 <낭만주의의 수사학>과 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24쪽) 국역본에서 <낭만주의와 현대비평>에 병기된 원어 'Romanticism and Contemporary' 다음에 'Criticism'이 누락됐다.

"이상의 모음집들에 이어 <미학적 이데올로기>(1996)가 나온다. 1977-83년 사이에 씌어진 에세이들이 포함되었으므로 이 저작은 <독서의 알레고리>의 후속편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이 책은 수사학, 지식의 생산과 미학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심도 깊게 숙고하는데, 이는 드 만의 저작이 비정치적이라는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그것은 드 만 저작의 정치적 정향성을 재획인해주며 그의 다음 프로젝트가 부분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에 집중될 것임을 예시한다. 유감스럽게도 드 만은 이 프로젝트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24-5쪽)

이 책에서 역자가 새롭게 시도하는 번역어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물론 제목에도 포함돼 있는 '탈구성(deconstruction)'이다. 흔히 '해체(론)'라고 옮겨지는 데리다의 이 용어를 역자는 '텍스트 이론적 맥락에서' '탈구성'이라고 옮길 것을 제안한다(일본에서는 '탈구축'이라고 옮겨지는 걸로 안다). 나는 이러한 시도에 반대하지 않는다(데리다 자신이 어떤 고정적인 'key word'를 거부한다). 하지만 몇 가지 다른 번역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부주의의 소치로 보인다.

가령 26쪽의 박스에서 데리다를 '파리대학의 철학자'라고 소개했지만 그는 '고등사회과학원의 철학자'였다(원문에도 그렇게 표기돼 있다). 같은 파리 하늘 밑에 있는 것일 테니 대수로운 건 아니지만. 하지만, 29쪽에서 "예일에서 문학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드 만은 제프리 하르트만, 해럴드 블룸, 힐리스 밀러 등을 가르쳤다."고 한 건 오역이다(동료들이 드 만에게 감화를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번역대로라면 세 사람이 드 만의 '제자'란 것인데 넌센스이다).

원문은 "While teaching on the literary studies program at Yale, de Man taught alongside the critics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and J. Hillis Miller."이다. 하르트만, 블룸, 밀러와 함께 가르쳤다는 뜻이다. 거기에 1975년부터 데리다가 객원교수로 가세하게 되어 소위 '예일학파'가 형성된다는 것. 비록 저자가 부적절한 명칭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왜냐? "드 만,  하르트만, 밀러, 데리다의 글에 어떤 유형적 유사성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목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 자신을 결코 어떤 특정한 유의 비평적 과업과 관련지어 묘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형적 유사성'은 'family resemblances(가족 유사성)'의 번역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굳이 다르게 옮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밖에 'desire'를 '욕구'라고 옮기는 것 등도 특이한 선택으로 보인다...

07. 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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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새로운 비평용어사전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고 나서 사라 밀즈의 <담론>(인간사랑, 2001)을 원저(1997)와 함께 도서관에서 대출해 절반 정도를 읽었다. '담론'은 물론 'discourse'의 역어인데 푸코가 처음 소개될 즈음만 해도 '언술' '언설' '술화' 등의 경쟁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대략 '담론'으로(언어학에서는 '담화'로) 통일되어 가는 듯하다(알라딘에서 '담론'을 검색하면 현재 286건의 상품이 뜰 정도로 상용화돼 있다).

 

 

 

 

그러한 용어의 정착에 기여한 책으론 밀즈의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다이안 맥도넬의 <담론이란 무엇인가>(한울, 1992/2002)와 푸코의 <담론의 질서>(새길, 1993; 서강대출판부, 1998)를 꼽을 수 있겠다. 토도로프의 <담론의 장르>(예림기획, 2004)도 번역돼 있고, 국내서 가운데서는 학술서로 분류될 이정우의 푸코 연구서 <담론의 공간>(민음사, 1994; 산해, 2000)이나 고명섭 기자의 서평집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은 '담론'이란 용어를 표나게 내세운 경우이다(한국학 관련서들을 제외할 경우 그렇다).

사라 밀즈의 책은 그러한 단상을 잠시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다지 재미있거나 유익한 책은 아니었다(이미 '담론'을 다루는 다른 책들을 읽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재미있는 내용은 내가 아직 읽지 않은 나머지 절반(4,5,6장)에 집중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5장의 제목이기도 한 'Colonial and post-colonial discourse theory'를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담론 이론'이라고 생경하게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자의 독특한 취향을 고려하연서 읽어야 할 터인데 그럴 만한 여유가 내겐 없다. 게다가 간간이 눈에 띄는 오역과 고유명사의 독특한 표기 등이 이 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든다.

가령 러시아의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내내 '미하일 박틴'이라고 옮기고 있다(아예 'Mikhail Bakhtin'을 'Mikhail Baktin'이라고 병기하면서!). 번역서가 나온 2001년이면 바흐친의 책들이 그래도 적잖게 소개된 형편이었는데도 말이다(역자가 국내의 이론 담론에 둔감했다는 것밖에 안된다). 그리고 저자가 푸코의 담론이론을 더 정교하게 이론화한 사례로 들고 있는 '미셸 페쇠(Michel Pecheux)'의 경우도 역자는 '미셸 뻬슈'라고 옮겼다. 물론 취향에 따라 그렇게 옮길 수도 있다. 단, 국내의 문헌들에 소개된 '페쇠'를 역자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다(적어도 맥도넬의 <담론이란 무엇인가> 정도는 참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페쇠의 공로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 언어학자 미셸 페쇠의 작업은 보통 미셸 푸코의 작업과 함께 읽는 것이 유리하다. 담론에 관한 그의 작업(페쇠, 1982)은 그가 단어들의 의미와 단어들이 더 큰 규모의 구조와 갖는 관계의 의미를 단어와 문장을 스스로 의미를 갖는다고 상정하지 않고서 분석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페쇠의 작업은 그가 미셸 푸코 이상으로 담론의 충돌적인 성격, 즉 담론이 항상 다른 입장들과 대화 또는 갈등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담론 구조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한다."(29-30쪽) 

그러니까 페쇠는 단어나 문장 들이 갖는 자체적 의미 따위를 인정하지 않고 막바로 그보다 큰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자 했으며, 한편으로 그러한 시도의 이론적 원천을 푸코라는 것. 하지만 "담론이란 용어는 푸코의 작업에서는 잘 정비된 이론적 관념 체계에 뿌리를 두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푸코 자신의 표현을 빌면, "나의 모든 책들은... 도구로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한다."(34쪽) 이런 식의 연결이 뭔가 어색한 것은 인용문에 오역이 포함돼 있어서이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All my books ... are little tool boxes...."이다('나의 모든 책은... 작은 도구상자들이다"). 그런 식으로 옮겨놓으면 번역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참고로, 저자가 참조하고 있는 페쇠(1982)는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1975)의 영역판이다(두껍지 않은 책이다). 어쨌든 담론과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더 정교하게 다듬는 일에 페쇠가 기여한 거로 보면 되겠다. 그러한 구도는 푸코와 알튀세르의 작업을 접합시키려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을까?

밀즈의 <담론>를 읽으며 그래도 얻은 소득은 이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긴장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이다('담론과 이데올로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든 문화이론가와 비평이론가들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 작업과 담론에 의거한 작업 중 어느 쪽을 원천으로 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극심한 이론적 어려움을 겪었다."(51쪽) 즉, 담론과 이데올로기 중에서 어느 것이 '베이스'이고 또 '베이스캠프'이어야 하는가, 가 논란의 쟁점이라는 것.

"작업의 토대를 이데올로기에 두는 이론가와 담론 이론에 두는 이론가 사이의 극명한 대조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정치적 올바름/성차별주의에 대한 논쟁일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평가와 담론이론가 모두 어떤 언술이 성차별적인지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서는 성차별주의는 허의의식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 알튀세르의 용어로 표현해서 주체가 질의받는, 즉 스스로를 특정 유형의 성적 주체로 인식하기를 요구받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담론이론의 관점에서는 성차별주의가 주체집단에 부과된 일단의 믿음의 문제인지 여부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된다."(71-2쪽)

большой пикчер

인용문에서 '언술'은 'statement'의 역어이다('언표'라고 자주 옮겨지는). 이데올로기 이론가나 담론이론가 모두 어떤 언술/언표가 성차별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은 서로 다르다는 것. 알튀세르의 용어로 표현해서 '주체가 질의받는' 방식이라고 보는 게 이데올로기 이론가의 입장이라고 했는데, '질의받는'는 알튀세르의 술어 '호명받는(interpellated)'을 잘못 옮긴 것이다(인문이론서의 역자가 소위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도 무지하다는 것은 좀 놀랍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성차별주의적 표현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지표로 간주하는 것이다. 반면에 담론이론의 입장은 성차별주의가 단순히 '부과'되는 것이라 투쟁을 통해서 정당화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성차별주의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억압적 전략이지만 담론이론에서는 성차별주의는 논쟁의 자리이다. 성차별주의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권력적인 위치를 얻어내기 위한 다수의 남성의 시도가 정당화되는 전장이다. 성차별주의는 또한 여성들이 항변하고 이러란 저항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이다."(73-4쪽).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핵심적인 대목이기에 원문을 옮겨적자면: "Thus, whilst within an ideological view sexism is an oppressive strategy employed by men to bolster their own power, within a discourse theory model, sexism is the site of contestation; it is both the arena where some males are sactioned in their attempts to negotiate a powerful position for themselves in relation to women, but it is also the site where the women can contest or collaborate with those moves."(45쪽)

원문의 'those moves'를 국역본은 '이러한 저항운동'이라고 옮겼는데 내가 보기엔 근거가 없다(일단 'those'는 '이러한'이 아니다). 'those moves'란 복수형이 받을 수 있는 건 앞에 나오는 'their attempts'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 여성들은 논쟁하거나 협력할 수 있다는 게 원문의 내용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성차별주의가 남성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이용하는 억압적 전략이라면, 담론이론의 모델에서 성차별주의는 논쟁의 장소이다. 즉, 성차별주의는 남성들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권력적인 위치를 얻어내려는 시도를 인가받는 격투장이면서, 동시에 여성들이 그러한 시도와 논쟁하거나 반대로 그와 협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담론 이론의 편에 서고 있는 사라 밀즈의 정리는 사실 푸코의 견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며 인용문 자체가 <성의 역사1>에서의 인용을 부연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담론-권력론을 푸코 스스로가 요약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해서 유의미한데 이런 내용이다.

