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었고 집에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일 없이도 바쁜 하루였다. 게다가 아이는 어제부터 목감기 증세를 보이는 터라 사촌들과 놀러가는 일정은 모두 취소되거나 간소화됐다. 내가 아이라고 해도 별반 재미없는 하루였을 것 같은데, 큰 투정없이 하루를 보내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열 속에서 아이는 자고 있다. 영화 <희생>에서 아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수원에서는 어린이날을 기념해 에어쇼를 하던 전투기 한 대가 추락하여 조종사가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고, 평택에서는 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강제철거를 둘러싸고 군경과 시위대가 오늘도 충돌했다. 인천 영종대 골프장에서는 미셀위가 컷을 통과했고, 일본 도쿄돔에서는 이승엽이 시즌 6호 홈런을 때렸다. 안팎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속은 더부룩하고 마음은 어수선하다(그나마 실시간으로 내리는 밤비가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준다). 이런 날은 문학처럼 '사람으로 붐비는 앎'을 전공한 것이 유감스럽다. 천문학이나 동물학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일부러 그런 책을 찾았다. 다행히도 있었다. "60여년간 평생을 동물 관찰에 바친 러시아의 세계적인 동물학자 V. N. 쉬니트니코프(1874-1956)의 새 관찰 기록"을 담은 <나를 숲으로 초대한 새들>(다른세상, 2006)이 그것이다(출판사 자체가 '다른세상'이군!).(*알라딘에 저자명이 '쉬니트니코흐'라고 표기돼 있는 건 오류이다.)

책은 저자가 1957년 출간한 책 <우리나라의 동물과 새들>에서 조류 부분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같은 책에서 포유류를 다룬 부분을 출간한 <나를 숲으로 초대한 동물들>(다른세상, 2004)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그러니까 한권으로 된 원서를 국역본은 두 권으로 분권해서 낸 셈이다.



소개에 따르면, "수많은 새와 동물이 내는 소리를 성대모사하는 재주꾼 새, '새대가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집짓기나 먹이 사냥에서 영리함을 보여주는 새들, 모성이 충만한 새들과 인간의 손길을 낯설어하지 않는 새들까지, 43종에 달하는 새들의 생태를 흥미롭게 엮었다. 각종 진기한 새들의 생태를 알려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오랜 새 관찰 경험을 토대로 표정과 몸짓에서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고 서로 교감을 나누는 지은이의 세밀한 시각이 잘 살아 있다. 본문 가운데 각각의 새들을 그린 삽화를 곁들였다." 위의 박쥐 같은.  

 

 

 

 

알다시피, 이런 동물들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을 따로 동물행동학이라 한다. 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서로 임신재 교수의 <동물행동학>(살림, 2006)도 최근에 나온 책이다. <동물 행동의 이해와 응용>(라이프사이언스, 2005)과 함께 참고문헌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국내에서 이 분야의 가장 저명한 연구자는 베스트셀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2001)의 저자 최재천 교수이다(올해 보다 좋은 연구여건을 보장받고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는데, 알라딘에는 저자 데이터가 아직 업데이트돼 있지 않다).

그의 <알이 닭을 낳는다>(도요새, 2006)의 증보판도 얼마전에(지난 3월에) 출간됐었다. 하지만, 이 책은 60여 편의 동물 이야기와 함께 인간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어서 '불만스럽다'. '알면 사랑한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라지만, '알면 슬프다'는 건 나의 오랜(?) 경험이다.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라구요?  

 

 

 

 

두번째 책은 제임스 가드너의 <생명우주>(까치, 2006)이다.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는 것이지만, 책은 "우주론적 관점에서 생명의 비밀을 파헤쳐 보는 저작"이며, "우주의 탄생에 관한 의문을 생명 탄생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하여 제기했다"고 한다. 순수천문학 책이 아니어서 유감이지만, 나로선 그런 책을 읽을 만한 수학적 지식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대략 이 정도가 마지노선이다. 저자 자신이 다양한 경력을 지난 과학저술가여서, 일반인의 눈높이를 고려했을 법도 하고.

"우주론과 진화론을 연구하는 복잡성 이론가"로 소개되고 있는 저자는 "우주와 생명을 설계하고 창조한 초월적인 존재인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아무 뜻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처럼 지능을 가진 생명이 과연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축제에 등장하는 하찮은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란 의문들에 대해, "초연적인 현상에 자연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는 카오스와 복잡성 이론을 동원하여 그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은 이른바 "이기적 친생명 우주(Selfish Biocosm)" 가설이다. 지능을 가진 생명이 무작위적인 사건에 의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규모에서의 창발과 진화,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났다는 것."

이쯤이면 과학과 SF를 넘나드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무튼 "물리학, 우주론, 생물확, 생화학, 천문학, 복잡성 이론 등 다양한 과학 분야를 넘나드는 논지로 기존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이분법 안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생명의 비밀에 관한 새로운 논쟁점을 제시한다"고 하니까 속는 셈치고 한번 읽어봄 직하다. 저명한 물리학자 겸 과학저술가 폴 데이비스도 저자 제임스의 설명을 '정말 굉장하다!'고 평하는 것으로 봐서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고 봐야겠다.  

사실 '엉터리'란 것은 과학과 정치가 연루되거나 결탁하면서 곧잘 발생한다. '정치는 과학을 어떻게 유린하는가'란 부제를 단 <과학전쟁>(한얼미디어, 2006)은 시사적인 읽을 거리이다. "책은 정치가 과학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정치가 어떻게 제대로 된 과학 발전의 길을 가로막는가를 미국의 사례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줄기세포 연구, 비만, 흡연, 낙태, 미사일 방위, 환경문제, 기후변화 등 과학적 정보와 연구가 중대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논쟁 사안에서 정치적 신념을 위해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악용하는 행위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 여러모로 미국이란 케이스는 타산지석감이다.

과학의 또다른 아킬레스건은 '상품화'이다.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는 부제의 <인체시장>(궁리, 2006)은 바로 이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신간이다. 공저저의 한 명인 도로시 넬킨의 관점은 <대중과 과학기술>(잉걸, 2001)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다고.

