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부터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담론, 혹은 키워드는 '파시즘'이다(최근엔 보다 '대중적'인 버전으로 '대중독재'란 말도 쓰이고/퍼지고 있다). 흔히 스탈린이즘과 함께 전체주의의 두 축을 이루는 이념으로 지칭되는 파시즘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권위적 국가주의'와 그에 대한 '대중의 절대적 지지'가 결합된 형태인데('대중독재'란 조어는 그 두 가지항을 결합한 것이겠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의 응원열기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파시즘'이란 표현을 썼고, 최근에 황우석 사태와 관련하여 일부 열성적인 '황빠'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파시즘'이란 표현을 갖다붙였다. 당초 '파시스트'란 말은 아마도 최대의 경계와 경멸을 담은 어사였을 텐데, 이젠 다반사로 쓰는 말이 돼 버린 것. 나의 일상, 나의 파시즘? 

 

 

 

 

그만큼 '파시즘'이란 용어가 '일상화'되었다는 뜻이겠는데,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이는 줄기차게 우리사회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주장해온 임지현 교수가 아닌가 싶다(거기에 강준만 교수의 개마고원팀들이 가세했다). 좁은 견문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 '(일상적) 파시즘'은 아마도 계간 <당대비평>의 최고 히트상품일 것이다. 최근엔 김상봉 교수까지 <도덕교육과 파시즘>(길, 2005)으로 무장하고서 이 '반-파시즘' 대열에 가세했다. 한 용어의 이러한 일반화/일상화는 한편으로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극대화하면서(대한민국이 파시스트 국가라니!)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도록 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파시즘'을 말 그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순치시켜버린 면도 있다('항시적' 파시즘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파시즘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현 '노빠 정권'이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정권의 '무시무시함'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히틀러/무솔리니 정권을 무능력하고 무기강적인 정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지지율이 30%를 밑도는 '국가주의'도 있나?).

해서, 현재의 '파시즘 인플레'는 주창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파시즘을 권장하고 장려한다(왜? 일상적 파시즘은 견딜 만한 파시즘이니까. 견딜 만한 것이 아니면 일상화될 수 없으니까). 더불어 모든 근본주의는 서로 공모하기에(주사파들이 조갑제류가 되는 것은 '전향'이 아니다. 본래 조갑제가 '주사파'이기 때문에. 박정희주의나 김일성주의나 그게 그거니까. 모두가 '인민'을 위해 애면글면했다. 단, 차이라면 뭔가 꿀리는 게 있었던 '친일파'는 어떻게든 먹여살렸지만 너무도 당당했던 '항일투사'는 인간 주체라는 게 먹고만 사는 거냐라고 내내 '교시'했다는 것. 말하자면, '배부른 돼지' 대 '배고픈 주체' 간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파시즘론이 무용하다거나 임지현 교수의 작업이 오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이론은 의미론과 함께 화용론을 가지는 것이어서 의미론적으로 '옳은' 이론이 화용론적으로, 즉 실제 현실상으로 언제나 '옳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것(이론적 순결주의자는 교리적 근본주의자의 세속적 버전일 뿐이다). 사실 '좋은 의도'와 '나쁜 결과'의 조합은 인간적인 결함의 결과만은 아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이런 모양'을 기대하신 건 아닐 테니까.  

 

 

 

 

이야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최근에 임지현 교수의 파시즘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던 책이 출간됐고, 나는 그냥 그 책에 대해서나 말하려던 참이다. 빌헬름의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그린비, 2006)이 그 책이다. 임교수는 책의 뒷표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동감을 잃어버린 좌파 교과서의 정답을 무시하고, 파시즘의 복합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 개인의 지적 여정에서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와의 만남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를 일반적으론 '프로이트 좌파' 혹은 '프로이트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해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프로이트주의는 혁명 러시아에서 곧 기각된다). 이미 작년에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2005)이 출간됐을 때 라이히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대신에 횡적으로, 작년초에 출간된 책으로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듣는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교양인, 2005)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겠다는 의견 정도를 덧붙인다. 심리적 분석과 역사적 분석이 서로 보완해줄 수 있을 테니까. 팩스턴의 <파시즘>은 600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이게 좀 부담스럽다면, 마크 네오클레우스의 <파시즘>(이후, 2002)로 때우셔도 해도 좋겠다. 1/3 정도의 분량이다. 얼마전에 나와서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강유원의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에는 한 장에 파시즘 관련서들에 대한 서평에 할애돼 있다.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라이히의 파시즘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만한 책으로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교양인, 2006)도 이번에 출간된 책이다.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괴벨스의 본격 평전인 이 책은 괴벨스의 일기와 그가 쓴 소설, 연설문,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괴벨스의 내면세계를 가장 깊숙한 지점까지 파헤쳐 들어간 탁월한 나치 심리의 해부서"라고 하니까 관심있는 독자들은 참조해볼 만한다. '대중의 자발적인 지지'가 '파시즘'의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할 때, 괴벨스의 공적은 그 지지를 '동원'할 수 있는 선전선동(=아지프로)전략을 개발한 데 있다. 물론 이것은 파시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러한 선전선동은 현실민주주의에서도 이미 '파시즘'만큼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니까.

 

 

 

 

괴벨스를 언급하면서 히틀러를 빼놓을 수는 없겠는데, 관련서들은 막스 피카르트의 <우리 안의 히틀러>(우물이있는집, 2005)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분석서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 2004), 히틀러에 대한 신화적 분석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민음사, 2003), 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서 <히틀러의 정신분석>(솔출판사, 1999)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거기에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 1998)과 <히틀러 최후의 14일>(교양인, 2005)도 덧붙일 수 있겠다(바람구두님의 강추에 따른 것이다). <30분에 읽는 히틀러>(랜덤하우스중앙, 2004)라면 히틀러에게 너무 야박한 것일까? 그렇다고 당신이 이 참에 <나의 투쟁>까지 읽겠다고 나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속으론 이렇게 중얼거리겠다. "그건 좀 오버가 아닌가요?" 

 

 

 

 

두번째로 꼽을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두 에세이스트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렝 핑켈크로트(팽켈크로)의 공동저작인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동문선, 2005). 작년말에 나온 책인데, 최근에서야 눈에 띄었다.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비터문>의 원작자이기도 한 브뤼크네르의 책은 <비터문>(산하, 1993) 등의 소설을 포함해서 여러 권의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읽은 가장 압권은 역시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이었다. 핑켈크로트의 경우도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 같은 뛰어난 에세이들이 소개돼 있고(아래 사진은 영화 <비터문>의 포스터).

각자가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지만, 내가 알기에 두 권의 공저도 쓰고 있는데, 한때 내가 구했던 책은 <새로운 사랑의 혼돈>이었지만 이번에 <길모퉁이의 모험>이 먼저 나왔다(전자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얼른 가늠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엔 저자들의 지명도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물론 번역서의 경우엔 역자를. 한데 역자의 책을 내가 읽은 게 없다! 브뤼크네르의 <번영의 비참>을 약간 읽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차례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곱 개의 장이다. 그러니까 '일상'이 전면화되어 있는 셈인데, 일상에서의 모험이란 사실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밖에 더 있겠는가?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이 모험이듯이(한가지 곁들이자면 동문선 책 치고는 가격이 저렴하다).

 

 

 

 

세번째 책은 송태현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 '융, 바슐라르, 뒤랑 - 상징과 신화의 계보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책 자체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부제이며 세 명의 상상력 '이론가'들과의 조우를 한번쯤 권하는 의미에서 꼽아본다. 유익한 안내서가 되어줄 듯하기 때문에. 융이나 바슐라르 관련서들은 우리 인문학 현실에선 '과다'할 정도로 여러 권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에(가장 얄팍한, 그래서 읽기에 간편한 책 몇 권만 이미지로 띄워놓는다), 한때 소개되다가 주춤하고 있는 질베르 뒤랑에 대해서만 몇 마디 덧붙인다. 사실 저자 자신이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서 '질베르 뒤랑의 문학비평:새로운 세계관과 비평의 쇄신'으로 박사학위 받은바, 뒤랑은 상상력이론과 신화이론에 있어서 (바슐라르파와는 또 구별되는) '그르노블학파'의 수장이었고, 국내에도 그의 직간접적인 제자들이 여럿 된다.

 

 

 

 

대표적으론 뒤랑의 <상징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83)을 처음 번역/소개한 진형준 교수를 들 수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문학과지성사, 1992)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오래전에 둘다 읽어보았지만 역시나 번역서보다는 우리말 저작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다. 이후 뒤랑은 진형준 교수가 관여하기도 했던 계간지 <상상>과 살림출판사쪽이 '전담'하게 되는데,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심층사회학을 위하여>(살림, 1998)이 유평근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고, 이어서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원제는 '상상력')>(살림, 1997)이 다시 진형준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다. 같은 해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도 진형준 교수 등의 편역으로 출간되고(덧붙이자면 유평근, 진형준 교수의 <이미지>(살림, 2001)도 이런 맥락상에 놓여 있는 책이다). 뒤랑의 상상력론이 한국문학에 실제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진형준 교수의 비평집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가장 최근의 평론집인 듯한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은 읽어보지 못했다).   

 

 

 

 

네번째 책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한길사, 2005). 라 로슈푸코(1613-1680)에 관한 책으론 국내에 드물게 소개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꼽아본 책이다. 이미 <고야>와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등의 저작이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는 바, 저자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문화사나 지성사쪽의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언젠가 몽테뉴를 <인생에세이>를 소개하면서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요시에의 <몽테뉴>를 꼽은 적이 있는데, <라 로슈푸코>도 보태야겠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는 라 로슈푸코는 블레즈 파스칼(1623-1662)과 동시대인이고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보다는 두 세대쯤 아래 연배이다. 저작으론 원래 <잠언집>이 유명한데, 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나무생각, 2003), <광우예찬, 군주론, 방법서설, 잠언과 성찰>(을유문화사, 1995)에 실린 '잠언과 성찰'이 있다.

 

 

 

 

끝으로 남아공의 여류 극작가 레자 드 왯(Reza de Wet)의 <러시안 트릴로지>(예니, 2005). 출간된 책들은 많지만, 손가락은 한정돼 있고 또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니 내 눈길이 '러시안'에 머문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 없다. 다만, 이 희곡집이 체홉의 주요 희곡 <세자매>, <바냐 아저씨>, <갈매기>를 토대로 그 주요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그렸다는 것밖에(그러니까 '후일담 희곡'이다). 나로선 그걸로도 충분히 흥미롭다(아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레자 드 왯, <세자매> 영화스틸, 데이빗 마멧과 그의 <세자매> 원서이다).

소개에 따르면, "<세자매2>는 체홉의 <세자매>의 마지막 장면에서 17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1920년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그 격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올가, 마샤 그리고 이리나 세 자매가 갖고 있는 열망과 희망이, 또 그들의 고귀함과 선량함 혹은 그들의 무지가 어떻게 비루해지고 전락해 가는가를 성찰한 작품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원작인 <바냐아저씨>의 8년 후를 배경으로 혈연과 애정, 결혼으로 이루어진 한 작은 집단이 사랑으로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 "<호숫가에서>는 원작 <갈매기> 4막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호숫가에 있는 집에 다시 나타난 니냐의 이야기로,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보인다."

이미 번역/출간돼 있는 체홉의 희곡들과 나란히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거기에 덧붙일 건 이번에 미국 연출가 데이빗 마멧의 번안작을 옮긴 <세 자매>(예니, 2006). "체홉을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현대 관객들에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영상미에 주안점을 두고, 공연하기에 적합한 글로 새롭게 썼다"고 하니까, 이 또한 흥미를 끌 만하다. 

 

 

 

 

P.S. 그밖에 눈에 띄는 우리 저자들의 책들은 나중에 몰아서 다루기로 하고, 세 권 정도만 덧붙여 '언급'하도록 한다. 먼저,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란 부제를 가진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아마도 지난주에 이 페이퍼를 썼다면 제일 먼저 꼽았을 책이다. 하지만 이미 주간베스트에도 오를 만큼 널리 알려진 책이기에 내 말은 군말 정도이겠다. 책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 즉 도서수집가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책의 제목인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는 한마디로 '점잖은 미치광이, 책에 미친 점잖은 사람들'을 일컫는다."는 소개대로이다. '곱게 미친 사람들'로 보면 되겠다("미치려면 곱게라도 미칠 것이지!"란 요구를 그래도 잘 수용한 사례들이라고나 할까).

