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쏟아져나오는 신간들에 대해 참견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구당이 명당이라고) '최근에 나온 책들'을 마저 연재하기로 한다. 한 넉달은 쉰 듯한데, 그렇다고 그간에 뭔가 재충전된 건 아니며 단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이 신간으로 나온 걸 보고서 문득 연재에서 다루고픈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사람의 뇌 또한 '카오스의 가장자리' 아닐까?). 그럼 시작해보기로 할까? 

 

 

 

 

제일 먼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파라북스, 2005)이 출간됐다. 이게 '드디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데, 카오스이론, 혹은 복잡계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에드워드 로렌츠'를 저자로 한 책이어서 무엇보다도 그냥 반갑다. 로렌츠란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름은 '콘라트'이지만,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에드워드'란 이름도 함께 기억해두는 것이 형평에 맞겠다.

소개에도 나와 있지만, "'브라질에 있는 나비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토네이토가 분다' 이는 최근 들어 동명의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나비효과'의 유명한 명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필적한다고 평가받는 카오스 이론의 장을 연 논문 제목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인 <카오스>(누림, 2006 *새로 나왔군!)의 저자 제임스 글릭은 빼놓지 않고 있으며(역자 박배식 교수는 <카오스의 본질> 또한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에 재출간된 <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범양사, 2006)에서도 저자 미첼 월드롭이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기상학자 로렌츠와 그의 '이상한 끌개'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소개에서 언급되는 있는 영화는 애쉬턴 커쳐가 나오는 영화 <나비효과>를 말한다.

 

이번에 약간 놀란 건 로렌츠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 것. 1917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90세이다. 책에서 읽을 때의 '젊은 기상학자'가 더이상 아닌 것이다.

로렌츠의 원저는 1993년에 나왔으며, 일역본은 1997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다. 카오스이론에서만큼은 우리가 일본보다 10년 정도는 뒤처지는 것 같은데, 이게 그저 '인상'일 뿐일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카오스이론이나 복잡계과학에 관한 번역서들 가운데는 일본책들이 적지 않다. 국내에서는 수학자 김용운 교수의 책 정도가 눈에 띌 따름이다. 벌써 10년쯤 전에 유행을 탄 카오스이론이지만,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나 <카오스의 본질> 같은 주요 저작들이 번역된 김에 한번쯤 '뒷북'을 쳐보는 것도 의미있어 보인다. 피서객들이 다 빠져나간 백사장을 되밟다보면 간혹 동전들 이상의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조금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정재승 교수의 베스트셀러 <과학콘서트>의 내용 대부분이 이 카오스이론/복잡계과학과 연관된 것들이다. 콘서트장의 연주를 즐기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이제 '악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나온 과학서들 가운데, <뇌가 나의 마음을 만든다>(바다출판사, 2006)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세계의 뇌 과학자 중 한 명인 라마찬드란 박사가 BBC의 ‘리스 강연’에서 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환상사지나 공감각 같은 희귀한 신경이상 사례들을 통해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같은 이제까지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질문들에 대해 외 과학자로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의 연결을 시도한다." 그러니 읽어봄 직하다. 뇌과학 관련서들이 근래에 부쩍 눈에 띄는데, 사실 게놈프로젝트 이후에 꼽을 만한 메가프로젝트란 대뇌지도 만들기 아니었나? 그게 얼만큼 진행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아놀드(1822-1888)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 아널드 전공자인 윤지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기억에, 아널드에 대한('Arnold'를 꼭 '아널드'라고 표기해야 할까?) 박사학위논문을 펴낸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창비, 1995)이 10년도 더 전에 나왔으니까 본 저작에 대한 소개 자체는 상당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 전에 <삶의 비평>(민지사, 1985)이란 아널드의 책이 한번 소개된 걸로 돼 있지만, 본격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 나온 <교양과 무질서>는 어떤 책인가? 소개를 좀 따라가본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매슈 아널드는 당대의 사회적 갈등과 계급현실에 대한 처방으로 '교양(culture)'의 이념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오늘날 '교양' '교양인' '교양교육' 등의 개념을 널리 사용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매슈 아널드를 꼽아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교양과 무질서>는 그런 매슈 아널드의 사상을 집약한 정치·사회평론서이다." 그러니가 '교양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교양과 무질서>는 1867년부터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쟁점을 두고 매슈 아널드가 1년 이상 벌인 논쟁문을 묶은 책이다. 차티스트 운동이나 각종 법률의 제정 등 정치적·경제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빅토리아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대중교육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무질서'로 규정하는 지은이는 그 대안으로 '교양'을 제시한다. 노동계급을 포함, 파당성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일으키는 중간계급을 '속물'이라고까지 비판하는 매슈 아널드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파란을 일으킨다. <교양과 무질서>에서 지은이는 이러한 반론에 하나하나 반박하며 자신의 교양 개념을 자세히 설파한다. "교양이란 우리의 고정관념과 습관에 신선하고 자유로운 생각의 줄기를 갖다대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양의 시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널드의 정치적 입장은 오늘날의 스펙트럼에서 볼 때 중도보수에 가깝지 않나 싶다(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파의 교양론에 대응하는 것은 좌파의 품성론이다). 단, 이 보수주의의 자격조건이 교양(culture)이며, 그게 결여된 이들을 통칭해서 '속물(philistines)'이라고 칭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교양 대가리'라곤 없는 속물적인 우파들이 보수주의를 떠들어대는 것이다. 물론 아널드의 분류에 따르자면 속물적인 좌파들 또한 비판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니겠다. 사실 이러한 교양주의가 '창비'와 보다 급진적인 노동/민중문학론자들을 가르는 입각점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아널드가 폄하해마지 않는 '무질서'에 대해서는 '다른 과학', '다른 지배자'가 필요한 듯하며, 참조할 만한 책 몇 권을 나열해보았다.   

 

 

 

 

세번째 책은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좌파적 교양'을 책임지고 있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대표작 <미국민중사>(시울, 2006)이다. 예전에 <미국민중저항사>(일월서각, 1986)이라고 나왔던 책의 개정판인데, 20년만에 나온 것이니까 어느덧 '한 세월'을 감당한 책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워드 진에 대해서만큼은 '연장 탓'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오만한 제국> <전쟁에 반대한다> 등의 책들을 통해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며 민중의 시각으로 미국사 전체를 읽어낸 <미국민중사>는 그의 역사학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역작으로, 1980년 첫 출간 이래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저서이다."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민중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미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미국을 구성하는 일반 사람들에게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미국의 민중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청도교인이나 지배층의 부유한 백인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은 오히려 기존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들에 더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책은 소외된 이들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예컨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칸 대륙 발견에서 하워드 진은 인디언 부족인 아라와크족의 시각을 빌려온다. 그리고 헌법제정의 역사에는 노예의 관점을, 산업주의 발흥의 역사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관점을, 멕시코 전쟁의 역사에는 탈영병들의 시각을, 뉴딜의 역사에는 할렘 흑인들의 관점을 도입한다." 이러한 관점들을 중재해줄 수 있는 객관적 시점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 의문을 갖게 한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역사? 진의 표현을 빌자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뜻있는 건 이번에 데이비드 조이스의 평전 <하워드 진>(열대림, 2006)이 같이 출간된 것.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실천적 지식인',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의 생애와 저술을 다룬 전기"로서 "책은 주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중점을 두고 진의 생애를 돌아본다. 전기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진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 속에서 그의 주요 저서를 소개하고, 그의 혁명적 사상을 분석하며, 그의 삶과 업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그러니 길잡이로서 유익하겠다. 물론 하워드 진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와 나란히 읽으면 더 좋겠다. 참고로, 미국사 관련서들을 몇 권 나열해 보았다.  

 

 

 

 

네번째 책은 고모리 요이치의 소세키 평전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이다. 제목은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따왔는데, 이 일본근대문학의 태두를 다루고 있는 저작이 이번에 처음 나온 건 아니지만, 저자가 <포스트콜로니얼>(삼인, 2002)의 저자 고모리 요이치라는 게 눈길을 끈다. 현재 도쿄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가끔씩 내한강연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고모리 교수의 문학비평가로서의 솜씨를 구경해볼 수 있는 책이겠다.

