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의 서론을 읽고 문제가 되는 오역들을 '악의적'으로 지적한 페이퍼에 대해서 역자가 달아준 댓글이다. 역자로선 할말이 없지 않은 듯하지만 이후에 본격적인 반박을 아직 접한 바 없어서 그 '할말'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주에 나는 서론과 1장을 읽고서 이 번역서가 겉모양새와는 다르게 '오역서'라 할 만큼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페이퍼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지 모르겠다(그럼 무고죄이다!). 문제는 내가 남 헐뜯기나 좋아하는 사악한 인간이어서 빚어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어긋나서 2장부터는 아주 똑부러지게 번역을 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2장까지도 읽었다. 책의 1/3이다. 하지만 책은 나로선 오역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일부러 두통만 나도록 한' 대목들이 수두룩했다(어느 출판사의 기준으로 하면 이 1/3의 오역/오타만으로도 전부 회수한 후에 개정판과 교환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기준이 다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런 걸 지적한다고 해서 이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질 리는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한다. 오역이 좀 있다고 해서 책값이 떨어지는 경우를 나는 못봤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동네서점에서 사느라 12,500원의 책값을 다 치렀다. 누가 억울한 건가?

하지만 억울하다는데 또 어쩔 것인가? 그래서 맘을 고쳐먹기로 한다. 사실 제임슨의 소개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웬만한 오역 정도는 알아서 고쳐 읽어도 된다(제임슨 소개서들이 다 그렇다). 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오역을 들먹이는 건 '터무니 없는 부당한 악평'으로 역자나 출판사에 위해를 가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떨결에 책을 구입한 독자들에게 '친절한 로쟈씨'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오물이 좀 묻었더라도 잘 씻어내면 또 먹을 수 있듯이 약간의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더라도 교정해가면서 읽으면 '본전'은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곁들여 나처럼 원서를 갖다 놓고 같이 읽으면 원서 독해력의 향상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이 책을 구입한 몇 안되는 분들을 위한 나의 '친절'이다. 당초에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란 제목을 이 페이퍼에 달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로 고쳐달았다. 그리고 카테고리도 '지겨운 책읽기'에서 '즐거운 책읽기'로 옮겼다. 그래도 잘 보여야 이 '오역의 감옥'에서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교정을 하며 읽고자 하는 게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란 2장이다, 라고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1장 '마르크스주의자'를 먼저 읽어야 한다(젠장). 원제는 'Marxist Contexts'이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기 전에 워밍업부터 하자는 얘기겠다. 왜냐구? "제임슨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며, 그의 작업 역시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제임슨의 대표적인 저작이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와 형식>(1971)이다. 우리에겐 <변증법적 문학이론이 전개>(창비, 1984)라고 소개된 저작 말이다.

참고로, 앨피출판사에서 나온 초기의 '크리티컬 씽커즈'와는 달리 이번에 나온 <제임슨>이나 <데리다>에는 참고문헌에 국내 번역서 목록이 다 빠졌다. 방침이 바뀐 모양이지만 국역본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조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뭐 이런 건 내 알 바가 아닌지도).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자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개념으로 꼽히는 것은 아마도 '총체성'일 것이다. 이 용어를 애용함으로써 '헤겔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다."(48쪽). 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 나왔다. 총체성. 이거 강조 표시다(미리 말해두자면, 제임슨에게서 또 다른 핵심개념 두 가지는 '소외'와 '사물화'이다. 이거면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다 정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 애덤 로버츠가 강조하는 것은 '총체성'이란 말을 애용하는 덕분에 제임슨이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를 사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럼 종류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헤겔주의에 반대하는, 그러니까 목적론적인 '총체성'을 거부하는 알튀세르주의도 있다(번역서는 시종일관 '알튀세'라고 표기했지만 여기서는 '알튀세르'라고 해두겠다).이 '알튀세리앵'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체화 작용을 우리를 억압하는 힘으로 간주한다."

그런 배경하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 "어쨌든 제임슨을, 알튀세적 접근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48쪽) 원문은 "It is worth noting, however, that Jameson is usually seen as a Hegelian Marxist, an inheritor of traditions of Lukacs and Adorno and more or less hostile to an Althusserian approach."(16쪽) 

보면 알겠지만, 원문 어디에도 '올바르지 않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제임슨이 일반적으론 알튀세르적 접근법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나 아드르노의 전통을 이어받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된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겠다."가 나의 번역이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견해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으며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알튀세르 진영으로 많이 끌고가고자 하는 게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적해두어야겠다'를 '올바르지 않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게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르크스에 관한 기본 초식들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세계는 변혁되어야만 한다." 이거 길게 따라갈 필요 없겠다. 넘어간다. 다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인용한 대목(이거 방대한 분량의 정전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완역돼 있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1>(청년사, 1998)이 전부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번역은 왜 안 이루어지는지? 신만이 아실 거다. 나도 두꺼운 영역본만 갖고 있다).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52쪽)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men...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17쪽)

부분역이긴 하나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나도 갖고 있는 듯한데 여하튼 지금은 없다(영역본도 박스에나 들어가 있겠다). 해서 그냥 보면, 나는 아무래도 표시한 문장이 껄끄럽다. 물론 movements'를 '활동'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한 감각이라고 생각되지만, 'treat A as B'(A를 B로 간주하다)라는 구문이 어떻게 해서 'B를 A로 삼는다'가 되는지 이해불능이다. 독어본에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적 감각은 "공산주의는 처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산을 인간의 생산물로 간주한다." 정도로 읽는다('premise'는 물론 '전제'란 뜻이지만 복수형일 경우 '토지'란 뜻도 갖는다).