이런 책소개를 수시로 늘어놓는 통에 간혹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내게도 어쩌면 '젠틀 매드니스'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말은 1800년대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가장 고귀한 질병, 바로 애서광증(愛書狂症)에 일찌감치 푹 젖어버린 분'이라고 한 표현에서 차용했다"고 하니까 그게 그리 나쁜 건가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책은 분량도 분량이고 역자들도 역자들이다.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표정훈,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연수, 출판기획자이자 번역가인 박중서 등 책에 미친 세 사람이 3년만에 번역을 마쳤다"! 우리의 경우 혈통과 무관하게 이들의 조상은 아마도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가 아니었을까? 표덕무, 김덕무, 박덕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두번째 책은 중국화인열전의 한 권으로 나온 저우스펀의 <석도>(창해, 2006), "청대 초기의 화가 '석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전기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왕손으로 태어나 승려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고 유민(遺民)화가로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서위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살려 그림과 함께 담아냈다. <팔대산인>, <서위>에 이어 출간된 '중국화인열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내가 중국 회화에 조예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다만 이전에 김용옥의 편역으로 출간되었던 <석도화론>(통나무, 1992/2002)에 등장하는 이름 '석도'가 그 '석도'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되어 꼽은 것이다. 도올의 책은 부제가 '김용옥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라고 돼 있는데, 백남준 예술론의 요체는 '예술은 사기다!'라는 것이다. 오래전에 백남준과 '플럭서스' 운동에 대한 논문을 교정하느라 참조했던 책들이 문득 몇 권 떠오른다(김홍희의 책들이 표준적이었다).   

세번째 책은 <호두까기인형>의 독일작가 E. T. A. 호프만의 <스퀴데리양>(열림원, 2006). 예전에 <스퀴데리 부인>(이유, 2002)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인데 새 번역본이 나온 것. 러시아 낭만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가이기에 관심이 가는 책이다. 비록 '세 자매'에 밀리긴 했지만. 호프만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P.S.2.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오세철 교수 등의 번역으로 1980년대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내가 산 1987년 2판은 당시로선 고가인 8,000원이어서 상당 기간 망설이다가 구입한 기억이 있다. 어제 새로 나온 번역본과 대조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부분적으로라도) 새 번역본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걸 알았다(오역들이 지적되던 예전 번역보다 못한 대목들도 더러 있는데, 이에 대한 지적은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우리말 정본에 대한 기대는 좀더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06. 01. 17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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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7 15:02   좋아요 0 | URL
<최후의 14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읽어보지 않았지만 분량이 많지 않아서 집어넣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자리에서 바람구두님이 이미 추천하셨더군요.^^

돌바람 2006-01-19 13:13   좋아요 0 | URL
글 퍼가는 걸 좀 자제하는 편인데 로쟈님 페이퍼는 나중에라도 다시 봐야겠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득불 퍼갑니다.

로쟈 2006-01-19 14:41   좋아요 0 | URL
'셀프'라서 좀 불편하긴 하지요.^^

새벽길 2006-01-20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아갑니다.

모네 2006-01-20 16:02   좋아요 0 | URL
님의 평론에서 늘 많은 도움 받고 있어요. 감사!

승주나무 2006-01-20 23:04   좋아요 0 | URL
라 로슈푸코를 보게 되는군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잠언집을 인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나이가 들면 주위에서 늙었음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아우! 십 년은 젊어지셨네요''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아요'라는 인사말도 씁쓸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혹시 '잠언과 성찰'은 예쁘게 번역이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세로 읽기로만 보아서..

로쟈 2006-01-21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새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예쁘게'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06년의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은 지난해 12월에 '막차'로 출간된 책들이다. 그래도 새해의 기분을 좀 내기 위해 첫번째 책만큼은 2006년에 나온 책으로 꼽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의 <자서전>(미메시스, 2006)이 그것이다. 원저는 'An Autobiography'(1943).

건축 분야에 문외한인지라(나는 아직 전세집에 산다) 나로선 저자의 이름이 생소한데,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구겐하임 미술관'이 그의 작품이란 소개를 보고서야 대충 지명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위의 사진 참조). 그는 "70여 년 동안 천여 점에 달하는 건축 작품을 남긴 라이트는 많은 건축가들이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손꼽는 인물"이며, "이러한 평가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현재 그에 관련된 논문과 저작만도 2천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소개를 좀더 따라가보면,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탁월한 디자인과 독창적인 이론에 있어서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하였기 때문이다. 책은 이 위대한 건축가가 자신의 삶과 사랑, 그리고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적어나간 기록으로, 건축이 자연과 소통하고 융합해야 한다는 그의 '유기적 건축 이론'과 혁신적인 양식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라이트 자신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그의 건축과 생애와 관련된 다양한 사진 자료가 함께 실려 있으며, 라이트의 작품들을 연도순으로 정리한 별책을 첨부하여 그의 작품 세계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설명보다 사실,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위대한 건축가는ㅡ필연적으로ㅡ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순간과 나날과 시대의 독창적인 해설가여야 한다"는 라이트의 말이다. 자신이 '건축업자'나 '건축기술자'가 아니라 '건축가'라는 걸 단 두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저자'로서의 자격도 충분하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의 자서전은 3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1장이 '가족과 친구들', 2장이 '일', 그리고 3장이 '자유'이다. 92세의 장수를 누리기도 했지만, 그만하면 남부럽지 않은 생애이다.

Annunciation Greek Orthodox Church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하나 정도만 잠시 감상해보자. 수태고지 그리스 정교사원(Annunciation Greek Orthodox Church)이라고 돼 있는데, 1956년작이고 위스콘신주의 와우와토사(Wauwatosa)에 있다고 한다. 세상은 넒고 사람뿐만 아니라 건축도 가지가지라는 걸 새삼 알게 해준다.

 

 

 

 

로이드 라이트에 대해서는 작년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연을 품은 공간 디자이너>(살림)라는 문고본 소개서가 이미 나와 있다. 검색해 보면 품절된 책이지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태림문화사, 1998)란 소개서도 있고. 교양을 조금 더 확대하자면, 20세기 건축에 대한 안내서들을 몇 권 꼽아볼 수 있겠다. 클라시커 시리즈의 <20세기 건축>(해냄, 2002)부터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생각의나무, 2005)까지. 나는 주로 '사유의 건축'에 관심이 있지만, 언젠가 전세살이를 좀 면하게 되면 이런 건축'작품'들에 대한 견문도 넓혀보아야겠다.

 

 

 

 

한편, 로이드 라이트가 미국 최고의 건축가라면, 스페인이 자랑하는 최고의 건축가는 단연 안토니 가우디(1852-1926)이고, 이 가우디만큼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그의 건축들만큼이나 특이한 '가우디'란 이름부터가 기억을 용이하게 할 뿐더러 이미 그에 관한 다수의 책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건축관련서를 읽는다면, 가장 먼저 손에 들어볼 만한 책들인데 이 분야 번역서들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평은 들은 바 있어서 미뤄두고 있었다. 건축 분야에도 주변에 전문 리뷰어가 있었으면 싶다.

  

 

 

 

한편, 철학이란 게 '생각의 집짓기' 혹은 '개념의 건축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만큼 '건축과 철학'이란 주제는 유구한 주제이다. 보드리야르의 <건축과 철학>(동문선, 2003), 데리다 등이 쓴 <공간의 논리>(현대건축사, 2001), 그리고 라이크만의 <들루즈건축>(접힘과펼침, 2004) 등이 그것인데, 공통점은 모두 번역이 미덥지 못하다는 것. 그간에 건축 분야의 책들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의 집짓기'란 표현을 처음 본 건  김윤식 문학선으로 나온 <작은 생각의 집짓기>(나남, 1985)에서였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듯한데, 그맘때 읽은 책들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건 박이문의 <시와 과학>(일조각, 1975). 철학과 사르트르에 대한 열정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이를 테면, '이문유치원' 혹은 '이문초등학교'?). 

지난 연말에 읽은 박이문 선생의 '자서전격' 저작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에 실린 저작 목록을 보니까 시집을 제외한 30여권의 책들 가운데 적어도 20권 이상의 책들을 사서 읽었다(나중에 박이문론을 써도 되겠다). 그런데, 이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철학적 여정의 피날레는 '둥지의 철학'이 될 거라고 한다. 아직 저자의 구상이 최종적인 형태로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경우에 '둥지로서의 철학'이 실용주의적 처세술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혹은 우리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 모두 '새'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새-되기? 새됐어?). 혹은 (애독자로서) 우려된다. 허무주의자의 '행복'이 부럽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어쨌든 건축가의 자서전을 제일 처음 꼽은 것은 새해를 설계하는 시기에 세기의 건축가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했었나 들여다보는 것도 유익한 참고가 될 듯해서이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미국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 아직 알라딘에는 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올라와 있지 않지만, "알폰소 링기스는 현상학과 실존주의, 현대철학, 윤리학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발표하고 있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이 사실을 내게 알려준 건 책을 간행한 새움출판사쪽이다(표지만 봐서는 무슨 '사진집'류가 아닌가 착각하겠다). 보도자료를 보내주셨는데, 반갑게도 나의 관심분야와 맞아떨어지는 책이기도 해서 주저없이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알폰소 링기스'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 조금 검색해보다가 나는 무릎을 쳤다. 레비니스의 <전체성과 무한>(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의 영역자인 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그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미국에 소개하고 탁월하게 주해한 선구자로 그의 사유를 계승 발전시킨 학자이다. 링기스는 또한 메를로-퐁티, 클로소프스키 등의 주요 저서들을 영역하고, 그들의 이론을 심화시키는 한편 비판적으로 경쟁하면서, 현대를 사는 육체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낯선 육체>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링기스의 저서로 삶정치(biopolitics)에 대항하는 정체성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담고 있다."(나는 '생체정치'라고 옮기는 'biopoltics'에 관한 책으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도 근간 예정인 걸로 안다. 조만간 '생체정치'는 국내 인문학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 한번 읽어봄 직하지 않은가.

 

 

 

 

세번째 책은 베른트 하인리히의 <까마귀의 마음>(에코리브르, 2005). 지난 연말에 나온 책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책인데(표지가), 600쪽이 넘는 분량이니까 '까마귀'를 제목에 달고 있는 책들 가운데 가장 두껍지 않을까 싶다(일단 그게 마음에 든다).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라고 하며, 책은 그의 대표작이라고(그의 책으론 <숲에 사는 즐거움>, <동물들의 겨울나기>가 더 소개돼 있다). 

소개를 잠시 옮겨본다: "하인리히는 미국 동북부 메인 주 숲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면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연구하고 사색하며 지내는 현장 학자이다. 특히 이 책의 주인공인 '도래까마귀'는 1980년대부터 근 20년간 저자가 여러 개체들을 자식처럼 길들이며 함께 지내왔던 새이다. 저자는 인간의 기준으로 동물의 생태를 섣불리 몇몇 개념으로 추상화하기보다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일궈나가는 동물들의 생활상과 행동 하나하나를 충실히 묘사해간다. 600쪽에 달하는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그런 실증적인 관찰과 체험의 기록이다. 그런 단단한 기초 위에서 저자는 비로소 조심스럽게 자신이 관찰한 한 숭고한 새의 마음의 세계, 즉 그들의 의식과 지능, 다른 포식동물과의 공생, 놀이, 인간과의 우정, 가족애를 긍정한다." 요컨대, 까마귀란 종의 '평전'쯤 되겠다.

저자가 동물행동학자'라고 돼 있는데, 사실 '동물행동학'의 역사가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한 콘라트 로렌츠, 니코 틴버겐, 폰 프리슈가 그 원조들이기 때문이다. 이 중 대중적으로  저명한 과학자는 역시나 <야생거위와 보낸 일년>(한문화, 2004)의 저자 로렌츠이며(창가시고기 연구로 유명한 틴버겐은 저명한 동물행동학자이자 저술가 데즈몬드 모리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프리슈의 전공은 꿀벌들의 의사소통 수단인 춤, 즉 벌춤), '야생거위'에 대한 그의 연구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조류의 '각인' 행동을 발견함으로써 유명해졌는데, 그걸 이용해서 그는 거위들의 '어미' 행세를 했다. 사진은 '자녀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 '어미' 로렌츠). 한편, <핀치의 부리>(이끌리오, 2002)는 생태학과 진화론에 걸친 저작이지만, 새를 다룬 책들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은 책이므로 같이 되새겨둔다.

이솝우화의 단골손님이기도 하지만, 문학에서 '까마귀'와 관련해서 내게 떠오르는 이름은 카프카와 포우, 두 작가이다. 카프카란 이름이 체코어로 '까마귀'를 뜻하기도 한다는 카프카(그 경우엔 '까프카'라고 해야겠다)와 "Nevermore!"란 후렴구가 유명한 시 '까마귀(The Raven)'(1848)의 저자 포우 말이다. <까마귀>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And the raven, never flitting, still is sitting, still is sitting
On the pallid bust of Pallas just above my chamber door;
And his eyes have all the seeming of a demon's that is dreaming,
And the lamp-light o'er him streaming throws his shadow on the floor;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Shall be lifted - nevermore!

