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주저 <레스 댄 낫씽(Less than Nothing>(2012) 번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제목이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새물결, 2013). 분량상 두 권으로 분권돼 각기 다른 제목이 붙여졌다(책값은 원서와 비슷하다). 처음 검토중이라는 번역본의 제목을 듣고, 귀를 의심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낙착된 모양이다.

 

 

원제를 옮기긴 어렵겠지만, 이 묵직한 철학서를 제목만 소프트하게 비꾼다고 해서 독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부제대로 <헤겔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림자>로 가든가 <헤겔의 유산> 같은 제목이 어땠을까 싶다. 

 

 

아무려나 제목과 무관하게 8월에 땀흘리며 읽어야 할 책 하나가 늘어났다. 지젝도 곧 방한한다고 하는데, 출간과 맞물려 행사라도 갖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기대를 갖고 있는 지젝의 올 예정작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폴리티, 2013)다. 한국어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의 영어판. 인디고 연구소에서 기획하고 류블랴나까지 직접 찾아가서 인터뷰한 책인데, 편집은 한국어판과 다르다고 들었다. 근간 예정으로는 R. 버틀러의 <지젝 사전>도 궁금한 책 가운데 하나.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와 같이 읽으려고 하는 책은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다. 부분적으로는 세번째 읽는 게 된다. 지젝-헤겔-라캉과 씨름하다 보면 가을이 코앞에 와 있겠다...

 

13.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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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만약 이번주에 휴가를 간다면 가방에 제일 먼저 챙겨넣을 책은 <아듀 데리다>(인간사랑, 2013)다. 데리다의 죽음에 부친, 그를 추모하는 철학자들의 글모음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 등의 추모사도 포함돼 있다. 편자는 코스타 두지나.

 

 

사실 데리다 자신이 '추모사' 전문이었기에, 코스타 두지나는 서문 격의 글에서 '데리다의 추모사'를 데리다적 스타일로 해명한다. <아듀 데리다>란 번역본 제목이 예고됐을 때, 나는 데리다가 쓴 <아듀>인 줄 알았는데(레비나스를 추모하는 책이다), <아듀 데리다>(2007)가 따로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복사라도 해두었을 성싶은데, 지금 원본을 따로 찾을 수 없다(하드카바 원서는 너무 비싸서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당장 읽는다면 번역본으로만 읽어야 하는데, 다행히 번역이 좋은 편이다.

 

 

뒷표지에는 지젝이 데리다에게 보내는 추모사,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에서 한 대목이 실렸는데(아무래도 국내에선 지젝이 대세 철학자인지라) 이런 대목이다(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데리다와 내가 한 배를 타고 있음을 발견한 지금, 관계를 조정하고 때늦은 연대감을 표명할 때가 된 듯하다. 데리다의 작품들과 씨름하는 많은 페이지들을 썼고, 이제 데리다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지금이 어쩌면 데리다가 차연이라고 부른 것과 내 작품의 친연성을 지적함으로써 그에 대한 기억에 경의를 표할 때인 듯하다.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데리다는 해체가 과격하면 할수록 어떻게 그것이 해체의 내적 조건, 즉 정의에 대한 메시아적 약속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 강조했다. 이 약속이야말로 바로 데리다적인 신념이 대상이다. 데리다의 궁극적인 윤리적 원칙은 이 신념만큼은 환원 불가능하며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온갖 종류의 역설을 허용할 수 있다.

데리다와의 오랜 불화를 접고 '때늦은 연대감'을 표명하고 있는 추모사. 차연(데페랑스)으로의 복귀를 호소하는 글답게 지젝은 마지막에 데리다의 차연을 이해하지/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그답게 설명한다.

 

라캉의 말처럼 욕동의 진짜 목적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것이다.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진 어느 바보에 대한 유명한 음담패설에서 여자는 그에게 무엇을 할지 정확하게 말해준다. "내 다리 사이에 이 구멍이 보이지? 그것을 여기에 넣어, 이제 깊숙이 밀어넣어, 이제 빼, 밀어넣어, 빼, 밀어넣어, 빼..." 잠깜만'하고 바보가 여자에게 물었다. "결정을 해! 넣어 아니면 빼?" 바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은 바로 미결정 그 자체, 반복되는 망설임 속에서 만족을 얻는 욕동의 구조이다. 다시 말해서 바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데리다의 차연이다.