 

 

 

 

소개에 따르면,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 평전. 금전, 호적, 우정, 사랑, 영국 유학 등 다양한 요소들을 동원해 소세키와 그의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폭넓고도 치밀한 연구를 통해, 소세키라는 필명을 얻기 전의 '나쓰메 긴노스케'의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어릴 때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 런던 유학 시절에 고향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 다섯 번의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최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부터 마지막 장편 작품인 <한눈팔기>,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문학론>과 '자기본위'라는 말로 유명한 강연 <나의 개인주의>까지, 지은이는 소설 속에 조각조각 나뉘어 숨어 있던 소세키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출세작도 소세키론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일본비평가들에게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자기입증을 위한 척도 같은 게 아닐까도 싶다(과문했던 나는 국내에서 소세키가 유행을 타기 전 아쿠다가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이 일본근대문학을 대표하는 걸로 알았다). 프랑스문학쪽으로 가면 마르셀 프루스트나 사뮤엘 베케트 같은 경우가 그런 듯싶은데, 쟁쟁한 비평가나 철학자들이 이들에 대한 연구서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느 작가론을 써야 비평가로서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있나?.. 

 

 

 

 

끝으로 마지막 책은 사랑 이야기이다.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으로도 불리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이 <내 사랑의 역사>(북폴리오, 2006)로 또 출간된 것이다. 원제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2003) 순절한 사랑의 대명사가 된 이 커플의 이야기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일까?

"12세기 프랑스의 수녀였던 엘로이즈는 중세 철학의 대가이자 성직자인 아벨라르와 숙명적이고도 질긴 사랑을 나눴다... 12세기 초, 파리의 열혈 논객이었던 아벨라르는 성당 참사관인 퓔베르의 집에 하숙을 청하고,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던 엘로이즈를 가정교사로 맞게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이들은 곧 육체에 대한 탐닉과 사랑에 빠져 비밀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게 되지만, 이 사실을 안 퓔베르는 아벨라르를 거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져 수도승과 수녀로 살아가게 되지만 15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랑과 종교, 철학이 어우러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끝맺게 될까?..."

이번에 나온 "책은 최근에 발견된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편지 뭉치와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삶을 마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풀어나간다"고 한다. 이미 이전에 출간된 독어권의 책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생각의나무, 2005)과 나란히 읽으면 이들의 사랑을 훔쳐보는 데 더 도움이 되겠다.  

한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거나 변주한 책들도 적지 않은데,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생각보다는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그만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와 누벨 엘로이즈>(만남, 2002) 같은 연구서만 달랑 하나 갖고 있다는 건 좀 궁색한 일이다. 예전에 출간된 루소전집에 들어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사랑의 역사'가 좀더 번듯하게 채워질 수 있도록... 

06. 09. 05-06.

P.S. 참고로,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에 대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09. 09) 어지러운 사회 바로잡는 힘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요, 비평가였던 매슈 아널드(1822~88)의 <교양과 무질서>가 아널드 전문가에 의해 번역·출판됐다. 우리가 이 책의 출간을 반갑게 여기는 것은 이 문화·사회·정치 비평의 고전에서 아널드가 펼치고 있는 논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널드의 시대에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세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한편 정치적 개혁과 사회적 변화에서 야기되는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었다. 더욱이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사상은 오래된 맹목적 신앙을 뿌리째 흔듦으로써 엄청난 정신적 의혹과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아널드가 ‘도버 해변’이라는 유명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꿈속의 땅처럼 눈 앞에 펼쳐진 세계/다채롭고, 아름답고, 싱그러우나/실은, 그 속에 기쁨도, 사랑도, 빛도/확신도, 평화도, 고통을 위한 도움도 없네./우리의 이 어두워 가는 평원엔/갈등과 패주의 경적이 어지럽고/밤마다 무지한 군대들이 충돌하고 있을 뿐”이라고 노래했던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널드의 혼란 인식은 이런 일반론에만 머물지 않고 그 나름의 구체성을 띠고 있다. 특히 귀족, 중간 계급 및 노동 계급 등 이른바 3대 계층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각별한 데가 있다. 그가 보기에, 귀족들의 개인적 자유 및 야외 스포츠 선호는 그 뿌리가 야만성에 있었고, 그 자신이 속한다고 여겼던 중간 계급은 온통 속물주의로 물들어 있는가 하면, 거칠고 무식한 노동계층은 우중(愚衆)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질서는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이었다.

-아널드는 중간 계층이 사회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계층은 물질주의에 물든 채 가난한 계층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도덕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당대 중간 계층의 도덕적 지주이던 청교도 정신이 편협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널드는 당대를 풍미하던 자유방임주의가 정치적 편견과 무책임으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했는데, 이는 제2장 ‘내키는 대로 하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지도자적 자질의 필수 덕목으로서의 교양을 강조하게 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로 교양이야말로 사회의 모든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안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교양은 무엇보다도 ‘완성에 대한 공부’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 보려는 욕망’과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고 행복하게 하려는 숭고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교양은 단순히 희랍어나 라틴어 문헌을 겉핥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순수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하지 않고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선을 행하는 도덕적 힘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아널드가 이 책에서 ‘단맛과 빛’이라는 말로 제1장의 제목을 삼은 것은 아주 시사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일찍이 꿀벌의 덕성을 논하면서 꿀벌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해서 단맛을 볼 수 있게 하는 한편 밀랍을 제공하여 촛불을 켤 수 있게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아널드가 ‘단맛’과 ‘빛’이라는 스위프트적 은유를 빌려서 교양의 속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중간 계층이 바로 이 단맛과 빛을 결여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은 아주 흥미롭다.

-아널드가 말하는 단맛과 빛은 그 성격에 있어서 인간의 헬레니즘적 성향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완성 또는 구원’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서는 헬레니즘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도덕적 실천을 최고 덕목으로 삼는 헤브라이즘의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헬레니즘의 ‘올바른 생각’과 헤브라이즘의 ‘올바른 행동’이 상호보완되어야 인간의 교양도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널드의 교양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여전히 적정할까? 물론 아널드가 이 책을 쓰던 1860년대는 우리 시대와 현저히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처해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은 140년 전 영국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걸친 우리의 민주정치 실험과 급속한 경제 개발은 과격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면서 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정신적 폐해를 야기해왔고, 이는 아널드가 짚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병폐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널드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으며 그가 제시한 처방책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만약에 ‘교양과 무질서’가 이런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도 없을 것이다.(이상옥|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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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9-04 21:12   좋아요 0 | URL
연재가 끊겨서 섭섭했었는데 반갑네요^^

로쟈 2006-09-04 21:22   좋아요 0 | URL
'시간 버리기'에는 이만한 일도 없지만, 아무래도 생계를 고려해야 하는지라(^^;)...

twoshot 2006-09-04 23:40   좋아요 0 | URL
'Arnold'를 '아널드'라고 부르는 것이 좀 거북합니다. 영화배우 애슐리 쥬드를 애슐리 저드라고 불러야하고 랄프 파인즈를 레이프 파인즈로 불러야 한다는 건 별 거부감이 없습니다. 쥬드와 저드, 랄프와 레이프는 많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사람이름인데 정확히 불러주자는 취지는 십분 공감 합니다만 아놀드라 하던걸 아널드로 불러야한다는 건 왠지 거부감이 들어요. '교양'이 부족해서 그런가요?-_-;

로쟈 2006-09-05 09:10   좋아요 0 | URL
그건 저도 불편합니다. 그리고 동의하지도 않습니다(더불어, 저는 '애슐리 쥬드'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아널드'가 '속물적 교양'에 대해서는 얘기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6-09-05 09:13   좋아요 0 | URL
오 드디어 다시 연재하시는 군요.~~~

가을산 2006-09-05 10:17   좋아요 0 | URL
다시 시작하셨군요. 아이구 반가워라.

로쟈 2006-09-05 11:59   좋아요 0 | URL
예, 힘 좀 빼고 그냥 가볍게 연재할까 합니다. 한데, 말려주시는 분들은 안 계시나요?^^

philocinema 2006-09-05 20:5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님의 신간리뷰를 보게 되니 기쁘고, 마음이 설레이는군요...

페일레스 2006-09-05 21:44   좋아요 0 | URL
말리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등떠밀어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
로쟈님의 글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물론, 생계에 지장을 미치지 않는 한에서.

