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에 책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마치 책사태처럼. 그런 사태는 지긋이 한번 무시하게 되면 계속 속편하지만, 괜히 한번 눈길을 주게 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남의 돈 세는 일 같아 남세스럽지만, 대개는 사두지 못할 책들을 또 몇 권 나열해 본다(물론 가끔 한두 권씩을 사게 되고 읽게 된다. 나도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처음에 꼽을 책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처녀작' <세미오티케>(동문선). 아마도 '모스크바통신'을 하릴없이 유심하게 읽은 분이라면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기억할지 모르겠다(모스크바에 온 보람을 안겨주었던 그 책이 내가 작년에 꼽은 '올해의 책'이다). 그 러시아어본에는 바흐친론인 <시학의 파괴>와 함께 <세미오티케>와 <소설 텍스트>가 합본돼 있었다(이 책들은 영어본이 아직 안 나와 있다).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세미오티케>(원서 제목은 희랍어로 돼 있다)는 박사학위논문인 <시적 언어의 혁명>과 함께 당시 프랑스 지식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불가리아 출신의 젊은 여성 '사무라이'가 얼마나 '센지'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아직 영어본도 나오지 않은 까닭에 우리말 번역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떡하니 서점에 깔려 있어서 '경악'했다.    

그 경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론 놀랍고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극히 걱정스러웠던 것. 거의 동문선 전속이라고 할 만한 역자는 이미 10여 권의 번역서를 낸바 있고, 그 중에는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과 그녀가 편집한 <미친 진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수준은 좀 미심쩍은데,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생각없는 번역서를 보노라면 기본적인 자질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사건은 터져 버린 것을. 게다가 크레스테바 전공자란 분들의 번역도 대개 기대 이하이기 때문에 이 경우만 유난스러울 건 없으리라는 계산까지 하게 되면, 결론은 '울며 겨자먹기'이다(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읽기는 이번 여름에 시도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건, 12편의 논문 가운데, 4편이 빠진 채 8편만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 역자가 후기에 밝혀놓은 사실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고 있다. 분량 때문에?(도스의 <폴 리쾨르>도 890쪽짜리로 번역돼 나온 걸로 봐서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빠진 논문들을 보니까 대개 기호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데리다의 <입장들>에 실린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60년대 후반 크리스테바는 프랑스에서 기호학의 선두주자였다). 해서, 우리말 <세미오티케>는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책이 돼 버렸다. 거듭 유감스럽다. 번역의 질이 그 유감을 상쇄해줄 수 있을는지?

 

 

 

 

두번째 책은 작년에 방한하기도 했던 페터 슬로토다이크의 대표작 <냉소적 이성비판1>(에코리브르)이다(이번에 1권이 나왔는데, 2권도 곧 나오는 건지?). 작년에 나온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를 도서관에서 대출해 놓은지 제법 오래 됐는데(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읽을 거리가 그새 또 추가됐다. 책은 이미 '냉소주의'를 우리시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틈틈이 참조하고 있는 책으로 낯설지 않은데(<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에서도 이 점은 언급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는 책이다. 책은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냉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알아본다."

이 신간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의 리뷰가 요긴한데, 잠깐 옮겨오면, "<냉소적 이성비판>은 철학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매우 선정적 방식으로 계몽주의 이후 현대철학의 총체적 파국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일약 독일 철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을 맞은 1981년부터 집필됐다. 이 때문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이성비판의 뒤를 잇는 '4대 이성비판'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후계자다.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자기과시적인 '길거리 철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3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됐다. 우리는 계몽됐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어디 써먹기 전에 우리는 이 책을 좀 읽어봐야 한다.

 

 

 

 

세번째 책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들뢰즈 영화론 연구서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물론 들뢰즈의 <시네마>를 친절하게 소개/해설해 준다는 데 있을 터이고, 그런 종류로는 좀 얄팍하지만 <들뢰즈: 철학과 영화>(열화당, 2004)란 책도 이미 소개돼 있다. 그리고 논문집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도 이 주제로 참조할 만한 책이다. 한데, 신간은 저자가 이미 <현대영화이론의 궤적>(원제는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믿을 만한 영화학자이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에 '참고서'로서 유용할 듯싶다. 문제는 정작 들뢰즈의 <시네마>가 아직 완간되지 않은 것. 애꿎게도 1권 운동-이미지만이 두 차례 번역되었을 뿐이다. 무얼 갖다놓아야 해설을 할 게 아닌가? 그러한 순서개념이 좀 부족한 것은 우리 학계/출판계의 '관행'이므로 크게 흠잡을 건 없지만, 조만간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해설서로서 로도윅의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철학분야의 신간,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이다. 이미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 2004)를 소개한 역자의 '신작'인데, 발리바르와 마슈레는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이고 조만간 소개될 듯한 자크 랑시에르까지 포함해서 알튀세르 사단의 3총사를 이룬다. 신간은 이들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해줄 듯. 앞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순서는 좀 뒤바뀌었다. 정작 스피노자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기 이전에 대표적인 연구서들이 먼저 책장에 꽂히게 된 것. 역자의 계획대로 제대로 된 스피노자 번역본들이 조만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책세상), 터키의 '대표작가' 오르한 파묵의 <눈>(민음사), 그리고 한국의 '유령작가' 김연수의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손꼽을 만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좀 삐딱한 마음으로 러시아작품을 고르도록 하겠다. 보리스 필냑(삘냐끄)의 <마호가니>(열린책들)이 그것이다. 잠시 소개문을 인용하면, "보리스 삘냐끄의 '마호가니(Krasnoe Derevo)'는 1929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작품으로, 트로츠키 공산주의자의 시점에서 혁명 후 10년의 사회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으로 인해 당국의 격렬한 비판을 받은 삘냐끄는, 작가 동맹에서 추방당하고 1937년 대숙청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필냑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30년대에 나름대로 아부도 하고 분투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한 불운한 작가였는바, 그의 대표작 <벌거벗은 해>(1921)은 이미 소개돼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가/작품은 <마호가니>에 같이 묶인 유리 올레샤의 <질투>(이들 작품들은 모두 이전에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던 것이 단행본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올레샤는 <기병대>의 작가 이삭 바벨과 함께 오뎃사 출신의 대표적인 '동반자작가'인바, 개인적인 생각으론 새로운 이념에 헌신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걸 무시하지도 못하는 '동반자' 문학의 핵심이 <질투>에는 잘 그려져 있다. 게다가 아주 코믹하다(하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코믹이다). 그리고 그 코믹은 '감정의 음모'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에는 올레샤의 동화 <세 명의 배불뚝이>(기탄출판)도 출간되었다. 그의 '음모'가 얼마나 코믹한지 한번 구경들 해보시길.  

여러 분야에서 읽어볼 만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다 헤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끝으로 한 권만 꼽자면,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새 비평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문학평론집으로서는 최근에 서영채의 <문학의 윤리>에 이어서 꼽아보게 되는 책이다.

 

 

 

 

책은 '존재의 변증법4'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이 그의 네번째 비평집이란 뜻도 된다.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을 시작으로,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등이 그가 이전에 낸 비평집들인데, 기억에 아마 시비평들만을 묶은 마지막 책을 제외하고 '존재의 변증법'이란 문구를 제목이나 부제로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실상 '존재의 변증법'이란 모호한 문구가 문학의 술어로서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굉장히 선호하는 문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의 비평행위를 그 문구에 집약하고자 하므로.  

정과리는 '문지' 4인방의 뒤를 이은 '문사' 세대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활동했었지만(작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이번 비평집도 문지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평론가 김현 사후에 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비평가로 지목됐었지만(적어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생전에 그의 일부 비평에 대해서 '관념의 체조 같다'는 평을 '스승'인 김현은 내린바 있지만) 비평가로서의 그의 궤적은 그러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문학의 지형변화, 혹은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변화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다(그 두 가지는 맞물리는 것이지만).

태도의 변화? 가령 이번 비평집에도 수록돼 있지만, "옛날 옛적에 문학이 있었지"라는 식의 태도. 해서, 그의 비평은 문학 이후, 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의 무덤을 앞에 둔 비평이다. 그러니 애도는 있을지언정 열정은 더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대신에 부각되는 건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비평이 '디지털화'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를 내게 암시해준 책이고, 한 젊은 비평가의 '패배주의'를 확인하게 해준 책이다. 이후에 그는 알다시피,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도 합류하면서 '최연소' 원로 비평가로 자리하게 된다. 그에게 어떤 영광이 더 남아 있는 것인지?

