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무기력증이란 병명이 혹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끔씩(자주?) 그런 증세에 시달린다. 심리적 이유가 클 듯싶은데, 오늘 같은 경우는 어제 배송예정이었던 책들이 대거 펑크가 난 탓도 있다. 주말에 참고해야 할 책들도 껴 있건만 추위를 핑계로 예정보다 2-3일씩 늦어지고 있다(오히려 당일 주문한 책은 배송됐으니 추위 탓만도 아니다). 그런 책 중의 하나가 슬라보예 지젝이 편집한 <코기토와 무의식>(인간사랑, 2013)이다.

 

 

'라깡정신분석연구회'에서 공역한 두번째 책인데, 먼저 나온 책이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인간사랑, 2010)였다. 이 두 권의 공통점이 듀크대학교에 나오던 'SIC' 시리즈의 1, 2권이라는 점(<레닌 재장전>도 이 시리즈의 한 권이다). 이 시리즈의 대표 편집자가 슬라보예 지젝과 레나타 살레츨이다.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으로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도서출판b, 2003)의 저자이기도 한 살레츨은 지젝의 두번째 아내였다. SIC 시리즈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차례로 7권이 출간됐는데, 더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에 적어놓는다(*책을 받아보니 3권과 6권이 <성화>와 <정신분석의 이면>이란 가제로 번역될 예정이다).

 

1.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1996)

 

  

2. <코기토와 무의식>(1998)

 

 

3. <성별화>(2000)

 

 

4. <도착과 사회적 관계>(2003)

 

 

5. <신학과 정치적인 것>(2005)

 

 

6. <자크 라캉과 정신분석의 이면>(2006)

 

 

7. <레닌 재장전>(2007)

 

 

13. 01. 06.

 

 

P.S. 이 시리즈에 덧붙여 개인적으로는 살레츨의 <불안에 대하여>(2004), <선택>(2011) 등도 번역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지젝의 책이야 따로 바람을 적지 않아도 앞으로도 충분히 번역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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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엔 일년에 두어 번씩 온라인서점을 통해 러시아 책을 구입하는데, 빠뜨리지 않는 건 지젝이나 라캉의 신간이다. 오늘 오랜만에 주문한 책 가운데는 지젝의 신간 두 권도 포함돼 있다. 한국어판으로 치면 하나는 <멈춰라, 생각하라>(와이즈베리, 2012)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 2002)이다. 전자는 지난 연말에 나왔고, 후자는 그보다 10년 전에 나와서 벌써 절판된 책이지만 러시아어판으로는 2012년에 나온 신간으로 나란히 뜬다(러시아에서 지젝은 국내에서보다 지명도가 높지 않고, 책도 듬성듬성 소개된 편이다). <환상의 돌림병>은 표지가 특별하지 않지만 <멈춰라, 생각하라>의 러시아어판 표지는 꽤 맘에 들기에 옮겨놓는다. 러시아어판의 제목은 <불가능한 해>이다.

 

 

 

 

13.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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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안내이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인터파크와 함께 진행하는 '하이브리드 인문학 강연'의 5회차이자 올해 마지막 순서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이다. 강연 제목은 '실재의 사막으로 가는 초대장'이라고 붙여졌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멈춰라, 생각하라>까지의 여정과 지젝의 문제의식을 소개할 예정이다.

 

 

 

행사 일시는 12월 26일(수) 저녁 7시이며, 장소는 합정역 부근에 있는 자음과모음 사옥 5층 강연장이다. 무료강연이며 참석자들께는 인문교양분야 최신간 2권씩을 드린다고 한다. 참가신청은 http://book.interpark.com/book/genbookeventaction.do?_method=EventPlan&sc.evtNo=132902&bid1=search&bid2=product&bid3=event&bid4=001 에서 하실 수 있다.