로쟈 2006-09-05 22:55   좋아요 0 | URL
risper3님/ '사랑이야기'가 들어가서인가요?^^
페일레스님/ 생계에 지장을 미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론 좀 헐렁하게 쓸 예정입니다. 그나마 벼랑끝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yoonta 2006-09-06 01:26   좋아요 0 | URL
니체도 그의 대표작들의 대부분이 연금생활을 할수있게 된 이후에 나왔다죠? 로쟈님도 생계문제때문에 고민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나오게될 글들이 어떤 것들일지 궁금해집니다..하루빨리 안정된 생계수단을 확보하시길 바래요..^^

로쟈 2006-09-06 14:18   좋아요 0 | URL
생계가 해결되면 사실 '역사 이후'이죠.^^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건강하시죠?^^
 

마이페이퍼란의 '모스크바 통신' 카테고리를 비공개로 돌렸다. 이미 2/3 가량은 수정버전이나 이미지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서 다른 카테고리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내용상 중복이 되는 걸 굳이 '공개'할 필요가 없어 보였고(나머지 1/3도 유효성이 있는 대목들에 한에서 틈나는 대로 정리할 생각이다), 재작년의 '객담'인지라 이젠 그냥 조용히 혼자만의 창고에 넣어두고 보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최근에 나온 책들' 시리즈도 에피소드까지 다 정리한 줄 알았더니 자투리가 남아있길래 여기에 옮겨둔다. '오역의 세 가지 대상'이란 모스크바 통신문의 서두에 들어 있던 내용이다. 

지난 일요일에(*이 글은 2004년 6월초에 씌어졌다)  모스크바에서 한국식당이 가장 많이 밀집돼 있는 ‘아를료뇩’호텔(표기는 ‘오를료뇩’이고 모스크바대학에서는 걸어서 30분 거리이다)의 한국식당에서 일행들과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동아일보 복사판이 눈에 띄길래 들고 왔다. 마침 토요일(29일)자 신문이어서 북리뷰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0일(토)자 이후 처음으로 읽는 한국의 일간지 서평이었다(물론 인터넷에도 뜨긴 하지만).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란 책이 1면에 다루어지고 있었고, 학술란에도 눈길을 끄는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먼저, 안토니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갈무리)이 번역/출간된 걸 알 수 있었는데, 나는 아직 <제국>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참견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에게서 ‘정치’와 ‘혁명’이 당위적인 도덕론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복종하지 말고 자유롭게 행동하라. 죽이지 말고 생성하라. 착취하지 말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정도가 ‘혁명’의 강령이라면 말이다. 분석이 결여된 강령에 대해서 나는 신뢰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한 시간관만 하더라도 미래(future)와 도래(to-come)의 구분에 대한 저작권은 내가 알기엔, 데리다에게 있다. 서평자는 “가난을 연민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주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네그리는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와 만나는 셈”이라고 썼는데, 네그리는 어느새 성자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네그리에 따르면, “탈근대의 상황에 놓인 가난한 자들은 ‘다중’이라는 새로운 공통의 이름을 획득함으로써 ‘도래할 민중’이 된다. 동시에 ‘제국’은 혁명의 시간을 거치며 다중의 ‘코뮌(communism)’이 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예언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인지, 당위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인지 헷갈린다(예언적 당위인가?). 사적 유물론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더불어, “네그리에 따르면 정치란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을 뜻하고, 혁명은 권력의 전복이기 이전에 자기 삶을 긍정하며 구성하는 사건이다.”

내가 궁금한 건, 이때 변신/변혁의 주체이자 근거인 ‘자기’는 기계와의 접속 이후의 “사이보그 혹은 일반지성”에서도 관철되는가 혹은 연속적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기계적인, 영속적인 신체와 지성을 얻게 된 이후에도 ‘나’로서 ‘자기’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가? 그때도 우리는 가난한 ‘다중’이고 ‘주체’인가? 그리고, 그때는 무엇이 변하는 것인가? 그때도 삶은 삶이고, 긍정은 긍정인가?(혹 네그리를 신뢰하는 분이 계시다면 답변을 주시길. 얇은 책이니까 금방 읽어보실 수 있을 거 같다.)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은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아동도서 같은 책 표지는 뭔가?). 알다시피, 커니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철학교수’이다. 그러니까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남의 철학을 잘 소화해서 대중에 소개하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고찰’이란 부제에서 그 ‘도전’은 아마도 그의 것이 아니라, 그가 다루고 있는 다른 철학자들의 것일 게다. 어쨌든 커니는 기존의 ‘쟁쟁한’ 타자론들을 ‘초월적 입장’(데리다, 리오타르, 레비나스 등이 속할 것이다)과 ‘내재적 입장’(프로이트나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 계열)으로 나누고, ‘제3의 길’로 ‘비판적 해석학’(딜타이나 가다머)을 내세운다고 한다. 이 입장은 해체주의처럼 타자를 무조건 환대하지도 않고, 정신분석학적 입장처럼 타자를 묵살하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해석자와 피해석자라는 두 자립적 타자가 만나는 지평의 융합과정”이란 게 무엇인가? 책읽기 아닌가? 그렇다면, ‘비판적 해석학’ 모델에서의 타자와의 조우란 것은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만나게 되는 경험 아닌가? 이때의 ‘추상적 저자’가 자립적 타자인가? 게다가 ‘저자’를 숭배하지도 무시하지도 말라?! 서평으로만 판단하자면, 커니는 여전히 좋은 철학교수로 남아있는 것이 낫겠다. 참고로, 그의 <현대철학자들과의 대화>는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대심문관>(한국외대출판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수록된 ‘대심문관’에 대한 러시아 석학들의 평론집이라고 한다. 이 ‘러시아 석학들’의 면면이 어떠한지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388쪽이니까 분량도 제법 되는 책이다. 혹시 읽으시는 분은 서평이라도 올려주시길. 지금은 절판된 책이지만, 르네 월렉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열린책들)에도 대심문관을 다룬 글이 두 편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참고로, 대심문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바로 다음 장 '러시아의 수도사'를 같이 읽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린다. 그래야 균형이 맞게 된다.

어제는 푸슈킨거리에 있는 고리키문학연구소에 갔다가 작년부터 새로 나오기 시작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18권) 중 제3권을 사들고 왔다. 이 책은 현재 5권까지 나와 있는 듯하며, 책임편집자는 자하로프 교수이다. 새 전집은 창작/발표 연대별로 수록하는 게 원칙인 듯한데(이 원칙에 따른 새로운 푸슈킨 전집이 곧 나올 예정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이 필요해서 산 3권은 총 688쪽이고, 1850-62년까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대개의 일반전집보다는 큰 판형이며(연구자용으로서는 좀 거추장스럽다), 장정도 유려하고 가격도 저렴하다(고리키연구소가 좀 싸긴 하지만, 우리돈 6,500원 가량. 1-2권은 더 싸다). 발행부수는 10,000부. 문제는 언제나 완간될까 하는 것. 도스토예프스키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 본 소리이다(이런 등속의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북리뷰에 크게 건 작게 건 소개된 책은 총 29권이고, 그 중 번역서가 18권이었다. 학술서는 6권 중에 5권이 번역서였고. 대략 2/3가 번역서인 셈. 그만큼 우리의 출판과 독서문화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그런 비중만큼, 양질의 번역서들이 양산되고 있는가이다. 즉, 제값이 번역서들이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 북리뷰의 한 서평은 “하지만 그의 현란한 문장이 설익은 채 번역돼 가끔은 읽기 어려운 게 흠이다.”라고 말미에 사족을 달고 있는데, 일간지 서평자들이야 출판사나 저자들이 송부해온 책을 보는 것이니까 그런 ‘흠’에 대해서 관대할 수도 있겠다.

해서, 나는 이런 서평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신뢰하는 건 적어도 ‘사서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이다. 내가 모든 책에 쪽수와 함께 악착같이(?) 책값을 병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악착같이(!) 오역에 대해서 물고 늘어지는 것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본전 생각’ 때문이다. 책은 책다워야 하며, 비싼 책은 비싼 책다워야 한다(이걸 ‘정명(正名)사상’이라고 하던가? 다르게 말하면, ‘정가(正價)사상’이다!).

2004.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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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6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번에 미처 다루지 못한 책들을 마저 다루기로 한다. 어느새 '가정의 달'도 다 지나가버렸는데, 지난 토요일에는 아이의 유치원에서 준비한 '가족의 날' 행사가 우천으로 취소되는 바람에(우리 가족은 아침, 점심을 김밥으로 때웠다) 본의 아니게(!) 번듯하게 아이에게 뭐 하나 해준 것 없이 보내게 되어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걸 좀 만회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 고른 책은 아동 정신분석에 관한 것이다(이게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인가?).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가 프랑수아즈 돌토의 <도미니크 이야기>(동문선, 2006)이 그것인데, 그녀에 관한 전기 <프랑수아즈 돌토>(도서출판 숲, 2003)는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다(돌토에 관한 보다 간랸한 설명은 <위대한 7인의 정신분석가>(백의, 1999)를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알고보니 그 사이에 돌토의 책이 몇 권 더 출간되었다. 한데, 기독교에 관한 책 두 권을 빼면, <어린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도서출판 숲, 2004)가 <도미니크 이야기>와 함께 아동 정신분석에 관한 책으로 분류될 수 있겠다(그 책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부재중'에 출간된 탓이다).