책머리에 실려 있으면서 아마도 표제를 빌려주었을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욕망'이란 평문은 1988년에 씌어진 것이고 나는 그 글을 읽던 때를 기억한다. 대학가의 그 골목과 지금은 없어진 그 서점에서 신간으로 나온 <문학과사회>를 들춰보던 때가 그 때였지 싶다. 욕망은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원로 비평가'의 욕망도 그때 거기서 들끓지 않았을까? 나는 '쿨한' 욕망을 믿지 않는다...  

05.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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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30 14: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가 근간 예정이라고 한다. 구색을 맞추게 돼서 다행이고 반갑다...

주니다 2005-05-30 15:45   좋아요 0 | URL
<세미오티케>는 기대한 책이었건만 난감한 지경이군요. 동문선은 언제나 이름값을 하려는지...<시네마-1>은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던데 어떤게 상태가 좋은지요? 그리고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라는 책이 의욕적으로 한꺼번에 나왔던데 살펴보셨습니까? 그나저나 이번 학기도 얼마 안남았군요.

로쟈 2005-05-30 16:42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두 권도 서점에서 봤습니다(제가 몇 마디 참견할 만한 책들은 아니어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단한 필력이다 싶은데, 곧 이주헌씨 뺨치겠더군요.^^ <시네마>는 둘다 깔끔하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제가 비교해보지는 못했습니다(둘 다 갖고 있지도 않지만). 또 <시각영화>라는 책도 번역돼 나왔는데, 저로선 아무래도 제목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청각영화'니 '후각영화'라는 게 있지 않은 한...

주니다 2005-05-30 17:29   좋아요 0 | URL
오, 이주헌씨 뺨 칠 정도라면....<시네마>는 주은우와 유진상씨가 번역했죠? 유진상씨는 미술이론하는 분 같은데, 서점 가면 찾아봐야 겠습니다. <시각영화>는 원제가 Visionary Film이더군요, Visionary의 원뜻으로 보나 "'몽환trance'이라는 맥락하에서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다"는 소개글로 보나 탐탁지 않은 제목이로군요. 그냥 편집부에서 쉽게 간 것 같죠? 이 책은 일전의 '재귀적인 영화' 때문에 눈이 번쩍 뜨여서 보관함에 넣어 뒀었는데, 실물을 확인해보고 구입 여부를 결정해야겠네요.(본다고 확인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핫)

로쟈 2005-05-30 17: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실물'이 중요합니다. 화장빨이나 얼짱 각도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palefire 2005-05-30 17:43   좋아요 0 | URL
엄격히 말하자면 [운동-이미지]는 재역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 나온 새길판(주은우/정원)이 좀 더 낫습니다. 비록 영역판을 많이 참고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적,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이나 들뢰즈에 대한 배경지식에 있어서는 새길판(아마도 지금은 절판상태?)이 더 낫습니다. 시각과언어판은 이런 점에서 단점이 많은 번역본입니다. (개정판이 나와주면 좋을텐데) 그리고 Visionary Film=시각영화도 정말 탐탁치 않은 제목이긴 해요. 환영적 영화 또는 몽환적 영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시트니의 개념이나, 그가 다루고 있는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흐름(당장 Deren과 Anger만 생각하더라도)에도 부합합니다. 저도 번역본은 보지 못했지만, 실험영화를 전공했고 현재 실천중인 시카고 MFA 출신들이 번역자로 참여해서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어의 개념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유보적 예측을 해 봅니다.

주니다 2005-05-30 18:36   좋아요 0 | URL
palefire님의 예상치 못했던 답변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시각 언어>에 대한 palefire님의 자세한 서평을 기대해 봅니다.(영화전공이신듯 하여...문외한들을 위하여)

2005-05-3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5-31 17:30   좋아요 0 | URL
주니다님/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은 오래 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번역에는 역시나 전문용어와 관련하여 오류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일종의 '사전'이기 때문에 구비해놓는 게 요긴한 책이긴 한데(원서를 참조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테바에 대한 책을 구하신다면, 역시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에서 나온 <크리스테바>를 권하겠습니다(저는 며칠 전에 복사했습니다). 컴팩트한 분량에 깔끔한 정리가 그 시리즈의 특장이죠. 국내서 중에서는 역시나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집을 추천하겠습니다.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제 기억엔 후기 크리스테바의 '테마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이론 읽기>의 한 장이 크리스테바에 할애돼 있는데, <시적 언어의 혁명>에 대한 해제입니다. 초기 크리스테바와 관련하여 참고하시길...

주니다 2005-05-31 17:55   좋아요 0 | URL
Noelle McAfee가 쓴 것이 맞죠? 일단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부터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5-05-31 19: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2005-06-0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번에 <신곡>의 완역본이 나왔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실물'을 보지 못한 까닭에 긴가민가해 하며 이전 번역서를 이미지로 올렸지만, 어제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의 책. 968쪽에 38,000원이다. 이전 번역본을 다시 손본 것이라 해도 '본격적인' <신곡> 완역본이라 할 만하다. 역시나 다시 나온 것이긴 해도, 두어 달 전에 나온 <몽테뉴의 인생 에세이>와 함께 올해 나온 고전 번역서로서 손꼽을 만하다.  서해문집에서 같이 나온 <신곡> 해설서와 나란히 놓고 읽으면 구색도 맞으리라.  

 

 

 

 

지난번 신간 소개글을 올린 지 며칠 안 됐지만, 이후에 나온 책 몇 권을 또 열거해 보기로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제일 먼저 꼽고 싶은 건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연구서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아직 서점가에 깔려 있지는 않지만 곧 나올 책으로 돼 있고, 이미 일간지 리뷰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기호학자 에코의 출세작이기도 한 <기호학 이론>(이 책의 불어판 번역서<부재하는 중심>의 우리말 번역서는 <기호와 현대예술>)의 '속편'으로 지난 2000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에 서울문고에서 처음 보고 구입한 적이 있는데, 이 신간과 함께 이제 읽어볼 만하겠다(분량상 원서를 독파하는 건 상당한 '여유'를 필요로 한다. 원서는 본문 464쪽이고, 번역본은 616쪽). 아마도 '칸트와 누구누구'라는 책 제목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 앞에 선 칸트' 정도의 뜻으로, 혹은 유머로 새기면 될 듯하다. 책의 부제는 '언어와 인지에 관한 에세이들'이고, 전체 6개 장에서 2장이 '칸트와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에 대한 것이다(미국 철학자 퍼스의 책들이 이제껏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오리너구리? 한때 논란이 되었던 이 동물은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다. 그런 한편으로 오리이며 너구리다. 이걸 어떻게 분류해야 하나? 이걸 분류할 수 있는 (칸트식의) 선험적 도식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이 난처한 사태에 칸트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독자를 일단 다른 철학서들과는 다른, 편안한 태도로 이 책에 접하도록 한다(끝까지 엉덩이를 떼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기호학이론>을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물론 우리말 <기호학이론>은 재미있기에는 너무 곤란한 번역서이다. 개역본이 나와야 될.) 이 책은 배꼽을 잡고 읽을 만하겠다.

