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쏟아져나오는 신간들에 대해 참견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구당이 명당이라고) '최근에 나온 책들'을 마저 연재하기로 한다. 한 넉달은 쉰 듯한데, 그렇다고 그간에 뭔가 재충전된 건 아니며 단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이 신간으로 나온 걸 보고서 문득 연재에서 다루고픈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사람의 뇌 또한 '카오스의 가장자리' 아닐까?). 그럼 시작해보기로 할까? 

 

 

 

 

제일 먼저, 에드워드 로렌츠의 <카오스의 본질>(파라북스, 2005)이 출간됐다. 이게 '드디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데, 카오스이론, 혹은 복잡계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에드워드 로렌츠'를 저자로 한 책이어서 무엇보다도 그냥 반갑다. 로렌츠란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름은 '콘라트'이지만,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에드워드'란 이름도 함께 기억해두는 것이 형평에 맞겠다.

소개에도 나와 있지만, "'브라질에 있는 나비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토네이토가 분다' 이는 최근 들어 동명의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나비효과'의 유명한 명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필적한다고 평가받는 카오스 이론의 장을 연 논문 제목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인 <카오스>(누림, 2006 *새로 나왔군!)의 저자 제임스 글릭은 빼놓지 않고 있으며(역자 박배식 교수는 <카오스의 본질> 또한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에 재출간된 <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범양사, 2006)에서도 저자 미첼 월드롭이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기상학자 로렌츠와 그의 '이상한 끌개'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소개에서 언급되는 있는 영화는 애쉬턴 커쳐가 나오는 영화 <나비효과>를 말한다.

 

이번에 약간 놀란 건 로렌츠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 것. 1917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90세이다. 책에서 읽을 때의 '젊은 기상학자'가 더이상 아닌 것이다.

로렌츠의 원저는 1993년에 나왔으며, 일역본은 1997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다. 카오스이론에서만큼은 우리가 일본보다 10년 정도는 뒤처지는 것 같은데, 이게 그저 '인상'일 뿐일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카오스이론이나 복잡계과학에 관한 번역서들 가운데는 일본책들이 적지 않다. 국내에서는 수학자 김용운 교수의 책 정도가 눈에 띌 따름이다. 벌써 10년쯤 전에 유행을 탄 카오스이론이지만,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나 <카오스의 본질> 같은 주요 저작들이 번역된 김에 한번쯤 '뒷북'을 쳐보는 것도 의미있어 보인다. 피서객들이 다 빠져나간 백사장을 되밟다보면 간혹 동전들 이상의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조금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정재승 교수의 베스트셀러 <과학콘서트>의 내용 대부분이 이 카오스이론/복잡계과학과 연관된 것들이다. 콘서트장의 연주를 즐기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이제 '악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나온 과학서들 가운데, <뇌가 나의 마음을 만든다>(바다출판사, 2006)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세계의 뇌 과학자 중 한 명인 라마찬드란 박사가 BBC의 ‘리스 강연’에서 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환상사지나 공감각 같은 희귀한 신경이상 사례들을 통해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같은 이제까지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질문들에 대해 외 과학자로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의 연결을 시도한다." 그러니 읽어봄 직하다. 뇌과학 관련서들이 근래에 부쩍 눈에 띄는데, 사실 게놈프로젝트 이후에 꼽을 만한 메가프로젝트란 대뇌지도 만들기 아니었나? 그게 얼만큼 진행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널드/아놀드(1822-1888)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 아널드 전공자인 윤지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기억에, 아널드에 대한('Arnold'를 꼭 '아널드'라고 표기해야 할까?) 박사학위논문을 펴낸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창비, 1995)이 10년도 더 전에 나왔으니까 본 저작에 대한 소개 자체는 상당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 전에 <삶의 비평>(민지사, 1985)이란 아널드의 책이 한번 소개된 걸로 돼 있지만, 본격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 나온 <교양과 무질서>는 어떤 책인가? 소개를 좀 따라가본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매슈 아널드는 당대의 사회적 갈등과 계급현실에 대한 처방으로 '교양(culture)'의 이념을 내세운 것으로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오늘날 '교양' '교양인' '교양교육' 등의 개념을 널리 사용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매슈 아널드를 꼽아도 무방할 정도라고 한다. <교양과 무질서>는 그런 매슈 아널드의 사상을 집약한 정치·사회평론서이다." 그러니가 '교양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교양과 무질서>는 1867년부터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쟁점을 두고 매슈 아널드가 1년 이상 벌인 논쟁문을 묶은 책이다. 차티스트 운동이나 각종 법률의 제정 등 정치적·경제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빅토리아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대중교육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무질서'로 규정하는 지은이는 그 대안으로 '교양'을 제시한다. 노동계급을 포함, 파당성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일으키는 중간계급을 '속물'이라고까지 비판하는 매슈 아널드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파란을 일으킨다. <교양과 무질서>에서 지은이는 이러한 반론에 하나하나 반박하며 자신의 교양 개념을 자세히 설파한다. "교양이란 우리의 고정관념과 습관에 신선하고 자유로운 생각의 줄기를 갖다대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양의 시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널드의 정치적 입장은 오늘날의 스펙트럼에서 볼 때 중도보수에 가깝지 않나 싶다(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파의 교양론에 대응하는 것은 좌파의 품성론이다). 단, 이 보수주의의 자격조건이 교양(culture)이며, 그게 결여된 이들을 통칭해서 '속물(philistines)'이라고 칭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교양 대가리'라곤 없는 속물적인 우파들이 보수주의를 떠들어대는 것이다. 물론 아널드의 분류에 따르자면 속물적인 좌파들 또한 비판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니겠다. 사실 이러한 교양주의가 '창비'와 보다 급진적인 노동/민중문학론자들을 가르는 입각점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아널드가 폄하해마지 않는 '무질서'에 대해서는 '다른 과학', '다른 지배자'가 필요한 듯하며, 참조할 만한 책 몇 권을 나열해보았다.   

