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목요일에 있었던 상상마당의 '어쿠스틱 인문학 행사' 정리기사가 올라왔기에 거두절미하고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217125705). 많은 분량의 내용을 기사로 정리하느라 애쓴 프레시안 안은별 기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기사의 서두와 대담 뒤에 가진 질의응답은 프레시안 기사를 직접 참고하시길.

 

 

 

 

프레시안(12. 02. 17) "지금 필요한 건 '빨간 약', 그리고 공산주의!"

 

(...)

로쟈, '로자 룩셈부르크' 아닙니다!

지난 9일 저녁, <프레시안>과 KT&G 상상마당이 함께 하는 인문학 저자 대담 행사 '어쿠스틱 인문학' 다섯 번째 시간은 지젝, 그리고 로쟈와의 만남으로 이뤄졌다. 출판사 자음과모음 신사옥(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소재)에서 열린 이날 행사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펴냄)을 쓴 이현우 한림대학교 연구교수가 초대되어, 사회자인 도서평론가 이권우와 함께 두 시간 동안 지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서 말한 '로쟈'는 이현우의 인터넷 블로그 필명, 그를 본명보다 더 유명하게 만든 '서평꾼'으로서의 이름이다. 그가 운영하는 '로쟈의 저공비행'은 하루 1000명 정도의 사람이 꾸준히 방문하는 인기 블로그로, 많은 이들의 책 선택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 로쟈라는 필명은 그가 2000년 번역 중이던 <죄와 벌>의 등장인물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에서 따왔다. 많은 이들의 생각관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의 '로자'가 아니라고.

 

10년 이상 지켜 온 필명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전공도, 학문적 관심도 러시아 문학을 향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비인기학과이지만, 그에겐 역사 속 대문호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공 공부를 하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내는 예상된 루트를 밟을 생각이었으나, "5만 원을 상금으로 주는 우수 리뷰"에 도전하며 시작한 '부업'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고.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펴냄),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펴냄) 등 그의 서평을 묶어낸 책들은 서점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다.

 

그의 저술 활동의 한 축은,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서정시를 분석하는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펴냄)처럼 전공과 관련돼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지젝 알리기'다. 그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펴냄), <레닌 재장전>(마티 펴냄),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펴냄) 등 지젝의 (공)저서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이번엔 본격적인 지젝 입문서를 직접 써냈다. 그것이 이날 행사의 주인공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이다.

 

 

 

라캉 세미나에서 대선 후보까지, 지젝의 발자취

서평꾼 로쟈의 탄생만큼, 지젝과의 만남도 우연했다고 이현우는 말한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1995년, 영화 비평서인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옮김, 시각과언어 펴냄)를 통해서다. 이현우에 따르면 당시는 "주변의 영화 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권해주던" 시기였고, 지젝은 '문화 이론의 엘비스', 'MTV 철학자'란 별명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쟈와 지젝의 만남은 200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는 국내 번역본들의 "성치 않은 번역" 덕분에 원서를 대조하며 꼼꼼히 읽으면서 그의 애독자가 됐다고 회고한다. "깊이 영향을 받은 저자들에겐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현우는 이날의 행사도,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출간도 바로 그 빚 갚기의 일환이라고 표현한다. 지젝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준 걸까? 먼저 이현우는 그의 약력을 소개한다.

 

지젝의 발자취는 철학적으론 헤겔에서 라캉, 다루는 분야로는 정치, 종교에서 오페라나 대중문화, 지리적으로는 동구권에서 영미권, 경력으론 여러 대학에서 '대선 후보'에까지 걸쳐져 있다. 1949년생인 그는 1975년 류블라냐 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1년에 프랑스로 건너간다. 거기서 라캉의 사위이자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좌장인 자크 알랭 밀레르를 만났고, 30명 한정의 인텐시브 코스(전문가 세미나)를 통해 라캉 이론을 통해 정신분석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1985년, 그는 파리에서 그의 두 번째 박사 학위를 받는다.

 

슬로베니아로 돌아온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헤겔, 라캉 철학을 통해 본 대중문화 분석으로 명성을 얻는다. 잘 알려진 대선 출마는 1990년의 일이었다. 4명의 대통령이 집단 지도하는 체제인 슬로베니아의 대선에서 그는 5위로 낙선했고, 그랬기에 이후 학문과 저술의 세계로 더 깊이, 넓게 들어올 수 있게 된다. 1989년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에 '데뷔'한다.

 

지젝을 바꾼 사건?

지젝을 영어권에 소개한 사람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서문을 쓰기도 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사이가 틀어져 현재로선 논적 관계에 놓여 있는데, 그 이유는 지젝의 달라진 정치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현우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급진 민주주의 계열에 속하는 라클라우와 마찬가지로, 지젝 역시 과거엔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이지만, 문제는 그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라는 처칠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어떤 사건' 이후 그는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로 선회,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순수 정치에서 정치경제학으로"라는 이행의 궤적을 그린다. 라클라우가 소개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지젝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던 때 쓰인 책인데, 이후 그 내용은 지젝의 자아비판 대상이 된다.

 

그 전기가 된 사건은 우리가 '9.11'이라 부르는,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받은 사건이다. 9.11 사건과 그 이후의 세계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의 주제인 동시에, 이 책이 분석 대상으로 삼는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임과 동시에 '영화 속 한 장면'이었던 압도적 광경 이후, 누구나 '우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현실'에서 눈을 뜬 그(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의 눈에 들어오는 건 불에 타 잔해만이 남아 있는 황량한 풍경, 다름 아닌 세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시카고의 모습이다.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그에게 아이러니한 인사를 건넨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9쪽)

 

사건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1989년으로부터 약 10년 후인 2001년 발생했다. 지젝은 이 사건을 통해 "10년 간 세계를 지배한 서구식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을 봤다." '자본주의 제국' 미국의 심장을 공격한 이 사건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더는 지속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 사회 내부로부터 정의된 사건의 틀은 '문명의 충돌' 혹은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였다. 멀리 사는 우리들도 9.11 이후 이어진 미국의 대(對)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이 요란법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짓말"이다. 그에 따르면 최강국의 전투기들이 총동원되어 폭격하는 곳이 "이미 아무것도 파괴할 만한 것이 없는 폐허인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사실은, 이 '테러와의 전쟁'의 요점이 "9.11이라는 외상적 사건 이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행동화'"임을 말해준다.

 

지젝은 9.11의 충격에 대해 "오늘날 디지털화된 제1세계와 '실재의 사막'인 제3세계 사이를 분리하는 경계를 배경으로 삼아야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격리된 '인공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인데, 이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전망에서 '테러리스트'들은 구체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로부터 튀어 나와 '추상화'되고 "그들은 진정한 '이슬람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환기된다는 게 지젝의 설명이다.

