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신곡>의 완역본이 나왔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실물'을 보지 못한 까닭에 긴가민가해 하며 이전 번역서를 이미지로 올렸지만, 어제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의 책. 968쪽에 38,000원이다. 이전 번역본을 다시 손본 것이라 해도 '본격적인' <신곡> 완역본이라 할 만하다. 역시나 다시 나온 것이긴 해도, 두어 달 전에 나온 <몽테뉴의 인생 에세이>와 함께 올해 나온 고전 번역서로서 손꼽을 만하다. 서해문집에서 같이 나온 <신곡> 해설서와 나란히 놓고 읽으면 구색도 맞으리라.

지난번 신간 소개글을 올린 지 며칠 안 됐지만, 이후에 나온 책 몇 권을 또 열거해 보기로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제일 먼저 꼽고 싶은 건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연구서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아직 서점가에 깔려 있지는 않지만 곧 나올 책으로 돼 있고, 이미 일간지 리뷰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기호학자 에코의 출세작이기도 한 <기호학 이론>(이 책의 불어판 번역서<부재하는 중심>의 우리말 번역서는 <기호와 현대예술>)의 '속편'으로 지난 2000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에 서울문고에서 처음 보고 구입한 적이 있는데, 이 신간과 함께 이제 읽어볼 만하겠다(분량상 원서를 독파하는 건 상당한 '여유'를 필요로 한다. 원서는 본문 464쪽이고, 번역본은 616쪽). 아마도 '칸트와 누구누구'라는 책 제목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 앞에 선 칸트' 정도의 뜻으로, 혹은 유머로 새기면 될 듯하다. 책의 부제는 '언어와 인지에 관한 에세이들'이고, 전체 6개 장에서 2장이 '칸트와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에 대한 것이다(미국 철학자 퍼스의 책들이 이제껏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오리너구리? 한때 논란이 되었던 이 동물은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다. 그런 한편으로 오리이며 너구리다. 이걸 어떻게 분류해야 하나? 이걸 분류할 수 있는 (칸트식의) 선험적 도식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이 난처한 사태에 칸트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독자를 일단 다른 철학서들과는 다른, 편안한 태도로 이 책에 접하도록 한다(끝까지 엉덩이를 떼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기호학이론>을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물론 우리말 <기호학이론>은 재미있기에는 너무 곤란한 번역서이다. 개역본이 나와야 될.) 이 책은 배꼽을 잡고 읽을 만하겠다.