하긴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도 좋은 말이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도 대차는 없겠다. 'esssntially'도 여기선 '본질적으로'란 뜻 같지만 '필수적으로'라고 옮긴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에잇,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몇 줄 내려가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관계로 결정된다고 믿었다."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human life'의 번역이라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뭐 의역이라는 게 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정리성 멘트: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둘러싼 경쟁, 혹은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를 창출하는 근원인 공장과 자원 등의 생산수단을 둘러썬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3쪽)

 

 

 

 

 

이어지는 내용은 알튀세르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을 어떻게 수정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 등에 관한 내용들 역시 상식에 속하므로 넘어간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입장이 비평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이론은, 문학과 문학비평 분야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1930년대 초반에 이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문화 전체를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57쪽)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한 문장들인데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Culture, says Jameson, is 'to be thought of as something more and other than... the false consciousness, that we associate with the word idelogy', and is instead something that possesses an 'uneasy existence, an uncertain status'."(21쪽)

일차적인 문제는 that이란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역자가 'false consciousness'가 아니라 'culture'로 잘못본 데 있다(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해서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를 다시 옮기면,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연상하게 되는 '허위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그걸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정도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허위의식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론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수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 것. 번역문의 뒷부분에서 '억압적인 힘'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마저 옮기면, "문화는 (그러한 허위의식) 대신에 '뭔가 불안한 존재성, 뭔가 불확실한 지위'를 갖는 어떤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단선적인 인과적 관계로 이해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사회의 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전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루이 알튀세이다."(59쪽) 여기서 '새로운 전제'는 'newer development'의 번역이다. 사전적 의미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역자의 자유자재로움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알튀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분으로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치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시기인 196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59쪽) 원문은 "Althusser started writing at a time, the early 1960s, when the excesses of Stalinist dictatorship in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 had done much to discredit Marxism as a political philosophy."(22쪽)

알튀세르의 커리어에 관한 대목인데,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을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목으로"라고 옮긴 건 아쉽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라는 소련에서" 정도의 뜻이기에(국역본은 강조할 대목들을 상당수 누락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이면 탈스탈린화 바람이 불던 때이다.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린 시기는 20년대 후반부터(특히 3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이다. 여하튼 그 여파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가 이미 땅에 떨어졌던 시기에 알튀세르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재검토한 뒤 총체성 개념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총체성은 전체적(*전체성) 혹은 전부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방식이다. 다양한 소논문과 비평집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적 유산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9쪽) 대신에 "알튀세에게 '역사는 (종결이나 목적을 의미하는) 텔로스 없는 과정이자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70-1쪽)

하지만, 이러한 알튀세르의 기획(project; 국역본에서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의 정치사상(political ideas; 국역본에서는 '정치적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세계(materal world; 국역본에서는 '물질세계')에 적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로선 주류였기 때문에 잘 수용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만, 조금 내용을 챙겨두자면, "1965년에 쓴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는 비록 초기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후기 마르크스는 헤겔을 극복하여 총체성과 관련한 위험한 논의와 단절했다며 진정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알튀세르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마르크스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의 이론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단절'을 발견할 수 있다. 전기의 헤겔주의자 마르크스와, 초기 저작의 위험한 헤겔주의를 청산한 후기의 과학적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이다."(63쪽)

"당연히 , 알튀세는 '사회질서'나 '전체 체계'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알튀세는 사회가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라기보다는, 다양한 요소가 상호연관된 더 복합적인 체계, 다시 말해 탈중심적 구조임을 강조한다. '사회형식' 등 첨단용어를 사용하여, 알튀세는 총체성의 '해체'를 달성하고자 한다."(63-4쪽) 

알튀세르에 관한 ABC의 나열인데, 눈길을 끄는 건 '사회형식'이라는 첨단용어(!)이다. '첨단용어'라는 말 자체가 원문에는 없을 뿐더러 이게 'social formation'의 번역이다! '사회구성체' 말이다(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이 재출간된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바로 그 '사회구성체', 줄여서 '사구체' 말이다)! 내가 요즘 사회과학서적을 좀 등한히 했기에 그간에 '사회구성체론'이 '사회형식론'이라는 '첨단용어'로 옷을 갈아입었는지는 잘 모르겠다(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건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무지의 소치이다...  

젠장,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즐거운 책읽기'를 계속하고 싶지만 내게도 '현실원칙'이란 게 있다. 먹고 살아야 한다. 1장에 남아있는 몇 페이지는 건너뛰고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2장은 들어가지도 못했군). "거칠게 말해서, 예술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요소들은 해체되어야 하지만, 알튀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한 그것을 재구축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재구축이 여전히 모순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경제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75쪽)

이 결론부분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이다. 아무리 자유자재로운 정신의 번역이라손 치더라도 'political sense'를 '경제적 의미'로 번역할 수 있나? 정치, 그거 따지고 보면 다 경제야, 란 계산이 깔린 거라면, 거의 대붕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나로선 이렇게 덧붙일 밖에: "번역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윤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참새 머리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로고...

07. 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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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7-02-18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스틴 2007-02-2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에 대한 비판을 찾아 읽어보니, 번역이 나쁘다고만 하고 왜 어떻게 나쁜지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네요. 사실 이런 비판이 최악의 비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말을 돌리지 마시고, 로쟈 님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qualia 2007-02-2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스 님, 트랜스 님의 위와 같은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사태의 전말을 모르시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말을 돌린 건, 제가 아닙니다. 첫글부터 객관적으로 읽어보세요. 심정적인/주관적인 해석은 미리부터 결론을 내리고 읽었다는 오해를 사기가 쉽습니다. (제가 오해이길 바랍니다.)