사실, ""나는 한때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바코드가 찍힌 생명공학시대의 신상품이 되었다." 혈액, 골수, 피부, 정액 등 인간의 생체물질이 과학적 연구, 상업적 이익 등을 위해 악용되는 시대에 대한 지은이들의 비판"을 다루고 있다고 하면 작년 여름에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아일랜드>를 막바로 떠올려볼 수 있겠다. 그때만 하더라도 황우석 교수팀의 젓가락 기술은 대한민국 과학의 '자부심'이자 동시에 미래 생명공학시대(안티-유토피아)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었다(인간이 앞으로 '젓가락질'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그 이후에 우리가 경험했던 사태는 '인체시장'과 '과학전쟁'의 복합적 종합이었다. 해서 이 주제에 관하여 한국인들만큼 잘 '계몽된' 국민은 전세계에 없을 거라 짐작되지만, '복습'을 원한다면 밑줄 그어가며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기운을 좀 차리고 '자연'에서 '문화'로, '문화의 전장'으로 다시 들어가 본다.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연구자이자 이론가 스튜어트 홀 입문서 <지금 스튜어트 홀>(앨피, 2006)이 출간됐다. 'Critical Thinkers' 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이다(같이 나온 네번째 책이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인데, 바르트 얘기는 생략하도록 하자). 홀의 책들은 간간이 소개된 바 있는데, 그의 논문들을 편역한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한나래, 2006)이 이제까지는 '정본' 구실을 해왔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이와 단짝이 될 만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영국 신좌파 그룹에 속해있던 1950년대 이후로 스튜어트 홀의 전방위한 사상적 범위와 연구, 그리고 그에 따른 성취를 요약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문화연구의 주창자로 부상한 것 이외에도, 1980년대 그가 촉발시킨 대처주의와 인종주의에 관한 논쟁, 1990년대 이후의 정체성·디아스포라·민족성에 관한 그의 발언 등을 살핀다."

그럼으로써 "스튜어트 홀의 방대한 연구를 역사적·문화적·이론적 문맥 속에 위치시켜 문화의 정치성,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문제, 정체성의 정치학 등으로 재구성했다. 또한 그가 남긴 지적 유산에 대한 비평가들의 견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지금껏 저서를 한권도 쓰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수정·갱신해 온 홀의 핵심 사상과 영향력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러니 비단 홀 입문서로뿐만 아니라 문화이론('문화적 유물론'이라고도 지칭되는)에 대한 입문서로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

 

  

 

 

'문화연구'로 검색되는 책들은 너무 많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스튜어트 홀이 주도했던 영국의 문화연구와 문화유물론에 대한 소개서 두 권,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현대미학사, 2005)와 <영미 문화연구>(문화과학사, 2000) 정도만을 따로 적어놓기로 한다. 물론 홀 등이 참여한 '교과서' <현대성과 현대문화>(현실문화연구, 2001)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더불어, 최근에 대학에서 각광받고 있는 '문화콘텐츠학'이라는 게 실상은 '이데올로기학'으로서의 '문화연구'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거세'한, 그러니까 '뇌관'을 빼놓은 연구라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해두자. 언제부터인가 대학에서의 학문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가축화되었다(이런 현상이 '큰 목소리'로 상쇄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네번째 책은 우리를 또다른 전쟁터로 안내한다. 마크 몬모니어의 <지도전쟁>(책과함께, 2006) '지리학' 분야의 책으론 상당히 오랜만에 꼽아보는 듯하다. 그간에 <인문지리학의 시선>(논형, 2005) 등의 책들이 출간됐다. '메르카토르 도법'을 둘러싼 '전쟁'을 다루고 있는 책의 내용은 이렇다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가 구체인 지구를 평면 위에 재현한 것인 까닭에 왜곡이 생기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지도들이 '메르카토르 도법'을 따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페터스 도법'이라는 또다른 도법이 등장하여 꾸준히 메르카토르 도법을 공격해 왔다고 한다. 2001년 방송된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에 등장한 페터스 도법을 따른 지도가 그 예. 이 책이 말하는 '지도전쟁'은 바로 이 도법 사이의 오랜 논쟁을 뜻한다. 400년 전 메르카토르 도법을 만든 네덜란드의 지도제작자 헤라르뒤스 메르카토르는 어떤 인물이었고, 이 도법에 담긴 세계관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서 지금의 가장 대표적인 평면지도 도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등을 본격적으로 상세히 파헤친다."



메르카토르도법의 세계지도라는 건 사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지도이다. 그리기에도 가장 쉬워서, 지리 시간에 한번쯤은 가로줄, 세로줄을 그어놓고 지리부도의 지도를 베껴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모눈종이에다 그렸던가?).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자연'으로서의 도법이었지만, <지도전쟁>은 그 도법이라는 '문화'를 둘러싼 오랜 논쟁을 다룬다. 이 도법에 담긴 '세계관'이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의 '순진한' 학생시절 또한 잠시 도마에 오르게 되는 건 아닐는지?

 

 

 

 

최근에 유독 주목할 만한 평전들이 많이 출간됐다. 바사리, 사드, 알카포네, 노신, 파스퇴르 등이 물망에 올라 있는 평전들인데, 내가 다섯번째 책으로 고른 건 롤랑 드 몰레가 쓴 <조르조 바사리>(미메시스, 2006)이다. '희소성'을 고려했기 때문에 선택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메디치가의 연출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16세기의 이 걸출한 미술가이자 미술사가인 바사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저자 야코프 브르쿠하르트가 "바사리와 그의 너무나도 중요한 저서가 없었던들, 북부 유럽, 더 나아가서 유럽 전체에는 아직도 미술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부르크하르트가 언급하고 있는 책은 흔히 <미술가 열전>이라고 줄여서 불리는 책으로 이미 오래전에 탐구당판으로 완역본이 출간된 바 있고, 축약본 <이태리 르네상스의 미술가 평전>(한명출판사, 2000)도 나와 있는 책이다(이 책은 몇달 전에 구입한 바 있는데, 저자가 '바자리'로 돼 있다. 내가 본 다른 미술책들에도 '바자리'로 표기돼 있는데, 어느쪽이 맞는 표기인지 모르겠다).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에는 1400년부터 186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문화를 주도해온 '재현/모방' 패러다임을 아예 '바사리 내러티브'라고 부름으로써 바사리의 미술사적 의의를 다시 확증해주고 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으로 치자면, 그가 미술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서양철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동양철학에서 주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버금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개에 따르면,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 출간된 <미술사 열전>으로 서양 미술사의 거대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르네상스 전후기 이탈리아 미술 전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르네상스'와 '고딕' 등의 표현을 처음 사용하는 등, 미술사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지 않은 이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명한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조르조 바사리에 대한 평전으로서, 미술사서를 써낸 그의 면모 뒤에 잘 알려지지 않은 미술가와 건축가로서의 활약상에도 주목하여 그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그려낸다. <미술가 열전>을 써낸 과정은 물론,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천정화, 우피치 궁 등의 비롯한 프레스코 대작들과 건축물을 짓고, 피렌체 공국의 문화예쑬 사업을 주도한 행정가로서의 면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과 정치, 사회적 맥락을 자세히 묘사함과 동시에, 회화, 건축, 장식 작품, 화가, 조각가, 행정가까지 다양한 정체성을 넘나들며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 바사리의 심리와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그렸다."

 

 

 

 

사실 책에 대해서는 비전문가의 나의 참견이나 간략한 소개보다 미술사학자 노성두의 서평을 참조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겠다. 한겨레(06. 04. 28)에 실렸던 서평을 대략 옮겨오기로 한다(서평자는 르네상스 서양미술에 관한 국내의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저역서를 갖고 있다).