 

 

 

 

두번째 책은 '잡설가' 박상륭의 <소설법>(현대문학). 그의 다섯번째 창작집이고, 표제작은 '소설-법'이면서 '소-설법'의 의미라고. 한국문학의 이단적인 작가이면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린) '주류' 작가이기도 한 박상륭에 대해서 사실 나는 별반 읽은 게 없다. 그의 <죽음의 한 연구>(작가는 <죽음의 연구>라는 제목을 끝까지 고집했었다고)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사두긴 했지만, '잡설들'을 읽을 만한 '여유'를 그간에 갖지 못했던 것.  가령, "'小說'이라는 개새끼[怪色鬼]는, 어떻게도 갈블 수 없이 雜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깊어지는데, 이는, '감성'과 '이성'이, 어지럽게, 그리고 사련적邪戀的으로 혼합되어, 학(鶴,은, 言語의 상징이기도 하거니!)의 털을 뽑고, 시뇨屎尿의 가마솥에 넣어 삶는 잡탕이라는 그 생각이 (글쎄, 패관만을 한정해 말이지만) 패관께는 깊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소설론'을 읽으면서 소설에 대해 깨치는 바가 있는 이라면, '난놈'이라 할 만하지만, 나는 박상륭 마니아도 아니고 '난놈'도 아니다. 다만, 그의 잡설들이 우리의 '근대소설'을 비춰보는 '거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는 "동서고금의 종교 신화 철학을 아우르는 심오하고도 방대한 사유체계와 우주적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거대한 스케일, 독보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확장시켜왔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라면 All or Nothing이다(박상륭은 한국문학보다 크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번째 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생애를 다룬 <평전 파솔리니 - 죽음과 삶의 몽타주>(이룸). 소개에 따르면, "영화감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뛰어난 재능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문학과 사회 분야의 평론가이자 생애와 작품이 모두 현대 유럽 사회의 예술과 정치, 종교와 성 담론에서 시대를 뒤흔들었던 현대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사실 그의 전기로는 로로로 시리즈의 <파솔리니>(한길사, 2000)가 이미 소개돼 있지만, 이번에 나온 건 훨씬 방대한 분량이고(613쪽), 엔초 시칠리아노라는 이탈리아의 평론가의 솜씨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 Pasolini는 '파솔리니'와 '파졸리니', 어느 쪽으로 발음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씨네21> 같은 영화지에서는 '파졸리니'라고 기재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씨네21>에서는 30년 전에 살해당한(목이 잘려서 도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던가?) 이 문제적 감독 살인사건이 재조사될 거라는 외신을 전하고 있는데("동성애 혐의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경험도 있는 그는 1975년 많은 의혹을 남긴 채 로마의 빈민가에서 17세의 동성애자에게 난자당해 숨졌다") 살해 혐의로 9년간 복역했던 용의자(동성애자)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파졸리니를 죽인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세 청년이었고, 이들이 그를 "더러운 공산주의자"라고 욕하면서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비참한 죽음을 맞은 거지만, 요는 그가 동성애자로 죽었는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로 죽었는가 하는 것.

'파졸리니'란 이름으로는(그래서 '파솔리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10년 전에 그의 소설 <폭력적인 삶>(세계사, 1995)이 번역/소개된바 있고,  그의 영화로는 <마태복음> <테오레마> 등이 출시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오래전 영화를 전공하던 선배로부터 빌린 비디오로 <살로, 소돔의 120일>, <오이디푸스왕>,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본 적이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작은 기사를 보니까 <살로, 소돔의 120일>은 네티즌들이 출시를 고대하는 DVD로 4위에 꼽혔다. 한 네티즌 왈 "과연 파졸리니 영화도 우리나라에 출시될 수 있는 건가요? 흠... 특히 무삭제로 나온다면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한 획을 긋는 충격적인 사건이겠네요." 이미 제자인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무삭제 개봉됨으로써 '한 획'은 그어졌지만, 스승의 <소돔 120일>은 같은 '한 획'이더라도 붓의 종류가 좀 다르다. 파졸리니의 '악몽'에 견주면, 베르톨루치의 '몽상'은 가히 천진난만이다.

같은 이탈리아 사람 에코의 책을 거명한 김에, 파솔리니/파졸리니의 평전을 거푸 거명하는 것이 '의리'에 맞을 듯하지만, 거리를 둔 건 이 신간의 편제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상하고 육중하다. 나는 그런 모양새가 '격렬한 삶' 혹은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파솔리니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물론 덕분에, 글자도 큼직큼직하게 박은 책값은 아주 '격렬'해졌다).      

네번째 책은 문화비평가이자 '미디어 이론가'의 대명사 마샬 맥루한의 마지막 책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실상 그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말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언을 예언한 맥루한인 만큼 그에 책들에 대해서 주절이주절이 늘어놓는 건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이미지들로 대신한다.

 

 

 

 

제일 왼쪽이 이번에 나온 책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어지는 두 권은 <미디어의 이해>에 대한 2종의 번역서이다(민음사판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세번째는 또다른 주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인데, 이전에 번역이 잘 안 읽힌다는 서평들을 읽은바 있다. 그리고 다섯번째 책이 <미디어는 맛사지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인데, 분량으론(100쪽) 별볼일 없는 책이다. 맥루한의 책들이 대개 난해하다지만, 이 책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맛사지용으로도 불편하고. 그리고 마지막 <맥루안>은('맥루안'을 고집한 역자의 고집이 돋보인다) 가장 얇으면서 유일한 입문서.  

신간에 대한 한국일보의 리뷰를 잠깐 인용하면, "맥루한의 글은 화려한 비유로 넘치지만 비교적 읽기 좋게 번역한 데다 곳곳에 친절한 역자 주가 붙어 있어 읽기에 썩 어렵지는 않다. 다만 책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잡지처럼 너무 가벼운 표지를 쓴 것이나,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쓴 마샬 맥루한 영자 이름에 탈자를 낸 성의 없는 편집이 아쉽다." 그 탈자라는 표지에서 마샬(Marshall)의 'r'을 빼먹은 것(보이시지요?). '읽기 좋게 번역한' 것만으로도(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스러움에는 틀림없지만, 외치건대, "마무리를 잘하자!"

 

 

 

 

다섯번째 책도 마무리가 잘 안된 책이다.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1919- )의 <셰익스피어의 시대>(을유문화사)가 그것. 뒷표지처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는 아니지만(어떻게 비평가가 '가장 위대한 문학가'가 될 수 있는가? 과대포장도 예의는 아니다. 그냥 '이 시대 최고의 비평가' 정로로만 띄워좋도 충분하다. 물론 그것도 영국에서의 일이고), 프랭크 커모드는 명망있는 비평가이고 믿을 만한 저자이다(그는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니, '커모드 경'이다). 비록 우리에게 소개된 건 일천하지만. <종말의식>(1967/2000)이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 1993)으로 번역된 게 단행본으론 전부이다. 한 추천사에 따르면, 이 신간에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책에 격조있게 담겨 있다." 거기에 장점은 분량이 얇은 것. 200쪽 정도니까 반나절만 투자해도 남을 만한 분량이다(이미 여러 권 출간된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평전 중에서 가장 얇다. 가장 지명도 있는 저자임에도).

내가 '마무리'를 들먹인 건 책날개에 실린 약력에서 커모드의 저서로 <로맨틱 이미지: 종말의 의미>라고 소개한 대목 때문. <로맨틱 이미지>와 <종말의 의미>는 각기 다른 책이고, 후자는 언급한 대로 국역돼 있다. 표지나 책날개처럼 눈에 잘 띄는 것도 없을 텐데, 좀더 세심한 교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책의 역자는 이미 이 책의 포함된 크로노스 총서에서 <르네상스>, <민족과 제국> 등을 번역한바 있는 전문가이다. 해서, 내용은 믿어봄 직하다. 한편, 셰익스피어 관련으로 내가 고대하는 책은 커모드급, 혹은 그 이상의 비평가 해롤드 블룸의 <셰익스피어: 인간성의 발명>이다(블룸의 셰익스피어를 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본문에 각주가 단 한 개도 달려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명도만으로도) 소개되어야 할 책이다.     

이렇게 다섯 권을 다 꼽아버렸는데, 약간 아쉬운 책은 <수량화 혁명 - 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심산)이다. 제목만으로도 내용은 어림짐작할 수 있다. 소개에 따르면 "중세 후기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동안 서구 문명이 성취했던, 질적 관점에서 양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논하는 책이다. 이러한 전환이 근대의 과학기술, 관료제, 상업 등을 가능하게 했고, 시공간의 정확한 측정 및 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대체적 추세로서의 '양화'가 아닌, 양화의 실상 즉 시간, 공간, 수학, 시각화, 음악, 회화, 부기 등 다양한 문화 아이템 각각에서 양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바로 그 양화가 유럽 제국주의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 설명한다."

 

 

 

 

저자, 앨프리드 W. 크로스비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미 "다른 대륙, 다른 문명의 사람들과 달리 유럽인들은 근대 이전부터 해외로 팽창하여 왔다.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그런 곳으로서 이곳에서는 유럽 출신 백인들이 기존의 정주민들을 내몰고 그 땅을 빼앗은 다음 거기에 유럽 문명을 복제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단지 인간의 소행일 뿐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팽창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주경철)란 요지의 <생태 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0)가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05. 05. 23. 

