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남들 못지 않게 사놓고 정작 재미를 못보고 있는 대표적인 두 저자가 내겐 프레드릭 제임슨과 아도르노이다(제임슨이 아도르노 연구서를 쓴 건 당연하면서도 짓궂다!). 그 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만한 건 제임슨인데, 일단 여러 권의 저작들이 소개되었으면서도 정작 대표적인 주저들은 번역/소개되지가 않았고(이럴 때 쓰는 말이 '닭 쫓던 개 제임슨 쳐다보기'이다), 그나마 번역된 책들 읽기 어려우며(어떤 것들은 이제 구하기도 어렵다), 그걸 좀 덜어주겠다고 나온 해설서들 마찬가지로 난삽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이때 '난삽함'이 비단 어려운 내용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역의 난잡함을 좀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이번에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로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과 함께 출간된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이 이 시리즈의 성격에 걸맞게 '가장 쉬운 제임슨 입문서'의 구실을 해주려나 은근히 기대를 가졌건만 어젯밤에 첫장인 '왜 제임슨인가?'를 읽고서 기대를 접었다(정말 묻고 싶다. 왜 제임슨인가?).
사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도 기대에 부응하는 번역은 아니었다(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알라딘은 이 책명을 '자크데리다의 유령들'로 붙여놓아서 '데리다'로는 도서검색이 안된다. 업무량이 그토록 과다한가?). 원서와 비교해보면 앨피출판사의 국역본 시리즈는 편집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는데(얼마나 알뜰한 편집이냐면 원문의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끊어놓은 번역문을 두 개의 문단으로 나눠놓는 식이다), 정작 '콘텐츠'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형국이어서 안타깝다. 책은 껍데기가 아니잖은가. 공연한 험담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가령, "여러 차례 그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에게서 얻어낸 통찰, 즉 결정이 순간은 광기라는 진술을 상기한다."(42쪽)는 구절을 읽으면 당신은 무엇이 상기되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거 송충이 씹는 맛 아닌가? 어쩌자고 덴마크의 '고독한 단독자'의 국적을 네덜란드로 바꿔놓는단 말인가?(나도 '어려운 오역'을 좀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축구 사랑의 인연으로 네덜란드에 더 친밀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역자와 편집자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를 아무생각 없이 접수할 수 있었단 말인가?(많이 쓰는 이름인 '키에르케고르'를 '키르케고르'로 표기하면서 '네덜란드 발음은 이게 더 가깝지'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듯 시작이 께름칙해놓으니까 이래저래 주의해서 읽을 도리밖에. 그래도 <자크 데리다>의 경우 1장에서 몇몇 의문스런 번역을 제외하면 2장부터는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내가 먼저 다뤄보기로 한 건 그 때문이다. 멀쩡하게 씌어진 역자 서문을 지나 '왜 제임슨인가?'의 몇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괜찮다. 제임슨의 두 화두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두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 대해서 유익한 해설을 읽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한데, 이러한 기대는 제임슨의 이력을 읽어나가는 대목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 제임슨은 하버대학에서 강사와 조교수로 재직했고, 이어 1967년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71-76년까지 불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교수로 일했으며, 1976-83년까지는 예일대학에서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때까지 듀크대학의 비교문학과 명예교수직도 겸했다."(29쪽)
사실 제임슨의 이력이 어떻다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역자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말로도 말이 안되는 게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때까지... 겸했다."? '그때까지'는 언제를 말하는가?(1983년 이후는?) 1983년까지 예일대학과 듀크대학의 교수직을 겸했다고?(유렵대학의 명망있는 교수들이 미국대학에도 초빙교수로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지만, 같은 미국내에서도 그렇게 'two job'을 갖는다?)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은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원문은 "SInce then he has been Distinguished Professor of Comparative Literature at Duke University."(3쪽)이다. "그 이후로 그는 듀크대학의 비교문학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명예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봉직기간 등 해당대학에서 규정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교수에게 수여하는 명예직이다. 그리고 미국대학에서 'Distinguished Professor'는 내가 알기론 해당분야의 탁월한 업적을 이룬 교수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대우도 물론 좀 다를 거라고 예상되고). 그게 몇년 전부터 국내에 도입된 '석좌교수'직과 성격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물론 영어에서 석좌교수를 가리키는 말은 따로 있지만).
