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29회까지 연재했던 ‘최근에 나온 책들’의 30회를 쓰기로 한다(*이 글은 2004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졌고, 모스크바통신에도 나누어서 올린 적이 있다. '에피소드' 시리즈의 '에필로그'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시 올려놓는다. 31회부터는 '로쟈의 노트2'에 연재돼 있다).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제 한국식당에 갔다가 지난 토요일자 동아일보의 복사본 한 부 들고 왔기 때문이다. 토요일자에는 물론 북리뷰(‘책의 향기’)란이 실려 있다(동아일보는 아직 타블로이드판 북리뷰를 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의 향기’에 소개된 신간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끄는 책 5권 꼽아보았다. 물론 이 선택은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반드시 꼽혀야 하는 것들로는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원제는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등이 있고,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슬그머니 출간됐지만, 지난주 북리뷰에는 빠진 걸로 봐서 이미 그 전 주에 다 ‘소화’되었던 모양이다. 언급한 저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신뢰하는 이들이며(번역자들 또한 어느 정도 수준급이다), 그 책들은 모두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리라고 본다. 서울에 있었다면, 벌써 각 권의 몇 페이지씩은 읽어 넘겼을 테지만, ‘현지사정상’ 나는 이 책들을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에 넣어두는 걸로 일단은 만족한다.

 

 

 


그럼,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무엇이냐? 그건 학술면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리차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원제가 'The Extended Phenotype'인 이 책의 2판이 1999년에 나왔는데, 국역본은 이 2판을 옮긴 듯하다(2판에는 다니엘 데넷의 후기가 들어가 있다). 알다시피, 도킨스의 출세작은 <이기적 유전자>이며, 이 책 역시 1판과 2판(개정판)이 있는바, 우리말로는 둘 다 번역돼 있다. 1판은 이용철 번역으로 동아출판사에서 나왔었고(현재는 품절된 걸로 보인다), 2판은 홍영남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현재도 잘 나가고 있다). 이번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은 그 후속작인데, 도킨스 자신이 (자신있게!)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유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개체들마저도 자신의 운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아마도 책은 그 사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예컨대, “거미줄, 흰개미집, 새의 둥지와 같이 동물이 만들어낸 인공물들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논리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보면 우리의 문화와 문명도 결국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전자의 전략과 그 결과로서의 ‘확장된 표현형’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side-effect)이나 오작동(malfunction)이다. ‘눈먼 유전자’들의 전략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목표한 타깃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라는 반박도 충분히 가능하다(하지만, 그런 반박의 타깃은 나이브한 ‘유전자 결정론’일 뿐이다). 즉, 진화는 적응(adaptation)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표현을 빌면) 외적응/굴절적응(ex-adaptation 혹은 exaptation)의 산물이기도 하다(지젝, <이라크>, 83쪽). 좀더 쉽게 말하면, 진화는 ‘의도한 적응’과 ‘의도하지 않은 적응’의 복합적 산물이다(가령, ‘의도하지 않은 아이’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하는 커플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뒤집어 말하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조차도 ‘조물주-유전자’의 확장된 손(=섭리)이 만들어낸 ‘효과’일 뿐이며, 유전자의 메시지(=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다만 상상계-상징계-실재라는 프리즘을 관통하면서 굴절될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혹은 그 분리 자체가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이 두 ‘문턱’에 대한 참조 없이 우리의 마음과 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수다’는 어느 때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말은 이런 책들을 읽으시라는 것이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다.

 

 

 

 

오래 전 얘기지만, 한 대학 신입생이 당시에 과 조교였던 나에게 추천도서를 물어왔다. 내가 골라준 책 세 권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한권을 덧붙인다면, <장자>를 집어넣고 싶다). 물론 그 신입생이 이후에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거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 다 읽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조개삿갓이나 말미잘, 수달 등과 다른 점은 그런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그런 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우리의 게으른 정신은 저 혼자 알아서 크지 않으며 끊임없는 자양분과 닦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달의 친구들’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도킨스는 다윈-예수의 바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인 지젝과 유사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또한 유사한 운명을 겪은 책들이다. 각각 <이기적 유전자>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어제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다. *위의 이미지)이라는 ‘처녀작’으로 (본인들도 놀랄 만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도킨스나 지젝이 자신들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리고 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 후속작들인 <확장된 표현형>과 <그들은…>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점은 두 저자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도킨스를 처음 읽은 것은 11-2년쯤 전이다. <도덕적 동물>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의 <3인의 과학자의 그들의 神>(정신세계사)를 읽고, 그 3인의 과학자 중 한명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게 <이기적 유전자>(동아출판사)의 1판이었다(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은 몇 년 뒤에 나왔다). 당시에 (적어도 국내에서는) 거의 주목 받지 않은 책이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미 제목만으로도 책은 나에게 숨통을 터 주었다. 이후에는 물론 ‘도킨스의 모든 책’이다(그러면서 알게 된 이가 <다윈 이후>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이다).

