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강조할 만한 책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 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로 불렸던 수잔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이다. "2004년 작고한 20세기의 대표적 예술평론가이자 작가인 수전 손택의 에세이 41편을 모"은 책으로 "고전이 된 첫 에세이집 <해석에 반대한다> 출간 이후 40여년만에 발간된" 것이며,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집"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책은 <해석에 반대한다>(이후, 2002),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현대미학사, 2004), <우울한 열정>(시울, 2005)에 이어지는 것이다. 지난번에 이 연재에서 다루었던 <우울한 열정>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강조해야 할 것>이 도착했으니 대략 난감이다. 덥석 집어물 형편도 아니면서 무시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 지성계의 여왕'이란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만한 여성 지성인이 많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강조해야 할 것> 이후에 (그녀의 소설들이 남아있지만) 더 나올 만한 책도 없다는 것.  

친절한 소개나 리뷰를 미리 참조하고서 책을 손에 잡는 게 유익할 듯싶은데, "총 3부 구성으로, 해박한 교양 지식과 다독으로 유명한 지은이답게 수많은 예술 작품에 대한 글들, 그리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지은이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1부 '내가 본 것들'은 영화와 회화, 오페라, 연극, 사진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2부 '내가 읽은 것들'에서는 그녀 스스로 정전으로 생각하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돈키호테, 롤랑 바르트 이외에도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상당수 다루고 있어, 독자들에게는 예술에 대한 안목을 한층 더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안목을 한층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도 되겠지만, 맥락을 알 수 없기에 헤맬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리고, "3부 '그곳과 이곳'에서는 수전 손택의 사적인 이야기가 그녀의 사유와 얽혀들어간다. 첫 출간 30년 후 <해석에 반대한다>의 현재적 효용성은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 전쟁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 에피소드와 번역의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그 가운데 지식인의 의미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날카롭게 설파한다." 나라면 3부부터 읽기 시작하겠다.

 

 

 

 

두번째 책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 2006). 주말에 각 언론에서 생각보다 많이/크게 다루어서 의외라고 생각한 책이기도 하다. 지난 2004년에 출간된 <도덕의 정치>(백성, 2004)에 대해서는 비교적 잠잠했었기 때문이다(<도덕의 정치>는 당시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산 책으로 기억된다. 한편 알라딘에는 이 책의 저자가 '조지레이 코프'로 잘못 기입돼 있다). 레이코프는 자주 공동작업을 하는 마크 존슨과 함께 현대 인지언어학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언어학자이다(그러니까 포스트-촘스키의 선두주자쯤 된다). 별로 읽을 짬은 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출간한 모든 책을 나는 챙겨둔다(물론 번역서들이다). 참고로 말하면, 러시아에서도 몇년 전부터의 그의 책들이 하나둘 소개되고 있다.

언어학자의 정치론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은 물론 촘스키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와 인지언어학의 거목은 관점이 약간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일차적인 호기심은 그것이다. 물론 공통점도 있을 텐데, 그건 당연히 '언어(말)'에 대한 관심일 터(우연찮게도 같이 나온 촘스키의 최신간의 제목은 <여론조작>(에코리브르, 2006)이다). 

소개의 말을 잠깐 따라가본다: ""문제는 말[언어]이다." 노엄 촘스키와 함께 세계적인 언어학자로 꼽히는 지은이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 정치를 바라보며 내놓은 결론이다. 왜 말일까? 그건 말이 유권자들이 세계를 보는 프레임[생각의 틀]을 결정짓고, 이는 곧 정치적 입장과 투표 성향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언어의 문제에 주목하여 미국 민주당의 선거 승리전략에 대해 실제적인 지침들을 조언으로 제공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4년 출간 이후 민주당원들의 입소문을 타고 2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고, 정치와 언론에서 '프레임' 개념이 새로을 각광받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정치언어학 도서로 분류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따라가보면, "지은이의 전작 <도덕의 정치>를 기반으로 책이 내놓는 주장은 진보 진영이 보수 진영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진영의 실패와 거짓말을 공격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유권자들이 진보 진영에 투표해 줄거란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것. 유권자들은 자기 이익이 아닌 정체성에 맞추어 투표하며, 그들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 진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범한 서민들이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겉으로 보기엔 이해 불가능한 현상을 명쾌하게 증명해낸 것." 우리의 경우엔, 언론학자 강준만이 언어학자였다면 썼을 만한 책처럼 보인다. 더불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어학자의 사회적 책임'이다.

"터미네이터를 연기한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배경에 대한 분석을 비롯하여 각종 미국 정치 담론에 말과 프레임의 힘이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쉬운 내용 구성 안에서 언어학과 정치학이 흥미로운 결합하여 한국 정치 환경을 해석하는 데에도 강력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하니까 선거의 계절을 맞이하여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그런데, 내 <도덕의 정치>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 것일까?

 

 

 

 

세번째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으로 잘 알려진" 저자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돌베개, 2006). "지은이가 90년대 중반부터 발표한 시론·시평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하니까 분량에 비해서는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지만, 그건 글의 형식상의 문제이고 내용상으로는 책의 제목 만큼이나 무겁고 갑갑할 것이니 미리 각오하고 읽는 편이 낫겠다. "'"난민'도 '국민'도 될 수 없는 추방자(디아스포라)의 감수성을 지닌 재일조선인인 지은이의 주변을 둘러싼 일본과 한국 사회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는 책.

난민 얘기가 나오니까 떠오르는 건 작년 봄에 <씨네21>(2005. 05. 13) '유토피/디스토피아'란에 실렸던 이진경 교수의 칼럼이다. '난민이 필요한 나라'라는 제목. 이 참에 한번 더 읽어본다.

-난민, 어느 한 나라에서 정부에 항거하거나 지배체제를 전복하려던 꿈을 꾸다 체포를 피해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망명, 여전히 전복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혹은 전복을 꿈꾸던 삶을 등질 수 없어서 자신의 나라를 뒤로 한 채 이국 땅을 떠도는 행위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 자국 정부가 자신에게 할당한 지위에서 벗어나 떠도는 이탈자들이고, 새로운 체제나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자 꿈꾸는 탈주자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자국 정부와 혹은 자신의 국가와 맞서는 위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부와 맞먹는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 외부에서 살기에, 한 사회의 내부에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내부에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들의 시계가 망명하던 시간에 멈추어버린, 그래서 그렇게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사는 나라의 외부자고 망명자, 난민이기에, 그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어디서도 외부자다. 내부에, 그 친숙함에 안주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익숙함의 관성에 따라가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나라, 혹은 자신이 사는 나라에 긴장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없는 것을 밀어넣는다. 그래서 무언가 다른 것이 만들어지게 한다. 그들은 언제나 저주받은 삶, 피곤하고 힘든 삶을 강요받지만, 그것을 좀더 나은 삶으로 되돌려준다. 비록 그것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망명자나 난민의 이러한 역할은 그들이 꿈꾸는 것을 실현하는가 여부에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어디서든 외부자라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명자나 난민이 아예 없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원하는 누구나 쉽게 그런 외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망명이 자유로운 사회. 그리고 되돌아오는 귀국도 자유로운 사회.(*'망명이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망명자'는 여전히 '망명자'인가?)

-이런 점에서 보자면, 망명이 꼭 정치적 핍박과 목숨을 위협하는 억압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국적을 던져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일전에 내가 아는 한 선배는 붕괴한 소련으로 늦은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의 소련행을 “문화적 이유에 의한 망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귀국할 수 없게 하는 위협이 없다고는 해도, 이런 망명이 결국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낼 것은 분명하다.(*그런 소련행을 환영할 '러시아인'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요즘 러시아에는 스킨헤드 경계령이 다시 떨어졌다.) 

-이른바 ‘임시정부’를 자처한 망명자들에 의해 수립된 나라, 가장 저명한 정치지도자가 오랜 망명생활을 한 끝에 대통령이 된 과거를 가진 나라, 그러나 난민협정에 가입하기 전에는 물론, 뒤늦게 가입한 뒤에도 10년이 넘도록 단 한명의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 그리고 미얀마의 망명자들처럼 정치적으로 곤혹스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난민보다는 불법체류자 다루듯 처리하는 나라, 목숨이 걸린 문제를 서류에 동그라미 치는 ‘서면회의’로 처리하는 나라, 난민된 사정이나 현재의 처지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그가 돌아가도 결국 죽지는 않을 거라는(사람은 정말 얼마나 죽기 어려운 것인지!) 생각으로 안심하고 추방명령을 내리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나라다. 이 나라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혹시 윤리적, 혹은 도의적 이유에 의한 망명자들인지도 모른다. 정말 난민이 필요한 나라다.

칼럼을 읽을 당시에 몇 마디 촌평을 페이퍼로 써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다른 일들에 치여 흐지부지됐었다. 칼럼의 반어적인 문제제기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내가 가졌던 소박한 의문은 '난민'과 '망명자'자 과연 같은 부류인가? '한번쯤 국적을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번" 해본 사람과 난민/망명자는 같은 부류인가? 하는 점. 그런 의문은 '노마드적 사유(노마디즘)'와 '노마드'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나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비롯된다. 물론 저자 서경식이 다루는 건 '재일 조선인'이라는 진짜 '난민', 혹은 국민도 난민도 아닌 어중간한 '난민'이다. 구체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책소개를 따라가자면, "총 3부 구성으로, 1부는 본격적인 시론과 시평에 앞서 지은이의 정치적 관점과 윤리적 감수성을 개괄할 수 있는 짤막한 에세이들을 실었다. 2부에서는 식민지배 시기부터 재일조선인의 과거를 구성하는 주요 사건들을 돌이켜보며 이들을 타자로 취급하고 차별하는 일본과 한국의 문제를 강도높게 비판한다. 국민의 영역 안에 들어와야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오류라는 것."

