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에 뒤적거리고 있는 책은 이번주에 나온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와 니얼 퍼거슨의 <증오의 세기>(민음사, 2010) 등이지만, 리뷰기사로는 바디우의 <사랑 예찬>(길, 2010)을 읽는다. 아무래도 성탄절에 더 어울리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니까. 게다가 아주 드물게 올라온 기사다.   

한국일보(10. 12. 25) 사랑, 우연한 만남을 운명으로 만드는 힘 

프랑스 68혁명 세대의 지성들이 대개 보편적 진리의 해체로 나아갔다면, 알랭 바디우는 빈사 직전에 몰린 그 진리의 복원을 꾀하고 있는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의 책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는데, <사랑 예찬>은 사랑을 진리 생산의 한 절차로 보는 그의 철학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바디우가 2008년 사랑을 주제로 연극기획자와 나눈 대담을 묶은 책이다. 

 

바디우 철학의 전모를 모르더라도 책은 사랑에 대한 여러 성찰로 가득차 있어, 지금 사랑을 시작했거나 사랑에 흠뻑 빠져있는 연인들이라면 곱씹어 읽어볼 만하다. 바디우가 우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을 종의 번식을 위한 위장술, 욕망의 미사여구 정도로 보는 냉소적 시각이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자위행위와 다름없다. 그는 "사랑을 포기하고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라며 "사랑을 포기하면 삶이 완전히 무미건조해진다는 사실을 언급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은 일회적인 인스턴트식 욕망이 아니라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고 하자는 욕망"이다. 그러니까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한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매몰차게 극복해가는" '진정한 사랑'이 그의 관심 대상이다. 보잘것없는 우연한 만남을 운명처럼 느끼게 하는 사랑의 힘에 주목하면서 그가 끄집어내는 사랑의 가치는 지속성, 약속, 충실성 등이다.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다."(59쪽) 이런 사랑 예찬이 낭만적 환상이라고 느낀다면 책을 덮으면 그만. 하지만 사랑 속에서 영원성의 도약을 느껴본 이라면 난해한 그의 글을 읽는 수고가 그리 아깝지 않다.

책은 사랑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유로 본격적으로 이어지는데, 사랑은 둘에 관한 진리, 달리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차이'라는 진리를 구축하는 경험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둘의 관점에서 행하는 세계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진리가 없다'는 탈근대 사상가들의 상대성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바디우는 그렇다고 폭력성과 배타성의 원천으로 지목된, 도그마로서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가 복원하고자 하는 진리는 '복수의 진리들'이며 그것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서 출현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사건의 철학'이다. 바디우에게 그 진리가 출현하는 사건 중 하나가 남녀의 우연한 만남인 것이다.(송용창기자) 

10. 12. 25.  

P.S. 참고로, 바디우와의 재작년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는 프랑스철학 전공인 김상환 교수가 맡았다.  

중앙일보(08. 01. 16) “진리는 혁명적 … 기존 지식체계 깨며 생겨”  

서양 철학사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속칭되는 각종 해체주의의 진원지다. 탈근대 해체주의 철학은 신·이성·본질(실체)을 중심으로 사유해온 서양 철학 2500년 역사를 뒤흔들었다. 그같은 해체는 급기야 철학의 존립 근거까지 위협했고, 철학의 역할과 목적을 다시 세우는 반성적 사고로 이어졌다. 푸코·데리다·들뢰즈 등 해체철학자들에 이어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71) 파리고등사범학교(ENS) 교수가 서 있는 자리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차이의 사상’과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진리가 하나 뿐이라고 강변하는 서양 전통의 ‘동일성 철학’으로 바디우가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e-메일 대담=김상환 서울대 교수