나는 작년에 <확장된 표현형>의 원서(2판) 또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장서용’으로 사서 서가에 꽂아 두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도 몇 권 더 갖고 있다).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굳이 원서를 살 필요는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역본에 이제야 나와서 다소간 ‘유감’이지만, 그 유감은 ‘반가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

 

 

 



두번째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북리뷰에서 톱으로 다룬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원저(Who are we?)가 올해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아마도 곧장 국역본이 나온 듯하다. <문명의 충돌>도 나는 읽지 않았지만(하도 떠들어대기 때문에 안 읽어도 내용을 아는 것 같은 책들이 있다), ‘미국의 정체성’이란 제목이 더 걸맞은 이 책 또한 굳이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적어도 돈 주고 사서는). 하지만, 읽을 ‘필요’는 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세계관보다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한미관계에만 관심을 집중해 온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 책이야말로 평균적인 백인 사회의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의 절반은 이라크 침공의 명분 상실에도 불구하고 올 11월의 미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을 여전히 테러라는 적을 응징할 선봉장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전혀 신비롭지 않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인 이러한 현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앵글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생각을, 그 이데올로기를 알 건 알고 직시할 건 직시해야겠다. 더불어 헌팅턴의 두 가지 예언, 즉 ‘문명의 충돌’과 (히스패닉으로 인한) ‘미국의 붕괴’ 중 한 가지만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후자 말이다(그것만으로도 그는 정치학자로서는 별볼일 없더라도 예언가로서, ‘선지자’로서는 후세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세번째 책은 레너드 쉴레인의 <알파벳과 여신>(파스칼북스)이다. 저자는 생소하지만(*2005년엔 그녀의 책으로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도 출간됐다), 640쪽이란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가격도 만만찮지만. 3만 4천원이면 그 정도 두께의 러시아 책을 최소한 5권은 살 수 있다). 원제는 “The Alphabet versus the Goddess”(1998)이다. 그러니까 우리말 제목의 ‘과’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의 대립적/적대적 관계이다(즉 ‘알파벳 대 여신’).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외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문자 언어, 특히 알파벳은 선형적, 추상적, 남성적으로 특징되는 좌뇌적 사고를 강화하고 종합적, 시각적, 여성적 우뇌의 기능을 퇴보시켰다. 우뇌적 가치에 대한 좌뇌적 가치의 승리는 여신을 죽이고 가부장제와 여성 천시 사상을 가져왔다.”

물론 ‘가설적인’ 주장이지만(이러한 주장이 입증되려면, 비문자 사회, 즉 원주민 사회에는 가부장제나 여성 천시 사상이 생소한 것이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거 같지 않다), 그걸 이 만한 분량으로 밀어붙인 노고에 대해서는 치하할 만하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지로의 회귀 현상을 의미 있게 보고, 앞으로 좌뇌와 우뇌, 남성과 여성의 가치, 문자와 이미지가 균형을 찾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잠깐 든 생각은 요새 한글(=알파벳)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딸아이가 점차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이 그 아이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네번째 책은 얇은 프랑스 소설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열린책들).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고르기 힘들었을 것이다(*책은 1998년에 나왔던 것이 재출간된 형태이고, 오르세나의 소설들은 <새들이 전해준 소식>을 포함해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알고 보니 제목의 ‘두 해 여름’은 번역가인 소설의 주인공이 “독자로서 경탄하고 번역자로서 낙담했다”고 한 나보코프의 소설 <아다>(‘에이다 혹은 아더’)를 번역하면서, 진탕 고생하면서, 보낸 기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실제의 번역자를 모델로 했다는 이 소설에는 기껏 번역을 해놓으니까 “내 걸작을 망쳐놓았다”고 타박하는 작가 나보코프도 등장하는바,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번역에 대한 한바탕 소동을 다루면서 저자는 번역가에 대한 예찬으로 소설을 마무리짓고 있는 듯하다. “내가 서가에 꽂힌 책의 반은 번역가들 덕분에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번역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번역가는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바다를 건너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하니, ‘한 해의 겨울과 또 다른 해의 여름’을 번역에 바치고 있는 나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번역자는 고작 200쪽짜리를 쓰고/옮긴 것이니 번역의 괴로움을 말하기에는 뭐하다(내가 옮기고 있는 원서는 640쪽 가량이다).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옮기고 있는 <아다>라면 사정이 좀 다를 테지만(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신기하게도’ 우리말 번역본이 있다. 물론 지금은 구하기 힘들 테지만).

나보코프 또한 번역일에 낯설지 않은데, 그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러시아어로 옮긴바 있고,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방대한 주석을 달아서 영어로 옮겼으며, 그의 아들 드미트리와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씌어진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러시아어로 다시 옮겼다. 참고로, 그의 외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아버지 나보코프의 영어본/러시아본 전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가장 엄격하게 저작권을 관리/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국내에 나보코프의 책들이 잘 번역돼 나오지 않는 것은 그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다. 빨리 끝내도록 해야겠다. 마지막 책은, 복간된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이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인데, 이번에 개정판이 다시 나온 것. 서문에서 김훈은 “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면 “그걸로 밥을 먹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건 김훈답지 않다. “그걸로 법을 먹게 해준 만큼” 그 글 부스러기들은 위대하지는 않을지언정 부끄러울 이유도 없다(밥벌이가 부끄러운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내가 이미 15년 전에 읽었던 것일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조금씩 교정을 보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글도 있고, 새로이 시인 이문재의 발문도 챙겨 넣은 모양이니까 여기서 소개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

200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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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3:19   좋아요 0 | URL
**님/ 서재주인에게만 생색을 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