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을 내고 대학내일과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그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로 시작해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로 마무리지었기에 나름으로는 2011년 결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대학내일(589호) 로쟈를 거쳐 지젝을 지나 실재의 사막으로

 

인문학자 이현우  혹은  로쟈

구 동독 시절 농담 하나. 동독의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 일자리를 얻었다. 생활환경이 좋다고 홍보하는데 당연히 미심쩍다. 노동자가 친구와 약속하길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우리 암호를 정하자. 내가 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그 내용은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는다. 편지엔 모든 게 훌륭하다고 적혀 있다. 음식은 풍부하고, 아파트는 넓고, 영화관에선 서구권 영화를 마음껏 틀어주고. 그런데 친구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문장, “딱 하나 빨간 잉크만은 구할 수가 없더라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현장에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인간 확성기’를 이용해 미국인들에게 이 우화를 전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에 과연 자유와 민주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동물과 섹스할 자유마저 있지만, 부자들의 세금 10% 높일 자유는 없는 곳, 생명연장기술이 찬란하게 발전 중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병원조차 갈 수 없는 곳. 지배 권력의 프레임 탓에 자유롭지 못함을 자각조차 못 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우리 생각의 한계를 꼬집는 지젝은 현대판 소크라테스다.


이번 인터뷰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유명한 인문학자 이현우 교수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나눈 내용이다. 이 교수는 최근 책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출간했다. 지젝의 저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풀어 전달하는 내용이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지젝을 읽고 지적으로 무장하길 바랬다.(이정섭기자) 

 

 

9 .11은 미국의 과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자주 들어왔던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관심을 익히 알 테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으니 왜 지젝을 이야기하는지 다시 한 번 설명해달라.
금융위기 이후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다음 올 세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부분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지젝은 가장 좌측에 있는 사람이다. 깃발만 거기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논리와 설득력이 있다. 1대 99의 사회에서 99%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실재에 대해 필독할 필요가 있다. 그냥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기득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고의 프레임 자체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1%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왔다. 속고 이용당해 온 사람들이 지젝을 통해 자신을 지적으로 무장했으면 좋겠다.  

 

책 서문에 ‘지젝거리다’ 할 정도로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라고 소개했는데, 견문이 짧아서인지 나는 그렇게 많이 들어본 것 같진 않다.
식자층, 특히 문화비평, 영화비평 쪽에서 정말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인데, 그 밖과는 좀 갭이 있다.  책도 그렇게 많이 팔리는 편이 아니다. 이름이 자주 거론되니까 기자들도 책이 꽤 읽히는 것으로 착각하더라. 시장성은 적지만 네임 밸류가 있으니까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데 그만큼 읽히진 않는 게 현실이다.

 


보통 9. 11사태를 문명 간 충돌의 시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데, 지젝은 9. 11사태 미국의 과잉이라고 해석한다.
문명의 충돌로 프레임을 짜는 것 자체가 미국식 시각이다. 자기들 주류적인 세계관을 주입하고 싶어서 만들어내는 것이고, 여기서 문제는 이 체제에서 고통 받는 제3세계 사람들마저 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이슬람의 이미지, 폭력적이고 우리와는 뭔가 다른 이슬람의 이미지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가 보는 현상 너머의 사막과 같은 실재를 보고 경험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로 치면 빨간 약을 먹고 실재 세상을 보는 것처럼.

 

미국의 과잉이란 표현이 어렵다. 설명해달라.
경제학의 경기론을 보면 호황과 불황 곡선이 있잖은가. 미국의 과잉이란 말도 그것과 같다. 미국의 힘이 모자랄 때도 있고 과하게 넘칠 때도 있다. 미소 냉전 시절 미국은 이슬람원리주의를 지원해 소련과 맞섰다. (영화 ‘람보 3’를 보면 람보가 이슬람 무장 세력과 함께 소련군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성장한 이슬람원리주의 단체들이 미국의 중동 정책과 부딪치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슬람원리주의는 타자적인 게 아니다. 미국 바깥에 있던 게 아니라 미국 패권을 위한 수단이 과잉이 돼서 돌아온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외부에서 온 문제냐, 미국 자체의 과잉이냐에 따라 해결 방향이 상당히 달라진다. 외부, 즉 이슬람 문명에서 온 문제라면 오히려 쉽다. 이슬람원리주의자만 모두 없애면 문제가 사라진다. 근데 과연 그럴 것이냐. 그럴 것 같지 않다. 한때 파시즘이 그렇고, 공산주의가 그랬듯, ‘진짜 이번 적만 없애면 끝이다’ 싶지만 어느 순간 또 다른 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또 하나 재밌는 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미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미화하는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다. 동양적인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든 경멸의 대상으로 삼든 그 기저는 같다. 보편성의 논리로 보지 않는 것. 상대를 우리랑 다른 존재, 우리랑 소통되지 않는 존재로 보는 것이 문제다.