"담론이 침묵보다도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담론이 권력의 수단도 되고 효과도 되는 동시에 권력의 장애물, 권력이 비틀거리며 부딪히는 벽, 저항의 지점, 반대 전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담론은 권력을 생산하고 전달하며 강화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소멸시키고 폭로하며 허약하게 만들고 권력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73쪽)

대략적인 요지는 맞지만 첫문장은 오역이다. "담론이 침묵보다도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성의 역사> 영역본에서 인용하고 있는 원문은 "Discourse are not once and for all subservient to power or raise up against it, any more than silences are."(44쪽, 영역본 110쪽) 고등학교식 영문법을 되새겨보자면, A whale is not a fish any more than a horse is.(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과 같다)와 같은 구문이다. 즉, "담론은 침묵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전적으로 복종하지도 전적으로 저항하지도 않는다." 침묵은 복종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의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담론 또한 그렇다는 얘기이다.

이 책에서 내가 챙긴 건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그 정도의 상식이고 그런 상식의 확인이다. 그러니 재미없을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비하면 당혹스러운 대목들은 보다 자주 눈에 띈다. 그걸 늘어놓는 것도 소모적이므로 한가지만 지적하자면, 99쪽 이하에서 푸코의 <담론의 질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어인 일인지 역자는 푸코의 논문/강연 제목인 'The order of discourse'를 모두 '사물의 질서'라고 옮겼다. 

우리말로는 단행본 <담론의 질서>라고 번역돼 나왔지만(영역본 <지식의 고고학>에 부록으로도 붙어 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문이기도 한 이 글의 영어본은 로버트 영이 편집한 <텍스트 풀기(Untying the text)>(1981)에 실려 있다. 이 텍스트를 황당하게 역자는 내내 '사물의 질서'라고 옮기고, 112쪽에 가서야 원래대로 '담론의 질서'라고 번역해준다(역자가 둘인가?). 이해 못할 노릇이다.

 

이해를 좀 해보고자 한다면, 역자가 <말과 사물>의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와 <담론의 질서>를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 또한 <말과 사물>로 옮겨줘야 한다. 자신의 무지를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절판중인지라 우리가 현재로선 푸코의 <말과 사물>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흥미로운 건 이러한 혼동/착오가 역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 사라 밀즈의 원서 참고문헌에도 푸코의 <말과 사물> 영역본(1970)이 <담론의 질서: 인문과학의 고고학('The Order of Discourse: An Archaeology of Human Sciences)'이라고 오기돼 있다(164쪽). 루틀리지의 편집/교정자들도 눈이 밝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책은 어제 그냥 반납하려다가 읽은 시간이 아까워서, 그리고 또 'discourse'를 '논술'이라고 내내 번역한 또다른 번역서가 생각나기도 해서 간단히 정리도 해둘 겸 몇 자 적어보았다. '논술 읽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7.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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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7-03-0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가라타니 고진 책을 읽었는데, 한국어 번역자는 미국을 줄곧 '아메리카'로 표기하고 있더라고요. 일본인들의 용법을 굳이 그대로 살려서 번역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함으로써 해당 글의 원문이 일본어로 씌어 있으며 읽을 때 일본이라는 맥락을 항상 고려해야 함을 상기시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바'인가요? ^^;) [말과 사물]을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로 옮기는 문제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글이 영미권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알려줄 수 있겠지요. 물론 [사물의 질서]가 영역이 아닌 '원문'이라고 받아들여지면 낭패지만..^^;;

로쟈 2007-03-0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미국'과 '아메리카'가 선택적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아메리카'라고 했다면 그걸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로선 어색한 번역이라고 생각하고요. <말과 사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사물의 질서>라고 해놓고 병기해주거나 각주를 달아준다면 양해할 수 있지만, <사물의 질서>라고만 옮겨주는 건 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국역본입니다. <말과 사물>이라고 번역돼 있으면 그렇게 통일시켜주는 게 불필요한 혼동을 줄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의 서론을 읽고 문제가 되는 오역들을 '악의적'으로 지적한 페이퍼에 대해서 역자가 달아준 댓글이다. 역자로선 할말이 없지 않은 듯하지만 이후에 본격적인 반박을 아직 접한 바 없어서 그 '할말'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주에 나는 서론과 1장을 읽고서 이 번역서가 겉모양새와는 다르게 '오역서'라 할 만큼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페이퍼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지 모르겠다(그럼 무고죄이다!). 문제는 내가 남 헐뜯기나 좋아하는 사악한 인간이어서 빚어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어긋나서 2장부터는 아주 똑부러지게 번역을 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2장까지도 읽었다. 책의 1/3이다. 하지만 책은 나로선 오역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일부러 두통만 나도록 한' 대목들이 수두룩했다(어느 출판사의 기준으로 하면 이 1/3의 오역/오타만으로도 전부 회수한 후에 개정판과 교환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기준이 다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런 걸 지적한다고 해서 이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질 리는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한다. 오역이 좀 있다고 해서 책값이 떨어지는 경우를 나는 못봤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동네서점에서 사느라 12,500원의 책값을 다 치렀다. 누가 억울한 건가?

하지만 억울하다는데 또 어쩔 것인가? 그래서 맘을 고쳐먹기로 한다. 사실 제임슨의 소개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웬만한 오역 정도는 알아서 고쳐 읽어도 된다(제임슨 소개서들이 다 그렇다). 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오역을 들먹이는 건 '터무니 없는 부당한 악평'으로 역자나 출판사에 위해를 가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떨결에 책을 구입한 독자들에게 '친절한 로쟈씨'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오물이 좀 묻었더라도 잘 씻어내면 또 먹을 수 있듯이 약간의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더라도 교정해가면서 읽으면 '본전'은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곁들여 나처럼 원서를 갖다 놓고 같이 읽으면 원서 독해력의 향상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이 책을 구입한 몇 안되는 분들을 위한 나의 '친절'이다. 당초에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란 제목을 이 페이퍼에 달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로 고쳐달았다. 그리고 카테고리도 '지겨운 책읽기'에서 '즐거운 책읽기'로 옮겼다. 그래도 잘 보여야 이 '오역의 감옥'에서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교정을 하며 읽고자 하는 게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란 2장이다, 라고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1장 '마르크스주의자'를 먼저 읽어야 한다(젠장). 원제는 'Marxist Contexts'이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기 전에 워밍업부터 하자는 얘기겠다. 왜냐구? "제임슨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며, 그의 작업 역시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제임슨의 대표적인 저작이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와 형식>(1971)이다. 우리에겐 <변증법적 문학이론이 전개>(창비, 1984)라고 소개된 저작 말이다.

참고로, 앨피출판사에서 나온 초기의 '크리티컬 씽커즈'와는 달리 이번에 나온 <제임슨>이나 <데리다>에는 참고문헌에 국내 번역서 목록이 다 빠졌다. 방침이 바뀐 모양이지만 국역본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조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뭐 이런 건 내 알 바가 아닌지도).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자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개념으로 꼽히는 것은 아마도 '총체성'일 것이다. 이 용어를 애용함으로써 '헤겔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다."(48쪽). 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 나왔다. 총체성. 이거 강조 표시다(미리 말해두자면, 제임슨에게서 또 다른 핵심개념 두 가지는 '소외'와 '사물화'이다. 이거면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다 정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 애덤 로버츠가 강조하는 것은 '총체성'이란 말을 애용하는 덕분에 제임슨이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를 사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럼 종류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헤겔주의에 반대하는, 그러니까 목적론적인 '총체성'을 거부하는 알튀세르주의도 있다(번역서는 시종일관 '알튀세'라고 표기했지만 여기서는 '알튀세르'라고 해두겠다).이 '알튀세리앵'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체화 작용을 우리를 억압하는 힘으로 간주한다."

그런 배경하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 "어쨌든 제임슨을, 알튀세적 접근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48쪽) 원문은 "It is worth noting, however, that Jameson is usually seen as a Hegelian Marxist, an inheritor of traditions of Lukacs and Adorno and more or less hostile to an Althusserian approach."(16쪽) 

보면 알겠지만, 원문 어디에도 '올바르지 않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제임슨이 일반적으론 알튀세르적 접근법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나 아드르노의 전통을 이어받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된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겠다."가 나의 번역이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견해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으며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알튀세르 진영으로 많이 끌고가고자 하는 게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적해두어야겠다'를 '올바르지 않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게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르크스에 관한 기본 초식들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세계는 변혁되어야만 한다." 이거 길게 따라갈 필요 없겠다. 넘어간다. 다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인용한 대목(이거 방대한 분량의 정전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완역돼 있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1>(청년사, 1998)이 전부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번역은 왜 안 이루어지는지? 신만이 아실 거다. 나도 두꺼운 영역본만 갖고 있다).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52쪽)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men...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17쪽)

부분역이긴 하나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나도 갖고 있는 듯한데 여하튼 지금은 없다(영역본도 박스에나 들어가 있겠다). 해서 그냥 보면, 나는 아무래도 표시한 문장이 껄끄럽다. 물론 movements'를 '활동'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한 감각이라고 생각되지만, 'treat A as B'(A를 B로 간주하다)라는 구문이 어떻게 해서 'B를 A로 삼는다'가 되는지 이해불능이다. 독어본에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적 감각은 "공산주의는 처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산을 인간의 생산물로 간주한다." 정도로 읽는다('premise'는 물론 '전제'란 뜻이지만 복수형일 경우 '토지'란 뜻도 갖는다).