바디우 역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대신 ‘복수(複數)의 진리’를 세우는 새로운 사유의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바디우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직접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행동하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탈근대적 ‘차이의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각종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철학을 그는 지향한다. 이는 프랑스 좌파 철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김상환 서울대 교수가 인터뷰 안하기로 ‘악명’높은 바디우 교수와 수차례에 걸쳐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김상환(이하 김)=한국 사회도 외국인이 급증하면서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하게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윤리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탈근대 철학자들의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끌어안는 새로운 윤리학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바디우 교수는 탈근대 철학자들을 소피스트라고 비판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이하 바디우)=일상적인 삶이나 정치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을 봄에 있어서 ‘차이’보다는 ‘같음’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의 근본적인 일체성, 즉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문제가 핵심적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 권리를 지지한다. 문화적 차이들이 다양한 물결을 이루지만 그 안에는 인류의 근본적인 일체성이 함축돼 있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김=진리에 대한 당신의 접근은 독특하다. 하나의 진리가 아닌‘복수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바디우=진리는 혁명적이고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면서 일어난다. 나는 진리가 생겨나는 4가지 절차가 있다고 본다. 정치·과학·예술·사랑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지 절차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철학은 이 점을 무시하고 진리를 과학이나 정치 혹은 예술과 같은 한가지 절차로 환원시켜 봉합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정치에, 영미 분석철학은 과학에, 하이데거의 추종자들은 예술에 봉합했다.

김=당신의 철학을 흔히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디우=사건은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다. 철학의 과제는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언어를 벗어나면서 출현한 진리에 개입해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다. 사건의 1차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김=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나서 보다 성숙하고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런데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나 정당 정치에 회의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디우=선거는 정치적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합의에 기초한 제도이다. 사회가 대충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경쟁 그룹들 사이의 의견일치가 없다면, 상대편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거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어떠한 세력도 실질적으로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상환=선거가 어떤 합의 위에 서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디우=자본주의라는 합의 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소위 민주주의적인 나라치고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나라, 시장경제가 군림하지 않는 나라, 대기업 CEO가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보다 더 큰 권력을 쥐지 않은 나라, 그런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선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인간 해방은 자본주의적인 경쟁체제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김=그럼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바디우=첫 번째 관문은 국가의 선거 형식 바깥에서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적 조직을 만드는 데 있다. 핵심 과제는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을 묶는 일이다. 가령 지식인·청년·직장인 그리고 사회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 어떤 행동 단위나 조직 단위를 구성해야 한다.

김= 사도 바울을 주제로 한 당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데, 종교 갈등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바디우=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이 종교나 문명 간 충돌이라 보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은 죽었고, 종교는 무력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중세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가난하고 헐벗은 인민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충돌은 때로 종교적 성향의 집단들에 의해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여러 가지의 거대한 불평등이 없다면, 이 집단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김=당신의 철학에 따른 정치적 주체는 투사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테러리스트와 어떻게 다른가.

바디우=테러리스트는 전혀 인간 해방의 보편적 비전을 수호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는 종교적 경전에 의해 확립된 폐쇄적인 정체성의 옹호자다. 과거의 열성적인 파시스트 신봉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는 충실과 참여의 정치학은 이런 종류의 폐쇄성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김=요즘 한국 학계는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바디우=내가 볼 때, 인문과학에서 ‘과학’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마르크스 전통에서 정의하는 역사,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 등 세 가지 정도다. 그 밖의 것들은 보통 ‘고전 연구’라 불리는데, 예술에 관계하는 학술적인 형식에 해당한다. 고전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은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실천적 관계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철학에서 예술은 과학·정치·사랑과 더불어 보편적 진리의 본질적 유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인문학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대학이 자본주의의 요구만을 따라가선 안된다. 대학이 몰두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 자체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구속이 있어서는 안된다.(정리=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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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12-25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예찬> 무척 즐겁습니다.^^; 바디우를 처음 접하기에는 <철학을 위한 선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기혼자는 좀 피하는 것이...--;;; '사랑은 만남이라는 우연성을 보편성으로 전환하는 진리'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제 진리는 제 배우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소리인데, 다수의(복수의) 진리에 상당한 욕심이 있는 기혼자라면 흠....(혜량하소서. 썰렁한 소리 늘어놓고 갑니다...^^;)