해서, 이 세 권 정도를 좀 읽어주는 계획도 세워봄 직하다. 아이가 당장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부모라면 한번쯤 읽어보면서 자기반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더불어, 아이들을 좀더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두번째 책은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원제는 'The Culture of Love'(1992)인데,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란 부제를 달고 있기에 '사랑의 문화'가 됐다.  일단 책이 눈에 띄는 건 (번역서라 좀 부풀려졌다 하더라도) 76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그리고 저자가 이미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 등 인상깊은 문화사 서적을 써낸" 전력을 갖고 있기에 신뢰할 만하다는 것. 문화사 방면으론 '서양 문화사 500년'이라는 큼직한 부제를 달고 있는 자크 버전의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도 눈에 띄는 신간이다. 두 권 합해서 1,500쪽이 넘는다. 하긴 500년의 문화사를 정리한다고 하니까 그만한 분량은 필요했을 법하다. 스티븐 컨의 책들과 함께 '교양 문화사 사전' 정도의 쓰임을 가질 수 있다. 

책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사랑의 역사를 추적해 본다. 정확히는 <제인 에어>가 출간된 1847년부터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1934년까지 87년간의 시기를 무대로 삼고 있다. 기다림을 시작으로 만남, 사랑의 언어, 입맞춤, 질투, 결혼식을 거쳐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하면서 마주치는 기본 요소들을 키워드로 삼고, 이러한 특정한 상황이 문학/예술 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당장은 특별히 사랑할 사람이 없는 이들도 애완견 돌보는 시간을 쪼개서 한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1500년 서양사를 네 가지 혁명으로 구분한다. 종교혁명과 군주혁명, 자유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그것. 책은 각 부마다 각 혁명이 일으킨 인간관의 변화가 문화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르네상스·바로크 미술·낭만주의·사실주의·모더니즘 등의 예술 사조와 마키아벨리와 스위프트·바흐와 모차르트 등의 세기를 주름잡은 인물들이 다채롭게 묘사된다. 지은이는 500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인간의 욕망, 즉 인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요소로 해방, 개인주의, 원시주의, 추상, 분석, 세속주의, 과학만능주의 등의 키워드를 든다. 그래서 이 책이 풀어내는 서양 문화사는 이들 요소의 다양한 비율에 따른 배합 결과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통사'는 아니고 그걸 저자 나름대로 꿰는 틀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

 
 
 
 
 
 
 

세번째 책은 히틀러를 사랑한 여인, 혹은 히틀러가 사랑했던 여인, 어느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20세기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란 평과 나치의 핀업걸이라는 혹평이 교차하는 걸출한 여성 감독 겸 사진작가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의 전기,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마티, 2006)이다. 650쪽 정도 되니까 이 또한 전기로서 듬직하다.

사실은 나도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을 통해서 리펜슈탈을 알게 됐을 만큼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들었나는 기록영화의 목록들은 '아!'라는 감탄사를 자연스레 유도한다(그녀의 영화는 <죽기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 포함돼 있으며, '미디어미학'의 중요한 탐구 대상이다). 알라딘에 전기에 관한 소개가 생략돼 있기에, 간단히 사전적인 인물 소개를 옮겨온다.

-나치 운동을 힘차고 화려하게 극화한 1930년대 기록영화로 유명하다. 베를린에서 그림과 발레를 배웠고 1923~26년 유럽순회 무용공연을 가졌다. 자연, 특히 산악의 경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독일영화의 한 형태인 '산악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방면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1931년 레니리펜슈탈영화사를 만들었고, 1932년 <푸른 불빛 Das blaue Licht>의 각본을 쓰고 감독·제작·주연을 맡았다.

 

 

-나치당의 지원을 받아 신체의 아름다움과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찬양하는 영화들을 감독했다. <신념의 승리 Sieg des Glaubens>(1933)는 아돌프 히틀러가 주문해 제작한 단편 영화이며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는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주의깊게 관찰한 중요한 기록영화로서 나치당의 결속을 강조하고 독일민족에게 당의 지도자들을 소개했으며 나치의 힘을 세계에 과시했다. 그리고 <올림픽 경기 Olympische Spiele>(1938)는 1936년에 열린 올림픽 경기를 <민족의 축제 Fest der Völker>와 <아름다움의 축제 Fast der Schönheit>라는 2부로 편성해 영화화한 것으로 스튜디오에서 만든 감명깊은 음악과 음향효과를 만들어 찬사를 받았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풍부한 음향 효과, 뛰어난 편집, 새벽의 아름다운 정경이나 산악지대, 독일의 전원생활 등을 영화에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가 만든 영화가 나치를 돕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뒤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나치와의 전쟁공범죄가 공식적으로 씻겨진 뒤인 1952년 다시 영화에 복귀하여 일찍이 전쟁 때문에 제작을 중단했던 영화 <저지대 Tiefland>를 완성했다. 1973년 그녀의 아프리카 사진집 <누바족의 최후 Die Nuba>가 출간되었다.(*손택의 리페슈탈론은 이 사진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책에 대한 동아일보(06. 05. 27) 이기우 기자의 리뷰.

-그녀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 있었다. 어디에 있든 바로 눈에 띄었다. 정열적이었고 자신감에 넘쳤다. 도도함과 오만함은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원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화려한 외모로 거장들을 ‘손에 넣었다’.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녀의 작업에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

-당시 독일 여자들은 나치의 규율에 따라 비스마르크가 격찬한 3K, 아이(Kinder) 교회(Kirche) 부엌(K¨uche)에 만족해야 했으나 그녀만은 예외였다. 사전 약속 없이도 히틀러를 둘러싼 두꺼운 호위망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와 히틀러는 둘 다 몽상가였다. 신화를 사랑했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히틀러를 지지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을 때 그녀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외친다. “나는 히틀러를 믿었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날 죽여요!”

-이 책은 극단의 세기였던 20세기를 ‘금지된 열정’으로 살았던 레니 리펜슈탈의 일대기다. 유망한 무용가이자 매혹적인 영화배우였고 20세기 최고의 천재감독이었던 여인, 그러나 ‘악마(히틀러)의 감독’이자 ‘나치 핀업걸’로 기억되는 한 여인의 처연한 삶의 초상이다. 리펜슈탈이 히틀러의 요청으로 만든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영화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낭만적인 동시에 서사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현실감 넘치는 이 영화는 당시의 카메라 기술로 촬영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영화비평가들은 신음하듯 뱉었다. “서정의 적(敵)으로부터 나온 이 서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리펜슈탈은 영화를 통해서 정말 히틀러의 사악한 제국을 선전했는가? 그녀의 예술적 삶을 ‘우울한 열정’이라고 표현했던 수전 손택은 그녀의 다큐멘터리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지도자에 대한 숭배를 통해 육체와 공동체의 재탄생을 찬양하고 있다며 ‘파시스트 미학’이라고 규정했다(*손택은 <올림픽 경기>와 <누마족> 사이의 '연속성'을 지적한다).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뒤 법정에서 “처벌할 수 있는 범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독하게 버려진다. 그녀는 비공식적인 블랙리스트에 올려졌고 다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책임도 있었다. 리펜슈탈은 존재 자체가 너무나 현란해서 그녀의 등장은 마치 파시스트의 악령이 되살아온 것과 같았다. 자신을 비난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열린 재판정에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관능적인 승마복에 굽이 15cm가 넘는 샌들을 신고 요염하게 걸어 들어서기 일쑤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온건한 견해가 불가능했다. 끔찍하거나 위대하거나! 천재이거나 악마이거나!

-그녀는 정치적으로 순진했다. 아니, 백치였다. 그녀의 삶을 좇으며 시종 그녀에 대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진한 연민을 드러내온 저자는 독백하듯 읊조린다. “그 광란의 파시즘 시대에 정치적 무지야말로 가장 큰 범죄는 아니었을까….”

해서 파시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도 그녀의 전기는 일독의 가치를 충분히 갖는다(파시즘의 '우울한 열정'은 '원시적 열정'이기도 하다는 그녀는 생생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녀가 갖고 있었던 건 '정치적 무지'가 아니라 그러한 '정치적 무의식'으로서의 '정치적 예지'가 아니었을까?). 

 
 
 
 
 
 

 

네번째 책은 '세계화 시대 라틴 아메리카 영화'를 다룬 임호준의 <시네마, 슬픈 대륙을 품다>(현실문화연구, 2006)이다. 영화의 변방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차고 진보적인 영화운동의 산지,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에 대해서 이만한 규모로 다룬 책이 더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단 주목에 값하는 책. 소개에 따르면, "세계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1950년대 중반 신영화운동 이후, 독창적인 미학으로 치열하게 현실을 담아내 온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대한 안내서. 현대라틴아메리카영화의 화제작들을 총망라하여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무의식을 추적했다."