원문 어디에도 '겸했다'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since then'을 '그때까지'라고 옮겨놓으니까 수습차원에서 '겸했다'란 말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 사례이지만 내 독서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역자가 어떻게 번역해놓았을지 얼추 짐작하게 한다. 사실 본문 첫문장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23쪽)에서 '아마도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에 인용부호와 인용출처가 빠져 있는 데에서도 번역의 충실성에 대한 의혹은 슬슬 기어나오기 시작했었다. 그러니 사단이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들여다보기 전에 '제임슨을 읽는 어려움' 일반론에 대해서 먼저 정리를 해둔다. 이러한 국역본의 소제목들은 아마도 편집자가 붙인 듯하지만(32-43쪽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이 원서에는 'The Challenges of Jameson's Work'로 돼 있다) 내용에는 부합한다. "일반적으로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속한 비평적 맥락이 복잡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임슨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를 읽어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이다."(32쪽)
'복잡하고 광범위한 비평적 맥락'으로 치자면 슬라보예 지젝 같은 경우 한술 더 뜨기 때문에 제임슨만의 두드러진 난점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매력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시적인 문체'. "제임슨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33쪽)니까 특별히 번역상의 문제만으로 우리가 곤란을 겪거나 분통을 터뜨리는 건 아니겠다. 반면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 같은 경우에 "나는 종종 서가의 문학이론서 자리에서가 아니라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 꽂힌 자리에서 그의 책을 뽑아든다."(33쪽)고 하니까 그의 문체(스타일)이 악평만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고(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글턴의 활달하고 재기넘치는 문체를 더 좋아한다).
물론 대세는 역시나 꼭 그렇게까지 문장을 꼬이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다. "제임슨의 스타일을 피곤하고 번잡스러우며 어쭙잖다고 평가절하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더글러스 켈너는 제임슨의 스타일을 형편없다고 얘기했다."(33쪽) 켈너는 국내에 <탈현대의 사회이론>(현대미학사, 1995)부터 <미디어문화>(새물결, 2003)까지 여러 권의 저작이 소개돼 있는 좌파이론가이다(보드리야르와 마르쿠제 연구서가 유명하다).
한데, 형편없다'고 옮긴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켈너가 쓴 단어는 'infamous'이며 사전적 정의대로, '악명 높은'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엔 이 말의 출처가 빠져 있지만, ('제임슨의 모든 것'이란 참고문헌 해제에 포함돼 있는 바대로) "제임슨의 다양한 논문을 실은 책" <포스트모더니즘/제임슨/비평>의 편자 서문에 나온다. 그 편자가 바로 켈너인 것. 따라서 "제임슨의 문체는 악명이 높다" 정도이지, "제임슨의 스타일은 형편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그의 난해한 문체가 시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잖은가!).
왜 그럼 제임슨은 그렇게 쓰는가? 아도르노의 난해한 문체를 옹호하면서 제임슨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한데, "요컨대 독서는 어렵고 불편한 일이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 "독서가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닐 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다."(35쪽) 그러니까 드러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낫다, 라는 게 제임슨의 글쓰기론이자 문체론이다. 저자인 로버츠의 해석대로, "이러한 주장은 난해한 글쓰기일수록, 비록 소극적인 의미에서나마 진보적 행위라는 사실을 내포한다."(36쪽)
거기에 보태어 제임슨은 그 '난해성'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왜냐하면 시류에 흔들리는 양떼처럼 제도적 압력에 굴복할 때보다는, 그에 저항하고 교전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 제임슨과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다.
저자 로버츠의 제임슨 꼬집기: "가령 우리는 제임슨을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에서 높은 존경을 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제도권 학계와 비평계가 교육사업을 벌여 미국에서만 연간 수천 만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제임슨의 난해한 스타일은 이러한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무지한 노동계급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37쪽) 이것이 '난해한 글의 계급성'이자 좌파 엘리트주의의 함정이다.
그리고 인용문에는 오역의 함정도 있다. 미국 대학시장의 규모를 '수천 만 달러'라고 옮겨놓았는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원서에 따르면 미국의 대학 '산업'이 해마다 벌어들이는 수익은 'billions of dollars'로 돼 있다. 지적하기도 뭐하지만 'billion'은 '천만'이 아니라 '십억'이다. 이건 액면상 적은 차이가 아니다. '무지한 독자계급'을 상대로 한 번역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대충 번역하면 곤란하다.
어쨌든 그러한 '함정'에 대해서 저자가 일침을 놓고 있는 대목: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는 행위로 자기를 과시하듯, 난해한 제임슨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자신이 학식과 교육 정도를 과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된 이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가 더 급진적 전략일 수도 있겠다."(38쪽) 단, 여기서도 '루틀리지 비평가 시리즈(Routledge Critical Thinkers)'는 '루틀리지 비판적 사상가' 시리즈 더 타당하다(비평가와 사상가는 좀 다르지 않나?).