-르네상스나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바사리는 포기할 수 없는 전범이다. 처음 바사리를 만났을 때 나는 한 마리의 행복한 종달새가 된 느낌이었다. 종달새는 단박에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시골목동 조토가 곱돌을 들고 너럭바위에 양의 모습을 쓱쓱 긁어대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르노강을 따라 신나게 날아올라서는 괴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얹기 위해 석재를 들어 올리는 거중기 그늘 아래로 찾아들어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엠폴리를 거쳐 빈치의 외딴 마을 무성한 올리브 나뭇가지에 앉아서 소년 레오나르도가 짓궂은 미소를 머금으며 아버지를 놀라게 할 끔찍한 악룡을 방패에 그려 넣는 것을 훔쳐보며, “이제 미술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이다.



-바사리는 1550년에 ‘아레초의 화가 조르조 바사리가 토스카나어로 저술하였으며, 그들의 예술에 대한 유용하고도 필요한 서문이 포함된, 치마부에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탁월한 이탈리아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의 생애’라는 아주 긴 제목의 책에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전기 작가이다. 책 제목이 너무 길어서 보통은 ‘예술가 전기’라고 줄여서 부른다. 고대 이집트부터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중세를 거치면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출몰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기록한 전기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술작품은 다락같이 떠받들었어도 정작 작품의 생산주체인 예술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찬밥 신세였던 것이다.

-가령 서기 1세기 로마의 군인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기억할 만한 조각가, 건축가, 화가들의 작품과 일화를 열거한다. 그러나 철광석의 채굴과 정련을 다루면서 청동조각가를 언급하고, 광물의 성질을 조사하다가 안료를 채취하는 법과 화가들의 일화를 슬쩍 건드리고 가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바사리는 정당한 의미에서 최초의 미술사 기록자이자 ‘미술사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사리의 빛나는 저작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미술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독일 미술사학자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더라도.



-이 책은 바사리의 삶을 다룬 평전이다. 바사리의 저작이 예술가가 쓴 예술가들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전기 작가에 대한 전기인 셈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관념적 꼬리 물기가 미술의 재현 형식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잘 알려진 대로 매너리즘 시대였다. 바사리가 미켈란젤로의 제자이자 16세기 토스카나의 예술에 매너리즘 조형의 세례를 쏟아 부었던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글쓴이 롤랑 르 몰레는 가장 적절한 평전의 대상을 골랐다고 불 수 있다.

-바사리의 업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소묘, 회화, 프레스코와 건축에 이르는 작품목록은 훑어보기에도 기가 질린다. 완전한 알레고리의 우주로 불리는 카사 바사리의 장식에 숨겨진 수수께끼는 지금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전기 작업에 등장하는 고딕양식, 비잔틴 양식, 매너리즘, 소묘 예술, 단축법 등 주요 미술용어들은 훗날 양식사를 밝히는 등불이자 미술사학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고대 예술의 부활, 곧 르네상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를 사용한 것도 바사리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바사리는 왜 ‘부활’을 필요로 했을까? 그가 꿈꾸었던 부활의 참뜻은 무엇이었을까?

-바사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았다. 이탈리아의 가장 참담한 역사를 목격하고 인정해야 했던 불운한 운명이 이탈리아 예술의 운명을 밝히는 책을 써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들린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종교적 반목, 터키와 스페인의 무력분쟁,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사이의 정치적 긴장이 앞날을 알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위기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수백 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정파를 나누어 모이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했다.

-1527년 로마 대약탈 이후, 예술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분열된 도시국가들을 통합하고 단일국가의 기틀을 형성하는 일은 차치하고 당대를 호령하던 천재 예술가들이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서 조국을 등지고 유랑을 시작하는 막바지 상황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바사리의 심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이 순간 바사리는 부활을 꿈꾼다. 그것은 지난 콰트로첸토의 은성했던 황금시대에 관한 희미한 기억이었다. 현실의 역사가 절망을 노래하는 후렴구의 끝자락에서 예술가의 지친 영혼을 이끈 것은 예술가의 삶을 기록하는 전기 작업이었다. 이탈리아의 예술을 기록하고 망각의 늪에서 건져내어 기억의 전당에 헌정하는 작업은 이탈리아의 입술에 예술의 입김을 불어넣어 사위어가는 영혼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무모한 시도이기도 했다.



-예술을 통해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터 잡기의 삽질은 고대 로마의 모범에서 출발한다. 바사리는 고대의 폐허로부터 빛나는 재건을 음모했던 콰트로첸토의 예술정신을 잊지 않았다. 고대 로마는 다름 아닌 이탈리아의 선조들이 남긴 유산이었다. 르네상스의 장인들이 고대 예술의 모방을 통해 중세의 ‘야만적’ 양식을 극복하는 과정은 하나의 이탈리아라는 정치적 이념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상징적 지표와 다름없었다. 바사리는 고대를 예술의 완전한 실현으로, 중세를 예술의 죽음으로, 그리고 르네상스를 예술의 새로운 부활로 읽는다. 조형예술의 역사서술에 종교적 구원사의 형식을 덧씌운 것이다.

-이 책은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이자 초유의 예술가 전기를 완성한 바사리의 삶의 자취를 유년기부터 임종 그리고 무덤에 누운 뒤 후대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더듬는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사리의 삶의 방식이다. 천재와 예술적 영감의 가치를 가장 높게 쳤던 매너리즘 시대에 바사리는 근면과 성실을 존재의 덕목으로 삼았다. 비웃음을 사기 딱 좋았을 것이다. 바사리의 인문적 토양은 무수한 기록과 증언의 수집과 정리에서 돋보인다. 수집된 정보들이 예외 없이 그의 두 눈과 두 다리를 통해서 검증된 다음에야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르네상스 예술의 굳은 혀를 풀어준 것은 부지런함과 지칠 줄 모르는 발품이었던 것이다.

06. 05. 05-06.

P.S.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비롯한 몇몇 소설들이 소개대상에서 빠졌는데, 조만간 따로 페이퍼를 쓰거나 리뷰를 쓸 예정이다. 할말은 많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은 짧다. 책에 대한 '수다'를 떠는 데만으로도, 하물며 '학문'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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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5-06 00:56   좋아요 0 | URL
노신 스페샬 해주세요 .........-.-

로쟈 2006-05-06 01:00   좋아요 0 | URL
노신의 평전이 나온 건 알고 있지만 소설 말고는 제가 별로 읽은 게 없고, 또 따로 소개가 필요한 작가도 아니기에 제쳐두고 있습니다. 아마도 노신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스페샬'로 다뤄주시길 저도 고대해 보겠습니다...

기인 2006-05-13 19:53   좋아요 0 | URL
'현대성고 현대문화' 오타입니다 ^^; 스튜어트 홀은 아는 선배가 번역해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 국문과는 많이 보수적이라서, '문화' 쪽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이 있지만, 원생들은 이를 뚫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 아카데미, 제도라는 것이 답답할 때가 많은데,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고만 있습니다.

로쟈 2006-05-13 20:49   좋아요 0 | URL
좋은 지적이십니다.^^ 국문과도 요즘은 문화콘텐츠학과로 개명하는 경우가 있던데, 대세는 아닌가 보군요. 홀의 책은 원서도 갖고 있어서 이 참에 읽어볼 생각으로 있습니다...