그러고도 갈가마귀는 날아가지 않고 아직도 앉아 있었네.
나의 침실문 바로 위 팔라스의 창백한 흉상 위에 아직도 앉아 있었네.
그의 두 눈을 꿈꾸고 있는 악마의 온갖 표정을 담고-
새를 흝어내리고 있는 등잔불빛이 마루 위에 그의 그림자를 던져주는데
마루 위에 누운 채 떠돌아다니는 나의 영혼은 그 그림자를 떠나서는
두 번 다시 들리우지 못하리라- "이젠 끝이야"




 

 

한데, 책소개는 아직 덜 끝났다. 포우 얘기도 나온 김에 꼽는 책은 '미국 정신의 르네상스를 이끈 우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이레, 2005). 두 사람의 이름은 지난주에 정현종 시인의 글들을 읽다가도 만날 수 있었는데, 사실 나는 <자연>의 저자이면서 초월주의/초절주의 운동가/철학자 에머슨과 <월든>과 <시민 불복종>의 저자 소로우 간에 어떤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신간의 제목이 눈에 띈 건 그런 배경 때문이다.   

소개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초월주의 운동을 이끌던 에머슨은 1837년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하버드 대학에 다니던 스물한 살의 고학생 소로우를 만난다. 서로의 환경은 매우 달랐지만 소로우와 에머슨은 곧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소로우가 마흔네 살에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켰다. 에머슨은 소로우가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게끔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에머슨과 소로우 간의 25년에 걸친 '비밀스런 우정'이 탄생하게 되었고, 책은 그걸 기록하고 있다고.

"지은이는 소로우와 에머슨의 교우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정신사의 두 영웅의 모습을 추적한다. 그가 밝히는 이 둘의 관계는 보통의 친구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경쟁과 협력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질투의 시선도 교묘하게 교차한다. 언제나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했던 에머슨이 소로우의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일화, 에머슨이 영국강연 여행을 떠난 9개월 동안 그의 집에서 리디안과 아이들을 돌보는 에머슨의 역할을 하면서 소로우가 겪었던 심리적 갈등도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니까 시간이 나면 일독해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꼽는 책은 저명한 SF작가 아서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옹기장이, 2005). 원저는 'Rendezvous with Rama'(1973)이며, 발표 당시 휴고상, 네뷸러 상, 존 캠벨 기념상, 주피터상 등 주요 SF 문학상을 모두 수상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번역본은 이번에 재출간되었다). 그렇긴 하나 '장르소설'을 잘 읽지 않는 그의 소설들을 나는 읽어본 바 없고, 다만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았을 뿐이다.

사실 아서 클라크의 책을 꼽은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그건 그가 <스타십 트루퍼스>의 저자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3대 과학소설 작가로 꼽힌다는 아이작 아시모프를 떠올려주었기 때문이다. 아시모프의 대표작은 <파운데이션>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재미있게 읽은 건 그의 자서전, 즉 <아이작 아시모프 자서전>(작가정신, 1995)이다. 1995년 연말에 출간된 그 책을 나는 딱 10년전, 그러니까 1996년 정초에 읽었다(2권짜리를 읽었는데, 미진하게 끝나길래 출판사에다 '이게 끝이냐, 혹 잘라먹은 거 아니냐?'란 항의성 전화까지 한 적이 있다. 출판사 답변은 '그게 다예요'였고, 관심에 감사하다며 다른 책을 한권 보내왔었다.) 그 자서전이 현재는 절판된 듯하여 아쉽다(내 책은 아직 버리지 않았으니까 어디 박스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시간이 되시는 분들이라면 이 '3대 작가'들의 세계에 한번쯤 빠져보시길.

 

 

 

 

하지만, SF로 죽일 시간은 부족하면서 한편으론 '진지함'은 남아도시는 분들은  수전 그린필드의 <미래>(지호, 2005)나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미래>(사이언스북스, 2005)를 일독해보시길. 전자는 원제가 'Tomorrow's People'(2003)이고(부제는 "내일의 과학은 우리의 삶과 정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후자는 원제가 'The Future of Life'(2002)이다. 한해의 시작때면, 올 한해뿐만 아니라 더 먼 장래까지도 한번쯤 내다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런 인지상'정(情)'에 '지(知)'를 보태는 데 참고할 만한 책들이겠다. 비슷한 성격의 책으론 보다 중립적인 것으로는 존 브록만(브로크만)이 엮은 <앞으로 50년>(생각의나무, 2002)도 있다.

오늘자 한겨레 책-지성 섹션에는 이 브로크만과 관련한 기사가 표제를 장식했는데, '새해 아침의 생각'으로 던져진 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위험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란 질문이고, 이건 <디제라티, 디지털 시대의 파워엘리트>(황금가지, 1999),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의 저자/편집자로 유명하다는 과학저술가이자 편집자, 그리고 '세계물음센터'(www.edge.org)의 운영자인 브로크만이 1997년부터 연례행사로 벌이고 있는 연말 이벤트의 일환이라고 한다. 올해가 10번째인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몇몇 스타 과학자들의 대답을 옮겨와본다(*최근에 책으로 출간됐다. <위험한 생각>(갤리온, 2007)이 그것이다).

Q. 당신이 생각하는 위험한 생각이 있다면?  

브라이언 그린(이론물리학, <엘리건트 유니버스>·<우주의 구조>(승산))=여러 우주들이 존재한다는 생각, 우리는 ‘우주들’(multiverse)이라 불리는, 광대한 우주(universe)의 집합 가운데 하나일 뿐일지 모른다는 생각.

 

 

 

 

리처드 도킨스(생물학,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조상 이야기>(까치))=차가 고장나면 차를 탓하는 것처럼 잘못된 비난과 책임 덮어씌우기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더 진실에 가깝게 분석하는 일을 그만두고 지름길로 가는 수단으로 만들어낸 의도적 허구라는 게 나의 위험한 생각이다.

 

 

 

로드니 브룩스(로봇공학, <로봇 만들기>(바다출판사))=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비생명체가 생명체로 바뀌는 자발적 변형이 극히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것이 (지구에서) 단 한번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수십년 안에 그것이 매우 희귀하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여러 증거들을 얻는다면 어찌될까. 우리는 우주에서 완전히 외톨이 생명체일까.

 

 

 

 

다니엘 데넷(과학철학, <다윈의 위험한 생각>)=우리는 정보 홍수 속에서 익사하거나 익사하지 않을 것이다. 익사한다면, 우리는 정보 과식에 의해 심리적으로 압도돼 희생될 것이며, 상상할 수 없는 정보 과잉 앞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선조들과는 아주 아주 다른 존재가 돼 있을 것이다.

 

 

 

 

로렌스 크라우스(물리학, <외로운 산소 원자의 여행>(이지북))=세계는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

 

 

 

 

제레미 번스타인(물리학, ·<오펜하이머>(모티브북))=가장 위험한 생각은 우리가 플루토늄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왜 작용하며 얼마나 안정적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무한한 미래에 안전하게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셰리 터클(심리학, <스크린 위의 삶>(민음사))=컴퓨터 문화 안에서 살며 몇 세대 지나고 나면 시뮬레이션은 완전히 자연스런 일이 될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진정성은 가치를 잃어 한 시대의 흔적으로 남는다.

 

 

 

 

하워드 가드너(심리학, <체인징 마인드>(재인) <다중지능>(김영사))=나의 위험한 생각은 (인간의) 도덕 정신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 즉 권력욕이나 즉흥적 만족, 적의 절멸 같은 다른 동기들에 의해 도덕정신이 동원되거나 압도될 수 있다는 것.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심리학, <몰입의 즐거움>(해냄) <플로>(한울림))=정치경제가 다른 어떤 가치에 앞서 자유시장을 만능해결책으로 지니고 있다는 생각. 그게 위험한 것은 자유시장이 일부엔 해택을 주지만 대다수엔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는 지성적이고 정치적인 사기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핀커(심리학,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사이언스북스))=평균 능력과 기질이라는 측면에서 인간마다 집단마다 유전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다음 십년 동안 위험한 생각이 될 것이다.

 

 

 

 

리처드 리스벳(심리학, <생각의 지도>(김영사))=우리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존 앨런 파울로스(수학, <수학자, 증권시장에 가다>(까치)·<수학 그리고 유머>(경문사))=‘초자연적 존재는 있을까’ 하는 의문은 진부하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우리는 존재할까’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지닌 약간 통일적 실체, 그 이상의 어떤 존재일까.

 

 

 

 

린 마굴리스(생물학,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섬모를 이용해 박테리아는 먹이를 향해 헤엄치고 유해한 가스를 피해 헤엄친다. 뜨거움을 피하고 불빛을 좇는다. 그래서 우리 감수성은 박테리아 조상의 감각 섬모에서 직접 진화했다는 생각, 그래서 박테리아는 우리의 친구나 적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생각.

 

 

 

 

다니엘 힐리스(물리학, <사이언스 북>(공저, 사이언스북스))=우리 모두가 가장 위험한 생각들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

 

 

 

여기에 나의 가장 위험한 생각을 덧붙이자면, 끔찍한 일이지만 이런 소개를 올해도 계속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06. 01. 05 - 06.

 

 

 

 

P.S. 연말에 나온 '고전'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재출간된 <아미엘 인생일기>(동서문화사, 2005)이다. "19세기 스위스의 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이 40년동안 쓴 일기를 엮은 책"으로 "수양서 성격을 띠고 있는 일종의 사적인 에세이"이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고민, 개인과 사회에 대한 통찰, 인간 내면에 대한 반성과 고뇌를 받아들이는 한 개인의 치열한 모습을 담고 있다."

"1883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며, 1923년 프랑스에서 다시 발간되어 식민지 쟁탈과 영토분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인간과 생명, 윤리와 도덕에 대한 존엄성이 퇴색되어 가던 혼란기의 유럽에 큰 반향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완역되어 선보인다"니까 관심을 두어봄 직하다. 1,000쪽이 넘는 분량이기 때문에, 대충 1월부터 슬슬 읽기 시작하면 연말쯤 다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의 인생 40년을 1년 동안 압축해서 살아보는 한 가지 방식이겠다.

그게 좀 지겨우신 분이라면, 새로 나온 입문서 <사드>( 김영사, 2005)로 워밍업을 하신 다음에 <소둠 120일>(고도, 2000)로 빠지시거나 '규방'(<규방철학>)에 묻히시면 되겠다. 요컨대, '맑고 순수한 영혼' 아미엘과 함께 '타락한 영혼' 사드를! 이게 내가 특별히 알려드리는바, 2006년을 또 '갉아먹는' 두 가지 비법이다. 아미엘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사드에 대해서는 간간이 '보고'를 드릴지도 모르겠다. 소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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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6-01-06 01:20   좋아요 0 | URL
건축은 잘 아는 분야라고 할 수 없지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건축가에요. 스타.라는 말이 어울리는 건축가라고 할까요.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

로즈마리 2006-01-06 02:15   좋아요 0 | URL
퍼갈게요..^^

Tamino 2006-01-06 03:29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책을 좋아한다면 로자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로그인 2006-01-06 08: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잘 읽고 갑니다.

이네파벨 2006-01-06 18:54   좋아요 0 | URL
멋집니다.

로쟈 2006-01-07 19:1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로는 올해의 마지막 연재가 될 듯하다(그러길 바란다). 지난 3월에 31번째를 썼으니까 10개월 못되는 기간에 30편의 페이퍼를 썼다. 그 정도면 어지간하다고 생각한다(내년까지 100회 정도를 채우고 방향전환을 모색하든지 해야겠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단연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이다. 2월초 러시아에서 돌아오자 마자 한 지인에게 물어본 것이 <트랜스크리틱>의 번역 유무였을 정도로 나로선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다. 작년에 나온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에 이어서 거르지 않고 올해도 그의 주저가 번역/소개된 것이 반갑다. 일어본은 저자가 여러 차례 개작을 했으며, 영역본도 올 5월에야 MIT출판사에서 나왔다(정확하게는 2003년에 나왔다. 올 2005년에 나온 건 페이퍼백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당연이 이 페이퍼백이고. 한편, 영역자는 <은유로서의 건축>과 마찬가지로 사부 고소이다. 내가 알기에 고진의 책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포함해 3권이 영역돼 있는 듯하다). 그 책을 나는 지난 가을에 주문해서 서가에 꽂아두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트랜스크리틱>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책이다. 지금껏 이렇게 두꺼운 책을 쓴 적이 없으며, 또 이렇게 시간을 들여 쓴 적도 없다. 나는 거의 10년 동안 이 책에 몰두했다. 고치고 또 고치기를 거듭한 결과, 40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에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해서, 이 책은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어찌 독서를 주저할 수 있으랴!

