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에 책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마치 책사태처럼. 그런 사태는 지긋이 한번 무시하게 되면 계속 속편하지만, 괜히 한번 눈길을 주게 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남의 돈 세는 일 같아 남세스럽지만, 대개는 사두지 못할 책들을 또 몇 권 나열해 본다(물론 가끔 한두 권씩을 사게 되고 읽게 된다. 나도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처음에 꼽을 책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처녀작' <세미오티케>(동문선). 아마도 '모스크바통신'을 하릴없이 유심하게 읽은 분이라면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기억할지 모르겠다(모스크바에 온 보람을 안겨주었던 그 책이 내가 작년에 꼽은 '올해의 책'이다). 그 러시아어본에는 바흐친론인 <시학의 파괴>와 함께 <세미오티케>와 <소설 텍스트>가 합본돼 있었다(이 책들은 영어본이 아직 안 나와 있다).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세미오티케>(원서 제목은 희랍어로 돼 있다)는 박사학위논문인 <시적 언어의 혁명>과 함께 당시 프랑스 지식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불가리아 출신의 젊은 여성 '사무라이'가 얼마나 '센지'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아직 영어본도 나오지 않은 까닭에 우리말 번역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떡하니 서점에 깔려 있어서 '경악'했다.    

그 경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론 놀랍고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극히 걱정스러웠던 것. 거의 동문선 전속이라고 할 만한 역자는 이미 10여 권의 번역서를 낸바 있고, 그 중에는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과 그녀가 편집한 <미친 진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수준은 좀 미심쩍은데,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생각없는 번역서를 보노라면 기본적인 자질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사건은 터져 버린 것을. 게다가 크레스테바 전공자란 분들의 번역도 대개 기대 이하이기 때문에 이 경우만 유난스러울 건 없으리라는 계산까지 하게 되면, 결론은 '울며 겨자먹기'이다(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읽기는 이번 여름에 시도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건, 12편의 논문 가운데, 4편이 빠진 채 8편만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 역자가 후기에 밝혀놓은 사실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고 있다. 분량 때문에?(도스의 <폴 리쾨르>도 890쪽짜리로 번역돼 나온 걸로 봐서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빠진 논문들을 보니까 대개 기호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데리다의 <입장들>에 실린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60년대 후반 크리스테바는 프랑스에서 기호학의 선두주자였다). 해서, 우리말 <세미오티케>는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책이 돼 버렸다. 거듭 유감스럽다. 번역의 질이 그 유감을 상쇄해줄 수 있을는지?

 

 

 

 

두번째 책은 작년에 방한하기도 했던 페터 슬로토다이크의 대표작 <냉소적 이성비판1>(에코리브르)이다(이번에 1권이 나왔는데, 2권도 곧 나오는 건지?). 작년에 나온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를 도서관에서 대출해 놓은지 제법 오래 됐는데(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읽을 거리가 그새 또 추가됐다. 책은 이미 '냉소주의'를 우리시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틈틈이 참조하고 있는 책으로 낯설지 않은데(<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에서도 이 점은 언급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는 책이다. 책은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냉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알아본다."

이 신간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의 리뷰가 요긴한데, 잠깐 옮겨오면, "<냉소적 이성비판>은 철학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매우 선정적 방식으로 계몽주의 이후 현대철학의 총체적 파국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일약 독일 철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을 맞은 1981년부터 집필됐다. 이 때문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이성비판의 뒤를 잇는 '4대 이성비판'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후계자다.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자기과시적인 '길거리 철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3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됐다. 우리는 계몽됐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어디 써먹기 전에 우리는 이 책을 좀 읽어봐야 한다.

 

 

 

 