2007-09-21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두주간 제법 많은 책들이 나왔다(*이 글은 2003년 2월말에 씌어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의미있어 보이는 책들을 간략하게 적어보기로 한다. 먼저, 가장 반가웠던 책은(여기서 반갑다는 말은 언제쯤 책이 나올까 고대했었다는 뜻) 마르트 로베르의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동문선)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문학과지성사, 1999)의 저자이며, 그의 책으론 프로이트 해설서인 <정신분석혁명>(문예출판사, 2000)도 이미 번역돼 있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신분석쪽 비평가의 한 사람인데, 사실 그의 주저는 카프카론이라고 한다. 이번에 나온 <고독>은 생각보다는 얇은 분량인데(물론 값은 비싸다) 어쨌든 카프카론의 구색을 맞출 수 있는 비중있는 저작이 번역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역자는 지난번에 소개한 <번영의 비참>의 역자이다(역자후기까지 달고 있는 걸 보면 애를 쓴 번역임에는 틀림없지만, 사실 100% 신뢰하기는 좀 어렵다). 아직 이 책은 일간지 북리뷰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카프카의 책으론 한국카프카학회에서 펴내는 전집의 한권으로 <실종자>(솔)도 얼마전에 출가됐다. 흔히 <심판/실종자>로 묶여서 나오는 소설인데, 나는 카프카가 임시로 붙여두었다는 '실종자'란 제목보다는 사실 (막스 브로트가 붙였다던가) '아메리카'란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작품을 완성했다면, 카프카 자신도 다른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제멋대로 추측해본다. 참고로, 솔출판사판 전집은 10권으로 기획돼 있으면 현재까지 4권이 나왔다(*이 전집은 2006년 현재까지 7권이 나온 것으로 안다).

 

 

 

 

또 일간지 북리뷰에서는 누락되었지만, 눈에 띄는 번역서는 폴 리쾨르의 <해석학과 인문사회과학>(서광사)이다. 리쾨르는 가다머와 함께 20세기 해석학을 양분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개인적으론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과 리쾨르의 <살아있는 은유>(미번역)의 번역스터디에 참여한 바 있어서(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1/3쯤에서 중단되었지만) 이들의 영역본 책들을 여러 권 가지고 있는데, 신간 또한 오래전에 제본해 두었던 책이다(책은 리쾨르 저작의 영어본 논문선집쯤 된다). 리쾨르의 경우는 번역본이 꽤 나온 셈이기 때문에(현재 8권 가량 번역됨) 너댓 권 정도만 더 번역되면 주저들은 거의 다 한국어본을 얻게 된다.

하지만 역시나 한국에서의 리쾨르학은 미진하다. 한국해석학회에서 특집으로 두어 차례 다룬 적이 있지만, 인문학 전반을 망라하는 리쾨르를 따라잡기란 아직은 요원하지 않나 싶다. 작년에 나온 정기철의 <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문예출판사)가 단행본 연구서로는 유일한데,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조금 들춰보고는 다시 반납했다. 전공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이 한손에 꼽을 정도는 되지만, 기대에는 못미치는 수준. 리쾨르의 신간 때문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작년에 <역사와 진리>(솔로몬)가 소리소문없이 번역돼 나왔었다. 리쾨르의 비교적 초기 저작인데, 번역에 무슨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이런 경우 책주문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진다(*알다시피, 리쾨르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사이에 <시간과 이야기>가 완역되었고, 프랑스와 도스의 전기 <폴 리쾨르>가 출간되었으며, 전공자인 윤성우 교수의 연구서/해설서도 선을 보였다. 사정은 분명 좋아졌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고미즈미 요시유키의 <들뢰즈의 생명철학>(동녘)이 이정우의 번역으로 나왔다. 200쪽 정도의 가벼운 분량의 입문서. 그래도 뭔가 장점이 있으니까 번역하지 않았을까 싶다. 들뢰즈 역시 <차이와 반복>과 <주름> 정도만 번역되면 대부분의 주저가 다 번역되게 된다. 여러 열성'분자'들 때문에 그래도 들뢰즈학의 사정은 다른 인문학에 비해 나은 편. <노마디즘>을 필두로 우리 저자들의 들뢰즈 해석/이해가 속속 출간되기를 기대한다(*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주목하는 또다른 번역서로 키스 안셀-피어슨의 <싹트는 생명>이 작년에 출간된 바 있다).

 

 

 

 

허버트 드레퓌스의 <인터넷상에서>(동문선)가 번역돼 나왔다(*'행동하는 지성' 시리즈의 이 책은 <인터넷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처럼). 눈에 띄는 건 책이 아니라 저자이다. 드레퓌스는 유명한 푸코 연구서인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의 공저자이다. 물론 우리말 번역은 좀 신통찮지만, 그 책은 손가락에 꼽히는 푸코 연구서이다. 나는 그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연구서인 <세계-내-존재>를 갖고 있기도 한데, 작년인가 그의 두 권짜리 논문선집이 나오기도 했다. 번역된 신간의 그의 다방면에 걸친 관심을 보여주는 듯하다(이런 책은 누가 먼저 읽고 서평을 써주었으면 싶다).



 

 

 

국내 저자의 책으로 넘어가서 제일 먼저 손에 꼽고 싶은 책은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경험과 기억>(당대)이다. 이번에 정년을 맞은 지식인 세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저자는 '종교-종교들-종교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틀을 제시하면서 그 중 '종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통해 종교학을 확장/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종교'라는 말보다는 '종교문화'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덕분에 그의 책은 고리타분한 종교학 개설서와는 좀 거리가 멀다. 참고로, 추천할 만한 정진홍 교수의 책으로는 먼저 종교학 입문서로서 <종교문화의 이해>(청년사, 1995)가 있고, 조금 무게있는 책으론 <종교문화의 논리>(서울대출판부, 2000)가 있다. 좀 가벼운 책으론 종교문화여행기인 <신을 찾아 인간을 찾아>(집문당, 1994)를 권한다.