 



 

 

"책 전반에서 드러나는 근대 국가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또다른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3부에선 윤이상,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가주의의 폭력에 저항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애도한다. 국가에 의해 배제당하고 추방당하고 희생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 우리 안에 숨어있는 근대의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네번째 책은 팔 다리가 없는 장애를 딛고 화가가 된 여성, 앨리슨 래퍼(1965- )의 자서전 <앨리슨 래퍼 이야기>(황금나침반, 2006)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쏟아지던 편견과 배척을 이겨내고, 독창적인 예술가이자 당당한 엄마로 살아가게 된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준다."그 래퍼가 23일(오늘) 방한했다.



'살아있는 비너스'라고 불리는 "앨리슨 래퍼는 양쪽 팔이 모두 없고 다리는 무릎 아래가 없이 넓적다리뼈에 발이 달려 있는 형상의, 이른바 '해표지증'이라는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살 수 있을까를 모두가 의심했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자신의 벗은 몸에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조각 같은 영상을 표현하는 구족화가이자 사진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니까 책은 그냥 한 예술가의 자서전이다.



그녀는 "이혼한 뒤인 1999년에 임신을 했고, 아이 역시 같은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출산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생명을 지키기로 결정하고, 건강한 남자아기를 낳았다. 임신 9개월의 앨리슨 래퍼의 모습은, 트라팔가 광장에 역사적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각상의 모델이 되었다. 모성 및 장애에 대한 편견에 도전하는 앨리슨의 예술작품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2005년 세계 여성 성취상'과 대영제국국민훈장(MBE)이 그녀에게 수여되었다."

한마디로 대단하다. 더불어 드는 생각은 장애나 콤플렉스가 없는 미래 '생명복제시대'의 인간이란 '위대함'의 조건을 박탈당한 '평균인'이 아닐까란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초상은' 완벽하지만 위대하지는 않은' 인간들의 군집은 아닐까?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휴머니스트, 2006). 중앙일보의 리뷰는 "거침없는 '역사 비빔' 스페셜"이란 타이틀을 뽑았는데, 이 '비빔(퓨전)'에 있어서 저자의 솜씨는 단연 독보적이란 걸 우리는 이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2003)에서 확인한 바 있다. 저자가 다시 3년만에 내놓은 책은 "시공간, 인간, 성(性), 몸, 앎, 글쓰기 등을 주제로 2001년부터 5년여간 써온, 한국 근대성의 기원과 다양한 양상들을 살피고 탈근대의 미래를 논의하는 11개의 글을 실었다."

"책 전반에서 지은이가 시도하는 접근법은 근대, 18세기, 탈근대 이렇게 세 가지 시간대를 서로 충돌시키고 넘나드는 것이다. 즉 근대의 담론을 이질적인 다른 두 시간대의 담론에 '밀어넣음'으로써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나비와 전사'라는 제목은 이 접근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 다산, 이옥, 옹녀와 변강쇠, 대장금, 그리고 허준, 노신, 달라이라마 등 18세기와 탈근대 담론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지니 소문난 잔치상으로 충분하다. 챙겨먹는 건 독자의 몫이다.

 

 

 

 

다소 예외적이지만, 여섯번째 책도 꼽아본다. 존 릭던의 <1905 아인슈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랜덤하우스중앙, 2006). 1905년,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에겐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에 아인슈타인은 무려 5편의 세기적인 논문들을 써냈는데, 그 논문들 이야기란다. "당시 물리학의 상황배경을 설명하고, 아인슈타인이 이들 논문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발전시키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보여주어, 아인슈타인 특유의 사고방식과 독창성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에필로그에서는 1905년 이후 물리학계의 흐름을 다루어 아인슈타인이 미친 영향을 실감하게 해준다." 과학사 산책으로 더없이 유익해 보인다.

게다가 책은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본문 중간에 삽화를 삽입하여 일반인들도 큰 어려움 없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아인슈타인의 인간적인 면보다는 학자로서의 면모에 집중하고, 상대성이론 이외에 아인슈타인이 남긴 과학적 업적들을 대거 다루어, 우리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 여타의 '아인슈타인'까지 같이 챙겨서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일곱번째 책은 러시아 특파원으로 활동한 일본인 기자 에가시라 히로시의 <푸틴의 제국>(달과소, 2006). 몇년 전에 나온 <푸틴 자서전>(문학사상사, 2001)과 함께 현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그의 '제국'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될 듯하여 꼽아둔다. 나로선 불가피한 '전공관련서'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고(얼마나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는 궁금하기도 하고 미지수이기도 하다).

소개를 약간 옮겨오면, "지은이는 일본 특파원 기자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푸틴 정권의 권력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미디어와 의회를 장악함은 물론, 소련 해체 이후 엄청난 부를 획득한 신흥 재벌(올리카키)들이 차지한 자원사업을 다시 국영화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푸틴 정권의 활동상이 자세히 그려진다. 이와 함께 러시아와 체첸 간 분쟁이 푸틴 정권에게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인지, 남북정당회담에서 드러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야심 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주변 4강 중에서 미, 일, 중에 대한 전문가들은 많다. 당신의 '희소가치'를 좀 살리기 위해서라면, '러시아'에 좀더 투자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연구의 미답지들은 그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널려 있기에 5년만 공부하면, 자기분야의 국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 러시아이다. 당신에게 러시아를 권한다.

06. 0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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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에 결혼식에 갔다가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의 역자를 만났다. 바로 물어본 것은 책의 근간 여부였는데, 벌써 깔렸다는 것이었다, 이번주에 말이다(알라딘의 새로나온 책 코너는 언제나 뒷북친다). 몇달 전 근간 소식을 접하고 고대하던 책이었던 만큼 제일 먼저 꼽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이미지를 띄우는 기능이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이 페이퍼는 언제 완결될지 알 수 없다).

 

 

 

 

한 차례 날려먹고 다시 쓴다. 하지만 조금 짧게. 어쨌든 가라타니 고진(1941- )은 현재 비평가로서 일본 최강이며 그런 만큼 최우량의 퀄리티를 보증한다. 신간 또한 예외가 아닐 거라고 믿어봄 직하다. 책의 표제가 된 글은 이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근대문학이 종말'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어 국내에서도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그걸 포함하고 있는 고진의 최신간 비평집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며 일어판은 작년 11월에 출간됐다. 그런데 불과 5개월 만에 국역본이 출간된 것이니까 이런 유형의 책에 관한 한국의 출판관행에 견주어 이례적이며 파격적이다. 그 '스피드'에 있어서 거의 일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자와 출판사의 '순발력'이 놀라울 뿐(역자는 이미 고진의 비평집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를 옮긴 바 있는 '전문가'이다).  

 

일어본의 부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현재'이고, '가라타니 고진 사상, 총결산과 새로운 전개'라는 광고문구가 큼지막하게 달려 있다. 그의 <일본근대 문학의 기원>이 '대외적인' 출세작이었으므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계기로 '총결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래저래 합당하다. 그 종언 이후의 새로운 전개(신전개)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두번째 책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아카넷, 2006)이다.  흔히 신랄한 독설가이자 <인간과 초인> 같은 희곡 작가로 잘 알려진 버나드 쇼이지만, 사회주의 사상서까지 쓴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상주의, 점진주의, 의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영국 노동당의 정치노선을 대변한다는 것이 페이비어니즘인데, 쇼는 그 핵심멤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가 될 만한 칼럼의 일부를 옮겨오면 이렇다. 김성이 교수(이화여대, 사회복지학)의 국민일보 칼럼(05. 12. 14)이었다.

 

 

 

 

-근세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기인한다. 베버리지는 “나는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적 조건하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 라는 이념으로 영국 사회보장에 기초가 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초로 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영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설립되게 되었다. 이베버리지에게 영향을 준 것은 영국의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페이비언 협회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버리지는 청년기 때 토인비홀에서 불우이웃을 위한 사랑실천 운동을 했으며,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여 자본주의의 자유시장체제와 사회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 영국에서 소수의 지식인에 의해 설립되어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로 발전되었다. 페이비언(Fabian)이란 한니발 대군을 격파한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기인한다. 그는 카르타고 전쟁에서 접전을 피하고 꾸물거린다고 로마 시민으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기를 포착해서 한니발을 격퇴하여 로마를 구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페이비언주의의 기본 이념은 점진적 사회개혁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페이비언 협회는 사회개혁의 네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첫째, 민주적이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사회개혁에 대하여 대응할 준비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둘째, 점진적이어야 한다. 개혁의 속도가 사회혼란을 야기시켜서는 안 된다. 셋째, 도덕적이어야 한다. 부도덕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더욱 도덕적이어야 한다. 넷째,그 어떤 개혁도 입헌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페이비언 협회는 침투와 설득이라는 전략으로서 사회개혁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설득의 대상으로 삼았다. 페이비언 협회의 노력 결과 런던의회가 개최되었고 구빈활동에 개혁을 가져와 영국 복지국가의 기본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복지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조화로운 박애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뉴라이트운동은 모든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해야 하며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해치는 어떠한 장애물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맞서 싸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싸움은 설득과 관용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뉴라이트의 정치이념이 '페이비언 사회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것인지는 의문이지만(어찌됐든 사회주의 아닌가!), 그리고 현재의 영국이 '복지국가'의 모델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페이비언 사회주의 유래와 내용은 그러하다고 한다. 쇼의 책은 그 이념적 정수를 짚어내고 있는 책이고. 버나드 쇼의 신간들 가운데에서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이너북, 2005)을 바그너의 원작 <니벨룽의 반지>(책과소금, 2005)와 함께 읽어보는 게 그간의 희망사항이었는데,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추가해야 될 모양이다. 덧붙여, 지난번에 자유주의 관련서들을 짚어보았던 김에 이번에는 사회주의 관련서 몇 권의 이미지도 띄워둔다.   