 

 

1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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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치과에 다녀왔지만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아 점심을 못 먹고 있다. 막간에 서재 들어왔다가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와이즈베리, 2012)에 실은 '감수의 글'을 옮겨놓는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에서부터 <멈춰라, 생각하라>에 이르는 지젝의 작업과 그 의의를 간추리고자 했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21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가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겪었다고 규정한다. 하나는 70여 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  곧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체제 경쟁, 이데올로기 경쟁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선언되었고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정치체제의 마지막 형태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곧바로 등장했다. 1991년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자 세계의 패권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갔다. 더 이상 눈치를 보면서 경쟁할 상대가 없어지자 자본주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로 질주했고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강화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극대화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심화되었다.


2001년의 9.11 테러는 이러한 흐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전면에 재등장했고 역사의 시계는 다시 태엽이 감겼다. 테러 공격으로 뉴욕 한복판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린 충격적인 사건은 그 스펙터클을 통해, 우리가 이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공격을 받은 미국 내부에서부터 “9·11 이후, 그 어떤 것도 예전과 똑같을 수 없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획기적인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서 기존의 패권주의를 재천명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나갔다. 돌이켜보자면 대테러전쟁의 작전명이 ‘무한한 정의’였다는 사실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이제 우리가 피해자다!”라는 람보식 울분을 터뜨리며 정의의 사도를 자처한 행태의 난센스가 그 하나라면, 그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진리가 또 다른 하나의 의미다. 정의는 그렇게 유예되었다.

 

 


무엇이 미국의 올바른 선택지였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일은 ‘여기’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거라고!”와 같은 미국의 예외주의적 태도가 최악의 선택지였다면 최선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돼!”에서 “그 어디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로의 전환 혹은 이행. 이것이 우리가 9.11에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이고, 또 교훈이어야 했다. 그러한 보편성의 실현과 확장이 과연 불가능한 미망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내기는 그렇지 않다는 쪽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의 내기는 그 불가능성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기획에 있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란 화두는 그의 내기를 집약해주는 문구다.

 

 


‘역사의 종말의 종말’과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종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주소다. 그 무엇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는 또 다른 파국으로 직행하고 있는 묵시록적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슨 일을 겪고 있는가. 9.11 테러와 뒤이은 이라크 전쟁, 그리고 2008년에 들이닥친 세계 경제 위기 등, 지젝은 이 모든 것을 헤겔 철학과 라캉 정신분석의 개념을 동원해 충실히 기록하고 해명하면서 우리 시대의 인식적 지도를 그려왔다. <멈춰라, 생각하라>는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바로 지난해, 2011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세계 곳곳에서 번져 나온 ‘해방적인 꿈’과 ‘파괴적인 꿈’ 들을 다시금 음미하며 우리가 갖고 있는 지도를 ‘업그레이드’한다


이러한 작업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다. 역사적 사건들의 기억을 봉쇄하고 그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작업이자 과제라면, 지젝은 거꾸로 그 사건들을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현실의 핵심 적대와 관련하여 재구성하고 재배치한다. 이제까지 지젝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를 통해 우리의 현실이라는 좌표를 어떻게 변경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탐문해왔다.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라는 게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이며, 이 책에서 보여준 그의 작업은 그러한 정의에 충실하다. 덕분에 우리는 지젝과 함께 모든 문제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자본주의의 궁극적 귀결이 ‘1퍼센트를 위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파국적 종말을 뜻한다면, 그것은 지속될 수도 없고 지속되어서도 안 되는 체제다. ‘분노하라!’(스테판 에셀)와 ‘점령하라!’가 우리의 구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우리의 긴급한 요구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2012년 초 슬라보예 지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유를 시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멈춰라, 생각하라>는 바로 그러한 요청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지 보여주는 전범적 사례다. 핵심은 두 가지다. 멈춰라. 체제의 작동에 일조하는 일에서 한걸음 물러나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는 제안한다. 물론 그러한 직시는 ‘생각하라!’는 또 다른 수행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요청은 근대 자본주의적 인간의 표상이라고 할 만한 파우스트의 구호와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갖는다. “멈춰라, 순간이여,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모든 욕망이 실현될 그 순간에 파우스트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넘기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모두 그 파우스트의 후예인가? 자본주의적 향락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인가? 최후까지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붙잡으려는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는 ‘가련한 자’라고 불렀다.