"모든 논의를 원론적인 논쟁의 자세로 되돌리는 것은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그럴 바에야 왜 문제제기를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 트랜스 님의 윗말은 앞과 뒤가 연결이 전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 공정한/객관적인/생산적인 논쟁이 되려면, 오히려 원론부터 확실히 하고 가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주관에 끼워맞춘 원론(그런 것도 원론이라면)을 가지고 토론을 한다면, 아무리 토론 할애비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죠.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냥 까짓 것 원론 따위는 뛰어넘을까요?

"그럴 바에야"라뇨? 어디 qualia 댓글에 그런 의도가 처음부터 표나게 드러나보이던가요? 자세히 증거를 대주시죠? 트랜스 님, 초장부터 논리의 비약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이럴 바에야, 저는 댓글조차 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제기를 왜 했느냐구요? 왜 한 게 아니라, 문제점이 보였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애초에 제 문제제기는 로쟈 님의 조롱조 비판글과, 남의 오류를 비판하는 마당에 자기자신까지 오류를 겹으로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에 대해서, 로쟈 님이 피장파장식 반론을 qualia한테 가해 오면서,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거듭 저지르셨구요. 그런 오류들을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죠.

만약에 위의 오류에 대해서 피차 간에 매듭이 있었다면, 논의는 좀더 실질적인/생산적인 오역 논쟁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왜 qualia가 그렇게 <괴델, 에셔, 바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 구체적인 오역 사례는 제시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qualia는 로쟈 님 번역 비판글에서 무엇이 그렇게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보는가 하는 점, 로쟈 님은 오역 사례의 교정에서 어떤 실수를 저지르시는가 하는 점... 따위를 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논쟁이 제자리 맴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몹시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qualia 2007-02-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님, 푸하 님의 앞 물음에 대해서도 답변드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더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제 견해를 확실히 할 것입니다. 여기는 아주 시끄럽고 담배연기 매캐한 피시방이기 때문에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는군요. 글을 올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로쟈 2007-02-20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확인하지만, "논쟁 상대자가 원론까지 부정한다면, 당연히 그 점을 따지고 들어가야지요. 상대방이 원론까지 부정하고 중언부언 자기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논쟁은 제자리 맴맴이니까요"의 '상대자'가 접니까? 아니면 이것도 "저는 결코 로쟈 님을 지목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에 해당하는 건가요?..

qualia 2007-02-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물으신 것에, 트랜스 님처럼 최악의 비판이라고 강력 비난한 것에, 푸하 님이 근거를 대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 "학실하게" 답하겠습니다. 로쟈 님과 푸하 님, 트랜스 님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qualia 너는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그렇게 (근거도 없이) 강력하게 비판만 하던데, 그러는 네가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이냐?" 특히 로쟈 님은 이러한 심사를 밑에 깔고 다음과 같이 qualia에게 우회적으로 역질문합니다.

로쟈 님 → "저는 부러 냉소적이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비평' 운운할 생각은 없습니다. 번역에서 오역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가 어디까지 관대해야 할까요?(그냥 알아서 원서대조해가며 감지덕지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렇게 해야 할까요? "곽상순님이 번역한 <프레드릭 제임슨>은 완전한 오역의 종합판입이다. 이런 불량 번역판을 찍어낸 출판사와 번역자는 크게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번역자 곽상순님과 도서출판 앨피 측에게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푸하 님은, 로쟈 님의 위 댓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재논박/재재논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되묻습니다.

푸하 님 → "qualia 님, '토론의 공방에서 애초에 문제가 됐던 사안에 대해 그렇다/아니다 뭐라고 상대방 분께서 표명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아니다의 사항이 뭔지 궁금합니다. 로쟈 님의 논리적 허점을 논박하고, 재설명하고, 재재설명했는데도,... 논리의 기본 단위는 주장보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짜증나실수도 있겠지만, 님의 주장 - 근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진술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위 로쟈 님 대응에서 분명한 것은 "피장파장(너도 역시you, too)" 식의 되받아치기입니다. 즉 qualia가 맨처음 로쟈 님의 번역비판에서 지나치게 냉소적인 "조롱조 문체"를 지적하고 나오자 → 로쟈 님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해야 할까요?" 하고 되묻고는 → 곧장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에서 거두절미한 한 대목을 따와, → 자기자신의 문맥 속에 절묘하게 끼워넣습니다. 즉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제3의 사안, 즉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건에 대한 qualia의 언급을, 마치 qualia의 입을 빌어 로쟈 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둔갑시켜 역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것은 qualia 자신의 말로 qualia 자신을 논박해 qualia의 자기모순/자가당착을 폭로하겠다는 수(사)법입니다. 즉, 나 로쟈는 이렇게 했는데, 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느냐? 그럼 결국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피장파장인데, 뭔 말이 그리 많으냐? 너도 할말 없지? 뭐 이런 식의 대응입니다.

허나, 이런 피장파장식 되받아치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자신의 논리적 정당성/타당성/근거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역증명하는 자기파기적self-defeating 결과로 낙착된다는 게 기본적/초보논리적 사실이죠. 아니라면, 초보논리적 명제까지 부정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택일해서 응답할 수 있는지요?

잘 아시다시피, 너도 잘못하고 있으니 내 잘못은 그리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의 강변은 남의 잘못을 들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초보적인 어거지 수법이라는 것, 아시죠? 이게 아니라면, 대체 뭐하러, 애초에 사안도 아니었던, 엉뚱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을 인용하는 건가요? 더군다나,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비판 문맥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비판 문맥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유추적으로 인용해 물귀신 작전을 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따로 곧 할 것입니다.