 

 

 

 

세번째 책은 지구상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던 나라, 그리고는 현실 사회주의를 지난 세기에 끝장낸 나라 러시아의 경제사를 다룬 따찌야나 찌모쉬나의 <러시아 경제사>(한길사, 2006)이다. 다루는 범위는 방대해서 고대 러시아부터 푸틴(뿌찐) 시대까지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총2부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술되어 있다. 제1부은 고대부터 1917년 10월 혁명 이전까지의 시기인데, 기존 연구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부분들-고대와 중세의 러시아 경제-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좀더 상세히 알 수 있다. 제2부는 10월 혁명부터 뿌찐 시대 초기까지의 경제개혁을 다루고 있는데, 기존의 책들과는 시각이 전혀 새로운 뿐만 아니라, 1990년대의 시장경제 체제개혁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에 이 분야의 책들이 드문지라 따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 경제발전사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정치, 사회 등 폭넓은 범위에 걸쳐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교양서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하니까 두루 읽어보심이 어떠할까? 참고로, 저명한 경제사학자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창비, 1998)는 이미 오래전에 출간된 바 있다. 나란히 꽂아둠이 마땅하다.  

 

 

 

 

네번째 책은 알코올 소비 세계 1위국인 러시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테마의 책이기도 한데(러시아의 술 얘기는 <굿모닝 러시아> 참조),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장 메종디외의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알코올>(정신의서가, 2006)이다. 부제는 '사랑의 이야기'.(아마 러시아판이었다면, '알코올 중독 이야기' 정도가 부제로 어울림직하다.) 내용은 제목 대로라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알코올이 무슨 역할을 할까, 정도를 기대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알코올 중독이라고 말하는 알코올 의존증과 남성성·여성성의 관련성을 살펴본다"고.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을 치료해 온 지은이가 만난 남녀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의 사례를 분석하여 술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사랑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벗겨낸다. 이 책은 알코올 의존증에 대한 흔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알코올 의존자들은 어쩌다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을까? 이는 알코올 중독의 원인이 술뿐이 아닌 심리적인 데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은이가 찾아낸 심리적 원인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고정된 타입을 강요하는 사회문화이다. 남성은 과음으로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반대로 여성은 여성스러움이 강요하는 결함을 은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술 없이는 이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남녀의 생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사람은 관계를 가깝게 만들기 위해 술을 마시는가, 아니면 술은 역설적으로 관계를 갈라놓는 벽인가의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이런 내용 소개보다 좀더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한 소제목인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술을 마셔요, 내 사랑"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러브샷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러브샷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고 싶지만/있지만,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을 두고서 술을 마신다. 엄청. 그게 알코올 중독의 흔한 시작 아닌가?(하다못해 황태자 주지훈도 한번 실연을 하고 소주를 하루에 3-4병씩 한달을 퍼마셨다지 않은가?) 그리고는 이렇게 주절거리곤 한다: "당신과 나, 알코올과 함께, 죽는 날까지". 결론? "알코올이냐 여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알코올이라면 황태자급에 해당하는 이들이 작가, 예술가들이다. 이 주당들의 면면들은 <알코올과 예술가>(마음산책, 2002), <작가와 알코올 중독>(랜덤하우스중앙, 2005) 등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문학작품으로는 '미라보 다리'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문학과지성사, 2001)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집 연구서로는 황현산 교수의 <얼굴 없는 희망>(문학과지성사, 1990)이 있다.  

 

 

 

 

네번째 책은 미국의 전설적인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의 리드싱어였던 커트 코베인(1967-1994)의 평전으로, 음악/연예 전문기자라는 찰스 크로스의 <커트 코베인 평전>(이룸, 2006)이다. 27살에 자살을 선택한 코베인은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이를 정서적 바탕으로 하여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 냉소 등을 펑크록에 담아 표출했다고.

 

 

 

 

사실 나는 너바나의 음악이나 커트 코베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그의 아내였던 커트니 러브를 먼저 알았을 정도이다).

미국의 현대 팝음악에 대한 나의 취향은 '도어즈'의 짐 모리슨에서 R.E.M 정도까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에 '전설'로 남은 리더이고, 그룹인지라('너바나'는 물론 불교에서 해탈을 뜻하는 '니르바나'를 영어식으로 읽어준 것이다. 그런데, 밴드 이름이 '니르바나'라고 하면 왜 촌스럽게 들릴까?) 이런저런 귀동냥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었다. 또,코베인의 개인사 못지 않게 당대의 문화사에 대한 식견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 이 평전에 눈길이 간다.  

다소 늦게 눈에 띄었지만, 이 평전과 마침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론 조지프 하스/앤드류 포터 공저의 <혁명을 팝니다>(마티, 2006)가 있다. 하버마스의 제자들이라는 두 저자는 1960년대 이후 서구를 휩쓴 반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의 '신화'를 낱낱히 까발린다고. 한 서평에 따르면, "잘못된 반문화의 이상에 헌신"해온 서구의 진보 좌파에 대한 통렬한 공격을 가한다. '문화적 저항'이란 신화에 (아직도) 기대와 미련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책으로 보인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작가 김훈의 첫 소설집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이다. 여러 일간지에서 이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여기서는 문화일보(06. 04. 17)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온다.

-김훈(58). 1995년에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를 펴낸 직후 바로 문단의 큰 나무가 돼버린 사나이. 장편소설 <칼의 노래>(2001년), <현의 노래>(2004년)로 우리말 문학의 아름다움을 한껏 쳐든 언어의 수공업자. 그가 첫 중·단편 소설집 ‘강산무진(江山無盡)’을 펴냈다. 8편의 작품을 모은 책의 제목은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의 산수화 이름에서 따왔다. 책이 담고 있는 풍경은 이승과 저승, 생시와 꿈의 경계를 넘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그림의 강산을 닮았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삶의 불우(不憂)와 슬픔을 늙어가는 육신에 혼자서 짊어지고 막막한 시선으로 이 세상과 그 너머의 풍경을 응시한다. 이들은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밥벌이’를 신경써야 하는 당대의 일상을 아픈 심신으로 힘껏 견디면서도 끝내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는다.(*김훈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쓴다. 에세이스트들의 천형처럼.)

-지난 13일 저녁, 경기 일산에 있는 작가의 집 주변의 한 맥주전문점에서 만났을 때 그는 가능하면 소설 이야기를 피하려 했다. 출판사 측은 그가 소설집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를 싫다고 해서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문예지 ‘문학동네’의 신수정 주간과 류보선, 서영채, 이문재, 황종연씨 등 편집위원들, 그리고 일산파 젊은 문인들인 김연수, 김중혁씨 등이 ‘김훈 선생’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소설동네의 경사를 축하했다.

-첫 소설집을 낸 작가는 이날 미치도록 부끄럽다고 되뇌었다. 그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억지로 말을 시키자, 이번 소설집이 ‘나’의 이야기에 머무르고 ‘너’ ‘우리’에게까지 넓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더듬더듬 말을 꺼내놨다. 자전거 레이서로서 시속 30㎞까지 달릴 수 있다고 자랑을 할 때와는 판이한, 어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나는 편협한 글밖에 못 써요. 개인만 가지고 쓰잖아요. 시대 전체를 보고 역사의 구조를 통찰하는 황석영, 조정래 같은 작가도 있는데, 나는 그게 안 보이니…. 그래도 내 팔자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의 ‘내 글’은 아내의 죽음을 맞거나(‘화장’)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음 앞에 있으며(표제작 ‘강산무진’)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뒀고(‘고향의 그림자’) 하청업체 사장을 하다가 부도후 택시운전을 하는(‘배웅’) 인물들이 주변 사람들의 삶과 부딪치며 빚어내는 내면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신 주간은 책 뒤의 해설을 통해 그의 소설이 고대(‘빗살무늬의 토기’)와 역사(‘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거쳐 3각 꼭짓점처럼 당대의 현실에 이르렀다고 묘파했다.