지젝은 이 가련한 자들의 파티장에 나타난 불청객이다. 그는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2011년 아랍의 봄에서 월스트리트 시위까지 종횡하는 <멈춰라, 생각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최신판 인식적 지도이자 도전적 사유다. 무엇을 생각할 수 있고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가. 그는 미망 너머에 있는 ‘진짜 현실’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시대의 헤겔’과 함께 우리는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더 단단해질 것이다. 바야흐로 단단한 자들이 오고 있다.

 

1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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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0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젝 방한기 <임박한 파국>(꾸리에, 2012)을 다뤘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멈춰라, 생각하라>(와이즈베리, 2012),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와 함께 '3종 세트'로 읽는다면 지젝 입문뿐만 아니라 현단계 세계정세에 대한 입문으로도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좀더 두꺼운 책들이 번역돼 나올 전망이다...

 

 

 

주간경향(12. 12. 11) 붕괴 직전에 놓인 자본주의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여행기 제목을 빌리자면 <임박한 파국>은 ‘여름 강의에 대한 겨울 결산’에 해당하는 책이다. 지난 6월 말 방한한 지젝은 홍세화 진보신당 전 대표, 설치미술가 임민욱씨와 인터뷰를 하고 두 차례 대중강연을 가졌다. 이 ‘결산 보고서’에는 당시 인터뷰, 강연 내용, 청중과의 질의 응답, 그리고 방한 일정을 조율하고 진행했던 이택광 교수의 후기가 담겼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먼저 제목 그대로 ‘임박한 파국’에 대한 주의의 환기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 자신 현장에서 즉석연설을 하기도 했던 2011년 가을 월가 점령시위도 이러한 구조적 위기상황에 대한 통찰에 빚지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종말 이후를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의 실상은 무엇인가. 지젝은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나온 유머를 예로 든다.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하지만 크림이 다 떨어지고 우유만 있기 때문에 크림 없는 커피는 없고 우유 없는 커피만 있다는 게 웨이터의 대답이다. 크림 없는 커피나 우유 없는 커피나 똑같은 커피지만 무엇이 없느냐에 따라 커피의 종류가 달라진다. 그렇게 부재 혹은 부정은 정체성을 구성한다. 지젝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중국, 북유럽 등 성공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가 기능이 망가져 있는 콩고와 같은 나라도 포함한다. 자본주의의 대표적 성공사례인 애플은 어떤가. 아이패드의 위탁제조업체가 중국에 공장을 둔 폭스콘이다.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중국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로 큰 물의를 빚은 곳이기도 한데, 폭스콘의 대만인 회장은 “매일 100만 마리의 동물들을 관리하느라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래서 타이베이 동물원 원장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했다나. 폭스콘은 새로운 성공신화를 쓴 애플의 이면이다. 중요한 것은 폭스콘이 없는 애플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그러한 어두운 이면과 배제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임박한 파국에 직면하여 당연히 요구되는 과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다. 지젝은 오늘날 좌파의 임무는 답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지라도 과거의 해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어떤 노스탤지어도 거부해야 한다는 게 지젝의 입장이다. 그는 ‘거대한 혁명’에서 가능성을 찾지도 않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좌파의 고민은 거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도그마적인 사고를 지양하고 이상주의와 결합된 실용주의적 정신이 필요하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의 생각이 우리 현실에는 어떤 효용을 가질까. 당신의 이론도 스타벅스 커피처럼 소비되는 것 아니냐는 한 청중의 질문에 지젝은 그럴 수도 있다고 흔쾌히 인정한다. 하지만 지난 6월 총선이 있던 그리스에서 지젝은 농담이나 던지는 ‘미친 철학자’가 아니라 급진좌파연합의 ‘비밀스런 멘토’로 지목돼 공격받기도 했다. 똑같은 지젝이지만 우리에겐 ‘스타벅스 철학자’와 ‘가장 위험한 철학자’란 다른 종류의 선택지가 주어진 셈이다.

 

12.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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