푸하 님, "문제는 님에게 근거의 형식을 갖추는 진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위에서와 같이 qualia가 누차 답변하고 재답변하고 재재답변했는데도, 근거의 형식이 없는 건가요? 푸하 님은 qualia가 방금 설명한 로쟈 님의 의중이 안 보입니까? 과연 qualia가 말한 초보논리 중 비논리/반논리/무논리적인 점이 어디 드러나 보이는가요? 위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하 님이 인정하기 어렵다면, 대체 푸하 님이 말하는 근거의 형식을 갖춘 진술이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다시 부언하면, 로쟈 님 같은 분이라면, 똑같은 글귀/낱말이라도 그것만 달랑 떼어내서 원글과는 전혀 다른 문맥contexts 속에 가져다 놓을 경우, 미묘한 풍자/빈정댐/희화화의 극적인 효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는 것이죠. 본능적인/원초적인 글감각/풍자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의 글에는 곳곳에서 이런 예민한 심리적 촉각/글감각이 반짝반짝 빛을 발합니다. 허나, 위 댓글들에서와 같은 예, 다시 말해 피장파장식 인용, 비린내 피우는 오류red herring fallacy(논점 회피의 오류),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 등등의 건에서는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강변하셔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글쓰기의 금과옥조를 순간적으로 망각하신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로쟈 님의 qualia에 대한 비난이 이러한 오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인터넷 대중에게 버젓한 진실로 전파된다면, 애먼 사람 하나(나 그 이상)의 양심을 손쉽게 죽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누명을 뒤집어쓴 qualia가 논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평범한 진리가 때로 사람을 살리고 죽입니다.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이 위와 같은 왜곡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부당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부당한, 초보논리에도 닿지 않는, 잘못된 비난을 받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qualia 2007-02-21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괴델, 에셔, 바흐>의 엉터리 번역은 이미 출판계/번역계에서 공인된 사실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박사학위 논문까지 있습니다.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그리고 번역가 이덕하 님께서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이 얼마나 심각한 엉터리 번역판인지 제법 상세한 영한대역식 대조를 해가면서 비판한 글을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셨습니다. "비평고원"(cafe.daum.net/9876)에 들어가보시면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글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비판글에 다음과 같은 댓글까지 달려 있죠.

국역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안 좋군요... 06.07.18 19:22
 
첫번째 이덕하님의 오역지적부분을 읽고 할말을 잃었습니다. -_- 번역본을 사놓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군요. 어서 영어본이나 구해놔야겠습니다. 06.07.28 01:42

그래서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비판이 어떠한 전후 문맥/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그 비판의 주된 초점이 무엇인지, 적어도 로쟈 님은 "학실히" 아실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러한 공인된 정황/사실에 근거하고, 심지어 로쟈 님까지 이미 알고 계시는, qualia의 비판 문맥을 로쟈 님이 "7-8년쯤 기다려보고"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겠다는 투로 조롱하며 전혀 엉뚱한 문맥으로 바꿔치기한 것은, 말그대로 qualia의 정당한 로쟈 비판에 대한 로쟈 님의 피장파장식 민감반응이라는 것이죠. 그 대응의 수사법은 말할 나위도 없이 빈정대기에 불과한 것이죠. 즉 개인적 감정이 담뿍 실린 대응이라는 것이죠. 즉 인신공격적 요소까지 있다는 것이죠. 즉 그 말의 진짜 의도는 진정한 번역비판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인 즉슨, 인용의 형식을 빌린 상대방 조롱에 있다는 것이죠. 부정하시겠습니까? 이것을 저는 누차 지적했고, 재지적했고, 재재지적했고, 그 가짜 진정성에 대해 그렇다/아니다로 로쟈 님이 표명하도록 (간접적으로) 묻고 물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qualia를 비아냥거렸다고 속시원히 토로하셨다면, 이렇게까지 소모적인 논쟁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느 근엄한 학자님이 제정신으로,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하라는 어떤 정신나간 허수아비"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하고 운운할까요? 이게 실없는 소리가 아니고 뭡니까? 아니라면, 그런 우스꽝스런 개그 코미디를, 그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진짜로 하셨다는 건가요? 게다가, "님(즉 qualia)의 충고"라고 대놓고 말씀하시던데, 아니 어떤 삐에로가 그런 "헷소리"를 로쟈 님께 일러주던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의법스런 질문에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어떻게 답하실 건가요? 요컨대 조롱이냐/말씀이냐 중에 무엇을 택일해 답변하겠습니까? 제발, 토 달며 또 회피하지 마시길!

분명히 하기 위해, 로쟈 님의 (에둘러 피하기식 = 역질문식) 재질문 기법(?)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드리죠. 푸하 님도 yoonta 님도 우회적 역질문 수(사)법을 편들면서 오히려 qualia를 누차누차 역공박했으니까요. 로쟈 님 왈,