-탁월한 문학기자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소설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때, 많은 이들이 그의 문체로 소설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나도 그렇다.) 삶에 깃든 슬픔과 허무를 아름다움으로 한껏 밀어올리는 그의 문체 미학이 저잣거리의 잡사를 다루는 소설에 들어올 수 없다고 여겼던 것. 그는 그러나 발품을 팔아 얻어낸 삶의 거래 현황을 소설 속에서 치밀하게 묘사, 현장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우리 삶의 남루한 구석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독자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안기고 있다.(*아직 확언할 수 없다.) 신 주간은 이를 “새로운 형태의 서정을 획득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주변의 높은 평가와 달리 작가 스스로는 “산문보다 소설 쓰는 게 훨씬 어렵고, 짧은 구조에 완결성을 가져야 하는 단편 쓰기는 참 힘들다”며 “소설을 업으로 삼지 못하고 아마추어로 영원히 머물 것”이라며 사뭇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내 생각도 그렇다.) 그는 그러면서도 소설을 쓰는 일은 모국어와 몸을 힘껏 써야 한다는 점에서 연애하는 것과 같다며 소년처럼 설레는 듯한 미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소설에서 ‘몸’의 미학에 천착해 온 그는 집필할 때 연필로 쓰는 것을 고집하는 까닭이 어깨로부터 팔에 전해지는 힘을 느끼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내가 김훈에게서 가장 높이 사는 것은 이 '소년'의 '연필로 쓰기'이다. 소설의 내용은 상관없다. 거기에 비하면 사소하다. 작가 김훈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앞으로의 창작 계획을 묻자 그는 요즘 병자호란, 한일합방 등 우리 역사의 치욕이 어떻게 된 것인지 책과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은 영광과 자존, 찬란함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소설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게 내 일이지요.”(*그 역사의 치욕이 그의 치욕과 어떻게 상관적인지는 다른 자리에서 지적한 바 있다. 김훈에 대한 나의 신뢰는 간혹 위악적인 그의 포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관성'에 대한 그의 집요한 몰입에 놓인다. 그는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이며, 자신의/역사의 치욕을 되뇌일 것이다. 나는 그가 훌륭한 소설가가 아니어도/못 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06. 04. 15-17.

P.S. 마감후에 눈에 띈 책은 (드디어 출간된) 미하일 바흐친의 <말의 미학>(길, 2006). 원제는 '언어적 창조의 미학'인데, 보기 이해하기 쉬운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바흐친 사후에 편집된 책으로 기억되는데(러시아판 1979년), 초기 바흐친의 주요 이론적 관심과 주장들을 모아놓은 그의 주저이다. 국내에서 한풀 꺾인 듯한 바흐친 '열기'에 다시 기름을 붓는 격이 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모처럼 출간된 '무게' 있는 저서(580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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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4-16 22:03   좋아요 0 | URL
커트 코베인 사진이 눈에 확 띄네요. 책 소개 기대할께요..^^

로쟈 2006-04-16 23:16   좋아요 0 | URL
이미지를 띄우는 기능이 먹통이어서 손놓고 있습니다. 별거 아닌 걸로 질질 끌어서 머쓱하네요...
 

강의준비에도 쪼들리고 있는 걸 보면 이래저래 바쁜 계절이다(4월이 어디 가겠는가?). 벚꽃놀이가 '시즌'에 들어갔지만, 꽃구경은 언감생심이다. 어린이대공원의 벚꽃놀이가 이렇다 한다. 나는 책구경으로 허전함을 때우려 한다. 최근에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나온 책들이다.

 

 

 

 

첫번째 책은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또 마뚜라나; 1928- )의 대담집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이다. 책은 독일어 원저가 2002년에 나오고, 대본이 된 영역본이 2004년에 나왔다고 하니까, 따끈한 책이다. 마투라나는 흔히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찍지어서 불리는 이름인데, autopoiesis, 즉 '자기생산' 혹은 '자가생산'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들뢰즈의 <시네마>인가에서 'autopoietic'을 '자율시적'이라고 옮겼는데, 오역이다).

국내에는 이미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란 책이 오래전에 소개됐었는데(나도 그 책을 통해서 이름을 처음 접했다), 마투라나는 자기조직 체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최근에 인문학에서는 부쩍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다. 비록 저자는 인지생물학을 인식론에 한정하여 이해하지만, 보다 확장된 시야에서 바라볼 수도 있는 것. 

가령, 오래된 책이지만 에리히 얀치의 <자기조직하는 우주>(범양사, 1989) 같은 천체물리학 책이나(물리학 책으론 로저 하이필드 등의 <시간의 화살>(범양사, 1994)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참고문헌이다), 폴 크루그먼의 <자기조직의 경제>(부키, 2002) 같은 경제학서, 그리고 슈미트의 <구성주의 문학체계이론>(책세상, 2004) 등은 모두 우주와 경제와 문학작품을 자기조직적 체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책들이다. 김성재의 <체계이론과 커뮤니케이션>(커뮤니케이션북스, 2005)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에 대한 체계이론적 접근 입문서이고, 사회학이론의 대가 니콜라스 루만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체계를 이해한다(그의 대저 <사회체계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또, 체계이론은 보통 기호학과 많은 부분 문제의식을 공유하는데('자기생산'의 기호학을 주제로 한 책들이 다른 언어권에는 나와 있다), 문화를 하나의 체계로 보는 러시아 문화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의 작업도 이러한 맥락하에 놓인다.

'자기조직적' 관점의 세계 이해라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혼자서도 잘해요!"가 되겠다. 어떤 외부의 힘의 유입/개입 없이도 자체적으로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질서)를 형성해나간다는 것. 이러한 관점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가 외부(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체계들의 집합체라는 것(바깥은 없다, 내지는 없어도 된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아닌가? 외부/바깥이 없는 무한으로서의 우주. 동양사상에서는 무위(無爲)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해서, 제목에서는 '있음에서 함으로'로 돼 있지만(물론 프리고진의 '있음에서 됨으로'를 바로 연상시킨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 아닌가? 비록 마투라나는 프리고진을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 '함(doing)'은 '무위'의 함이라고 나는 지레짐작한다. 그것은 무얼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최적성의 경로를 따라서 무엇이 저절로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정치적 함의가 (루만의 경우도 그렇지만) 한편으론 보수주의적이라는 걸 따로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왓에버 윌비 윌비(Whatever will be, will be)의 교육 버전. "애들은 (지들이) 알아서 큰다!"(이런 경우는 '진보적'이라고 해야 하나?)     

 

 

 

 

두번째 책은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1904-1980)의 주저 <마음의 생태학>(책세상, 2006)이다. 원제는 'Steps to an Ecology of Mind'인데, 이미 <마음의 생태학>(민음사, 1990)으로 국역본이 나와있는 책이지만, 이번에 나온 책은 2000년판을 옮긴 것이며,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1936- )의 서문(1999)이 붙어 있다. 메리는 베이트슨과 저명한 여성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아래는 베이트슨 부녀의 사진.

<마음의 생태학> 외에 베이트슨의 책으론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까치, 1997), 마가렛 미드의 <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기질>(이대출판부, 1998)과 함께 초기 인류학의 '명저'로 꼽힌다는 <네이븐>(아카넷, 2002), 그리고 <정신과 자연>(까치, 1998), <마음과 물질의 대화>(고려원, 1993) 등이 더 소개돼 있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것은 정신분열증에 관한 베이트슨의 이론이다. 흔히 이중구속(double bind)론이라고 불리는 것 말이다.  백과사전에서 관련내용을 옮겨오면 이렇다: "예컨대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서 무언가를 하도록 말하고,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듯한 몸짓을 한다. 그러면 아이는 이중으로 구속된 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이중구속의 상태라고 한다. 베이트슨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없을 때에 이 상태가 생기기 쉽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이론의 모델은 발리섬 주민의 개인 간 상호작용에 관한 고찰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개인 중에서도 주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아버지의 권위가 약해지거나 아버지가 없는 현대의 가족상황을 예견한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영국의 반정신의학이나 가족요법의 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두 가지 명령에 구속된 상태를 말하는바, 강의시간에 우스개 소리로 자주 하는 얘기는 이런 거다. 다이어트중인 딸한테 아빠가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엄마는 먹으면 혼날 줄 알아라는 표정으로 눈을 흘긴다. 만약에 엄마와 아빠를 모두 사랑하는 딸이 두 사람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자 한다면, 이중구속 상태에 빠지게 된다(보통은 이런 난처한 상황한 처한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린다). 정신분열증이란 이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이거 먹는 건 내가 아니야 라고 부인하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나와 그걸 금지하는 나의 자기분열. 믿거나 말거나.   

 

언젠가 체계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어 베이트슨의 책들을 사들이긴 했었는데(근작에 속하는 <네이븐>을 제외하고), <마음의 생태학>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이 거기에 포함된다. 국역본이 나온 김에 독서계획을 세워볼까 하지만, 책장에서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니 모두 박스보관 도서인 듯하다.      

 

 

 

 

세번째 책은 역사학자 피터 버크의 <지식>(현실문화연구, 2006)이다.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문화사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버크 교수의 처음 출간된 책은 <역사학과 사회이론>(문학과지성사, 1997)이며 이후로 잠잠하다가 작년부터 부쩍 출간도서가 많아지고 있다. <이미지의 문화사>(심산, 2005), <문화사란 무엇인가>(길, 2005) 등이 그의 책들이다. 모두가 한번쯤 읽어볼 만한 주제와 분량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식>의 원제는 'A Social History of Knowledge: from Gutenberg to Diderot'(2000)이니까 '지식의 사회사'쯤 될 텐데, <지식의 역사> 같은 식의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은 좀 이외이다. 슈바니츠의 베스트셀러 <교양>(들녘, 2004) 같은 책과 '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된 것인지? 여하튼 내용은 지식의 탄생과 유통, 소비에 관한 모든 역사이다. 

소개를 옮겨오자면, 책은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지식의 탄생, 흐름, 분류, 판매, 소비, 상품화 등을 망라하는 '학문의 역사'를 담았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형성된, 이른바 '지식의 공화국(Republic of Knowledge)'에 대한 40여년에 걸친 지은이의 연구 결과물이다. '지식의 공화국'이란 표현은 주로 학자들 간의 상상된 지식공동체를 뜻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를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장인이나 농부, 산파의 현장경험도 '지식'의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거기에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덧붙여지는바, 실상 '지식인'의 탄생과 종말을 다룬 책들은 적지않게 나와 있으므로 관심있는 독자들은 일독해보시길. 아쉬운 건, 러시아식의 독특한 지식인 유형인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책들이 요즘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인텔리겐치아의 시대는 끝났다 하더라도 '인텔리겐치아의 역사' 정도는 소개되어도 좋지 않을까?  