 

그 자리에 등장하는 것은? "이슬람을 이해하고자 코란의 영역본을 불티나게 사 대는"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적 관용의 태도'다. 이현우는 "얼핏 긍정적인 변화로도 간주될 수 있는 이러한 태도·추세의 함정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9.11 공격을 낳은 정치적 정세와 역학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고 지적한다.

 

 

 

MB 때문? 시스템 때문!

자본주의가 그 근본부터 생명을 다 했다는 경고는 '9.11'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를 통해 한층 가시화됐다. 지젝은 9.11과 세계 금융위기 두 사건을, 유명한 경구를 차용해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창비 펴냄)라 각각 비유하며 진단한 바 있다. 그의 진단과 전망은 지난해 그가 월가에서 외친 유명한 연설 문구에 집약돼 있다.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이현우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객관적 폭력, 구조적 폭력입니다. (폭력의 주체로) 누구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가령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발생해 직장을 잃는다든지, 20대가 아무리 노력해도 살 곳을 마련하기 힘들다든지 하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난을 생각해 봅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작동할 때 불가피하게 나오는 폭력들이죠. 이것들은 어떤 나쁜 최고경영자(CEO) 한 명의 잘못이 아니며, 흔히 규탄하는 대로 'MB 때문'도 아닙니다. 지젝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지젝은 과거에 갖고 있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버리는데,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을 통해서 보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 '신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인간'을 말하지만 '난민'에 더욱 가깝다.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살아있으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간주되지 않는 자"를 말한다.

 

이현우에 따르면 이들은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살해해도 범죄가 성립되지 않"으며,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법 체류자'나 '중국 경찰에 붙잡힌 탈북자들'처럼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감벤은 근대 사회에서 '국민', '시민'이라 불리는 인민 전체가 실은 난민이나 다름없으며, '난민 수용소'처럼 누군가를 특정해 난민이라 여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난민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미끼'라고 강조한다.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가니스탄 포로들과 탈레반의 테러리스트들은 물론, 르완다나 보스니아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는 쪽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오늘날의 '호모 사케르'라고 지적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인도적 지원'이 '비인간적 포로 대응'과 동일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호모 사케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현우는 아감벤의 입장이 염세적이란 이유로 영어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지만, 이내 되묻는다. "우리를 '주인'이라며 총선 시즌마다 큰절을 올리는 정치인들 눈에, 그 외의 시간에 비친 우리는 어떠한가?" 그는 "표를 행사하기 직전에만 주권자 대접을 받고, 그 외의 시간에 하는 요구들은 묵살되는 지금, 여기의 경우를 떠올려보라"며, 우리에게도 '호모 사케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유대인을, 노동조합원을, 가톨릭교도를 숙청하는 동안 침묵했고, 차례가 내게로 왔을 때 나서줄 이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시(마르틴 니묄러의 '다음은 우리다')의 내용과 마찬가집니다. '나는 저렇게 안 될 거다'라고 생각하는 그 범주 안에 결국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 해고도 "사장 잘 만나면 괜찮아"로 넘길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잘리는 사람이 언젠가의 '나'란 생각, 이것이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자는 겁니다."

 

공산주의, 새로이 발명하라

이현우는 "지젝은 계몽주의자"라 말한다. 그 계몽주의자가 타파하려고 하는 현존 질서는 앞서 암시한대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다. 그것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 무엇이 와야 하는가? 지젝이 대안으로 염두에 둔 체제는 공산주의다. 지젝은 '레닌을 반복하라'는 코뮤니즘의 주문을 외친다. 그러나 여기서의 반복이 '레닌이 한 대로의 반복'이 아니라 '레닌이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시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현우는 강조한다.

 

"지젝의 대안 속에 있는 공산주의란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입니다. 정해진 공산주의란 없지요. 소련의 공산주의도 인류 사회에서 처음 시도되어 본 실험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거라고는 적어놓지 않았어요. 러시아도 혁명 이후 4년 동안 내전을 치렀습니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70년 동안 이어져 오다 '실패'했지만, 거기에서 다 버릴 게 아니라 그 실패에서 다시 시도하라는 게 지젝의 주문입니다."

 
이권우가 "지젝의 공산주의에 대한 전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묻자, 이현우는 "공산주의는 새로 발명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며 "자본주의와 완벽히 대치될지 아닐지는 미지수라고 본다"고 답했다. 다만 "코뮤니즘의 어원대로 '공동적인 것'을 확장시켜 삶의 중심으로 가져오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라며, 낮은 차원에서 특혜 교육 반대론자, 의료나 철도 민영화 반대론자 등 각각의 사안에서 재산과 가치의 '공유'를 옹호하는 이들도 이 비전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하면 곧바로 부정적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남한 사회에서 더 깊이 들어봐야 할 이야기다. 이현우는 "치료도 교육도, 돈을 더 낼수록 더 좋은 곳에서 받을 수 있는 사회에 동의하는가?"라며 "이견이 떠오른다면 그게 코뮤니스트적 입장이라 본다"고 말했다. 물론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은 자동 입력된 것처럼 '돈을 쓰는 건 번 사람의 자유'라는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현우는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임을 지적, 그 전제 자체를 문제시하면서 "그때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주류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젝, '조금만' 읽으세요

이상에서 살펴본 지젝의 분석틀과 주장에 대해 이현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학계를 넘어 선풍적 인기를 끈 학자이니만큼 지식인들 사이에선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보다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현우는 그런 입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면 그가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내가 그럴 만큼 똑똑하지 않다"면서, "아직 완전히 밀착해서 더욱 잘 이해하고자 하는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지젝 전도사'를 자처하지만 그의 모든 책을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철학자로서의 지젝' 책은, 철학도가 아닌 이상 무리해 관심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에 소개된 지젝의 저서를 다소 무거운 철학서와 영화 비평서, 그리고 시사·정치 관련서 등 세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며 그 가운데 시사 책들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이 책들이 바로 '이대로는 안 된다!'란 절박함을 가진 이들의 필독서다. 이현우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책, 그리고 누구나 감동 받진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책들"이라며 "뽀빠이에게 시금치 같은 존재"라 비유했다.

 

이어서 이권우는 그것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프롤로그에서 제기한 지젝과의 '피상적인 만남'이 아니냐며, 왜 그러한 만남을 권유하는지 물었다. 그는 "사람들에겐 알면 알수록 서로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살짝' 알수록 더 낫다"며 전문가 담론에 회의적 입장이라 밝혔다.