두 철학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13. 07. 07. 

 

 

 

P.S. 짐작에 지난 일년 정도 기간에 구입한 데리다 관련서들이다. 베누아 페터즈의 전기 <데리다>는 결정판 전기라 할 만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평도 좋다(놀랍게도 저자는 비평가이면서 만화작가이자 소설가이다). 데리다의 독자라면 필수 소장 아이템. 읽는 건 '휴가' 때나 가능하다는 게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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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 상영과 토크 행사가 있었다. 게스트로 참여하면서 부담이 없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청중이 함께해 주어서(게다가 열띤 질문까지 해주어서) 예정 시간보다 늦게 끝나고 몇 분과는 뒤풀이까지 가졌다.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처럼 이 영화도 DVD판으로 출시되기를 기대한다.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래는 영화제 웹진에 쓴 짤막한 리뷰이다(아래 이미지는 영화 <풀 메탈 재킷>의 한 장면 속에 들어간 지젝).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의 포스터와 러시아 포스터를 사이에 집어넣었다.  

 

 

소피 파인즈의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2012)는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2006)에 이은 지젝과의 두 번째 작업이다. 초점은 ‘영화’에서 ‘이데올로기’로 옮겨왔지만, 이 두 편의 다큐영화는 마치 형제 혹은 자매처럼 여겨진다. 영화에 대한 지젝의 관심과 열정적인 분석이 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징후적 독해로 나아간 걸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내놓고 드러내는 이데올로기적 영화도 있지만, 보통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다. 하지만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강의’의 서두에서 지젝은 존 카펜터의 <화성인 지구정복(They Live)>(1988)을 숨은 걸작이라고 치켜세운다. 영화에서 떠돌이 '나다'가 우연히 발견한 선글라스는 지구의 황량한 진실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그것은 대부분의 지구인들의 정체가 인간의 탈을 쓴 외계인이라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랄한 폭로이면서 탐욕적인 소비주의 문화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지젝은 <죠스>에서 <풀 메탈 재킷>을 거쳐 <택시 드라이버>까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타이타닉>을 거쳐 <시계태엽 오렌지>까지, 더불어 2011년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극우주의자의 테러 학살극과 영국에서의 폭동을 찍은 뉴스 필름까지 종횡무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돼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작업과 분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체제 경쟁, 이데올로기 경쟁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선언되었고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정치체제의 마지막 형태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곧바로 등장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질주했고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강화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극대화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심화되었다. 하지만 2001년의 9.11 테러는 이러한 흐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종말의 종말’과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종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주소다. 그 무엇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9.11 테러와 뒤이은 이라크 전쟁, 그리고 2008년에 들이닥친 세계 경제 위기 등등.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지젝은 이 모든 사건과 오늘의 현실을 헤겔 철학과 라캉 정신분석의 개념을 동원해 충실히 기록하고 해명하면서 우리 시대의 인식적 지도를 그려왔다.

 

 

 

역사적 사건들의 기억을 봉쇄하고 그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작업이라면, 지젝은 거꾸로 그 사건들을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현실과 관련하여 재구성하고 재배치한다. 지젝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를 통해 우리의 현실이라는 좌표를 어떻게 변경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탐문해왔다.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는 그러한 작업의 압축판이면서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도록 자극하는 ‘빨간 알약’이다.

 

13. 04. 28.