부제가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인 데서 알 수 있지만, 고진의 책은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는 "모든 고정관념(외형)이나 과거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텍스트(주로 <자본론>) 속에서 마르크스를 읽는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투철한 통찰이고, 그 통찰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쉽게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소개의 말을 좀더 옮겨오면, "그는 경제학자들이 <자본론>을 단지 경제학 책으로만 본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 <자본론>에서의 '비판'이 자본주의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의 욕동(欲動, drive)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고, 나아가 그 근저에서 교환행위에 불가피하게 따라다니는 난점들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은 자본주의로부터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쉬운 출구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을 밝힘으로써 오로지 자본주의에 대한 실천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냄으로써 실천 가능성을 시사하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인데,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가 마르크스와 칸트를 결부시킨 이유이다."

즉, 그는 "자본주의 경제나 국가에 대한 계몽적 비판이나 문화적 저항에 머물러 있는 데 만족할 수 없었고, (...)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하는 일"에 나선다. 우리의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이 놀랄 만한 책은 현대 자본 제국에 대한 대항의 철학적/정치적 기초를 다시 주조하는 가장 독창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라는 꽉 막힌 상황을 타파하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현실성을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지젝의 종종 과장하는 버릇을 감안하더라도 고진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한 셈이다(참고로, 올해엔 '문화이론의 엘비스' 지젝에 관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미지는 영화의 포스터이다. 조만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고진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이것은 모험/실험을 감행하는 주장이며 그러한 '위험' 자체에 의의가 있기도 하다(오직 하이에나류의 비평가들만이 '안전한' 말들만을 늘어놓는다). 그가 책에 만족감을 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위험'과 관련될 것이다. 여하튼 고진 비평의 진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니 연초의 휴가를 물건너가서 라운딩하며 보낼 수 없는 이들에게도 진정한 '트랜스'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선사해줄 책이겠다.   

 

 

 

 

물론 이 책은 고진의 우려대로 일반독자가 읽기엔 좀 어렵다. 해서, 사전에 예비적으로 몇 권 읽어두는 게 좋겠다. 내가 고진에 입문하게 된 책은 <탐구1>(새물결, 1998)이었는데, 역시 <트랜스크리틱>의 역자 송태욱씨의 작품이다(그는 최강의 고진 번역자이다). 아주 쉽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윤리21>(사회평론, 2001)을 권하겠다. '트랜스크리틱'의 아이디어가 이미 제안되고 또 시험되고 있는 책이다(이 역시 역자는 송태욱). 물론 난해하지 않으며 죽 읽어나갈 수 있다. 두 가지 책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트랜스크리틱>을 바로 손에 집어들어도 좋겠다. <일본 정신의 기원>(원제는 <일본정신분석>),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은유로서의 건축> 등은 옵션이다(<마르크스>만을 아직 나는 안 읽었다. 참고로, 고진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윤리21>과 <일본정신의 기원>을 같이 참조해줄 것을 권했다).

만약에 이런 책들이 너무 난해하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게다가 재미마저 없다고 하면 당신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걸출한 비평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겠다(너무 크게 유감스러울 건 없다. 덕분에 지출이 많이 줄어드니까). 하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트랜스크리틱>을 '소장용'으로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두시길 바란다(그래야 양서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이상에서 이미지로 나열한 책들은 번역자 송태욱씨가 올해 <트랜스크리틱>을 제외하고도 낸 번역서들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그린비)뿐이지만(저자는 고진 사단에 속한다), 이러한 번역량 또한 경탄에 값한다. 내가 무슨 권한이 있다면 올해의 인문서 번역가상이라도 주고 싶다. 교양과학서에서 이에 견줄 만한 번역자는 이한음씨이다. 그가 올해 번역한 책들이 알라딘에서 12종 가량이 검색된다(얇은 책들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주요한 책들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도킨스의 책 <악마의 사도>와 <조상 이야기> 두 권을 옮긴 것만으로도 이한음씨 또한 올해의 번역가로서 손색이 없다. 나의 격려가 무슨 보탬이 되지는 않겠지만, 연말에 즈음하여 올 한해 두 번역자의 활약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들이 신뢰할 만한 역자들의 솜씨로 번역돼 나오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흔하진 않다(반대로 그런 책들이 엉터리 역자들을 만날 경우의 끔찍함이라니!).


 

 

 

두번째 책은 윤성우 교수의 <해석의 갈등>(살림). 부제는 '인간 실존과 의미의 낙원'이다. 알다시피 올해 타계한 철학계의 최고 거물이 폴 리쾨르(1913-2005)인바, 해석학의 권위자로서 그의 주저라 할 만한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의 해설서가 출간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해석의 갈등'은 '해석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란 뜻이다). 리쾨르 전공자인 저자는 리쾨르의 삶과 <해석의 갈등> 전후 시기의 철학을 정리줌으로써 리쾨르 입문서를 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리쾨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이기도 한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동문선,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윤교수에 따르면, "번역상의 몇몇 혼란이 옥의 티로 남았지만 리쾨르의 자전적 삶과 학문적 삶에 대한 연구서로는 더 이상의 책은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책이다. 이와 함께 읽어볼 만한 입문서로는 윤교수의 <폴 리쾨르의 철학>(철학과현실사, 2004)가 있다고.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1969)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과 함께 현대 해석학의 최고 업적으로 간주되는 고전이다(비록 논문집이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아쉬운 건 <진리와 방법>이 아직 우리말로 완역되지 않은 사실이다(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진리와 방법>의 불어본 출간을 주도한 사람이 리쾨르이다. 불역본도 완역본은1996년에야 나왔다고 하니까 한국어본이 지체되는 건 얼마간 이해가능하다. 참고로, 영역본은 두 차례 나왔다). 거기에 비하면 10권 가까이 번역돼 있는 리쾨르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교수의 번역 용례에 따라) <생생한 은유>나 마지막 주저 <기억, 역사, 망각>(2000) 등은 곧 번역되었으면 싶다(이미지들은 영역본의 것이며 후자는 일부가 올해 계간 <세계의 문학>에 소개된 적이 있다. <기억, 역사, 망각>의 러시아어 완역본은 작년에 출간됐다). 리쾨르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철학적 작업의 결산 내지 종합"이라고 규정했다는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1990;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 제목으론 'Oneself as another')도 조만간 소개되었으면 싶고.

 

 

 

 

여하튼 <해석의 갈등>에 포함된 논문 몇 편을 나는 겨울방학에 읽어볼 듯하다(나에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 있는데, 러시아어본은 완역본이 아니다). <해석의 갈등>과 함께 리쾨르의 후기 주저로 꼽히는 건 1983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시간과 이야기>(전 3권) 시리즈이다. <존재와 시간>이 20세기의 책이라면, <시간과 이야기>는 21세기의 책이 될 것이란 예언도 있을 정도인데,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후설 현상학에서 출발한 리쾨르의 여정이 '이야기(내러티브)'에 이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두 저작의 커넥션을 '존재-시간-이야기'로 묶고, 하이데거의 못다한 이야기가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상상하길 좋아한다. 시간이 곧 이야기인 이상 존재의 해명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우 문학은 철학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먼 장래를 위해 남겨놓은 나의 숙제이다.

 : Imagination and Chanc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hought of Ricoeur and Derrida (Suny Series in Intersections : Philosophy and Critical Theory)

여담 한마디. 작년에 타계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1960년대 초반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서 리쾨르의 강의 조교를 했었다(윤성우 교수의 책에는 데리다의 생년이 192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리쾨르보다 일 년 먼저 세상을 떠난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학생이던 1953년에 <에스프리>지가 주관하던 세미나에서 리쾨르를 처음 만났다. 데리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세미나에서 '역사와 진실'이라는 주제로 리쾨르의 발표가 있었는데, '명확하고 우아하고 논증력이 있고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권위가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의 참여를 보여주는' 발표였다고 한다."(69쪽) 데리다의 '제자' 박이문 선생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에는 이 시절 '강의조교' 데리다의 지도를 받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나의 스승 데리다'란 추모의 글에 실려 있다. 영어권에서 나온 연구서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철학을 비교한 <상상력과 우연: 리쾨르와 데리다 철학 간의 차이>(1992)도 출간돼 있다.

 

 

 

 

세번째 책은  들뢰즈와 레비나스 철학의 전문가인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민음사). 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책은 <차이와 타자>에 실려 있는 '아이와 초월' '일요일이란 무엇인가?' 두 편의 글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즉 일상적인 것들에 철학적 담론의 육체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읽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보다 적합한 제목은 '일상의 철학적 구원'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붙인 부제 자체가 '태어나 먹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이기에 더욱 그렇다(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을 나는 이미 여러 잡지들에서 읽었었는데, 본문의 장들 가운데서 제목을 고르자면 '셰익스피어의 유령학' 정도가 어떨까 싶다. '일상의 모험'이란 제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지만, 주제를 알자면 나는 저자가 아니라 그저 한 독자일 뿐이다!).

저자가 '모험'이라고 이름붙인 건 내가 보기엔 일상성 자체가 갖는 모험성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범박한/세속적 일상을 철학적으로 담론화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그러한 시도를 '모험'으로 간주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한편으론 저자는 모범적인 철학적 담론 바깥으로의 모험은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들은 단정하고 정연하다. 그래서 결코 '탈'나지 않는다. 가령 니체 전공자인 김진석 교수의 문장들과 비교해 보라).

그러한 시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일상(quotidien, Alltaglichkeit)'라는 식으로 우리말 '일상'에 불어와 독어의 일상을 병기해놓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저자의 작업이 일상에 대한 독어와 불어식의 철학적 사유를 우리식 일상에 번역해오는 과정이라는 걸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럴 때 우리의 일상은 '보편적' 일상으로 격상되는 것이기도 하고. 당연히 책은 철학논문 못지 않은 각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가장 먼저 나오는 각주는 M. Heidegger, Zein und Ziet,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독어본의 쪽수이다. 두번째 각주는 메를로-퐁티의 <눈과 정신> 불어본 쪽수이고. 자신의 '일상'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은 별 매력을 주지 못하겠지만(그 일상이 '철학적 일상'이 아닌 이상), 자신의 '교양'이 궁금한 독자라면 기꺼이 읽으며 경탄해볼 일이다. 저자는 동시대 젊은 철학자들 가운데 최고의 철학적 교양을 자랑하므로.

 

 

 

 

레비나스(과거엔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됐었으나 '에마뉘엘 레비나스'로 표기가 바뀌었다. 이 또한 '교양'에 속한다) 전공자로서 서동욱 교수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란 역서를 갖고 있는데, 우연찮게도 그의 은사이자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의 역자인 강영안 교수의 레비나스 연구서도 이번에 출간됐다. <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이 그것이다. 책에 실린 몇 개의 논문을 역시나 잡지들에서 읽은 바 있는데, (레비나스 철학의 강력한 소개자이자 옹호자인) 저자의 레비나스 연구를 한번 결산하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전문서 범주에 속할 듯하지만,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독해 볼 만한 책. 부록으로 레비나스의 저작과 2차문헌, 그리고 국내의 연구현황 등을 개관하고 있기에 연구자들에게는 아주 요긴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론 레비나스에 관한 책들을 준-전공자 정도의 수준으론 갖고 있는데,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하는 책은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과 알랭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이다. 두 권 다 어렵지 않으며 읽기 편한 책이다. 레비나스의 대담으론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이 번역돼 있고, 리처드 커니의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도 참조할 수 있다.  

 

 

 

 

네번째 책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 이장욱의 첫 비평집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사)이다. 그가 올해 낸 책들이 이로서 이론서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을 포함해 세 귄이 된다. 이런 부지런한 저자를 친구로 둔 덕에 나는 지난 주말 한 모임의 뒷풀이 자리에서 저자로부터 사인된 책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시, 소설, 비평, 연구 가운데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우문에 그는 '시'라고 답했다. 그는 내 기억에 언젠가 현대시 동인상을 받은 '유력한'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책은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란 부제를 달고 있으니 '시인의 시읽기'인 셈인데, 저자에 따르면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에세이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책은 요즘의 추세와는 다르게 단 한 개의 각주도 달고 있지 않다). 나는 몇 편의 글을 잡지나 시집 해설 등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한데 모아놓으니까 보기에 즐겁다(제목과는 달리 결코 우울하지 않다!). 책에 대한 리뷰는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겠지만(김춘수의 시 한편을 다룬 '구름과 장미의 나날들'에 대한 글이 가장 먼저 씌어질 듯하다) 얼핏 받은 인상은 그의 비평 혹은 에세이들이 매우 몽타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라는 지시 형용사나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아주 자주 사용한다. 그걸 종합하여 말하자면, 그의 글들은 산책자 혹은 여행자의 즉물적인 인상들의 기록처럼 읽힌다. 그 인상들이 개념어들을 통해 반추될 경우에도 그 과정은 산책자/여행자의 보폭과 리듬을 유지한다. 그는 멀리 지나가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시와 시구들을 말하고 있는 것(책갈피에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저자의 스냅사진이 실려 있다). 그게 내가 받은 인상이다.     