 

여기서 그가 꺼낸 개념은 '적정 기술(Appropriate Technology)'에 빗댄 표현인 '적정 인문학'이다. 그는 어느 정도까지 공유되는 교양으로서의 앎을 중요하게 본다. 바다에 비유하면 연안에서 심해까지 물 깊이는 다르지만, 그 울퉁불퉁한 높낮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바다'가 공유하는 부분이 있고 바로 그 공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알고 싶다면 그 순간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면 된다. 여기서 연안과 심해의 관계는 '대중 대 고급(학문)'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이지 않은 '적정 대 첨단' 관계라면서 그는 덧붙인다.

 

"소련은 인류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렸지만, 교실에서 쓸 칠판지우개는 못 만들었습니다. 첨단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에 갭이 있는 것이죠. 이런 점이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편, 마찬가지의 일이 자본주의 체제의 학문 면에서도 벌어집니다. (대학이)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들마저 아는 최고 수준의 논문입니다. '적정 대 첨단' 관계 속 '첨단' 학문에서 성과가 있다면, 그걸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바꿔서 전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피상적 만남'은 그런 식의 인문학을 말합니다."

 

앞으로의 저술 계획을 묻자 그는 여전히 지젝을 더 알리는 데 힘쓰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읽으면 즐거워지지만 반드시 읽지 않아도 되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지젝은 안 읽으면 불편해지는 쪽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서양 철학에 대한 자양분이 없어도 즉각적으로 큰 인상을 줄 수 있는 학자라며 "지젝이야말로 '적정 인문학'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현우는 마지막으로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이 상황을 주시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지젝의 최신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어쿠스틱 인문학'이 있기 며칠 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한 말이다. 이현우는 "지금이야말로 '실재의 사막'을 직시할 때이며 그것을 직시하기 위해 용기를 갖출 필요가 있다. 즉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2.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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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서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라는 기획하에 매주 수요일 해외 지성과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첫번째 대화자가 지젝이어서 링크해놓는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2/h2012020721083086330.htm). 현재 진행중인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지젝 강의에 요긴한 자료로 쓸 참이다. 덧붙여 박스기사로 나간 지젝 소개는 나도 한마디 거들었기에 옮겨놓는다.

한국일보와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공동기획한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는 세계적 석학들에게 최근 전세계적인 정치, 사회,경제 위기에 관해 묻고 그들의 혜안을 듣는 인터뷰 시리즈다. 지젝을 비롯해 자크 랑시에르(프랑스ㆍ철학), 가라타니 고진(일본ㆍ문학), 지그문트 바우만(독일ㆍ사회학), 악셀호네트(독일ㆍ철학), 크리스토프 멘케(독일ㆍ철학) 등 해외 지성들의 인터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한다. <편집자주>

 

■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은 누구
영화·SF소설 등 대중문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지젝거리다' 조어도

200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맨 앞줄에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지난해 <실천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포스트 근대문학의 시대, 또는 연장선에 대하여'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국내에 출간된 지젝의 저서는 23권으로, 가라타니 고진(12권), 위르겐 하버마스(10권), 미셸 푸코(7권)를 압도한다.

1949년 옛 유고연방에서 태어난 지젝은 1972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 박사학위, 85년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 세계 철학ㆍ사상계에 파장을 일으켜 온 그는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해 이미 50여권을 출간한 그는 영화, SF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국내에서는 지젝의 저서가 특히 비평계에서 많이 읽힌다. '지젝거리다'는 조어가 있을 정도로 담론장에서 많이 회자된다"고 말했다. 지젝 연구자인 민승기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인문학계에서 지젝의 사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대중적인 대상에서 철학의 정수를 뽑아내고, 일상에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지젝의 이론ㆍ사상적 토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철학,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지젝이 해석한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닫힌 체계를 완성하는 것의 정반대 편에 있다. 정(正)도 반(反)도 아닌, 하지만 동시에 정이면서 반인 합(合)을 지향하는 변증법이다(지젝에 따르면 영화 '에일리언' 속 에일리언이 사람도 괴물도 아니면서 동시에 사람과 괴물인 것처럼). 그는 새롭게 해석한 헤걸의 변증법을 일상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깨부수는 비판의 도구로 활용한다. 지젝의 라캉도 이렇게 해석된 라캉이다. 자기동일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주체,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주체다.

민승기 교수는 "지젝은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지금 상황을 뒤흔들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생산해내는 절차를 만들고자 한다. 현실적인 문제에 개입하면서 손쉬운 해결책이 주는 이데올로기적의 함정을 지적하고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학자"라고 말했다.

 

12. 02. 07.

 

P.S. 인터뷰 말미에서 지젝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은 이런 것이다.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유를 시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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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주말 북리뷰 코너에서 '깊이 읽기'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깊이 읽기'는 올해 새로 만들어진 꼭지인 듯하다). '로쟈의 지젝 읽기 가이드'가 컨셉인데, 비슷한 취지의 글을 여러 차례 쓴 터라, 편집만 급하게 다시 했다. 올해 안으로 업그레드판 가이드를 다시 써볼 계획이다.

 

 

프레시안(12. 01. 13) 종말의 시대, 우리가 진짜 공격해야 할 것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 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많은 책들이 번역·소개됐다.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란 부제를 단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옮김, 시각과언어 펴냄, 1995)가 필두였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펴냄, 2002)이 전환점이었으며, <지젝이 만난 레닌>(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 2008)이 새로운 영감이었다. 우리에게 소개된 순서를 따르자면 그렇다.

 

사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괴물' 철학자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을 통해서 영어권 지식 사회에 등장했을 때, 그가 우리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가 되리라고 점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일원으로 지젝을 처음 소개하면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조차도 "포스트 마르크시즘적 시대에 사회 민주주의적 정치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필독서가 되리라고 데뷔작의 의의를 한정했었다.

 
하지만 지젝은 이듬해 슬로베니아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후에 더 본격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열정적인 '이론 투쟁'을 개시한다. 그 결과 영어로는 이미 60권에 육박하는 단행본을 출간했고, 국내에 번역·소개된 것만 해도 30종이 넘는다. 가히 '지젝 현상'이라고도 할 만한 이러한 현황의 이면에는 그의 부지런한 다산성 못지않게 그의 이론적 사유에 대한 지식 사회의 수요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 대한 이러한 열광을 낳는 것일까? 개인적으론 그를 통해서 비로소 헤겔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해 진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걸로 이유를 대신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지젝이 목표로 한 바이기도 하다. 그는 이데올로기 이론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 외에 라캉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에 대한 개설을 제공하는 것과 '헤겔로의 회귀'를 목표로 내세웠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계돼 있다는 점이다. 그는 '헤겔을 구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라캉을 경유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라캉적 독법과 헤겔의 유산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판단한다. 비록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다"라는 처칠의 주장을 반복하던 초기의 입장은 곧 철회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색은 그가 줄곧 견지하고 있는 과제다.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지젝의 사유에는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작업에 대해서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가해진다.

