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페이퍼란의 '모스크바 통신' 카테고리를 비공개로 돌렸다. 이미 2/3 가량은 수정버전이나 이미지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서 다른 카테고리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내용상 중복이 되는 걸 굳이 '공개'할 필요가 없어 보였고(나머지 1/3도 유효성이 있는 대목들에 한에서 틈나는 대로 정리할 생각이다), 재작년의 '객담'인지라 이젠 그냥 조용히 혼자만의 창고에 넣어두고 보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최근에 나온 책들' 시리즈도 에피소드까지 다 정리한 줄 알았더니 자투리가 남아있길래 여기에 옮겨둔다. '오역의 세 가지 대상'이란 모스크바 통신문의 서두에 들어 있던 내용이다. 

지난 일요일에(*이 글은 2004년 6월초에 씌어졌다)  모스크바에서 한국식당이 가장 많이 밀집돼 있는 ‘아를료뇩’호텔(표기는 ‘오를료뇩’이고 모스크바대학에서는 걸어서 30분 거리이다)의 한국식당에서 일행들과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동아일보 복사판이 눈에 띄길래 들고 왔다. 마침 토요일(29일)자 신문이어서 북리뷰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0일(토)자 이후 처음으로 읽는 한국의 일간지 서평이었다(물론 인터넷에도 뜨긴 하지만).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란 책이 1면에 다루어지고 있었고, 학술란에도 눈길을 끄는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먼저, 안토니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갈무리)이 번역/출간된 걸 알 수 있었는데, 나는 아직 <제국>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참견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에게서 ‘정치’와 ‘혁명’이 당위적인 도덕론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복종하지 말고 자유롭게 행동하라. 죽이지 말고 생성하라. 착취하지 말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정도가 ‘혁명’의 강령이라면 말이다. 분석이 결여된 강령에 대해서 나는 신뢰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한 시간관만 하더라도 미래(future)와 도래(to-come)의 구분에 대한 저작권은 내가 알기엔, 데리다에게 있다. 서평자는 “가난을 연민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주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네그리는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와 만나는 셈”이라고 썼는데, 네그리는 어느새 성자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네그리에 따르면, “탈근대의 상황에 놓인 가난한 자들은 ‘다중’이라는 새로운 공통의 이름을 획득함으로써 ‘도래할 민중’이 된다. 동시에 ‘제국’은 혁명의 시간을 거치며 다중의 ‘코뮌(communism)’이 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예언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인지, 당위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인지 헷갈린다(예언적 당위인가?). 사적 유물론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더불어, “네그리에 따르면 정치란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을 뜻하고, 혁명은 권력의 전복이기 이전에 자기 삶을 긍정하며 구성하는 사건이다.”

내가 궁금한 건, 이때 변신/변혁의 주체이자 근거인 ‘자기’는 기계와의 접속 이후의 “사이보그 혹은 일반지성”에서도 관철되는가 혹은 연속적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기계적인, 영속적인 신체와 지성을 얻게 된 이후에도 ‘나’로서 ‘자기’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가? 그때도 우리는 가난한 ‘다중’이고 ‘주체’인가? 그리고, 그때는 무엇이 변하는 것인가? 그때도 삶은 삶이고, 긍정은 긍정인가?(혹 네그리를 신뢰하는 분이 계시다면 답변을 주시길. 얇은 책이니까 금방 읽어보실 수 있을 거 같다.)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은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아동도서 같은 책 표지는 뭔가?). 알다시피, 커니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철학교수’이다. 그러니까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남의 철학을 잘 소화해서 대중에 소개하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고찰’이란 부제에서 그 ‘도전’은 아마도 그의 것이 아니라, 그가 다루고 있는 다른 철학자들의 것일 게다. 어쨌든 커니는 기존의 ‘쟁쟁한’ 타자론들을 ‘초월적 입장’(데리다, 리오타르, 레비나스 등이 속할 것이다)과 ‘내재적 입장’(프로이트나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 계열)으로 나누고, ‘제3의 길’로 ‘비판적 해석학’(딜타이나 가다머)을 내세운다고 한다. 이 입장은 해체주의처럼 타자를 무조건 환대하지도 않고, 정신분석학적 입장처럼 타자를 묵살하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해석자와 피해석자라는 두 자립적 타자가 만나는 지평의 융합과정”이란 게 무엇인가? 책읽기 아닌가? 그렇다면, ‘비판적 해석학’ 모델에서의 타자와의 조우란 것은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만나게 되는 경험 아닌가? 이때의 ‘추상적 저자’가 자립적 타자인가? 게다가 ‘저자’를 숭배하지도 무시하지도 말라?! 서평으로만 판단하자면, 커니는 여전히 좋은 철학교수로 남아있는 것이 낫겠다. 참고로, 그의 <현대철학자들과의 대화>는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대심문관>(한국외대출판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수록된 ‘대심문관’에 대한 러시아 석학들의 평론집이라고 한다. 이 ‘러시아 석학들’의 면면이 어떠한지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388쪽이니까 분량도 제법 되는 책이다. 혹시 읽으시는 분은 서평이라도 올려주시길. 지금은 절판된 책이지만, 르네 월렉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열린책들)에도 대심문관을 다룬 글이 두 편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참고로, 대심문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바로 다음 장 '러시아의 수도사'를 같이 읽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린다. 그래야 균형이 맞게 된다.

어제는 푸슈킨거리에 있는 고리키문학연구소에 갔다가 작년부터 새로 나오기 시작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18권) 중 제3권을 사들고 왔다. 이 책은 현재 5권까지 나와 있는 듯하며, 책임편집자는 자하로프 교수이다. 새 전집은 창작/발표 연대별로 수록하는 게 원칙인 듯한데(이 원칙에 따른 새로운 푸슈킨 전집이 곧 나올 예정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이 필요해서 산 3권은 총 688쪽이고, 1850-62년까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대개의 일반전집보다는 큰 판형이며(연구자용으로서는 좀 거추장스럽다), 장정도 유려하고 가격도 저렴하다(고리키연구소가 좀 싸긴 하지만, 우리돈 6,500원 가량. 1-2권은 더 싸다). 발행부수는 10,000부. 문제는 언제나 완간될까 하는 것. 도스토예프스키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 본 소리이다(이런 등속의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북리뷰에 크게 건 작게 건 소개된 책은 총 29권이고, 그 중 번역서가 18권이었다. 학술서는 6권 중에 5권이 번역서였고. 대략 2/3가 번역서인 셈. 그만큼 우리의 출판과 독서문화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그런 비중만큼, 양질의 번역서들이 양산되고 있는가이다. 즉, 제값이 번역서들이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 북리뷰의 한 서평은 “하지만 그의 현란한 문장이 설익은 채 번역돼 가끔은 읽기 어려운 게 흠이다.”라고 말미에 사족을 달고 있는데, 일간지 서평자들이야 출판사나 저자들이 송부해온 책을 보는 것이니까 그런 ‘흠’에 대해서 관대할 수도 있겠다.

해서, 나는 이런 서평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신뢰하는 건 적어도 ‘사서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이다. 내가 모든 책에 쪽수와 함께 악착같이(?) 책값을 병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악착같이(!) 오역에 대해서 물고 늘어지는 것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본전 생각’ 때문이다. 책은 책다워야 하며, 비싼 책은 비싼 책다워야 한다(이걸 ‘정명(正名)사상’이라고 하던가? 다르게 말하면, ‘정가(正價)사상’이다!).

2004.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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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6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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