 

 

 

 

시인 이장욱만큼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비평가 권혁웅 교수가 '신화에 숨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란 부제를 단 신간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문학동네)를 출간했다(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권혁웅의 가장 좋은 책이다). 지난번에 낸 비평집 <미래파>를 내가 아직 다 읽어보기도 전의 일이다(내가 읽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책을 써내는 이들이 나는 싫다!). 비평가 이장욱이 '다른 서정'이라고 부르는 최근 시의 경향들에 대한 비평가 권혁웅의 호칭이 '미래파'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지는 책은 '태초에'라니!

저자에 따르면, "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 모든 신화는 사랑이다. 한 사람의 꿈을 움직이는 힘, 한 편의 시를 추동하는 힘도 그렇다. 이것은 사랑의 산화가 아니라 신화의 사랑에 관한 책이다. 신화에 숨은 몸의 논리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신화에 관한 정신분석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간은 '정신분석서'로 분류되어야 하겠다. 서동욱 교수의 책과 같이 나란히 서재에 꽂아놓으면 '일상과 신화'라는 그럴 듯한 풍경이 완성될 듯하다. 정신분석이란 말이 나온 김에 참고로 지적하자면,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정신분석>(민음사, 1999)의 원제가 'Au Commencement E'tait L'amour', 즉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이다. 신간의 제목을 거기서 빌어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지막 다섯번째 책은 강유원의 서평집 <주제>(뿌리와 이파리)이다. 소개에 따르면, "'회사원 철학박사'로 잘 알려진 강유원이 그간 써온 서평들을 여섯 주제로 묶어 펴낸, 본격적인 주제서평집이다. 저자의 세 번째 서평집이기도 한 이 책은 다른 일반 서평집들과 달리 단순한 서평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길 안내에 특히 중점을 둔 서평집이다."  

데뷔 서평집인 <책>(야간비행, 2003) 이후 이제 2년 남짓 가량 되었지만,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혹은 '교양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군더더기의 말은 불필요하겠다. 한데, 이번에 나온 <주제>가 세번째 서평집이라면, 두번재 서평집은 <책과 세계>인가(아니면 <몸으로 하는 공부>)? 사정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분명히 내 돈 주고 산 책인 <책>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러시아에 다녀온 이후로 보지 못한지라 나는 <책과 세계>(살림, 2004)에 대한 몇 마디 적어본 전력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주제> 또한 읽을 만할 거라고 짐작한다(몇몇 글들은 그의 블로그 등에서 읽은 듯하다).

다시 소개의 글을 옮기자면,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교양이란 '앎과 삶의 일치'에 있다.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주제서평의 '주제'는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을 천착하고 있다." 즉, 그의 저작 혹은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진정한 교양인' 되기이며 그 권고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했지만, 그건 다른 말로 앎(머리)과 몸의 일치이기도 하겠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뜻하는 바가 그게 아닐까? 이때 '몸'은 추상적인 몸이 아니다. 그가 '근육질적인' 문체를 갖고 있다고 언젠가 적었지만, 그의 사유를 담고 있는 문장들은 잘 단련된 바디빌더의 몸을 연상시킨다. 주로 뼈와 물렁살로 이루어진 나와는 다른 차원의 글이고 몸인 것. 한데 이로써 형성되는 '교양인의 자세'는 김규항의 'B급 좌파적 자세'이면서 동시에 영화 <공공의 적>에서 뱃살 늘어진 형사 설경구가 아닌 근육질의 냉혈한 이성재를 더 닮은 자세이기도 하다. 그 또한 자본주의의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Money talks!)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철저하게 견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류적' 앎이고 진리라면, 그와의 차별화를 위해서 당연히 요청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결단코 타협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 그게 근육질의 교양이며 혁명적 교양이다(강유원의 글쓰기가 고압적인 태도를 동반하는 것은 그러한 '교양'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비록 강유원의 서평들에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바탕이 물렁한 데다 평소 운동과 인연이 없는 나로선 그냥 <말랑말랑한 힘>과 <물렁물렁한 책>들에 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빵들을 나는 좋아한다. 언젠가는 그 '말랑말랑한 빵에게' 바치는 시도 썼으니 이런 식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먹어보면 안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살짝, 그렇다, 살짝 구워진다는 !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밀은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는다, 살살 녹아난다. 비밀은 사랑스럽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여기저기서 주무르고 달군다. 더러는 태우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살짝, 그렇다, 살짝 미쳐간다는 !

그것이 또한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침내 말랑말랑한 빵이 구워졌다.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내가 아직까지 믿는 것은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이다. 가령 티베트의 수도이자 라마교의 성지 라싸의 사원을 향해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그러니까 몸의 다섯부분(五體) 즉 이마, 오른쪽 팔꿈치, 왼쪽 팔꿈치, 오른쪽 무릎, 왼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수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리는 여정을, 하지만 환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감내하며 걸어가던/던져가던 티베트 어린아이들의 발걸음 같은 것 말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하지만, 삶은 앎의 극한이다. 앎은 삶의 궁극적인 모순에 가닿기엔 너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것을 앎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해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는 이래저래 멀고도 멀다. 강유원의 길이든, 티베트 아이들의 길이든 말이다. 그저 오늘도 읽고 또 읽을 따름이다...  

05. 12. 20.  

 

 

 

 

P.S. 올해의 마지막, 더불어 최악의 스캔들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황우석 스캔들'이다. 조만간 그가 과욕을 부린 국민 과학자였는지 희대의 사기꾼이었는지는 밝혀질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사태 때문에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면, 단연 <골렘>(새물결)이다. 원제는 'The Golem: What You Should Know about Science'(1993), 그러니까 '과학에 대하여 당신이 알아야만 하는 것'. 소개에 따르면, "골렘은 유대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온순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언제라도 미쳐 날뛸 수 있는 존재이다. 저자들은 과학은 골렘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흥미진진한 일련의 사례들을 통해 이런 구축 - 관측과 실험 - 이론의 확증이라는 전통적인 과학상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친다."

보다 구체적으로 "책은 과학적 연구 결과의 수용과 검증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던 7가지 사례들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사례 중에는 상대성 이론 검증 실험 같은 유명한 연구에서부터, 상온 핵융합처럼 신문의 과학면에서 봤음직한 연구 등 다양한 사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과학의 '뒷골목'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인문학의 '지적 사기'를 크게 떠들어댄 과학자도 있었지만, 돌이켜보건대 인문학의 사기는 '과학적 사기'에 비할 바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래저래 인문학은 과학에 미달이다. 모자란 것들 같으니라구!.. 

 

 

 

 

P.S.2. 내친 김에 개인적으로 꼽은 2005년의 책 다섯 권을 골라둔다. 기준은 기억해 둘 만한 책들 가운데 내가 갖고 있는 책으로 읽었거나 읽고 있는 중인 책으로 한정했다. 도정일, 최재천 교수의 <대담>, 가라티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은 최근에 내가 '지지'를 표명했던 책들이다. 김윤식 교수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이나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는 내가 좋아하는 '생애전'들이다. 두 사람의 생애는 각각 문학과 철학으로 변형되었다. 문학으로서의 삶, 철학으로서의 삶.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걸 새삼 한번 더 기억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루소의 자전적 <고백>. 물론 한번 언급한 바 있듯이 복간본 번역이다. 많은 고전들이 올해 번역돼 나왔지만 지금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건 이 <고백>이다. (어줍잖은) '픽션'에 대한 선호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면(하물며 판타지라니요!) 확실히 늙어가는 모양이다(곧 가속도가 붙을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그런가?..

P.S.3. 거기까지 쓰고 집에 가는 길에 <트랜스크리틱>의 서문을 읽었는데, 부실한 교정이 눈에 띄어 적어둔다. 역시나 생몰연대에 관한 것. 16쪽에서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생몰연대가 '1908-65'로 돼 있는데, '1809-65'의 오타이다. 오타야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왜 체크가 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19쪽에서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의 생몰연대가 '1924- '라고만 돼 있는데, 그는 이미 지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일어본에 오기돼 있는 걸까?). 좋은 번역은 좋은 교정을 수반할 때 더욱 빛이 난다. 좀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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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20 11:00   좋아요 0 | URL
<탐구1>은 품절이군요. <윤리21>부터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소장용으로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두란 말씀에 좀 웃었습니다. ^^

blowup 2005-12-20 11:30   좋아요 0 | URL
저두요. 소장용으로라도 구입해서 출판 문화에 기여할까 싶습니다.

딸기 2005-12-20 16:52   좋아요 0 | URL
소장용 책 리스트에 올려놓을께요.

페일레스 2005-12-20 18:29   좋아요 0 | URL
<탐구 1>은 절판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재빨리 구입해 두었는데, 다른 것들을 읽다보니 늦어지고 있네요. 로쟈님 페이퍼에 힘입어 고진의 책을 독파해 보고자 합니다. <트랜스크리틱>도 소장용이 아닌 독서용이어야 할텐데... 음.

로쟈 2005-12-21 13:02   좋아요 0 | URL
그럼, 그게 다 바람구두님이?^^

니브리티 2005-12-21 15:32   좋아요 0 | URL
옆길로 새는 얘기지만 최승호의 <물렁물렁한 책> 뒤의 해설(누가 썼더라)에서 물렁물렁하다...를 '끈적끈적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더라구요. 근데 어감상으로도 그렇고, 실제 사용하는 어의로도 그렇고 전혀 통용되지 않는 단어였는데...

세밑 잘 보내세요....

2006-01-01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sVida 2010-09-18 23:36   좋아요 0 | URL
일상의 모험 읽고 있는데 리뷰가 로쟈님꺼 밖에 없네요~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 책 제목 "존재와 시간" 독어 철자가 "Sein und Zeit" 로 고쳐져야 할 것 같아요~
 

이 해가 가기 전에 두 차례 더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연말에 책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지지만 않는다면). 그러니까 내겐 패 두 장이 남아 있는 셈이다. 조금 아껴둘까 했지만, 그 중 하나를 펴보이는 것은 순전히 패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 때문이다. 그녀의 선집이 첫번째 책들이며, 올해는 그녀의 사망 10주기가 되는 해이기에 선집의 출간은 좀더 의미 깊어 보인다.

 

 

 

 

이번에 선집으로 나온 건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민음사)을 포함해서 3권이다. 그 중 표제작은 올초인가 <세계의 문학>에 소개되었기에 출간이 임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3권이 한꺼번에 나올 줄을 몰랐다. 2003년에 <낯선 승객>(해문출판사)과 <태양은 가득히>(동서문화사)가 번역된 바 있기에, 제법 하이스미스 컬렉션의 꼴이 갖추어진 셈이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알랭 들롱이 주연했던 르네 클레망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많은 것이다(아찔한 영화 중 하나이다). 그리고 사실, 내가 접해본 하이스미스도 영화 <태양은 가득히>가 전부이다(그녀가 원작자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이고). 당신도 사정이 비슷하다면, 초급 하이스미스를 뗀 것이 된다.

 

 

 

 

중급 하이스미스는 <낯선 승객>이 히치콕의 영화 <스트레인저>의 원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그녀의 첫 장편인 <낯선 승객>은 "1950년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그게 얼마전 출간된 스포토의 <히치콕>(동인, 2005)에서는 <열차의 이방인>으로도 번역된 <스트레인저>(1951)이다. 그리고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지젝 등의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지젝이 자주 언급하며 높이 평가하는 현대 작가의 한 사람이다(덕분에 나로서도 친숙해질 수 있었던 이름이다). 이후 하이스미스가 1955년 발표한 <재주꾼 리플리>는 그녀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으로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로 두 번 영화화되었다. 이런 정도까지 카바하면 하이스미스 중급이 되겠다.

그리고 이제 고급 단계로 진입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건 이번에 나온 선집들을 읽는 일이다. 다시 소개를 옮기면 그녀는 "1961년 이후에는 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단편 작가로 활동했는데, 영어로 쓴 작품이 독일어로 먼저 번역.소개될 만큼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하이스미스는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두 사람은 112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정확히 같은 날, 같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 고국보다 유럽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로 기억하는 것이다. 위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최근간 포우 작품집, 포, 젊은 날의 하이스미스, 노년의 하이스미스이다. 젊은 날의 하이스미스는 패트리샤 카스 못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지만, 노년의 모습은 실례가 아니라면, <미저리>의 케시 베이츠를 떠올리게 한다(나이란 그런 것이다). 고급 하이스미시언이라면, 빔 벤더스의 영화 <미국인 친구>(1977)이 리플리 시리즈 중 한 편인 <리플리의 게임>(리플리스 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어야겠다. 얼마전 개봉되었던 존 말코비치 주연의 영화 <리플리스 게임>(2003)도 같은 원작의 영화(두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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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실련던 소개 기사를 잠시 발췌해 보면, "이탈리아 여성 감독인 릴리아나 카바니가 2004년 연출한 <리플리스 게임>은 리플리 시리즈의 후기작으로 선과 악의 통념에 대한 반기라는 점에서 감독이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왔던 관심사와 원작의 주제가 맞아 떨어진다. 여기에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이 귀족처럼 우아한 말투로 섬뜩한 범죄자 역할을 능란하게 해내는 좀 말코비치의 탁월한 연기다. 알랭 들롱, 브루노 간츠 맷 데이먼 등 역대 리플리들이 하나같이 독특한 매력을 보여줬지만 <리플리스 게임>의 존 말코비치처럼 배우의 카리스마에 많이 기댄 리플리도 없을 것 같다."(비디오는 언제 나오나?) 