조금 부연하면, "브라질,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라틴아메리카 영화 60여 편에 대한 소개와 130여 장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루시아>, <오피셜 스토리>,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이 투 마마>,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 각각의 영화들이 나오게 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책의 표지로 사용되고 있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이미지처럼, 영화를 타고 가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 일주기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가는 김에 라틴 아메리카에 관한 책 몇 권도 같이 끼고 가면 더 좋을 듯.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아이리스 장의 난징대학살에 관한 기록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이다. 이전에 <난징대학살>(이끌리오, 1999)로 한번 출간된 적이 있는데,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듯하다. 아무튼 새로이 출간된 이 끔찍한 기록을 나는 바로 주문해서 입수했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펼쳐보지 못하고 있다(이 거리낌은 이 페이퍼가 늦춰지는 데도 한몫했다). 해서 일단은 동아일보 김희경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5. 20) 1937년 12월 중국 난징(南京)은 ‘살아 있음이 불길하게만 여겨지는 곳’이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7주간 학살한 중국인은 26만∼35만 명. 눕혀 놓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35km나 이어질 숫자이고 위로 쌓는다면 빌딩 74층 높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일본군이 희생자들에게 최대한의 고통과 수치를 주면서 학살했다는 사실이다. 남성은 총검술 연습, 목 베기 시합의 대상이었고 2만 명이 넘는 여성이 강간당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다큐멘터리 작가인 저자는 1997년 이 책을 펴낸 뒤 일본 우익세력의 끝없는 협박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4년 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징 대학살이 규모와 잔혹함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2차 대전 후의 냉전적 상황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고, 일본은 다른 패전국이 받은 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 중국과 대만은 일본과 교역 물꼬를 트려고 경쟁하느라 전쟁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책에 실린 사진과 학살의 사실적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참혹하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실상을 알리는 것을 뛰어넘어 처참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본성과 아이러니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본의 만행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추적하면서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종잇장처럼 얇은지, 권력이 얼마나 쉽게 10대 소년들의 천성을 변질시켜 살인 병기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나는 이러한 야만성이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절대적인 무능력/불가항력에 처해 있는 타자를 학대/살해하는 대신에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반복하자면, 우리의 문명이란 얼마나 얇은 것인가!).

-드라마틱한 사람들의 인생 유전도 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난징에서 중국인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 욘 라베는 난징의 나치당 리더였다. 그는 독일에 돌아가 난징의 실상을 알리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됐고 전후에는 나치 전력 조사를 받으며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난징 대학살은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나는 책을 내년쯤에나 읽어야겠다). 저자가 책을 쓰는 동안 마음 깊이 새겨 두었다는 경고는 이 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평범한 인간들의 비범한 잔악성을 상기시켜주는 책으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의 회고록이 있다. 한국일보의 리뷰를 옮겨온다.

한국일보(06. 05. 20) 헤스의 고백록 "나는 악마가 아니였다"

-헝가리 40만명, 프랑스 11만명, 네덜란드 9만5,000명, 슬로바키아 9만명….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헤스(1940~1947)가 기억하는 학살 유대인 숫자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죽었는지 알지 못하며 심지어 어림짐작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가 죽인 유대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실제 1940년 5월부터 나치가 망할 때까지 살인공장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나간 유대인, 소련군 포로, 집시 등은 250만명을 넘는다. 그러니 아우슈비츠를 만들고 가스 살상법을 개발해 집행한 헤스를 악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남긴<헤스의 고백록>을 읽으면 그는 악마 같지가 않다. 정신 이상자도, 성격 파탄자도 아니다. 어려서는 아버지로부터 누구에게라도 정중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간호사와 나눈 첫사랑은 전 생애에 걸쳐 그를 인도해준 싹이 됐다.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버지요 착한 남편이었다. 직무에 충실했고 술,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교양 수준도 높았다. 그 때문인지 그는 수기의 끝에서 자신이 “악인은 아니었다”고 적었다.

-그래서 놀랍다. 광인이나 정신 착란자였다면 특이한 예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그 같은 대량 학살을 해치웠다는 점이 더 무섭다. 나치 독일이 단지 폭력적 강제 만이 아니라 헤스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가와 행동에 의해 존재했다면, 나치 독일에서 행해진 그 끔찍한 일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아렌트의 표현을 빌면, '악의 평범성' 혹은 '악의 진부성' 문제이다.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란 경악은 이 문제를 숙고하는 데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가 있다는 가정하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 라고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한겨레(06. 05. 19) ‘그래,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So You Think You’re Human?) 원제는 이처럼 다소 도발적이다. 도발적이지 않다면, 당혹스럽다.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아카넷 펴냄)라는 번역본의 제목은 원제를 상당히 점잖게 누그러뜨린 셈이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 그러니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향해 질책하듯 던지는 말은 아니다(아니, 사실은 그런 질책의 뜻을 담은 질문인 것일까).

-런던대 지리학 교수인 역사가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가 쓴 이 책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정의와 범주, 그 정합성과 타당성을 따져 묻고자 한다. ‘인간’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종다기하겠지만, 역사학자인 지은이가 동원하는 방법론은 역시 역사적 접근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그 타당성과 설득력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거나, 자기가 혹시라도 인간 아닌 다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자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의 진술일 터이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왜 새삼스럽게 인간의 정의를 문제 삼고 나섰는가. 자명한 것 속에 함정이 있으며, 자명한 것이 왜 자명한지를 따져 묻는 것이야말로 진정 학문적 태도임을 그가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에 깔고 그는 인간에 관한 역사적 정의의 타당성을 점검한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전통적인 요소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도구와 언어, 문화 등이 있다. 그러나 영장류 동물학의 최근 연구 성과들은 이런 특징들이 인간만의 몫이 아님을 속속 밝혀 내고 있다.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개미집에 집어 넣어 거기에 달라 붙은 개미를 떼어 먹는 유명한 사례는 제인 구달의 선구적 연구 덕택에 보편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단한 나무 열매를 쪼개기 위해 두 개의 돌을 이용하는 원숭이는 물론, 조개 껍질을 깨기 위해 돌을 이용하는 수달을 보더라도 도구 사용에 관한 인간의 독점권은 인정하기 어렵다.

-언어 역시 인간만의 몫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벌·개미와 돌고래, 박쥐 등의 고유한 의사전달체계는 인간과 다른 방식의 ‘언어’로 볼 수 있으며, 영장류들을 훈련시켜 얻은 결과는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습득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말을 알아듣는 개와 앵무새의 사례 역시 참조할 만하다.

-언어와 도구가 아닌 ‘문화’라는 고급스러운 현상으로써 인간의 고유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려 할 때 수컷 침팬지들이 모여 똑같은 방식으로 몸을 흔들고 발을 구르는 ‘비 춤’의 사례 보고라든가, 죽은 토끼나 바퀴벌레를 종일 머리에 얹어 두고 만족스러워하는 암컷 보노보들의 행위는 영장류들에게도 나름의 문화가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

-일본 코시마 섬의 짧은꼬리원숭이 집단에서 목격된 행동의 혁신과 보편화 과정은 특히 놀랍다. 관찰자들이 ‘이모’라는 이름을 붙인 천재 암컷 원숭이가 농부에게서 얻은 고구마를 개울물에 헹구어 흙을 씻어 내고 먹기 시작하자 그 방법은 이내 다른 동료 원숭이들에게 확산되었다. 이모는 또 인간들이 해변에 뿌려 주는 밀에 모래가 묻어 먹기에 힘들자 밀과 모래를 함께 물에 뿌리고는 물 위에 떠오르는 밀만을 건져 먹는 방법을 개발해서 역시 무리들에게 전파시켰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지은이는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일종의 ‘복권’을 주창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생 인류의 조상과 상당 기간 동안 공존하다가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물질문명을 이루었으며 죽은 이를 매장하고 그 위에 꽃을 뿌리는 식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의 조상에 비해 여러 모로 열등했다는 주장을 하며 그에 어울리는 증거를 찾기에 열을 올린다.