세번째 책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들뢰즈 영화론 연구서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물론 들뢰즈의 <시네마>를 친절하게 소개/해설해 준다는 데 있을 터이고, 그런 종류로는 좀 얄팍하지만 <들뢰즈: 철학과 영화>(열화당, 2004)란 책도 이미 소개돼 있다. 그리고 논문집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도 이 주제로 참조할 만한 책이다. 한데, 신간은 저자가 이미 <현대영화이론의 궤적>(원제는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믿을 만한 영화학자이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에 '참고서'로서 유용할 듯싶다. 문제는 정작 들뢰즈의 <시네마>가 아직 완간되지 않은 것. 애꿎게도 1권 운동-이미지만이 두 차례 번역되었을 뿐이다. 무얼 갖다놓아야 해설을 할 게 아닌가? 그러한 순서개념이 좀 부족한 것은 우리 학계/출판계의 '관행'이므로 크게 흠잡을 건 없지만, 조만간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해설서로서 로도윅의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철학분야의 신간,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이다. 이미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 2004)를 소개한 역자의 '신작'인데, 발리바르와 마슈레는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이고 조만간 소개될 듯한 자크 랑시에르까지 포함해서 알튀세르 사단의 3총사를 이룬다. 신간은 이들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해줄 듯. 앞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순서는 좀 뒤바뀌었다. 정작 스피노자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기 이전에 대표적인 연구서들이 먼저 책장에 꽂히게 된 것. 역자의 계획대로 제대로 된 스피노자 번역본들이 조만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책세상), 터키의 '대표작가' 오르한 파묵의 <눈>(민음사), 그리고 한국의 '유령작가' 김연수의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손꼽을 만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좀 삐딱한 마음으로 러시아작품을 고르도록 하겠다. 보리스 필냑(삘냐끄)의 <마호가니>(열린책들)이 그것이다. 잠시 소개문을 인용하면, "보리스 삘냐끄의 '마호가니(Krasnoe Derevo)'는 1929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작품으로, 트로츠키 공산주의자의 시점에서 혁명 후 10년의 사회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으로 인해 당국의 격렬한 비판을 받은 삘냐끄는, 작가 동맹에서 추방당하고 1937년 대숙청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필냑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30년대에 나름대로 아부도 하고 분투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한 불운한 작가였는바, 그의 대표작 <벌거벗은 해>(1921)은 이미 소개돼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가/작품은 <마호가니>에 같이 묶인 유리 올레샤의 <질투>(이들 작품들은 모두 이전에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던 것이 단행본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올레샤는 <기병대>의 작가 이삭 바벨과 함께 오뎃사 출신의 대표적인 '동반자작가'인바, 개인적인 생각으론 새로운 이념에 헌신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걸 무시하지도 못하는 '동반자' 문학의 핵심이 <질투>에는 잘 그려져 있다. 게다가 아주 코믹하다(하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코믹이다). 그리고 그 코믹은 '감정의 음모'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에는 올레샤의 동화 <세 명의 배불뚝이>(기탄출판)도 출간되었다. 그의 '음모'가 얼마나 코믹한지 한번 구경들 해보시길.  

여러 분야에서 읽어볼 만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다 헤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끝으로 한 권만 꼽자면,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새 비평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문학평론집으로서는 최근에 서영채의 <문학의 윤리>에 이어서 꼽아보게 되는 책이다.

 

 

 

 

책은 '존재의 변증법4'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이 그의 네번째 비평집이란 뜻도 된다.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을 시작으로,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등이 그가 이전에 낸 비평집들인데, 기억에 아마 시비평들만을 묶은 마지막 책을 제외하고 '존재의 변증법'이란 문구를 제목이나 부제로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실상 '존재의 변증법'이란 모호한 문구가 문학의 술어로서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굉장히 선호하는 문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의 비평행위를 그 문구에 집약하고자 하므로.  

정과리는 '문지' 4인방의 뒤를 이은 '문사' 세대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활동했었지만(작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이번 비평집도 문지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평론가 김현 사후에 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비평가로 지목됐었지만(적어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생전에 그의 일부 비평에 대해서 '관념의 체조 같다'는 평을 '스승'인 김현은 내린바 있지만) 비평가로서의 그의 궤적은 그러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문학의 지형변화, 혹은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변화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다(그 두 가지는 맞물리는 것이지만).

태도의 변화? 가령 이번 비평집에도 수록돼 있지만, "옛날 옛적에 문학이 있었지"라는 식의 태도. 해서, 그의 비평은 문학 이후, 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의 무덤을 앞에 둔 비평이다. 그러니 애도는 있을지언정 열정은 더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대신에 부각되는 건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비평이 '디지털화'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를 내게 암시해준 책이고, 한 젊은 비평가의 '패배주의'를 확인하게 해준 책이다. 이후에 그는 알다시피,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도 합류하면서 '최연소' 원로 비평가로 자리하게 된다. 그에게 어떤 영광이 더 남아 있는 것인지?

책머리에 실려 있으면서 아마도 표제를 빌려주었을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욕망'이란 평문은 1988년에 씌어진 것이고 나는 그 글을 읽던 때를 기억한다. 대학가의 그 골목과 지금은 없어진 그 서점에서 신간으로 나온 <문학과사회>를 들춰보던 때가 그 때였지 싶다. 욕망은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원로 비평가'의 욕망도 그때 거기서 들끓지 않았을까? 나는 '쿨한' 욕망을 믿지 않는다...  