"qualia님/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오역서가 발견되면 처음엔 정중하고 따뜻하게 예의를 갖춰서 오역사항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역자나 출판사에 알리고 7-8년 정도 수정/개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런 개과의 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다시 신랄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한다, 가 되는 건가요? 님의 불만은 저의 비평방식인가요, 아니면 타이밍인가요?(둘다일수도 있겠군요.) 한편,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해서 오역에 대한 비판은 있어 왔지만 그 상세한 내용을 저로선 접할 수 없었습니다(역자/출판사쪽에만 알리신 건가요?).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네요(님이 비공개로 돌리셨으니). 오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경력으로 치자면 저도 그 정도는 됩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위 글에 대한 qualia의 논박에 대해, 로쟈 님은 ""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이라고 제가 토를 달았습니다" 하고 그야말로 "토"의 "토"를 거듭 다시더군요.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토에 불과하다고 발뺌하시면서, 그 토에 불과한 가정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오역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7-8년쯤 기다려보고 적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절판되지 않는다면..." 운운하는 로쟈 님의 "결론/결심"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로쟈 님은 정리도 틀린 정리를 가지고 가정을 한 다음 → 그 그릇된 가정을 전제삼아 → 분명히 qualia를 빈정대는 결론으로 슬그머니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게 옳은 논리적 말법입니까? 이런 명백한 바꿔치기 지적에 대해 솔직하고 정면돌파적인 응답/인정이나 반박/부정을 로쟈 님과 yoonta 님과 푸하 님은 한 번이라도 했는가요? 그러기는커녕 (푸하 님의 경우, 바꿔치기 이전까지의 "토"만 전략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논리적 술수는 애써 숨긴 채), 거꾸로 qualia의 요점이 뭐냐고 자꾸 되묻는 역질문 전략을 집요하게 펴지 않았습니까(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슬쩍 회피하는 것입니다. 뭐랄까, 일종의 "비린내 피우는 오류(주의 전환의 오류)red herring fallacy"라고나 할까요. 뻔한 내용을 자꾸 반복 재반복해 역질문 하시니, 그에 대한 논박 재논박도 매번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로쟈 님이 위와 같이 수상한 심리적 비웃음을 밑에 깔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아무런 혐의점도 없는 논쟁의 대상자한테 인신공격적인 분위기를 뒤집어씌우면, 로쟈 님같이 막강한 필력을 휘두르는 분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수많은 인터넷 대중에게 그 대상자는 순전한 "비아냥거리"나 "비열한 놈"으로 낙인찍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먼 사람 웃음가마리로 만드는 거 손가락 하나 까딱입니다. 게다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가 필요이상으로 조롱조인 로쟈 님의 비난 때문에 입었을 감정의 상처를 한번 생각해 보셨나요? 로쟈 님 말씀대로 "충고를 받아들여서" 약으로 쓸 만한 진정성 담긴 비판은 진정코 없는 건가요? 물론 아니겠지요.

그럼, 로쟈 님과 푸하 님과 트랜스 님은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을 꼬투리잡던데, qualia는 이에 대해 뭐라고 답변할 건가? 거듭거듭 누차누차 말했듯이,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은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과 괘를 달리합니다. 즉, qualia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의 주된 초점은, qualia가 최초의 댓글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구체적인 번역내용이라기보다는 "번역가의 (독자/원저자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마음가짐과 (번역에 대한 사명감/책임감/정성/엄밀성 따위의) 번역정신"입니다.

이미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의 심각한 문제점이 만천하에 밝혀진 마당에(이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까지 나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게다가 로쟈 님과 같은 번역비판가/번역비평가 분들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판국에, 또 다시 구체적인 오역 사례를 일일이 꼬집어내는 것보다는, 비판의 다른 측면 즉, 수많은 비판이 직접 해당 번역자한테  전달됐는데도, 그 문제의 심각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명확하게 드러났는데도(예컨대, 로쟈 님이 주장하시듯 독자들의 돈낭비 시간낭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도), 번역자가 자신의 오역을 인지하고 충분히 검토/반성하고 구체적 소명이나 대책을 내놓을 시점이 훨씬 지났는데도, 무대책/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는 번역자의 비양심적 작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이런 비양심적/반지식인적 행태야말로 제가 정면비판한 것입니다. 엄청난 지식의 부도 사태가 출판계/대학계/지식계에서 햇볕 쨍쨍하니 벌어지고 있는데도, 나몰라라식으로 동반책임을 유기하며 무책임/비양심/반윤리/반지식인적 행태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작금의 비겁한 지식인 세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게다가 난센스의 극치는 서울대(서울대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명예감투/막강권력/상품가치로 작용하는지 아시죠?)까지 오역의 종합판 <괴델, 에셔, 바흐>를 100권의 추천도서로 앞뒤안팎 내막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강권(서울대라는 권력은 사회적 강권아닌 강권이라 할 만하다!)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TV, 책을 말하다"보다 서울대 추천도서 100권이 더 강력하고 더 지속적인 광고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저런 무책임한 번역자/출판사의 책을 국민들한테 버젓히 권할 수 있는가? 그동안 몰랐다고 변명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소위 한국 최고라는 자타의 공인 아래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할 서울대가 이 모양이니, 희대의 세계적 과학사기꾼을 탄생시킨 이력에 <괴델, 에셔, 바흐> 100권 추천건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이런 정황/사실/문맥을 알고도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동급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동급으로 다루더라도 "동급최강" <괴델, 에셔, 바흐>의 번역자/출판사를 따라올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알라딘에 떠있는 번역자의 변명을 한번 들어봅시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죠.

번역의 부족함에 대하여 따끔하게 꼬집어 주신 독자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일차적으로 5년전에 도전한 이 번역에서 저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지만, 부족한 곳이 너무 많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번역하면서 도중에 그만 두려는 생각을 한 두번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 이전에도 수 많은 번역자들이 포기를 했었고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번역자입니다.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무모하게 번역한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부족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을 차후에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로 거듭 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만 번역자 나름대로의 위안은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 동안 번역의 오류를 꼼꼼이 지적해 주신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어판과 대조하면서 읽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2003년 11월 26일 알라딘에 보내주신 작가코멘트) - 박여성(옮긴이)

위 옮긴이 말은 겉으로는 반성하고 있는 듯합니다. 반성하는 사람한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것이 과연 진정한 반성일까요? 혹 반성의 형태를 빈 변명은 아닐까요? 그러나 반성의 진정성은 번지르르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조치에 있습니다. 게다가 위 글은 진정한 반성보다는 변명과 합리화에 기울어 있습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을 한국어로 어느 정도나마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데 만족했"다는 둥,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되지만 번역자는 자신의 번역으로 평생 칼도마위에 오른다는 걸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입장"이라는 둥, "읽히지도 않고 인구에 회자되는 신비의 원서보다는 과감하게 번역을 해서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라는 둥, "저도 다른 번역자들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저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애정과 격려가 있을 때 담론은 생산적이 되지만,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라는 둥, 실로 무책임하고 오만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해당 번역자는 도대체 독자들을 뭘로 보기에, 저런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는가?