 

 

 



젊은 사학자 김영두가 옮긴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와 신명직이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현실문화연구)는 지난 두주 동안 일간지 북리뷰의 1면을 장식했던 책들이고,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전자의 경우엔 출판사측도 놀랄 정도로 많이 팔려 나가고 있다 한다. 공들여 만든 책들이 잘 팔린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문화를 두텁게 만드는 일이다. 이 두 책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또 하나 <한겨레21>에 박노자와 함께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역사학자 한홍구의 <대한민국사>(한겨레신문사)가 나왔다(*작년에 제3권이 출간되면서 완간되었다). 고등학생들의 필독서로 읽혔으면 싶다. 그리고 모처럼 소설 한권을 덧붙인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경성라인)이 번역돼 나왔다. 번역 수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개츠비>와 더불어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러시아문학 연구서 한권. 골룹꼬프의 <러시아 현대문학과 잃어버린 대안>(부산외대출판부)이 번역돼 나왔다. 어떤 계열의 책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러시아문학쪽 저작은 워낙 드물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있어서 소개한다.(*고룹꼬프는 모스크바대학 교수이며 얼마전에는 <러시아 현대문학: 분열 이후의 새로운 모색>(역락, 2006)도 출간되었다. 개인적인 안면은 없지만, 비교적 젊고 건장한 외모의 골룹꼬프 교수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새로운 문고본 기획으로 열림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 시리즈가 나오고 있다. 한국문학의 문제작들은 자세히 읽는다는 취지인데, 이남호의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와 김인환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는다> 등이 1차분으로 나왔다. 이러한 기획 자체에 대해서 대단히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120-30쪽 분량의 책에 자세한 연구서지 목록이 들어가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세상 시리즈에서처럼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문헌만을 필자가 가려서 싣는 것이 오히려 요긴하고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여간에 그래서 책은 고등학생이나 일반인이 읽기에는 좀 버거운 형식의 것이 돼 버렸다.

어쨌거나 이런 기획을 계기로 이런저런 지도비평보다는 '작품읽기'의 전범이 될 만한 비평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류의 책들은 필자의 '작품읽기' 수준(본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만큼 모험적이기도 한데, 그런 모험들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교양은 좀더 풍성해질 수 있다.(*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는 나오다 말았다.) 

끝으로, 계간지 소식. <문학과사회> 봄호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특집이 실렸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청준 문학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지만(적어도 아직까지는) 그의 문학에 관심있는 이들은 필독하시길...

AS(1): 지난번에 소개한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한 나날들>은 확인해본 결과 2002년에 나온 안나의 회고록을 옮긴 것인데, 12개의 장으로 구성된 것으로 봐서 72년에 나온 2판과 동일한 판본이 아닌가 싶다.

AS(2): 역시나 지난번에 소개한 과학서 가운데 <루시의 유산>은 번역이 좋지 않다고 한다. 이 점은 지난주 중앙일보 북리뷰에서 지적된 것인데(이러한 '죽비'가 많아져야 한다!), 참고로 여기에 옮겨둔다. 우리는 정말 두눈 부릅뜨고 책을 읽어야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번역에 대한 감시는 소비자 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근래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는 곳이 교양 과학서 시장이다. 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 분야는 인기가 높다. 하지만 부실한 번역으로 원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문제다. 대표적인 예로는 <붉은 여왕>(김영사, 김윤택 옮김)과 <루시의 유산>(한나, 한상희·윤지혜 옮김)을 꼽을 수 있다. 외국에서는 `명쾌하고 논리적인 명저`로 이름을 떨친 책들이다. 하지만 번역판은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와 요령부득의 표현이 가득하다.

-우선 지난해 출간된 <붉은 여왕>을 보자. 가장 큰 문제는 원서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한 대목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71쪽을 보자. "…그후 진행의 4분의 3을 이 과정에 쓴다"는 표현이 나온다. 원문은 "…and then dispose of three quaters of the proceeds." 따라서 "결과의 4분의 3을 버린다"는 뜻이다. 저자의 원래 논지는 이렇다. "세포가 난자를 만들 때는 감수분열을 해 자기 염색체의 절반만을 전달한다. 그런데 감수분열 직전에 염색체수를 두배로 늘린다. 그리고는 원래 염색체의 절반만 난자에 집어넣는다. 굳이 두배로 늘린 다음 결과의 4분의3을 버리는 건 낭비가 아닌가?" 하지만 "버린다"를 "쓴다"로 반대로 옮긴 결과 전체 문맥의 의미가 통하지 않게 돼버렸다.

-1백34쪽의 "훨씬 더 중대한 차이는 어머니로부터만 오는 유전자가 훨씬 적다는 것이다"도 마찬가지. 원문은 "A much more significant difference is that there are a few genes that come only from the mother". 그 뜻은 "어머니로부터만 오는 소수의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다. 저자는 이어서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 유전자가 두가지 성별이 생기게 된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존재한다"를 "훨씬 적다"로 옮긴 탓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이 돼버렸다. 이같은 오역과 혼란은 번역본 도처에서 발견된다. <붉은 여왕>은 이른 시일 내에 개정판을 내는 것이 원저자에 대한 예의이자 독자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한편 이달에 나온 신간 <루시의 유산>은 <붉은 여왕>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오역이 많다. 원저는 1999년 미국 출판협회의 전문학술 저작상을 받은 명저다. 하지만 한국어판은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암호책 같은 인상을 준다. "성은 아마도 두개의 연결된 세포에서 나온 핵물질이 함께 살아 남았을 때 육식성이 불완전해지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61쪽) 여기서 '육식성'이 무엇인지 설명이 없다. "유기체의 모든 계통은 자손을 키우는데 암컷만큼 노력하는 수컷이 있는 종을 칭찬한다. 역사적인 각주로서, 우리의 이름인 포유동물, 유방을 가진 생명체도 역시 불가피했다."(91쪽)

-그뿐이 아니다. 저명한 학자의 이름도 엉터리다. 책에는 '토마스 말투스'란 이름이 되풀이해서 등장한다. 알고보니 그는 '인구론'의 저자인 토머스 맬서스였다. 결론적으로 <루시의 유산>은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야 할 책이다. 물론 독자들에게는 리콜을 해줘야 할 것이다. 명저의 한국어 저작권을 독점한 출판사는 한국의 과학 대중에 대해 지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조현욱 기자)

2003.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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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3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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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3 0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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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이 글은 2003년의 2월 중순에 쓴 것이다) 일간지 북리뷰란 두 곳에서 지난번에 소개한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가 1면에 올랐다. 바로 한겨레와 조선일보에서. 언젠가 이진경의 <노마드>도 두 일간지는 1면에 올렸었는데, 책을 보는 안목이 비슷한 것인지?

조선일보의 경우는 유독 학술적 유행에 민감하다. 동인문학상을 접수한 경우와 마찬가지일 텐데, 학술/사상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인 듯싶다. 들뢰즈나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크게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학술적 권위(명성)을 조선일보와 동일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얼마전 쿤데라님이 소위 '수집주의'에 대해 비판한 바 있는데, 실상 그 수집주의의 심리적 메커니즘에도 그러한 동일시에의 욕망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일상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유명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그 욕망은 야콥슨/라캉의 용어를 빌면, 환유적이다.(그리고 물론 그 욕망은 성취되지 않는다! 라캉의 공식이 보여주듯이.)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것은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왕>(동문선)이다(*연극과인간 버전도 조금 나중에 출간됐다). 나는 이 작품을 오래전에 밀란 슬라덱의 마임 공연으로 먼저 본 적이 있다. 예술의 전당에 공연을 보러 갔는데, 슬라덱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의 공연 비디오를 대신 보게 된 것. 그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이, 바로 원조 부조리극쯤에 해당하는 <위뷔왕>이었다(그때는 '우부대왕'쯤으로 이해했다). 그러다가 작년인가 마침 영역본을 구할 수 있었고, 이번에 우리말 번역이 나왔으니 이제 시간을 내서 즐기는 일만 남았다.