 

 

 

 

네번째로는 자유주의에 관한 책들을 몇 권 고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티븐 룩스의 <자유주의자와 식인종>(개마고원, 2006). 다른 정보가 없으니 소개를 인용하면, ""자유주의자에게는 자유주의를, 식인종에게는 식인주의를" 이 책 제목의 모티브가 된 이 말은 영국의 철학자 마틴 홀리스가 만든 경구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사상의 '자유'를 용인한다는 자유주의를 따른다면 식인주의도 용인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저명한 사회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스티븐 룩스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기고하거나 강연한 원고를 모은 것이다. 13편에 달하는 글에서 지은이는 자유주의가 내포하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갖는 한계를 탐구하고 있다."

 

"즉, 다양한 역사·문화적 배경에서 생성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빚을 수밖에 없는 현대 지구촌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를 거부하며 모든 가치를 원칙적으로 인정해 버리고 마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갈등을 해소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기 한계까지도 인정할 줄 아는 자유주의적 이성'을 제시한다. 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 이성을 계몽하고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최적점을 찾아가는 자세를 갖는 것이 '자유주의자'와 '식인종'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자기 한계까지도 인정할 줄 아는 자유주의적 이성'은 얼핏 리처드 로티를 연상시킨다.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가 되라!'가 저자의 금언인가?

그리고, 자유주의 이론에 관한 천착을 계속 하고 있는 이근식 교수의 신작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기파랑, 2006)도 출간됐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저술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을 상세히" 살피고 있는데, "1999년 출간된 지은이의 전작 <자유주의 사회경제사상>(한길사, 1999)에서 애덤 스미스를 다루었던 부분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저자의 변은 이렇다: "지금부터 꼭 40년 전 대학 진학시 경제학과를 지망한 것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워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 수 없었다.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된 것은 40대 중반에, 경제학을 전공한 지 20년도 넘어서, 애덤 스미스의 책들, 특히 <도덕감정론>을 읽고 나서였다. <도덕감정론>은 내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스미스는 인간은 양심과 타인에 대한 동정심도 있으나 자기 사랑이 더 강하며, 누구나 더 잘 살려고 노력하는 강렬한 본능이 있으며, 시장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므로 저절로 발생하여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제도임을 가르쳐 주었다."

한데, 이 <도덕감정론>(비봉출판사, 1996)은 이미 품절된 지 오래된 책이다. 자유주의 애호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주저를 서점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한편, 저자의 다른 책으론 <자유와 상생>(기파랑, 2005)이 얼마전에 나온 책이고, 편저자로 참여하고 있는 <자유주의의 원류>(철학과현실사, 2003), <자유주의란 무엇인가>(삼성경제연구소, 2001) 등도 자유주의 '원론'을 챙겨볼 수 있는 책들이다.

한편, 미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의 정치철학을 살핀 입문서도 출간됐다. 조나산 울프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철학과현실사, 2006)이 그것이다. 노직의 대표작인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1974; 국역본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문학과지성사, 1997)에 대한 해설서로 유용한 책이겠다. 노직의 책은 내가 학부를 다닐 때만 해도 롤즈의 <정의론>과 함께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필독서였다. '자유주의'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나 반감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노직과 한번 대결해 봄직하다(이런, 노직의 책들도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다!). 한편, 알라딘에는 저자가 '노지크'로 돼 있지만, <인생의 끈>(소학사, 1993)의 저자도 로버트 노직이다. 저자의 명성에 비해 좀 한가해보이는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흥미로운 건 그의 인생론이 아니라 정치철학이다. 

 

 

 

 

끝으로 전혀 예상치 않았던 책, 롤랑 바르트의 'S/Z'(동문선, 2006)이다. 작년에는 <목소리의 결정>이 나오고 해서, 이로써 롤랑 바르트 전집이 거의 완결돼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발자크의 단편 <사라진느>에 대한 정밀하면서도 유희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이 '문학이론서'는 바르트의 이론적 여정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로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전범적인 책이다. 한데, 그런 만큼 번역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국역본의 출간은 반가우면서도 미심쩍기까지 하다(러시아어로 번역돼 있긴 하지만). 한편으론 <모드의 체계> 같은 '구조주의' 저작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법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바르트의 책으론 단연 <텍스트의 즐거움>과 <사랑의 단상>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그의 사진론 <카메라 루시다>(열화당)를 보탤 수 있고(이 책이 절판된 건 유감스럽다).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는 바르트 애호가나 전문 독자의 리뷰를 읽었으면 싶다. 이럴 때면 좀 아쉬운 사람들이 있다...

06. 04. 14-15.

 

 

 

 

P.S. 덧붙이고 싶은 책은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 노르웨이의 노벨상 수상 작가 크누트 함순(1859-1952)의 <굶주림>(범우사, 2006)이다. 나는 이전에 우종길의 번역으로 된 <굶주림>(창, 1994)으로 읽었었다. 나치 부역 혐의로 말년의 삶은 좀 치욕적이었지만, '20세기 최고의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크누트 함순의 처녀작. "1890년에 출간되었으며, 고통스럽게 불안해하는, 소외된 현대의 인간을 문학작품 속에 등장시킨 최초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이중적이고 복잡한, 그래서 때때로 관련성이 없는 반응양식을 보이는 인간의 심리를 통찰한 작품이다."



소개를 더 옮기면, "이 작품에는 1886년 겨울 작가가 오슬로에서 직접 겪은 극심한 가난이 반영되어 있다. 그가 묘사하는 굶주림의 상황과 심리현상은 매우 충격적이다. 소설 속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굶주림의 사회적 원인도 서술대상이 아니다. 오직 '불가사의한 굶주림'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뿐. 이 굶주림은 주인공을 '극도로 날카로운 지각능력과 죽음에 가까운 혼미상태가 교차하는' 고도의 정신분열증적 상태로 몰아간다."

"작가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은 20세기의 주요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란츠 카프카, 베르톨트 브레히트, 헨리 밀러 등 전 세계의 유명 작가들이 그를 숭배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이작 싱어는 영어로 번역된 <굶주림>의 미국판 서문에서 크누트 함순을 '현대 문학의 아버지'라고 평한 바 있다."

거기에 동시대 작가 폴 오스터(왼쪽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문학론 <굶기의 예술>(문학동네, 1999)는 무엇보다도 함순의 <굶주림>과 카프카의 단편 <단식광대>에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더불어,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1905-1942, 오른쪽 사진)의 부조리한 작품들에도 함순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함순은 하름스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의 한 사람이다).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청어람미디어, 2004)에 실린 단편 <노파>를 <굶주림>과 같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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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13 17:20   좋아요 0 | URL
새로나온 책은 아니지만 민음사에서 김우창전집을 재간행했더군요. 예전의 활판인쇄(?)가 아닌 새로운 판본으로...[시인의 보석]이 없던차라 서점에서 낼름 사왔습니다.

로쟈 2006-04-13 18:2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반가운 소식인데요(다음번에 올려야겠습니다). 저는 <시인의 보석>만 갖고 있는 거 같은데.^^
 

집에서 밤참 라면을 먹으면 글을 친다(이미지들은 이전에 미리 올려놨지만). 여하튼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번에 다룰 새로 나온 책들의 컨셉은 '세계 여행'이다. 이 여행은 공간적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이기도 한데, 가장 먼저 둘러볼 곳은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이고, 1969년이다. 이때의 일본은 전후 최대 문제 작가 중 한 사람인 미시마 유키오(1925-1970)의 나라이다.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새물결, 2006)가 증언해주고 있는.

 

 

 

 

1969년이면 작년에 개봉됐던 이상일 감독의 영화 <69 식스티나인>의 시간적 배경과 동일한 해이다. 그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1960년대 말 일본의 자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까지도 기득권 세력으로 비판하면서 ‘미·일 제국주의 타도’와 ‘제국대학 도쿄대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투쟁한 극좌파 학생운동조직인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가 마침내는 동경대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던 해이다(해서, 프랑스 파리의 1968년에 대응하는 것이 일본 동경의 1969년이다).

그런 전공투가 극우파 지식인 작가의 거두 미시마 유키오와 1969년 5월 13일에 동경대학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만나 2시간 30분 동안 격론을 벌였고, 그 녹취된 내용을 1999년 토론 30주년 맞아 장년이 된 전공투 참여자들이 벌인 후일담 토론 내용과 같이 묶어서 책으로 펴낸 것이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책이라 한다. 극우와 극좌의 만남이었지만 토론의 분위기는 '의외로'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지난주 대부분의 언론 리뷰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 다만, 리뷰들 가운데 가장 유익했던 문화일보의 리뷰를 부분적으로 옮겨오면 이렇다.

-단순한 우파와 좌파가 아닌,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극 우파 미시마와 극좌파 도쿄대 전공투 학생들은 당시 왜 만나 얼 굴을 마주대하고 토론을 벌였을까. 역사의 전설로 남은 69년 대 화와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99년 이제 초로(初老)의 나이가 돼 다시 자리를 함께 한 전공투 출신 인사들이 당시 토론을 반추 하고 평가한 내용을 담은 책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추진된 일본 근대화는 물론, 우리에게 있어서 근대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 준다.