<괴델, 에셔, 바흐>의 원저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형태의 책이라고? 독자는 읽기 싫으면 책을 닫으면 그만이라고? 신비의 원서를 과감하게 번역해서 (독자를 시험에 들게 하고) 질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다른 번역자의 글을 후련하게 비난하고 싶지만 자기는 번역자라는 재귀준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고?

이에 대해 일일이 타박을 놓기는커녕 번역자의 궤변에 기가 질려 저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재귀준거의 틀 운운하는 데는 헛웃음밖에...―,.― (사족이지만, self-reference는 괴델/호프스태터 문맥에서는 자기지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를 두고 재귀준거라고? 도대체 그런 개념으로 어떻게 <괴델, 에셔, 바흐>의 복잡한 논증을 읽어나갔는지?)

이덕하 님의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 비판 일부를 인용해보죠.

호프스태터가 쓴 <한국어판에 부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책의 번역자인 박여성 교수의 여러 해에 걸친 정성스런 번역은 독자들의 부담을 한결 덜어줄 것이며, 한국어로 정착된 독자적인 GEB의 운명을 짊어지고 책읽기의 색다른 묘미를 선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xix) 

<역자 후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부분의 번역판을 호프스태터 교수가 감수했듯이, 그는 한국어판에서도 검증을 요구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 책의 가치와 번역의 엄정성을 위해서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984) 

위에 인용된 저자와 역자의 말은 이 책의 번역이 양호함을 암시한다. 이런 식 과대포장은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하필이면 14<TNT 및 그것과 연관된 체계들의 형식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비판한 이유가 있다. 14장은 어떤 면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14장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의 증명이 완결되는 부분이며 이 정리는 이 책의 핵심 테마다. 이 정리를 이해하지 않고 이 책을 이해하려 한다면 수박 겉핥기를 넘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번역서로는 골치아픈 이 책의 핵심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아래의 구체적인 비판이 이런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28(영어판 23) 분량의 번역문에서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한 오역만 76개다.

문제의 내막이 바로 위와 같습니다. 더 중언부언할 것 없이, 문제의 심각성이 저 정도라면, 번역자와 출판사는 문제의 오역판을 당장이라도 전량 회수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더는 서점에 깔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번역자 변명에도 나와 있듯이  "개정 번역하여 진일보한 명실상부한 GEB" 번역판으로 내기로 하였다면, 일차적인 조치가 뭔지는 깨달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기는커녕 번역자와 출판사는 오역 문제가 불거지고 비난이 들끓고 있는 와중에서 오히려 1만 얼마하던 책값을 올려 상/하권 도합 4만원에 계속 출하를 하고 있습니다. 책값낭비, 돈낭비, 시간낭비를 결부시켜 표나게 번역판의 오역을 지적하시는 로쟈 님은 이런 후안무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보다 더 심각한 게 독자들을 엉터리 번역, 잘못된 지식으로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 엄청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와 같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책임회피적 발언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반지식인적 행태는 어떻구요?

그런데 이 엉터리 번역판과 번역자/출판사의 엉터리 양식/양심에 놀아나며, 사정/내막도 모르는 순수한 독자들은 <괴델, 에셔, 바흐>를 놓고 자기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그 책의 심오함과 난해함에 경탄하며 금쪽같은 돈을 들여 금쪽보다 더 귀한 시간을 헛되어 소진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 오히려 비리의 몸통은 보호받고 내부고발자는 철창 가는 게 당연한 대한민국, 양심가는 바보등신 취급받고 사기꾼은 거들먹거리며 사회 유지나 지도층으로 존경받는 대한민국, 이런 따위로 뒤집힌 나라에서는 <괴델, 에셔, 바흐> 오역쯤이야 아무런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할 것입니다. 젠장,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만수산 드렁칡하고 살죠, 뭐... 이렇게 하면 됩니까?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까닭으로 qualia의 <괴델, 에셔, 비판> 번역판 비판과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판 비판은 그 정황과 문맥과 초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을 가지고 qualia를 걸고 넘어진다면, 그것처럼 유치하고 우스꽝스런 꼬투리가 어딨을까요? 그러니 로쟈 님이 <괴델, 에셔, 바흐> 번역판에 대해 qualia가 비판한 것을 가지고 qualia를 넌지시 조롱/비난한 것은 그릇된 유추 논증의 오류에다 피장파장의 오류에다 비린내 피우는 오류에다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까지 매우 복합적인 오류를 저지르신 것이 됩니다. 이런 오류들을 아예 못 보시거나 애써 외면하고 역공을 펼치신 yoonta 님, 푸하 님, 트랜스 님, 모두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셨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 줄 압니다.

트랜스 님, 비판이 추상같기에 이렇게 길게 지겨운 얘기를 했는데, 답변 됐는지요? 로쟈 님, 푸하 님 qualia의 답변에 지겹지 않으셨는지요? qualia도 사실 이런 뻔한 얘기 하기 싫습니다.