 

 

상상조차 못하는 부자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도중 지젝이 중국 이야기를 했다. 중국이 대안적인 세상을 그리는 영화, 소설 등이 금지됐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미국은 상상할 능력마저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적절하게 표현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현실’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재’적으론 자유롭지 못한 것.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 ‘매트릭스’에서 그렇듯 안락하게 몽상의 세계에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속고 있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익숙한 사고에서의 탈주가 있어야 한다.

 

지젝이 건네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평소 듣지 못한 내용이고, 낯선 생각의 단초가 된다. 예를 들어 중국 올림픽 때 매스게임 보면서 뭔가 전체주의적 느낌을 받았는데, 책에서 지젝은 매스게임을 그렇게 보는 고정관념 자체가 잘못돼 있다고 지적했다.
흔히 매스게임을 원조 파시즘으로 해석하는데, 그것과는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집단 퍼포먼스는 본래 노동자 운동의 한 요소다, 그것을 파시즘이 갖다 쓴 것이다. 공산주의 매스게임을 보며 파시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건 지배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바꿔놓은 순서로 인식하는 것이지.
 
비폭력 시위가 옳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카페인 없는 커피’ 같은 것이라며 비판한다.
운동에 폭력을 쓰느냐 마느냐는 따로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상황은 반복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최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무조건 비폭력이 옳다’ ‘폭력은 항상 정당하다’ 그런 건 없다. 정세를 판단해 가장 강력한 수단을 택해야 한다. 간디의 인도 해방 때는 비폭력이 강력했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 땐 폭력이 강력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일반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닌을 반복하라
공산주의(코뮈니즘)이란 말 자체도 요즘엔 지식인들이 웬만하면 피하려는 단어다. 지젝처럼 자신을 공산주의라고 내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공산주의라는 단어와 함께 거대한 수용소, 강제적인 의식화, 활력 없는 사회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은 우리나라 교육체제의 승리고. 프로파간다의 승리다. 지젝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이야기한다. 보통 현실은 어떤 선택지를 강요한다. 예를 들어 취업해서 잘 먹고살든가, 취업하지 않고 굶든가. 레닌은 현실이 강요하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행동을 통해 불가능을 돌파했다. 여기서 레닌을 반복하라는 건 레닌이 했던 것을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레닌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자리가 있다. 전체 인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문턱. 실패하되 더 낫게 실패하라.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역사의 폐기장에 던지지 말고 그 원래 자리로 가서 다시 한 번 시도하라. 전철이 있으니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또 실패할 수도 있고.

 

지젝은 현재의 의회 민주주의는 반대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말이 대의제이지 별로 대의가 되지 않지 않는가. 가진 사람 의견만 대의하니까. 지금 보면 거의 과두제화돼 있지 않은가. 해결책을 고민하는 한쪽은 최장집 교수처럼 기존 대의제 시스템은 유지하되 어떻게 대표성을 강화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이 제도 자체가 한계가 있으니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까?
흔히 누군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그 대안이 뭐냐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만한 사이즈의 뭔가를 가져오라고 이야기하는데, 지젝은 지금이 파국적 마지막 상황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런 것을 절박하게 발명해야 될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여러 방식이 가능하지만 미리 예단할 수 없다. 나꼼수의 돌풍을 보라.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무도 알 수가 없던 일이다. 변화된 정황, 매체의 변화, 사회적 분위기가 결합해 나온 게 나꼼수다. 미리 계획을 다 짜놓고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해서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젝이 제안한 건 소비에트식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이다. 직접민주주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인구수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데 그렇게 불가능하지도 않다. 기술적으로 그런 게 가능해진 시대이지 않은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가능한 방법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찾아가는 것, 길을 찾아가는 게 오늘날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게 있다면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부자 세금도 마찬가지. 10%? 30%? 그중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거 아니다. 모두 사람이 만든 규칙이다. 원래 있던 규칙을 자연법칙처럼 인식하는 것. 현 상태를 ‘자연화’하려는 게 보수다.