로쟈 2010-12-25 20:37   좋아요 0 | URL
진리를 생산하는 방식들은 다 좀 '과격'하죠.^^

워킹슬로울리 2010-12-25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수록 점점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자들을 만날 때 마다, 결국 시시하게 끝나버릴 인연이겠지 라는 생각 부터
들기 시작하더군요.
곰곰히 이유를 생각해보니, 결국 인간이 사랑을 하게 되는 계기는, 외면 아니겠습니까?
얼굴, 집안, 학벌이라는 조건이 일치하면, 사람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주죠,
그때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집안,학벌,돈을 보지 않는 순수한 사랑도 있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엔 얼굴은 다 보는것 같습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가요?ㅎㅎ
얼굴이라는 외면적 가치가 끼어든 사랑은 순수할수 없다.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남아서, 결국 순수한 사랑은 없다 라는 사랑의 냉소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아무튼 로쟈님, 메리크리스마스

로쟈 2010-12-25 20:36   좋아요 0 | URL
외면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 오만 아닐까요? 중요한 건 그것 이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 텐데, 순서는 관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외면이든 내면이든...

워킹슬로울리 2010-12-2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에요
워낙 외적 가치가 팽배하다 못해 폭발해버릴것 같은 사회에 살고있는 느낌입니다.

어제, 타마르 반 데 도프의 영화 블라인드(2007) 을 봤는데요,
저에게 사랑에 대한 엄청난 의미를 던지고 갔습니다.
연말 바쁘지 않으시다면 보기를 추천해드릴게요!

로쟈 2010-12-27 12:10   좋아요 0 | URL
네, 눈길을 끄는 영화네요. 알려주셔서 감사.^^
 

오랜만에 지젝과 관련한 칼럼들이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이란 이름이 칼럼에 등장하는 빈도수가 친숙도의 척도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공역자로 참여한 지젝의 <폭력>(난장이, 2011)이 내달에 출간되는데, 그의 문제의식이 더 많이 공유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겨레(10. 09. 13) [홍세화칼럼]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정치

지난 9월3일 취임 인사차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은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은 “위원장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해 너무 감사하다. 우리도 민주노총을 ‘우리 민주노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한국 사회에서 조합원들이나 현장 활동가들 위에 군림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조직의 지도층이 공권력 앞에서 주눅들거나 황송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노총과 자리바꿈을 한 듯한 민주노총 위원장의 이번 행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한 “‘배제된 자’에 적대적인 ‘포함된 자’”에서 ‘포함된 자’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행정자치부를 행정안전부로 바꾼 것처럼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바꾼 것도 이명박 정권의 지향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령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은 노동허가제가 아닌 고용허가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노동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고용의 주체는 고용주라는 점에서 노동허가제와 고용허가제는 전혀 상반된 노동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동안 실질에 있어서는 ‘노동통제부’에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이름만큼은 그래도 노동부였던 것을 고용노동부라고 바꾼 것인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에 맞게 실제로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운다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일컬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제된 자들 중에는 오늘도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앞에서 두 달째 노숙 투쟁을 벌이는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있다. 충남 서산에 있는 이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900여명은 모두 기아자동차 ‘모닝’을 생산하지만 기아자동차 노동자가 아닌, 17개 외주하청업체에 소속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이엠에프 환란 직후인 1998년, 정치권과 자본의 전방위 압력을 받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가장 약한 고리인 식당 여성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는 데 합의했던 과정과 그에 따른 투쟁을 형상화한 게 <밥·꽃·양>인데, 일단 물꼬가 터진 뒤 ‘전 생산노동자의 비정규직화’라는, 사용자에게 억만금의 이윤을 챙기게 해주는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개념은 지제크에게서 빌려올 필요 없이 쌍용자동차 사태를 돌이켜보면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배제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게 공권력의 역할임을, 또한 ‘포함된 자’가 자칫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우면 그 또한 ‘배제된 자’가 되어야 함을 쌍용자동차 사태는 가르쳐주었다. 복종하여 포함될 것이냐, 싸우다 배제될 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노동계가 그간 보인 대응은 전자 우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고용노동부는 지난 7월22일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불법파견, 정규직 지위 확인’ 판결의 현장파급효과를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타임오프제를 빌미로 사용자들에게 단체협약을 바꾸도록 압박하고 있다. 대법 판결 이후 현장에서 그나마 되살아나고 있는 연대 동력을 무력화하면서 지금까지처럼 노동을 순치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에만 눈길을 주는 게 관성이 된 탓인가, <한겨레>를 포함하여 진보매체에서조차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는 대법 판결 이후 현장의 움직임을 기사화하는 데 인색하다.