두번째 책은 '잡설가' 박상륭의 <소설법>(현대문학). 그의 다섯번째 창작집이고, 표제작은 '소설-법'이면서 '소-설법'의 의미라고. 한국문학의 이단적인 작가이면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린) '주류' 작가이기도 한 박상륭에 대해서 사실 나는 별반 읽은 게 없다. 그의 <죽음의 한 연구>(작가는 <죽음의 연구>라는 제목을 끝까지 고집했었다고)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사두긴 했지만, '잡설들'을 읽을 만한 '여유'를 그간에 갖지 못했던 것. 가령, "'小說'이라는 개새끼[怪色鬼]는, 어떻게도 갈블 수 없이 雜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깊어지는데, 이는, '감성'과 '이성'이, 어지럽게, 그리고 사련적邪戀的으로 혼합되어, 학(鶴,은, 言語의 상징이기도 하거니!)의 털을 뽑고, 시뇨屎尿의 가마솥에 넣어 삶는 잡탕이라는 그 생각이 (글쎄, 패관만을 한정해 말이지만) 패관께는 깊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소설론'을 읽으면서 소설에 대해 깨치는 바가 있는 이라면, '난놈'이라 할 만하지만, 나는 박상륭 마니아도 아니고 '난놈'도 아니다. 다만, 그의 잡설들이 우리의 '근대소설'을 비춰보는 '거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는 "동서고금의 종교 신화 철학을 아우르는 심오하고도 방대한 사유체계와 우주적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거대한 스케일, 독보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확장시켜왔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라면 All or Nothing이다(박상륭은 한국문학보다 크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번째 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생애를 다룬 <평전 파솔리니 - 죽음과 삶의 몽타주>(이룸). 소개에 따르면, "영화감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뛰어난 재능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문학과 사회 분야의 평론가이자 생애와 작품이 모두 현대 유럽 사회의 예술과 정치, 종교와 성 담론에서 시대를 뒤흔들었던 현대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사실 그의 전기로는 로로로 시리즈의 <파솔리니>(한길사, 2000)가 이미 소개돼 있지만, 이번에 나온 건 훨씬 방대한 분량이고(613쪽), 엔초 시칠리아노라는 이탈리아의 평론가의 솜씨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 Pasolini는 '파솔리니'와 '파졸리니', 어느 쪽으로 발음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씨네21> 같은 영화지에서는 '파졸리니'라고 기재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씨네21>에서는 30년 전에 살해당한(목이 잘려서 도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던가?) 이 문제적 감독 살인사건이 재조사될 거라는 외신을 전하고 있는데("동성애 혐의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경험도 있는 그는 1975년 많은 의혹을 남긴 채 로마의 빈민가에서 17세의 동성애자에게 난자당해 숨졌다") 살해 혐의로 9년간 복역했던 용의자(동성애자)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파졸리니를 죽인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세 청년이었고, 이들이 그를 "더러운 공산주의자"라고 욕하면서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비참한 죽음을 맞은 거지만, 요는 그가 동성애자로 죽었는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로 죽었는가 하는 것.
'파졸리니'란 이름으로는(그래서 '파솔리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10년 전에 그의 소설 <폭력적인 삶>(세계사, 1995)이 번역/소개된바 있고, 그의 영화로는 <마태복음> <테오레마> 등이 출시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오래전 영화를 전공하던 선배로부터 빌린 비디오로 <살로, 소돔의 120일>, <오이디푸스왕>,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본 적이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작은 기사를 보니까 <살로, 소돔의 120일>은 네티즌들이 출시를 고대하는 DVD로 4위에 꼽혔다. 한 네티즌 왈 "과연 파졸리니 영화도 우리나라에 출시될 수 있는 건가요? 흠... 특히 무삭제로 나온다면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한 획을 긋는 충격적인 사건이겠네요." 이미 제자인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무삭제 개봉됨으로써 '한 획'은 그어졌지만, 스승의 <소돔 120일>은 같은 '한 획'이더라도 붓의 종류가 좀 다르다. 파졸리니의 '악몽'에 견주면, 베르톨루치의 '몽상'은 가히 천진난만이다.
같은 이탈리아 사람 에코의 책을 거명한 김에, 파솔리니/파졸리니의 평전을 거푸 거명하는 것이 '의리'에 맞을 듯하지만, 거리를 둔 건 이 신간의 편제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상하고 육중하다. 나는 그런 모양새가 '격렬한 삶' 혹은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파솔리니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물론 덕분에, 글자도 큼직큼직하게 박은 책값은 아주 '격렬'해졌다).
네번째 책은 문화비평가이자 '미디어 이론가'의 대명사 마샬 맥루한의 마지막 책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실상 그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말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언을 예언한 맥루한인 만큼 그에 책들에 대해서 주절이주절이 늘어놓는 건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이미지들로 대신한다.






제일 왼쪽이 이번에 나온 책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어지는 두 권은 <미디어의 이해>에 대한 2종의 번역서이다(민음사판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세번째는 또다른 주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인데, 이전에 번역이 잘 안 읽힌다는 서평들을 읽은바 있다. 그리고 다섯번째 책이 <미디어는 맛사지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인데, 분량으론(100쪽) 별볼일 없는 책이다. 맥루한의 책들이 대개 난해하다지만, 이 책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맛사지용으로도 불편하고. 그리고 마지막 <맥루안>은('맥루안'을 고집한 역자의 고집이 돋보인다) 가장 얇으면서 유일한 입문서.
신간에 대한 한국일보의 리뷰를 잠깐 인용하면, "맥루한의 글은 화려한 비유로 넘치지만 비교적 읽기 좋게 번역한 데다 곳곳에 친절한 역자 주가 붙어 있어 읽기에 썩 어렵지는 않다. 다만 책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잡지처럼 너무 가벼운 표지를 쓴 것이나,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쓴 마샬 맥루한 영자 이름에 탈자를 낸 성의 없는 편집이 아쉽다." 그 탈자라는 표지에서 마샬(Marshall)의 'r'을 빼먹은 것(보이시지요?). '읽기 좋게 번역한' 것만으로도(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스러움에는 틀림없지만, 외치건대, "마무리를 잘하자!"