로쟈 2007-02-2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는 <괴델, 에셔, 바흐>의 오역 상태와 그 심각성을 qualia님이 잘 아시는다는 것이겠네요. 하니 다른 번역서들은 같이 놓고 비교하면 안된다? qualia님이 모르시는 건 그만한 오역서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과연 어딨을까요? 이런 블랙 코미디를 보고도 못 본 척 직무유기하는 한국의 고상한 지식인들처럼 시큰둥하고 비겁한 종족이 또 어딨을까요?"라고 흥분하시지만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 경우에도 오래전부터 해온 일입니다(<괴델, 에셔, 바흐>만이 문제라면 한국사회를 들먹일 일도 없습니다.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그래서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2007-02-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 논리학 타령만 하지 마시고 언어의 경제학도 고려하시길

qualia 답변 → 언어의 경제학 지적은 받아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qualia 자신도 언어의 경제학에 신경써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죠.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로쟈 님 → 제가 드린 질문은 qualia님이 '따뜻한 비평' 운운하며 문제삼는 게 제 비판의 방식인가 타이밍인가 하는 겁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① 비판의 방식: → qualia가 최초 댓글에서 문제삼은 것 중 하나는 바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번역자를 로쟈 님이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비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첫 댓글에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못 읽으셨다면 다시 찾아 읽어보시죠. 또 하나는 로쟈 님의 번역 비판에 도사린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제 지적이 옳지 않다면, 증거를 들어서 역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qualia는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로쟈 님이 항상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판의 타이밍: → 이에 대한 답변도 이미 드렸습니다. 7-8년이니 뭐니 하는 숫자놀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취지로 여러 차례 답변드렸습니다. 소위 비판의 타이밍은 qualia의 비판 항목이 결코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그럼 좀 더 확실하게 답변드리죠. 비판의 타이밍이 1년이냐, 2년이냐, [...], 7-8년이냐 하는 장단의 문제만 따질 경우,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놀음이고 꼬투리잡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단어조차 로쟈 님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맞죠? qualia는 비판의 타이밍을 결코 문제삼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문제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다고요? 해당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 게다가 둘 사이에 비판의 과정에서 갈등/상호불신/인신공격이 뜻하지 않게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런 것 따위도 얼마든지 이성적/생산적/상호존중적인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로쟈 님의 지나친 조롱조 문체는 상호존중적 대화를 이끌어내기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제 비판의 최초 동기였고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다차원적인 복잡다단한 절차와 과정을 어떻게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단순화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문제는 이런 점들을 로쟈 님이 더 잘 아시면서, 자꾸 비판의 타이밍이라는 지극히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을 들고나와 qualia에게 들이대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qualia의 비판글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로쟈 님이 그렇게 읽어들이셨다고 끝까지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qualia의 표현능력 부족으로 알고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변은 앞으로 포기하겠습니다. qualia의 이 포기를 로쟈 님이나 다른 분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도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로쟈 님 → 다시 읽어보니까 qualia님의 입장은 저와 좀 다르군요. "진짜 문제는 오역을 확인한 다음입니다. 번역가가 어떤 마음가짐을, 어떤 번역정신을 보여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오역은 어차피 불가피하므로 그 이후가 문제이다?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인데, 무엇이 '오독'이었나요? 뭐가 문제입니까?

qualia 답변 → 제 생각에 로쟈 님은 너무 형식적이고 단선적인 시각으로 번역비판 대 번역수정 절차의 평면적 도식을 qualia의 입장이라고 들이대시는 것은 아닙니까? 로쟈 님 왈, "즉, 번역가가 그걸 반성하고 고치느냐, 고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얼마간 반성의 시간을 주고 교정본을 내는지 주시한 다음에 비평을 가한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이미 제 식으로 요약정리한 내용"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qualia의 입장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로쟈 님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타이밍과 직결된 요약이군요? 맞죠? qualia의 주장은 그런 형식적/단선적/평면적/도식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디 번역비평가와 독자와 번역자와 출판계 간의 의견교환 관계가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단순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qualia는, 이 점에 대해서 로쟈 님도 분명 동의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결국 로쟈 님과 qualia의 궁극적인 견해는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qualia는 로쟈 님의 기본적인 비판정신에는 모두 동의/동감합니다.

혹시 제 답변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콕 찍어서 다시 질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로쟈 님은 qualia의 질문에 대해서 한 번도 답변을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굳이 하시지 않겠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로쟈 님과 댓글 공방을 벌이며 다소 날것에 가까운 표현을 해서, 로쟈 님께 의도하지 않았던 비례를 저질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qualia가 깝죽댄다고 해도 로쟈 님 발꿈치나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댓글 공방 이전부터나 공방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로쟈 님께 느꼈던 첫인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적어도 논쟁의 객관적 자세와 개인적 감정 사이의 엄정한 구별쯤은 항상 지키려고 노력했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진리와 양심과 비판정신만은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챙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본의 아니게 로쟈 님께 누를 끼친 데 대해 마음으로 사과드립니다.

2007-02-21 16:06

 


qualia 2007-02-22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trawalk 님,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합니다. extrawalk 님의 의견은 extrawalk 님의 자유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증거를 대면서 비판했으면, qualia가 받아들이기에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extrawalk 님이 qualia를 비판하면서, 어느 정도 객관적이었고, 어느 정도 공정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여기서 qualia의 개인적 의견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뚝 떨어져 있는 제3자만이 어느 정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평가할 수 있겠죠.

extrawalk 님 → 애초에 누가 먼저 말꼬리를 잡고 토를 단 건지 저로서는 참 의아스럽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의 맨처음 댓글은 로쟈 님의 비꼬기식 비판 방식과 오역을 비판하는 번역비평가 자신의 치명적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말꼬리를 잡은 것이라고 extrawalk 님이 주장하신다면, 그런 extrawalk 님의 의견 존중하겠습니다.