 

하지만 라캉을 따라서 '메타 언어'는 없다고 주장하며 고상한 담론과 범속한 담론의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지젝은 그러한 비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의 헤겔 독법에 유보할 지점이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헤겔의 대한 새로운 독해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응수한다.

굳이 그러한 철학적 기여가 아니더라도 지난 20년간 현 세계의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슈에 대해 지속적인 철학적 성찰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제시하고 있는 철학자가 지젝 말고 더 있는지 궁금하다. 분명 손에 꼽을 정도이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지젝은 어떤 사유와 이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가?

 

 

 
철학적 이슈와 정치적 쟁점을 종횡무진하는 지젝의 행보와 재담을 모두 따라가는 건 지젝의 애독자라도 어려운 일이지만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주저를 몇 권 꼽아놓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외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까다로운 주체>(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그리고 <시차적 관점>(김서영 옮김, 마티 펴냄)까지 네 권의 책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차적 관점>은 "철학이란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란 그의 주장에 충실한 책으로 지젝의 이론적 사유를 따라가거나 그와 대결하기 위해서라면 필독해야 할 책이다.

편저 <지젝이 만난 레닌>과 공저 <레닌 재장전>(이현우 외 옮김, 마티 펴냄, 2010)을 통해서 지젝은 레닌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제안하고 촉발하고자 한다. 이 경우 레닌은 "마르크스는 괜찮아, 하지만 레닌은 뭐야?"라고 할 때의 레닌이다. 지젝은 한마디로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다시 따져 묻는다. 그의 기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 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합의'만 유지된다면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용인된다. "네 마음대로 말하고 써라. 단 지배적인 정치적 합의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방해하지만 마라. 비판적 논제로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해 달라. 지구 생태계의 파국에 대한 예상. 인권 침해. 성 차별, 동성애 혐오, 반 페미니즘. 멀리 떨어진 나라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에서 점점 늘어나는 폭력. 제1세계와 제3세계, 부유한 사람들과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 디지털화가 우리 일상생활에 가하는 강력한 충격"… 등등.

 

물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제한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 나열한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국가나 기업의 지원 하에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관용의 사례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인도에서의 맥도널드 해프닝이다. 맥도널드가 감자 칩을 동물성(소의 지방에서 나온)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인도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데, 이에 대응하며 맥도널드는 바로 사실을 시인하고 인도에서 파는 모든 감자 칩은 식물성 기름으로만 튀긴다고 약속한다. 신속한 조치에 만족한 힌두교도들은 다시금 '안심하고' 감자 칩을 먹게 되었다는 얘기다.

 

지젝이 보기에 맥도널드의 힌두교도 '존중'은 어린아이들을 대할 때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생색내기'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진지하게 대하진 않더라도 그들의 환상을 굳이 깨뜨리지 않으려고 무해한 습관들을 '존중'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외부인이 어떤 마을에 가서 그곳 관습들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서투르게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런 관용적 태도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불에 태워 죽이는 힌두교의 전통에 이르면 손쉽게 '불관용'으로 바뀐다. 즉 자유주의적 관용은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유지되며, 이것이 언제나 타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함정이다. 가령, 한국사회에서도 성문법적으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합의만 유지될 수 있다면 무얼 해도 괜찮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원칙상으론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에 실상은 어떤 '금지'가 기입돼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지젝의 자주 드는 구동독의 농담을 한 번 더 상기해보자.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친구한테 이렇게 미리 일러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 암호를 정하자. 나한테 받은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에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게 된다. 시베리아의 친구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쾌적하며 만족스럽다고 적은 이후에 끝으로 한 가지를 덧붙인다.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

 

이 노동자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실제로는 빨간 잉크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그의 거짓말은 '진실'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이기도 하다. '테러와의 전쟁'이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등의 용어들 대신에 우리를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를 과연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이러한 입장은 '좌익 소아병'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상기시키는데, 그가 보기에 정치적 극단주의 혹은 과잉 근본주의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치 현상이다. 즉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이자 제한으로, "끝까지 가는 것"에 대한 거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 정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그것이 정치 투쟁이 경제 영역을 참조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 즉 '정치경제학'에 대한 통찰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으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지젝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즉 반세계화(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예컨대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 자체는 제거할 수 없다.

지젝이 '진정한 마오주의자'라고 칭하는 알랭 바디우는 아예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이렇듯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자본주의와 함께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음으로써 지젝은 급진민주주의라는 입장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의 전환을 혁명적 테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더욱 강화한다.

 

지젝은 자코뱅의 혁명적 폭력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적 법과 질서의 '초석적 범죄'라고 절반쯤 정당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을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참고한 건 엥겔스의 말이다. "최근 들어 사회민주주의적 속물들이 다시 한 번 이 말을 듣고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좋습니다, 여러분. 이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럼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습니다."

 

즉,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인데, 지젝은 엥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18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 '신적 폭력=비인간적 폭력=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등가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때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이다.

 

자코뱅의 역사적 유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지젝은 이렇게 바꿔서 질문한다. "혁명적 폭력의 자주 탄식할 만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이상 자체를 거부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오늘날의 전혀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여 그 현실화로부터 그것의 잠재적 내용을 부활시킬 방법이 있는가?" 그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지적한 대로 자코뱅의 급진적 테러는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히스테리적인 행동화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지젝이 보는 자코뱅의 위대함은 테러의 연출이 아니라 일상의 재조직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에 두어진다.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그것을 지젝은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 요점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실패는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 실행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실패한다.

 

사실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시기에, 마오쩌둥 자신에 의해서 소요 사태가 봉쇄되기 전에 '상하이 코뮌'이 있었다. 당의 공식 슬로건에 따라 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가의 소멸과 심지어는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했고,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마오는 군대를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한다. 인민에게 '반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부추긴 문화혁명의 온전한 결론 앞에서 그 자신이 후퇴한 것이다. 이렇듯 마오가 충분히,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역설적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폭발을 위한 공간을 연 것이라는 게 지젝의 시각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지젝이 보기에 양자는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 형태는 거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지젝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 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현우·김희진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와 <이라크 : 빌려온 항아리>(이성민·박제철·박대진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 이어지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김성호 옮김, 창비 펴냄)는 그의 이러한 이론적 관점과 정세적 개입의 결합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건 중립적인 분석이 아닌 대단히 '편파적인' 분석이다. 진리란 편파적이며, 진정한 보편성은 오직 편파성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오랜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해둠과 동시에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가 농담의 배경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단 말이야!"