한편, 클로드 샤브롤의 <올빼미의 울음>(1987) 등도 하이스미스 원작이라고 한다(아직 국내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이스미스의 소설들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인정받으며 유럽 감독들에게 인기가 더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겠다. 이 겨울의 추위가 덜 매서워 보인다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쿨한' 세계에 한번 빠져보시길...

두번째 책은 역시나 미국 작가 윌리엄 버로스(버로우즈; 1914-1997)의 <네이키드 런치>(책세상).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 의해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던 작품(1991)의 원작. 영화의 소개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몽환적 결합을 그린 환타지물"로 돼 있다. 마약과 환각 등을 소재한 걸로 아는데, 그러한 경향은 작가가 속했던 1950년대 비트 제너레이션 문학(비트 문학)의 일반적인 성격을 이룬다(비트 세대의 대표적인 시인은 앨런 긴즈버그이다). <네이키드 런치>는 그 대표작이고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 소설에 뽑혔던 작품. 요컨대, <네이키드>는 (수치스럽게도!) 이젠 정장한 '클래식'의 반열에 들어간 작품이다.

 

 

 

 

세번째 책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급부상한 박찬욱 감독의 문집 두 권이다. 보다 관심을 끄는 건 <박찬욱의 몽타주>(마음산책). 같이 나온 <박찬욱의 오마주>는 소개대로 이전에 나왔던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삼호미디어, 1994)의 개정증보판이다. 나는 그 책을 10년쯤 전에 사서 읽은 듯하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이나 <3인조> 같은, (보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를 아주 '쿨'하게 만들었던 영화들을 찍은 '너무 아는 게 많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예리한 감식안의 영화마니아의 모습을 그 책에서는 읽을 수 있었다(정성일의 평문들보다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개정증보판이라고 하니까 이후에 더 쓴 내용들이 얼마나 포함된 건지 모르겠다.

<내 인생의 영화>(씨네21, 2005)에 실린 꼭지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박찬욱은 필력으로도 영화인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위인이다(<씨네21>에 칼럼을 연재했던 김지운 감독도 책을 낼 만한 위인이고). 그걸 나에게 각인시켜준 게 언젠가 한 신문에(경향신문이었던 것 같은데) 실렸던 그의 칼럼이었다. 이후에 나는 그의 칼럼/산문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길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생각보다는 빨리 충족되었다. 이 또한 <올드보이>의 힘이 아닌가 싶다. 나는 작년 11월말에 모스크바통신에서 <올드보이>의 러시아 개봉에 맞춰 이루어진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옮겨놓은 바 있는데, 혹 생소하신 분들이 있을까 해서 여기에 발췌해놓는다(<아피샤>는 러시아의 공연전문 잡지이다). 나의 군더기말들은 빼고.  

 

 

  

 

아피샤: 서구에서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천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찬욱: 나로선 자신에 대해 쉽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비록 내가 칸느에서 돌아왔을 때 나에 대한 주변의 태도가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팬사인회에 초청됐고, 대통령은 나에게 공로 메달(훈장)을 수여했다. 솔직히 말해서, 전작(<복수는 나의 것>)을 찍었을 때는 나를 죽이려고들 했으니까, 사정이 좋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아피샤: 누가 죽이려고 했는가?

박찬욱: 관객들이다. 물론 말로, 비유적으로 그랬을 뿐이지만, 어쨌든 유쾌하진 않았다. 

아피샤: 원작만화인 <올드보이>는 원래는 다른 감독이 찍으려고 한 걸 당신이 그 프로젝트를 가로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박찬욱: 처음 듣는 얘기다. 나는 만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올드보이>는 제작자가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준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찍도록 한 건 순전히 그의 아이디어이다.


아피샤: <올드보이>가 우연히 칸느의 경쟁부문에 올랐다는 게 사실인가?

박찬욱: 그렇다. 영화사에서는 일반적인 제작 절차에 따라 영화를 (칸느에) 보냈을 뿐이다. 경쟁부분에 오른 건 정말로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기쁜 일이었다. 알다시피, 나의 전작들은 (경쟁부문은커녕) 칸느의 비경쟁부문에도 오른 적이 없다.

아피샤: <올드보이>의 두 주인공은 거의 동갑내기이다. 하지만 복수자를 연기한 유지태는 희생자를 연기한 최민식보다 두 배 정도 어리다. 왜 그런가?

박찬욱: 그건 아주 특별하다. 눈에 띌 정도이기 때문에 너무 거친 설정인지도 모른다. 복수자의 경우 40은 확실히 넘었을 텐데, 실제로는 훨씬 젊어 보인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한 가지 목적에만 걸 경우 그렇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삶을 사는 게 아니므로 늙지 않는다. 복수자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아니며, 그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간주한다. 우리는 한 장면을 찍었었는데(최종 버전에서는 빠졌다), 거기서 복수자는 오대수와의 마지막 대화장면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제스처와 억양을 수정하고, 대화에서의 이런저런 화제 전환시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미리 준비한다. 이 장면을 이후에 잘라냈는데, 관객들이 마지막의 결정적인 대화장면에 대해서 미리 예측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기까지 한데, 왜냐하면 그 장면이 많은 걸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보통의 사람은 특히 극한적인 상황에서 유창하게 말하지 못한다. 우물우물거리거나 더듬거리고 같은 말을 10번은 반복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모르는 걸 알고 있을 때에라도 마치 시간을 지배하듯이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한 스웨덴 작가가(이름은 잊어먹었는데) 학교에 관한 단편을 쓴 게 있는데, 거기서 교사들은 학생들의 생활을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통제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신이 된다. 복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마치 감독처럼 자신의 희생자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사전에 알고 있다. 그래서 오대수가 복수자의 계획을 거스르고자 할 때 그는 신에게 반항하는 인간에 견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아피샤: <올드보이>는 원칙적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될 수 없는 영화이다. 그런데도 왜 해피엔드로 끝냈는가?


박찬욱: 그게 해피엔드라고 할 수 있는가.


아피샤: 하지만 주인공이 행복한 표정으로 웃지 않는가?

 

 

 

 

  

 

 

 

  

박찬욱: 그는 웃는다고 볼 수 없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프샤(*이 단어는 대문자로 돼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등장인물인가? 영화를 몇 번 봤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웃는 모습이 기억나는가? 그건 망각의 기쁨이다. 그에겐 아무런 좋은 일이 없다. 나는 관객에게 위안을 준다거나 영화의 끝에 가서 낙천주의를 주입시키고자 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 물어본 거라면.


아피샤: 당신이 영화를 찍을 때 모든 일을 아내와 상의한다는 게 사실인가?


박찬욱: 그렇다. 모든 단계에서 나는 아내의 의견을 반드시 묻는다. 아내는 매우 분별력이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고, 영화와는 아무런 관련도 갖고 있지 않다. 주부로서 그녀가 아는 건 생활이다. 때문에 그녀의 충고는 나에게 아주 소중하다. 감독의 일이란 건 신의 일과 닮은 데가 있어서, 일에 몰입하다 보면 정말로 자신을 신이라고 자만할 위험이 있다. 감독들은 종종 유머감각을 잃고 아주 바보스런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아내는 내가 이런 걸 피하도록 도와준다.


아피샤: 아이들이 몇 살 정도가 되면 <올드보이>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박찬욱: 당신의 아이는 몇 살인가? 나의 딸아이는 지금 10살이다. 아이가 15살이 되면, 반드시 보여주겠다.

 

아피샤: 서구의 비평가들은 당신의 영화에서의 물리적 폭력이 강한 인간적 감정의 비유(=은유)라고들 쓴다.


박찬욱: 그건 헛소리다. 영화가 마음에 들면, 비평가들은 문화론적인 설명을 시도하려고 애쓴다. 만약에 그게 잔혹한 영화라면 그들은 아무리 환영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것일지라도 자기 사회의 도덕적 표준과 일치하는 어떤 걸 가져와서 그걸 희석시키려고 애쓴다. 사회는 폭력을 단죄한다. 때문에 그들은 폭력이 비유라고 쓰는 것이다.


아피샤: 당신이 비평가였을 때에는 같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


박찬욱: 아니다.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나는 정직한 비평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아피샤: 당신은 <올드보이>의 미국판 리메이크를 찍을 저스틴 린을 만나 보았는지?


박찬욱: 나는 리메이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와 제목에 대한 판권을 샀을 뿐이다. 나는 저스틴 린의 영화를 한편도 본 적이 없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아피샤: 미국판의 주연도 최민식이 맡는다는 소문이 있다.


박찬욱: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벤 에플렉이나 누군가 미국에서 인기 있는 배우를 고를 것이다.


아피샤: 당신은 정말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라면 납치가 그렇게 나쁜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박찬욱: 나에 관한 무슨 인터뷰를 읽어봤는가? 아마도 내 말을 잘못 번역한 것 같다. 종종 내 말이 잘못 옮겨지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 거다.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을 납치한다면 그게 아주 무용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 자기인식과 개인의 어떤 예기치 않은 능력의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아피샤: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에서 당신은 자본주의 일반과 그 한국적 모델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했었다.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박찬욱: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 특정한 결함들을 들춰낼 뿐이다.


아피샤: 그 말은 당신이 예술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믿는다는 것인가?


박찬욱: 물론이다. 예술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의 한국에 대해서 성급하게 폭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비교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1992년까지 우리에겐 독재정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최초로 선출된 민간 대통령에 의해서 우리 나라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때서야 나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한국 감독들은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갖게 됐다.

 

아피샤: 타란티노는 한해 내내 <올드보이>의 광고만 하고 다녔다. 어딜 가든, 어디에서건 이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라고 열변을 토했다. 물론 당신이 그의 찬사에 대해서 응답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킬빌>을 보았는지? 두 사람의 영화가 아이디어상으로 서로 가깝다고 느끼지는 않는지?


박찬욱: 나는 1부만 보았다. 매우 아름다운 영화이다. 하지만, <올드보이>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아피샤: 어떻게 아직까지 <킬빌2>를 볼 수 없었는지?


박찬욱: 나는 대체로 영화들을 많이 보지 못한다. 일이 너무 많다.

 

아피샤: 그럴 만하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 생각엔 어째서 당신을 포함해 타란티노와 라스 폰 트리에 등 몇몇 거장들이 거의 동시에 복수에 관한 이런저런 영화들을 찍었다고 보는가?

 

박찬욱: 복수란 건 촉매이다. 그 속에서 인간이 멋지게 드러난다. 거기에는 언제나 한 인간을 파괴한 어떤 객관적인 원인, 사건이 선행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가장 솔직하고 가장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문명사회는 악에 대한 응징의 수단으로서 개인의 복수를 부정한다. 하지만, 복수에의 열망이 그 때문에 없어지는 건 아니다.


아피샤: 복수에 관한 당신의 3부작 중 마지막 편은 언제 나오는가?

 

박찬욱: 지금 막 찍기 시작했다. 생각에는 2월말이나 3월초까지는 끝내려고 한다. 이번 영화는 한 여자의 복수에 관한 것으로,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의 모티브와 플롯을 합금한 것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한 여자가 15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그리고 풀려나서는 그녀가 겪은 일에 책임이 있다고 간주한 남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아피샤: 3부작을 끝낸 뒤의 작업에 대해서는 이미 정해두었는가?

박찬욱: 뱀파이어에 관한 영화이다. 제목은 <살아있는 악>이 될 것이다.

 

아피샤: 자신의 영화의 주제(혹은 플롯)에 대해서 아주 빨리 고안해낸다는 것이 사실인가?


박찬욱: 그건 비교의 문제이다. 가령 김기덕은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작업한다. 그와 비교한다면, 나는 스탠리 큐브릭이다.

 

아피샤: 당신은 큐브릭을 좋아하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감독들은 누구인가?


 

 

 

 

 

    

 

 

박찬욱: 한국 감독 중에 김기영이라고 있었다. 백과사전에는 그가 한국 쓰레기 영화의 왕이라고 씌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아주 대담하고 훌륭한 영화들을 찍었다. 그는 용기있고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였다. 영화를 찍을 기회를 잃게 되었을 때, 그가 살던 집에는 화재가 일어나고 그는 불길에 타 죽었다.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닮고 싶지는 않다.

 


 

 

 

 

 

  

 

 

아피샤: 그럼 당신이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박찬욱: 가능하다면, 마르 베르이만을 닮고 싶다...