P.S. 지난 20일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1913년 생이니까 그는 지상에서 꼬박 아흔 두 해를 살았다. 백 세를 넘겼던 가다머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는 생애이며, 그가 남겨놓은 업적과 자취 또한 후학들이 따라가기에 버거울 정도로 깊고 광대하다. 나는 부랴부랴 도서관에 들어온 프랑스와 도스의 전기 <폴 리쾨르 - 삶의 의미들>(동문선)을 앞당겨 대출했다. 890쪽이니까 그의 생애에 그 나름으로 견줄 만하다(참고로,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200쪽까지 무난하게 나가지만 이후엔 '재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제 그를 읽을 시간이 되었다.

 

 

 

 

리쾨르의 책들이 그래도 여러 권 번역돼 있지만, 리쾨르에 관한 책은 아직 드물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한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건 리처드 커니의 대담집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에서의 리쾨르 편이다. <폴 리쾨르>의 중간에 실린 화보에는 1988년 한 학회에서 커니와 리쾨르가 함께  찍은 사진도 들어 있는데, 당시 75세의 노학자 리쾨르에 비해 커니는 2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모습이다. 커니의 책은 현대 사상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에 다른 철학자/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로서 아주 요긴하고 유익하다(데리다에 대한 두툼한 책을 쓴 존 카푸토는 데리다 입문서로도 이 대담집을 꼽은바 있다).    

지난 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장들 가운데, 이제 1908년생인 레비-스트로스 정도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듯하다(동급생인 메를로-퐁티가 죽은 지 거의 반 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사상은 날로 '발전'해 가는 문명에 비례할 듯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거장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나면, 말 그대로 텅 비게 된다. 빈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하다못해 올해로 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21세기의 아인슈타인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20세기 영화사가 그러하고 한국 현대시사가 그러하며, 한국문학 비평사가 그러하다. 해석학으로 분야를 지극히 한정하더라도 리쾨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세울 만한 이가 또 나올는지는 의심스럽다(사상에는 구조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남은 건 안락한 아류들의 지루한 여생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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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3 11:50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 너구리 리뷰 읽었어요.
기대되는 책이고, 또 구매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더군요.
전, 님으로부터 책공부와 러시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렸던가요?^^

갈대 2005-05-23 13:11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번역이 걱정됩니다(미네르바 성냥갑의 안 좋은 기억). 역자가 독어본을 중역한 것 같은데 말이죠.

로쟈 2005-05-23 15:28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역시 빠르시네요.^^ 갈대님/ 역자는 다르지요? 이번에는 <괴델, 에셔, 바흐>의 역자분인데, 저는 반신반의하는 쪽이고 확실한 건 '물건'을 열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2005-05-26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래는 지난 주말에 작성되어야 하는 글이었는데, 사정상 며칠 늦어졌다. 그 런 사정을 반영하여, 제일 처음에 꼽고자 하는 것은 새로 나온 <단테>와 그 해설서이다. 이건 오늘 아침에 한국일보에서 <신곡>을 완역한 한국외대 한형곤 교수와 그 해설서 <신곡 - 단테, 신의 나라로 여행을 시작하다>(서해문집)를 쓴 부산외대 박상진 교수의 대화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다시 검색해 보니까 한형곤 교수의 이탈리어어 완역본은 지난 78년에 삼성출판사(세계문학전집)에서 나왔었고, 2003년에 개역본이 한국외대출판부에서 <풀어 쓴 단테의 신곡>으로 다시 나왔다. 이후에 새로운 판본이 다시 나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요즘 <신곡>보다 더 많이 팔려나가는 것은 <단테 클럽>이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같이 단테의 이름을 '참칭'한 책들이지만,  교양있는 독자라면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세계 3대 문호로까지 꼽히는 단테의 <신곡>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혹은 읽은 척이라고 할 필요가 있고, 적어도 책이라도 서가에 꽂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말 역자나 해설자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커녕 끝까지 다 읽은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나부터도 그렇지만). 그건 원작 자체가 완벽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시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번역도 까다롭거니와 원작의 맛을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 이 '숭고한' 책에 대해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건 읽어보려고 노력하거나, 읽은 척하는 것이다. 다시 나온 번역본이나 새로 나온 해설서가 요긴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적어도 읽은 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정말로 '읽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게 '읽은' 한국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나로서도 단테는 (페트라르카 등과 함께) 하나의 콤플렉스 거리이다. 푸슈킨도 이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해서 여러 모로 참조하고 있지만("푸슈킨과 단테"라는 게 "푸슈킨과 셰익스피어"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연구주제이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고골의 <죽은 혼>이 그 3부작 구성에 있어서 이 <신곡>의 구성을 의도했었다는 점. 그러니, <죽은 혼>을 (강의에서건 어디에서건) 얘기할 때마다 단테의 <신곡>도 덩달아 언급하게 되지만, '정보' 이상의 내용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강의'에 걸맞는 얘기를 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하지만, '언어장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여건상 그간에는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이번에 나온 해설서는 그런 의미에서 반갑다. 물론 영어권에서 나온 해설서들도 참조할 수 있겠지만, <신곡>을 영역본으로 읽는 건 또 만만하겠는가?(나는 러시아어본도 구하긴 했다.)  

지난 2월에는 단테의 <새로운 인생>(민음사)도 우리말 번역본을 얻은바 있으니 언제 짬을 내서 단테의 세계로 한번 잠수해볼 일이다(이 책은 이탈리어 역이 아니라, 단테 로세티의 영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T. S. 엘리엇에 의하면,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 그 사이에 제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괴테가 들으면 섭섭해 할 일이지만, 하여간에 사정들이 그러하다고도 하니 우리의 얄팍한 교양에 (헛)바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라도 단테를 좀 읽어보도록 하자(중2 때 단테의 <신곡>을 들고 다니던 한 친구 때문에 나도 덩달아 얄팍한 번역서 한 권을 들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번역이 제대로 읽혔을 리 없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해설에서 읽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뿐).  

 

 

 

 

두번째 책은, 역시나 우리의 교양과 관련된, 그리고 단테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첫손가락에 꼽았을 책인바,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문학동네)이다.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의 형이기도 이탈리아 출신의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는(우리의 경우 그런 형을 둔 영화감독으로 봉준호가 있다) 동생만큼 유명한 건 아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영문학 '연구자'의 한 사람이다(그에게 걸맞는 칭호는 '이론가'나 '비평가'가 아니라 '연구자'이다. 실제로 그는 스탠포드대학의 소설연구센터를 지휘하고 있는 연구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이미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로 우리에게 소개된바 있고 몇 년전에는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지만, 겸손하게도 고작 '연구자'인 탓인지 주변에서 생각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모레티는 중요하다(적어도 재미있다). 그러니 읽을 필요가 있다. 중요해서건, 재미있어서건.(모레티는 페터 지마만큼 이론 지향적이지만, 테리 이글턴만큼 재미있다.) 

모레티는 문학연구에 통계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등을 도입하는 걸로 유명한데, 기본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제한다면, 그의 프로젝트는 '(러시아)형식주의 + 다위니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의 형식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그는 텍스트사회학의 창시자 페터 지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지마가 문학사회학의 상관항으로서 '텍스트성'을 파고든다면, 모레티는 대범하게 그러한 형식이나 텍스트성의 진화에 대해 고찰하고 기록한다(거기서 중요한 건 진화의 '단위'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아예 <유럽소설의 지도 1800-1900> 같은 걸 만들어보기도 한다. 비록 재미있다 하더라도 문학연구의 '핵심'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는 그의 작업 스타일은 내가 보기엔 역사학 연구에서 인구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인구변동의 통계나 다룰 듯하지만, 인구학적 접근은 역사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걸 얘기해주는데(가령 인구학자 토드의 <유럽의 발견> 같은 책), 모레티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 문학사를 '문학의 도살장'으로 보는 그의 시각은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참신한 것인지!

지난 1987년에 처음 나온 <세상의 이치>는 모레티의 비교적 초기 저작이다(나는 Verso에서 나온 이 1판을 갖고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얼마전 개정판이 나왔다. 확인해 보니까 2000년에 'New Edition'이 나온 것).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이란 부제에 걸맞게 책은 '상징적 형식으로서 교양소설'이 근대사회사의 전개 속에서 갖는 의미맥락을 추적하고 재구성한다. 그런데, 결코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면, "모레티의 저작에는 페이지마다 순수한 지성이 살아숨쉰다." 읽어볼 도리밖에.