 

현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반체제인사들이 놓인 곤경을 잘 보여주는 이 농담이 지젝은 오늘날의 비판적 좌파에게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래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다시 소환되는 것이 '공산주의적 가설'이다. 지젝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적 가설은 여전히 올바른 가설이며 나로서는 그 외의 어떤 올바른 가설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이 가설이 포기되어야 한다면 집단행동 차원의 어떤 일도 행할 가치가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 없이는, 이 이념 없이는 역사적, 정치적 미래의 어떤 것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 만한 종류가 되지 못한다."

 

물론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 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 시민성'과 '공통 관심'을 바탕으로 "시장 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 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 이어서 그가 펴낸 두툼한 책 제목은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 Times)>이다.)

 

12. 01. 14.

 

 

 

P.S. 참고로 덧붙이자면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는 1월 31일부터 2월 28일까지 5주간 화요일 저녁에 로쟈와 함께 읽는 슬라보예 지젝 : 99%의 행복찾기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한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7&tolclass=&searchword=&subj=F91126&gryear=2012&subjseq=0001&p_selmenu=01). 교재는 <실재의 사막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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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을 내고 대학내일과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그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로 시작해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로 마무리지었기에 나름으로는 2011년 결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대학내일(589호) 로쟈를 거쳐 지젝을 지나 실재의 사막으로

 

인문학자 이현우  혹은  로쟈

구 동독 시절 농담 하나. 동독의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 일자리를 얻었다. 생활환경이 좋다고 홍보하는데 당연히 미심쩍다. 노동자가 친구와 약속하길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우리 암호를 정하자. 내가 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그 내용은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는다. 편지엔 모든 게 훌륭하다고 적혀 있다. 음식은 풍부하고, 아파트는 넓고, 영화관에선 서구권 영화를 마음껏 틀어주고. 그런데 친구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문장, “딱 하나 빨간 잉크만은 구할 수가 없더라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현장에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인간 확성기’를 이용해 미국인들에게 이 우화를 전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에 과연 자유와 민주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동물과 섹스할 자유마저 있지만, 부자들의 세금 10% 높일 자유는 없는 곳, 생명연장기술이 찬란하게 발전 중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병원조차 갈 수 없는 곳. 지배 권력의 프레임 탓에 자유롭지 못함을 자각조차 못 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우리 생각의 한계를 꼬집는 지젝은 현대판 소크라테스다.


이번 인터뷰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유명한 인문학자 이현우 교수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나눈 내용이다. 이 교수는 최근 책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출간했다. 지젝의 저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풀어 전달하는 내용이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지젝을 읽고 지적으로 무장하길 바랬다.(이정섭기자) 

 

 

9 .11은 미국의 과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자주 들어왔던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관심을 익히 알 테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으니 왜 지젝을 이야기하는지 다시 한 번 설명해달라.
금융위기 이후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다음 올 세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부분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지젝은 가장 좌측에 있는 사람이다. 깃발만 거기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논리와 설득력이 있다. 1대 99의 사회에서 99%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실재에 대해 필독할 필요가 있다. 그냥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기득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고의 프레임 자체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1%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왔다. 속고 이용당해 온 사람들이 지젝을 통해 자신을 지적으로 무장했으면 좋겠다.  

 

책 서문에 ‘지젝거리다’ 할 정도로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라고 소개했는데, 견문이 짧아서인지 나는 그렇게 많이 들어본 것 같진 않다.
식자층, 특히 문화비평, 영화비평 쪽에서 정말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인데, 그 밖과는 좀 갭이 있다.  책도 그렇게 많이 팔리는 편이 아니다. 이름이 자주 거론되니까 기자들도 책이 꽤 읽히는 것으로 착각하더라. 시장성은 적지만 네임 밸류가 있으니까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데 그만큼 읽히진 않는 게 현실이다.

 


보통 9. 11사태를 문명 간 충돌의 시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데, 지젝은 9. 11사태 미국의 과잉이라고 해석한다.
문명의 충돌로 프레임을 짜는 것 자체가 미국식 시각이다. 자기들 주류적인 세계관을 주입하고 싶어서 만들어내는 것이고, 여기서 문제는 이 체제에서 고통 받는 제3세계 사람들마저 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이슬람의 이미지, 폭력적이고 우리와는 뭔가 다른 이슬람의 이미지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가 보는 현상 너머의 사막과 같은 실재를 보고 경험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로 치면 빨간 약을 먹고 실재 세상을 보는 것처럼.

 

미국의 과잉이란 표현이 어렵다. 설명해달라.
경제학의 경기론을 보면 호황과 불황 곡선이 있잖은가. 미국의 과잉이란 말도 그것과 같다. 미국의 힘이 모자랄 때도 있고 과하게 넘칠 때도 있다. 미소 냉전 시절 미국은 이슬람원리주의를 지원해 소련과 맞섰다. (영화 ‘람보 3’를 보면 람보가 이슬람 무장 세력과 함께 소련군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성장한 이슬람원리주의 단체들이 미국의 중동 정책과 부딪치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슬람원리주의는 타자적인 게 아니다. 미국 바깥에 있던 게 아니라 미국 패권을 위한 수단이 과잉이 돼서 돌아온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외부에서 온 문제냐, 미국 자체의 과잉이냐에 따라 해결 방향이 상당히 달라진다. 외부, 즉 이슬람 문명에서 온 문제라면 오히려 쉽다. 이슬람원리주의자만 모두 없애면 문제가 사라진다. 근데 과연 그럴 것이냐. 그럴 것 같지 않다. 한때 파시즘이 그렇고, 공산주의가 그랬듯, ‘진짜 이번 적만 없애면 끝이다’ 싶지만 어느 순간 또 다른 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또 하나 재밌는 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미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미화하는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다. 동양적인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든 경멸의 대상으로 삼든 그 기저는 같다. 보편성의 논리로 보지 않는 것. 상대를 우리랑 다른 존재, 우리랑 소통되지 않는 존재로 보는 것이 문제다.

 

 

상상조차 못하는 부자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도중 지젝이 중국 이야기를 했다. 중국이 대안적인 세상을 그리는 영화, 소설 등이 금지됐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미국은 상상할 능력마저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적절하게 표현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현실’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재’적으론 자유롭지 못한 것.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 ‘매트릭스’에서 그렇듯 안락하게 몽상의 세계에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속고 있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익숙한 사고에서의 탈주가 있어야 한다.