 

 

곁다리의 가치
지젝의 나머지 내용에 대해선 독자의 독서를 위해 남겨두고 인문학 자체에 대해 묻겠다. 한동안 유용성이 없다고 취급받던 인문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문학 서적 중엔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처럼 인문학을 통해 개인을 치유하려는 책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당신은 한 방송에서 인문학은 희망이나 행복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인문학자마다 관점의 차이는 있다. 나는 인문학이 공동체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거라면 그런 면에선 희망을 품기 조금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인이라면 직장을 갖고 수입을 늘려가면서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보면 쉽게 희망을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 이야기다.

 

행복이란 값어치가 없는 말이라고도 했다.
행복이란 게 상당히 오용되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행위의 목적으로 행복을 이야기할 때는 그 행복은 에우다이노미아(eudaimonia)다. 지속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우리가 쓰는 행복(happiness)하고는 다르다. 복권 당첨, 승진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남과 비교했을 때 차별적인 행복이다. 전쟁에 나갔는데 옆에 있는 병사가 화살에 맞는 게 행복이란 말이다. 자신은 안 맞았으니 속으로 기쁜 거야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대놓고 만세 부를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가령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취업을 하면 행복해하는데, 99명이 1명을 위해 들러리 서는 시스템을 문제라고 생각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당신은 자신을 전체주의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지젝이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쓴 책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도 번역돼 나와 있는데. 나는 나 자신을 지식 전체주의자, 혹은 공유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지식의 많고 적음이 어떤 차등적 대우의 근거가 되는 것에 반대한다. 블로그 활동도 그런 것의 일환이다. 영어로 된 콘텐츠는 인터넷상에 이미 상당히 많다. 대학마다 공개강의도 영상으로 올라와 있고. 무료로 접할 수 있는 지식 정보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똑똑해질 수도 있다. 나는 그게 중요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격차가 큰 사회보다 중간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마지막 질문이다. 스스로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하는데 이유는 뭔가?
내가 곁다리 인문학자라고도 쓰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곁에 두는(beside)의 뜻이 있다. 인문학에 발을 담그고 있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항하다(against)의 의미다. 어깃장을 놓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이다. 한 일본 학자가 말했듯 서구인이 하면 ‘인문학’, 제3세계인이 하면 ‘인류학’인 꼴이다. 서구의 시각으로 돼 있기에 제3세계의 본 생각이 반영되긴 쉽지 않다. 그리고 인문학엔 보수주의도 있다. 소위 교양주의라고 불리는 ‘나는 이만큼 알고 있는데 쟤는 잘 모르지. 그러니 내가 우월해’식의 사고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에 beside와 against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본다. 인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하고 교정해가면서 동시에 인문학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 이용가치를 선용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언젠가 당신이 인문학을 등쳐 먹고 인문학이 또 당신을 등쳐먹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웃음)내가 인문학 때문에 세월을 보냈으니 제 인생을 등쳐 먹은 게 맞지. 곁다리란 말엔 사실 친근감을 느낀다. 한 문학평론가가 머리말이라든가 책 표지에 있는 글 같은 걸 뭉뚱그려 곁다리 텍스트라고 한 적이 있다. 메인이 아닌 그런 텍스트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나 역시 메인 텍스트를 이용해 곁다리 텍스트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제 몫이 있다고 본다. 지금 세상은 연구를 열심히 해서 좋은 인문서가 나와도 그 텍스트가 전파가 안 된다. 사회적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다리 역할이 필요한데 내 책도 그런 역할이다. 지젝하고 독자하고 사이에 거리감이 있으니 좀 좁히고 싶다. 가령 징검다리로 개천을 건너는데 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가운데 하나를 놓고 싶은 거고. 그래도 넘기 힘들면 하나 더 놓고. 그런 작업이 필요한 것 아닐까. 독자가 성장해서 컴퍼스가 길어지면 중간 돌 필요 없이 그냥 건너가면 되고.


지금 이 인터뷰도 지젝과 로쟈에 가까워지는 돌이 됐으면 좋겠다.

 

11.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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