 

 

P.S.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지만, 제목에서 특칭하고 있는 책을 고르자면 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번역본이 절판된 이 책은 개역판이 나온다고 한다)과 방한 강연집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외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Mapping Ideology)>(1995/2012)가 있다.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문헌들을 지젝이 편집한 것으로 서론과 마지막장에서 지젝 이데올로기론의 골자를 읽을 수 있다. 이 또한 빠르면 올해 안에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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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4.25-5.3)에서 소피 파인즈 감독의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2012)를 상영한다. 세 차례 상영일정이 잡혀 있는데(http://www.jiff.or.kr/f00_movie/f20_screen_detail.asp?idx=2856&nowpage=1&objpage=0&order_by=&sec_code1=&sec_code2=&sec_search=&sec_search_str=지젝&menu_gubun=&menu_head=), 4월 27일(토) 20:00 영화 상영 이후 진행되는 '토크 클래스'에 게스트로 참여하게 됐다(30분 정도의 소개와 질의응답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2006)와 마찬가지로 지젝이 직접 출연하여 여러 영화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 우리의 일상 속에 배여 있는 이데올로기를 설명한다. 간략한 소개는 이렇다.

전작 영화 강의에 이어 이번에는 지젝이 등장하여 이데올로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가 다루는 핵심은, 우리가 믿는 것과 행동 하는 것 사이의 간극과 시차이다. 그의 책을 통해 잘 알려진 내용들이지만 <풀 메탈 자켓>, <택시 드라이버>를 인용하며 해설을 전하고 있다. 시청각 지젝 개론서라 부를 만 하다.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

 

지난해에 이어서 흥미로운 행사에 참여하게 돼 기쁘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아래 사진은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를 들고서 작년 토론토영화제를 찾은 지젝과 감독 소피 파인즈.

 

 

13. 04. 09.

 

참고로 덧붙이자면, 이번 영화제에서는 카프카 탄생 130주년을 맞아 '카프카 특별전'도 진행한다(http://www.jiff.or.kr/f00_movie/f10_section.asp?order_by=&sec_code1=1067&sec_code2=1120&menu_gubun=8). 미하엘 하네케의 <성>(1997) 등이 상영작인데, 내려간 김에 한 편은 보려고 한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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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경향아티클(20호)에 실은 가상인터뷰를 옮겨놓는다. 기획특집이 철학자들과의 가상인터뷰인데, 12명의 철학자가 인터뷰이로 선택됐고 내게 맡겨진 것이 지젝과의 인터뷰였다. 지젝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염두에 두고 진행했다. '로쟈가 묻고 지젝이 답하다'.

 

 

경향아티클(13년 3월호) "바보야, 문제는 정치경제학이야"


로쟈: 슬라보예 지젝 선생님, 안녕하세요? 가상 인터뷰 자리이지만 작년 여름 방한 강연 때 뵙고, 다시 뵙습니다. 작년에 ‘번역자’라고만 소개를 드렸는데, 선생님의 책을 몇 권 공역하고 또 여러 곳에서 선생님에 관한 강의도 꽤 하고 다니는 로쟈입니다. 멋쩍지만 ‘지젝 전도사’라고도 불립니다.(웃음) 그래서 이런 인터뷰 자리도 뿌리치지 못하고 나오게 됐습니다. 늘 배우는 입장에서 오늘도 여러 궁금한 점을 질문 드리고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작년에 오셨을 때는 옆에서 뵙기에도 건강이 안 좋아 보였는데, 요즘은 어떠신지요? 선생님의 방한 강연과 인터뷰를 수록한 <임박한 파국>(꾸리에, 2012)가 작년 말에 나왔는데, 경희대학교의 석좌교수직도 맡으셨던데요. 한국에는 자주 오시게 되는 건가요?    

 

 


지젝: 네, 건강이 허락하면 일 년에 한 번씩은 들러서 특강도 하려고 합니다. 한국에는 지난 2003년 가을에 석학초청강좌에 초빙돼 처음 왔었고 작년 여름 방한은 두 차례 강연을 하긴 했지만 사적인 방문이었죠. 아직 남북한이 분단 상태에 있는 한반도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지역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지만 그 이데올로기 대립이 눈앞에 현전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지난해 방한 시에 비무장지대도 방문하고 북한이 판 땅굴에도 가보았습니다. 저는 남한의 대중영화들뿐만 아니라 북한의 선전영화들도 많이 보고 있어요. 김정일의 영화론도 흥미롭게 읽었지요. 간혹 언급한 적이 있지만 앞으로 제 책에 한국에 관한 내용이 더 자주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한국뿐 아니라 한국인과의 인연도 없지 않으시죠? 인디고연구소의 젊은 친구들이 류블랴나 자택까지 선생님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나눈 적이 있으니까요. 물론 잘 아시겠지만 그 인터뷰가 작년초에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이란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올해는 그 책의 영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박용준 편집장이 귀띔해주더군요. 거기에서도 나온 질문이지만 예전에 선생님은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비밀’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다’라고 답하셨어요. 선생님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하시나요? 영어권 언론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도 선생님을 지칭하는데, 그에 대해선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가요?