 

지젝이 건네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평소 듣지 못한 내용이고, 낯선 생각의 단초가 된다. 예를 들어 중국 올림픽 때 매스게임 보면서 뭔가 전체주의적 느낌을 받았는데, 책에서 지젝은 매스게임을 그렇게 보는 고정관념 자체가 잘못돼 있다고 지적했다.
흔히 매스게임을 원조 파시즘으로 해석하는데, 그것과는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집단 퍼포먼스는 본래 노동자 운동의 한 요소다, 그것을 파시즘이 갖다 쓴 것이다. 공산주의 매스게임을 보며 파시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건 지배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바꿔놓은 순서로 인식하는 것이지.
 
비폭력 시위가 옳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카페인 없는 커피’ 같은 것이라며 비판한다.
운동에 폭력을 쓰느냐 마느냐는 따로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상황은 반복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최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무조건 비폭력이 옳다’ ‘폭력은 항상 정당하다’ 그런 건 없다. 정세를 판단해 가장 강력한 수단을 택해야 한다. 간디의 인도 해방 때는 비폭력이 강력했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 땐 폭력이 강력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일반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닌을 반복하라
공산주의(코뮈니즘)이란 말 자체도 요즘엔 지식인들이 웬만하면 피하려는 단어다. 지젝처럼 자신을 공산주의라고 내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공산주의라는 단어와 함께 거대한 수용소, 강제적인 의식화, 활력 없는 사회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은 우리나라 교육체제의 승리고. 프로파간다의 승리다. 지젝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이야기한다. 보통 현실은 어떤 선택지를 강요한다. 예를 들어 취업해서 잘 먹고살든가, 취업하지 않고 굶든가. 레닌은 현실이 강요하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행동을 통해 불가능을 돌파했다. 여기서 레닌을 반복하라는 건 레닌이 했던 것을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레닌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자리가 있다. 전체 인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문턱. 실패하되 더 낫게 실패하라.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역사의 폐기장에 던지지 말고 그 원래 자리로 가서 다시 한 번 시도하라. 전철이 있으니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또 실패할 수도 있고.

 

지젝은 현재의 의회 민주주의는 반대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말이 대의제이지 별로 대의가 되지 않지 않는가. 가진 사람 의견만 대의하니까. 지금 보면 거의 과두제화돼 있지 않은가. 해결책을 고민하는 한쪽은 최장집 교수처럼 기존 대의제 시스템은 유지하되 어떻게 대표성을 강화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이 제도 자체가 한계가 있으니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까?
흔히 누군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그 대안이 뭐냐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만한 사이즈의 뭔가를 가져오라고 이야기하는데, 지젝은 지금이 파국적 마지막 상황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런 것을 절박하게 발명해야 될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여러 방식이 가능하지만 미리 예단할 수 없다. 나꼼수의 돌풍을 보라.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무도 알 수가 없던 일이다. 변화된 정황, 매체의 변화, 사회적 분위기가 결합해 나온 게 나꼼수다. 미리 계획을 다 짜놓고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해서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젝이 제안한 건 소비에트식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이다. 직접민주주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인구수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데 그렇게 불가능하지도 않다. 기술적으로 그런 게 가능해진 시대이지 않은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가능한 방법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찾아가는 것, 길을 찾아가는 게 오늘날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게 있다면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부자 세금도 마찬가지. 10%? 30%? 그중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거 아니다. 모두 사람이 만든 규칙이다. 원래 있던 규칙을 자연법칙처럼 인식하는 것. 현 상태를 ‘자연화’하려는 게 보수다.

 

 

곁다리의 가치
지젝의 나머지 내용에 대해선 독자의 독서를 위해 남겨두고 인문학 자체에 대해 묻겠다. 한동안 유용성이 없다고 취급받던 인문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문학 서적 중엔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처럼 인문학을 통해 개인을 치유하려는 책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당신은 한 방송에서 인문학은 희망이나 행복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인문학자마다 관점의 차이는 있다. 나는 인문학이 공동체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거라면 그런 면에선 희망을 품기 조금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인이라면 직장을 갖고 수입을 늘려가면서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보면 쉽게 희망을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 이야기다.

 

행복이란 값어치가 없는 말이라고도 했다.
행복이란 게 상당히 오용되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행위의 목적으로 행복을 이야기할 때는 그 행복은 에우다이노미아(eudaimonia)다. 지속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우리가 쓰는 행복(happiness)하고는 다르다. 복권 당첨, 승진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남과 비교했을 때 차별적인 행복이다. 전쟁에 나갔는데 옆에 있는 병사가 화살에 맞는 게 행복이란 말이다. 자신은 안 맞았으니 속으로 기쁜 거야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대놓고 만세 부를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가령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취업을 하면 행복해하는데, 99명이 1명을 위해 들러리 서는 시스템을 문제라고 생각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당신은 자신을 전체주의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지젝이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쓴 책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도 번역돼 나와 있는데. 나는 나 자신을 지식 전체주의자, 혹은 공유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지식의 많고 적음이 어떤 차등적 대우의 근거가 되는 것에 반대한다. 블로그 활동도 그런 것의 일환이다. 영어로 된 콘텐츠는 인터넷상에 이미 상당히 많다. 대학마다 공개강의도 영상으로 올라와 있고. 무료로 접할 수 있는 지식 정보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똑똑해질 수도 있다. 나는 그게 중요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격차가 큰 사회보다 중간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마지막 질문이다. 스스로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하는데 이유는 뭔가?
내가 곁다리 인문학자라고도 쓰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곁에 두는(beside)의 뜻이 있다. 인문학에 발을 담그고 있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항하다(against)의 의미다. 어깃장을 놓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이다. 한 일본 학자가 말했듯 서구인이 하면 ‘인문학’, 제3세계인이 하면 ‘인류학’인 꼴이다. 서구의 시각으로 돼 있기에 제3세계의 본 생각이 반영되긴 쉽지 않다. 그리고 인문학엔 보수주의도 있다. 소위 교양주의라고 불리는 ‘나는 이만큼 알고 있는데 쟤는 잘 모르지. 그러니 내가 우월해’식의 사고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에 beside와 against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본다. 인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하고 교정해가면서 동시에 인문학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 이용가치를 선용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언젠가 당신이 인문학을 등쳐 먹고 인문학이 또 당신을 등쳐먹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웃음)내가 인문학 때문에 세월을 보냈으니 제 인생을 등쳐 먹은 게 맞지. 곁다리란 말엔 사실 친근감을 느낀다. 한 문학평론가가 머리말이라든가 책 표지에 있는 글 같은 걸 뭉뚱그려 곁다리 텍스트라고 한 적이 있다. 메인이 아닌 그런 텍스트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나 역시 메인 텍스트를 이용해 곁다리 텍스트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제 몫이 있다고 본다. 지금 세상은 연구를 열심히 해서 좋은 인문서가 나와도 그 텍스트가 전파가 안 된다. 사회적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다리 역할이 필요한데 내 책도 그런 역할이다. 지젝하고 독자하고 사이에 거리감이 있으니 좀 좁히고 싶다. 가령 징검다리로 개천을 건너는데 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가운데 하나를 놓고 싶은 거고. 그래도 넘기 힘들면 하나 더 놓고. 그런 작업이 필요한 것 아닐까. 독자가 성장해서 컴퍼스가 길어지면 중간 돌 필요 없이 그냥 건너가면 되고.