이제 오역의 핵심적 문제로 들어간다. "이와 연결된 핵심적 문제를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문장을 제임슨의 글에서 뽑아보면 이렇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정치적 무의식>에서의 인용문으로 넘어가는데, 유감스럽게도 세 줄이 누락됐다. "Chapter 3 of The Political Unconscious looks at 'the novel', and reads the French novelist Honore de Balzac to illustrate his case."가 그것이다. 뭐 빠져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한데 굳이 누락시킬 이유가 있는가?), 디테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차라리 발췌역을 하는 게 나을 터이다(그나마 인문서들의 경우엔 덜한 편이고 실용서나 경영서들의 경우엔 공공연하게 발췌역이 자행된다. 그런 책들 돈 주고 산다는 것이 넌센스이다. 물론 발췌독을 한다면야 할말 없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인용문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이다.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진실로 이해해보려고 여러 번 읽어보았지만 내게 남는 건 두통뿐이다. 제임슨의 원문 자체가 난삽한 건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문장을 갖다놓고 번역문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역자는 대체 무슨 뜻으로 옮긴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편집자는 한쪽 눈을 감고 교정을 보는가?). 제임슨의 원문보다 난해한 문장을 어떻게 '해독'하라는 것인가?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이 문장에 대해서는 저자가 이어서 3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국역본은 40쪽에서 원서와는 다르게 인용문을 한번 더 반복해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한데 읽을 수 없는 인용문을 한번 더 읽는다고 이해가 되는지?). 그러니까 설혹 제임슨이 쓴 문장의 의미를 바로 캐치하지 못했더라도 로버츠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 파악을 할 수 있게끔 돼 있다(뒤이어 이 문장에서 주어가 뭐고, 동사가 뭐고, 목적어가 뭐고 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한데 역자로서 불성실한 것은 그러한 저자의 '노고'조차도 발췌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장 요소들을 분절해서 각각의 요소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히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야만 이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41쪽)고 해놓고 역자 자신은 그 '힘겨운 작업'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더러 저자의 그 '힘겨운 작업'을 독자에게 전달해주지도 않았다.'옮긴이의 글' 말미에서 "이 책을 쓴 애덤 로버츠는 짧은 분량 안에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을 압축적이고도 명쾌하게 설명하여, 독자들을 단번에 제임슨 이론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그 충실하고 명쾌한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거나 깊이 공감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을 역자의 부족한 능력 탓이다."라고 적은 내용이 아무래도 역자 스스로에겐 충분히 이해되거나 공감되지 않은 듯하다.
Indeed,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 assert,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럼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한다. 번역문 말고 원문을, 저자 로버츠를 따라서(조금 더 자세하게 풀었다). 먼저 문장 전체 주어는 무엇인가? 'as any number of 'definitions' of realism'가 주부이고 주어는 'definitons'이다. 그리고 전체 동사는 동사는 'assert'. 그리고 'and as the totemic ancestor of the novel, Don Quixote, emblematically demonstrate'가 삽입절이고, that-이하가 'assert'의 목적절이다, 라고 처음에 보았었지만 이 문장에서 that은 접속사가 아니라 지시형용사이다. 거기에 준해서 내용을 정정한다.
that processing operation variously called narrative mimesis or realistic representation has as its historic function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그리고 주절에서 'that processing operation'이 주어이고 'has'가 동사이다. 'has A as B'로 'A를 B로 갖고 있다'란 구문인데 A가 너무 길어져서 'as B'가 먼저 나온 형국이다. 그럼 A에 해당하는 거은 무엇인가? "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demystification, the secular 'decoding' of those preexistng inherited traditional or sacred narrative paradigms which are its initial givens." 나머지 전체이다. 그럼, B(its historic function)에 해당하는 건 무엇인가?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 세 가지이다. 그리고 이 명사(구)들이 전치사 of 를 통해서 뒤에 나오는 목적어들을 받고 있다.
그러한 구문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들은... 서사적 모사라는 그 작동과정이 이러이러한 것을 (1)체계적으로 침식하고 (2)탈신비화하고 (3)세속적으로 '해독'하는 것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번역문에는 어떤 착오가 있는가?