다섯번째 책도 마무리가 잘 안된 책이다.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1919- )의 <셰익스피어의 시대>(을유문화사)가 그것. 뒷표지처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는 아니지만(어떻게 비평가가 '가장 위대한 문학가'가 될 수 있는가? 과대포장도 예의는 아니다. 그냥 '이 시대 최고의 비평가' 정로로만 띄워좋도 충분하다. 물론 그것도 영국에서의 일이고), 프랭크 커모드는 명망있는 비평가이고 믿을 만한 저자이다(그는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니, '커모드 경'이다). 비록 우리에게 소개된 건 일천하지만. <종말의식>(1967/2000)이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 1993)으로 번역된 게 단행본으론 전부이다. 한 추천사에 따르면, 이 신간에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책에 격조있게 담겨 있다." 거기에 장점은 분량이 얇은 것. 200쪽 정도니까 반나절만 투자해도 남을 만한 분량이다(이미 여러 권 출간된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평전 중에서 가장 얇다. 가장 지명도 있는 저자임에도).
내가 '마무리'를 들먹인 건 책날개에 실린 약력에서 커모드의 저서로 <로맨틱 이미지: 종말의 의미>라고 소개한 대목 때문. <로맨틱 이미지>와 <종말의 의미>는 각기 다른 책이고, 후자는 언급한 대로 국역돼 있다. 표지나 책날개처럼 눈에 잘 띄는 것도 없을 텐데, 좀더 세심한 교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책의 역자는 이미 이 책의 포함된 크로노스 총서에서 <르네상스>, <민족과 제국> 등을 번역한바 있는 전문가이다. 해서, 내용은 믿어봄 직하다. 한편, 셰익스피어 관련으로 내가 고대하는 책은 커모드급, 혹은 그 이상의 비평가 해롤드 블룸의 <셰익스피어: 인간성의 발명>이다(블룸의 셰익스피어를 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본문에 각주가 단 한 개도 달려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명도만으로도) 소개되어야 할 책이다.
이렇게 다섯 권을 다 꼽아버렸는데, 약간 아쉬운 책은 <수량화 혁명 - 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심산)이다. 제목만으로도 내용은 어림짐작할 수 있다. 소개에 따르면 "중세 후기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동안 서구 문명이 성취했던, 질적 관점에서 양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논하는 책이다. 이러한 전환이 근대의 과학기술, 관료제, 상업 등을 가능하게 했고, 시공간의 정확한 측정 및 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대체적 추세로서의 '양화'가 아닌, 양화의 실상 즉 시간, 공간, 수학, 시각화, 음악, 회화, 부기 등 다양한 문화 아이템 각각에서 양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바로 그 양화가 유럽 제국주의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 설명한다."


저자, 앨프리드 W. 크로스비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미 "다른 대륙, 다른 문명의 사람들과 달리 유럽인들은 근대 이전부터 해외로 팽창하여 왔다.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그런 곳으로서 이곳에서는 유럽 출신 백인들이 기존의 정주민들을 내몰고 그 땅을 빼앗은 다음 거기에 유럽 문명을 복제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단지 인간의 소행일 뿐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팽창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주경철)란 요지의 <생태 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0)가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05. 05. 23.
P.S. 지난 20일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1913년 생이니까 그는 지상에서 꼬박 아흔 두 해를 살았다. 백 세를 넘겼던 가다머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는 생애이며, 그가 남겨놓은 업적과 자취 또한 후학들이 따라가기에 버거울 정도로 깊고 광대하다. 나는 부랴부랴 도서관에 들어온 프랑스와 도스의 전기 <폴 리쾨르 - 삶의 의미들>(동문선)을 앞당겨 대출했다. 890쪽이니까 그의 생애에 그 나름으로 견줄 만하다(참고로,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200쪽까지 무난하게 나가지만 이후엔 '재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제 그를 읽을 시간이 되었다.


리쾨르의 책들이 그래도 여러 권 번역돼 있지만, 리쾨르에 관한 책은 아직 드물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한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건 리처드 커니의 대담집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에서의 리쾨르 편이다. <폴 리쾨르>의 중간에 실린 화보에는 1988년 한 학회에서 커니와 리쾨르가 함께 찍은 사진도 들어 있는데, 당시 75세의 노학자 리쾨르에 비해 커니는 2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모습이다. 커니의 책은 현대 사상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에 다른 철학자/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로서 아주 요긴하고 유익하다(데리다에 대한 두툼한 책을 쓴 존 카푸토는 데리다 입문서로도 이 대담집을 꼽은바 있다).
지난 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장들 가운데, 이제 1908년생인 레비-스트로스 정도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듯하다(동급생인 메를로-퐁티가 죽은 지 거의 반 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사상은 날로 '발전'해 가는 문명에 비례할 듯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거장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나면, 말 그대로 텅 비게 된다. 빈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하다못해 올해로 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21세기의 아인슈타인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20세기 영화사가 그러하고 한국 현대시사가 그러하며, 한국문학 비평사가 그러하다. 해석학으로 분야를 지극히 한정하더라도 리쾨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세울 만한 이가 또 나올는지는 의심스럽다(사상에는 구조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남은 건 안락한 아류들의 지루한 여생인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