내가 알기에 <위뷔왕>의 초연은 굉장한 스캔들이었고, 이후에 자리는 위비왕 연작을 썼는데, 번역본의 분량으로 봐선 한 작품만이 번역된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감상과 함께 다루기로 하겠다. 참고로, 자리와 <위뷔왕>에 대해서는 신현숙의 <20세기 프랑스 연극>(문학과지성사, 1997)이 요긴하다.

 



 

 

<위뷔왕>과 함께 동문선에서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이 번역돼 나왔다. 마찬가지로 얇은 분량에 비싼 책값이다. 들뢰즈와의 공저들을 뺀 가타리만의 책으론 <분자혁명>(푸른숲, 1998)이 있지만,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이 책은 조만간 구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 돈들어갈 구멍은 막을 수가 없다!). 때문에 이 신간에 대해서도 뭐라 말할 수 없다. 누군가 그의 작업에 대해서 리뷰를 해주었으면 싶다. 참고로,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최명관 역, 민음사)는 김재인의 새번역으로 다시 출간된다고 한다(<안티 오이디푸스>로). 시기는 올연말쯤이고 출판사는 같은 민음사이다(*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번역의 오류들이 개선되고 더 좋은 번역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러한 노력이 일부 저자나 책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나 도스토예프스카야(1846-1918)의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한 나날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두번째 아내인 속기사 안나의 회고록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러시아초판은 1925년에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인 L. 그로스만의 편집으로 나왔고(800쪽 정도 분량) 2판은 더 축약된 형태로 1972년에 튜니마노프 등의 편집으로 나왔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우리말 번역은 이 2판을 토대로 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영역본은 1975년에 B. 스틸만의 편역으로 나왔고, 이 책을 옮긴 것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문음사, 1986)이다. 분량으로는 <나날들>이 <아내>의 2배 가량 된다.(*러시아어본을 나는 재작년에 모스크바에서 구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문고)이 번역돼 나왔다. 듀이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은 1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문고본은 처음 3개 장만을 번역해 싣고 있다. 문고본 분량 때문인 것 같은데, 좀 유감스러운 일이다. 듀이 관련 연구서들은 역자가 더 읽을 만한 책 목록에서 소개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거기에 빠진 것이 이 책의 완역본이 이미 나왔었다는 사실인데, <예술론>(희성출판사, 1986초판, 1990재판)이 그것이다. 이 책을 서점에서 샀는지 헌책방에서 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책장에서 먼지묻은 책을 꺼내 새로 나온 번역본과 잠시 비교해 보았다(물론 새 번역의 가독성이 더 좋은 편이다).

교육철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은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교육과학사, 1996)도 이미 번역돼 있다(580쪽 분량의 두툼한 책이다). 하지만 역시나 전체적으론 소략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듀이 철학에 대한 업그레이드된 해석은 신실용주의를 제창하는 리처드 로티의 여러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로티의 듀이 다시 읽기는 라캉의 프로이트 다시 읽기에 비유될 수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1843-1941)의 <황금가지>(한겨레신문사)가 다시 번역돼 나왔다. 물론 축약본이지만,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래도 절판된 삼성출판사판을 대신해서 <황금가지>의 우리말 표준번역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듯하다. 물론 여기에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까치글방, 2001)가 곁들여져야 구색이 맞는다.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를 읽으며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는데, 그나마 아직까지 이 분야에 무관심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리스신화 열풍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권도 사지 않은 때문. 최근 중국신화까지 가세하고 있는 형편인데, 신화 혹은 신화론에 관심을 두려는 독자는 먼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참고로 아주 극소수의 한국 신화 관련 서적 중에 표준적인 것은 서대석의 <한국의 신화>(집문당, 1997)이다.

 

 

 



끝으로 자연과학서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은 '인류의 성과 지능의 진화'라는 부제를 단 앨리슨 졸리의 <루시의 유산>(하나번역출판)이다. 저자는 국제 영장류 동물학회장을 역임한 진화생물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500쪽이 넘는 분량이 나로선 아직 부담스럽다(물론 나는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한권을 고르라면, <루시의 유산>과 접전을 벌이다 떨어질 만한 책이 하워드 블룸의 <집단정신의 진화>(파스칼북스)이다. 450쪽이 넘는 이 책은 한마디로 '개체 선택주의'나 '유전자 선택주의'에 맞서서 '집단 선택주의'를 기초로 한 진화론을 주장하는 책이다. 저자의 경력이나 주장으로 봐서 '신과학'류의 책이 아닐까 의심이 갔는데, 저명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추천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사이비는 아는 듯싶다. 같은 저자의 <루시퍼 원리>(파스칼북스)도 번역돼 있다. 하지만 나로선 이 두 과학서를 읽을 만한 여력이 당분간은 없을 것 같다...

 

 

 



덧붙임: 새로 나온 시집 두 권을 적어둔다. 먼저, 황동규의 신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0년에 나온 <버클리풍의 사랑노래>에 이어 딱 3년만에 나온 셈. 사적인 인연이 겹쳐서 황동규의 거의 대부분의 시집을 사서 읽었지만(하지만/때문에 그의 전집은 안 갖고 있다!), 나는 그의 초기시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김춘수의 평에 의하면, 황동규는 당대의 테크니샹이다. 그러니까 기교파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노년(?)의 그의 시들은 자못 인생파적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시적 어법(기교상으로 그의 시의 핵심은 긴장tension이다)은 여전하지만, 선불교를 연상시키는 그 '인생파적' 깨달음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나왔으니까 사두어야겠다.

어제 문화일보를 보고 안 것인데, '노가다 시인' 김신용의 <버려진 사람들>(천년의 시작)이 다시 나왔다. 공사장 품팔이를 하다가 우연하게 등단하게 된 그의 데뷔작인데, 1988년에 고려원에서 나왔다가 한달만에 절판된 시집. 한창 시집들을 많이 사던 때였고 서점에서 본 기억도 있지만, 그때는 사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의 두번째 시집인 듯싶은 <개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만을 갖고 있다. 박노해나 백무산이 정통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 분류된다면, 김신용은 룸펜 프롤레타리아 시인쯤 될까? 마치 초기 고리키의 경우처럼. 요즘은 드물어진 시적 정서와 만날 수 있을 듯싶다. 혹은 88년 여름 거의 매일같이 바닷가 백사장을 헤매던 청춘의 한 페이지와도...