extrawalk 님 → 로쟈님의 이번 페이퍼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qualia님께서 처음부터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던가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위 qualia님께서 남기신 댓글의 문맥을 살펴보면 결국 "비평이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에 다름 아닌데, 이거 너무 맥빠지는 얘기 아닌가요. 다시 말해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말하고자 했던 동기, 핵심, 논점 모두 다 qualia의 최초 댓글에 들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지켜보셨다는 분이라면 어떻게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지요? extrawalk 님같이 요약할 수 있는 분도 있구나 하고 저는 그렇게 이해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extrawalk 님의 요약은 빗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의 요점은 바로 윗글, 즉 로쟈 님께 드리는 답글에 더 선명하게 나와 있으니 정확하게 읽고 반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사실에 대해서만 비판하시길 바랍니다.

extrawalk 님 → 상대방의 글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인데,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습니다.

qualia 답변 → 제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qualia는 어디서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 하고 제법 준엄하게 충고하시는데요. 로쟈 님은 학생(이나 국민)을 가르치는 분인데, 게다가 수많은 누리꾼들이 로쟈 님의 글을 읽고/퍼가고/참고하는데, 그런 분이 저지르는 오류를 목도하고도, 가만히 못 본 척 있으라 이거군요? 저는 제 스승님한테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받아들인다 해도 이 점만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extrawalk 님 → qualia님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지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너무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어떤 사안을 스스로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고 그러시지 말기 바랍니다.

qualia 답변 → qualia가 자중지란에 빠졌다고 하셨는데, 그 구체적 증거를 들어서 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떤 허점에 빠졌는지 날카롭게 증명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저는 저의 허점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강력하게 비판해주시는 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분석도 없이,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선입견이 스민 인상비평이나 감정적 편견만 내세우는 비난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견도 있구나 하고 참고만 할 뿐입니다. qualia가 무엇을 복잡하게 꼬았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비판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qualia가 처음부터 extrawalk 님식으로 아무런 논증절차도 없이, 구체적 반박사례도 없이, 로쟈 님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면, 댓글 대접조차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2007-02-21 17:40

 


푸하 2007-02-22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 님, 공들인 글 잘 읽었습니다. 님 글의 주된 대상이 되는 저이기에 여러 1차적 판단과 인상 그리고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속에 물결 치듯했습니다. '아'와 '어'는 다르다는 것, 이게 논리적 판단의 기초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시기를 정하기 어렵지만 되도록 빠른 시간내에 구체적으로 검증가능하도록 이야기 하겠습니다.

로쟈 2007-02-2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답변드리지 않겠습니다. 요는 비판의 타이밍 문제가 아니라 비판의 방식이라는 것. 제 방식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것. 그리고 첫댓글의 표현을 빌면, '엄밀함과 치밀함과 매끄러움'이 부족하다는 것. 이 후자의 경우엔 따로 qualia님의 모범을 보여주시면 될 거라고 봅니다(바보에게 넌 왜 바보냐라고 몯는 건 소모적입니다. 바보가 아닌 방식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냉소적'이라는 건 가능한 평이긴 하나 정확한 건 아닙니다(제가 냉소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일에 시간낭비하지 않습니다). 조롱 섞인 비평이 차라리 적합한데, 그건 '블랙 코미디'에 대한 제 반응입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비분강개할 수도 있을 사안에 대해서 조롱 섞인 비평을 늘어놓는다는 게(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오역의 정도에 따라서 제 반응은 조금씩 다릅니다) 특별히 비난받을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qualia님의 핵심적인 의견은 "번역자에게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나보인다면 그깟 시기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것일 뿐 저 또한 그런 '의견교환'을 나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괴델, 에셔, 바흐>의 경우에 "번역비평가와 해당 번역가 사이에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는 의견교환/상호비판이 언제든지 가능하잖습니까"를 경험하신 건지요? 그 경우에 역자는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시는 건가요?(거듭 말씀드리자면 <괴델, 에셔, 바흐>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제 경우엔 그게 모순적인 주장처럼 여겨지는데 "번역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 학문적 양심,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를 갖춘 역자라면 매 페이지마다 오역이 속출하는 번역을 책으로 내지 않습니다(그게 가능하다고 보시면 저와 의견이 다른 겁니다. 무엇이 번역에 대한 책임감이고 사명감이며 학문적 양심이고 지식인의 자기 엄결주의인가에 대해서). 견해가 다른 만큼 다른 방식의 비평을 택한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싶네요. 저는 평면적 방식을 선택하겠습니다. qualia님이 '입체적인' 방식을 보여주신다면 상호보완이 될 거라고 믿어집니다. 건필하시길...

푸하 2007-02-2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의 핵심적 입장을 정리하자면 <괴델, 에셔, 바흐>에 관한 비판은 구체적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로쟈님의 비판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구체적인 번역비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1. 다른 속성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두 책 모두 오역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로쟈 님도 이러한 두 책을 오역이라는 같은 속성에 기대어 같은 잣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물론 qualia님 입장에서는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주된 속성을 지닌 페이퍼가 구체적인 번역내용을 비판하는 로쟈 님의 페이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공통점을 비교의 대상으로 선정할 것인지 하는 것은 열려있습니다. 두 책은 오역서라는 무시 못 할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2. 로쟈 님의<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초기단계만 보더라도 출판사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은 파악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오역지적이 형식적일 뿐이겠습니까?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번역가의 마음가짐과 번역정신에 대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 님의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비판은 구체적인 번역비판인 동시에 번역가와 출판사의 마음가짐 번역정신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qualia님의 가장 기초적인 진술인 따라서 이후 로쟈 님을 비판하는 논리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오역 비판에서 <괴델, 에셔, 바흐>와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는 잘못된 진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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