지젝: 제가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공산주의에 대해 새롭게 정의하는 게 필요합니다. 사실 철학이란 어떤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답은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게 철학자의 역할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공산주의 국가 슬로베니아 출신이기에 현실 공산주의에 대해서 아무런 환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궁극적으로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더 나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도 저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공동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공산주의는 바로 그 문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만일 제가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해답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문제로서의 공산주의를 사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말이 불쾌하진 않습니다. ‘백치’는 아니라는 얘기니까요. 물론 지난해 방한 강연 때 한 청중의 질문대로 아무리 위험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지적 교양으로, 혹은 지적 액세서리로 소비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소비되는 걸 두고 ‘스타벅스 철학자’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2011년 6월 총선이 있던 그리스에서 시리자(급진좌파연합)의 ‘비밀스런 멘토’로 지목돼 공격받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저는 위험하기도 하고 위험하지 않기도 합니다. 철학에 대한 이해 역시 주관적 개입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

 


로쟈: 지난해 방한 때 아드님과 강남대로를 걷고 있는 걸 보고 누군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 생각납니다. ‘가장 위험한 철학자’가 버젓이 서울 한복판을 활보하고 있는데 한국 경찰은 뭐하고 있는 거냐고요.(웃음) 그러고 보니 위험한 철학도 위험한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접속될 때만 작동하는 기계 말이죠.


지젝: 맞아요. 한데 위험한 철학자가 아니라 그냥 위험한 남자로 비칠 때도 있습니다. 언젠가 뉴욕지하철을 탔더니 한 중년여성이 제 시선이 폭력적이라고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었죠. 유쾌하지 않은 경험인데, 제 인상이 위협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여기에도 시차(視差)가 있는 것이죠.(웃음)

 

 


로쟈: 선생님은 1989년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이란 제목으로 번역됨)을 발표하면서 영어권 지식사회에 데뷔하셨습니다. 이후에 정말 놀랄 만큼 많은 저작을 펴내시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선생님의 저작을 편의상 철학책, 영화책, 시사책, 크게 셋으로 분류하는데요, 한국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으로 읽는 영화책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가 처음 소개된 이후에 다수의 저작이 번역됐습니다. 공저까지 포함하면 50여 권이 넘는 책이 소개됐어요. 물론 한국에만 이런 ‘지젝 붐’이 있는 건 아니고, 아스트라 테일러가 찍은 다큐영화 <지젝!>(2005)을 보니까 세계 곳곳에서, 특히 남미 쪽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계시더군요. <지젝!>에서는 직접 선생님의 주저를 꼽기도 하셨죠?

 

 

 
지젝: 기억납니다.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펴내려고 할 때인데 영국 버소출판사의 편집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대표작을 꼽아 보았지요. 제 철학적 주저라고 할 만한 것은 <시차적 관점>을 포함해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네 권이라고 했지요. 주로 헤겔과 독일 관념론을 주로 다룬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제 철학은 라캉 정신분석을 통해서 헤겔 철학을 새롭게 독해하는 것입니다. 또 거꾸로 헤겔 철학으로 라캉을 읽고요. 그렇게 서로 엇갈려 읽을 때 헤겔철학의 파워가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시차적 관점> 이후에도 책을 여러 권 더 펴냈고, 그 가운데서는 작년에 낸 <레스 댄 낫씽(Less Than Nothing)>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과 변븡법적 유물론의 그림자’가 부제에요. 1000쪽이 넘으니만큼 가장 무거운 책이기도 합니다.(웃음)

 

 