여야 정치권 사이의 싸움이 아무리 요란해도 결국 이건희의 품 안에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이며, 민주당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지만 새만금을 밀어붙였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 통합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통합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마땅하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그래서 표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진보는 거추장스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 기획위원)    

한겨레(10. 12. 18) [세상 읽기] 지제크식 이웃사랑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역시 예수님 말씀이다. 말은 쉬운데, 행동은 참 어렵다. 혹자는 원수까진 몰라도 이웃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손이 부족하면 가서 도와주고, 명절이면 음식을 나눠먹고, 상을 당하면 함께 울어준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누가 한번 선을 그어보라. 그 경계 안에 몇 명이나 있는가?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하지 말잔 얘긴가?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보편적인 윤리적 명령이 되려면 이웃의 특정한 경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이웃사랑이 충돌해서 원수로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쩌라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윤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견해를 참조해 보자. 지제크는 윤리의 관건을 ‘이웃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이웃은 근처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은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이다. 주차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동기, 임금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이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기 때문에 이웃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거다. 결국 ‘이웃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쉽지 않다. 대개는 거꾸로 간다. 최철원 사건을 떠올려보자. 그는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맷값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 그런 그가 모교에는 15억원을 기부했다. 이웃은 원수로, 남은 이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유사한 행태는 흔하다.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임금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행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신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한다. 진정한 이웃의 고통은 부인하고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의 특권적 형식으로 물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란 명령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친절하게 각주까지 붙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이웃은 원수의 모습을 하기 쉬우니 남을 끌어들여 이웃을 외면하는 잔머리를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를 받아주는 무력한 존재만 이웃으로 경계 짓지 말고 상처받은 얼굴로 노려보는 진정한 이웃의 요구에 정직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연말이면 어김없이 불우이웃돕기 구호가 등장한다. 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같은 무력한 존재들이 그 대상이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벤트로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일상을 가린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죽어나간 노동자들에 대해 세계 일류기업이 보여주는 일관된 외면을 보라. 북한의 포사격으로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사이 이웃의 권리를 분배하는 예산안을 당파의 권리로 날치기 통과시킨 집권세력은 또 어떠한가. 이해관계로 뭉친 패거리만 이웃으로 경계 짓고 진정한 이웃의 고통을 양식으로 삼는 것이 그들의 ‘이웃사랑’인가. 불우해지기 전에 이웃을 돕는 것,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가?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0. 12. 19.  

P.S. 두 칼럼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슬라보이 지제크'로 표기됐다. 현행 외국어표기법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슬라보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Slavoj'가 '슬라보예'로 소개된 것은 우연한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음은 '슬라보이'니까. 최근의 어느 기사는 '슬라보즈'라고 독창적으로 읽었지만), '지젝'을 '지제크'로 읽는 건 소모적으로 보인다. '지젝'은 이미 통용 표기이기 때문이다(하긴 '벤야민'은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것도 여전하니 '지제크'만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지제크'가 무슨 비스킷 이름처럼 들리는 게 나뿐일까?). 나의 지론은 적어도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는 일관적인 표기원칙을 따르기 곤란하며 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지젝의 <폭력>의 핵심 요지에 대해서는 동영상 시리즈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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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

주말 북리뷰에서 새로운 관심도서가 눈에 띄지 않아서(리처드 슈스터만의 <몸의 의식>(북코리아, 2010) 같은 책을 나는 어제 손에 넣었다) 차라리 이번주 '장정일의 책속 이슈'를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다루고 있어서다. 나도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란 서평을 쓴 적이 있지만, '책속 이슈' 곧 책의 핵심을 잘 짚어주고 있다.  