 

 

 

 

 

 

 

  

 

네번째 책은 박찬욱 감독도 좋아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를 해설하고 있는 홍대화의 <도스또예프스끼>(살림)이다. 박찬욱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유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유머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면서 그의 문학적 교양을 인정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아나키스트들의 집단 살인 장면은 <악령>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감독은 고백한 바 있다(말이 나온 김에 장석원의 첫시집 <아나키스트>도 신간이다).

 

 

참고로, 발레리 카프리스키가 주연한 안제이 줄랍스키의 영화 <퍼블릭 우먼>(1984) 또한 원작은 따로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주된 모티브로 하고 있는 영화이다. 줄랍스키는 그 이듬해에 소피 마르소를 주연으로 하여 <격정>(<성난 사랑>으로도 출시돼 있다)을 찍었는데,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고전으로 치자면, 세르반테스의 <돈끼호떼>(창비사)가 민용태 교수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됐고, 작년에 서거 100주년을 맞았던 안톤 체홉의 <4대 장막전>이 실제로 작품을 국내 무대에 올렸던 연출가 전훈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이 번역의 의의는 레제드라마가 아닌 공연텍스트로서 '체홉'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겠다). 그리고 20세기 영국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인 E. M. 포스터 선집으로 나온 두 권 <전망 좋은 방>(열린책들)과 <모리스>.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들과 함께 컬렉션을 만들면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오랜만에 출간된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책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조르부 바타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 지배 바깥의 공동체, 즉 조직, 기관, 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 장-뤽 낭시의 논문 '무위(無爲)의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진 모리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와 그에 대한 낭시의 재응답인 '마주한 공동체'를 함께 싣고 있다. 중심의 부재 또는 빈 중심으로 현시되는 역설적이고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내재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는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을 프랑스 철학계의 두 거목이 함께 모색하는 이 책은 20세기 이후 '공동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며 멀리 나아간 논의를 담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지만, 정치제도와 공동체라는 화두는 내년에 새삼/새롭게 숙고되어야 할 중요한 테마이다. 블랑쇼/낭시의 책은 우리의 사고를 점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 블랑쇼에 대해서는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가 유용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레비나스가 쓴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 2003)이 소개돼 있다(사진은 두 사람, 블랑쇼와 레비나스이다). 그의 비평서로는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0/1998)과 <미래의 책>(세계사, 1993)이 번역/소개돼 있다. 소설로는 <죽음의 선고>, <알 수 없는 사람 또마> 등이 금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었다. 한편, 2003년 블랑쇼의 죽음 이후에 한 대학원신문에서는 블랑쇼 특집을 꾸미기도 했었는데, 그때 이번에 출간된 책의 역자가 쓴 글을 잠시 옮겨본다.

 

-자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장례식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블랑쇼의 장례식(그의 사망 나흘 후인 2003년 2월 24일)에서도 장문의 추도문을 낭독하였다. “어떻게 바로 여기서, 이 순간에, 이 이름, 모리스 블랑쇼를 말하면서 떨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로 시작하는 추도문은 블랑쇼를 읽었던 많은 독자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느꼈을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블랑쇼는 단순히 한― 아마도 위대하다고 불러야 할 ― 철학자도, 작가도, 문학비평가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어떤 문예, 사상의 사조와 흐름을 주도하는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목소리였다. 벌거벗은, 초라한, 무력한, 사라져 가는 그러나 그래서 찬란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언제나 어떤 과거보다 더 먼 과거로부터 들려왔지만 또한 어린아이의 속삭임이기도 했고, 또한 절규이기도 했다. 같은 헐벗은 어린아이들, 즉 삶과 사회체제의 잔인함에 고통 받는 타자들의 숨결을 듣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없는 절규….

-블랑쇼는 살아 있을 때, 은둔 때문에 오히려 ‘알려진’ 작가였다. 각종 매체(신문, 방송,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를 문학이 비켜 나갈 수 없게 된 시대에, 각종 매체에 의존해 얻을 수 있는 선전효과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블랑쇼의 은둔은 오히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의 은둔은 그의 사상을, 그의 글쓰기, 그의 작품을 신비화시켰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 신비화 가운데 그의 작품이 오해될 것이라고, 그리고― 다음의 말을 어떠한 감정의 과장도 없이 쓴다 ― 그 신비화에 블랑쇼가 저항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블랑쇼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 1인칭 ‘나’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거리 아무데나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자들, 하지만 ‘헐벗은 어린아이들’로서의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들,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들, 어떠한 1인칭의 권력도 소유하지 못한 자들, 다만 헐벗음으로만 그 권력을 거부하고, 그 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던 자들. 필요하다면 결국 자신의 사라짐·지워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제 3자들, 3인칭의 인간들, 다시 말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타자들. 

-블랑쇼가 거부하고자 했던 1인칭의 권력(그 권력을 그가 의도 가운데 원했을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은둔을 통해, 나타나지 않음으로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을 그에게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신비화된 1인칭 블랑쇼로부터 그의 작품을 읽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다만, 단순히, 그의 작품에서 3인칭의 인간들, 타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에, 작품으로부터 그를 이해하는 데에, 작품으로부터 한 개인 블랑쇼의 은둔·지워짐이란 3인칭이 말하기를 원했던 그에게는 바로 글쓰기의 실천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단어들, 문장들 사이로 사라지기를 원했고, 이제, 그의 죽음 이후로, 그 사라짐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과제는 그의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블랑쇼는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중 아무나, “‘그 누군가’가 죽는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 말은, 정확히 하이데거에 반대해, 죽음으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의 본래성을 회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나‘를 이름 없는 자의 비본래성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죽음으로의 접근, 즉 ‘나’아닌 타자가 되기, 비인칭적 실존에 기입되기, ‘내’가 통제할 수 없는―의미로, ‘나’의 존재의 ‘의미’로 포착할 수 없는― 익명의 실존으로 되돌아가기. 그렇게 귀결되는 블랑쇼의 죽음에 대한 사유와 그 자신의 죽음 사이에 어떤 연결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블랑쇼가 마지막으로 써서 출간한 작품에 붙인 제목은 <나의 죽음의 순간>(1994)이었다. 거기서 그는 나치의 총구와 마주한 그(또는 나)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를 대신해 이 가벼움의 감정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갑작스럽게 다가온, 물리칠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죽는―죽을 수 없는. 아마도 황홀경. 차라리 고통 받는 인간성에 대한 연민의 감정, 죽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 그때부터 그는, 은밀한 우정으로, 죽음과 맺어졌다.” ‘나’의 죽음, 심각한 것이 아님, 정확히 말해 심각할 수 없음―수동성으로서의 죽음의 체험―, ‘가벼움’ 또는 아니면 ‘행복감’. 우리들 중 누구도 블랑쇼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의 옆집에 살던 한 대학생이,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언론·방송에 그의 죽음을 알렸고, 그에 따라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을 뿐이다. 

-위대한 한 작가의 죽음인가? 그의 죽음은 의미심장한 것인가? 아마, 다만, 단순히, 우리들 중 아무가 죽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 안에 있는 ‘내’가 죽어나간 것이고, 한때는 ‘나’(지금 쓰고 있는 필자, 내가 아니라 그의 독자 중 아무나 될 수 있는 ‘나’)를 스쳐갔던 시간이 이제 결코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아니 죽어버린 것이다. 결국 블랑쇼의 죽음이 전해주는 감정은 ‘나’의 어떤 부분이 도려내어질 때 다가오는 통렬함이다. 그러나 그 통렬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내’가 잘 아는, ‘나’와 가까운 자였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가 결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무엇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통해 전달되는 우정으로, ‘나’로 하여금 ‘우리’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의 글쓰기’ 또는 ‘우정의 글쓰기’, 그 글쓰기를 그의 죽음과 별개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나마 다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 가장 깊이 몰입했던 한 비평가의 죽음은 또한 그의 새로운 삶이기도 하다. 텍스트로서의 삶. 우리에게 그 삶이 주어졌고, 우리에겐 지금 그걸 읽을 '자유'가 있다...

 

05. 12. 06. 

 

P.S. 개인적으로 바타이유와 블랑쇼 읽기는 내년의 과제 중 하나이다. 그의 책들이 '고아원'에 보내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내년엔 아마 벤야민이나 들뢰즈만큼 이들의 이름을 자주 들먹이게 될 것이다. 책이란 게 도대체가 읽어치워야지만 버릴 수라도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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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2-06 11:53   좋아요 0 | URL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관심만 잔뜩 있고( 아마, 책도 잔뜩 있는) 작가였어요. 선집이 나왔다니 반가운 소식이네요. 이번기회에 읽어봐야겠습니다. 2005년 마지막 주문이 되길 바라며.

2005-12-06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2-0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7 14:4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마지막 주문'이 되시길!..

롯데명품위즐 2005-12-10 14:51   좋아요 0 | URL
이 자리에 써도 될 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데리다 니체 니체 데리다>라는
책을 읽어야 할 과제로 설정하신 적이 있는데요.(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함께) 번역이 읽을만 한지, 아니면 영역본이라도 구해서
함께 검토하면서 읽어야 할 책인지 궁금합니다. 질문드려도 될까요?

로쟈 2005-12-11 09:39   좋아요 0 | URL
벨러의 책은 번역이 훌륭하다고 봅니다(제가 언제 페이퍼에 쓴 거 같은데). 제가 영역본을 갖고 있는데, (원저는 독어이지만) 굳이 영역본과의 대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의견 차이는 가능하겠지만, 널려 있는 오역서들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봅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니까 이래저래 못다한 일들이 작당하여 "언제까지 할 건데?"라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일들까지 새로이 몰려다니며 "이것도 좀 해보지?"라고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나는 협박에도 약하고 추파에도 약하다. 그러니 더더욱 진퇴양난이다. 머리가 손가락 수의 절반만이라도 됐으면 싶다(분신술 수련이라도 해야 할까?). 그럼, 능력있는 남편에, 자상한 아빠에, 명민한 학자에, 재능있는 작가에, 얼치기 정부(情夫)까지 5역 정도는 해낼 수 있을 텐데, 사정이 그러하질 못하여 유감스럽다(대략 '얼빠진 30대 가장'이 내 모습이다. 내가 집사람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정신나갔어!'이다). 그저 저녁 먹은 걸 소화시킨다는 이유로 또 책 얘기나 늘어놓는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한나 아렌트(1906-1975)의 <과거와 미래 사이>(푸른숲)이다(내년이 아렌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로군!). '푸른숲 필로소피아'의 13번째 책으로 나온 것인데, 9번째 책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였고, 12번째 책이 <정신의 삶> 3부작 중 제1권 '사유'였다. 세 권의 책을 옮김 역자 3인이 소위 '아렌트 3인방'으로 한국에 아렌트 번역/수용을 주도하고 있는 연구자들이다. 이번에 나온 <과거와 미래 사이>는 1968년에 나온 책인데,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연습'이란 부제를 갖고 있고, 당연히 8편의 논문 모음으로 돼 있다. 몇 년전에 아렌트에 심취하여(김선욱 교수의 <정치와 진리>가 계기였던 듯하다.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인연으로 저자와 메일을 교환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저들과 연구서들을 구했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도 거기에 포함된 책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 2002)와 함께 이번 겨울에 읽어볼 짬을 내봐야겠다.

역자인 서유경 교수가 이전에 옮긴 책은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이다(나는 그 책의 원서까지 제본해서 갖고 있다). 알다시피 1920년대 대학 초년생 아렌트와 젊은 교수 하이데거는 사제지간이면서 그 이상의 연인관계를 잠시 유지했었다. 유부남 교수와의 관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추천에 따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던 야스퍼스의 지도학생이 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유태인이었던 아렌트는 이후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계와 언론계에서 지적인 명성을 쌓게 된다. 출세작은 '악의 평범성'을 묘파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과 함께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1)과 <혁명론>(1968)을 비롯한 나머지 주저들은 번역돼 있다.

아렌트의 고유한 용어들의 번역 문제가 제기되기는 하지만, 그녀에 관한 유일한 전기로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를 참조할 수 있다. 아렌트 자신이 훌륭한 전기적 스케치들을 남기고도 있는데, 그녀의 저작으론 최초로 소개된 듯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이 그 전범이다(현재는 절판돼 있는데,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러시아아어본도 갖고 있다). 얼마전에 나온 손택의 <우울한 열정>(시울)과 견줄 만한 책이다. 사실, 벤야민론에 있어서는 아렌트가 손택의 선배인데, 최초의 영역본 선집 <일루미네이션>을 편집하고 해설격의 서문을 붙인 이가 벤야민과 교우가 있었던 아렌트이다. 그녀의 벤야민론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일루미네이션>의 국역본인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에 수록돼 있다(모두 절판된 책들이지만).