지금 이 인터뷰도 지젝과 로쟈에 가까워지는 돌이 됐으면 좋겠다.

 

11.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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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에 대한 리뷰기사를 몇개 모아놓는다. 중복 인용되는 대목이 있는 건 주중에 기자간담회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젝 읽기에 대한 제안이 어느 정도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일보(11. 11. 18) "한국 사회 이대론 곤란하다 느끼면 지젝 읽기라는 저항과 함께 해보길"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도 읽을 필요가 없다. '이대로!'가 생활 신념이자 정치적 신념인 위인들도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발행)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도발적인 '선언'은 거꾸로 누가, 왜, 어떻게 지젝을 읽어야 하는지를 읽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목이 함축하듯 이 책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상을 쉽게 풀어 전하는 대중교양서다. 

이 교수는 1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젝은 현실의 해석보다 현실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자"라고 강조하며, "국내에서 지젝에 관한 '진입장벽'이 더 낮아져야 한다"는 바람에서 책을 썼다고 말했다. "모두 '지젝거린다'고 할 만큼 국내 학계에서 지젝에 관한 논의가 많지만, 실제 지젝의 저서 판매량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강의를 하다 보면 학계와 대중의 괴리가 크다는 걸 실감하는데, 지젝이 대표적이죠. 사실 지젝은 재미있는 학자예요. 영화 '지젝!'의 아르헨티나 강연 실황을 보면, 나꼼수 콘서트를 연상시킬 만큼 청중 반응이 대단해요." 

지젝은 철학적 주제를 SF소설, 할리우드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을 통해 변주해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꼼수만큼 만만하지 않다. 지젝은 라캉과 헤겔에 관한 독특한 해석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정반합'의 완성된 사유가 아니라 '끝없이 분열하는 사유'로 읽어낸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에일리언을 몸에 품은 사람이 사람도 에일리언도 아니지만 동시에 사람이면서 에일리언인 것처럼,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정(正)도 반(反)도 아니면서 동시에 정과 반인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사유다. 라캉도 비슷하다.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존재라는 것이 지젝이 라캉을 읽는 방식이다. 이 교수는 이런 지젝의 독창적 해석을 "학문적 업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지젝 읽기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번에 지젝의 저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원제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자음과모음 발행)도 김희진씨와 함께 번역, 출간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이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지젝의 지적 여정을 소개하는 식으로 쓰여졌다.

지젝은 얼마 전 월가 점령 시위를 지지하는 연설을 한 것처럼 현실정치에도 기민하게 대응하며 자신의 논지를 설파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작금의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며 '다시 레닌'으로 돌아가 새로운 코뮤니즘을 만들자고 말해왔다. 그가 강성 좌파로 분류되는 이유다.

<실재의 사막…>은 지젝이 정치에 관한 책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계기가 된 9ㆍ11테러 관련 5편의 논문을 엮은 책이다. 9ㆍ11테러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지만, 미국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지젝의 평가다. 지젝은 9ㆍ11테러가 상징하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체제의 균열을 예의 복잡다단한 사유로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매트릭스의 삶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지젝의 사유를 통해 한국사회에 생산적인 담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지젝 읽기라는 저항을 함께 할 것을 권했다.(이윤주기자)  

 

경향신문(11. 11. 19) “지젝 읽기는 타성과 기득권, 편의주의에 대한 저항”

영화 <매트릭스>는 인간이 컴퓨터가 만든 가상현실 속에 갇히는 미래 세계를 그렸다. 영화에서 진짜 현실에 눈뜬 주인공에게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이렇게 말한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본떠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책에서 지젝은 “9월11일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이름을 알린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43·사진)가 지젝의 이 문제의식을 담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전문번역가 김희진씨와 함께 새로 번역해 내놓았다. 이 책을 중심으로 지젝을 풀이한 해설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도 함께 출간했다.

책 출간을 맞아 17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 교수는 “<지젝!>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면 지젝의 아르헨티나 강연 모습이 나오는데 마치 ‘나는 꼼수다’를 연상케 할 만큼 웃고 즐기는 분위기였다”며 “우리가 지젝에 대해 느끼는 장벽을 낮추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지젝의 책은 “현실을 바꾸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책이니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젝은 9·11테러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을 무너뜨린 계기라고 본다. 마치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폐허가 된 실제의 시카고를 보며 느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 영화 같은 실제 장면을 보고는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시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현실’(reality)이 무너지자 진짜 ‘실재’(the real)가 무엇인지를 보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 환상을 믿는 쪽을 택했다. <매트릭스>로 말하면 빨간 약이 아니라 파란 약을 먹은 셈이다. 그 환상은 바로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핵심인 ‘실물경제’를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것도 우리가 믿는 ‘현실’에 불과하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실재’ 그 자체가 오히려 경제위기를 불러온 금융순환이라고 분석한다. 이 교수는 “지젝은 현재 자본주의 위기의 처방으로 나오는 일명 ‘박애적 자본주의’, 워런 버핏이나 안철수와 같은 사회환원식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발명해야 할 대안적 경제체제”다. 지젝은 월가 점거 시위에 참가해 이렇게 연설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진정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교수가 책에서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며 “지젝 읽기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자크 라캉은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젝을 빌려 “중요한 것은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문학 전도사’로 불리며 대중적 강의와 저술에 힘쓰고 있는 그는 “학술 논문을 쓰거나 비평에 그럴듯한 문구를 가져오기 위해서 지젝을 읽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지젝은 실제로 현실을 바꾸고 싶어했습니다. 지젝의 문제의식을 얼마나 많이 공유하는가가 변화를 불러온다고 믿습니다. 가급적 모두가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는 ‘지식 전체주의자’입니다.”(황경상기자)   

한겨레(11. 11. 19) 진짜 삶을 살고 싶다면, 쫄지 말고 ‘지젝’ 읽어라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불리는 슬라보이 지젝은 우리나라에도 번역서가 30종 가까이 나왔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지젝의 생각은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잘 알려져 있는가?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지젝은 그저 어릿광대’라거나 ‘이론만 현란하지 별것 없더라’ 등으로 평한다. 한편에선 ‘너무 어렵고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다.