 

 

 

 

세번째 책은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좌파적 교양'을 책임지고 있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대표작 <미국민중사>(시울, 2006)이다. 예전에 <미국민중저항사>(일월서각, 1986)이라고 나왔던 책의 개정판인데, 20년만에 나온 것이니까 어느덧 '한 세월'을 감당한 책이기도 하다. 이로써 하워드 진에 대해서만큼은 '연장 탓'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 <오만한 제국> <전쟁에 반대한다> 등의 책들을 통해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며 민중의 시각으로 미국사 전체를 읽어낸 <미국민중사>는 그의 역사학자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역작으로, 1980년 첫 출간 이래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저서이다."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민중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미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미국을 구성하는 일반 사람들에게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미국의 민중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청도교인이나 지배층의 부유한 백인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은 오히려 기존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들에 더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책은 소외된 이들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예컨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칸 대륙 발견에서 하워드 진은 인디언 부족인 아라와크족의 시각을 빌려온다. 그리고 헌법제정의 역사에는 노예의 관점을, 산업주의 발흥의 역사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관점을, 멕시코 전쟁의 역사에는 탈영병들의 시각을, 뉴딜의 역사에는 할렘 흑인들의 관점을 도입한다." 이러한 관점들을 중재해줄 수 있는 객관적 시점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 의문을 갖게 한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역사? 진의 표현을 빌자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뜻있는 건 이번에 데이비드 조이스의 평전 <하워드 진>(열대림, 2006)이 같이 출간된 것.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실천적 지식인',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의 생애와 저술을 다룬 전기"로서 "책은 주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중점을 두고 진의 생애를 돌아본다. 전기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진의 삶이 보여주는 궤적 속에서 그의 주요 저서를 소개하고, 그의 혁명적 사상을 분석하며, 그의 삶과 업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한다." 그러니 길잡이로서 유익하겠다. 물론 하워드 진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와 나란히 읽으면 더 좋겠다. 참고로, 미국사 관련서들을 몇 권 나열해 보았다.  

 

 

 

 

네번째 책은 고모리 요이치의 소세키 평전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이다. 제목은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따왔는데, 이 일본근대문학의 태두를 다루고 있는 저작이 이번에 처음 나온 건 아니지만, 저자가 <포스트콜로니얼>(삼인, 2002)의 저자 고모리 요이치라는 게 눈길을 끈다. 현재 도쿄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가끔씩 내한강연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고모리 교수의 문학비평가로서의 솜씨를 구경해볼 수 있는 책이겠다.