참고로, 러시아문학과 관련해서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1831)과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1840)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러시아문학 작품(곧 교양소설)이다. 주로 스탕달을 다루고 있는 장에서. 이 때문에, 나는 이전에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었었다. 이들과 더불어 거명되고 있는 유일한 러시아인은 미하일 바흐친이다. 한가지, 사실주의(리얼리즘)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달한 문학형식이라는 게 모레티의 대전제인데,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게 러시아문학이며, 모레티 자신이 그 점을 시인하고 있다. 한 대담에서 루카치가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로 꼽은 톨스토이와 당대 러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모레티는 이렇게 답한다. "톨스토이는 제게 골치아픈 적수죠. 제 주장과 어긋나는 작가거든요. 이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안과밖>, 제12호, 273쪽) 모레티는 솔직한 사람이다.

 

 

 

 

세번째 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신제국주의>(한울). 아마도 현대 지리학자 중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학자이자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이가 하비일 것이다(그의 책은 최소한 7권이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번에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나무)라는 묵직한 책이 나온바 있는데, 이번엔 2003년에 나온 그의 최신간이다. 역자는 하비의 책을 번역한바 있는 최병두 교수. 하비에 대해선 영국 옥스포드의 좌파(맑시스트) 지리학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책 몇 권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고 있다), 이번 저자 소개를 보니까 뉴욕시립대학의 인류학과 교수로 돼 있다. 지리학자에서 인류학자로 변신? 한편으론, 그가 지리학의 외연을 거의 인류학 수준으로 확장했다는 걸 떠올려볼 수 있다(이 경우는 문화인류학의 하위범주로서 '도시인류학'이 될 것이다). 한편, 지난번에 나온 책과 관련하여 갖는 바람. 또 다른 '맑시스트' 마샬 버만에 따르면, 모더니티의 또다른 수도는 파리 외에 페테르부르크와 뉴욕이 있다. 하비급의 학자가 나서서 이 '두 도시 이야기'마저 파리 이야기만큼 써주었으면 좋겠다. 근대의 세 도시, 혹은 근대의 세 가지 유형학에 대하여. 

                    

 

 

  

네번째 책은 프랑스쪽의 '행동하는 지성'들에 관한 것. 거물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실천이성>(동문선)이 불쑥 나왔고, 드레퓌스 사건을 촉발했던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하다>(책세상)가 책세상문고의 한권으로 선보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유익한 책은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자인, 2002)인바,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 부르디외의 신간은 동문선의 간판 번역자 김웅권의 작품인데, 그가 번역한 <파스칼적 명상>에 대한 평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기에 나로선 유보적이다. <순진함의 유혹> 같은 좋은 번역서도 있는 반면에, <구조주의의 역사2-4> 같은 어수룩한 번역서도 내놓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는 다른 분들이 먼저 읽고 판별해 주었으면 한다(책값이 싼 것도 아니고). 여하튼, 부르디외의 거의 모든 책들이 번역되었다. 해서, 부르디외식 사회학이 한국에서도 꽃필 수 있을까? 기대는 해보지만, 판돈을 걸지는 않겠다. 부르디외 '전공자'가 태연하게 조선일보에도 글을 쓰는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 사회이기에.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꼽는 시집, 조정권의 <떠도는 몸들>(창비). <산정묘지>(민음사, 1991), <신성한 숲>(문학과지성사, 1994) 이후에 10여년만에 나온 신작 시집인데(정말이다!), 그런 만큼 기대해봄 직한 시집(적어놓고 보니 시인은 출판사들도 떠돌고 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때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산정묘지1')라고 선언했던 '조로한' 시인의 '후일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헌 누더기'의 행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서평들을 보니 시집의 컨셉은 여행인 듯하다. 동아일보 서평에 따르면,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자취가 깃든 여행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저자 자신은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일상에 발목을 잡히는 모습은 예술가로서 저자의 고민을 공감하게 한다. '어디로 가도 지상의 오줌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스스로를 망명자로 자처한다'(국내 망명자)는 이 같은 시인의 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망명시인의 명단을 하나 더 늘여야 할 모양이다...

05. 05. 18.

 

 

 

 

P.S. 알고 보니까 연초에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새로운 장정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표지만 바뀌었을 뿐,  편제나 내용 자체는 그닥 달라진 것 같지 않다(이젠 칼라화보라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얼마전 <씨네21>의 창간 10주년도 맞고 해서 영화관련 글들을 제법 읽게 되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있다. 조만간 영화와 영화비평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되기를(이렇게 적어놓으면, '의무감'에서라도 몇 자 적게 되지 않을까? 이런 게 화행, 곧 'speech act'이다)...   

 

 

 

  

P.S.2. 부르디외 사회학의 한국적 적용과 관련하여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책은 <문화와 계급>(동문선, 2002)이다. 그 중 문화자본에 대한 장미혜 박사의 (실증적인)연구가 나로선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장박사는 짐작에 "소비양식에 미치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상대적 효과" 같은 주제의 학위논문을 썼는데,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더듬어보자면, '경제자본'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문화자본'이라는 게 있고, 이 두 변수(돈과 눈높이)에 따라 네 가지 사회적 계층이 분류될 수 있다(이 경우 사회계층이란 게 이분법적이지 않다). (1)돈도 많고 눈도 높은 경우, (2)돈은 많지만 눈은 없는 경우, (3)돈은 없는데, 눈만 높은 경우, (4)돈도 없고 눈도 없는, 속편한 경우. 거기서 가장 '문제적인' 계층은 (3)이다. 책 살 돈은 없으면서 즐겨 책타령을 늘어놓는 어떤 이도 분류하자면 거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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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8 12:26   좋아요 0 | URL
맨날, 사정상......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영화야그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으실꺼죠?^^

로쟈 2005-05-18 12:32   좋아요 0 | URL
예, 맨날, 날이면 날마다...

비로그인 2005-05-18 13:26   좋아요 0 | URL
아 봉인된 시간 안그래도 이번에 구입할 생각이었다 장바구니에서 뺐는데 로쟈님이 말씀하시니 여쭤봐야겠네요. 보니 독일어를 번역해놓은거더라구요 원래 독일어로 쓴건 물론 아니겠죠? 번역이 어떤지요? 읽을만하면 그냥 한국어번역본으로 구입하게요. 그의 영화에 머리깼던 생각이 나서 읽고는 싶은데 괜히 책도 겁납니다..^^

로쟈 2005-05-18 13:30   좋아요 0 | URL
'이상한' 일이지만, 제가 러시아어본을 아직 못 봤습니다(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책들을 제법 많이 갖고 있음에도). 국역본은 읽을 만한 책입니다. 정 미심쩍으시면, 영어본을 읽으셔도 되겠지만...

주니다 2005-05-18 19:19   좋아요 0 | URL
소개하시는 책들에게 Thanks to 할 수 있도록 편집해주시죠. 좀 귀찮으시겠지만. 그럼 쌓일 적립금이 꽤 되지 않을까요? 번번이 날로 먹자니 원....

로쟈 2005-05-18 19:41   좋아요 0 | URL
책 표지사진만 끌어다 놓았습니다. 제가 '편집' 같은 데 서툴러서요. 제가 누구처럼 책을 공짜로 드리는 것도 아닌데.^^

주니다 2005-05-18 20:1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링크를 책 전체에 걸어야 되나 봅니다. 풀어 쓴 단테의 신곡만 Thanks to가 생기는 걸로 봐서는.... 다시 해 주세요 ㅎㅎㅎ 이왕이면 귀국 후 쓰신 글들에도 다 해주세요.

주니다 2005-05-18 20:14   좋아요 0 | URL
여기서 노는 사람들은 대충 3번째의 문제적 사회계층이 가장 많지 않을까요? 심지어 주제는 모르고 눈만 높아서 결혼도 못한 사람도 있고....크크크

로쟈 2005-05-19 15:25   좋아요 0 | URL
주제를 모르신다면, 아직 '가망'이 있습니다. 지 주제를 알고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balmas 2005-05-20 00:57   좋아요 0 | URL
어이구,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군요.
그런데 [신곡] 완역본이 300쪽밖에 안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로쟈 2005-05-20 13:35   좋아요 0 | URL
그게 대조해 보지 않아서 현재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풀어썼다면' 분량이 더 늘어나야 정상일 텐데요.^^

n69 2005-12-09 04:01   좋아요 0 | URL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은 물론 어렵긴 하지만, 읽었을 때 도대체 의미판독이 안되는 책은 아닙니다. 역자가 <실천이성>을 번역하면서 <파스칼적 명상>의 번역이 어려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허나, 다른 부르디외 번역서 이를테면 <예술의 규칙>이나 <텔레비전에 관하여>보단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불어할 줄 전혀 모르나, 읽어보았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로쟈 2005-12-12 12:16   좋아요 0 | URL
<파스칼의 명상>을 자세히 검토하진 않았기에 제 의견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주변의 의견까지 참조하면 그리 과장된 건 아니지만). 역자에 대해서는 저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데, 훌륭한 번역서와 남루한 번역서들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좀 의아할 따름입니다...
 