-2시간30분 가량 진행된 미시마와 전공투의 격론을 보면, “정말 근대를 둘러싼 중후하고 약동감 넘치는 활기찬 토의였다”는 30 년 뒤 전공투쪽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다. 토론장 입구에 자신을 고릴라 모습으로 캐리커처한 그림을 보고 웃었다는 미시마나 “약간의 비아냥과 예의의 표시로 교복을 입고 마중나갔는데, 폴로 티셔츠를 입은 러프한 모습으로 미시마가 나타났을 때 ‘아차 한방 먹었구나’ 생각했다”는 69년 집회를 기획한 기무라 오사 무(木村修)의 회고 등은 당시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렇다면, 미시마와 도쿄대 전공투의 만남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양쪽은 자민당과 공산당이라는 ‘사이비’ 보수와 진보가 대변해온 ‘전후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현대사를 철저하게 전복시키려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공통 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실 양자에게 당시 좌파와 우파는 뿌리 부터 잘못된 근대의 쌍둥이 질병에 다름 아니었다. 미시마가 전공투 와의 토론을 끝내며 “제군들의 열정만은 믿는다”고 말했던 이 유이기도하다. 폭력과 시간의 연속성, 전공투, 정치와 문학의 관계, 천황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미시마는 천황이란 이름으로 상징되는 일본 민중의 저변에 있는 것, 일본민족이 오랜 시간 지속시켜 온 멘탤러티에서 해결책을 찾은 반면, 전공투는 혁명을 통한 새로운 공간의 창출로 근대를 초극하려 한 점이 달랐지만 말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종래 리버럴로 분류됐던 지식인들이 이념적 성향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분화되거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좌우의 입장을 극한으로 밀고가 일본을 근본에 서 사유하려 했던 미시마와 전공투의 토론과 30년 뒤 평가를 담은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뉴라이트다 뉴레프트다’ 소리는 요란하지만 ‘사이비’ 좌파와 우파만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좌파와 우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작년봄에 '커밍아웃의 윤리'를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소리만 요란한 좌파나 소위 '할복'하지 않는 우파를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 작년은 미시마의 탄생 80주기가 되는 해였고, 나는 그걸 대비하여 재작년에 러시아어로 된 두툼한 미시마 선집(사진)을 구해 왔었다(러시아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거의 모든 작품이 여러 판본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하지만, 그걸 읽을 만한 여유가 여태 없었는데(앞으로도 없을까봐 걱정된다), 이 <미시마 유키오 대 전공투>는 그에 대한 관심을 새삼 불러일으켜주는바, 미시마 '입문서'로서도 제격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러시아본의 표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는 상당한 근육질의 몸매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혹독한 훈련의 결과였다.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의 서문에서 미시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대목: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고대 일본의 무예들과 현대의 생리학적 기술들이 그에게 허락한 극한의 훈련과 고통에 그의 육체를 복종시킨 바 있다. 그는 그런 훈련과정에서 그의 육체가 가장 강렬하게 관능화되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고대 일본의 서사시적이고 영웅적인 윤리를 부활시키고 그것을 그의 육체와 언어를 이용하여 미래 속으로 던져넣기 위해 현대 생리학과 심리학적 기술들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의 실험적인 육체 편력을 육체의 능력을을 키우기 위한 무제한적인 투자가 주도하는 '육체의 전투'를 우리에게 폭로하고, 근육들이 고양하는 상상력에서 해방된, 그리고 근육들을 규약하는 타자들과 결합한 권력이 부양하는 상상력에서 해방된 '권력의 긴장'을 우리에게 폭로한다. 그는 인간의 영광의 정점은 세속적인 수단들이나 목적들과는 거리가 먼, 시커먼 죽음의 빛 앞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는 찬란한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5쪽)

인용문에서 '찬란한 권력의 상징'은 'a figure of radiant power'를 옮긴 것인데, '인간의 영광의 정점'을 받는 술어로서는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이 대목에서 'power'는 '권력'의 아니라 (육체의)'힘'을 가리키며, 'a figure of radiant power'는 '광채나는 근육질 몸매'란 뜻이 아닐까 한다(그것이 미시마가 보기엔 인간의 '최고의 영광'이라는 것). 미시마가 자신을 근육질 '몸짱'으로 만든 이유가 달리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미시마는 1970년 일본 자위대 본부를 점거한 채 자위대의 총 궐기와 일본의 재무장을 호소하면서 전통무사식으로 할복자살한다.  

 

 

 

 

두번째 책은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작가들, 2006). 때는 1904년, 장소는 우리의 제물포 앞바다. 그리고 두 주연은 러시아와 일본의 수병들이다. 저자는 1904년 '르 마탱' 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는데, "그 해 4월 1일 밤 그는 러시아 수병들로부터 한 전투 이야기를 취재했다. 그 전투는 바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열강이 벌인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 즉 러일전쟁의 서막을 연 제물포해전이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특유의 문학적 필치로 기사화하여 신문에 연재하고, 이를 묶어 책으로 출간하기에 이른다"는 게 책의 출간배경이다.

우리로서는 예기치 않은 역사적 사건에 관한 예기치 않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개를 좀더 옮겨오자면, "100여년 전의 문헌을 발견하여 번역한 이 책은 제물포해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사료 중 하나이자 유럽인의 (편향된) 시각에서 재현한 전쟁 기록이기도 하다. '제물포의 영웅들'을 만나게 된 과정, 그들과의 인터뷰, 제물포 해전 이후까지 이어지는 전쟁의 묘사와 지은이가 만난 러시아 수병들과의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교차하는 구성을 띠고 있으며, 외교문서와 여러 관련 자료로 제물포해전의 실체를 보여준다. 또한 러시아가 패배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반일친러의 시각에서 러시아 병사들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지은이의 묘사,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한국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구성, 전쟁의 잔인한 참상에 대한 문학적이고 생생한 묘사 등으로 한국인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할 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200쪽 남짓이니까 비교적 가벼운 분량인데, 사실 '제물포 해전은 이듬해 벌어지는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의 서막일 테니까 이 책 또한 그 서론쯤으로 읽힐 수 있겠다. 그럼, 본론은? 러시아쪽에서 나온 책 두 권이 눈에 띄는데, <러일전쟁사>(건대출판부, 2004)와 콘스탄틴 플레샤코프의 <짜르의 마지막 함대>(중심, 2003)가 그것이다. 후자는 출간당시 언론의 관심을 끈 책이지만 곧 잊혀진 듯하다.

저자는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쓰시마 해전'을 인류 역사상 세계 5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으면서, 이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발틱함대의 길고도 험난한 항해와 순식간의 처참한 패배를 생동감있게 그려내고 있다고. 물론 이 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여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반면에 러시아는 혁명의 불길에 휩쓸려 제국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이른다(러시아제국은 크림전쟁(1853-56)에서의 패전 이후 이 또 하나의 이 치욕적인 패배를 겪으며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쪽 시각에 대해서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명문각, 1992)을 참고할 수 있다고 한다. 

 

 

 

 

세번째 책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미국의 1920년대 풍경을 다루고 있는 F. L. 알렌의 <원더풀 아메리카>(앨피, 2006)이다. 책 자체가 '고전'인데,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좋았던 옛날;에 대한 기록"으로서 "1931년 출간된 이래, 수정과 증보를 거치면서 당대의 모순과 역동성에 대한 세밀화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 고전적 저서"라고. 원제가 'Only Yesterday'인 국역본의 부제는 '미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시대에 대한 비공식 기록'이다.  

소개를 부분적으로 옮겨오자면, 책은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의 종결부터, '쿨리지Coolidge(후버Hoover) 호황'을 극적으로 붕괴시킨 1929년 11월 13일 주식시장 대폭락까지 11년간의 역사를 아우르며 무한한 낭만과 가능성이 살아 숨쉬던 미국의 청년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정숙한 여성과 신여성의 치마 길이 차이, 알 카포네(사진)가 들고 다닌 명함 문구 등 사소한 사건들로부터 당시 대중들의 사고방식의 변화를 읽어내고, 적색공포―스캔들에 대한 열광―매너와 도덕의 혁명―부자의 꿈―지식인의 반란―부동산 투기 열풍―대활황 주식시장―주식시장 대붕괴로 이어지는 한 시대의 거대한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1920년대의 매력'을 생생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 국역본에는 원서에 없는 사진들이 1,000점 포함되어 이해를 돕는다고 한다. <제국의 부활>이나 <미국이라는 이름의 후진국> 혹은 마이클 무어의 미국('더티 아메리카')과는 좀 다른 시대, 다른 모습의 미국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 무어가 되돌려달라고 하는 미국이 '원더풀 아메리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류하자면, 시대사이면서 문화사에 속하는 책인데, 같은 1920년대 초반 조선의 문화의 유행을 다루고 있는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2003)를 비교해가며 읽어볼 수도 있겠다. 한편, 러시아의 1920년대는 혁명 이후 신경제정책(NEP) 시기에서 스탈린 시대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였다. '원더풀 아메리카' 못지 않게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문화사의 거리가 될 텐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에 관한 책들은 소개돼 있지 않다. 톰슨의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사회평론, 2004)에서 그 뼈대 정도를 간추릴 수 있을 따름이다.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현장증언과 함께.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이 관통한 시대이기도 했던 1920년대...