 

 

 

 

소개에 따르면,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 평전. 금전, 호적, 우정, 사랑, 영국 유학 등 다양한 요소들을 동원해 소세키와 그의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폭넓고도 치밀한 연구를 통해, 소세키라는 필명을 얻기 전의 '나쓰메 긴노스케'의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어릴 때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 런던 유학 시절에 고향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죄책감, 다섯 번의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최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부터 마지막 장편 작품인 <한눈팔기>,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문학론>과 '자기본위'라는 말로 유명한 강연 <나의 개인주의>까지, 지은이는 소설 속에 조각조각 나뉘어 숨어 있던 소세키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출세작도 소세키론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일본비평가들에게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자기입증을 위한 척도 같은 게 아닐까도 싶다(과문했던 나는 국내에서 소세키가 유행을 타기 전 아쿠다가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이 일본근대문학을 대표하는 걸로 알았다). 프랑스문학쪽으로 가면 마르셀 프루스트나 사뮤엘 베케트 같은 경우가 그런 듯싶은데, 쟁쟁한 비평가나 철학자들이 이들에 대한 연구서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느 작가론을 써야 비평가로서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있나?.. 

 

 

 

 

끝으로 마지막 책은 사랑 이야기이다.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으로도 불리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이 <내 사랑의 역사>(북폴리오, 2006)로 또 출간된 것이다. 원제는 '엘로이즈와 아벨라르'(2003) 순절한 사랑의 대명사가 된 이 커플의 이야기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일까?

"12세기 프랑스의 수녀였던 엘로이즈는 중세 철학의 대가이자 성직자인 아벨라르와 숙명적이고도 질긴 사랑을 나눴다... 12세기 초, 파리의 열혈 논객이었던 아벨라르는 성당 참사관인 퓔베르의 집에 하숙을 청하고,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던 엘로이즈를 가정교사로 맞게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이들은 곧 육체에 대한 탐닉과 사랑에 빠져 비밀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게 되지만, 이 사실을 안 퓔베르는 아벨라르를 거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져 수도승과 수녀로 살아가게 되지만 15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사랑과 종교, 철학이 어우러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끝맺게 될까?..."

이번에 나온 "책은 최근에 발견된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편지 뭉치와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삶을 마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풀어나간다"고 한다. 이미 이전에 출간된 독어권의 책 <중세 최대의 연애사건>(생각의나무, 2005)과 나란히 읽으면 이들의 사랑을 훔쳐보는 데 더 도움이 되겠다.  

한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거나 변주한 책들도 적지 않은데,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생각보다는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그만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와 누벨 엘로이즈>(만남, 2002) 같은 연구서만 달랑 하나 갖고 있다는 건 좀 궁색한 일이다. 예전에 출간된 루소전집에 들어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사랑의 역사'가 좀더 번듯하게 채워질 수 있도록... 

06. 09. 05-06.

P.S. 참고로,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에 대한 서평 하나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09. 09) 어지러운 사회 바로잡는 힘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요, 비평가였던 매슈 아널드(1822~88)의 <교양과 무질서>가 아널드 전문가에 의해 번역·출판됐다. 우리가 이 책의 출간을 반갑게 여기는 것은 이 문화·사회·정치 비평의 고전에서 아널드가 펼치고 있는 논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널드의 시대에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세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한편 정치적 개혁과 사회적 변화에서 야기되는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었다. 더욱이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사상은 오래된 맹목적 신앙을 뿌리째 흔듦으로써 엄청난 정신적 의혹과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아널드가 ‘도버 해변’이라는 유명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꿈속의 땅처럼 눈 앞에 펼쳐진 세계/다채롭고, 아름답고, 싱그러우나/실은, 그 속에 기쁨도, 사랑도, 빛도/확신도, 평화도, 고통을 위한 도움도 없네./우리의 이 어두워 가는 평원엔/갈등과 패주의 경적이 어지럽고/밤마다 무지한 군대들이 충돌하고 있을 뿐”이라고 노래했던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널드의 혼란 인식은 이런 일반론에만 머물지 않고 그 나름의 구체성을 띠고 있다. 특히 귀족, 중간 계급 및 노동 계급 등 이른바 3대 계층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각별한 데가 있다. 그가 보기에, 귀족들의 개인적 자유 및 야외 스포츠 선호는 그 뿌리가 야만성에 있었고, 그 자신이 속한다고 여겼던 중간 계급은 온통 속물주의로 물들어 있는가 하면, 거칠고 무식한 노동계층은 우중(愚衆)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질서는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이었다.