하긴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도 좋은 말이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도 대차는 없겠다. 'esssntially'도 여기선 '본질적으로'란 뜻 같지만 '필수적으로'라고 옮긴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에잇,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몇 줄 내려가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관계로 결정된다고 믿었다."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human life'의 번역이라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뭐 의역이라는 게 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정리성 멘트: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둘러싼 경쟁, 혹은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를 창출하는 근원인 공장과 자원 등의 생산수단을 둘러썬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3쪽)

 

 

 

 

 

이어지는 내용은 알튀세르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을 어떻게 수정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 등에 관한 내용들 역시 상식에 속하므로 넘어간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입장이 비평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이론은, 문학과 문학비평 분야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1930년대 초반에 이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문화 전체를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57쪽)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한 문장들인데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Culture, says Jameson, is 'to be thought of as something more and other than... the false consciousness, that we associate with the word idelogy', and is instead something that possesses an 'uneasy existence, an uncertain status'."(21쪽)

일차적인 문제는 that이란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역자가 'false consciousness'가 아니라 'culture'로 잘못본 데 있다(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해서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를 다시 옮기면,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연상하게 되는 '허위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그걸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정도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허위의식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론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수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 것. 번역문의 뒷부분에서 '억압적인 힘'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마저 옮기면, "문화는 (그러한 허위의식) 대신에 '뭔가 불안한 존재성, 뭔가 불확실한 지위'를 갖는 어떤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단선적인 인과적 관계로 이해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사회의 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전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루이 알튀세이다."(59쪽) 여기서 '새로운 전제'는 'newer development'의 번역이다. 사전적 의미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역자의 자유자재로움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알튀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분으로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치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시기인 196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59쪽) 원문은 "Althusser started writing at a time, the early 1960s, when the excesses of Stalinist dictatorship in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 had done much to discredit Marxism as a political philosophy."(22쪽)

알튀세르의 커리어에 관한 대목인데,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을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목으로"라고 옮긴 건 아쉽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라는 소련에서" 정도의 뜻이기에(국역본은 강조할 대목들을 상당수 누락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이면 탈스탈린화 바람이 불던 때이다.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린 시기는 20년대 후반부터(특히 3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이다. 여하튼 그 여파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가 이미 땅에 떨어졌던 시기에 알튀세르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재검토한 뒤 총체성 개념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총체성은 전체적(*전체성) 혹은 전부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방식이다. 다양한 소논문과 비평집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적 유산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9쪽) 대신에 "알튀세에게 '역사는 (종결이나 목적을 의미하는) 텔로스 없는 과정이자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70-1쪽)

하지만, 이러한 알튀세르의 기획(project; 국역본에서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의 정치사상(political ideas; 국역본에서는 '정치적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세계(materal world; 국역본에서는 '물질세계')에 적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로선 주류였기 때문에 잘 수용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만, 조금 내용을 챙겨두자면, "1965년에 쓴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는 비록 초기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후기 마르크스는 헤겔을 극복하여 총체성과 관련한 위험한 논의와 단절했다며 진정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알튀세르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마르크스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의 이론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단절'을 발견할 수 있다. 전기의 헤겔주의자 마르크스와, 초기 저작의 위험한 헤겔주의를 청산한 후기의 과학적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이다."(63쪽)

"당연히 , 알튀세는 '사회질서'나 '전체 체계'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알튀세는 사회가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라기보다는, 다양한 요소가 상호연관된 더 복합적인 체계, 다시 말해 탈중심적 구조임을 강조한다. '사회형식' 등 첨단용어를 사용하여, 알튀세는 총체성의 '해체'를 달성하고자 한다."(63-4쪽) 

알튀세르에 관한 ABC의 나열인데, 눈길을 끄는 건 '사회형식'이라는 첨단용어(!)이다. '첨단용어'라는 말 자체가 원문에는 없을 뿐더러 이게 'social formation'의 번역이다! '사회구성체' 말이다(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이 재출간된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바로 그 '사회구성체', 줄여서 '사구체' 말이다)! 내가 요즘 사회과학서적을 좀 등한히 했기에 그간에 '사회구성체론'이 '사회형식론'이라는 '첨단용어'로 옷을 갈아입었는지는 잘 모르겠다(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건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무지의 소치이다...  

젠장,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즐거운 책읽기'를 계속하고 싶지만 내게도 '현실원칙'이란 게 있다. 먹고 살아야 한다. 1장에 남아있는 몇 페이지는 건너뛰고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2장은 들어가지도 못했군). "거칠게 말해서, 예술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요소들은 해체되어야 하지만, 알튀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한 그것을 재구축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재구축이 여전히 모순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경제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75쪽)

이 결론부분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이다. 아무리 자유자재로운 정신의 번역이라손 치더라도 'political sense'를 '경제적 의미'로 번역할 수 있나? 정치, 그거 따지고 보면 다 경제야, 란 계산이 깔린 거라면, 거의 대붕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나로선 이렇게 덧붙일 밖에: "번역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윤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참새 머리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로고...

07. 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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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7-02-18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야부사 2007-02-2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에 대한 비판을 찾아 읽어보니, 번역이 나쁘다고만 하고 왜 어떻게 나쁜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네요. 사실 이런 비판이 최악의 비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말을 돌리지 마시고, 로쟈 님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qualia 2007-02-2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스 님, 트랜스 님의 위와 같은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사태의 전말을 모르시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말을 돌린 건, 제가 아닙니다. 첫글부터 객관적으로 읽어보세요. 심정적인/주관적인 해석은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고 읽었다는 오해를 사기가 쉽습니다. (제가 오해이길 바랍니다.)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 트랜스 님의 윗말은 앞과 뒤가 연결이 전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 공정한/객관적인/생산적인 논쟁이 되려면, 오히려 원론부터 확실히 하고 가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주관에 끼워맞춘 원론(그런 것도 원론이라면)을 가지고 토론을 한다면, 아무리 토론 할애비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죠.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냥 까짓 것 원론 따위는 뛰어넘을까요?

"그럴 바에야"라뇨? 어디 qualia 댓글에 그런 의도가 처음부터 표나게 드러나보이던가요? 자세히 증거를 대주시죠? 트랜스 님, 초장부터 논리의 비약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이럴 바에야, 저는 댓글조차 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제기를 왜 했느냐구요? 왜 한 게 아니라, 문제점이 보였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애초에 제 문제제기는 로쟈 님의 조롱조 비판글과, 남의 오류를 비판하는 마당에 자기자신까지 오류를 겹으로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에 대해서, 로쟈 님이 피장파장식 반론을 qualia한테 가해 오면서,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거듭 저지르셨구요. 그런 오류들을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죠.

만약에 위의 오류에 대해서 피차 간에 매듭이 있었다면, 논의는 좀더 실질적인/생산적인 오역 논쟁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왜 qualia가 그렇게 <괴델, 에셔, 바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 구체적인 오역 사례는 제시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qualia는 로쟈 님 번역 비판글에서 무엇이 그렇게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보는가 하는 점, 로쟈 님은 오역 사례의 교정에서 어떤 실수를 저지르시는가 하는 점... 따위를 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논쟁이 제자리 맴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몹시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qualia 2007-02-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님, 푸하 님의 앞 물음에 대해서도 답변드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더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제 견해를 확실히 할 것입니다. 여기는 아주 시끄럽고 담배연기 매캐한 피시방이기 때문에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는군요. 글을 올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로쟈 2007-02-20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확인하지만,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의 '상대자'가 접니까? 아니면 이것도 "저는 결코 로쟈 님을 지목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에 해당하는 건가요?..

qualia 2007-02-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물으신 것에, 트랜스 님처럼 최악의 비판이라고 강력 비난한 것에, 푸하 님이 근거를 대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 "학실하게" 답하겠습니다. 로쟈 님과 푸하 님, 트랜스 님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qualia 너는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그렇게 (근거도 없이) 강력하게 비판만 하던데, 그러는 네가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이냐?" 특히 로쟈 님은 이러한 심사를 밑에 깔고 다음과 같이 qualia에게 우회적으로 역질문합니다.

로쟈 님 → "저는 부러 냉소적이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비평' 운운할 생각은 없습니다. 번역에서 오역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가 어디까지 관대해야 할까요?(그냥 알아서 원서대조해가며 감지덕지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렇게 해야 할까요? "곽상순님이 번역한 <프레드릭 제임슨>은 완전한 오역의 종합판입이다. 이런 불량 번역판을 찍어낸 출판사와 번역자는 크게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번역자 곽상순님과 도서출판 앨피 측에게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푸하 님은, 로쟈 님의 위 댓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재논박/재재논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되묻습니다.

푸하 님 →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위 로쟈 님 대응에서 분명한 것은 "피장파장(너도 역시you, too)" 식의 되받아치기입니다. 즉 qualia가 맨처음 로쟈 님의 번역비판에서 지나치게 냉소적인 "조롱조 문체"를 지적하고 나오자 → 로쟈 님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해야 할까요?" 하고 되묻고는 → 곧장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에서 거두절미한 한 대목을 따와, → 자기자신의 문맥 속에 절묘하게 끼워넣습니다. 즉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제3의 사안, 즉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건에 대한 qualia의 언급을, 마치 qualia의 입을 빌어 로쟈 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둔갑시켜 역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것은 qualia 자신의 말로 qualia 자신을 논박해 qualia의 자기모순/자가당착을 폭로하겠다는 수(사)법입니다. 즉, 나 로쟈는 이렇게 했는데, 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느냐? 그럼 결국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피장파장인데, 뭔 말이 그리 많으냐? 너도 할말 없지? 뭐 이런 식의 대응입니다.

허나, 이런 피장파장식 되받아치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자신의 논리적 정당성/타당성/근거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역증명하는 자기파기적self-defeating 결과로 낙착된다는 게 기본적/초보논리적 사실이죠. 아니라면, 초보논리적 명제까지 부정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택일해서 응답할 수 있는지요?

잘 아시다시피, 너도 잘못하고 있으니 내 잘못은 그리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의 강변은 남의 잘못을 들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초보적인 어거지 수법이라는 것, 아시죠? 이게 아니라면, 대체 뭐하러, 애초에 사안도 아니었던, 엉뚱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을 인용하는 건가요? 더군다나,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비판 문맥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비판 문맥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유추적으로 인용해 물귀신 작전을 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따로 곧 할 것입니다.