진실로, 사실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진술들은 <돈키호테> 같은 소설의 원시적 선조들처럼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했는데,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 다양하게 불리는 과정은, (전통적 서사가 갖는 신성성을) 구조적으로 훼손시키고 탈신비화시키는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부여받은 서사의 신성성의 패러다임 혹은 전 존재적 유산과 전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한 것이다.
혼돈은 등위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1)the systematic undermining and (2)demystification, (3)the secular 'decoding'이 '역사적 기능'의 내용이란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덧붙여 지적하자면 'emblematically'는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란 뜻이고, 'initial'은 '필수적으로'가 아니라 '최초의'란 뜻이다. 'preexisting'을 '전 존재적'이라고 띄워서 옮긴 건 (편집자의 오류로 보이는데) '전(前)'이라고만 해줬어도 오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반대로 제임슨이 만일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쓴다고 할 때 우리가 잃게 되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돈키호테의 둥장 이래 사물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한 소설들은 실제로는 사실적 재현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명맥히 기반한 고대의 신성한 서사들의 가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해독해온 것이다.''"(38-9쪽)
(제임슨의 것이 아닌) 로버츠의 원문은 "Novels, from Don Quixote onwards, that have attempted a 'realistic representation' of things have not in fact been doing this, they have actually been undermining and 'decoding' the ancient sacred narratives on which they are distantly based."(8쪽) 여기서도 '명백히'라고 옮긴 'distantly'는 '간접적으로' '멀리'란 뜻이다('distintcly'와 헷갈릴 정도로 정신없이 번역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다시 옮기면, "<돈키호테> 이래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을 시도해왔다고 하는 소설은 실상 그러한 재현과는 무관하다. 소설이 실제로 한 것은 그 자신이 멀리 기원을 두고 있는, 고대의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기반을 침식하고 '탈코드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최초의 인용문을 다시 옮기면: "리얼리즘에 관한 많은 '정의들'이 주장하듯이, 그리고 소설의 기원으로서 <돈키호테>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서사적 모방' 혹은 '사실적 재현'이라고 다양하게 불리는 그 작동과정은 과거부터 존재해온 전통적인 이야기나 최초에 관한 성스러운 이야기들의 패러다임을 체계적으로 침식하거나 탈신비화하고 세속적으로 '탈코드화'하는 일을 그 역사적 기능으로 갖고 있었다."(가독성을 위해서 얼마간 의역을 했다.)
이제 정리해보자. "이상적인 독자라면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할 만큼 머리가 좋겠지만, 그보다 열등한 독자는 해독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단서를 잃고 헤매며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제임슨은 이렇게 자신의 글을 읽고 또 읽도록 의도했을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인내심을 잃고 이해 자체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41쪽) 저자가 먼저 던지는 질문이지만 과연 그런 난해함이 (제임슨이 입만 열면 반복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 이런 문장을 읽고 느낄 즐거움은 '내가 이 어려운 걸 다 읽고 이해했어'라는 식의 자기만족적 즐거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비싸다!
이제 기운이 떨어져서 더 주절거리지도 못하겠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왜 제임슨인가?'의 맨 마지막 인용문까지도 오역으로 점철돼 있다. 가령, "post-traditonal daily life and its bewilderingly empirical, 'meaningless,' and contigent Umwelt"를 당신이라면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탈전통적인 일상적 삶과 그 정신없을 만큼 경험적이고 '무의미하며' 우연적인 환경세계" 정도 아닌가. 국역본은 "탈전통적 일상생활, 당혹스러울 정도로 제국주의화되고 의미가 상실되었으며 우연적인 환경"이라고 옮겨놓았다.
"현재 프로이트와 라캉, 지젝의 글 등을 읽으며 서사를 둘러싼 행동의 비밀을 이해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역자는 먼저 이러한 말실수들을 둘러싼 오역의 비밀들을 먼저 이해하려고 애를 썼으면 좋겠다...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라... 제임슨은 건너뛰란 얘기로군...
07. 02. 07.
P.S.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을 건너뛰면 재미있는 건 많다. 가령, 일반인들에겐 프레드릭보다 유명한 포르노배우 제나 제임슨은 어떤가?(사실 외설적인 오역서를 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제임슨을 검색하다 보니 학교도서관에 <프로노스타처럼 사랑하는 법>(2004)이란 책도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 제나 제임슨의 자서전이며 우리에겐 <게임>(디앤씨, 2006)으로 소개된 닐 스트라우스가 대필한 책이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지만, <포르노스타처럼 돈 버는 법>(2006)은 그 이후에 쓴 책이다. 프레드릭을 읽느니 차라리 제나를 당신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