 

한겨레(10. 11. 05) '공갈 자본주의’ 대신 공산주의의 새출발을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2008년 금융위기의 해결책을 놓고 대립했다. 금융 파국을 방지하기 위해 연방준비은행이 7000억달러나 되는 구제금융을 민간 금융사에 지원하려 하자, 공화당 의원들이 구제금융은 금융사회주의이며 비미국적이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오바마와 민주당은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며, 끝내 월스트리트에 세금을 쏟아부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에서 그때 미국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적 조처의 목적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었다면서, 자본가들이 그토록 질색을 하는 ‘사회화’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원하는 일에 복무할 때는 아무 거리낌없이 용인되고, 또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도 가능한지를 명료히 분석한다.

공화당 의원들이 구제금융을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맹비난했던 배면에는, 자본주의 체제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없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심리전적인 목적이 있다. 즉 그들은 구제금융을 극렬히 반대함으로써 금융위기는 체제의 근본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나치게 느슨한 법적 규제와 거대 금융기관의 타락이었을 뿐이라는, 흠결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신화를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이런 서사를 통해 점차 자연이 되어 간다.

반면 구제금융에 동조한 좌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메인스트리트(중산층)의 복지는 번영하는 월스트리트(금융자산)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속수무책이었고, 월스트리트를 걷어차면 실제로 타격을 입을 사람들이 평범한 노동자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런 사실이 가르쳐 주는 것은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해 언제라도 사회주의 구원 투수를 투입할 수 있는 우파는 물론이고, 좌파마저 그런 자본주의의 공갈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연화’가 이루어진 속에서는 투기로 무일푼이 된 은행을 국고로 지원하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쫓겨나는 공장을 국영화하는 건 비합리적인 것으로 믿게 된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공황이 발생할 때마다 자기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전제를 반성하기보다 금융 감독과 같은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강화되고, 매번의 공황을 통해 중산층은 자본주의 질서에 더욱 길들여진다. 이게 사실이라면, 시장에서 참패하고 악마화(강제수용소화)된 국가 악몽으로 막을 내린 공산주의는 왜 매번 기본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숱한 진보적 인사들은 이 시대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인 양 하지만, 현실은 사회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이며, 진정한 진보인사는 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오래전에 사회주의 정책의 기초를 완료한 서구 유럽은 물론이고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공공연히 사회주의 정책을 쓸 수 있는 미국의 예,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아시아적 온정주의’로 위장된 중국이 보여주듯이 전세계는 이미 사회주의화되었다. 그러나 기뻐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 사회주의가 자본을 위한 사회주의이며, 자본주의는 가중되는 심각한 체제 모순 때문에 그만큼 강력한 국가의 권위(법·경찰)와 민중을 달랠 사회주의 복지정책마저 수용해 나간다.

세계는 영구혁명의 혼이 제거된 사회주의와 재장전된 공산주의의 싸움이라고 단정하는 이 책은, 공황과 재출발 사이를 왕복달리기 하는 자본주의의 희극적인 반복을 보면서 공산주의의 새 출발을 촉구한다. 그게 내가 읽은 이 책의 핵심이다. 지젝이라는 성체(聖體)를 뜯어 먹는 방법은 제각기이겠지만, 지젝의 거시기를 뽑아 내시로 만들고 비역까지 하는 일은 아주 손쉽다. 그의 급진주의적 정치이론은 모르쇠 하면서, 정신분석이나 문화이론의 가두리에 그를 감금하는 것이다.(장정일_소설가) 

10. 11. 06. 

 

P.S. '공갈 자본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살림, 2008)과 홍기빈의 <자본주의>(책세상, 2010),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2010)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장하준 교수의 책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시장'을 문제(불행)의 원인으로 지목한다는 점에서 지젝과는 관점이 다르지만, 신자유주의 비판서로서 여전히 계몽적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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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0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작가 고어 비달이 미국 경제 체제를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 기업,
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주의" 라고 했다는데,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라는 것도 있군요!