푸하 님,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위에서와 같이 qualia가 누차 답변하고 재답변하고 재재답변했는데도, 근거의 형식이 없는 건가요? 푸하 님은 qualia가 방금 설명한 로쟈 님의 의중이 안 보입니까? 과연 qualia가 말한 초보논리 중 비논리/반논리/무논리적인 점이 어디 드러나 보이는가요? 위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하 님이 인정하기 어렵다면, 대체 푸하 님이 말하는 근거의 형식을 갖춘 진술이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다시 부언하면, 로쟈 님 같은 분이라면, 똑같은 글귀/낱말이라도 그것만 달랑 떼어내서 원글과는 전혀 다른 문맥contexts 속에 가져다 놓을 경우, 미묘한 풍자/빈정댐/희화화의 극적인 효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는 것이죠. 본능적인/원초적인 글감각/풍자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의 글에는 곳곳에서 이런 예민한 심리적 촉각/글감각이 반짝반짝 빛을 발합니다. 허나, 위 댓글들에서와 같은 예, 다시 말해 피장파장식 인용, 비린내 피우는 오류red herring fallacy(논점 회피의 오류),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 등등의 건에서는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강변하셔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글쓰기의 금과옥조를 순간적으로 망각하신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로쟈 님의 qualia에 대한 비난이 이러한 오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인터넷 대중에게 버젓한 진실로 전파된다면, 애먼 사람 하나(나 그 이상)의 양심을 손쉽게 죽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누명을 뒤집어쓴 qualia가 논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평범한 진리가 때로 사람을 살리고 죽입니다.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이 위와 같은 왜곡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부당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부당한, 초보논리에도 닿지 않는, 잘못된 비난을 받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qualia 2007-02-21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괴델, 에셔, 바흐>의 엉터리 번역은 이미 출판계/번역계에서 공인된 사실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박사학위 논문까지 있습니다.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그리고 번역가 이덕하 님께서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이 얼마나 심각한 엉터리 번역판인지 제법 상세한 영한대역식 대조를 해가면서 비판한 글을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셨습니다. "비평고원"(cafe.daum.net/9876)에 들어가보시면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비판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까지 달려 있죠.

국역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안 좋군요... 06.07.18 19:22
 
첫번째 이덕하님의 오역지적부분을 읽고 할말을 잃었습니다. -_- 번역본을 사놓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군요. 어서 영어본이나 구해놔야겠습니다. 06.07.28 01:42

그래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이 어떠한 전후 문맥/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그 비판의 주된 초점이 무엇인지, 적어도 로쟈 님은 "학실히" 아실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러한 공인된 정황/사실에 근거하고, 심지어 로쟈 님까지 이미 알고 계시는, qualia의 비판 문맥을 로쟈 님이 "7-8년쯤 기다려보고"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겠다는 투로 조롱하며 전혀 엉뚱한 문맥으로 바꿔치기한 것은, 말그대로 qualia의 정당한 로쟈 비판에 대한 로쟈 님의 피장파장식 민감반응이라는 것이죠. 그 대응의 수사법은 말할 나위도 없이 빈정대기에 불과한 것이죠. 즉 개인적 감정이 담뿍 실린 대응이라는 것이죠. 즉 인신공격적 요소까지 있다는 것이죠. 즉 그 말의 진짜 의도는 진정한 번역비판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인 즉슨, 인용의 형식을 빌린 상대방 조롱에 있다는 것이죠. 부정하시겠습니까? 이것을 저는 누차 지적했고, 재지적했고, 재재지적했고, 그 가짜 진정성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로쟈 님이 표명하도록 (간접적으로) 묻고 물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qualia를 비아냥거렸다고 속시원히 토로하셨다면, 이렇게까지 소모적인 논쟁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느 근엄한 학자님이 제정신으로,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라는 어떤 정신나간 허수아비"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하고 운운할까요? 이게 실없는 소리가 아니고 뭡니까? 아니라면, 그런 우스꽝스런 개그 코미디를, 그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진짜로 하셨다는 건가요? 게다가, "님(즉 qualia)의 충고"라고 대놓고 말씀하시던데, 아니 어떤 삐에로가 그런 "헷소리"를 로쟈 님께 일러주던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의법스런 질문에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어떻게 답하실 건가요? 요컨대 조롱이냐/말씀이냐 중에 무엇을 택일해 답변하겠습니까? 제발, 토 달며 또 회피하지 마시길!

분명히 하기 위해, 로쟈 님의 (에둘러 피하기식 = 역질문식) 재질문 기법(?)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드리죠. 푸하 님도 yoonta 님도 우회적 역질문 수(사)법을 편들면서 오히려 qualia를 누차누차 역공박했으니까요. 로쟈 님 왈,

"qualia님/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오역서가 발견되면 처음엔 정중하고 따뜻하게 예의를 갖춰서 오역사항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역자나 출판사에 알리고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한다, 가 되는 건가요? 님의 불만은 저의 비평방식인가요, 아니면 타이밍인가요?(둘다일수도 있겠군요.) 한편,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해서 오역에 대한 비판은 있어 왔지만 그 상세한 내용을 저로선 접할 수 없었습니다(역자/출판사쪽에만 알리신 건가요?).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네요(님이 비공개로 돌리셨으니). 오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경력으로 치자면 저도 그 정도는 됩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위 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에 대해, 로쟈 님은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이라고 제가 토를 달았습니다" 하고 그야말로 "토"의 "토"를 거듭 다시더군요.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토에 불과하다고 발뺌하시면서, 그 토에 불과한 가정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운운하는 로쟈 님의 "결론/결심"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로쟈 님은 정리도 틀린 정리를 가지고 가정을 한 다음 → 그 그릇된 가정을 전제삼아 → 분명히 qualia를 빈정대는 결론으로 슬그머니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게 옳은 논리적 말법입니까? 이런 명백한 바꿔치기 지적에 대해 솔직하고 정면돌파적인 응답/인정이나 반박/부정을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은 한 번이라도 했는가요? 그러기는커녕 (푸하 님의 경우, 바꿔치기 이전까지의 "토"만 전략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논리적 술수는 애써 숨긴 채), 거꾸로 qualia의 요점이 뭐냐고 자꾸 되묻는 역질문 전략을 집요하게 펴지 않았습니까(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슬쩍 회피하는 것입니다. 뭐랄까, 일종의 "비린내 피우는 오류(주의 전환의 오류)red herring fallacy"라고나 할까요. 뻔한 내용을 자꾸 반복 재반복해 역질문 하시니, 그에 대한 논박 재논박도 매번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로쟈 님이 위와 같이 수상한 심리적 비웃음을 밑에 깔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아무런 혐의점도 없는 논쟁의 대상자한테 인신공격적인 분위기를 뒤집어씌우면, 로쟈 님같이 막강한 필력을 휘두르는 분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수많은 인터넷 대중에게 그 대상자는 순전한 "비아냥거리"나 "비열한 놈"으로 낙인찍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먼 사람 웃음가마리로 만드는 거 손가락 하나 까딱입니다. 게다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가 필요이상으로 조롱조인 로쟈 님의 비난 때문에 입었을 감정의 상처를 한번 생각해 보셨나요? 로쟈 님 말씀대로 "충고를 받아들여서" 약으로 쓸 만한 진정성 담긴 비판은 진정코 없는 건가요? 물론 아니겠지요.

그럼, 로쟈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을 꼬투리잡던데, qualia는 이에 대해 뭐라고 답변할 건가? 거듭거듭 누차누차 말했듯이,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과 괘를 달리합니다. 즉,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의 주된 초점은, qualia가 최초의 댓글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구체적인 번역내용이라기보다는 "번역가의 (독자/원저자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마음가짐과 (번역에 대한 사명감/책임감/정성/엄밀성 따위의) 번역정신"입니다.

이미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의 심각한 문제점이 만천하에 밝혀진 마당에(이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까지 나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게다가 로쟈 님과 같은 번역비판가/번역비평가 분들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판국에, 또 다시 구체적인 오역 사례를 일일이 꼬집어내는 것보다는, 비판의 다른 측면 즉, 수많은 비판이 직접 해당 번역자한테  전달됐는데도, 그 문제의 심각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명확하게 드러났는데도(예컨대, 로쟈 님이 주장하시듯 독자들의 돈낭비 시간낭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도), 번역자가 자신의 오역을 인지하고 충분히 검토/반성하고 구체적 소명이나 대책을 내놓을 시점이 훨씬 지났는데도, 무대책/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는 번역자의 비양심적 작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이런 비양심적/반지식인적 행태야말로 제가 정면비판한 것입니다. 엄청난 지식의 부도 사태가 출판계/대학계/지식계에서 햇볕 쨍쨍하니 벌어지고 있는데도, 나몰라라식으로 동반책임을 유기하며 무책임/비양심/반윤리/반지식인적 행태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작금의 비겁한 지식인 세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게다가 난센스의 극치는 서울대(서울대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명예감투/막강권력/상품가치로 작용하는지 아시죠?)까지 오역의 종합판 <괴델, 에셔, 바흐>를 100권의 추천도서로 앞뒤안팎 내막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강권(서울대라는 권력은 사회적 강권아닌 강권이라 할 만하다!)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TV, 책을 말하다"보다 서울대 추천도서 100권이 더 강력하고 더 지속적인 광고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저런 무책임한 번역자/출판사의 책을 국민들한테 버젓히 권할 수 있는가? 그동안 몰랐다고 변명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소위 한국 최고라는 자타의 공인 아래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할 서울대가 이 모양이니, 희대의 세계적 과학사기꾼을 탄생시킨 이력에 <괴델, 에셔, 바흐> 100권 추천건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이런 정황/사실/문맥을 알고도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동급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동급으로 다루더라도 "동급최강" <괴델, 에셔, 바흐>의 번역자/출판사를 따라올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알라딘에 떠있는 번역자의 변명을 한번 들어봅시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죠.