로쟈: 말씀하신 네 권의 책은 모두 한국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절판됐는데, 아마 다시 나오는 걸로 알고요. <레스 댄 낫씽>, 제가 제목을 정한다면 <헤겔의 유산>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대작도 올봄에는 한국어판이 나오는 걸로 압니다. 아마 2013년에도 선생님의 책이 서너 권은 더 번역되지 않을까 싶어요. 작년에 펴내신 <가장 위험하게 꿈꾼 해(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2012)도 <멈춰라, 생각하라>(와이즈베리, 2012)란 제목으로 번역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제가 감수의 글을 덧붙이기도 한 책입니다. 편집자가 책 소개하기 위해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라는 문구를 집어넣었는데,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그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지젝: 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 오랫동안 해온 작업이기도 하지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현재의 지배적 체제입니다. <시차적 관점>에서 얘기한 거지만, 정치와 경제는 분리해서 다룰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의 핵심 통찰은 바로 그것이에요.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동시에 보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해요. 이렇게 보면 두 옆얼굴이 보이고, 저렇게 보면 꽃병만 보이고 하는 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치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가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경제를 바꾸고자 한다면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를 건드려야 하구요. 따라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일면적이기 때문이에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유산을 문제 삼지 않고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이에요.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을 비판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죠. 대기업의 음모에 맞서는 정직한 미국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자본주의는 비판하더라도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제 친구이기도 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아예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고 말했죠. 물론 자본주의는 대단히 유동적인 체제입니다.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결합하고 있어요. 서구식 발전모델과는 다른 모델입니다. 월가 점령시위 때 즉흥연설에서도 언급한 부분인데, 오늘날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보다도 훨씬 더 역동적인 자본주의를 운영하고 있어요. 하지만 민주주의는 배제하죠. 성장이라는 척도만 갖고 얘기하자면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의 성공이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와 결혼한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이혼한 자본주의’까지도 상대해야 하는데 오늘날 좌파의 과제라고 할까요. 


로쟈: 두 가지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한편으로 이 둘은 서로 연결돼 있기도 하지요. 글로벌 자본주의란 말이 함축하듯이 말이죠. 지난해 강연에도 말씀하신 폭스콘의 사례도 대표적이고요.


지젝: 정말 흥미로운 사례죠. 폭스콘은 중국에 있는 아이패드 제조업체죠. 군대식 기숙사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스트레스가 심한 노동조건 때문에 노동자들이 연이어 자살하자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입사할 때 각서를 쓰게 했어요. 나는 자살하지 않겠다, 동료가 우울해보이면 신고하겠다,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병원에 가겠다, 등등. 2011년 연말에 폭스콘의 모기업인 대만의 홍하이그룹 회장이 종무식 자리에서 “백만 마리의 동물을 관리하려니 골치가 아프다”며 대만동물원 원장을 초빙해 강연을 듣겠다고 하더니 실제로 그렇게 했다지요.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자본주의적 혁신의 상징이지만 폭스콘 없는 애플은 상상하기 어렵죠.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란 건 그 이면 또한 직시하는 걸 말합니다.

 

 


로쟈: 바로 그런 맥락에서 선생님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 2011)에서도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과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을 구분하셨죠.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가 폭력에 대해서 비로소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다는 게 선생님의 주장이셨습니다.


지젝: 거기에 니체의 구분법을 대입해보자면, 능동적 폭력과 수동적 폭력이란 구분도 가능합니다. 진정한 폭력 대 반응적 폭력이라고 할까요. 사건으로서의 폭력이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 지속돼서는 안 되는 것을 중단하는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보다는 더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변화에 대한 요구를 가로막기 위한 폭력이 바로 수동적‧반응적 폭력입니다.


로쟈: 제가 덧붙이자면 선생님의 사유야말로 대단히 폭력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더 이상 고정관념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발길질을 해대니까요.(웃음) 지면이 한정돼 있어서 아쉽지만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여기서 마쳐야 할 거 같습니다. 끝으로 <경향아티클>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지젝: 이 가상 인터뷰의 독자도 가상 독자는 아닌가요?(웃음) 여러 번 당부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가상공간(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입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요. <매트릭스>의 질문을 반복하자면, 당신은 빨간약과 파란약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3.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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