로쟈 2010-11-07 20:47   좋아요 0 | URL
'그들만의 사회주의'(자기들끼리 해먹기)라서 문제인 것이죠...

2010-11-06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7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중에 책을 구하고 아직 펼쳐보지 못한 책이긴 한데, 지젝의 신간 <나눌 수 없는 잔여>(도서출판b,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원저는 1996년에 나온 것으로 국내 소개된 책으로는 <향락의 전이>(1994)와 <환상의 돌림병>(1997) 사이에 나온 것이다.   

한겨레(10. 10. 30) 관념론자 셸링 안에 유물론 씨앗 있다 

<나눌 수 없는 잔여>는 좌파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61·사진)의 1996년 저작이다.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지젝을 세상에 알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이래 그의 주요 저작이 거의 모두 우리말로 나온 셈이 됐다. 이 책의 번역이 늦어진 것은 내용의 낯섦과 까다로움도 한몫한 것 같다. 부제 ‘셸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가 가리키는 대로 이 책은 셸링의 철학을 논의의 재료로 삼고 있다. 언제나 상식과 통념의 허를 찌르는 지젝은 이 책에서 좌파 철학이 거의 다루지 않는 셸링이라는 ‘낡은 주제’를 아주 새롭게 독해한다. 



철학사의 일반적 서술을 따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1775~1854)은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배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객관적 관념론으로 뒤집어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으로 넘겨준 사람이 셸링이다. 전통 좌파 철학 노선은 셸링을 비합리주의적 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특히 후기 셸링 철학이 그런 평가를 받았는데, 이 시기의 셸링은 ‘신지학’(신의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에 몰두한 사람, ‘객관적 관념론’을 창출한 젊은 시절의 합리성과 과학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통했다. 지젝은 이 책에서 바로 이런 ‘표준적 독해’를 뒤집는다. 그의 해석을 통해 셸링은 비합리적 신비주의에 빠진 관념론자가 아니라 일종의 유물론자로 재탄생하며, 탈관념론의 선구자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셸링을 유물론 계열의 철학자로 읽어낸 최초의 책이 됐다.

더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유물론자’ 셸링의 모습을 청년기 저작이 아니라 후기 저작에서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세계로 빠져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후기 셸링이야말로 유물론자 셸링이라는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셸링의 미완성 저작 <우주의 역사>를 탐색한다. 셸링은 <우주의 역사> 초고를 1811년부터 5년 동안 세번이나 쓰고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지젝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그 세 편의 초고다. 이 초고 상태의 글에서 셸링은 ‘신의 역사’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한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그 태초 이전의 상태에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태초 이전에 카오스적 상태의 우주가 있었으며 그때 우주는 맹목적 충동 그 자체였다. 태초 이전에 신은 이 카오스적·맹목적 충동이었다. 이 충동이 모든 것의 토대다. 이 토대에서 신이 스스로 독립해 나와 자기 자신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신이 곧 이성이고, 그 이성이 역사의 주체다.

이렇게 신비주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세계의 기초로서의 ‘토대’가 바로 셸링 유물론의 근거이다. 이성은 바로 이 비이성적 토대에서 탄생한다. 비이성이야말로 이성의 바탕이다. 문제는 그 토대를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젝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개념을 동원해 셸링의 철학을 설명한다. 셸링의 그 비이성적 토대를 ‘나눌 수 없는 잔여’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포착할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는 토대, 그것을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실재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실재계가 현실(상징적 질서)의 세계로 들어올 때 바깥에 남게 되는 것이 ‘나눌 수 없는 잔여’다. 요컨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라 해도 그 토대에 비이성적인 불가해한 것을 깔고 있으며, 이성은 언제나 이 비이성과 얽혀 있어서, 칼로 무를 자르듯 깔끔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분석은 해독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긴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통해 셸링의 <우주의 역사>는 “메타심리학적 작품”이 된다. 