번역의 부족함에 대하여 따끔하게 꼬집어 주신 독자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일차적으로 5년전에 도전한 이 번역에서 저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지만, 부족한 곳이 너무 많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번역하면서 도중에 그만 두려는 생각을 한 두번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 이전에도 수 많은 번역자들이 포기를 했었고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번역자입니다.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무모하게 번역한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부족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을 차후에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로 거듭 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만 번역자 나름대로의 위안은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 동안 번역의 오류를 꼼꼼이 지적해 주신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어판과 대조하면서 읽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2003년 11월 26일 알라딘에 보내주신 작가코멘트) - 박여성(옮긴이)

위 옮긴이 말은 겉으로는 반성하고 있는 듯합니다. 반성하는 사람한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것이 과연 진정한 반성일까요? 혹 반성의 형태를 빈 변명은 아닐까요? 그러나 반성의 진정성은 번지르르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조치에 있습니다. 게다가 위 글은 진정한 반성보다는 변명과 합리화에 기울어 있습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다는 둥,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이라는 둥,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라는 둥,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라는 둥, 실로 무책임하고 오만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해당 번역자는 도대체 독자들을 뭘로 보기에, 저런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는가?

<괴델, 에셔, 바흐>의 원저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이라고?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그만이라고? 신비의 원서를 과감하게 번역해서 (독자를 시험에 들게 하고)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다른 번역자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자기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고?

이에 대해 일일이 타박을 놓기는커녕 번역자의 궤변에 기가 질려 저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재귀준거의 틀 운운하는 데는 헛웃음밖에...―,.― (사족이지만, self-reference는 괴델/호프스태터 문맥에서는 자기지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를 두고 재귀준거라고? 도대체 그런 개념으로 어떻게 <괴델, 에셔, 바흐>의 복잡한 논증을 읽어나갔는지?)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 일부를 인용해보죠.

호프스태터가 쓴 <한국어판에 부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책의 번역자인 박여성 교수의 여러 해에 걸친 정성스런 번역은 독자들의 부담을 한결 덜어줄 것이며, 한국어로 정착된 독자적인 GEB의 운명을 짊어지고 책읽기의 색다른 묘미를 선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xix) 

<역자 후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부분의 번역판을 호프스태터 교수가 감수했듯이, 그는 한국어판에서도 검증을 요구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 책의 가치와 번역의 엄정성을 위해서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984) 

위에 인용된 저자와 역자의 말은 이 책의 번역이 양호함을 암시한다. 이런 식 과대포장은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하필이면 14<TNT 및 그것과 연관된 체계들의 형식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비판한 이유가 있다. 14장은 어떤 면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14장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의 증명이 완결되는 부분이며 이 정리는 이 책의 핵심 테마다. 이 정리를 이해하지 않고 이 책을 이해하려 한다면 수박 겉핥기를 넘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번역서로는 골치아픈 이 책의 핵심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아래의 구체적인 비판이 이런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28(영어판 23) 분량의 번역문에서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한 오역만 76개다.

문제의 내막이 바로 위와 같습니다. 더 중언부언할 것 없이, 문제의 심각성이 저 정도라면, 번역자와 출판사는 문제의 오역판을 당장이라도 전량 회수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더는 서점에 깔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번역자 변명에도 나와 있듯이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 번역판으로 내기로 하였다면, 일차적인 조치가 뭔지는 깨달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기는커녕 번역자와 출판사는 오역 문제가 불거지고 비난이 들끓고 있는 와중에서 오히려 1만 얼마하던 책값을 올려 상/하권 도합 4만원에 계속 출하를 하고 있습니다. 책값낭비, 돈낭비, 시간낭비를 결부시켜 표나게 번역판의 오역을 지적하시는 로쟈 님은 이런 후안무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보다 더 심각한 게 독자들을 엉터리 번역, 잘못된 지식으로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 엄청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와 같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책임회피적 발언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반지식인적 행태는 어떻구요?

그런데 이 엉터리 번역판과 번역자/출판사의 엉터리 양식/양심에 놀아나며, 사정/내막도 모르는 순수한 독자들은 <괴델, 에셔, 바흐>를 놓고 자기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그 책의 심오함과 난해함에 경탄하며 금쪽같은 돈을 들여 금쪽보다 더 귀한 시간을 헛되어 소진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 오히려 비리의 몸통은 보호받고 내부고발자는 철창 가는 게 당연한 대한민국, 양심가는 바보등신 취급받고 사기꾼은 거들먹거리며 사회 유지나 지도층으로 존경받는 대한민국, 이런 따위로 뒤집힌 나라에서는 <괴델, 에셔, 바흐> 오역쯤이야 아무런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할 것입니다. 젠장,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만수산 드렁칡하고 살죠, 뭐... 이렇게 하면 됩니까?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까닭으로 qualia의 <괴델, 에셔, 비판> 번역판 비판과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은 그 정황과 문맥과 초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을 가지고 qualia를 걸고 넘어진다면, 그것처럼 유치하고 우스꽝스런 꼬투리가 어딨을까요? 그러니 로쟈 님이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qualia가 비판한 것을 가지고 qualia를 넌지시 조롱/비난한 것은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에다 피장파장의 오류에다 비린내 피우는 오류에다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까지 매우 복합적인 오류를 저지르신 것이 됩니다. 이런 오류들을 아예 못 보시거나 애써 외면하고 역공을 펼치신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 모두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셨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 줄 압니다.

트랜스 님, 비판이 추상같기에 이렇게 길게 지겨운 얘기를 했는데, 답변 됐는지요? 로쟈 님, 푸하 님 qualia의 답변에 지겹지 않으셨는지요? qualia도 사실 이런 뻔한 얘기 하기 싫습니다.


로쟈 2007-02-2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는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 상태와 그 심각성을 qualia님이 잘 아시는다는 것이겠네요. 하니 다른 번역서들은 같이 놓고 비교하면 안된다? qualia님이 모르시는 건 그만한 오역서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라고 흥분하시지만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 경우에도 오래전부터 해온 일입니다(<괴델, 에셔, 바흐>만이 문제라면 한국사회를 들먹일 일도 없습니다.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그래서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2007-02-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qualia 답변 → 언어의 경제학 지적은 받아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qualia 자신도 언어의 경제학에 신경써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죠.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로쟈 님 →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① 비판의 방식: → qualia가 최초 댓글에서 문제삼은 것 중 하나는 바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를 로쟈 님이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비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첫 댓글에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못 읽으셨다면 다시 찾아 읽어보시죠. 또 하나는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도사린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제 지적이 옳지 않다면, 증거를 들어서 역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qualia는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로쟈 님이 항상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판의 타이밍: → 이에 대한 답변도 이미 드렸습니다.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취지로 여러 차례 답변드렸습니다. 소위 비판의 타이밍은 qualia의 비판 항목이 결코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그럼 좀 더 확실하게 답변드리죠. 비판의 타이밍이 1년이냐, 2년이냐, [...], 7-8년이냐 하는 장단의 문제만 따질 경우,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놀음이고 꼬투리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단어조차 로쟈 님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맞죠? qualia는 비판의 타이밍을 결코 문제삼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문제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해당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 게다가 둘 사이에 비판의 과정에서 갈등/상호불신/인신공격이 뜻하지 않게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런 것 따위도 얼마든지 이성적/생산적/상호존중적인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로쟈 님의 지나친 조롱조 문체는 상호존중적 대화를 이끌어내기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제 비판의 최초 동기였고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다차원적인 복잡다단한 절차와 과정을 어떻게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단순화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문제는 이런 점들을 로쟈 님이 더 잘 아시면서, 자꾸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을 들고나와 qualia에게 들이대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qualia의 비판글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로쟈 님이 그렇게 읽어들이셨다고 끝까지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qualia의 표현능력 부족으로 알고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변은 앞으로 포기하겠습니다. qualia의 이 포기를 로쟈 님이나 다른 분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도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로쟈 님 →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제 생각에 로쟈 님은 너무 형식적이고 단선적인 시각으로 번역비판 대 번역수정 절차의 평면적 도식을 qualia의 입장이라고 들이대시는 것은 아닙니까? 로쟈 님 왈,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qualia의 입장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로쟈 님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타이밍과 직결된 요약이군요? 맞죠? qualia의 주장은 그런 형식적/단선적/평면적/도식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디 번역비평가와 독자와 번역자와 출판계 간의 의견교환 관계가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단순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qualia는, 이 점에 대해서 로쟈 님도 분명 동의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결국 로쟈 님과 qualia의 궁극적인 견해는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qualia는 로쟈 님의 기본적인 비판정신에는 모두 동의/동감합니다.

혹시 제 답변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콕 찍어서 다시 질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로쟈 님은 qualia의 질문에 대해서 한 번도 답변을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굳이 하시지 않겠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로쟈 님과 댓글 공방을 벌이며 다소 날것에 가까운 표현을 해서, 로쟈 님께 의도하지 않았던 비례를 저질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qualia가 깝죽댄다고 해도 로쟈 님 발꿈치나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댓글 공방 이전부터나 공방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로쟈 님께 느꼈던 첫인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적어도 논쟁의 객관적 자세와 개인적 감정 사이의 엄정한 구별쯤은 항상 지키려고 노력했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진리와 양심과 비판정신만은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챙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본의 아니게 로쟈 님께 누를 끼친 데 대해 마음으로 사과드립니다.