도시락으로 싸온 김밥을 먹으며 몇 자 적는다. 어제 하려고 했던 책 얘기이다. 지난주에는 딱히 관심사에 부합하는 책들이 별로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막판에 두어 권이 합류하는 바람에 다섯 권이 채워졌다. 앞으론 이 '기록'도 그냥 부정기적으로 다섯 권의 책이 채워지면 기록해두는 방식으로 해볼 생각이다.

 

 

 

 

첫번째 책은 김윤식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문학사상사)이다.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되었던 원로 비평가의 자서전/회고록이다. 그는 36년생으로 올해 고희를 맞았다. 최근에 몇 권의 책이 거푸 출간되고 있는 건 그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책과 함께 비평집 <작은 글쓰기, 큰 글쓰기>(문학수첩)도 지난주에 나왔다. 신간은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이란 부제를 담고 있는데, 그 길이란 사실 책들과의 만남으로 다 채워져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란 것도 자서전의 한 축을 구성할 테지만, 그건 오직 책들과의 만남을 보완하는 의미일 테다. '20세기의 문학과 사상'이란 제목의 문구가 거창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읽고 쓴 책들이 우리문학의 20세기를 그대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김영랑의 본명으로서의 김윤식이 아니라 비평가 김윤식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였다. 거기엔 '한국문학의 연속성'이란 단원이 있었던바, 고 3때의 국어선생님은 이게 비교적 어려운 글이라고 했다. 나름대로 시골뜨기였던(19살의 내가 경험했던 서울은 작년에 내가 경험한 모스크바 이상으로 낯선 도시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 다소 놀랐던 건 교과서(혹은 신문)에나 나오던 이들이 버젓이 교정과 강의실을 활보하고 다니던 것. 첫학기에 나는 문학개론과 같이 신청했던 철학개론을 종교학개론으로 변경신청해서 듣고는, 2학기에 (비평가가 아닌) 김윤식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이는 매번 강의시간이 되면 (대형)강의실에 들어와서는 강의를 하고 끝나면 나갔다. 미스테리란 아주 단순한 것에 있는데, 나에게 미스테리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저자들'이 걸어다닌다는 것!(하이데거의 현존재, 즉 거기에-있음과는 좀 다른 양태로 '저기에-있음'이란 것. 어, 저 사람이 저기에 있네! 철학자 박이문이 파리 유학시절에 강의실에서 본 데리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저기에 있다니! 그러니까 미스테리라든가 기적이란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는 양태론적인 것일 테다. 어떤 인간/사물의 존재는 그 자체로 기적/미스테리가 된다. 그걸 바라보는 시선/태도에 의해. 그걸 '대상 a'로 보는?) 하여간에 그런 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나는 종교학과 국문학쪽 강의를 학부 내내 들었다(대학원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해서,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의 많은 대목을 나는 비평가의 육성으로 읽을 수 있다. 잡지에 연재되었을 때 처음 몇 번은 도서관에서 복사를 해 읽었더랬는데, 많은 대목들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언제가 들어본, 들어본 거 같은, 이미 들어버린 이야기들이었던 것). 그걸로 656쪽이다. 나는 그의 비평열차가 20세기의 종반을 향하던 무렵에 탑승한 승객이지만 나름대로 끼어들 감상이 없지는 않다. 그가 쓴 책들이 내가 젊은 날 읽은 책들의 서가 한 켠 정도는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 진화해나간다지만 인간의 열정까지 진화해가는 것 같지는 않으며, 따라서 문학/사상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 나름의 폭과 크기를 자랑했던 앞 세대의 비평가들이 점차 황혼에 접어들고 있는 풍경은, 아쉬운 장관이다.

 

 

 

 

두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온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문예출판사). 이미 두 영문학 교수의 번역으로 10년전에 책이 나왔더랬다. <문화와 제국주의>(창, 1995). 나는 그 책을 당시 내한했던 사이드의 강연장에서 구입했다. 강의는 주로 헌틴턴의 문명충돌론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오리엔탈리즘>이 한창 키워드로 부각되고 있던 시기여서 나름대로 성황을 이루었던 강의였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내가 읽은 사이드는 그의 자서전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Out of Place)>, 김석희 역(살림, 2001) 밖에 없는 듯하다. 그것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좋은 번역이었다. 하지만, 사이드의 나머지 책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은 모양이어서 인터넷서점의 서평들은 대부분 번역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작인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 1991/2000)부터가 그렇다. 그러니 내가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손해본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내용을 잘 요약해주고 있는 책들은 많다). 해서, 이번 번역본도 반신반의하게 된다.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 있는 집, 2003)까지 낸 역자이지만 사이드 번역은 저작보다 더 만만찮은 모양이다.

 

 

 

 

사이드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와 함께 역시나 얼마전에 나온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의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앨피)이다(얼마전 독지가께서 보내주신 책의 하나인데, 원서는 언젠가 복사해두었던 책이다). 사이드와 함께 소위 탈식민주의 3인방을 이루는 이가 스피박과 호미 바바인바, <다른 세상에서>(여이연, 2003)의 저자 스피박에 대해서는 역시나 같은 시리즈의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근간 예정이므로 기다려볼 일이다(스피박은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영역자로 유명하다). 그리고 호미 바바의 책으론 <문화의 위치>(소명출판, 2002)가 출간돼 있다. 언젠가 이 연재에서 한번쯤은 언급했던 책들일 것이다(물론 쉽게 읽히는 책들은 전혀 아니다. 아무래도 번역에 있어서의 식민상태를 우리는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우리 머리/언어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 새로운 세대, 새로운 경향의 탈식민주의에 대해서는 현대 중국영화에 관한 책인, 레이 초우의 <원시적 열정>(이산, 2004)을 단연 손꼽을 만하다(따라서 우리도 탈식민주의와 관련하여 '고전적인' 책이 곧 나올 만하다).

 

 

 

 

세번째 책은 재작년인가 한번 예고가 되었던 책인데, 우리의 영미문학 번역 실상을 점검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이다. 이 책은 고전이라는 '상징계' 너머, 고전 번역의 '실재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각 대학마다 교양필독서의 목록들을 '남발'하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어떤 책을, 혹은 어떤 번역서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나 가이드는 태부족인 게 현실이다(나는 이게 '기만적 현실'이라고 본다). 영어로 된 원서라면, 그나마 원서 추천이라는 게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기타' 언어의 고전들은 어떻게 읽으라는 말인가. 물론 번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그렇다고 영역이나 일역으로?). 하니 고전이 아무리 숭고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접하는 건 턱없는 번역들뿐이다. 따라서, 그 턱(수준)을 좀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 건 당연하며,  그 사전정지 작업으로 번역서에 대한 점검 또한 요구되는 것. 이게 간단히 정리한 이 책이 의의이다(아쉽다면, 이런 가이드북은 재생지를 쓰더라도 책값을 싸게 매겨서 널리 보급시키는 게 좋지 않았을까 라는 점. 32,000원은 부담스럽다.) 

584쪽의 책은 나름대로 방대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고 나는 모든 언어권에 걸쳐서, 그리고 철학/과학을 막론한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이러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교양필독서를 꼭 집어줄 수 있어야 하며, 번역서의 경우 (랭킹까지는 아니더라도) 등급/평점까지는 매겨질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나무에 가서 고기를 구하는 어리석은 짓이 재연되지 않는다.  가령 <로빈슨 크루소>, <오만과 편견>, <막대한 유산>, <모비 딕>, <무기여 잘 있거라>,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소리와 분노> 등 영미문학의 대표작 12편의 경우 읽을만한 추천본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동안 우리는 무얼 읽어왔다는 말인가?(이런 건 하고많은 영문학도들이 석고대죄할 일이다.)   