2003.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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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지난 주 또한 눈에 띄는 책이 많지 않았다(*이 글은 2003년 1월말에 쓴 것이다). 서점에 들러 그 자리에서 몇 권 사는 걸로 충분할 정도였으니까(물론 밀린 책들은 적잖고, 2월에 그 중 상당수를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계획으로 있다). 개인적으로 이럴 땐 도서관의 책들을 대출해서 제본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을 쓴다. 지난 한달 동안만 10여권 이상 제본하고 복사한 듯하다. 움베르토 에코도 지적한 바 있지만, 복사의 문제점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는 절대로 복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아는 쟁쟁한 학자들 또한 생애의 대부분을 복사와는 전혀 거리가 먼, 필사의 시대를 살았다. 환갑이 아직 먼 한 '젊은' 국문과 교수도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 2만장의 카드를 작성했다고 한다(그래봐야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인데!). 하루종일 필사할 수 있는 분량이래봐야 오늘날 1-2분이면 복사할 수 있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요즘 세대는 대부분 그것조차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복사해 두는 걸로 읽기를 대신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수집가보다는 애독가가 윗길이라는 사실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책을 모으는 즐거움이 대신할 수는 없다! 지난주에 책을 낸 '수집가' 조희봉씨도 <전작주의자의 꿈>(함께읽는 책) 일간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대담 회고록인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이 나왔다. 원서는 1988년에 나온 책이고, 대담자는 디디에 에리봉.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인 에리봉은 잘 알려진 푸코 전기(<미셀 푸코>, 시각과언어, 1995)의 저자이면서, 이런 분야의 전문 대담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곰브리치와의 대담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1997)이 그것인데,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알라딘 서평란을 참조하시기 바람).

레비스트로스의 책은 지난주 책소개들에서 다 빠져 있는데, 아마도 출판사측에서 신문사들에 책을 미처 돌리지 못했기 때문인 듯싶다. 어쨌거나 이 책은 가장 좋은 레비스트로스 입문서이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대담이나 자서전들을 아주 좋아한다). 레비스트로스를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주경복의 <레비스트로스>(건대출판부, 1996) 혹은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스트로스>(시공사, 1998)와 함께 읽는 게 좋을 거 같다.

그의 책으론 98년에 완역 출간된 <슬픈 열대>(한길사)가 가장 많이 읽히지만, 이론적인 주저에 해당하는 것은 <구조인류학>이다. 나는 2권짜리 영역본을 갖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김진욱의 번역으로 종로서적에서 1권이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더불어 <야생의 사고>(한길사, 1996)도 번역돼 있다. <신화의 의미>도 <신화를 찾아서> 등으로 번역돼 있고, 오래전 걸로는 <인종과 역사>의 문고본 번역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전체적으론 빈곤하기 짝이 없다. 그의 후기 주저인 <신화론>(혹은 <신화학>)은 전 4권에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아마도 우리말 번역서를 기대하기는 힘들 거 같다(*한데, 출간됐다! 알다시피 2004년에 <신화학> 1권이 나왔고, 나머지 권들도 차례로 나올 거라고 한다). 우리말 번역서라면 아마도 3,000쪽이 넘어갈 듯싶다. 그의 데뷔작이자 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만 해도 500쪽이 넘는다(친족 개념이 희박한 나로선 이 책을 굳이 읽을 생각이 아직 없긴 하지만). 참고로, 인류학자 이광규 교수가 레비스트로스의 열혈팬으로서 그의 이론을 한국의 친족/가족 관계에 적용한 책들을 쓴 바 있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해설서/연구서로는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90)을 참조할 만하다(초판이 8,000원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25,000원이다! 그만큼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레비스트로스부터 푸코, 알튀세르, 라캉을 모두 읽은 한국 학자는 내 생각에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이 책에서 김교수가 인용한 문단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입장을 'superrationalism'이라고 부른다. 번역하자면, '초강력합리주의'쯤 될까?('초합리주의'라고 번역하는 건 좀 약하다!)

미리엄 글룩스만의 <구조주의와 현대 마르크시즘>(한울, 1994)도 절반은 레비스트로스에 할애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알튀세르.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은 여성학자 글룩스만의 박사학위논문이다.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1997)에서도 구조주의 파트에서 소쉬르 다음으로 레비스트로스를 다룬다. 하지만, 언젠가 서평에서 쓴 대로,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수준 이하다. 어제 소쉬르에 관한 부분을 원문 대조해서 다시 읽어봤는데, 똑똑한 학부생의 번역보다 못하다(역자는 소쉬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 보인다). '능기' '소기'를 거꾸로 번역하는 건 이 책에서 아주 흔한 오역의 사례일 뿐이다.

대담에서도 나오지만, 레비스트로스는 현장 인류학자들로부터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그에 대한 자기변호를 또한 이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 비판으로 아주 유익한 것은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이다. 상당한 무게 있는 이론서인데, <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해리스의 이론적 입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해리스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이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슬픈 열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거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가 아닌 작가로서도 이름이 남을 만한 학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 그 레비스트로스가 아직 살아있다! 지난 80년대 초반인가 우리나라를 다녀가기도 했던 이 노인류학자는 1908년생으로 메를로퐁티나 시몬느 보부아르와 동년배이다(메를로퐁티와는 교생실습도 같이 했다). 노화학자들 말로 80세까지는 건강관리를 잘하면 살 수 있지만, 100세 이상 사는 건 (장수)유전자 덕분이라고 한다. 아마도 작년에 세상을 뜬 가다머와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 또한 장수 가계에 속하는 모양이다. '역사적 인물들', 책 속의 인물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간혹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레비스트로스 얘기가 너무 길었다. 나머지는 짧게 줄이자.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2003)이 번역돼 나왔다. 작년에 나온 <해석에 반대한다>(이후)에 이은 책이고, 앞으로 '투명성'에 대한 그의 최신작으로 이어질 거라고 한다. 손택은 미국을 대표할 만한 에세이스트 비평가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에 대해서는 지난주 일간지 서평들에서 많이 다루어졌기에 군말하지 않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 긴 리뷰를 쓰고 싶다.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백년글사랑, 2003)이 나왔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목차를 검색해 보니, 예상대로 이전에 묶였던 산문집(<생명의 황홀>)과 많이 겹친다. 때문에 나로선 새로 살 생각이 없는 책이지만(아마 표제글 외 몇 편 정도가 내가 안 읽은 글일 듯싶다), 그의 산문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권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소개한다. 황동규와 더불어 정현종 또한 대단히 뛰어난 산문가이다. 어줍잖은 글들을 읽느니 그의 글을 한번 읽어보시길.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문학동네, 2003)이 나왔다. 연대출신인 성석제는 기형도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정현종의 제자이기도 하다. 시로 데뷔했지만, 엽편 소설로 이름을 날리다가 급기야는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는데, 그의 장기는 이 신작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다. 사실 나는 그의 책을 아직 한권도 사보지 않았지만(검토단계이다), 그가 우리시대의 재능있는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언젠가 <씨네21>에 실린 칼럼을 읽고 책값 3,000원 벌었다는 생각을 했다).



