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교보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은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의 한 권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앨피, 2007)이다. 폴 드 만(1919-1983)은 대중적으로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문학비평과 이론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지나칠 수 없는 '예일 마피아의 대부'로서 예일대학에 오래 봉직했던 벨기에 태생의 비평가이다.
드 만의 높은 지명도(혹은 악명?)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단 한권의 저작도 번역돼 있지 않아서 사실 이런 입문서의 출간이 반가운 것만은 아닌데, 어쨌거나 이번 출간이 계기가 되어 적어도 두어 권 이상은 번역/소개되었으면 한다(러시아어로도 <맹목과 통찰>, <독서의 알레고리> 두 권이 번역돼 있다. 짐작에 일어로는 더 많은 책들이 번역돼 있을 법하다). 적어도 데리다나 스피박의 책들이 번역되는 만큼은(드 만은 데리다의 친구였고 스피박의 지도교수였다) 소개되는 게 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한다(문학이론쪽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지라 나는 세 사람의 책들은 거의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번역본이 나온 김에 원서(2001)는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복사했다. 같은 시리즈의 여느 책들과 마찬가지로 143쪽의 콤팩트한 분량(국역본은 254쪽). 바쁜 일들에도 불구하고 제 버릇 남 못 주기에 서론(왜 드 만인가?)을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 몇 가지를 적어놓는다('비워놓는다'는 게 정확하겠다. 자꾸 어른거리기에 다른 일에 방해가 된다).
앨피출판사의 이 시리즈로는 올초에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과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출간된 바 있고(<제임슨>과는 좀 '시끄러운' 인연을 갖게 됐다) <폴 드 만>은 세번째 책이다. 이어서 나올 근간 목록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주디스 버틀러>,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눈에 띄는데, 모두 여성이론가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덕분에 하반기에는 이 여성이론가들에 대해 정리할 기회가 생길 듯하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로부터 시작된 이 시리즈의 책들을 나는 다 갖고 있다. 개인적으론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책들의 저자들을 다루고 있기에 일종의 '로드맵' 삼아서 소장해두는 격이다(이 시리즈의 의의는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이론가 사전을 겸한다는 데 있다). 매우 요긴함에도 불구하고 간혹 불만스런 번역이 없지 않아서 역자에 좀 민감하게 되는데, <폴 드 만>의 경우는 낭만주의와 벤야민의 문학이론 연구로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다.
벤야민과 드 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아, 알레고리론으로 연결된다!) 드 만이 낭만주의에 관한 권위있는 저작들의 저자인지라 '낭만주의 전공'이라는 이력은 그래도 의지할 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맨앞에 실린 '옮긴이의 글'에서 프랑스의 비평가 '제라르 주네트(Gerard Genette)'를 '제라르 자네트'라고 표기한 건 상당히 특이해 보이지만('쥬네트'나 '즈네트'란 표기는 본 적이 있지만 '자네트'는 처음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구조주의 비평가의 한 사람인 주네트의 경우에도 '제라르 즈네뜨'의 <서사담론>(교보문고, 1992) 이후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다(폴 드 만이나 제라르 주네트가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번역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 딱히 우리가 읽어야 할 문학이론서는 몇 권 되지 않는다).
폴 드 만을 포함하여 힐리스 밀러, 제프리 하(르)트만, 해롤드 블룸 등 예일대학의 쟁쟁한 문학비평가 네 사람을 미국 대학가에서는 '예일학파'라고 칭하고 일부에서는 '예일 마피아'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는데, 드 만은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지만) 그 대부격의 인물, '돈 파올로(Don Paolo)'로 간주됐다(더 친숙한 인물로 고르자면 '돈 꼬레오레'라고 해야할까?).
이 예일학파에 대한 소개로는 페터 지마의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2001)가 단행본 분량으로서는 유일하면서도 유용하다(서론을 읽은 바로는 <폴 드 만>의 저자 맥퀼런은 드 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지마와 의견이 좀 다를 듯하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최악의 번역서란 평도 얻은) 프랭크 렌트리키아의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문예출판사, 1994)의 한 장이 폴 드 만에 할애돼 있고('폴 드 만: 권위의 수사학'), 빈센트 라이치의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 1993)와 조너던 컬러의 <해체비평>(현대미학사, 1998)에서도 드 만은 자주 언급된다.(*<이론에 대한 저항>과 <독서의 알레고리>도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청년시절 드 만이 전쟁 중에 전쟁 중에 점령된 벨기에에서 나치에 협력적인 언론을 위해 글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진 1987년 소위 '드 만 사건'"에 대해서는 책의 6장('저술과 책임: 드 만의 전시 언론활동') 외에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의 12장('파시즘 문제 - 폴 드 만/하이데거/니시다 기타로')를 참고할 수 있다.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던 데리다에 의하면 드 만의 업적은 '문학이론 영역의 변혁(transformation)'에 놓인다(두 사람은 1966년 존홉킨스대학에서 열린 '구조주의 논쟁'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만났다). "이 변혁은 대학 내외의 그리고 미국과 유럽 양쪽의 문학이론 영역에 물을 대는 경로들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동료였던 힐리스 밀러의 단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가 된다면 보편적 정의와 평화적 평화의 밀레니엄이 도래할 것"이다.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good readers in de Man's sense)'는 나라면 '드 만적 의미의 좋은 독자'라고 옮기겠다(일급의 비평가였던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가 되는 것보다는 '드 만적 의미의 좋은 독자'가 되는 게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일 아닐까?).