 

 

 

  

두번째 책은 이미 지난주에 언론에 소개되었고, 기대만큼의 반응을 불어일으키고 있는 듯한 <대담>(휴머니스트)이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인문과학이란 제유가 가리키는 이는 영문학 전공의 도정일 교수이고 자연과학이란 제유가 지칭하는 이는 사회생물학 전공의 최재천 교수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간판급 지식인들인데, 연배로는 도정일 교수가 위이지만 두 사람은 (띠)동갑내기이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기획이 돋보이는 책인데, <대담>은 이승환, 김용석 교수의 대담을 기록한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2001),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 교수간의 대담을 기록한 <오만과 편견>(2003)에 이은 '물꼬틀기'의 세번째 책이다. 나는 세 책을 모두 진작에 사두게 됐는데, 아마도 이번에 나온 <대담>을 가장 먼저 읽게 될 거 같다. 내용이 나의 관심사와 가장 밀착돼 있기 때문이다.

'늦깎이' 평론가 도정일 교수의 첫평론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가 나온 게 벌써 10년도 더 전이다(도교수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보다 한 살 더 많다!). 저자는 그때 이미 수 권의 책들을 조만간 한꺼번에 낼 거란 예고를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러한 예고는 <대담>의 머리에서도 다시 읽게 된다. 이번 만큼은 공약(空約)이 아니었으면 싶다. 그만큼 기대를 걸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겠다.

 

 

 

 

이상에서 이미지로 나열한 책들이 번역서들을 제외하고 내가 갖고 있는 최재천 교수의 책들이다. 단독저작으로는 올봄에 나온 <당신의 생을 이모작 하라>(삼성경제연구소, 2005) 정도가 빠진 듯하다. 물론 <개미제국의 발견>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애독자로서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최재천 교수는 발군의 필력을 자랑한다(황소개구리에 관한 글이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니!). 한국의 도킨스라고나 할까?(그는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나의 고전'으로 꼽기도 했다). 하긴, 애초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최교수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윌슨에 대한 관심이 연장된 것이다. 사제지간의 끈끈함을 보여주는 번역서들이 또한 아래와 같다(두 사람의 공통 키워드는 '개미'이겠지만).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최재천 교수의 지론이다. 그게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될는지는 의문이지만(그쪽이라면,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정현종의 시구에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연과학에서라면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통섭' 효과라도 발휘가 돼서 그런 사랑이 인문학적 앎에도 통할 수 있었으면 싶다. 그게 바람이긴 하지만, 내가 아직 더 끌리는 쪽은 정신분석학이 말해주는 진리이다. "알면 사랑하지 않는다!" 왜 있잖은가, 이런 푸념들. "내가 그걸 몰랐던 거지!" "내가 바보였던 거야!" "진정 난 몰랐었네!" 그리하여 신파조의 결론: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울 줄 아아알았다면..."

 

 

 

 

한편, 생물학 분야의 책으로  루이키 루카 카발라-스포르차의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지호)와 재출간된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도 일독할 만하겠다. 예전에 <에덴 밖의 강>(동아출판사, 1985)로 출간됐던 도킨스의 책은 도킨스 입문서로서도 가장 적격인 책이다.   

 

 

 

 

세번째 책은 역시나 기획이 돋보이는 책인데, 60년대 문단에 '감수성의 혁명'(유종호)를 가져왔던 작가 김승옥을 문학적 생애를 기념/조명하고 있는 책 <르네상스인 김승옥>(앨피)이다. 그와 나란히 나온 책이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인데) "4.19 혁명의 기운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1960년 9월 1일부터 1961년 2월 14일까지 167일간, 대학생 김승옥이 서울경제신문에 연재한 네 컷짜리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해설과 함께 보여주고 있는 <혁명과 웃음>(앨피)이다. "만화의 인물, 아이콘, 상징들은 모두 대중적인 표상으로서 당시의 인간과 사회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작년에 새롭게 출간된 <김승옥 소설 전집>(문학동네)과 함께 꽂아둘 만한 자리를 서가에 두는 것이 좋겠다. (흔히 4.19세대라 불리는) 한 세대의 문학적 초상과 정신을, 그리고 그 감수성을 거기에 고스란히 모셔두고 음미해보는 것도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테니까.

 

 

 

 

네번째 책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누엘 푸익이 1973년에 발표한 세 번째 장편소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현대문학)이다. 제목은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의 원제로 익숙한데, 그게 푸익의 원작이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다. "내 영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마누엘 푸익이다."(왕가위) 설명을 보태면, "반페론주의적 성향과 동성애 관계에서의 남성성의 비하를 문제 삼아 1973년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모티프가 된 책으로 화제가 되었다."

영화 <해피 투게더>(1997)도 한때 동성애 장면이 문제가 되어 수입이 보류되었던 적이 있었다. 대학가 축제때 야외에서 저녁시간에 영화상영되는 걸 본 적도 있는데(화질이 안 좋아서 주제가만 좀 들었다), 지금은 영화의 비디오와 음반도 갖고 있다. 물론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를 접하게 된 것도 이 영화를 통해서였고. 작년엔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2000)를 TV에서 볼 수 있었다. 생일파티를 맞은 장국영의 짓궂은 장난기도 메이킹 필름에는 담겨져 있었는데, 그가 더이상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쉽다.  

아무튼 푸익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는 많은 걸 떠올려주는 소설이다. 그의 작품으론 <조그만 입술>(책세상, 2004)와 <거미 여인의 키스>(민음사, 2000)도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다. 윌리엄 허트가 주연한 헥터 바벤코의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도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정치영화'인 걸 보면, 동성애는 푸익 문학세계의 중요한 코드인가 보다(푸익의 소설들을 모두 번역하고 있는 송병선 교수의 <영화속의 문학읽기>(책이있는마을, 2001)에는 이 영화에 대한 해설이 실려 포함돼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미국 작가 로버트 쿠버의 <잠자는 미녀>(열림원). 원제는 'Briar Rose'(1996)이다. 소개를 잠시 옮겨보면, "'하이퍼 픽션(Hyper-Fiction)'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소설가 로버트 쿠버의 <잠자는 미녀>가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세간에 익히 알려진 그림 형제의 동화를 '다시쓰기' 한 작품으로, 잠자는 미녀 이야기에 대하여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버전들을 공주, 왕자, 노파 요정이라는 세 인물의 관점에서 나열한다."

사실 쿠버란 이름은 내게 <하녀 볼기치기>(책세상, 1987)의 작가로 각인돼 있는데,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무의식의 시학>(인간사랑, 2002)에는 이 작품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기도 하다(좀 어색하게도 <하녀 때리기>로 번역돼 있다). 많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어서, 한때 언젠가 책을 쓰면 같은 제목을 달고, '주인과 하녀의 변증법'이란 부제를 붙일 생각을 하기도 했다(제목이 풍기는 인상으론 '헤겔과 페미니즘' 정도를 다뤄주어야 할 텐데, 어느 세월에!).

그런 작가가 지난 5월말에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하여 강연한바 있으며 나는 직접 작가의 육성을 들을 기회를 가져보았다. 후줄근한 차림의 쿠버 '교수'(브라운대학에선가 문예창작을 가르친다고)는 기대만큼의 카리스마는 보여주지 못했고, '하이퍼픽션'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해서 많은 걸 얘기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 방면으론 아직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내 취향은 여전히 하녀의 볼기나 치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일보(5.8)에 실린 김성곤 교수의 기고문을 잠시 발췌해 본다: "쿠버 씨는 집필이 끝나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 소재한 명문 브라운대에 나가 창작을 가르친다. 쿠버 씨가 주관하는 ‘케이브(CAVE·최첨단 컴퓨터 영상화 센터)’는 전자시대의 문학을 산출하는 미래 소설의 인큐베이터다. 벽이 대형 스크린으로 돼 있는 가상 현실 랩이다. 그곳에 들어가면 컴퓨터그래픽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전자음악과 3D 가상현실이 뒤섞이면서 문학은 더 이상 종이 위의 고정된 활자가 아니라, 사운드와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3차원 멀티미디어 종합예술이 된다."

-“나는 컴퓨터게임과 문학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보세요. 컴퓨터게임과 아주 흡사합니다.”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만들어내는 쿠버 씨는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 소설의 대가’이자 ‘게임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전자소설의 대부’라고 불리는 쿠버 씨가 73세라는 사실은, 나이를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최첨단 작가여서인지 쿠버 씨는 얼굴마저 동안(童顔)이다.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도 저는 말보다 스크린 이미지로 청중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벌집문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구멍을 통해 들어가지만 우리는 결국 인터넷이라는 꿀통에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하며 살고 있는 셈이지요.” 쿠버 씨의 아내 필라 씨는 46년 전 그가 스페인 체류 시 카탈루냐에서 만나 결혼한 여자다. “카탈루냐는 프랑스 쪽에 가깝다는 이유로 스페인에서는 차별받는 지역입니다. 그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작가란 정신적 망명객과도 같아서 카탈루냐 사람들처럼 늘 소외된 삶을 살게 되니까요.”

-쿠버 씨는 아내 필라 씨에게 이번에 극동여행을 특별한 선물로 제공한다. 그의 대표작 <공개 화형>의 배경 가운데 하나인 한국을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 함께 서울에 올 계획이다. “현대판 마녀재판으로 불리는 매카시즘을 패러디하는 소설 <공개 화형>을 쓰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1985년 한국을 방문했지요. 이제는 인터넷 강국이 된 한국을 20년 만에 다시 찾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밤이 오면 쿠버 씨는 집에서 영화를 본다. 그의 소설 <영화 보는 밤>은 바로 문학과 영화를 접목시킨 소설이다. 아예 영화처럼 1부와 2부 사이에 막간 휴식도 있다. 쿠버 씨의 하루는 동화들에 대한 패러디 소설 집필로 끝난다. 최신작 ‘계모’에서는 계모가 등장하는 여러 동화들의 재해석을 통해 여성 문제와 성장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하나의 고정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이끌어냄으로써, 동화들을 시대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거지요.”

-그는 진부한 리얼리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향해 이렇게 질타한 적이 있다. “차라리 다시 한번 고래 뒤를 추적하거나, 헨리 밀러처럼 유랑의 길을 떠나거나, 아니면 신화나 동화의 세계를 탐색해 보라.” 쿠버 씨는 지금 사이버공간 속에서 문학의 미래를 탐색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은 안개를 뚫고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흰 고래 ‘모비 딕’처럼 이제 우리 앞에 그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나온 '동화'는 바로 그런 계열의 책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읽고 싶은 건 <공개 화형>이나 <영화 보는 밤> 같은 작품들이다. 순서상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한국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은 <공개 화영> 같은 소설이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태는 나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05. 11. 23-24.

P.S.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동아시아) 두 권, <대칭성 인류학>과 <신의 발명>이 새로 나왔다. 해서 시리즈는 모두 5권이 되었다(몇 권이 더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처지가 못된다. 애독하시는 분들의 리뷰를 기다려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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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11-23 22:04   좋아요 0 | URL
오옷 스포르차의 책이 나왔군요!
맥닐의 책과 함께 무진장 기다리던 책인데...

비로그인 2005-11-23 22:45   좋아요 0 | URL

로쟈님, 저번에 소개해주신다고 하셨던 이 책 말이예요,

괜찮은 책인가요? "과학혁명의 구조" 너무 읽기가 고역이라서....

저 또 그리고 스피박 넘기 이 책 번역 상태가 어떤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로쟈 2005-11-24 13:01   좋아요 0 | URL
구스님/ <토마스 쿤>은 제가 안 갖고 있어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네요.^^ 소개로는 읽을 만한 책입니다. <스피박>은 제가 원서와 함께 갖고 있는 책이지만 당분간은 손이 가지 않을 책이기도 합니다. 들뢰즈, 벤야민, 데리다, 지젝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는 데다가 전공쪽의 책들도 산더미인지라... 언제 갑자기 마음이 동하면 리뷰는 쓰고 싶지만...

롯데명품위즐 2005-11-28 22:0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음.. 제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저는 로쟈님과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래도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메일을 드렸습니다.
제가 라캉에 대해 오인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들뢰즈와 라캉을 접속시키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게 생각해봤습니다. 흠..... 왠지 제가 메일을 드린 게
후회가 되네요.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로쟈 2005-11-29 09:34   좋아요 0 | URL
위즐님이 보내신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무의식'과 '되기'가 유사하지 않나고 하셨는데, '무의식-되기'가 불가능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단은 '감'에 의지하기보다는 두 철학자에 대한 가감없는 '읽기'에 몰입하시는 게 더 생산적일 듯합니다(물론 독학보다는 대화적 소통이 더 바람직합니다. 이미 나와 있는 논의들도 참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와 라캉'이란 주제 자체가 상당한 견적의 사유를 요구하니까요. 라캉에 대하 '오인'하신 부분을 더 늘려나가시다 보면,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실 수도 있고, 굳이 저에게 문의하지 않으실 정도의 자신감도 얻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롯데명품위즐 2005-12-01 11:29   좋아요 0 | URL
친절한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