05.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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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30 14: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가 근간 예정이라고 한다. 구색을 맞추게 돼서 다행이고 반갑다...

주니다 2005-05-30 15:45   좋아요 0 | URL
<세미오티케>는 기대한 책이었건만 난감한 지경이군요. 동문선은 언제나 이름값을 하려는지...<시네마-1>은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던데 어떤게 상태가 좋은지요? 그리고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라는 책이 의욕적으로 한꺼번에 나왔던데 살펴보셨습니까? 그나저나 이번 학기도 얼마 안남았군요.

로쟈 2005-05-30 16:42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두 권도 서점에서 봤습니다(제가 몇 마디 참견할 만한 책들은 아니어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단한 필력이다 싶은데, 곧 이주헌씨 뺨치겠더군요.^^ <시네마>는 둘다 깔끔하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제가 비교해보지는 못했습니다(둘 다 갖고 있지도 않지만). 또 <시각영화>라는 책도 번역돼 나왔는데, 저로선 아무래도 제목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청각영화'니 '후각영화'라는 게 있지 않은 한...

주니다 2005-05-30 17:29   좋아요 0 | URL
오, 이주헌씨 뺨 칠 정도라면....<시네마>는 주은우와 유진상씨가 번역했죠? 유진상씨는 미술이론하는 분 같은데, 서점 가면 찾아봐야 겠습니다. <시각영화>는 원제가 Visionary Film이더군요, Visionary의 원뜻으로 보나 "'몽환trance'이라는 맥락하에서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다"는 소개글로 보나 탐탁지 않은 제목이로군요. 그냥 편집부에서 쉽게 간 것 같죠? 이 책은 일전의 '재귀적인 영화' 때문에 눈이 번쩍 뜨여서 보관함에 넣어 뒀었는데, 실물을 확인해보고 구입 여부를 결정해야겠네요.(본다고 확인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핫)

로쟈 2005-05-30 17: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실물'이 중요합니다. 화장빨이나 얼짱 각도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palefire 2005-05-30 17:43   좋아요 0 | URL
엄격히 말하자면 [운동-이미지]는 재역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 나온 새길판(주은우/정원)이 좀 더 낫습니다. 비록 영역판을 많이 참고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적,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이나 들뢰즈에 대한 배경지식에 있어서는 새길판(아마도 지금은 절판상태?)이 더 낫습니다. 시각과언어판은 이런 점에서 단점이 많은 번역본입니다. (개정판이 나와주면 좋을텐데) 그리고 Visionary Film=시각영화도 정말 탐탁치 않은 제목이긴 해요. 환영적 영화 또는 몽환적 영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시트니의 개념이나, 그가 다루고 있는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흐름(당장 Deren과 Anger만 생각하더라도)에도 부합합니다. 저도 번역본은 보지 못했지만, 실험영화를 전공했고 현재 실천중인 시카고 MFA 출신들이 번역자로 참여해서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어의 개념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유보적 예측을 해 봅니다.

주니다 2005-05-30 18:36   좋아요 0 | URL
palefire님의 예상치 못했던 답변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시각 언어>에 대한 palefire님의 자세한 서평을 기대해 봅니다.(영화전공이신듯 하여...문외한들을 위하여)

2005-05-3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5-31 17:30   좋아요 0 | URL
주니다님/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은 오래 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번역에는 역시나 전문용어와 관련하여 오류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일종의 '사전'이기 때문에 구비해놓는 게 요긴한 책이긴 한데(원서를 참조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테바에 대한 책을 구하신다면, 역시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에서 나온 <크리스테바>를 권하겠습니다(저는 며칠 전에 복사했습니다). 컴팩트한 분량에 깔끔한 정리가 그 시리즈의 특장이죠. 국내서 중에서는 역시나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집을 추천하겠습니다.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제 기억엔 후기 크리스테바의 '테마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이론 읽기>의 한 장이 크리스테바에 할애돼 있는데, <시적 언어의 혁명>에 대한 해제입니다. 초기 크리스테바와 관련하여 참고하시길...

주니다 2005-05-31 17:55   좋아요 0 | URL
Noelle McAfee가 쓴 것이 맞죠? 일단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부터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5-05-31 19: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2005-06-0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