-지은이는 이런 태도에서 흑인을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적 존재’로 보고자 했던 19세기 인종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과거에 인간과 사실상 구분되지 않는 인간 아닌 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이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게다가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의 불가피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야말로 ‘인간적 가치라는 신화’를 보존하고 확산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간곡한 제언이다. 그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서 기왕의 인간 개념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인간적 겸손와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 ‘이웃 동물’들의 권리와 행복 역시 침해하지 않는 평화적 공존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가령 동물들 역시 자기 영역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잡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무언가를 빼앗기는 실험을 당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권리를 지닌다는 동물 권리운동가들의 주장에도 새겨 들을 바가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이며 다른 모든 생명을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하거나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인간 중심주의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 개념의 경계는 분명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 개념은 아직도 놀랄 만큼 확장될 여지가 있다”는 지은이의 결론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이같은 염원을 바탕에 깔고 있다.(최재봉 기자)

06. 05. 28 -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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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4 2006-06-09 13:33   좋아요 0 | URL
아... 이 페이퍼는 언제 완료 되나요? 계속해서 뒤페이지로 밀려나는군요.^^;;

로쟈 2006-06-10 02:00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부득이한 개인사정까지 겹쳐서 계속 미뤄지고 있습니다. 79나 80회 정도는 정리하고 있어야 하는데, 워낙에 실속이 없는 일이라 보니(--;)...

GoNgo 2006-08-07 17:22   좋아요 0 | URL
로쟈님 덕에 보관함에 책이 자꾸 늘어만 갑니다. 보관함 비우면서 5권 감사의 표시를 했습니다. '워낙 실속이 없는 일이라'시기에 보잘것없는 답을 해봅니다.^^;

로쟈 2006-08-07 19:49   좋아요 0 | URL
별 실속 없는 얘기를 다 마음에 담으시네요.^^ 그저 피로감 정도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일이라!..
 

바쁜 일들을 핑계로 '최근에 나온 책들'을 외면해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울 리는 없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빨리 해치우는 게 제일 속편한 일일 듯싶다. 연재를 조금 늦추는 바람에 다루어야 책들이 좀 많다. 성큼성큼 보폭을 좀 늘려잡아야겠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책이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휴머니스트, 2006)이다. 소위 '고전해제'류에 해당하는 책인데, 기획과 편집에 꽤 손이 많이 간 것으로 입시 논술 등을 준비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생, 일반인들에게도 '서양 고전'에 대한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는 동양편으로 이미 2권을 출간한 바 있는데, 아마도 4권까지 나온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의 '성공'에 힙입어(내가 이 출판사의 책을 처음 접한 것도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시리즈를 통해서였지 않나 싶다) '고전'에까지 손길을 뻗은 게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교양'과 '고전'은 거의 '한 식구'라고도 할 수 있으니(고전에 대한 식견이 바로 교양 아닌가?) 이 '손길'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잠시 소개를 옮겨보면, "총 네 권에 걸친 방대한 분량으로 각 분야/각 권마다 '시간과 문명의 파노라마', '정의와 권력, 정치 변증법' ,'영혼과 성장' 등의 주제에 따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20세기 현대 지성들의 저서까지 고전들을 선정, 소개한다. '교과서적인 고전 편식'을 지양하고 우리 사회에 가장 깊고 넓게 영향을 끼치는 책, 21세기 한국의 문화 상황에서 다시 읽으면 좋은 작품을 선정했다."

 

 

 

 

그렇게 선정된 목록을 죽 훑어보았는데, 인문/자연과 정치/사회 분야에서 특별히 억지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책은 보이지 않는다. 대개가 고전으로서의 평판을 얻고 있는 책들이란 얘기이다. '문학'쪽에는 다소 눈길을 끄는 책들이 몇 권 포함돼 있는데, 먼저 시집들. 릴케의 <릴케 시집>과 하이네의 <노래의 책>(이상 독일어권), 푸슈킨의 <서정시집>(러시아), 엘리어트의 <황무지>(영미권), 네루다의 <모두의 노래>(스페인어권) 등이 언어권별로 선정된 듯한데, 프랑스 시인들이 빠진 것이 좀 특이하다(요컨대, 보들레르가 빠져 있는 것). <모두의 노래>를 제외하면(음반에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모두가 번역본이 나와 있는 작품들이다(푸슈킨의 경우엔 단도직입적으로 운문소설 <예브네기 오네긴>을 꼽는 게 어땠을까 싶다).

 

 

 

 

소설의 경우에도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이나 발자크의 <잃어버린환상>, 만초니의 <약혼자들> 등이 포함된 것은 안심할 수 있는 번역본들이 출간된 사실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특이사항이라 할 만한 것은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등이 포함된 것인데, 파농의 책이야 번역서라도 있지만, 생소한 피어시그(1928- )의 책은 어떤 연줄로 포함된 것인지?(굳이 지적하자면, 플로베르와 조이스도 빠졌는데 말이다. 프루스트는 분량 때문에 뺐다손 치더라도.)

물론 그의 작품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이 멜빌의 <모비딕>에 비견되기도 할 만큼 중요한 작품이라지만, 문제는 독자가 우리말로 읽을 수 없다면 말 그대로 '그림의 떡' 아닌가? '21세기 한국이 문화적 상황에서 다시 읽으면 좋은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읽을 수라도 있으면 좋은 작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니까. 여기서 '고전'에 대한 한 가지 원칙에 합의할 수 있는데, 그건 일차적으로 '번역'돼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손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본이 나와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같은 경우는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2005)에 따르면 다수의 번역본들에도 불구하고 추천할 만한 번역이 한 종도 없는 걸로 돼 있는데(제목은 '막대한 유산'으로 하고), 이 해제를 읽은 (청소년을 포함한) 독자들은 어떻게 '고전'과 만나야 하는 걸까? 궁극적으로 '고전해제'라는 것은 고전 읽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읽기를 제안하고 유혹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할 때 말이다. 해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또다른 원칙은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어야 한다는 것.

 

 

 

 

거기에 마지막 원칙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가벼운 해제'와 함께 '부피 있는 독해'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필요에 따라 우리는 고전을 (다이제스트로) 줄여 읽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고전의 '본때'를 맛보게 해줄 만한 책들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원칙이 고전 읽기와 이해의 3박자라고 생각한다(우리네 인생살이는 네박자라지만, 교양은 세박자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한 고전 작품에 대해서 우리는 적어도 3종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해서,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에게 서양 고전을 어떤 의미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그런 물음을 가능하게 할 만한 조건을 우리가 충족시키고 있는가를 따져물어야 한다. 그건 우리 사회의 교양지수를 묻는 것과 같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 최근에 나온 <파우스트> 번역과 주해서, 연구서 3권이다. 이 책들은 교양 3박자에 대한 요구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시키고 있기에 그러하다.

먼저, 이인웅 교수의 새번역 <파우스트>(문학동네, 2006). "괴테가 1773년 집필을 시작해 1831년 완성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걸작 <파우스트>를 들라크루아의 석판화 연작, 막스 베크만의 펜 소묘 삽화와 함께 수록했다. 국내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번역 및 연구 성과를 집적한 완결판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책"이라는 것이 의의로 제시돼 있는데, 의당 기대해볼 만하지 않는가? 거기에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담은 <파우스트 주해>(한국외대출판부, 2006)과 공동 연구서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문학동네, 2006)은 <파우스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심화시켜줄 것이다. 작년에 나온 <괴테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여성들>(서울대출판부, 2005)까지 챙겨두게 되면, 가히 전문가 수준의 교양이라 할 만하다.  

 

 

 

 

해서,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에 한정하더라도 선정된 68종에 대한 이러한 검토작업이 필요하다. 번역되었는가, 신뢰할 만한 번역인가, 주해서가 나와 있는가, 새로운 독해/연구가 소개돼 있는가, 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살펴볼 형편은 아니지만, 3박자가 고루 갖춰진 경우도 있고 2박자 정도의 빠른 템포에 엇박자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령,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처럼 예전에 두어 종이 번역돼 나왔지만 모두 절판되어 현재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역설적인 건 2차 참고문헌들은 다수 나와 있다는 것), 다윈의 <종의 기원>처럼 여러 종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지만 전공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책들도 적지 않다(일반인들은 '대에충' 읽으면 된다는 뜻인가?). 때문에 우리사회는 분류하자면, '아직도 교양이 고픈 사회'이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의 취지는 이렇다: "단순한 고전 해제를 넘어서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동시대인들과 청소년들에게 걸맞는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고전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들 대표독자들이 제시하는 고전에 대한 시각과 문제의식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고전해제'를 읽고서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간다는 건 물론 오버이고 과장이다.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가기 전에 '있는 고전들'만이라도 꼼꼼히 자신의 힘으로 읽어내는 것이 우선적이며, 그게 '진짜 교양'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만 하더라도 수 종의 번역서 중 하나 정도는 읽어주고,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선언>(그린비, 2005)로 역사적 배경을 확인해둔 다음,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선언>(뿌리와이파리, 2006) 같은 책을 통해 한 장이라도 자세히 따라 읽어보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 강유원에 따르면 그게 '근대인'의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구축하자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왕의 권력을 신이 준 것이라고 하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인간 중심의 사회를 이룩하려 하였다. 이들은 긴간의 힘에 의해 파악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의 교양을 형성하였다. 이들이 부르주아로 불리는 근대의 시민인데 고전적 의미에서의 우파, 즉 오늘날의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다. 즉, 근대의 지식인이라 하면 일단 누구나 다 우파 수준의 교양을 갖춘 셈이다... 그러니까 일단 '근대인'이라 하면 우파적인 교양을 갖추는 게 기본이다.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골고루 먹고사는 문제, 그러니까 평등의 문제 등을 고민하면 좌파인 거다. 우파건 좌파건 근대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람들 모두 교양인이다."(50-1쪽, 강조는 나의 것)