 

 

 

 

네번째 책은 W. I. T. 미첼의 <아이코놀로지: 이미지, 텍스트, 이데올로기>(서지락)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온 시카고대 영문학/미술사 교수인 저자가 언어적 관점에서 이미지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네 명의 이론가, 넬슨 굿맨, 곰브리치, 레싱, 그리고 에드먼드 버크를 역순으로 짚어가면서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관한 이들의 논의를 정리하며, 그 이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파헤친다." 이 책이 눈에 띈 건 내가 원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3부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는 이 방면의 다른 책들에서 자주 추천되는 대목이므로 일독할 만하다(마지막 장은 "우상파괴의 수사학: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물신숭배"란 제목을 갖고 있다). 예술/대중문화쪽으로 분류돼 있지만, 언어학/기호학쪽으로도 분류되어야 하는 책이다.

 

 

 

 

다섯번째 책은 앤드루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이산). 원저는 2002년에 나왔고 말 그대로 도쿠가와 시대부터 2001년가지의 일본 현대사를 훑은 책이라고 한다. 656쪽으로 분량도 맘에 든다. 저자는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라는데, 동양학에 있어서만큼은 하버드대가 이름값을 한다는 게 내 인상이다. 껄끄러운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래지향적인 것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지일(知日)이다. '애국적'인 견지에서라도 짬찜이 읽어볼 만한 책(일본 망가만 보지 말고). 

엊그제 EBS에서 우연히 청소년을 위한 도올 김용옥 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면서 우리 주변의 4강,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걸 그는 특히 강조했다. 당연히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그는 특히 러시아어를 강조했다). 유전 사업과 관련하여 매일같이 '러시아'는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정작 러시아에 관한 좋은 책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일본이나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감스러운 일이다. '애국적'인 견지에서도(러시아어도 좀 배웁시다!). 

05.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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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1 12:51   좋아요 0 | URL
님으로부터 러시아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로쟈 2005-05-11 12:54   좋아요 0 | URL
파란 여우님의 직업이 혹 알라딘 모니터링은 아니신지요? 제가 다시 읽어보기도 전에 댓글을 다시다니!..

파란여우 2005-05-11 13:12   좋아요 0 | URL
제 직업은 5월 7일까지는 공무원이었구요
지금은 무한정 놀기 시작한...^^
오타도 전 사랑하거든요...
아, 그리고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묵직한...
어찌 시간대가 잘 맞는지 히히^^

릴케 현상 2005-05-11 13:35   좋아요 0 | URL
부산에 살때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사람이었던데다가 우리회사 사장이 러시아어 두 달 공부하고는 러시아여자랑 결혼을 해버려서 꽤 가깝게 느끼게 되어버렸어요^^ 요즘 영어와 제2외국어 공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인데...중국어 대신 고려를...

로쟈 2005-05-11 13:36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놀기 시작'하신 건 좀 되지 않으셨는지?^^ 자명한산책님/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이라... 해볼 만한 '모험'이지요.^^

마냐 2005-05-11 13:36   좋아요 0 | URL
사이드의 책을 주말까지 숙제로 받아놓았슴다. 좀 바쁜 주라...제대로 읽을런지...쩝.

로쟈 2005-05-11 13:37   좋아요 0 | URL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 등에서 '컨닝'을 좀 하심이.^^

로쟈 2005-05-12 13:37   좋아요 0 | URL
번역서로서 표준적이었던 건 랴자노프스키의 <러시아사>였습니다. 그리고 호스킹의 <소련사>. 사실 러시아사는 1991년 이후의 시각에서 다시 정리돼야 하는데, 그런 시각에서의 최신사는 아직 번역/소개돼 있지 않습니다...

테렌티우스 2006-12-09 13:13   좋아요 0 | URL
아 사이드의 강연장에 계셨군요! 저는 그날 수업이 있어서 그 강의를 들으러 택시를 타고가 앞 부분을 놓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는데요... 강의 후 질문시간에 누군가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 종교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사이드가 '종교? 바로 종교가 문제지!'하는 대답을 해서 사람들이 다같이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여하튼 그럼 로쟈님과 저는 구면(?)이네요...^^

로쟈 2006-12-09 15:52   좋아요 0 | URL
저는 통역하던 배유정씨만 기억이 나는데요.^^
 

지난번 '최근에 나온 책들(37)'과 관련하여 내게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다. '좋은 일'이란 건 나의 궁색한 소리에 한 독지가께서 한꺼번에 다섯 권의 책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 거기에는 내가 그 글에서 언급한 지젝 책 두 권과 박노자의 책이 포함돼 있었다. 처음엔 선의를 사양했지만, 나중에 갚으면 된다라는 말씀에 넙죽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책들을 오늘 받았다(이 분은 나의 주소지도 알고 있었다). 고맙고 기쁜 일이다.

반면에, '나쁜 일'이란 건 강유원씨에 대한 언급과 벤야민 번역에 대한 지적이 때아닌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나로선 번역 텍스트들에 대한 자세한 읽기를 5월중에 시도해보겠다고 했건만 한 성급한 독자의 선의/악의 때문에 성마른 비난들에 내몰렸다(물론 일부에 국한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에 대한 과도한 열기의 분출인지 종교적 열정의 갈급한 표출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그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도록 하겠다). 그 대부분의 비난들에서 내가 별로 얻을 게 없었다는 건 유감스럽다.

텍스트는 읽으면 되는 것이고, 강유원씨의 작업도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읽기이다. 하지만 모든 언어의 텍스트를 그 모든 언어로 읽을 수는 없으므로 번역이 필요하며 또 요긴하다. 번역의 중요성과 의의에 대해서는 항상 강조해온 바이므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또 번역이 중요한 만큼 번역에 대한 비판, 즉 번역의 장단점을 짚어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건 당연하다(강유원씨 또한 이 일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일에 사적인 감정이라는 건 우습고도 같잖은 것이다(일면 면식도 없는 강유원씨에 대해서 내가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하다). 중요한 건 텍스트 읽기이고, 이해이다. 그걸 위해서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고 서로의 오류는 교정받을 수 있다. 나머지는 나의 관심사항이 아니며, 번역에 대한 나의 지적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기를 기대한다.

어쨌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으며, 좋은 일에 대해서는 오래 기억해두도록 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릴 작정이다. 그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한편,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자면,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는 연재는 나의 블로그와 내가 드나드는 카페에만 올려놓는 것이므로 허락없이 다른 공간에 퍼나르는 일은 삼가해주셨으면 한다. 글의 성격상 이 연재는 순전히 나의 '기억'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다(물론 몇 분의 지인들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이 다른 분들의 기억 보조에 사용되는 건, 가능한 일이긴 하나 나로선 부수적인 일이다. 이건 기본적인 전제이다.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내가 보기에 주제넘는 일이면서 당나귀들의 일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에서도 다섯 권을 꼽는 일은 식은 죽먹기이다. 아마도 몇 권은 어림짐작으로 맞히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꼽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지식의 대통합>(사이언스북스)이다. 나는 언제가 '윌슨의 모든 책'이라고 쓴바 있으며(나는 한 리뷰에 '에드워드 윌슨과 나'라고까지 적었다. 비록 '객기'일지언정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의 <통섭(Consilience)> 또한 예외는 아니다(사회생물학과 생물철학쪽 서가를 보니 이 책의 복사본이 뉘어져 있다).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지 30년만에 우리말로 번역되는 그의 또다른 주저이기에 반갑고, 무엇보다도 최적임의 역자들이 수고해준 것이 미덥다(개인적인 얘기지만, 몇 년 전 내가 이 책을 대출했을 때 선행 대출자로 역자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책은 부제에 걸맞게 학문과 지식의 대통합에 대한 윌슨의 구상을 펼쳐보인다, 고 한다. 이미 <사회생물학>에서 그 구상의 얼개를 내비친바 있지만, 윌슨이 보기에 학문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양분되면서 사회과학은 모두 양극, 특히 생물학과 인문학으로 흡수될 거라는 게 윌슨의 전망이다(생물학은 우리의 물질과 경험을 다루고 인문학은 텍스트를 다룬다).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윌슨의 여러 책들 가운데 "가장 현란한 지적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그러니 멀미약을 지참하고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데리다 같은 '현란한 몽매주의자'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고 하니까 주변적인 구경거리들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두번째 책은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재작년에 자서전이 번역돼 나온 이 러시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는 지리학자이자 동물학자이기도 하며 자연세계에서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부조의 원리가 진화의 동력이라는 걸 이 책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즉 "상호부조야말로 상호투쟁과 맞먹을 정도로 동물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그 이상이다.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상호부조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건 자연계의 일면만을 강조하는 게 될 것이다(악어와 악어새는 서로 우호적이지만, 악어와 악어사냥꾼은 서로 적대적이니까).