 

 

 

 

네번째 책은 지중해로 넘어간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5인의 공저인 <지중해의 역사>(한길사, 2006)이 그것인데, 포괄적인 통사 형식의 지중해사는 처음 소개되는 게 아닌가 싶다. 소개를 옮겨오면, "지중해를 둘러싼 장대한 문명의 변화상을 담아낸 역사서"로서, "프랑스, 이탈리아[구 로마제국], 그리스 등의 유럽 국가들과 이스라엘, 오스만투르크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과 아랍 국가 등 수많은 민족들과 국가들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쳐온 역사가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진다. 충실한 구성으로 프랑스의 지중해 관련 수업과 강의에서 교재로 자주 선택되는 책이다." 즉, 지중해사 '교과서'라고 보면 되겠다.

지중해 문명과 관련한 국내서로는 국내 저자 13인이 힘을 모은 책, <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한길사, 2005)가 있다. 김진경 교수의 <지중해 문명산책>(지식산업사, 1994/2001)과 진원숙 교수의 <지중해 문화사 이야기>(노벨미디어, 2003)도 관련서이고,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사랑의 풍경>(한길사, 2003)도 부제가 '지중해를 물들인 아홉 가지 러브스토리'인 만큼 이 분야의 책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그렇게 꼽자면, 사제지간인 그르니에-카뮈의 지중해도 빠뜨릴 수 없겠는데,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한길사, 2003; 청하, 1990)은 그 기본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카뮈 전공자인 김화영 교수의 산문집 <행복의 충격>(책세상, 2001)도 <지중해, 내 푸른 영혼>(민음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듯하고, 그게 카뮈의 <결혼. 여름>과 함께 '지중해'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결정지은 듯하다. 거기에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1)릉 얹으면 지중해에 대한 나의 '추억'은 거의 완성된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언제나 한 여름의 그 바다!..

 

 

 

 

<지중해의 역사>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책으로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비엔나>(구운몽, 2006)도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19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빈)에서 얻어진 지적·예술적·문화적 성취들을 탐구한 저작으로, 198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원제는 'Fin-de Siecle Vienna: Politics and Culture'이다.  

소개를 더 옮겨보면, "지은이는 '포스트니체 문화(post-nietzschean culture)', 즉 니체 이후의 지성사와 문화사를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모델로 비엔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문학, 도시계획, 조형예술 등 각 분야에서 비엔나의 문화현상과 대표적인 인물들의 활동상을 역사가와 문화분석가의 입장에서 깊이 접근해 들어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쓰여진 총 7개의 장은 각각의 개별적인 연구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이다." 가령, "압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비엔나 공간에서 일어나는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표현한 건축가들, 자유주의의 몰락 속에서 발생한 표현주의 문화 등을 분석"하면서,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 아르놀트 쇤베르크(음악), 쿠스타프 클림트(회화) 등 '아버지에 대한 저항'을 기본 코드로 빈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지성인들을 다뤘다."

비엔나 건축에 대해서는 임석재 교수의 <추상과 감흥>(문예마당, 1995)이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는 두말한 건덕지도 없고, 쇤베르크 관련서로는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를 주제로 한 노명우의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문학과지성사, 2002)가 읽을 거리이다. 이 참에 새로 나온 클림트 화집도 구해보실 수 있겠다. 이 모두가 동시대 비엔나의 소산이라고 하니까 쟁쟁하기 그지 없다. 다만 거기에 "19세기 말 합스부르크 빈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삶을 조명한 책", 스티븐 툴민의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 2005)를 더 얹으면 금상첨화겠다.  

 

 

 

 

당신이 비엔나까지 둘러봤다면, 이제 모국행을 서두를 때이다.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 2006)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책은 "2005년 3월부터 1년간,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그 대부분을 읽은 터이지만, 책으로 묶어서 읽는 맛은 또 다르다. "우리 신문학 백년사에서 제 방 하나를 너끈히 가질 만한" 시인 50명의 시집을 한권씩 소개하는데, 이만한 연재가 우리 언론사에서 자주 있었던 것인가를 묻고 싶다. 내가 금요일은 뺀 평일에 한국일보를 주로 보는 것은 순전히 고종석 때문이라는 걸 굳이 고백해야 할까? 아마도 내년 이맘때쯤에는 고종석 버전의 <말들의 풍경>도 출간될 것인바, 그런 일만으로도 나이먹는 일의 허망함이 절반은 상쇄된다고 말하고 싶다(나머지 절반의 허망함은 각자가 누리도록 하자).

거기에 덧붙여, 김윤식 교수의 새 평론집 <작가론의 새 영역>(강, 2006)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 그밖에 책에 관한 책들, 곧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6),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마티, 2006), 그리고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 2004)의 저자 최종규의 <헌 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 2006)은 도대체 책이 무엇인관데, 란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책들이겠다. 그런 질문들에 미처 답하지 못하더라도 <조선 최고의 명저들>(휴머니스트, 2006)는 놓치지 말아야겠다. "<조선왕조실록>, <열하일기>, <난중일기> 등 조선시대를 대표할만한 14개의 명저들을 소개"하면서, "기행문과 일기, 보고서, 문집 등 국보급 기록에서 당시 민중 사이에서 즐겨 읽힌 베스트셀러까지, 각 문헌의 주요 내용과 그에 얽힌 역사적 배경, 당대인들의 사상과 문화적 깊이를 살핀다"고 하니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06. 04. 05 - 06.

P.S. 부록으로 클림트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 '키스'를 이 자리에 옮겨놓는다. 책읽기에 지친 영혼들께서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용맹정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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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28 00:25   좋아요 0 | URL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다라는 말에 다소 의외였었는데 이 책을 보니까 그 말이 이해가 되더군요. 다치바나가 말한 것은 '상대적' 바보였던 것이지요. 동경대 전공투의 말이 다소 매끄럽진 않지만 서양 철학, 특히 현상학을 섭렵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이였습니다. 일본 대학생이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68혁명에 동참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그런 지적 기반이 있지 않았나 새삼 생각했습니다.

로쟈 2006-10-28 00:50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구입도 못한 책인데요(^^;)...
 

지난번에 마저 다루지 못한 예술 관련서들을 호출하도록 한다. 신간이라고 나왔으면 무대인사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건 혼자 생각이고 미리 안면을 터두어야 머리속에 오래 담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호출한 책들은 (혼자 생각에) '내놓은' 책들이다.

 

 

 

 

 

 

 

 

 

첫번째로 내놓을 책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예술>(동문선, 2006)이다. 원제는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2003)이다. 들뢰즈 전문가의 한 사람인 보그는(알라딘에서는 '로널드보그'로 검색된다) 우리에게 <들뢰즈와 가타리>(새길, 1995)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저자인데, 이후에 이번에 나온 책을 포함하여 <들뢰즈와 문학(Deleuze on Literature)>(2003), <들뢰즈와 시네마(Deleuze on Cinema)>(2003) 등을 한꺼번에 출간했다(이름을 붙이자면 보그의 '들뢰즈와 예술 3부작'쯤 되겠다. 보그의 최신간은 'Deleuze's Wake'[2004]이다). 얼마전에 이 세 권 중에서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의 원서를 마지막으로 구했었는데, 이번에 번역본이 나와준 것(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이미 '들뢰즈의 미학'을 주제로 한 <사하라>(산해, 2006)도 얼마전 출간된 바 있고 해서 바야흐로 들뢰즈의 미학과 예술론에 대한 읽을 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느낌이 든다(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철학'과 '실험철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예술가/실험가 철학'). '들뢰즈와 음악'에 대한 연구서들도 최근에 더 나오고 있지만(가령 뷰캐넌 등의 책)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쪽은 영화나 미술이고, 특히 미술 방면으론 콜브룩의 입문서 <질 들뢰즈>(태학사, 2004)를 먼저 참조하신 후에 <감각의 논리>(민음사, 1995)를 옆에 끼고서 보그의 신간을 읽으시면 되겠다(내가 그럴 계획이라는 얘기이지만).   

 

역자는 '사공일'씨인데 관료출신의 경제학자와는 무관한 동명이인이고 후기를 보니 <들뢰즈와 가타리>(세종출판사, 2004)의 저자 정형철 교수의 제자이며 번역 용어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출판사가 흠없는 책들을 좀체로 내지 않는 동문선이라 미심쩍긴 하지만, 초면의 반가움을 더 증폭시켜줄 수 있는 책이기를 기대한다(대충 훑어본 바로는 기대 이상의 번역이다).  

 

 

 

 

 

 

 

 

 

동문선 얘기가 나온 김에 그동안 모른 체했던 책을 한 권 언급하자면, 프랑스 저명한 신화학자 조르주 뒤메질(1898-1986)의 대담짐 <대담>(동문선, 2006)이 출간됐다. 대담자는 학술전문 저널리스트인 디디에 에리봉. 에리봉의 대담집으론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와 곰브리치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1997)이 이미 출간돼 있다(에리봉의 푸코의 전기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 푸코는 뒤메질의 제자이다). 내 기억에(푸코의 전기를 읽다보면 종종 언급된다) 뒤메질은 인도신화의 최고 권위자였는데(레비스트로스가 북미신화의 권위자였듯이), 자전적 <대담>이 그의 책으론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책이다. 그런 책들이 어디 한둘이랴만.

 

 

 

 

 

 

 

 

 

두번째로 짚어볼 책은 서성록 교수의 <한국 현대회화의 발자취>(문예출판사, 2006)이다. 한국 미술과 미술계에 문외한인지라 저자나 이번 저서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저명한 미술평론가 오광수 교수와 함께 <우리 미술 100년>(현암사, 2005)을 출간한 바 있는 중견이다. 현대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오광수 교수의 <한국 현대미술사>(열화당, 2004)와 같이 읽어봄 직하겠다. 그런 미술사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우리 젊은 화가들의 작업을 둘러보고 싶다면, <한국의 젊은 화가들>(다빈지기프트, 2006)에 눈길을 주어보시길.