2007-02-21 16:06

 


qualia 2007-02-22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trawalk 님,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합니다. extrawalk 님의 의견은 extrawalk 님의 자유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증거를 대면서 비판했으면, qualia가 받아들이기에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어느 정도 객관적이었고, 어느 정도 공정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여기서 qualia의 개인적 의견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뚝 떨어져 있는 제3자만이 어느 정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평가할 수 있겠죠.

extrawalk 님 → 애초에 누가 먼저 말꼬리를 잡고 토를 단 건지 저로서는 참 의아스럽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의 맨처음 댓글은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과 오역을 비판하는 번역비평가 자신의 치명적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말꼬리를 잡은 것이라고 extrawalk 님이 주장하신다면, 그런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하겠습니다.

extrawalk 님 → 로쟈님의 이번 페이퍼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qualia님께서 처음부터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던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위 qualia님께서 남기신 댓글의 문맥을 살펴보면 결국 "비평이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에 다름 아닌데, 이거 너무 맥빠지는 얘기 아닌가요. 다시 말해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말하고자 했던 동기, 핵심, 논점 모두 다 qualia의 최초 댓글에 들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지켜보셨다는 분이라면 어떻게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지요? extrawalk 님같이 요약할 수 있는 분도 있구나 하고 저는 그렇게 이해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extrawalk 님의 요약은 빗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의 요점은 바로 윗글, 즉 로쟈 님께 드리는 답글에 더 선명하게 나와 있으니 정확하게 읽고 반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사실에 대해서만 비판하시길 바랍니다.

extrawalk 님 →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제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qualia는 어디서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 하고 제법 준엄하게 충고하시는데요. 로쟈 님은 학생(이나 국민)을 가르치는 분인데, 게다가 수많은 누리꾼들이 로쟈 님의 글을 읽고/퍼가고/참고하는데, 그런 분이 저지르는 오류를 목도하고도, 가만히 못 본 척 있으라 이거군요? 저는 제 스승님한테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받아들인다 해도 이 점만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extrawalk 님 → qualia님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지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너무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어떤 사안을 스스로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고 그러시지 말기 바랍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자중지란에 빠졌다고 하셨는데, 그 구체적 증거를 들어서 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떤 허점에 빠졌는지 날카롭게 증명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저는 저의 허점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강력하게 비판해주시는 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분석도 없이,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선입견이 스민 인상비평이나 감정적 편견만 내세우는 비난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견도 있구나 하고 참고만 할 뿐입니다. qualia가 무엇을 복잡하게 꼬았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비판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qualia가 처음부터 extrawalk 님식으로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구체적 반박사례도 없이, 로쟈 님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면, 댓글 대접조차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2007-02-21 17:40

 


푸하 2007-02-22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공들인 글 잘 읽었습니다. 님 글의 주된 대상이 되는 저이기에 여러 1차적 판단과 인상 그리고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속에 물결 치듯했습니다. '아'와 '어'는 다르다는 것, 이게 논리적 판단의 기초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시기를 정하기 어렵지만 되도록 빠른 시간내에 구체적으로 검증가능하도록 이야기 하겠습니다.

로쟈 2007-02-2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답변드리지 않겠습니다. 요는 비판의 타이밍 문제가 아니라 비판의 방식이라는 것. 제 방식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것. 그리고 첫댓글의 표현을 빌면, '엄밀함과 치밀함과 매끄러움'이 부족하다는 것. 이 후자의 경우엔 따로 qualia님의 모범을 보여주시면 될 거라고 봅니다(바보에게 넌 왜 바보냐라고 몯는 건 소모적입니다. 바보가 아닌 방식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냉소적'이라는 건 가능한 평이긴 하나 정확한 건 아닙니다(제가 냉소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일에 시간낭비하지 않습니다). 조롱 섞인 비평이 차라리 적합한데, 그건 '블랙 코미디'에 대한 제 반응입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비분강개할 수도 있을 사안에 대해서 조롱 섞인 비평을 늘어놓는다는 게(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오역의 정도에 따라서 제 반응은 조금씩 다릅니다) 특별히 비난받을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qualia님의 핵심적인 의견은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것일 뿐 저 또한 그런 '의견교환'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괴델, 에셔, 바흐>의 경우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를 경험하신 건지요? 그 경우에 역자는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시는 건가요?(거듭 말씀드리자면 <괴델, 에셔, 바흐>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제 경우엔 그게 모순적인 주장처럼 여겨지는데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갖춘 역자라면 매 페이지마다 오역이 속출하는 번역을 책으로 내지 않습니다(그게 가능하다고 보시면 저와 의견이 다른 겁니다. 무엇이 번역에 대한 책임감이고 사명감이며 학문적 양심이고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인가에 대해서). 견해가 다른 만큼 다른 방식의 비평을 택한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싶네요. 저는 평면적 방식을 선택하겠습니다. qualia님이 '입체적인' 방식을 보여주신다면 상호보완이 될 거라고 믿어집니다. 건필하시길...

푸하 2007-02-2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의 핵심적 입장을 정리하자면 <괴델, 에셔, 바흐>에 관한 비판은 구체적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로쟈님의 비판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구체적인 번역비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1. 다른 속성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두 책 모두 오역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도 이러한 두 책을 오역이라는 같은 속성에 기대어 같은 잣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물론 qualia님 입장에서는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주된 속성을 지닌 페이퍼가 구체적인 번역내용을 비판하는 로쟈 님의 페이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공통점을 비교의 대상으로 선정할 것인지 하는 것은 열려있습니다. 두 책은 오역서라는 무시 못 할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2. 로쟈 님의<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초기단계만 보더라도 출판사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은 파악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오역지적이 형식적일 뿐이겠습니까?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에 대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구체적인 번역비판인 동시에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qualia님의 가장 기초적인 진술인 따라서 이후 로쟈 님을 비판하는 논리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는 잘못된 진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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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남들 못지 않게 사놓고 정작 재미를 못보고 있는 대표적인 두 저자가 내겐 프레드릭 제임슨과 아도르노이다(제임슨이 아도르노 연구서를 쓴 건 당연하면서도 짓궂다!). 그 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만한 건 제임슨인데, 일단 여러 권의 저작들이 소개되었으면서도 정작 대표적인 주저들은 번역/소개되지가 않았고(이럴 때 쓰는 말이 '닭 쫓던 개 제임슨 쳐다보기'이다), 그나마 번역된 책들 읽기 어려우며(어떤 것들은 이제 구하기도 어렵다), 그걸 좀 덜어주겠다고 나온 해설서들 마찬가지로 난삽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이때 '난삽함'이 비단 어려운 내용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역의 난잡함을 좀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이번에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로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과 함께 출간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이 이 시리즈의 성격에 걸맞게 '가장 쉬운 제임슨 입문서'의 구실을 해주려나 은근히 기대를 가졌건만 어젯밤에 첫장인 '왜 제임슨인가?'를 읽고서 기대를 접었다(정말 묻고 싶다. 왜 제임슨인가?).

사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도 기대에 부응하는 번역은 아니었다(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알라딘은 이 책명을 '자크데리다의 유령들'로 붙여놓아서 '데리다'로는 도서검색이 안된다. 업무량이 그토록 과다한가?). 원서와 비교해보면 앨피출판사의 국역본 시리즈는 편집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는데(얼마나 알뜰한 편집이냐면 원문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끊어놓은 번역문을 두 개의 문단으로 나눠놓는 식이다), 정작 '콘텐츠'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형국이어서 안타깝다. 책은 껍데기가 아니잖은가. 공연한 험담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가령, "여러 차례 그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에게서 얻어낸 통찰, 즉 결정이 순간은 광기라는 진술을 상기한다."(42쪽)는 구절을 읽으면 당신은 무엇이 상기되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거 송충이 씹는 맛 아닌가? 어쩌자고 덴마크의 '고독한 단독자'의 국적을 네덜란드로 바꿔놓는단 말인가?(나도 '어려운 오역'을 좀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축구 사랑의 인연으로 네덜란드에 더 친밀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역자와 편집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를 아무생각 없이 접수할 수 있었단 말인가?(많이 쓰는 이름인 '키에르케고르'를 '키르케고르'로 표기하면서 '네덜란드 발음은 이게 더 가깝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듯 시작이 께름칙해놓으니까 이래저래 주의해서 읽을 도리밖에. 그래도 <자크 데리다>의 경우 1장에서 몇몇 의문스런 번역을 제외하면 2장부터는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내가 먼저 다뤄보기로 한 건 그 때문이다. 멀쩡하게 씌어진 역자 서문을 지나 '왜 제임슨인가?'의 몇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괜찮다. 제임슨의 두 화두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두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 대해서 유익한 해설을 읽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한데, 이러한 기대는 제임슨의 이력을 읽어나가는 대목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제임슨은 하버대학에서 강사와 조교수로 재직했고, 이어 1967년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71-76년까지 불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교수로 일했으며, 1976-83년까지는 예일대학에서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때까지 듀크대학의 비교문학과 명예교수직도 겸했다."(29쪽)

사실 제임슨의 이력이 어떻다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역자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말로도 말이 안되는 게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때까지... 겸했다."? '그때까지'는 언제를 말하는가?(1983년 이후는?) 1983년까지 예일대학과 듀크대학의 교수직을 겸했다고?(유렵대학의 명망있는 교수들이 미국대학에도 초빙교수로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지만, 같은 미국내에서도 그렇게 'two job'을 갖는다?)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은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원문은 "SInce then he has been Distinguished Professor of Comparative Literature at Duke University."(3쪽)이다. "그 이후로 그는 듀크대학의 비교문학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명예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봉직기간 등 해당대학에서 규정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교수에게 수여하는 명예직이다. 그리고 미국대학에서 'Distinguished Professor'는 내가 알기론 해당분야의 탁월한 업적을 이룬 교수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대우도 물론 좀 다를 거라고 예상되고). 그게 몇년 전부터 국내에 도입된 '석좌교수'직과 성격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물론 영어에서 석좌교수를 가리키는 말은 따로 있지만).

원문 어디에도 '겸했다'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since then'을 '그때까지'라고 옮겨놓으니까 수습차원에서 '겸했다'란 말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 사례이지만 내 독서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역자가 어떻게 번역해놓았을지 얼추 짐작하게 한다. 사실 본문 첫문장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23쪽)에서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에 인용부호와 인용출처가 빠져 있는 데에서도 번역의 충실성에 대한 의혹은 슬슬 기어나오기 시작했었다. 그러니 사단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들여다보기 전에 '제임슨을 읽는 어려움' 일반론에 대해서 먼저 정리를 해둔다. 이러한 국역본의 소제목들은 아마도 편집자가 붙인 듯하지만(32-43쪽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이 원서에는 'The Challenges of Jameson's Work'로 돼 있다) 내용에는 부합한다. "일반적으로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속한 비평적 맥락이 복잡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임슨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를 읽어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이다."(32쪽)

'복잡하고 광범위한 비평적 맥락'으로 치자면 슬라보예 지젝 같은 경우 한술 더 뜨기 때문에 제임슨만의 두드러진 난점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매력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33쪽)니까 특별히 번역상의 문제만으로 우리가 곤란을 겪거나 분통을 터뜨리는 건 아니겠다. 반면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  같은 경우에 "나는 종종 서가의 문학이론서 자리에서가 아니라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 꽂힌 자리에서 그의 책을 뽑아든다."(33쪽)고 하니까 그의 문체(스타일)이 악평만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고(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글턴의 활달하고 재기넘치는 문체를 더 좋아한다).  