사실 비슷한 논지의 책이 이미 소개돼 있긴 하다. 10년 전에 나온 <새로운 생물학>(범양사출판부, 1994)은 "자연생태계를 잔인하고 냉담한 사냥터로 보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부정하고 자연속에서 생물들이 협동과 조화를 통해 살아가고 있음을 밝힌" 새로운 생물학을 소개하고 있다. 또 매트 미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원제는 <미덕의 기원>)도 시작은 바로 크로포트킨의 탈옥 에피소드이다. 크로포트킨의 삶 자체가 상호부조론의 실례였던 것. 상호부조론 혹은 '이타성'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유전적/생물학적 이익과 관련되는바, 그런 이익을 산출하는 알고리듬에 대해서는 이미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에서 과학적 통찰과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임이론으로 푸는 인간 본성 진화의 수수께끼'라는 부제를 단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이파리, 2004)는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설을 담은 국내서이다. 

 

 

 

 

'아나키즘 사상의 생물학적 기초' 라 평가되는 신간은 영역에서 옮긴 듯한데, 말하자면 중역본이 될 테다.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서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을 헌책방에서, 그리고 그의 선집인 <아나키야>를 새책방에 구입한바 있다.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지만, 기억에 이 '상호부조론'도 포함돼 있었던 듯하다. '원전주의자'들에 따르면,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제법 읽고 말할 만한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에 따라,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따르는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러시아어를 배워서 러시아어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인지? 물론 아니다. 원전 형이상학은 현전의 형이상학만큼이나 지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그냥 그럴 듯한 기분에 지나지 않는 것(어떠한 텍스트도 의미가 자명하게 현상하지 않는다. 의미는 번역/결정되는 것이고 해체/재구성되는 것이며, 발견/발명되고 생산/소비되는 것이다). 직접성의 환상에 따라, 기분에 따라 공부하는 이들이 아직도 드물지 않은 건 유감스런 일이다.

 

 

 

 

세번째 책은 카사노바의 자서전 <불멸의 유혹>(휴먼&북스)이다. 그의 자서전은 12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고 하니까(그러니 나름대로 '숭고한' 책이다! '수학적 숭고' 말이다) 번역서의 분량이 912쪽이라 하더라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 재작년에 나온 <카사노바의 스페인 기행>(예담, 2002)도 그 자서전의 일부이니까 (겹치지 않는다면) 나란히 구입해놓을 만하다.

물론 내내 "마리나는 체실리아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몸은 더 성숙했다. 그녀는 언니보다 자기가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녀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 그녀 말이 맞는 것 같았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가 처녀가 아니란 사실을 내가 알고 기분이 나빠질까봐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는 식의 내용만을 읽게 된다면 약간은 낯이 뜨거워질 수도 있겠지만, 카사노바의 자서전은 나름대로 고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그건 내가 이 책을 읽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믿을 만한 작가 츠바이크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츠바이크의 카사노바론은 <천재와 광기>(예하, 1993)에 실려 있으며, 아주 훌륭한 책이다. 거기에 실린 톨스토이론, 도스토예프스키론, 니체론 등이 모두 일급의 에세이이다.

 

 

 


네번째 책은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 현직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 번역가들의 육성을 담은 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터뷰집인 셈. 같은 저자의 <번역사 산책>(궁리, 2001)이 이미 소개된바 있다. 그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한 구절: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또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하지만 저울에 올리는 것은 사전에 정의된 말이 아니라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정신이 투입되어 스며들어 있고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깊은 수정이 가해진’ 말이다. 그것은 살아서 고동치는 말이며 원문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다리를 뻗어 작품 전체와 긴밀히 얽혀 있다. 저울에는 그 생명의 무게가 얹힌다. 따라서 저울의 또 한편에도 ‘똑같은 생명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등가의 무게’가 필요하다."

조금 첨언하자면, 그때 저울에 다는 건 비단 단어만이 아닌 '말'의 여러 수준이다. 문장과 문단과 텍스트 전체가 거기에 올려져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저자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톨스토이는 한국어 톨스토이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국어 도스토예프스키로 다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번째 책은 메를로퐁티의 논문 번역서인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책세상문고)이다. 1952년에 발표된 논문은 나중에 단행본 <기호들>(1962)에 첫 논문으로 수록되었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분량은 짧지만 메를로 퐁티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몸의 현상학 그리고 회화와 언어의 표현 형식에 대한 탈근대적 이해 등 그의 존재론과 예술론을 집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에서 그는 언어와 회화는 개념적 언어가 아닌 침묵으로 표현되며, 철학은 예술의 표현 형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영역본 <기호들>을 갖고 있으며(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번역서의 초반부를 좀 읽어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소쉬르의 언어학과 관련한 대목이 먼저 나오는바, 언어학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이 독해에 필수적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미학 전공인 역자가 다소 미진하게 번역한 대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전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런 건 굳이 불어 원본과 대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포함하여, 메를로퐁티의 텍스트와 벤야민 텍스트의 번역 읽기는 5월중에 시간을 내서 시도해보도록 하겠다. 관심있는 다른 분들이 수고를 덜어준다면 나로선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05. 05. 02.

P.S.1. '네바 강의 환각'과 관련한 보충. 지난 토요일 한겨레에는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란이 연재됐는데, '작가의식의 방법적 승리'의 세 가지 사례로 노교수는 (1)최인훈의 <하늘의 다리>(1970)에서의 환각("갠 하늘에 여자의 다리 하나가 오늘도 걸려 있다. 허벅다리 아래가 뚝 잘린 다리다."), (2)현기영의 <순이삼촌>(1978)에서의 환청("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환청은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3)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1984)에서의 환후("모두가 그 독가스 탓이죠.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거리에서도 잠자리에서도 그 지독한 놈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요.")를 든다. 이데올로기라는 관념을 먹고 사는 괴물(=터부)에 맞서는 것으로서 온몸, 곧 감각기관이 동원되었고 이것이 걸출한 작가의식의 산물이라는 것. "분단문제, 4.3사건, 5월의 광주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있지도 않은 허깨비들, 일종의 환각이고 환청이고 환후였던 것. 이 현장성의 휘황함이여. '우리문학 만세!'라고 내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리는 까닭이오."

이 '환각'으로서의 문학은 이전에도 강조된바 있는 것이기에 새로운 건 아니다(노교수는 자신의 문학론을 반추하고 반복한다). 내게 의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학론 자체가 '김윤식스러움'을 내포한 그만의 것이라는 것. 그 '환각'을 그는 다른 말로 '황홀경'이라 불렀던바, 문학이란 그 '환각'의 발명이며 '황홀경의 사상'이다.

P.S.2. 이미 알려진 바대로,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은 루틀리지의 'Critical Thinkers' 시리즈를 옮긴 것인데, 오늘 책의 속표지를 보니까 6권의 책들이 근간으로 예정돼 있다. 스피박, 데리다, 롤랑 바르트, 폴 드 만, 스튜어트 홀, 하이데거가 그것들이다. <지젝>과 <사이드>의 역자들로 봐서는 수유연구실의 사람들이 번역을 책임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올해 안에 책들이 나온다면, 해당 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나 교양서로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책들의 목록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근간 리스트를 보다가 좀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 것은 이미 출간된 <들뢰즈>가 빠진 것. 짐작대로 수유연구실의 연구진들이 번역해내는 책이라면 '들뢰즈 없는 시리즈'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 하여간에 마이어스의 <지젝>에 대해서는 조만간 독후감을 올리도록 하겠다. 지젝을 안 읽어도 되는 이들의 여가시간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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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5-02 15:04   좋아요 0 | URL
흐음, 그래도 이번 페이퍼에는 제가 읽어본 책들이 꽤 나와서 퍽 흐뭇하군요(^.^;).

로쟈 2005-05-02 15:32   좋아요 0 | URL
어느새 읽으셨더란 말인가요?..

瑚璉 2005-05-02 16:18   좋아요 0 | URL
잠시 소통장애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제가 이번에 소개해 주신 책들을 벌써 읽었을 리가 있나요(-.-;). 단지 배경설명으로 말씀해주신 책들 중 몇 권을 읽어보았다는 멘트였습니다.

2005-05-02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