번역과 평론을 통해 지젝의 책과 생각을 다뤄왔던 ‘인터넷 서평꾼 로쟈’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이를 ‘지젝과 거리두기’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 자신이 세상을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은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뭔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분들은 한번쯤 지젝을 읽으셔도 좋겠다”고 한다. 지젝과 거리를 둬서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 편의주의, 무사안일주의 등에 대한 저항인 ‘지젝 읽기’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그가 펴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대중을 위한 지젝 입문서’다. 17일 만난 지은이는 “지젝을 소개하는 입문서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꼼수다>처럼 좀더 독자들에게 와닿게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젝의 사상은 현실을 바꾸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지젝과 독자들 사이의 벽을 낮춰 더 많이 공유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오늘날 지젝의 사상이 위치하는 맥락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자본주의 체제마저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 한편에선 자본주의를 다듬어 살길을 찾으려는 ‘박애 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는 흐름이 나온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인 지젝은 ‘레닌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이런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물론 옛 소련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박애와 자선에 기댄 자본주의 극복은 근본적 해결이 아니기 때문에 지젝은 레닌이 사회주의를 현실화했던 그때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도’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젝의 이런 생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 9·11 테러를 계기로 삼아 ‘자본주의적 재앙이냐 공산주의적 구제냐’의 선택지를 제시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다.

지젝 사상의 바탕인 라캉, 헤겔과의 연관성을 짚어내며 책을 분석한 지은이는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뒤의 ‘그저 그런 삶’과 ‘진정한 삶’을 대비시킨다”고 말한다. 그저 그런 삶은 자기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고, 그 정치적 비전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라 한다. 이런 ‘강요된 선택’을 넘어서기 위해 지젝은 현실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기획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지은이는 지젝의 사유 속에 담긴 ‘포퓰리즘에 대한 엘리트주의의 비판에 대한 비판’을 강조했다. 지젝은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대중의 집단성에 과도하게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것을 비판한다. 총체성·집단·규율 등은 원래 창조적인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속하는데, 탈정치화된 자유민주주의 중도파가 이 모두를 파시즘으로 규정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온건한 탈정치적 태도보다는 대의를 향한 열망을 실질적인 정치로 묶어내는 ‘급진적인 정치화’만이 새로운 삶의 비전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 사회에서 <나는 꼼수다> 인기의 의미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풀이한다.(최원형 기자)   

서울신문(11. 11. 19) 위험한 철학자 지젝 전도사로 나선 ‘로쟈’ 이현우-번역·서평서 출간 

“그들은 우리가 모두 루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루저들은 저곳 월 스트리트에 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해도, 2008년 금융 시장 붕괴 당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이룬 그 사유재산 말이다.”

‘이 시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62)이 지난달 10일 미국 월가 시위에서 위와 같이 시작한 연설을 한마디 할 때마다 사람들이 따라서 외쳤다. 뉴욕시가 확성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젝의 연설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지만, 현장의 육성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확장됐다. 틱 증상이 있는 지젝은 월가 시위 연설에서 한마디를 할 때마다 티셔츠를 잡아당겼고, 보통은 끊임없이 코를 문지른다.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 라캉과 헤겔의 철학을 크로스오버하는 시도를 처음으로 한 지젝은 공산주의자이자 행동가다. 워낙 많은 사람이 그의 책과 철학을 언급해 ‘지젝거린다’(지젝을 인용한다)는 조어가 있을 정도다. 70여권의 책을 썼고 이 가운데 30권 정도가 한국에서 번역됐다.

인터넷에서 필명 ‘로쟈’로 유명한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가 번역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9·11 테러 이후의 세계’와 직접 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상 자음과 모음 펴냄)를 통해 지젝 전도에 나섰다. ‘실재의 사막’에서 지젝은 9·11 테러를 통해 진정으로 읽어내야 했던 것은 “승자 독식의 안온한 자본주의 체제(지젝은 이것을 매트릭스에 비유했다)의 균열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지젝은 공산주의 시절에 나돌던 구닥다리지만 매력적인 농담 하나를 소개한다. 한 동독 인민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우편물이 검열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두었다.

“암호를 정해 두세나. 만일 내가 파란색 잉크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건 내가 쓴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일세. 만일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다면, 편지 내용은 거짓일세.” 그가 떠난 지 한 달 뒤에, 그의 친구는 시베리아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으로만 쓰인 편지였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굉장하다네. 상점은 질 좋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극장에서는 서방에서 만든 유명한 영화가 상영되지. 아파트는 널찍하고 고급스럽다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빨간색 잉크뿐이라네.”

그는 월가 시위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이 농담을 영화 ‘매트릭스’와 연결해 메시지를 던진다. ‘당신은 지금의 안전하지만 통제되는 삶에서 한걸음 밖으로 빠져나올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자본주의 매트릭스의 안온한 삶에 머물면서 ‘최후의 인간’으로 살아가겠는가?’

지젝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빨간 알약을 삼키고 밖으로 걸어나와 자신이 주인인 삶을 살라고 선동한다. 이현우 교수는 “지젝만큼 진보적인 좌파 철학자는 있지만 지젝만큼 이해하기 쉽진 않다.”며 “지젝은 재미있고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젝!’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의 강연 분위기는 ‘나꼼수’(나는 꼼수다) 콘서트처럼 열광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인터넷 방송 ‘나꼼수’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정권의 실체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있다.”며 지지했다. 지젝이란 이 시대의 철학자를 ‘나꼼수’처럼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방식으로 알리는 것이 서평꾼 ‘로쟈’의 역할이라는 이야기다. 소수 지식인이 지젝의 철학을 이해하기보다는 대중이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지젝 읽기는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나 ‘우리 집안만 빼고 다 망해라!’와 같은 유구한 심보에 대한 저항이다.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윤창수기자) 

11.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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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11-1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 정말 잘생기셨네요'''

로쟈 2011-11-20 23:18   좋아요 0 | URL
지젝 말인가요?

park6 2011-11-2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바로 샀습니다ㅋㅋㅋ읽다가 이해 못하는 부분은 메일로 물어봐도 될까요?ㅠ

로쟈 2011-11-21 23:58   좋아요 0 | URL
네, 질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