물론 대세는 역시나 꼭 그렇게까지 문장을 꼬이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다. "제임슨의 스타일을 피곤하고 번잡스러우며 어쭙잖다고 평가절하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더글러스 켈너는 제임슨의 스타일을 형편없다고 얘기했다."(33쪽) 켈너는 국내에 <탈현대의 사회이론>(현대미학사, 1995)부터 <미디어문화>(새물결, 2003)까지 여러 권의 저작이 소개돼 있는 좌파이론가이다(보드리야르와 마르쿠제 연구서가 유명하다).

한데, 형편없다'고 옮긴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켈너가 쓴 단어는 'infamous'이며 사전적 정의대로, '악명 높은'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엔 이 말의 출처가 빠져 있지만, ('제임슨의 모든 것'이란 참고문헌 해제에 포함돼 있는 바대로) "제임슨의 다양한 논문을 실은 책" <포스트모더니즘/제임슨/비평>의 편자 서문에 나온다. 그 편자가 바로 켈너인 것. 따라서 "제임슨의 문체는 악명이 높다" 정도이지, "제임슨의 스타일은 형편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그의 난해한 문체가 시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잖은가!).  

왜 그럼 제임슨은 그렇게 쓰는가? 아도르노의 난해한 문체를 옹호하면서 제임슨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한데, "요컨대 독서는 어렵고 불편한 일이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독서가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닐 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다."(35쪽) 그러니까 드러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낫다, 라는 게 제임슨의 글쓰기론이자 문체론이다. 저자인 로버츠의 해석대로, "이러한 주장은 난해한 글쓰기일수록, 비록 소극적인 의미에서나마 진보적 행위라는 사실을 내포한다."(36쪽)

거기에 보태어 제임슨은 그 '난해성'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왜냐하면 시류에 흔들리는 양떼처럼 제도적 압력에 굴복할 때보다는, 그에 저항하고 교전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 제임슨과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다. 

저자 로버츠의 제임슨 꼬집기: "가령 우리는 제임슨을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에서 높은 존경을 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가 교육사업을 벌여 미국에서만 연간 수천 만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제임슨의 난해한 스타일은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무지한 노동계급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37쪽) 이것이 '난해한 글의 계급성'이자 좌파 엘리트주의의 함정이다.  

그리고 인용문에는 오역의 함정도 있다. 미국 대학시장의 규모를 '수천 만 달러'라고 옮겨놓았는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원서에 따르면 미국의 대학 '산업'이 해마다 벌어들이는 수익은 'billions of dollars'로 돼 있다. 지적하기도 뭐하지만 'billion'은 '천만'이 아니라 '십억'이다. 이건 액면상 적은 차이가 아니다. '무지한 독자계급'을 상대로 한 번역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대충 번역하면 곤란하다.

어쨌든 그러한 '함정'에 대해서 저자가 일침을 놓고 있는 대목: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는 행위로 자기를 과시하듯, 난해한 제임슨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자신이 학식과 교육 정도를 과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된 이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가 더 급진적 전략일 수도 있겠다."(38쪽) 단, 여기서도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Routledge Critical Thinkers)'는 '루틀리지 비판적 사상가' 시리즈 더 타당하다(비평가와 사상가는 좀 다르지 않나?).

이제 오역의 핵심적 문제로 들어간다. "이와 연결된 핵심적 문제를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문장을 제임슨의 글에서 뽑아보면 이렇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정치적 무의식>에서의 인용문으로 넘어가는데, 유감스럽게도 세 줄이 누락됐다. "Chapter 3 of The Political Unconscious looks at 'the novel', and reads the French novelist Honore de Balzac to illustrate his case."가 그것이다. 뭐 빠져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한데 굳이 누락시킬 이유가 있는가?), 디테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차라리 발췌역을 하는 게 나을 터이다(그나마 인문서들의 경우엔 덜한 편이고 실용서나 경영서들의 경우엔 공공연하게 발췌역이 자행된다. 그런 책들 돈 주고 산다는 것이 넌센스이다. 물론 발췌독을 한다면야 할말 없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인용문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이다.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진실로 이해해보려고 여러 번 읽어보았지만 내게 남는 건 두통뿐이다. 제임슨의 원문 자체가 난삽한 건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문장을 갖다놓고 번역문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역자는 대체 무슨 뜻으로 옮긴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편집자는 한쪽 눈을 감고 교정을 보는가?). 제임슨의 원문보다 난해한 문장을 어떻게 '해독'하라는 것인가?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이 문장에 대해서는 저자가 이어서 3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국역본은 40쪽에서 원서와는 다르게 인용문을 한번 더 반복해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한데 읽을 수 없는 인용문을 한번 더 읽는다고 이해가 되는지?). 그러니까 설혹 제임슨이 쓴 문장의 의미를 바로 캐치하지 못했더라도 로버츠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 파악을 할 수 있게끔 돼 있다(뒤이어 이 문장에서 주어가 뭐고, 동사가 뭐고, 목적어가 뭐고 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한데 역자로서 불성실한 것은 그러한 저자의 '노고'조차도 발췌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장 요소들을 분절해서 각각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히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야만 이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41쪽)고 해놓고 역자 자신은 그 '힘겨운 작업'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더러 저자의 그 '힘겨운 작업'을 독자에게 전달해주지도 않았다.'옮긴이의 글' 말미에서 "이 책을 쓴 애덤 로버츠는 짧은 분량 안에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을 압축적이고도 명쾌하게 설명하여, 독자들을 단번에 제임슨 이론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그 충실하고 명쾌한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거나 깊이 공감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을 역자의 부족한 능력 탓이다."라고 적은 내용이 아무래도 역자 스스로에겐 충분히 이해되거나 공감되지 않은 듯하다.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한다. 번역문 말고 원문을, 저자 로버츠를 따라서(조금 더 자세하게 풀었다). 먼저 문장 전체 주어는 무엇인가?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가 주부이고 주어는 'definitons'이다. 그리고 전체 동사는 동사는 'assert'. 그리고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가 삽입절이고, that-이하가 'assert'의 목적절이다, 라고 처음에 보았었지만 이 문장에서 that은 접속사가 아니라 지시형용사이다. 거기에 준해서 내용을 정정한다.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리고 주절에서 'that processing operation'이 주어이고 'has'가 동사이다. 'has A as B'로 'A를 B로 갖고 있다'란 구문인데 A가 너무 길어져서 'as B'가 먼저 나온 형국이다. 그럼 A에 해당하는 거은 무엇인가?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나머지 전체이다. 그럼, B(its historic function)에 해당하는 건 무엇인가?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 세 가지이다. 그리고 이 명사(구)들이 전치사 of 를 통해서 뒤에 나오는 목적어들을 받고 있다.

그러한 구문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들은... 서사적 모사라는 그 작동과정이 이러이러한 것을 (1)체계적으로 침식하고 (2)탈신비화하고 (3)세속적으로 '해독'하는 것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번역문에는 어떤 착오가 있는가?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혼돈은 등위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이 '역사적 기능'의 내용이란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덧붙여 지적하자면 'emblematically'는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란 뜻이고, 'initial'은 '필수적으로'가 아니라 '최초의'란 뜻이다. 'preexisting'을 '전 존재적'이라고 띄워서 옮긴 건 (편집자의 오류로 보이는데) '전(前)'이라고만 해줬어도 오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반대로 제임슨이 만일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쓴다고 할 때 우리가 잃게 되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돈키호테의 둥장 이래 사물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한 소설들은 실제로는 사실적 재현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명맥히 기반한 고대의 신성한 서사들의 가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해독해온 것이다.''"(38-9쪽) 

(제임슨의 것이 아닌) 로버츠의 원문은 "Novels, from Don Quixote onwards, that have attempted a 'realistic representation' of things have not in fact been doing this, they have actually been undermining and 'decoding' the ancient sacred narratives on which they are distantly based."(8쪽) 여기서도 '명백히'라고 옮긴 'distantly'는 '간접적으로' '멀리'란 뜻이다('distintcly'와 헷갈릴 정도로 정신없이 번역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다시 옮기면, "<돈키호테> 이래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해왔다고 하는 소설은 실상 그러한 재현과는 무관하다. 소설이 실제로 한 것은 그 자신이 멀리 기원을 두고 있는, 고대의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기반을 침식하고 '탈코드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최초의 인용문을 다시 옮기면: "리얼리즘에 관한 많은 '정의들'이 주장하듯이, 그리고 소설의 기원으로서 <돈키호테>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고 다양하게 불리는 그 작동과정은 과거부터 존재해온 전통적인 이야기나 최초에 관한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패러다임을 체계적으로 침식하거나 탈신비화하고 세속적으로 '탈코드화'하는 일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었다."(가독성을 위해서 얼마간 의역을 했다.)

이제 정리해보자. "이상적인 독자라면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할 만큼 머리가 좋겠지만, 그보다 열등한 독자는 해독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단서를 잃고 헤매며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제임슨은 이렇게 자신의 글을 읽고 또 읽도록 의도했을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인내심을 잃고 이해 자체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41쪽) 저자가 먼저 던지는 질문이지만 과연 그런 난해함이 (제임슨이 입만 열면 반복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 이런 문장을 읽고 느낄 즐거움은 '내가 이 어려운 걸 다 읽고 이해했어'라는 식의 자기만족적 즐거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비싸다!

이제 기운이 떨어져서 더 주절거리지도 못하겠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왜 제임슨인가?'의 맨 마지막 인용문까지도 오역으로 점철돼 있다. 가령, "post-traditonal daily life and its bewilderingly empirical, 'meaningless,' and contigent Umwelt"를 당신이라면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탈전통적인 일상적 삶과 그 정신없을 만큼 경험적이고 '무의미하며' 우연적인 환경세계" 정도 아닌가. 국역본은 "탈전통적 일상생활, 당혹스러울 정도로 제국주의화되고 의미가 상실되었으며 우연적인 환경"이라고 옮겨놓았다.