 

 

 

 

흥미로운 대목인데, 일단 '근대인=교양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의 '교양인'이란 '우파 부르주아지(시민)'라는 것. '좌파'는 그 '우파 부르주아지'에서 나온다는 것(일단 기본 교양을 갖춘 우파가 평등의 문제를 고민하면 좌파라는 것이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교양 대가리' 없는 놈들이 좌파 행세하면 안된다). 예전에 나는 강유원이 '배고픈 우파'가 아닐까란 지적을 했었는데, 크게 잘못 짚은 것 같지는 않다. 좌파가 되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교양있는 우파가 될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니까('이사야 벌린' 정도 된 이후에 '칼 마르크스'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니까. 마르크스 또한 일차적으론 '근대적 교양인'이었다).

조금 확대해석하면, 그는 고전적인 역사적 유물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좌파 혁명)'보다 '부르주아 혁명(=우파 혁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그런 관점에 설 경우, (조급했던) 러시아 혁명이 정통에서 일탈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더불어, 교양이 아닌 '품성론'에 기초한 현실 사회주의가 '전근대적' 체제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없는 것들'이 순서도 모르고 나서면 곤란한 것이다.  

아무려나 우파이건 좌파이건 간에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근대인이 알아야 할 모든 것'으로서의 '교양'이란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는 그 문턱에서 요긴한 가이드북 노릇을 해줄 것이다(하긴 68종의 고전에 대한 3종 세트를 구입하여 읽을 만한 여가를 프롤레타리아가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전무할 터이니 교양은 우파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아닐 도리가 없다. 이건 혹 딜레마가 아닐까?).

 

 

 

 

교양 있는 분들을 위한 책으로 또한 꼽을 만한 것이 <브레히트 희곡선집1, 2>(서울대출판부, 2006)이다. 예전에 '한마당'에서 브레히트 선집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정격 번역이 두 권 분량으로 묶여서 출간된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역자는 브레히트와 독일 희곡의 전문가이며 유려한 문장을 자랑한다). 사실, 폴 존슨의 보고에 따르면, 브레히트야 말로 '배부른 좌파'의 표본적인 작가였다(고가의 노동자복을 맞춰 입고 다녔던 브레히트는 자기PR의 귀재이기도 했다). '배고픈 좌파'라는 게 편견일 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곡들은 고전으로서의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 한 작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천적인 재능(=문학적 재능) 못지 않게 후천적인 재능(=정치적 감각)도 갖추어야 함을 웅변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 -동양문학편>(휴머니스트)에 '해제'가 포함돼 있는 시선(詩仙) 이백의 시선집 <이백 오칠언절구>(문학과지성사, 2006)를 꼽아두기로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백 시세계의 백미를 담아낸 책. 현전하는 이백의 절구시(絶句詩) 전체인 187수를 우리말로 옮기고, 이백 시의 전문 연구자 황선재 씨의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소개했다. 이백의 시 중에서 가장 짧은 형식인 '오.칠언절구시'만을 묶어 펴낸 것은 중국을 포함하더라도 이 책이 세계 최초이다." 이 어이 아니 주목할 수 있겠는가?

"오칠언절구(李白 五七言絶句)는 이백의 작품 1천여 편 가운데 가장 짧은 형식의 시로서, 작품 한 편이 오언절구는 20자, 칠언절구는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시 한편은 비록 짧지만, 그 가운데는 오묘한 진리와 풍부한 음악성이 스며들어 읽으면 읽을수록 운치 있는, 즉 말은 다했지만 뜻이 무궁하게 남는 경지(言有盡而意無窮) 속으로 몰고 간다. 이백 시를 내용에 따라 15장으로 분류하고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백 시로 추정되는 17편을 추가해 이백 오칠언절구 전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 한시 원문을 읊고 적확한 우리말로 음미한 뒤, 이백의 생애와 역사 등 시가 씌어진 배경 해설을 함께 읽을 수 있다."

 
 
 
 
 
 

러시아 문학에서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당시(唐詩)에서 '이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알다시피 시성(詩聖) '두보'이다. 이 기회에 두 시인에 관한 책들과 두보 시선도 몇 권 눈여겨 봐두도록 한다(두시에 대해서는 고전적인 '언해'와 현대적인 '언해'가 제법 출간돼 있다). 자, 이런 것들이 '고전'들이다. 이걸 읽고 음미할 만한 여유만 각자 마련하면 되겠다...

06. 05. 24-28.

 

 

 

 

P.S. 그럴 만한 여유/형편이 안되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그런 이들은 '세계의 고전'이니 '서양의 고전'이니 다 (개)무시하고, 백석의 시집 한 권과 최근에 나온 고형진 교수의 <백석 시 바로 읽기>(현대문학, 2006) 같은 책 한 권 정도 사놓고 틈틈히 읽어보면서 노트에다 시와 자기만의 감상을 적어보는 걸로 '교양'을 대신하면 되겠다. 백석의 절창 '흰 바람벽이 있어'(1941)에 나오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시인 안도현이 자신의 시집 제목으로도 갖다쓴 시구이지만, 그가 멋있는 제목에서 빼먹은 것은 '가난하고'란 단어였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오늘도 '흰 바람벽'을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과 함께 오래 응시해볼 일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절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 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격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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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 2006-08-09 09:17   좋아요 0 | URL
언급하신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은 이미 우리말 번역본이 있습니다. 절판되었지만, 도서관에서는 찾아볼 수 있지요. <선을 찾는 늑대> 로버트 M. 퍼시그 저 ; 一指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1.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인 <라일라>(로버트 퍼시그 지음 ; 정영목 옮김 김영사, 1994)도 나왔지만 역시 절판되었군요.

로쟈 2006-08-09 11:43   좋아요 0 | URL
그랬었군요.^^ 동명의 책이 검색되지 않아서 나온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참에 새 번역본이 나왔으면 싶네요...
 

이전에 29회까지 연재했던 ‘최근에 나온 책들’의 30회를 쓰기로 한다(*이 글은 2004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졌고, 모스크바통신에도 나누어서 올린 적이 있다. '에피소드' 시리즈의 '에필로그'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시 올려놓는다. 31회부터는 '로쟈의 노트2'에 연재돼 있다).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제 한국식당에 갔다가 지난 토요일자 동아일보의 복사본 한 부 들고 왔기 때문이다. 토요일자에는 물론 북리뷰(‘책의 향기’)란이 실려 있다(동아일보는 아직 타블로이드판 북리뷰를 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의 향기’에 소개된 신간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끄는 책 5권 꼽아보았다. 물론 이 선택은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반드시 꼽혀야 하는 것들로는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원제는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등이 있고,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슬그머니 출간됐지만, 지난주 북리뷰에는 빠진 걸로 봐서 이미 그 전 주에 다 ‘소화’되었던 모양이다. 언급한 저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신뢰하는 이들이며(번역자들 또한 어느 정도 수준급이다), 그 책들은 모두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리라고 본다. 서울에 있었다면, 벌써 각 권의 몇 페이지씩은 읽어 넘겼을 테지만, ‘현지사정상’ 나는 이 책들을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에 넣어두는 걸로 일단은 만족한다.