-아널드는 중간 계층이 사회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계층은 물질주의에 물든 채 가난한 계층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도덕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당대 중간 계층의 도덕적 지주이던 청교도 정신이 편협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널드는 당대를 풍미하던 자유방임주의가 정치적 편견과 무책임으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했는데, 이는 제2장 ‘내키는 대로 하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지도자적 자질의 필수 덕목으로서의 교양을 강조하게 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로 교양이야말로 사회의 모든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안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교양은 무엇보다도 ‘완성에 대한 공부’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 보려는 욕망’과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고 행복하게 하려는 숭고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교양은 단순히 희랍어나 라틴어 문헌을 겉핥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순수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하지 않고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선을 행하는 도덕적 힘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아널드가 이 책에서 ‘단맛과 빛’이라는 말로 제1장의 제목을 삼은 것은 아주 시사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일찍이 꿀벌의 덕성을 논하면서 꿀벌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해서 단맛을 볼 수 있게 하는 한편 밀랍을 제공하여 촛불을 켤 수 있게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아널드가 ‘단맛’과 ‘빛’이라는 스위프트적 은유를 빌려서 교양의 속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중간 계층이 바로 이 단맛과 빛을 결여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은 아주 흥미롭다.

-아널드가 말하는 단맛과 빛은 그 성격에 있어서 인간의 헬레니즘적 성향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완성 또는 구원’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서는 헬레니즘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도덕적 실천을 최고 덕목으로 삼는 헤브라이즘의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헬레니즘의 ‘올바른 생각’과 헤브라이즘의 ‘올바른 행동’이 상호보완되어야 인간의 교양도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널드의 교양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여전히 적정할까? 물론 아널드가 이 책을 쓰던 1860년대는 우리 시대와 현저히 다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처해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은 140년 전 영국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걸친 우리의 민주정치 실험과 급속한 경제 개발은 과격한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면서 혹심한 가치관의 혼란과 정신적 폐해를 야기해왔고, 이는 아널드가 짚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병폐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널드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으며 그가 제시한 처방책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만약에 ‘교양과 무질서’가 이런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도 없을 것이다.(이상옥|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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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9-04 21:12   좋아요 0 | URL
연재가 끊겨서 섭섭했었는데 반갑네요^^

로쟈 2006-09-04 21:22   좋아요 0 | URL
'시간 버리기'에는 이만한 일도 없지만, 아무래도 생계를 고려해야 하는지라(^^;)...

twoshot 2006-09-04 23:40   좋아요 0 | URL
'Arnold'를 '아널드'라고 부르는 것이 좀 거북합니다. 영화배우 애슐리 쥬드를 애슐리 저드라고 불러야하고 랄프 파인즈를 레이프 파인즈로 불러야 한다는 건 별 거부감이 없습니다. 쥬드와 저드, 랄프와 레이프는 많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사람이름인데 정확히 불러주자는 취지는 십분 공감 합니다만 아놀드라 하던걸 아널드로 불러야한다는 건 왠지 거부감이 들어요. '교양'이 부족해서 그런가요?-_-;

로쟈 2006-09-05 09:10   좋아요 0 | URL
그건 저도 불편합니다. 그리고 동의하지도 않습니다(더불어, 저는 '애슐리 쥬드'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아널드'가 '속물적 교양'에 대해서는 얘기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6-09-05 09:13   좋아요 0 | URL
오 드디어 다시 연재하시는 군요.~~~

가을산 2006-09-05 10:17   좋아요 0 | URL
다시 시작하셨군요. 아이구 반가워라.

로쟈 2006-09-05 11:59   좋아요 0 | URL
예, 힘 좀 빼고 그냥 가볍게 연재할까 합니다. 한데, 말려주시는 분들은 안 계시나요?^^

philocinema 2006-09-05 20:5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님의 신간리뷰를 보게 되니 기쁘고, 마음이 설레이는군요...

페일레스 2006-09-05 21:44   좋아요 0 | URL
말리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등떠밀어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
로쟈님의 글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물론, 생계에 지장을 미치지 않는 한에서.

로쟈 2006-09-05 22:55   좋아요 0 | URL
risper3님/ '사랑이야기'가 들어가서인가요?^^
페일레스님/ 생계에 지장을 미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론 좀 헐렁하게 쓸 예정입니다. 그나마 벼랑끝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yoonta 2006-09-06 01:26   좋아요 0 | URL
니체도 그의 대표작들의 대부분이 연금생활을 할수있게 된 이후에 나왔다죠? 로쟈님도 생계문제때문에 고민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나오게될 글들이 어떤 것들일지 궁금해집니다..하루빨리 안정된 생계수단을 확보하시길 바래요..^^

로쟈 2006-09-06 14:18   좋아요 0 | URL
생계가 해결되면 사실 '역사 이후'이죠.^^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