1970년대 예일대학에 몸을 담게 된 드 만과 동료 비평가들의 "선구적 작업으로 형성된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관심은 (*미국) 학계에 상당한 마찰을 불러왔다. 문학비평의 전통적 형식들이 새로운 지식체계의 극단적 함의들로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이 무렵에 종종 옛것과 새것 사이의 '매서운 토론'이 잇따라, 흔히 이 시기(대략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는 영미권 지식인의 삶 속에 이른바 '이론 전쟁(theory wars)'이라는 극적인 명칭으로 불린다."(21쪽) '이론 전쟁'이란 말은 '예일 마피아'란 별명과 잘 어울리는군.
"드 만의 저술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부터 사망하기까지 약 65편의 에세이와 평문을 남겼다."(23쪽)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계산'은 정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겠다. 드 만의 저술은 '약 75편(some seventy-five)'이다. "책으로 출간된 드 만의 첫 에세이 모음집은 <맹목과 통찰>인데, 이는 1971년에 출간되어 1983년에 수정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 이어서 문학과 수사학을 탐구하는 <독서의 알레고리>(1979)가 간행되었다."
"드 만의 글 중 영향력이 가장 큰 몇몇 글들은 사후 첫번째 간행된 모음집인 <이론에 대한 저항>(1986) 속에 실려 있다. 이 책의 표제 제목으로 선택된 논문은 소위 '이론 전쟁' 기간 동안 이론적 질문의 방향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낭만주의의 수사학>(1984)은 <독서의 알레고리> 속에 표현된 이론들을 확장시키는데, 낭만주의적 사유에 대한 드 만의 작업의 중요성을 공고히 한다. <낭만주의와 현대비평>(1993)은 어떤 의미에서 <낭만주의의 수사학>과 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24쪽) 국역본에서 <낭만주의와 현대비평>에 병기된 원어 'Romanticism and Contemporary' 다음에 'Criticism'이 누락됐다.
"이상의 모음집들에 이어 <미학적 이데올로기>(1996)가 나온다. 1977-83년 사이에 씌어진 에세이들이 포함되었으므로 이 저작은 <독서의 알레고리>의 후속편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이 책은 수사학, 지식의 생산과 미학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심도 깊게 숙고하는데, 이는 드 만의 저작이 비정치적이라는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그것은 드 만 저작의 정치적 정향성을 재획인해주며 그의 다음 프로젝트가 부분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에 집중될 것임을 예시한다. 유감스럽게도 드 만은 이 프로젝트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24-5쪽)
이 책에서 역자가 새롭게 시도하는 번역어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물론 제목에도 포함돼 있는 '탈구성(deconstruction)'이다. 흔히 '해체(론)'라고 옮겨지는 데리다의 이 용어를 역자는 '텍스트 이론적 맥락에서' '탈구성'이라고 옮길 것을 제안한다(일본에서는 '탈구축'이라고 옮겨지는 걸로 안다). 나는 이러한 시도에 반대하지 않는다(데리다 자신이 어떤 고정적인 'key word'를 거부한다). 하지만 몇 가지 다른 번역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부주의의 소치로 보인다.
가령 26쪽의 박스에서 데리다를 '파리대학의 철학자'라고 소개했지만 그는 '고등사회과학원의 철학자'였다(원문에도 그렇게 표기돼 있다). 같은 파리 하늘 밑에 있는 것일 테니 대수로운 건 아니지만. 하지만, 29쪽에서 "예일에서 문학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드 만은 제프리 하르트만, 해럴드 블룸, 힐리스 밀러 등을 가르쳤다."고 한 건 오역이다(동료들이 드 만에게 감화를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번역대로라면 세 사람이 드 만의 '제자'란 것인데 넌센스이다).
원문은 "While teaching on the literary studies program at Yale, de Man taught alongside the critics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and J. Hillis Miller."이다. 하르트만, 블룸, 밀러와 함께 가르쳤다는 뜻이다. 거기에 1975년부터 데리다가 객원교수로 가세하게 되어 소위 '예일학파'가 형성된다는 것. 비록 저자가 부적절한 명칭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왜냐? "드 만, 하르트만, 밀러, 데리다의 글에 어떤 유형적 유사성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목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 자신을 결코 어떤 특정한 유의 비평적 과업과 관련지어 묘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형적 유사성'은 'family resemblances(가족 유사성)'의 번역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굳이 다르게 옮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밖에 'desire'를 '욕구'라고 옮기는 것 등도 특이한 선택으로 보인다...
07. 04.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