 

 

 


그럼,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무엇이냐? 그건 학술면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리차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원제가 'The Extended Phenotype'인 이 책의 2판이 1999년에 나왔는데, 국역본은 이 2판을 옮긴 듯하다(2판에는 다니엘 데넷의 후기가 들어가 있다). 알다시피, 도킨스의 출세작은 <이기적 유전자>이며, 이 책 역시 1판과 2판(개정판)이 있는바, 우리말로는 둘 다 번역돼 있다. 1판은 이용철 번역으로 동아출판사에서 나왔었고(현재는 품절된 걸로 보인다), 2판은 홍영남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현재도 잘 나가고 있다). 이번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은 그 후속작인데, 도킨스 자신이 (자신있게!)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유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개체들마저도 자신의 운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아마도 책은 그 사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예컨대, “거미줄, 흰개미집, 새의 둥지와 같이 동물이 만들어낸 인공물들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논리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보면 우리의 문화와 문명도 결국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전자의 전략과 그 결과로서의 ‘확장된 표현형’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side-effect)이나 오작동(malfunction)이다. ‘눈먼 유전자’들의 전략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목표한 타깃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라는 반박도 충분히 가능하다(하지만, 그런 반박의 타깃은 나이브한 ‘유전자 결정론’일 뿐이다). 즉, 진화는 적응(adaptation)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표현을 빌면) 외적응/굴절적응(ex-adaptation 혹은 exaptation)의 산물이기도 하다(지젝, <이라크>, 83쪽). 좀더 쉽게 말하면, 진화는 ‘의도한 적응’과 ‘의도하지 않은 적응’의 복합적 산물이다(가령, ‘의도하지 않은 아이’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하는 커플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뒤집어 말하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조차도 ‘조물주-유전자’의 확장된 손(=섭리)이 만들어낸 ‘효과’일 뿐이며, 유전자의 메시지(=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다만 상상계-상징계-실재라는 프리즘을 관통하면서 굴절될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혹은 그 분리 자체가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이 두 ‘문턱’에 대한 참조 없이 우리의 마음과 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수다’는 어느 때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말은 이런 책들을 읽으시라는 것이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다.

 

 

 

 

오래 전 얘기지만, 한 대학 신입생이 당시에 과 조교였던 나에게 추천도서를 물어왔다. 내가 골라준 책 세 권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한권을 덧붙인다면, <장자>를 집어넣고 싶다). 물론 그 신입생이 이후에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거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 다 읽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조개삿갓이나 말미잘, 수달 등과 다른 점은 그런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그런 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우리의 게으른 정신은 저 혼자 알아서 크지 않으며 끊임없는 자양분과 닦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달의 친구들’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도킨스는 다윈-예수의 바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인 지젝과 유사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또한 유사한 운명을 겪은 책들이다. 각각 <이기적 유전자>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어제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다. *위의 이미지)이라는 ‘처녀작’으로 (본인들도 놀랄 만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도킨스나 지젝이 자신들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리고 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 후속작들인 <확장된 표현형>과 <그들은…>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점은 두 저자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도킨스를 처음 읽은 것은 11-2년쯤 전이다. <도덕적 동물>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의 <3인의 과학자의 그들의 神>(정신세계사)를 읽고, 그 3인의 과학자 중 한명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게 <이기적 유전자>(동아출판사)의 1판이었다(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은 몇 년 뒤에 나왔다). 당시에 (적어도 국내에서는) 거의 주목 받지 않은 책이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미 제목만으로도 책은 나에게 숨통을 터 주었다. 이후에는 물론 ‘도킨스의 모든 책’이다(그러면서 알게 된 이가 <다윈 이후>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이다).

나는 작년에 <확장된 표현형>의 원서(2판) 또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장서용’으로 사서 서가에 꽂아 두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도 몇 권 더 갖고 있다).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굳이 원서를 살 필요는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역본에 이제야 나와서 다소간 ‘유감’이지만, 그 유감은 ‘반가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

 

 

 



두번째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북리뷰에서 톱으로 다룬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원저(Who are we?)가 올해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아마도 곧장 국역본이 나온 듯하다. <문명의 충돌>도 나는 읽지 않았지만(하도 떠들어대기 때문에 안 읽어도 내용을 아는 것 같은 책들이 있다), ‘미국의 정체성’이란 제목이 더 걸맞은 이 책 또한 굳이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적어도 돈 주고 사서는). 하지만, 읽을 ‘필요’는 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세계관보다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한미관계에만 관심을 집중해 온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 책이야말로 평균적인 백인 사회의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의 절반은 이라크 침공의 명분 상실에도 불구하고 올 11월의 미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을 여전히 테러라는 적을 응징할 선봉장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전혀 신비롭지 않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인 이러한 현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앵글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생각을, 그 이데올로기를 알 건 알고 직시할 건 직시해야겠다. 더불어 헌팅턴의 두 가지 예언, 즉 ‘문명의 충돌’과 (히스패닉으로 인한) ‘미국의 붕괴’ 중 한 가지만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후자 말이다(그것만으로도 그는 정치학자로서는 별볼일 없더라도 예언가로서, ‘선지자’로서는 후세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세번째 책은 레너드 쉴레인의 <알파벳과 여신>(파스칼북스)이다. 저자는 생소하지만(*2005년엔 그녀의 책으로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도 출간됐다), 640쪽이란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가격도 만만찮지만. 3만 4천원이면 그 정도 두께의 러시아 책을 최소한 5권은 살 수 있다). 원제는 “The Alphabet versus the Goddess”(1998)이다. 그러니까 우리말 제목의 ‘과’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의 대립적/적대적 관계이다(즉 ‘알파벳 대 여신’).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외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문자 언어, 특히 알파벳은 선형적, 추상적, 남성적으로 특징되는 좌뇌적 사고를 강화하고 종합적, 시각적, 여성적 우뇌의 기능을 퇴보시켰다. 우뇌적 가치에 대한 좌뇌적 가치의 승리는 여신을 죽이고 가부장제와 여성 천시 사상을 가져왔다.”

물론 ‘가설적인’ 주장이지만(이러한 주장이 입증되려면, 비문자 사회, 즉 원주민 사회에는 가부장제나 여성 천시 사상이 생소한 것이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거 같지 않다), 그걸 이 만한 분량으로 밀어붙인 노고에 대해서는 치하할 만하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지로의 회귀 현상을 의미 있게 보고, 앞으로 좌뇌와 우뇌, 남성과 여성의 가치, 문자와 이미지가 균형을 찾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잠깐 든 생각은 요새 한글(=알파벳)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딸아이가 점차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이 그 아이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네번째 책은 얇은 프랑스 소설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열린책들).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고르기 힘들었을 것이다(*책은 1998년에 나왔던 것이 재출간된 형태이고, 오르세나의 소설들은 <새들이 전해준 소식>을 포함해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알고 보니 제목의 ‘두 해 여름’은 번역가인 소설의 주인공이 “독자로서 경탄하고 번역자로서 낙담했다”고 한 나보코프의 소설 <아다>(‘에이다 혹은 아더’)를 번역하면서, 진탕 고생하면서, 보낸 기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실제의 번역자를 모델로 했다는 이 소설에는 기껏 번역을 해놓으니까 “내 걸작을 망쳐놓았다”고 타박하는 작가 나보코프도 등장하는바,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번역에 대한 한바탕 소동을 다루면서 저자는 번역가에 대한 예찬으로 소설을 마무리짓고 있는 듯하다. “내가 서가에 꽂힌 책의 반은 번역가들 덕분에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번역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번역가는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바다를 건너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하니, ‘한 해의 겨울과 또 다른 해의 여름’을 번역에 바치고 있는 나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번역자는 고작 200쪽짜리를 쓰고/옮긴 것이니 번역의 괴로움을 말하기에는 뭐하다(내가 옮기고 있는 원서는 640쪽 가량이다).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옮기고 있는 <아다>라면 사정이 좀 다를 테지만(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신기하게도’ 우리말 번역본이 있다. 물론 지금은 구하기 힘들 테지만).

나보코프 또한 번역일에 낯설지 않은데, 그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러시아어로 옮긴바 있고,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방대한 주석을 달아서 영어로 옮겼으며, 그의 아들 드미트리와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씌어진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러시아어로 다시 옮겼다. 참고로, 그의 외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아버지 나보코프의 영어본/러시아본 전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가장 엄격하게 저작권을 관리/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국내에 나보코프의 책들이 잘 번역돼 나오지 않는 것은 그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다. 빨리 끝내도록 해야겠다. 마지막 책은, 복간된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이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인데, 이번에 개정판이 다시 나온 것. 서문에서 김훈은 “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면 “그걸로 밥을 먹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건 김훈답지 않다. “그걸로 법을 먹게 해준 만큼” 그 글 부스러기들은 위대하지는 않을지언정 부끄러울 이유도 없다(밥벌이가 부끄러운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내가 이미 15년 전에 읽었던 것일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조금씩 교정을 보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글도 있고, 새로이 시인 이문재의 발문도 챙겨 넣은 모양이니까 여기서 소개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

200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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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3:19   좋아요 0 | URL
**님/ 서재주인에게만 생색을 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