 

 

 

끝으로, 작년 연말에 나온 대학출판부 책 2권을 적어둔다. 하나는 콘라트 로렌츠의 <현대문명이 범한 여덟 가지 죄악>(이대출판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은 이전에 문고본(삼성미술문화재단) 등으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의 변을 들어보니, 다시 번역해 낼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고, 나도 이전의 문고본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없기에 다시 손에 들었다. 로렌츠는 니코 틴버겐, 칼 폰 프리슈 등과 더불어 1973년에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 동물행동학 1세대 학자이고, <공격성에 대하여> <솔로몬의 반지>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물론 올초에 결정판 전기라 할 <콘라트 로렌츠>(사이언스북스, 2006)까지 출간됐다).

다른 하나는 백낙청 외, <성찰과 모색>(서울대출판부, 2002). 부제는 '영미문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설정을 위하여'로 돼 있고, 6편의 연구논문이 실려 있다. 현단계 한국영문학계의 문제의식과 그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책이다...

2003.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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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05 11:02   좋아요 0 | URL
전 언제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라고 쓰려다, 생각해보니 전 이런 책을 끝내 읽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어려운 책을 갈수록 기피하게 되더라구요... 아무튼 리스트 중에서 성석제 책은 읽었답니다.

로쟈 2006-05-05 17:4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못 읽었습니다.^^

마태우스 2006-05-05 23:17   좋아요 0 | URL
아아, 그렇군요!! 하여간 로쟈님이 고른 책은 뭔가 달라 보여요
 

이제 비로소 2003년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세월은 지나간 것만으로도 코믹하군!)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은 많지 않다. 이럴 땐 다행스러우면서도 좀 심심하다. 물론 10년 전쯤보다는 사정이 좋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그 시절엔 매일같이 서점에 들렀어도 '신간'은 가물에 콩나듯했으니까.

 

 

 

 

그래도 눈에 띈 책은 파스칼 브뤼크네르(1948- )의 <번영의 비참>(동문선)이다(*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저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를 나는 알렝 핑켈크로트와 함께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그래서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책은 모두 산다. 특이하게도 매 2년마다 소설과 에세이를 번갈아가면서 낸다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책은 모두 7권이다.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과 <영원한 황홀>(동문선, 2001), 그리고 <번영의 비참>(원저는 2002)이 에세이이고, <비터문>(산하, 1993), <출생파업>(하서, 1994), <새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작가정신, 2000), <아름다움을 훔치다>(문학동네, 2001)이 소설이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산 책은 <출생파업>인데, 물론 그 당시엔 이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책도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 브뤼크네르! 하게 된 것이 <순진함의 유혹>을 읽고서이다(이 책에 대한 좀 빈곤한 서평을 쓴 바 있다). 그 책은 아직도 내가 읽은 에세이들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걸작이다. 이후에는 당연히 '브뤼크네르의 모든 책'이다. 해서 나는 뒤늦게 수소문했지만 구하지 못한 <비터문>(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영화의 원작소설이다)을 빼놓고는 그의 책을 다 갖고 있다(*2005년말에 나온 <길모퉁이에서의 모험>까지 포함해서).

이번에 나온 <번영의 비참>은 '종교화한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대략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부르주아(학자건 장사꾼이건)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을 '천국의 얼간이들' 혹은 '배부른 천민들'이라고 부른다(이 또한 마음에 든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 책을 몇 쪽밖에 읽지 않았지만, 역자의 무식이 좀 근심스럽다. 영문과를 나오고 통역대학원을 나왔다는 역자는 시작부터 노벨상 수상작가인 '네이폴(혹은 나이폴)'을 '나이파울'로 옮겨서 찜찜하게 만들더니, 여러 고유명사를 매끄럽지 않게 옮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자가 경제학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관련번역서들에 대해서 무지하며 읽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경제학자로서 클린턴 행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던 '로버트 라이시'(Reich)를 '로버트 라이히'로 옮기고, 우리말로도 번역된 그의 신간 <부유한 노예>(김영사, 2001; 원제는 '성공의 미래')를 <완전한 미래>(불역본 제목이다)로 옮겼다(나는 우리 번역서와 번역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민음사, 2001: 원제는 '접속의 시대')을 <접근의 시대>로 옮겼다(최소한 '접속의 시대'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대표작인 <거대한 변환>(민음사, 1997)은 <대변혁>이라고 옮겼다(최소한 '거대한 전환'이라고 옮겨야 하다). 그리고 갤브레이스의 책들의 번역도 우리말 번역서들을 참조하지 않았다. 이상의 지적은 주로 책의 말미에 붙은 '원주'에 관한 것인데, 본문을 읽는 데 큰 지장을 줄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번역서가 되려면 이러한 디테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세기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1899-1951)의 단편들이 세계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번역돼 나왔다. 제목은 <귀향>이고 표제작 외 서너 편의 단편이 책으로 묶였다. 플라토노프는 불가코프와 함께 20세기 후반에 '발견'된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다. 그의 대표작은 장편소설인 <체벤구르>인데(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란 평을 듣기도 했다(*<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다). 내친 김에 <체벤구르> 또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연극의 한 장면.

<귀향>에 실린 단편들 중에 '포투단 강'은 예전에 <러시아문학>이란 저널에 실린 적이 있는데, 작가의 금욕주의를 떠올리게 한 기억이 있다. 읽을 만한 소설들이기에 일독을 권한다.

 

 

 

 

<현대과학철학논쟁>(아르케, 2002)의 수정 번역판이 나왔다. 원제는 <비판과 지식의 성장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으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 출간 이후 과학적 지식의 합리성/객관성을 놓고 벌어진 쿤과 포퍼 진영의 일대 격돌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학술서로선 상당히 오래전의 책이기 때문에(그게 단점은 아니지만) 이후의 논쟁에 대해서 보완해줄 수 있는 책이 필요한데, 지아우딘 사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이 거기에 적합하다. 사르다르 또한 내가 주목하는 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녀의 책은 얄팍한 분량에 비해서 상당한 정보량을 갖고 있는 아주 잘 씌어진 책이다.(*그의 책들 가운데 <문화연구>는 번역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끝으로 존 피스크의 <대중문화의 이해>(경문사, 2002)가 번역돼 나왔다. 피스크의 책으론,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와 <TV읽기>(현대미학사, 1994)가 이미 나와 있다. 피스크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순전히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원제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 덕분이다. 그 책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서이면서 가장 좋은 기호학 입문 교재이다(우리 번역본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긴 하다). 나는 군더더기말이 많은 교재를 꺼리는 편인데(맨투맨 같은 영어교재), 피스크의 책은 아주 간결하며 설명이 압축적이다. 그리고 다른 기호학 책들이 자세히 다루지 않는(이건 치명적인 결함인데) 기호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다룬다.

움베르토 에코가 정의한 대로, 기호란 "거짓말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때문에, 거짓말로서의 기호와 이데올로기의 관련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것은 기호학에서 아주 핵심적이지만, 불행하게도 에코를 비롯한 기호학 이론서나 교재들에는 그러한 내용이 빠져 있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만으로도 피스크의 책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나 또한 그러한 교재를 써보고 싶다). 새로 나온 <대중문화의 이해>에 눈길을 주는 건 바로 그 피스크의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신뢰한 사람에 대해선 인심이 후한 편이다...

2003. 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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