지젝은 이 책에서 셸링의 유물론이 철학사에서 ‘사라지는 매개’ 구실을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사라지는 매개’라는 개념은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한테서 빌려온 말인데, 제임슨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요약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사라지는 매개’였다는 것이다. 봉건제 시대에 종교는 경제와 분리돼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새로운 신앙이 등장하고서야 종교 안으로 경제가 들어왔다. 재산을 축적하고 노동에 매진하는 것이 구원의 표지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런 종교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가 발흥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결국 쇠퇴하고 말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였던 것이다. 셸링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셸링의 유물론적 철학은 독일 관념론의 세계 안에서 신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사유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유물론이 이후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진정한 유물론으로 이어졌다. 셸링이 관념론 안에서 유물론적 사유의 씨를 뿌렸고 이 씨가 발아해 관념론 형식을 벗어버리고 유물론으로 자라났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라지는 매개’로서 셸링 철학의 철학사적 기여인 셈이다.(고명섭 기자) 

10. 10. 29.  

P.S. 책의 부제는 '셸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인데, 1부의 두 장이 '셸링에 대한 에세이'라면, 2부의 3장 '양자물리학과 라캉'이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다. 개인적인 관심은 일단 셸링보다는 관련된 문제들 쪽에 쏠린다. 사실 셸링 철학이 양자물리학보다 더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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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10-3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제목만 보면 왜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네요 ㅋㅋㅋ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말을 처음 보고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너무 궁금해서 원제를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ㅎ

로쟈 2010-10-30 08:36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환상이라는 돌림병' 그런 식으로 번역이 됐어야 할 거 같은데, 처지가 바뀌었어요...

sommer 2010-10-31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셸링을 유물론적으로 다룬 건 지젝도 참고했다고 말했듯이, 그가 처음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하버마스(인식과 관심에서 셸링과 맑스의 연관을 다루고 있는 논문)와 만프레드 프랑크의 '존재의 무한한 결핍'이 있다는 것도 덧붙여야 할 거 같군요.

로쟈 2010-11-01 14:39   좋아요 0 | URL
단행본 분량으론 처음이란 뜻인가 봅니다...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프랑스의 국제철학학교를 다룬 다큐영화 <철학의 권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국내 상영소식은 접했지만, 시간은 낼 수 없었는데, 기사는 현장의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맛보기 영상도 같이 옮겨놓는다.  

  
(왼쪽부터) 국제철학학교를 설립한 자크 데리다, 「철학의 권리」 의 니시야마 유지 감독, 백영서 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

교수신문(10. 10. 04) 思惟의 장에 던진 지적 자극 … 새로운 목소리는 무엇인가   

1983년 프랑스 파리 제5구역에 위치한 데카르트 거리. 그곳에서 꺼져가던 68혁명의 소산, 실험대학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국제철학학교의 시작이다. 자크 데리다, 도미니크 르쿠르 등이 세운 이 학교는 국가지원금을 재원삼아 비영리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비는 무료다.

철학 교육의 새로운 방식 제도화
다양한 학문 간의 대화를 실천하고, 철학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이 학교를 담은 다큐멘터리 「철학의 권리」가 지난달 28일 연세대 국학연구원(원장 백영서 사학과) 초청으로 연세대 학술정보관에서 상영회를 가졌다. 상영 후에는 감독인 니시야마 유지 일본 도쿄메트로폴리탄대 교수(철학)와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 나종석 연세대 연구교수(철학), 후지타 히사시 큐슈산업대 교수 그리고 70여명의 관객이 참여해 국제철학학교와 오늘날 철학의 역할에 관해 논의를 펼쳤다. 

  

「철학의 권리」는 국제철학학교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지난해 9월부터 일본을 비롯해 중국,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30회가 넘는 상영회를 개최했다. 2011에는 영국과 독일, 불가리아 등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배경은 데리다가 창설한 국제철학학교지만 단순히 데리다 철학이나 학교를 소개하는 영화는 아니다. 니시야마 유지 감독은 철학자로서 대학 및 인문학과 연관된 여러 문제들을 미셸 드기, 프랑소와 누들만, 브뤼노 끌레망 등 역대 국제철학학교의 총장과 보얀 만체프 부총장, 그리고 국제철학학교의 전·현직 디렉터들과 만나 인터뷰 형식으로 담담히 풀어간다. 특히 니시야마 감독은 글로벌한 자본주의 시대에서 효율성과 수익성의 논리에 밀려 퇴출 위기에 처한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의 존재 이유와 그것들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국제철학학교의 사례를 통해 모색했다.