 

두툼한 분량은 아니지만, '45명과의 인터뷰'란 부제대로 에누리 없이 "한국의 젊은 미술가 45명의 삶과 철학 그리고 예술 이야기를 대표작과 함께 수록"한 책이다. 소개를 더 옮겨오자면, 책은 "45인의 작가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여섯 개 항목의 질문을 통해,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살펴보았다. 나아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보고자 했다. 동시대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큐레이팅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씌어진 책." 그러니까, 눈요기와 귀동냥을 위한 책이다.

 

  

 

 

 

 

 

 

세번째 찍어둘 책은 <옥스포드 세계영화사>(열린책들, 2006) '보급판'. 실상 양장본 책은 작년에 나왔었지만, 도서관을 위한 '그림의 떡'이었고, 이번에 나온 보급판은 나름대로 '저렴한' 가격이기에 장서용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 굳이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지만, "전세계 80명 이상의 영화학자와 영화평론가들이 함께 만든 영화의 역사에 관한 백과사전. 1000쪽에 이르는 페이지와 1만 개의 색인 목록이 말해주듯 '세계 영화사'가 다루어야 할 항목들을 빠짐없이 수록했다"는 점에서 소장가치는 충분하다. 단, (나처럼) 데이비드 보드웰/크리스틴 톰슨의 <세계영화사>(시각과언어, 2000)를 이미 갖고 있는 경우에는 약간 망설여지기도 하겠다. 이런 경우엔 주머니 사정에 맡겨두면 되겠다. 국내 버전으론 김성태/임정택의 <세계영화사 강의>(연세대출판부, 2001)도 있다. 1000쪽이나 되는 영화사를 관람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적합해 보인다.  

 

 

 

 

 

 

 

 

<옥스포드 세계영화사>는 "현대 영화이론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책이면서도 전체적인 시각의 균형을 잘 유지해 특정 학파의 이론을 중심으로 씌어진 기존의 영화사 책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지역적으로도 유럽과 미국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도, 라틴 아메리카 등까지 아우르며 고르게 안배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 대한 소개가 빠진 부분이 약간 아쉽다."(한국의 세계영화사의 바깥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줄 책들이 자료집들을 포함해서 최근에 계속 나오고 있다(중요한 건 이런 영화사들이 해외에도 소개되는 일이겠다). 이런 분야를  '쌈박하게' 정리해줄 분이 주변에 없는 게 아쉽다.   

 

 

 

 

 

 

 

 

 

덧붙여 한국영화의 현재를 점검해주는 책들로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의 '영화와 시선' 시리즈의 신간들도 최근에 출간됐다. <공동경비구역 JSA>(삼인, 2002)로 시작된 이 시리즈의 10번째 책은 역시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새물결, 2006)이고, 같이 나온 9번째 책은 <살인의 추억>(새물결, 2006)이다. 이 시리즈의 강점은 한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깊이있는 읽기를 시도한다는 데 있는데, 한편으론 우리 '영화담론'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넓이'에 주목하고픈 독자라면 <200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작가, 2006)에 눈길을 돌려 마땅하다.

 

 

 

 

 

 

 

 

 

"2005년 한 해 동안 국내에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34편의 작품을 선정하고, 각 영화에 대한 평론을 덧붙였다. 영화인, 영화 이론가, 영화평론가, 각 분야의 문화 예술 전문가, 출판.편집인으로 구성된 105명의 추천 위원을 위촉하여, 한국 영화 16편과 외국 영화 15편, 독립(단편) 영화 3편을 '2006 오늘의 영화'로 선정했다. 2006년 선정된 작품들 중 한국 영화 부문에서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17회)가, 외국영화 부문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15회)가, 독립(단편) 영화 부문에서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14회)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추천을 받은 감독과 영화를 목록으로 작성하여 부록으로 수록하고, 추천 위원들의 '선정 이유'도 함께 실었다"는 책.

 

 



 

 

 

 

 

네번째로 꼽아보는 책은 마틴 켐프의 <레오나르도>(을유문화사, 2006)이다. 2004년에 나온 책이 이렇듯 재빨리 번역/소개되는 것은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지만, 저자가 옥스포드대학의 미술사학과 교수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 등도 기획했다고 하니까 허술한 책은 절대로 아니겠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이 어떻게 예술과 과학을 탄생시켰으며,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같은 걸작들에 숨겨진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또 레오나르도의 다양한 이력을 추적함으로써, 그의 꿈과 힘 있는 패트론(후원자)과의 관계, 신과 인간, 자연에 대한 관점들을 풀어낸다."

 

한 외국저널의 서평이 간명하다: "레오나르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마틴 켐프는 창조적이면서 지적인 삶을 살았던 레오나르도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통합적으로 서술하였다. 마틴 켐프는 르네상스 거장의 경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받은 임무, 그를 유혹했던 돈, 그가 섬긴 궁전에서의 임무, 잘 알려진 간결한 그림들이 갖고 있는 여담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그의 접근을 매혹적이고 계몽적이며 읽기도 쉽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로널드 보그의 책과의 수미상관을 고려하여 전방위 문필가 장석주의 비평서 <들뢰즈, 카프카, 김훈>(작가정신, 2006)을 고른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이 제시하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문학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저자의 사유는 '공무도하가'를 비롯해 이상,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이성복, 신경림, 황지우, 황동규 등과 이문과, 김훈 등 한국작가들의 시와 소설, 그리고 카프카를 종횡무진 아우른다. 지은이는 문학이 '나'와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현실과 역사, 더불어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사유체계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단면들―타자, 시선, 욕망, 개인, 가족, 국가, 질병, 순수, 유목주의, 술, 스타일―을 통해 그 전체적인 국면을 들여다본다."

 

 

 

 

 

 

 

 

 

과거  출판사 편집/경영까지도 했었던 저자를 '비평가'가 아닌 '문필가'로 칭한 것은 비평가는 물론 시인, 소설가에다 에세이스트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전 5권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시공사, 2000)이 그의 재기작이었다. 의외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소설창작론인 <소설>(들녘, 2002)로 돼 있다. 입소문이 난 책인가?). 아마도 그는 손으로 꼽을 만한 다산성을 자랑하는바, 이제까지 40여 권에 육박하는 책들을 출간했다. 물론 나의 독서력은 저자의 집필력을 따라가지 못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그의 책은 시집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문학과지성사, 1996)와 산문집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프리미엄북스, 1997) 등이 아니었나 싶다. 여유가 생기면, 작년에 나온 <풍경의 탄생 - 한국시의 이미지 계보학을 위해>(인디북, 2005) 등을 읽어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들뢰즈, 카프카, 김훈>을 손에 들겠지만...

 

06. 03. 30.

 

 

 

 

 

 

 

 

 

 

P.S. 덧붙이자면, 아주 오랜만에 장 필립 뚜생(1957- )의 소설이 번역돼 나왔다. 그의 2002년 신작 <사랑하기>(현대문학, 2006)이 그것이다(<텔레비전>(문학사상사, 1997) 이후 거의 10년만이다). 역자는 이번에도 그의 소설 <욕조>(세계사, 1991)를 소개했던 이재룡 교수이고, 분량은 180쪽 정도니까 역시나 경쾌한 중편 정도이다. 소개에 따르면, 뚜생은 작년 2005년에 <도망치기>란 작품으로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뚜생과 <사랑하기>의 불어본.

 

 

줄거리인즉, "디자이너인 '마리'와 마리의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마리는 내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어난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마리와 나의 관계를 어긋낼 것이란 예감을 한다"는 식이며, "노골적 성 행위를 뜻하는 원제목(Faire l'amour)에서 알 수 있듯, '육체적 충동과 욕망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랑의 파괴적 에너지가 허무를 낳고 소멸과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묘사했다. 소설의 배경은 도쿄이다.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명성을 떨친 작가 장 필립 뚜생은 일본 문단으로부터 '프랑스 스타일의 선(禪)문학'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는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렀는데, 2002년 발표한 <사랑하기>는 일본 체류시의 기억을 되살려 쓴 작품이다. (메디치상 수상작인 <도망치기>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아래 사진은 일역본. 덧붙이자면, 사랑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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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30 22:42   좋아요 0 | URL
"출판사가 흠없는 책들을 좀체로 내지 않는 동문선"...헌데 꾸준하긴 엄청나게 꾸준한 것 같습니다.-.-;;

푸하 2006-03-30 22:5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편력(여정)이 긴 행렬을 이루네요.... 로쟈님 책 내신 거 있으세요? 미묘한 질문인가요?

瑚璉 2006-03-30 23:44   좋아요 0 | URL
그래도 동문선의 완역상주 한전대계는 좋은 시리즈였는데 말이지요.

로쟈 2006-03-30 23:43   좋아요 0 | URL
marcus님/ '동문산'쯤 될 겁니다!
푸하님/ 제가 더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면 올해부터는 두어 권씩 나올 예정입니다.
壺裏乾坤님/ 저도 원래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출판사입니다(--;)

푸하 2006-03-31 15:0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여정이 기대되네요..... ^^; 이곳의 많은 자료들은 책출판하는 시점에서 안전할까요?

로쟈 2006-03-31 18:33   좋아요 0 | URL
'안전'이란 말씀은? '자료들'이 막바로 책이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내버려둘 계획입니다. 혹 다른 걸 물어보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