"현재 프로이트와 라캉, 지젝의 글 등을 읽으며 서사를 둘러싼 행동의 비밀을 이해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역자는 먼저 이러한 말실수들을 둘러싼 오역의 비밀들을 먼저 이해하려고 애를 썼으면 좋겠다...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라... 제임슨은 건너뛰란 얘기로군...

07. 02. 07.

P.S.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을 건너뛰면 재미있는 건 많다. 가령, 일반인들에겐 프레드릭보다 유명한 포르노배우 제나 제임슨은 어떤가?(사실 외설적인 오역서를 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제임슨을 검색하다 보니 학교도서관에 <프로노스타처럼 사랑하는 법>(2004)이란 책도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 제나 제임슨의 자서전이며 우리에겐 <게임>(디앤씨, 2006)으로 소개된 닐 스트라우스가 대필한 책이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지만, <포르노스타처럼 돈 버는 법>(2006)은 그 이후에 쓴 책이다. 프레드릭을 읽느니 차라리 제나를 당신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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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바로 이번주부터 정치적 무의식 세미나 시작하는데요. 번역된 제임슨의 두 책 신비평 비판서(언어의 감옥)랑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는 들춰보기는 했는데, 그렇게 '구린' 문체였다는 기억은 없는데. 정치적 무의식 걱정되네요;;
영문학도 3명과 함께 하는 거라서.. 오 마이 잉글리쉬! ㅎ

로쟈 2007-02-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명'에 미리부터 주눅들 필요는 없는 거죠. 사실 모든 문장들이 욕나오는 건 아니고 군데군데 요령부득일 따름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이나 데리다는 얼마나 평탄한 것인지요...

yoonta 2007-02-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는 왜 저런 책 번역을 로쟈님같으신 분들에게 부탁하지 않는건지 (아니면 로쟈님이 거부하시는건가?) 그런데 empirical같은건 그렇다쳐도 제임슨의 원문은 난삽하기 정말 그지없네요. 번역자가 혼동할만도 합니다.

로쟈 2007-02-0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지젝 등을 비롯해서 여러 건의 번역 청탁을 받긴 했지만, 현재 맡고 있는 일들 때문에 고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인건비 문제도 있지만). 제임슨의 경우 달리 악명이 높았겠습니까!..

yoonta 2007-02-08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 인건비?를 좀 적절하게 책정해서(로쟈님이 큰 욕심부릴분 같지도 않고^^) 청탁하면 저희같은 독자들에겐 보다 양질의 번역본을 읽어볼수있다는 혜택이 생길텐데..안타까울따름이네요.

로쟈 2007-02-0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다시피, 인문서 번역은 약간의 명예욕을 충족시켜준다는 걸 제외하면 3D업종이죠. 힘들고 대우 못 받고, 인정 못 받는. 그런 상황에서 자꾸 출간되는 오역서들이 상황이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maysoony 2007-02-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잔데요, 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을 저토록 어렵게 쓰는 제임슨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부분이니까요.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누락된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로 누락이 있었는지, 그것이 어느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확인이 필요하지만) 진심으로 사과 말씀 드립니다. 적어도 이 책이 단칼에 쓰레기 취급받을 만큼 형편없는 오역은 아니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02-1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무니 없는 부당함'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반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셨는데, 어려운 말이어서 머리 아픈 것과 말도 안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 종류가 다릅니다. (2)부주의가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 만큼'은 아니라고 하셨는데, 제가 읽은 바로는 계속 나오더군요. 그런 '부주의한' 오역들이 어느 정도 나와야지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지 기준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3)'누락된 부분'에 대해선 '실제로 누락이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하신가요? 원서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으셨다면 바로 확인되는 거 아닌가요?.. 아시다시피, 안면도 없는 처지에 '악의적인' 지적을 제가 굳이 할 필요가 있는지요? 저는 제 돈 주고 산 책의 '품질'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다 자세하고 성의있는 반박을 부탁드립니다...

cretois 2007-02-1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보아도 역자가 원서를 제대로 독해못한 케이스입니다. 절판시키거나 다시 번역하세요

로쟈 2007-02-1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어본 2장까지 오역은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성의도 없을 뿐더러 기본 독해력도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너무 많은데, 역자는 무엇을 '번역'이라고 생각하며 무엇이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2007-02-12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좋은 지적이십니다. assert가 타동사여서 목적어/목적절을 뭐라도 갖다 붙이려고 했고 사실 인용문이라 'that'이 지시형용사로 쓰일 수 있다는 건 미처 고려하지 못했네요. <정치적 무의식>의 원문을 보니까 앞문단에 process 얘기가 나옵니다. 확인해보지 않은 불찰입니다(구문분석은 잘못됐지만 그래도 번역은 틀리지 않았네요)...
 

그제 점심을 먹으며 몇 페이지 읽어본 책은 자신을 '미디어 키드'라고 지칭하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 '대중문화'를 표나게 내세우고 있어서 그 흔한 문화비평서의 한 종류쯤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실상은 진지한 미디어 리뷰들로 채워져 있다. 한데, 그 미디어에는 '글'도 포함되고 저자가 말하는 '내 유일한 미디어'가 '글쓰기'인 걸 보면 제목의 '대중문화'는 두루뭉술이라 할 만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안녕! 프란체스카>, <프렌즈> 같은 드라마들도 리뷰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고전적인' 의미에서 북리뷰나, 영화리뷰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서 이 책의 용도는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는 데 있다기보다는 다루어지고 있는 미디어-텍스트들에 대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렇게 성격을 한정하면 책의 미덕이 도드라진다. 내가 읽은 책이나 본 영화들을, 리와인드 시켜서 다시 읽고 보는 효과가 있을 뿐더러 아직 읽지 않은 책이나 보지 않은 영화들에 대한 개성있는 소개, 마치 진득하게 사귀어온 친구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해주는 듯한 정감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친구들'과 단번에 다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 책 덕분에 한 '거물급'을 다시금 상기하게끔 됐으니, 곧 <분서>의 저자 이탁오가 그이다.

'태워버려야 할 책, 그러나 영원히 태우지 못할 책'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분서>의 리뷰는 책의 맨마지막 꼭지인데, 이 배치 자체는 물론 우연이 아니겠다.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사람을 한꺼번에 쓰러뜨리고 한꺼번에 일어서게 만드는 글이었다. 가득 찬 절망을 선물하지만 가득 찬 희망을 동시에 선물하는 그런 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리지만 결국 울음과 웃음은 같은 것임을 깨닫고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글. 한마디로 병주고 약주는 글이었다. 아직 그런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런 꿈을 아직 내버리지 않고 견디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11-2쪽)고 적었는바, 바로 그 '병주고 약주는 글'이 말미에서 다루고 있는 <분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글에 대한 탐심에서 벗어나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매서운 죽비처럼 쾌감 어린 고통으로 내 뒷목을 후려친 두 스승이 바로 루쉰과 이탁오였다." 먼저, 루신: "루신의 글은 세상을 향한 그의 고독한 전투를 위한 '투창과 비수' 자체였다. 나는 루쉰의 글을 통해 글이란 자고로 무조건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미학적 허영과 결별할 수 있었다. 좋은 글이란 좋은 삶을 위한 하찮은 핑계이거나 배설물에 불과하며, 삶이라는 토대가 받쳐주지 않는 한, 한낱 글이란 삶에 맹독이 될 수도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이탁오의 <분서>: "루쉰이 글에 대한 내 오랜 낭만적 허영을 한칼에 베어냈다면, <분서>(한길사, 2004)는 건조한 철학책이 한 사람을 종일토록 울게 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글이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장르에 속할 필요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어떤 장르도 아닌 채로 글 자체의 에너지로 진검 승부하는 글쓰기. 그의 글은 일상과 현실에 대한 하루하루의 고뇌 자체가 철학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탁오의 <분서>는 철학이고자 하지 않는데도 철학이 되었고 차라리 '태워버려야 할 책'(焚書)이 되고자 몸부림쳤음에도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걸작이 되었다."(343-4쪽)

이전에 <이탁오 평전>(돌베개, 2005)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소개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분서>의 완역본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그 이전에는 <평전>의 역자가 옮긴 단권짜리 <분서>(홍익출판사 1998)가 나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듯 '온몸으로 보여주는', 리뷰 자체가 명령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글을 접하게 되어 일단 <이탁오 평전>만이라도 먼저 사두었다(<분서>를 소장하려면 목돈이 필요하다). 이런 '폐해'를 보건데, 서두에 적은 이 책의 '미덕'은 달리 '맹독'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이거 '대중문화의 숲'이 아니잖아!).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저자가 뿜어내는 '강추'의 추임새: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사람. <분서>는 앎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양이나 권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닌, 알고 죽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서러울 것 같아, 차마 멈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뿜어낸 사유의 기록이다."(345쪽) 이 정도면 가관 아닌가? 거의 투창과 비수를 들고서 '이래도 안 읽겠는가?' 심문하는 듯하다. 몇 문장이 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읽고서도 이탁오와 그의 <분서>에 대해서 모른 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아마도 모든 책과 무관한 사람이 예외일 수 있겠다). 나는 두손 다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싱어송 라이터, 한대수'씨의 추천사를 빌어서 말하자면, "정여울씨, 땅콩 베리 머치!"

07. 01. 25.  

P.S. '태워버려야 할 책'까지 집에 꽂아두면 식구들한테 더 혼날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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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2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저도 얼마전에 정여울 선배 글을 읽고 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미디어에서 희망을 찾은 선배가 너무 부럽더라고요. ㅎㅎ

로쟈 2007-01-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 대신에 제가 본 건 '분서'입니다.^^

나비80 2007-01-2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망이든 희망이든 한꺼번에 일어나게 하고 한꺼번에 쓰러뜨린다. 히야~! 그 참 기막힌데요. 로쟈님, 땅콩 베리 머치! ^^

새들처럼 2007-01-26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받았네요. 고맙습니다.^^

앨런 2007-01-2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정보 가져갑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7-01-2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맹독성' 리뷰를 저만 취하기엔 좀 억울했을 뿐입니다.^^;

로쟈 2007-01-26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눈팅이 피곤하실 때 가끔 댓글도 남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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