국제철학학교는 프로그램 디렉터 50명의 합의제로 운영된다. 50명의 디렉터 중 10명은 외국인이다. 초등학교 교사부터 대학 교수까지 누구나 디렉터가 될 수 있으며 그만큼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교사들의 관계는 평등하다. 국제철학학교는 대학이나 공공연구기관과는 다른 시민단체 혹은 시민들의 결사체다. 여러 정부 기관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만 연구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는 않는다. 국제철학학교의 교육 역시 무상이며, 학위제도도 없다.

국제철학학교는 이런 ‘특별한 방식’의 제도화를 지향한다.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철학학교는 제도란 이념을 해체 또는 탈구축하려는 활동의 장이다. 즉, 기존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기존 제도권 인문학에 의해 질식당했던 철학적, 인문학적 사유를 무한하고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에 개방하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주는 울림이 클수록 영화를 보는 국내연구자들과 관객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예정보다 30여분 가량 길어진 토론회에서는 새로운 소통방식으로서 국제철학학교가 던지는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대학의 안과 밖에서 철학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등 논의가 이어졌다. 또한 국제철학학교 관계자들의 진술로만 진행되는 영화의 진행방식이 오히려 국제철학학교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학문적 결과를 대학밖 시민과 공유하기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니시야마 감독은 이미 이전 상영회들을 통해 인터뷰만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전개방식이 여러 번 지적됐었다고 운을 땐 뒤, “영화의 목적이 국제철학학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과 인문학의 미래를 고민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굳이 학교의 모습을 찍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이들의 진술이 가진 보편적인 힘을 믿었다”고 답했다.

후지타 히사시 교수는 「철학의 권리」의 내용과 의의, 상영 모두를 하나의 ‘여행 과정’에 비유했다. 또한 철학자인 니시야마 감독이 영화 제작에 도전함으로써 그 동안 수동적이었던 일본 인문학 연구의 방법을 표현운동 등으로 다양화했다고 평가했다.

참여연대에서 시민교육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주은경 부원장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국제철학학교의 운영방식에 주목했다. 더불어 “국학연구원처럼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는 대학 기관이 그 학문적 결과를 대학 내에서 뿐 아니라 대학 밖의 시민들과 어떻게 나눌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회를 맡은 김항 고려대 연구교수(철학)는 그에 대한 답을 플로어에 앉아있던 백영서 원장에게 돌렸다. 백 원장은 “사실 대학 내 연구자들 대부분은 대학을 벗어난 사고에 익숙치 않다. 그러다보니 제도 안에서 인문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인정하며 “대학 구성원들의 사고부터 다양화 하자”고 촉구했다. 일반 대학의 철학 강의가 고정된 캠퍼스 안에서 이뤄진다면 심포지엄, 세미나, 워크숍을 포함한 국제철학학교의 강의는 대학의 안과 밖, 국내와 국외의 구분 없이 이뤄진다. 대학에서의 세미나와 시민 강좌의 형식이 이중적으로 중첩돼 있는 형태다.

니시야마 감독은 영화 제목인 「철학의 권리」는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을 향한 권리’라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철학의 권리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철학은 대학, 철학 텍스트, 철학사 등 제도에 의해 보호를 받아왔다. 그런데 데리다는 지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이 제도에 의해 보호 받아왔다는 사실 사이에서 사고를 정리한다.”

영화 내내 데리다가 주장한 ‘탈구축’이 주요 화두로 언급됐다. 이 때, 탈구축은 ‘제도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문제 삼아야 하는 제도적 실천’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철학의 권리」는 철학과 인문학이 본래의 사회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적절한 만남의 공간이 창출돼야 한다는 의미 있는 대안을 던졌다. 오랜 기간 위기에 빠져 있던 인문학은 「철학의 권리」에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우주영 기자) 

10.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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